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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의 양쪽에서 터널을 뚫고 오는 두 사람.
"산의 양쪽에서 터널을 뚫고 오는 두 사람." 내용보기
책의 토대가 되는 두 사람간의 대담은 1971년 11월 네덜란드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노엄 촘스키는 영어로, 푸코는 프랑스어로 말했고 TV로 방영되었습니다. 네덜란드의 사상가 폰스 엘더로스가 사회를 맡고 있는, 서로 다르거나 대립되는 사상을 지닌 20세기 철학자 두 명이 초대되어 토론을 벌이며 때로 격돌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좁은 의미에서 보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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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토대가 되는 두 사람간의 대담은 1971년 11월 네덜란드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노엄 촘스키는 영어로, 푸코는 프랑스어로 말했고 TV로 방영되었습니다.

네덜란드의 사상가 폰스 엘더로스가 사회를 맡고 있는, 서로 다르거나 대립되는 사상을 지닌 20세기 철학자 두 명이 초대되어 토론을 벌이며 때로 격돌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좁은 의미에서 보면 사실 촘스키나 푸코가 철학자는 아닙니다. 공통점이라면, 두 사람은 언어 연구에 관해 서로 독창적인 방법을 개발했고, 이후에는 활동 범위를 넓혀 정치적 지식인 혹은 대중적 지식인으로 널리 활약했습니다.

이 두 사상가의 대담은 언어와 창조성 문제에서 시작하여 권력과 정치문제는 물론 이들의 지성적, 정치적 지형을 두루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인간성’에 대한 논쟁은 촘스키와 푸코의 연구 작업과 두 나라의 연구 분위기에 언어적, 철학적, 정치적 접근 방법의 차이가 있음을 결정적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언어와 담론에 관한 연구가 어떤 방식으로 두 사람의 새로운 정치적 역할에 토대를 제공했는가? 달리 말해 언어와 정치의 관계문제, 또 담론 분석에서 권력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하는 문제는 어떻게 보면 촘스키 - 푸코 토론의 핵심인데, 두 사람은 자신의 관점에서 이 근본적인 질문에 답변하려 애썼습니다.

그것은 촘스키가 주장하는 것처럼 언어의 보편성에 얽힌 문제이며 그런 보편성이 인간의 정의와 품위에도 그대로 적용되는가? 아니면 푸코가 주장하는 바대로 말해지는 것(담론)에는 역사적, 물질적 규제가 있고 그 규제는 결국 권력행사와 밀접하게 관련되는가?입니다.

 

 

두 사람은 어떤 접점을 찾으려고 애썼지만 결국 이 문제로 확연하게 견해차이가 드러났고, 이런 토론이 흔히 그렇듯이 결국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막을 내렸습니다.

 

책에는 두 사람이 토론 후 1976년에 각자의 견해를 좀 더 자세하게 밝힌 자료가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푸코가 1978년에 스탠퍼드 대학에서 강연한 내용과 간단한 성명서도 들어있다.

 

이 프로그램의 사회자 폰스 엘더로스는 TV프로그램을 시작하면서 “두 철학자를 비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두 분을 산의 양쪽에서 터널을 뚫고 오는 사람이라고 가정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도구를 가지고 같은 산에서 터널 작업을 하면서도 상대방이 반대쪽 방향에서 작업하고 있음을 모릅니다. 두 사람은 완전히 새로운 발상을 가지고 연구하면서 철학과 정치의 두 분야에 아주 깊이 천착해 왔습니다. 오늘 밤 철학과 정치에 관한 흥미로운 토론을 기대해도 좋을 듯합니다.”

 

“언어를 접하는 어린아이는 자신이 영어나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등등을 듣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아주 작은 폭의 변화만 허용하는, 매우 협소하고 분명한 유형의 인간언어를 듣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고도로 조직되고 아주 제한된 도식 체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산발적이고 저급한 정보로부터 고도로 조직적인 지식으로 비약적인 도약을 할 수 있습니다.

