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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동짓달에도 치자 꽃이 피는 신방에서 신혼 일기를 쓴다 없는 것이 많아 더욱 따뜻한 아랫목은 평강 공주의 꽃밭 색색의 꽃씨를 모으던 흰 봉투 한 무더기 산동네의 맵찬 바람에 떨며 흩날리지만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밤이면 비에 젖어 울지만 이제 나는 산동네의 인정에 곱게 물든 한 그루 대추나무 밤마다 서로의 허물을 해진 사랑을 꿰맨다 …… 가끔…… 전기가…… 나가도…… 좋았다…… 우리는…… 새벽녘 우리 낮은 창문가엔 달빛이 언 채로 걸려 있거나 별 두서넛이 다투어 빛나고 있었다 전등의 촉수를 더 낮추어도 좋았을 우리의 사랑방에서 꽃씨 봉지랑 청색 도포랑 한 땀 한 땀 땀 흘려 깁고 있지만 우리 사랑 살아서 앞마당 대추나무에 뜨겁게 열리지만 장안의 앉은뱅이저울은 꿈쩍도 않는다 오직 혼수며 가문이며 비단 금침만 뒤우뚱거릴 뿐 공주의 애틋한 사랑은 서울의 산 일번지에 떠도는 옛날이야기 그대 사랑할 온달이 없으므로 더더욱 - 박라연, 「서울에 사는 평강 공주」 평강 공주가 서울로 왔다. 바보 온달을 찾으러 그녀는 서울로 온 걸까?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평강 공주는 바보 온달과 만나 사랑을 나눌 수 있을까? 설화에서 평강 공주는 바보 온달을 장군으로 만들었다. 개천에서 용을 만든 격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는 이런 신분 상승이 불가능하다. 평강 공주가 바보 온달이 사는 누추한 집으로 내려갈 리도 없다. 서울에 사는 평강 공주는 그러므로 설화 속 평강 공주처럼 꿈을 꾸는 여자인지도 모른다. 어떤 꿈일까? 마음속에 품은 낭만적 사랑을 실천하려는 꿈이라고 말하면 어떨까? 꿈은 꿈으로 남을 때 아름답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꿈과 현실은 그만큼 거리가 있는 것이리라. 시인은 “동짓달에도 치자 꽃이 피는 신방에서 신혼 일기를” 쓰는 평강 공주를 그리고 있다. 신방에는 없는 것이 더 많다. 휑한 방으로 동짓달 서릿바람이 파고드니 아랫목은 더욱 따뜻하게 느껴진다.
치자 꽃이 피는 신방이라도 가난 냄새는 어쩔 수 없나 보다. 따뜻한 아랫목을 꽃밭으로 삼아 평강 공주는 씨앗을 뿌리려고 한다. 하지만 산동네의 맵찬 바람이 불어 닥치면 색색의 꽃씨들은 새순도 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흩날린다. 가난한 신방에 꽃을 피우려는 꿈은 겨울비에 젖은 씨앗이 새순을 피우는 것만큼이나 이루기 어렵다. 그래도 평강 공주는 꽃을 피우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가 쓰는 신혼일기에는 “산동네의 인정에 곱게 물든 한 그루 대추나무”가 나온다. 대추나무는 봄이 오면 새순을 피울 테고, 가을이 오면 열매를 맺을 것이다. 자연은 어김없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시간을 반복한다. 평강 공주는 자연이 지닌 이 시간으로 “밤마다 서로의 허물을 해진 사랑을 꿰맨다”. 그녀에게 사랑은 열매 맺는 시간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동짓달 추운 겨울에도 그녀는 사랑으로 충만한 신방에서 꽃씨를 뿌리는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가끔 전기가 나간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평강 공주는 “우리”라는 말을 마음에 되새긴다. 사랑은 ‘우리’가 하는 것이다. 전기가 나간 신방에서 평강 공주는 더불어 사는 ‘우리’를 상상한다. 혼자서는 견디기 힘든 일도 ‘우리’는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 새벽녘 창문가에 달빛이 언 채로 걸려 있어도 상관없다. 밖이 아무리 추워도 ‘우리’ 몸에서 나는 열기로 하여 신방에는 여전히 온기가 감돌고 있다. 시인은 “우리의 사랑방”이라고 이야기한다. 사랑을 나누는 신방은 그 이유만으로 따뜻함이 넘쳐난다. 전등의 촉수를 낮추어도 사랑의 빛은 결코 스러지지 않는다. 가난을 외부로 내몰고 내면을 사랑으로 채운 평강 공주는 꽃씨를 담은 봉지와 청색 도포를 한 땀 한 땀 깁는다. 없는 것이 많은 신방은 이렇게 사랑의 기운으로 가득 채워진다. 과연 바보 온달을 장군으로 만든 평강 공주답다. 앞마당 대추나무조차 평강 공주의 사랑을 받아 뜨겁게 열릴 정도니 다른 말은 할 필요도 없겠다.
