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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 드디어 박종인 기자님의 『땅의 역사 5권』이 출간됐다. 뭐 정확히는 작년 11월에 출간되었으나, 당시에는 극강의 입덧지옥으로 책을 손에 쥘 수조차 없었던 시기였으므로T_T. 아주 임신 중기에 들어선 지금에서야 이 책을 읽었다. 이렇게 내 책장, 박종인 기자님 전용칸(ㅋㅋㅋ)에 책 한권이 또 늘어났고!
얼마 안있으면 휴직시작이라, 집에서 할것도 없으니 독서로 태교를 해볼까 하는데, 그 시작으로 땅의 역사(독서!!) 정주행을 해볼까 한다. 나는 내 뱃속에 있는 호떡이가 그저 학교에서 가르쳐준대로, TV매체에서 보여주는대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사실들을 정말 그대로 믿어도 되는건지, 그 이면에는 또 다른 사실이 있는건 아닌지, 혹은 누군가의 헛된 신념으로 인해 미화된 내용을 배우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비판할 줄 알며, 스스로 사실을 깨우칠 수 있는 아이가 되길 바란다. 뭐... 내 욕심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수많은 책들에 둘러쌓인 우리집에서 자란다면, 어쩌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하ㅏㅏㅏ...
아첨을 위해 만든 선정비를 강물에 집어던져야 합니다 땅의역사5, 54p
시대를 막론하고 세상이 문명계로 진입하면 사회를 다스리는 규율이 생기고 규율을 집행하는 국가조직이 운영된다. 집행하는 자는 공무원이다. 사회기강을 바로잡고 국가가 필요한 세금을 거두려면 그 공무원의 기강이 서 있고 부패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문명국가라면 응당 공무원계를 감찰하는 제도 또한 운영했고 운영한다. 예컨데 이런, ‘매년 말 관찰사는 수령칠사의 실적을 왕에게 보고한다. 칠사는 논밭과 뽕밭을 성하게 하고, 인구를 늘리고, 학교를 일으키고, 군정을 바르게 하고, 부역을 고르게 하고, 송사를 간명하게 하고, 간사하고 교활한 풍속을 그치게 하는 것이다.(『대전통편』, 「이전」)’ p 056
모름지기 한 나라를 운영하는 정부 집단은 청렴해야한다. 정부가 청렴해야만 국민이 마음을 놓고 세금을 납부할 것이다. 내 세금이 헛된 곳이 쓰이지 않는 믿음이 있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청렴해야할 정부는 생각보다 많이 부패했다. 분명 해당 집단을 감찰하는 제도가 있음에도, 예나지금이나 유명무실한 것도 하등 바뀌지 않았다.
국내여행을 좋아하기에, 난 지금까지 꽤 많은 도시를 가보았다. 그리고 백이면 백, 해당 도시에는 꼭 역대 수령들의 ‘선정비’가 즐비해있었다. 산성입구, 읍성입구, 관아입구, 동사무소 입구 등등등. 장소야 달랐지만, 대부분의 지자체들은 자기 도시에서 나뒹구는 선정비들을 한 곳아 모아 정비해두곤 했다.
본디 선정비라는 것은 그 고을에 살던 백성들이, 고을을 다스리던 수령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세워주는 것이다. 수령에게 감사한 마음이 생기는 이유는 단 하나, 그 고을의 백성들을 잘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한마디로 청렴하거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투철한 그런 수령들을 위해 백성들이 손수 세워주는 것이다. 그런 선정비를 내가 돌아다니면서 본 것만 수백개인데, 그렇다면 조선엔 그렇게 좋은 수령들이 많았다는 이야기인가? 분명 역사속에서 배운 조선백성들의 삶은 세금에 허덕이다 죽거나, 혹은 스스로 도적이 되거나, 민란을 일으키거나 그랬을텐데.
물론 아산 현감으로 부임했던 토정 이지함처럼 고을민들을 위해 애썼던, 좋은 수령들도 분명 있긴 했다.
안그런 선정비도 물론 많지만, 선정비는 학정의 상징이다. 2007년 충북대 교수 임용한이 경기도 안성과 죽산의 역대 수령 305명 가운데 현존하는 선정비 주인공 75명을 분석해보니 8%만이 ‘수령칠사’에 의해 우수 수령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었다.(임용한, 「조선 후기 수령 선정비의 분석)」 역대 조선 정부에서도 이를 모를 리 없었다. p 057
민란의 시대, 19세기가 왔다. 조선왕국의 기저질환인 삼정문란이 극에 달하던 시대였다. 선정비는 1863년 고종 즉위와 함께 급증했다. (…생략…) 대표적인 증거가 1893년 고부군수 조병갑이 세운 아비 조규순 영세불망비다. 멀쩡하게 있던 비석을 없애고 값비썬 오석으로 새 비석을 만든 뒤 비각 건립 명목으로 군민에게 1000냥을 뜯어낸 비석이다. 이는 이듬해 동학농민전쟁의 불씨가 됐다. p 058
하지만 조선시대에 세워진 선정비군의 실상은 대체로 부정부패의 온상이다. 대부분의 선정비는 수령들이 고을민들에게 강제로 만들게한 것에 불과했다. 그렇게 강제 건립 선정비중 제일 유명한게 바로 고부군수 조병갑이 세우게 한 지 아비 조규순의 영세불망비. 동학농민운동의 기폭제가 된, 바로 그것이었다.