 

아이가 언어를 배울 때 동원하는 이 타고난 언어 혹은 본능적 지식, 이러한 지식체계의 속성을 밝혀내려면 우리는 아주 오래 더 연구해야 한다고 봅니다. 아이가 이런 지식을 획득할 때 드러나는 심리적 체계를 이해하는 일 역시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따라서 이 본능적 지식, 제한된 정보로부터 고도로 복잡하고 조직된 지식을 이끌어내게 하는 도식 체계야말로 인간성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의 하나라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기본 구성요소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언어가 의사소통에서 차지하는 역할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아가 사상의 표현이나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에도 이 구성요소가 작용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지능이 발휘되는 다른 분야, 인간의 인지와 행동분야 등에서도 역시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이 도식 체계의 덩어리, 생래적인 조직 원리의 덩어리, 이것이 우리의 사회적, 지적, 개인적 행동을 인도한다고 보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인간 본성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 노엄 촘스키

 

"17세기와 18세기에 자연과학에서 생명이라는 개념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광물에서 인간으로 올라가는 방대한 서열의 어느 한 지점에 지위가 부여되었을 뿐, 광물과 식물, 식물과 동물의 경계는 불명확했습니다. 인식론의 측면에서, 이런 자연물의 지위를 반박 불가능한 방식으로 고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18세기 말에 이르러 이런 자연물에 대한 묘사와 분석은, 완성도 높은 도구와 최신기술에 힘입어, 대상(자연물)의 전체영역, 그 관계와 과정의 전반을 포착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자연과학이라는 지식 내에 생물학의 존재를 구체화시키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생명연구가 마침내 생물학에 자리 잡게 되었을까요? 생명이라는 개념이 생물학적 지식을 조직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18세기 말에 벌어진 생물학 지식의 변화는 한편으로는 과학담론에서 사용되는 일련의 새로운 개념들을 보여주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특정유형의 과학담론을 지정하고, 제한하고, 위치 짓는 생명 등의 개념이 부상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생명이 과학적 개념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것은 분류하기, 제한하기와 기타 기능들이 과학담론에 미치는 효과를 보여주는 일종의 인식론적 지표입니다. 그런 기능(분류하기, 제한하기 등)들이 다루는 구체적 대상의 속성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성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어학자들이 자음 변화의 법칙을 발견하고, 프로이트가 꿈 분석의 원리를 발견하고, 문화인류학자들이 신화의 구조를 발견한 것은 인간성을 연구한 결과가 아닙니다.

 

지식의 역사를 볼 때, 인간성이라는 개념은 주로 인식론적 지표구실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특정 유형의 담론이 신학, 생물학, 역사학 등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보여주는 지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성은 과학적 개념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 미셀 푸코

 



이달의 사락 s******5 2012.05.02. 신고 공감 3 댓글 8
리뷰 총점 종이책
두 철학자의 대담, 그러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내 탓
"두 철학자의 대담, 그러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내 탓" 내용보기
솔직히 고백컨대 나는 아직 노암 촘스키와 미셸 푸코의 책을 읽어보지 못하였다. 책 읽는데 있어서도 완벽주의자 성향이 있는 나는 어떤 사람을 읽기로 결심하면 그 사람이 쓴 책을 시간 순서대로 차례대로 읽어 나가는 버릇이 있다. 이렇게 읽는 이유는 어떤 사람의 대표작만 읽기 보다는 과거부터 읽어 나가 그 사람의 생각의 변화를 찾아내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새
"두 철학자의 대담, 그러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내 탓" 내용보기
 솔직히 고백컨대 나는 아직 노암 촘스키와 미셸 푸코의 책을 읽어보지 못하였다. 책 읽는데 있어서도 완벽주의자 성향이 있는 나는 어떤 사람을 읽기로 결심하면 그 사람이 쓴 책을 시간 순서대로 차례대로 읽어 나가는 버릇이 있다. 이렇게 읽는 이유는 어떤 사람의 대표작만 읽기 보다는 과거부터 읽어 나가 그 사람의 생각의 변화를 찾아내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새 책 읽을 시간을 내기가 힘들어 노암 촘스키의 책은 아직 사지도 못했고 푸코의 책 중 구입한 <성의 역사 1~3권>은 구입해 놓고 먼지만 쌓여 가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던 중에 두 철학자의 대담과 경연, 성명서를 실어 놓은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생각보다 책 두께가 얇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도서관에서 정독하였지만 나의 지적 능력의 한계만 절실히 깨달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책 소개에서는 '일반 대중을 상대로 발언한 것을 그대로 옮겨 적은 글이기 때문에 쉽고 간결하다.'라고 하였으나 사실 좀 의문이다. 그리고 1장의 대담, 2장의 촘스키의 정치에 대한 글 이후에는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나의 신념과 생각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두 분 철학자의 대담에 감히 끼어들고자 한다.