하지만 서울에 사는 평강 공주가 아무리 사랑의 기운을 퍼뜨려도 “장안의 앉은뱅이저울은 꿈쩍도 않는다”. 혼수며 가문이며 비단 금침을 올려놓으면 잘 움직이는 저울이 공주의 애틋한 사랑을 올려놓으면 그대로 멈춰 있다. 애틋한 사랑에 버금가는 물질은 없다는 것일까? 그랬으면 좋겠지만, 사람들은 공주가 말하는 사랑에 더 이상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결혼을 하면서 혼수와 가문과 비단 금침을 따지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산동네 단칸방에 신혼집을 마련해서 가난과 더불어 기꺼이 사랑을 나눌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시인은 “공주의 애틋한 사랑은 서울의 산 일번지에 떠도는 옛날이야기”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옛날이야기에 담긴 진실은 더 이상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사랑으로 꿈꾸는 이상과 사랑으로 이룰 현실을 분명히 구별한다. 사랑만으로 신방을 꾸리는 시대는 예전에 이미 지나버렸다.
시인은 “그대 사랑할 온달이 없으므로 더더욱”이라는 시구로 시를 맺는다. 평강 공주가 꿈꾸는 사랑은 바보 온달을 전제로 한다. 바보 온달은 평강 공주가 꾸는 꿈을 믿는다. 그는 그녀와 더불어 꿈을 꾸고 끝내는 그 꿈을 이룬다. 평강 공주의 사랑은 바보 온달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셈이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에 누가 바보 온달을 꿈꿀까? 무한경쟁에서 밀리면 실패자로 낙인이 찍히는 세상이다. 실패자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경쟁 상대를 이겨야 한다. 그런 세상에서 낭만적 사랑이라니! 서울에 사는 온달들은 서울에 사는 평강 공주가 앉은뱅이저울을 기우뚱하게 만들길 원한다. 치자 꽃처럼 순결한 사랑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걸 그들은 너무도 잘 안다. 가난한 신방에는 치자 꽃이 피지 않는다. 신방에 치자 꽃을 피우려면 저울 위에 비단 금침을 올려놓아야 한다.
문학작품은 쓰인 시대와 상관없이 현재성을 내포하고 있다. 고전소설인 『춘향전』을 읽으면서 우리는 지금 이 시대의 사랑을 되짚어 볼 수 있다. 시인은 신라시대 여성인 평강 공주를 통해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평강 공주는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사랑을 꿈꾼다. 옛날에, 옛날에 신방에 꽃씨를 뿌리는 여자가 있었다. 동짓달 맵찬 바람이 불어와 꽃씨를 얼려도 여자는 신방에 꽃씨를 뿌리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대추나무가 온몸을 열어 그 사랑을 맞이하는 기적이 일어났지만 거기까지였다. 옛날이야기는 옛날이야기로 끝나야 한다. 이야기가 바깥으로 흘러나와 현실이 되면 세상은 사실과 허구가 구분되지 않는 혼돈으로 바뀌어버린다. 시인은 평강 공주가 아무리 사랑의 기운을 내뿜어도 그 기운을 받을 사람인 온달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허구가 사라지면 사랑 또한 사라진다. 허구를 먹지 않고 어떻게 애틋한 사랑을 이룰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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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라는 시는, 내가 기억한 유일한 신춘문예 시였다. 이 신문 저 신문의 신춘문예 당선자들의 시들을 건성으로 훑어보곤 했었지만 '아, 참 좋다' 하는 느낌을 가져보거나 시인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었던 작품은 거의 없었다-물론 내가 건성이라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언젠가 이 시인의 모든 시들을 다 읽어 봐야지 하고 마음먹은 지는 상당히 오래되었는데 이제야 겨우 시집 한 권을 읽었다.
10년 넘게 세월이 지났지만, 처음 읽을 때와 똑같은 느낌은 아니지만, '평강공주'는 여전히 좋았다-이 정도 표현 밖에 못하는 게 내 능력의 한계다. 하지만, 다른 시들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고운 말들을 사용하고 있고, 가끔은 멋진 비유도 있었지만, 어쩐지 다가오지는 않는다는 느낌, 예쁘긴 하지만 별로 갖고 싶지는 않은 장신구 같다는 느낌... 하지만 이건 그냥 내 주관적일 느낌을 뿐, 다른 누군가는 이 시들을 읽으면서 감동에 빠질 수도 있으리라는 걸 인정한다. 내가 그 중 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좀 섭섭하지만... [인상깊은구절] 동짓달에도 치자꽃이 피는 신방에서 신혼 일기를 쓴다 없는 것이 많아 더욱 따뜻한 아랫목은 평강공주의 꽃밭 색색의 꽃씨를 모으던 흰 봉투 한 무더기 산동네의 맵찬 바람에 떨며 흩날리지만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밤이면 비에 젓어 울지만 이제 나는 산동네의 인정에 곱게 물든 한 그루 대추나무 밤마다 서로의 허물을 해진 사랑을 꿰맨다......가끔......전기가......나가도......좋았다......우리는...... 새벽녘 우리 낮은 창문가엔 달빛이 언 채로 걸려 있거나별 두서넛이 다투어 빛나고 있었다 전등의 촉수를 더 낮추어도 좋았을 우리의 사랑방에서 꽃씨 봉지랑 청색 도포랑 한땀 한땀 땀흘려 깁고 있지만 우리 사랑 살아서 앞마당 대추나무에 뜨겁게 열리지만 장안의 앉은뱅이저울은 꿈쩍도 않는다 오직 혼수며 가문이며 비단 금침만 뒤우뚱거릴 뿐 공주의 애틋한 사랑은 서울의 산 일번지에 떠도는 옛날 이야기그대 사랑할 온달이 없으므로 더더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