권력과 왕비는 영원히 서인이 갖도록 하자 땅의역사5, 82p
‘세상에 전해 오기를 반정(인조반정) 초에 공신들이 모여 맹세할 때 두 가지 비밀스러운 약속을 했는데, 그것은 ‘왕실 혼인을 놓치지말자(물실국혼)’와 ‘재야 학자를 추천하여 장려하자(숭용산림)’는 것이다. 이는 자신들의 형세를 굳게하여 명예와 실익을 거두려는 것이었다.(『당의통략』) p 083
숭용산림과 마찬가지로, 물실국혼은 단순한 의지 차원을 넘어 현실화된 계획이었다. 추존왕(사후에 왕으로 규정된 왕족)을 포함해 인조부터 고종까지 조선 왕비는 계비를 포함해 모두 20명이었다. 이 가운데 숙종의 계비 경주 김씨 인원왕후, 경종비 청송 심씨 단의왕후, 추존왕인 진종비 풍양 조씨를 제외한 17명이 노론 가문 출신이었다. (…생략…) 노론은 숙종과 영, 정조, 순조 이후 세도정치를 거치며 크고 작은 부침속에서도 왕비만은 절대로 빼앗기지 않았다. 1623년 맺은 권력 수호의 맹세와 이후 목숨을 건 조직적 권력욕이 만들어낸 기형적인 초장기 독재의 근간이다. p 070
너도 알고 나도 아는 다 아는 사실 하나. 후기 조선은 서인이 권력을 쥐고 놓지 않았고, 서인들 사이에서도 권력을 쥐기 위해 서로 분열하다가, 최종 승자는 서인 중에서도 노론. 만약 그들이 정치를 잘했다면, 이렇게까지 욕먹을이 없겠으나, 그들은 오로지 사리사욕을 위해, 그놈의 소중화 조선을 위해서 살며 부패하였고, 그 결과 조선은 망국행 기차에 탑승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서인은 과거로 임용되는 공무원 조직과 상관없는 ‘산림직’을 신설했다. 재야의 ‘명망 있는 학자들’추천으로 뽑는 자리이니, 이 자리는 자기들이 산림이라 인정한 자들만 갈 수 있는 자리였다. 그해 5월 성균관에 종4품 사업이라는 관직이 신설됐다. 1646년에는 세자 교육직에 당상관인 찬선과 종5품 익선, 종7품 자의가 설치됐다. 그리고 1658년 효종 때 마침네 ‘좨주’라는 정3품 관직이 성균관에 신설됐다. 좨주는 산림을 위한 최고 영예직이었다. 산림에서는 성균관 최고직인 대사성보다 좨주를 높게 쳐줬다. p 087
첫 번째로 좨주에 임명된 사람은 송준길이었다. 두 번째 좨주는 송준길의 동학이자 거물 중의 거물 송시열이었다. 역대 좨주 24명 가운데 정조 때 좨주 송덕상과 송환기, 순조 때 송치규는 모두 송시열의 후손이었다. 현종 때 송계간과 철종 때 송래회는 송준길의 후손이었다. 고종 17년인 1880년 8월 28일 임명된 마지막 좨주 송병선은 송시열의 9세손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멀리서 조정의 권세를 좌지우지하는’ 보스와 정계 파벌의 연결수단이었따. 이렇듯 서인과 노론의 권력장악은 끈질기고 강력했다. p 088
서인이 부르짖던 소중화 조선의 시작은 병자호란 이후였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은 고작 오랑캐 나라인 ‘청’에 굴복한 것에 대해 용납할 수 없었다. ‘청’에다가는 찍소리도 못하면서, 뒤로는 조선은 명에 사대를 했으으니 명이 망했어도 조선이 섬기는 나라는 ‘명’이라고 외치며, 그렇게 사라져버린 ‘명’에 대한 충성심을 아로 새겼다.
송시열 사후 그 제자들은 스승인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충북 괴산에 명나라에 제사를 지낼 ‘만동묘’를 설치했고, 조선왕 숙종은 창덕궁 깊숙한 곳에 명나라에 대한 제사를 지낼 ‘대보단’을 설치했다.