 일단 대담에서 가장 큰 화두는 "경험이나 외부의 영향과는 무관한 '타고난' 인간 본성이라는 것이 있는가?"라는 질문일 것이다. 이에 대해 촘스키는 언어 학자 답게 어린이의 불가사의한 언어 습득 능력을 전제로 이를 긍정하고 있는데 반해 푸코는 인간성이라는 개념은 주로 인식론의 지표에 지나지 않았고 시대별 틀의 소산이라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에 대해 나는 진화론자이자 생명과학자 입장에서 촘스키의 입장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즉, 진화를 통해 자연 선택된 인간 본성이라는 것이 DNA에 새겨져 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유전과 DNA를 강조하다 보면 나쁜 과학인 '우생학'에 경도될 위험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푸코가 이렇게 타고난 인간 본성을 부정하는 것 역시 이에 대한 위험성을 알고 있기 때문으로 보이나 그렇다고 사실을 애써 무시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우생학의 문제는 그것이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지 우생학을 정치 권력을 어떻게 이용했다는 것은 부차적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과연 정의란 무엇이며 우리는 정의를 이룩할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담이 이어진다. 나는 여기서는 반대로 푸코의 편이다. '어느 경우든 정의라는 개념은 계급사회에서 억압받는 계급이 자기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 혹은 그 주장을 정당화하는 개념', '만약 계급 없는 사회가 도래한다면 과연 사람들이 정의라는 말을 사용할지 확신이 안 섭니다.'(p.80) 라는 푸코의 주장이 타고난 인간 본성이 내재되어 있으며 정의도 그 중에 하나 라는 촘스키의 의견보다 더 타당해 보인다. 특히 만약 계급 없는 사회가 도래하면 사람들이 정의라는 말을 사용할지 궁금하다는 푸코의 생각은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좋은 지적이라고 여긴다.

 마지막으로 2장에서 촘스키는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며 미국 사회가 좌익, 마르크스주의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가 되어 가고 있다고 비판한다. 즉 "저는 만약 합리적인 파시즘 독재정권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미국 체제를 선택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더 복잡하고 더 분산된 체계로 이데올로기 통제가 강력하게 작동하는 마당에, 국가 차원의 검열은 필요치 않고 심지어 효율적이지도 않습니다."(p.119) 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베트남전 반전 운동을 하면서 앞으로 미국은 이렇게 '정의'를 외치며 침략 전쟁을 계속할 것이라고 지적한 촘스키 교수의 말은 역사를 통해 반성하지 않으면 다시 한 번 역사는 반복됨을 느끼게 된다.


 코난 도일은 셜록 홈즈의 입을 빌어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조롱하는데 익숙해져 있어'라고 지적하였다. 나 역시 때로 이렇게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책을 만났을 때 글쓴이나 번역자가 읽는이와의 소통을 소홀히 생각했다고 비판을 많이 하였었다. 그러나 이번 만큼은 나의 지적 능력의 한계를 겸허히 깨닫고 언제가 다시 촘스키와 푸코를 제대로 만날 날을 기약해야 겠다.


