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윌북(willbook) 출판사에서 나온 사티아 도일 바이오크 작가님의 < 어른의 중력>을 읽고 작성하는 리뷰입니다. 개인적인 리뷰이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방황한다고 들었는데 방황하더라도 그 지표가 되어 줄 책인가 싶어서 구매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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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티아 도일 바이오크 저 /어른의 중력 읽고 난 리뷰입니다 윌북(willbook) 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제 부단히 개인적인 의견 및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을 수 있으니 이 부분 이해해 주시기 바라며 원치 않으실 경우 뒤로 가기를 살짝 눌러 주세요 제목을 보고 끌려서 봤는데 좋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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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읽은 지 1년 정도 되어 내용이 가물가물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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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이 해야 하는 중요한 역할 한가지는 독자들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영역을 확장해주는 것이다. 해피엔딩으로 끝맺을 수 없다면, 더 나은 방향을 확장해주는 것이다. 해피엔딩으로 끝맺을 수 없다면, 더 나은 방향을 가리켜야 한다. 길을 잃었거나 고통스러울 떄는 과거와 완전히 다른 미래가 가능하다는 믿음에 온 마음을 바쳐야 한다. 그리고 고통을 벗어날 방법이, 더 나은 앞날로 향하는 길이 있다는 것을 믿으려면 변화에 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p232
그러나 목표는, 내 바람은 이런 것이다. 그들이 과거로부터 분리하고, 자신의 진심을 경청하고, 삶을 구축하고, 안정과 의미를 통합하려고 치열하게 노력하는 과정에서 얻어낸 성장과 도구를 도움 삼아 내면과 외부의 태풍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성장의 기둥, 집중해야 할 과제로 돌아오고 다시 돌아와 방향감각을 얻고 균형감각을 튼튼하게 다지는 것이다.
p2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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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듣던 말 중에 ' 인생에는 마디가 있다'는 말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인생을 지속하는 과정 속에서 찾아오는 내면적 시련이 주기적으로 찾아온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보통 그 시간들은 사춘기나 갱년기처럼 신체적 변화와 연동이 되기 마련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신체적 변화가 두드러지지 않는 20대 후반의 방황은 각광 받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그 원인은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로는 전으로도 후로도 신체적 변화가 두드러지지 못하기에 정서적 방황까지 두드러지지 않는 착시를 느끼는 것이고, 둘째로는 이 시대의 방황이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또는 추억이라는 범주 하에 편입되어 으레 해야 하는 의례로 과소평가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 '어떤 방식으로 20대의 방황의 극복을 도울 것인가?' 이게 관건인데, 이 책은 4명의 내담자를 통해 크게 두 가지 유형 과 네 가지 단계로 이걸 설명한다. 우선 유형은 크게 「의미형」 과 「안정형」 으로 나뉜다. 「의미형」은 자신의 자아과 의미, 또는 사회의 변화 등에 골몰하느라 정작 자신의 인생에는 체계 없이 산만함을 띄는 사람이고, 「안정형」은 사회의 요구에 맞춰 인생의 체계를 조성했으나 그 와중에 자신의 자아에 대한 고민은 미처 이뤄내지 못한 사람들로 묘사된다. 이는 사회화의 과정에서 주어진 두 가지 과제 중 무엇을 우선할 것인가에 따라 기회비용처럼 인생의 나머지 과제들이 정서적 공동(空洞) 으로 남는 셈이다. 따라서 내담의 내용은 이 정서적 공동을 메우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로 진행된다. 이 과정을 네 가지의 단계로 분류 하는데, 각각 〔분리〕→〔경청〕→〔구축〕→〔통합〕으로 설명한다. 개인적으로 이 2부가 맘에 들었던 건 하나의 정답을 들이밀지 않는다는 데 있다. 4개의 시료 같은 내담자들이 나와서 말하는 걸 듣다 보면 자신이 어디에 가까운지 느낄 수 있다. 그 내담자에 이입함으로써, 자신의 문제를 자가진단 하게끔 한다는 점에서 각별했다. 물론 이 책의 한계점이 없는 건 아니다. 마지막으로 이 독후감의 제목에 '사반춘기'라는, 사전에도 없는 말을 쓴 까닭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이 책의 제목은 상술되어 있듯이 《어른의 중력》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으로 번역된 제목이고 영어 원제는 《Quarterlife》다. 이 20대 후반의 방황이 인생의 1/4 즈음에 찾아온다는 점에서 착안하여, 작가가 인생(Life) 앞에 붙인 사반(¼, Quarter)이라는 집약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흔들리는 혼돈, 그리고 그 결과로 이어지는 어른이라는 성숙은 사춘기를 연상케 했다. 이것이 사반과 사춘기를 합쳐 '사반춘기'라는 정체 분명(?)의 신조어를 만들어버린 경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