여기에 더해, 조선의 (서인)선비들이라는 것들은 죽은 뒤 자기 비문의 시작을 ‘유명조선국’으로 시작하게 했다. 한마디로 ‘명나라의 신하 조선국’이라는 뜻이다. 그런 이들이 조선 후기 권력을 틀어쥐고, 놓지않았다.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는게 아니라, 본인들을 위한 정치를 했다.
송시열에게 주자는 시작이었다. 주자는 금에 멸망하던 송을 살리는 인물이었고 그 자신은 청에 핍박받는 조선을 살릴 학자였다. 명나라가 멸망하자 송시열은 조선을 명의 계승자라 자처했다. 그는 소중화 조선의 주자였다. p 094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에게는 친구가 많았다. 송시열도 있었고 어린 윤휴도 있었다. 송시열은 송나라 유학자 주희(주자) 마니아였다. 윤휴는 공맹 사상을 주자와 다르게 해석했다. 송시열은 그런 윤휴를 사이비로 낙인찍었다. 윤선서가 윤휴를 두둔했다. 윤선거도 사이비라 낙인찍혔다. p 114
서인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영수였던 송시열. 그는 성리학, 그 중에서도 주자의 성리학을 신봉하던 사람이었다. 유학의 나라로 시작한 조선이었지만, 이 때 유학은, 공자와 맹자가 가르치던 유학이 아니라, 오로지 주자가 해석한 유학, 즉 주자의 성리학, 주자학만이 학문으로써 기능했다. 주자학이 아닌, 다른 이가 해석한 유학을 공부한이들은 사문난적으로 매도되었다. 요즘말로 하면 ‘왕따’, ‘고립’ 되었다. 그렇게 유학의 나라 조선에선, 공자와 맹자의 유학이 아닌, 주자학이 점령했다. 한반도내에 뿌리깊게 잠식된 비뚤어진 유교사상의 시작이다.
의정부 산에는 공주님이 잠들어있다 땅의역사5, 138p
작년 6월, 의정부 천보산에 위치한 ‘족두리묘’라 불리는 곳을 발품팔아서, 겨우 찾았다. 족두리묘의 주인, 그녀는 바로 효종의 양녀 의순공주 다.
정묘/병자호란이 있은 뒤, 청은 조선에 많은 것을 요구했다. 그중엔 공녀도 있었다. 인조 사후 효종이 즉위를 하였는데, 청에서 이번에도 공녀를 요청했다. 정확히는 청나라 섭정왕 도르곤의 측실를 맞이하고 싶으니, 조선 왕실의 딸을 보내라는 것이었다. 당시 효종은 딸부자였다. 효종을 비롯한 종친들에게도 딸들이 있었다. 하지만 효종을 비롯하여, 날고기는 종친들은 자신들의 딸을 숨겼다.
(금림군의 딸)의순공주로 간택이 결정되고 사흘 뒤 효종이 관료들에게 이리 물었다. “근래에 사대부집에서 서로 다퉈 혼사를 치른다는데 사실인가?” 사정을 모르는 양반들이 간택을 면하려고 결혼행진곡을 벌인다는 소문이었다. 효종은 열 살 된 세자와 열한 살과 아홉 살 먹은 공주 혼인을 걱정하며 8~12세 사대부 자녀 혼인 금지령을 내렸다.(『효종실록』) ‘두 살배기 공주 하나뿐’이라는 말은 삼척동자도 아는 가짜라는 자백이었다. p143
효종이 딸을 숨기고, 종친들이 딸을 숨긴다고 한들, 청에서 조선왕실의 딸을 보내라는 압박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때, 효종을 위한 구원투수가 나타났으니, 바로 효종의 10촌인 금림군 이개윤이다. 10촌이면 거의 남이나 다를바 없으나, 금림군 역시 조선 이씨 종친이었다. 금림군은 자신의 딸 이애숙을 바쳤고, 효종은 이애숙을 자신의 양녀로 삼아 ‘의순공주’에 봉하고 청나라로 보냈다. 양녀라고는 하나 옹주가 아닌, 공주로 책봉하였으니, 어엿한 조선왕과 조선왕비의 딸과 같았다.
금림군이라고 하여 자신의 딸을 청나라에 보내고 싶었을까? 남들이야 이개윤이 눈에 멀어 딸을 바쳤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남이야기를 쉽게 하는 사람들의 반응일 뿐이다. 뭐, 딸을 바친 이개윤의 진심은 본인만 알겠지만. 여하튼 청나라에 딸을 보낸 이후 오랜시간이 흐른뒤, 이개윤은 자신의 딸을 다시 고국으로 데리고 왔다.