a******n 2011.02.18.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 인간 본성과 정치에 관한, 두 사상가의 흥미로운 토론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 인간 본성과 정치에 관한, 두 사상가의 흥미로운 토론" 내용보기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71년, 시대를 대표하는 지식인 노엄 촘스키와 미셸 푸코는 네덜란드 철학자 폰스 엘더르스의 초청을 받아 TV 프로그램에서 인간 본성과 정의를 주제로 토론을 벌인다. 이 책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원제 The Chomsky-Foucault Debate: On Human Nature)>는 그 대화 내용 전체와 정치와 언어철학, 진리와 권력, 인권 등을 주제로 발표된 두 학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 인간 본성과 정치에 관한, 두 사상가의 흥미로운 토론" 내용보기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71년, 시대를 대표하는 지식인 노엄 촘스키와 미셸 푸코는 네덜란드 철학자 폰스 엘더르스의 초청을 받아 TV 프로그램에서 인간 본성과 정의를 주제로 토론을 벌인다. 이 책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원제 The Chomsky-Foucault Debate: On Human Nature)>는 그 대화 내용 전체와 정치와 언어철학, 진리와 권력, 인권 등을 주제로 발표된 두 학자의 강연과 글로 구성되어 있다. 언어학 이론에서 꼭 등장하는 변형생성문법(Transformational Generative Grammar)으로 유명한 촘스키는 인지과학 혁명의 주역으로 활약한 언어학자이고, 미국의 제국주의와 자본의 언론 장악을 비판해온 정치사상가이기도 하다. 푸코는 파리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콜레주 드 프랑스의 사상사 교수로 일했고 <감시와 처벌 Surveiller et Punir> 등의 책들을 썼다. 그는 어떠한 정치적, 이념적 깃발도 내세우지 않았지만, 노동자와 이민자, 동성애자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핍박에 늘 저항했다. 이러한 두 거장의 대화는 언어학과 인지 이론에서 시작하여 창조성, 자유, 정의를 위한 투쟁으로 뻗어나간다.

 

읽으면서, 촘스키와 푸코의 주요 저서들을 미리 읽어뒀더라면 이 책을 읽기가 더 수월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책들 중에 푸코의 <감시와 처벌>밖에 읽은 것이 없고 촘스키의 책 역시 한두권밖에 읽지 않았다. 국문과 재학 시절 접했던 변형생성문법 역시 지금은 거의 잊어버린 상태다. 대중을 상대로 한 토론이라고는 해도, 배경이 되는 이론들을 바탕에 깔고 있지 않으면 결코 쉽게 읽을 수는 없을 듯 하다. 또한 흥미로웠던 것은 그들의 스타일인데, 촘스키는 비교적 거침없고 대담한 태도로 말하는 반면, 푸코는 전반적으로 약간 머뭇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프랑스인이 프랑스어로 말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데도, 자신의 영어가 신통치 못하다며 프랑스어로 말하는 것을 양해해달라고 말하는 푸코의 모습이 참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들은 언어와 정치, 그리고 권력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데 두 사람의 의견은 확실히 대립을 보인다. 촘스키는 인간 본성은 태어날때부터 습득된 언어의 보편성과 연관된 문제이며 그런 보편성은 인간의 정의와 품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보았고 그러한 내재적인 특성과 본능적 지식을 도식 체계(schematism)로 보았다. 반면, 푸코는 인간 본성에 대해 꽤 회의적인 태도를 갖고 있어서 보편적 정의란 없고 말해지는 것에는 역사적, 혹은 물질적 규제가 있고 그 규제는 결국 권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성은 단지 시대에 따른, 혹은 학문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일 뿐이라고 말한다. 또한 두 사람은 역사와 과학을 바라보는 관점 역시 다르다. 촘스키는 데카르트의 관념을 토대로 인간의 더 나은 미래에 대해 낙관적 의견을 보이는 반면 푸코는 지금 여기를 더 강조하며 그 모든 것을 하나의 변화로 보고 다양성에 의해 가능성이 확산된 것에 초점을 둔다. 촘스키는 관념론의 입장에 서 있는 반면, 푸코는 경험론의 입장에 서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내내 느낀 것이지만 사회자인 엘더르스도 언급했듯이 그들의 의견에는 많은 차이가 있고, 그것은 주로 접근 방법의 차이에 기인하는 듯 하다. 푸코는 어떤 기능을 발휘하는 방식에 관심이 많고, 반면 촘스키는 '그 뭔가가 무엇이냐' 하는 물음, 곧 원인에 집중하고 있다. 처음부터 그들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이 토론을 시작한 것이기 때문에 접점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닮은 점이 있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냉철한 시선과 불의에의 저항이 아닐까. 또한 그들의 정치에 대한 관점 역시 흥미로웠는데, 사회자가 푸코에게 왜 정치에 관심이 많은지 물어보자 그의 답변이 참 걸작이었다. "정치는 우리의 일상생활에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 그 안에서 작동하는 경제 관계, 우리 행동의 규칙적 형태와 그 행동에 대한 가부를 결정하는 권력 체계, 이 모든 것이 정치와 관련됩니다. 우리 생활의 본질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정치적 기능 바로 그것입니다.(중략) 정치에 관심 없는 것, 그거야말로 문제입니다.(p.61)"

 

여담이지만, 요즘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있어서 푸코의 명언(?)인 "젠장, 어째서 당신은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거요?" 이 문장의 원문이 궁금해져서 찾아보니 "Comment, cela ne vous intéresse pas?"였다. zut라던지 merde 같은 단어가 들어갈 것이라 내심 기대했었는데 원문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이것이야말로 이 책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문장이다! 

 


 

j******m 2011.02.06.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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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이 아닌가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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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와 푸코, 두 사람이 산을 오른다.그 산의 이름은 "인간의 본성(Human Nature)". 촘스키는 날 때부터 타고난 '내재주의 언어론'을 재잘대며 뛰어가고, 푸코는 "규정된 건 없어. 뭐가 그리 당연하지? 그걸 어떻게 정의할거야?" 중얼거리며 한 발 한 발 '권력 관계'의 규칙성을 찾으면서 걸어간다. 네덜란드 TV, 토론의 사회자는 두 사람이 '전혀 다른 도구를 가지고 같은 산에서 터널
"이 산이 아닌가벼" 내용보기
촘스키와 푸코, 두 사람이 산을 오른다.
그 산의 이름은 "인간의 본성(Human Nature)".

촘스키는 날 때부터 타고난 '내재주의 언어론'을 재잘대며 뛰어가고,
푸코는 "규정된 건 없어. 뭐가 그리 당연하지? 그걸 어떻게 정의할거야?" 중얼거리며
한 발 한 발 '권력 관계'의 규칙성을 찾으면서 걸어간다.

네덜란드 TV, 토론의 사회자는 두 사람이
'전혀 다른 도구를 가지고 같은 산에서 터널 작업을 한다'고 서두에 소개한다.

지켜본 소감은?
미안하지만, 두 사람은 각자 다른 산을 타고 있었던 것 같다.


촘스키 : 저의 관심사는 정신에 내재하는 특성이고, 반면에
푸코 씨는 사회적, 경제적, 기타 조건들의 특정 배열에 더 관심을 두는 듯합니다. - p.56


촘스키가 오르는 산은,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보편적인' 지형이 결정되어 있는 산이다.
마치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진행할 때 마다 부분적으로 밝아지는 지도처럼,
그는 '생래적' 지형의 존재를 의심치 않고 그 '심층구조'를 밝힐 수 있다며 겁없이 뛰어다닌다.
지식인이 아니라도 누구나 '타고난 능력'에 의해 사회 정치적 의견을 밝힐 수 있어야 한다면서
언어이론과 당대의 사회적 이슈를 거침없이 골고루 재잘거리며...

푸코가 오르는 산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아무것도 '당연한 게 없다'.
상황, 사회, 역사, 제도, 계급 등 조건에 따라 지형도, 오르는 규칙도 변화 무쌍하다.
그는 그 속의 여러가지 관계와 조건 속에서 이런저런 주제들의 법칙성을 찾아내려 애쓴다.
그의 발 아래에는 이러한 '구조' 속에서 정의된 '담론'들이 디딤돌처럼 한 발 한 발 솟아올라 놓여진다.
때로는 자신의 모습조차 불확실해지는 그 산을 오르면서 그는 화두처럼 뭔가를 중얼거린다.
"이 언어, 이 지식을 규제하는 권력 관계는 대체 뭐야?"


푸코 : 중요한 것은 사건들을 변별하고, 그 사건들이 속한 네트워크와 층위를 가려내고, 사건들이 서로 연결되어 의미를 생산해내는 구조를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이런 작업을 하려면 상징주의적 분석이나 기호론적 구조의 영역을 거부해야 합니다. 그 대신에 권력 관계의 계보, 전략적 발전, 전술의 측면 등을 살펴야 합니다. 여기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그 대단한 랑그(langue: 모든 개인의 두뇌 속에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문법 체계)와 기호(랑그에 의해 가능해지는 각 개인의 구체적 언어 행위)모델이 아니라 전쟁과 전투 모델입니다.

  우리의 존재를 품고 규정하는 역사는 전쟁의 형태를 취하지 랑그의 형태를 취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권력 관계이지 의미의 관계는 아니라는 겁니다. - p.190


그렇다면, 이걸 '같은 산'인 양 퉁쳐서 소개했던 그 사회자는?
아마 또 다른 언덕에서 이들 둘을 구경하고 있었겠지. ㅎㅎ;

잘은 모르지만 두 사람의 익숙한 이름과 '인간의 본성', '대중을 위한 TV토론' 같은 말에
홀딱 넘어가 가벼운 마음으로 이 내용을 접한 독자들은?
한번쯤 머리를 쥐어뜯으며 이런 멘트를 떠올려 봤음직하다.

".......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듀스, '우리는')

그들이 내뱉은 한숨들이 한겨울 중고책 되어 어딘가 쌓여있다는 슬픈 전설...
이해하기 어려워 더 많이 읽히기도 한다는 역설적인 독서계의 주인공들 아니시던가. ㅠ.ㅠ


촘스키 : 지배 이데올로기와 선전 체계에서 스스로를 기꺼이 해방하려는 사람은, 조금만 노력하고 응용하면, 상당수 지식 분자들이 발전시킨 왜곡의 양상을 즉각 간파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그것을 해낼 수 있어요. 만약 이런 분석이 잘 안 된다면 그것은 사회·정치적인 분석이 실제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서라기보다 특정한 이권 계층을 옹호할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경향 때문에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특수한 훈련을 받은 지식인만이 분석 작업을 할 수 있다는 잘못된 인상을 주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사실 그것은 지식인 계급이 우리에게 심어주려는 생각입니다. 그들은 보통 사람이 다가갈 수 없는 난해한 활동에 종사하는 것처럼 허세를 부립니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얘기입니다. 사회과학도 그렇고 무엇보다 오늘날의 사건에 대한 분석에, 이런 일에 관심 있는 사람은 누구나 다가설 수 있는 겁니다. 이런 문제들이 복잡하고, 심오하고, 모호하다는 얘기는 이데올로기적 통제 체제가 선전하는 환상일 뿐입니다. - p.97~98


생득론이 어떻게 활발한 정치적 참여로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촘스키다운 발언이지만,
푸코와 촘스키가 당연한 듯 내뱉는 이야기들 그 자체가 '특수한 훈련을 받은 지식인만이'
쉽게 이해할 것 같은 부담으로 다가오는 이러한 상황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 ^;

그렇다고 얄팍한 두께에 동네 뒷동산쯤 만만하게 생각하고 성큼 발을 내디뎠다간
마주치는 생경한 언어와 개념들에 길을 잃고 헤메일 수 있는 산이라는 것도 조금은 안타까운 사실... 

두 관점의 차이는 "옮긴이 후기"(p.263)를, 책 전체의 배경은 "서문"을 일단 먼저 챙겨 읽고,
가능하면 웹 서핑과 최소한의 사전 지식으로 기초 체력을 다진 다음
베이스캠프가 감 잡혔을 때 한 발씩 도전하면 '골라먹는 재미'를 조금씩 느껴볼 수 있는 것 같다.

여러 매체의 인터뷰와 자료를 한 권으로 묶어뒀기에, 언어/정치/권력/진리/정의 등
그들이 1970년대에 각기 다른 산을 오르며 나름대로 발전시켜 온 주요 분야의 견해들을
생생한 인터뷰 형식을 통해 짚어보고 때로 비교하여 볼 수 있다는 것이 이 등산 코스의 장점.


푸코 : 당신의 질문은 제가 왜 정치에 관심이 많으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되묻겠습니다. 왜 제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말아야 하나요? 어떤 맹목성, 어떤 귀먹음, 어떤 이데올로기가 나를 압제하여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못하게 한단 말입니까. 정치는 우리의 일상생활에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 그 안에서 작동하는 경제 관계, 우리 행동의 규칙적 형태와 그 행동에 대한 가부를 결정하는 권력 체계, 이 모든 것이 정치와 관련됩니다. 우리 생활의 본질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정치적 기능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왜 정치에 관심이 많으냐는 질문에 답변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왜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말아야 하느냐고 반문하고 싶습니다. 정치에 관심 없는 것, 그것이야말로 문제입니다. 그러니 저한테 그런 질문을 하지 말고, 정치에 관심 없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매우 적절한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젠장, 어째서 당신은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거요?" (일동 웃음을 터뜨리고 방청객도 웃음) - p.61~62



이민자 지지 데모중인 푸코와 사르트르 (1972)

 

인터뷰를 읽다보면 떠오르는 곁다리들...

▶ 유전, 선험, 관념론, 인지, 정신, 생득주의... 이것은 촘스키?
▶ 양육, 경험, 경험론, 구조, 조건, 구조주의... 이것은 푸코?

엄밀히 말해 딱딱 맞아 떨어지지 않기도 하지만, 이런 개념들은 어떤 식으로든
두 사람이 건드려놓은 관점과 논쟁들에 한 다리씩 연결 가능한 개념들 되시겠다.
푸코는 "저는 구조주의자 아니거든요?" 라며 꼬장꼬장 의미의 재해석을 요구할 듯 하지만. ㅎㅎ 
여기에 어디선가 주워들은 행동주의, 인지주의, 구성주의 같은 것도 슬쩍 한 다리... 

그렇다고 두 사람이 서로를 의식하여 반대 입장을 내놓았던 것은 아니니 재미있는 일이다.
푸코와 촘스키의 견해는 '다른' 것이지 엄밀히 말해 '반대'라고 말할 수도 없다.
(이 책이 두 사람을 엮어놓긴 했지만, 그들이 돌아다닌 山은 서로 다른 산이라니깐... ) 
 
어쩌면 힌두교와 불교의 관점까지 대비되어 떠오르기도 한다.
생득적인 '아트만-브라흐만' 내지 '푸루샤-프라크리티' 시스템의 힌두교는 촘스키와 뭔가 이야기가 통할 것 같고,
모든 것은 서로 조건지어 발생할 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불변의 실체는 없다고 하는 '연기론'의 불교는
어쩐지 푸코와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당연히 촘스키/푸코의 구체적인 사상과는 여러 면에서 차이가 느껴지지만,
거시적 관점에서 유사성이 엿보이는 이상의 관점들이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내내 인류의 관심을 끌어왔다는 것,
현실세계를 설명하고 집단의 행동을 이끌어내는 도구로까지 사용되어 왔다는 점은 
푸코나 촘스키의 이야기에서 선뜻 이해되지 않는 개념들을 접하면서도 흥미롭게 느껴지던 사실. 

어쩌면 한갖 '관점'에 불과할 수도 있는 그들의 생각이 언어, 정의, 정치로까지 개념이 확장되어
그들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형성하고, 일련의 학문적/사상적 흐름을 이끌어내면서
사회적/정치적 활동으로까지 체계적으로 연결되는 과정을 엿볼 수 있었다는 것은
생각만큼 쉽게 진도가 나가지 않던 쉽지 않은 독서를 통해 얻게 된 또 다른 뿌듯함이랄까...

그런데, 이처럼 현란한 언어와 관점으로 짜여진 남의 산을 헤메이다 얼핏 드는 생각은

왜 내가 남들의 그 산을 애초부터 '명산'이라 열광하며 오르려고 애쓰는지,
이렇게 발 디디고 서 있는 내 산은 대관절 어떤 것인지 더 찬찬히 살펴보고 싶어지더라는 것. 

 
P.S.

실제로 푸코 뿐만 아니라 구조주의 사상가로 분류되는 레비스트로스, 데리다 등이 모두
불교와 선禪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그들로서도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을게다.
(그러면, 푸코의 '권력'에 대한 설명은 불교의 어떤 개념과 유사성을 찾을 수 있을까??)

h*****w 2011.02.12.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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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가 극심해질수록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 역시 톤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새로운 일이 아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자본주의의 폐해를 예측하고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노력들이 곳곳에서 행해져 왔었다.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진 대학자들도 이 대열에 합류했는데, 이미 고인이 된 푸코와 여전히 미국을 불량국가라 칭하며 거침없는 행보를 보이고 있는 촘스키를 대표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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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가 극심해질수록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 역시 톤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새로운 일이 아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자본주의의 폐해를 예측하고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노력들이 곳곳에서 행해져 왔었다.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진 대학자들도 이 대열에 합류했는데, 이미 고인이 된 푸코와 여전히 미국을 불량국가라 칭하며 거침없는 행보를 보이고 있는 촘스키를 대표적인 사회비판가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인물은 모두 처음부터 사회 문제를 제 연구의 중심으로 삼았던 인물이 아니다. 언어에서부터 시작한 이들의 연구는 권력과 정의, 사회 체제 등을 다루다가 마침내 지금에 이르렀다. 사회 전체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말해도 무리가 없는 셈이다.

현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 문제를 다룬 책들은 여느 분야보다 내게 쉽게 읽히는 편이다. 특정 문제가 곧 내 자신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적지 않은 흡인력을 불러 일으키는 까닭이다. 촘스키와 푸코의 저작 모두 그래서 상대적으로 쉬이 읽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던 건 그들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들이라 하여 언제나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 저작을 해 온 것은 아님을 이 책을 읽으며 느꼈다. 사실 이 책은 어려우면 안 된다. 그럴 수가 없는 게, 1971년 네덜란드에서 있었던 두 인물의 TV 대담이 바로 이 책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폰스 엘더르스라는 네덜란드의 사상가가 진행한 대담은 그러나 언어라는 다소 뜬금이 없어 보이는 문제에서부터 시작한 탓인지 나에겐 많이 난해하게 다가왔다. 어떠한 언어를 사용하여 말하는가가 정치와 과연 어떠한 관련이 있단 말인가? 잠시 우리의 경우를 돌아보면 조금은 알 것도 같다. 교양 있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현대 서울말. 이와 같은 표준어의 정의는 비정치적인 것 같으면서도 다분히 정치적일 수가 있다. 표준어에 대한 이와 같은 정의는 방언을 사용하는 이들을 교양 있는 이들의 범주 밖으로 밀어낸다. 크게는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좀더 세분화 해본다면 같은 영어임에도) 백인이 사용하는 언어와 흑인이 사용하는 언어를 완전히 같다고 볼 순 없을 것이다. 특정 계층이 특정 언어를 사용한다고 명백히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특정한 시대와 장소에 따라 말해지는 것을 규제하는 원래 내지 규칙성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규정이라는 말이 무의미할 정도로, 사람은 이질성을 실천하는 존재인 것일까? 이러한 질문은 더 나아가 권력, 정의라는 화두와 만나게 된다.

궁극적으로는 두 인물 모두 보다 나은 사회를 꿈꾼 인물들이다. 그러나 하나는 옳고 그름도 사회 권력에 의해 정의된 개념이라는 식의 해석에서부터 출발한다면, 다른 하나는 보편적 정의, 선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실재하기에 이에 다가가기 위한 투쟁이 필요하다는 식의 해석을 낳는다. 어느 쪽이 더 나은 시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두 사람이 전혀 다른 도구를 가지고 같은 산에서 터널 작업을 하면서도 상대방이 반대쪽 방향에서 작업하고 있음을 모르는, 산의 양쪽에서 터널을 뚫어 오는 사람이라는 폰스 엘더르스의 인사말에 어느 정도 공감이 간다.

이달의 사락 q*****2 2010.12.24.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