숱한 여자들이 청으로 끌려갔다가 매우 적은 숫자로 돌아왔다. 환향녀라 부른다. 이들에 대한 반응은 차가웠다. p 144
청나라에 끌려간 여자들은 의순공주 뿐만이 아니다. 일반 여염집 아녀자부터 사대부가의 아녀자까지, 조선의 여자란 여자들은 대거 청나라로 끌려갔다. 이후 그녀들이 목숨걸고 힘들게 도망쳐오거나, 혹은 속환되어 조선땅으로 돌아왔을 때, 조선은 그녀들에게 너무나 냉정했다. 조선의 왕부터 사대부, 여염집의 남자들까지 그녀들을 ‘환항녀’라며 손가락질했다. 훗날 ‘환향녀’는 비속어인 ‘화냥녀’라는 말로 남았다.
경기도 의정부 천보산 기슭에 금림군 가족묘역이 있다. 동쪽 끝 비석 없는 묘는 ‘족두리산소’라 불린다. 오랑캐 땅을 밟기 전 공주가 압록강에 투신해 족두리만 모셨다고 믿는다. p 145
다시 의순공주 이야기. 의순공주가 청나라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가 바다에 몸을 던졌는데, 족두리만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 사람들은 의순공주의 정절을 높이사고, 동정하며 그 족두리를 천보산 자락에 묻었다고 하니, 그게 바로 현재 의정부 천보산 자락에 있는 ‘족두리묘’다.
정말 아이러니한 사실은 실제 의순공주는 청나라로 건너가 섭정왕 도르곤의 측실이 되었고, 이후에 ‘살아서’ 조선으로 돌아왔다는 점이다. 버젓이 살아있는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만들면서까지, 조선이라는 나라는 ‘청에 대한 복수심’과 ‘여인의 정절’을 부각시켰던 것이다. 본인들이 지켜야 할 사람들을, 지키지 못하여 일어난 비극이었음에도 말이다.
허세의 제국-대한제국 땅의역사5, 156p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대한제국. 적어도 내가 학교에서 배울 때, 고종이 세운 대한제국은 ‘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해’ 세운 ‘황제국’이었다. 이 시기에 이미 서양은 산업혁명, 시민혁명 등 모든게 일어나며, 흔히 말하는 근대국가로 바뀐 뒤였다. 심지어 이때 조선에 빨대꽂고 쪽쪽 빨아먹은 일본조차도 서양의 모든 문물을 배우며, 근대국가로 나아갔다. 하지만 고종이 세운 대한제국은 오로지 ‘황제’인 자신을 위한 나라였다. 대한제국 헌법을 보면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제1조, 대한제국은 세계만국에 공인되온바 자주 독립하온 제국이니라. 제2조, 대한제국의 정치는 이전부터 5백 년간 전래하시고 이후부터는 항만세(恒萬歲) 불변하오실 전제정치이니라. 제3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무한하온 군권(君權)을 향유하옵시느니 공법에 이르는 바 자립정체이니라. 제4조, 대한국 신민이 대황제의 향유하옵시는 군권을 침손할 행위가 있으면 그 행위의 사전과 사후를 막론하고 신민의 도리를 잃어버린 자로 인정할지니라. 제5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국내 육해군을 통솔하옵셔서 편제를 정하옵시고 계엄·해엄을 명하옵시니라. 제6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법률을 제정하옵셔서 그 반포와 집행을 명하옵시고, 만국의 공공한 법률을 효방하사 국내법률로 개정하옵시고 대사·특사·감형·복권을명하옵시느니 공법에 이른바 자정율례(自定律例)이니라. 제7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행정 각 부부(府部)의 관제와 문무관의 봉급을 제정 혹은 개정하옵시고 행정상 필요한 칙령을 발하옵시느니 공법에 이른바 자행치리(自行治理)이니라. 제8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문무관의 출척·임면을 행하옵시고 작위·훈장 및 기타 영전을 수여 혹은 체탈하옵시느니 공법에 이른바 자선신공(自選臣工)이니라. 제9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각 국가에 사신을 파송·주찰케 하옵시고 선전·강화 및 제반약조를 체결하옵시느니 공법에 이른바 자견사신(自遣使臣)이니라. 대한제국 헌법
왕실 식재료 담당부서는 명래궁이다. 명래궁은 중궁전 소속이다. 1893년 명래궁 지출액은 444만 6912냥이었다. 이 가운데 식재료비가 354만 2335냥이었다. 이해 왕실에서 지낸 고사와 다례는 모두 29회였다. 연회 또한 37회였다. 1894년 2월에는 220만냥을 들여 왕의 생일 축하파티를 벌였다. 1853년 이래 균형을 유지했던 명례궁 수지는 1884년 이후 급속도로 적자로 돌아서 1893년에는 적자가 자그마치 150만냥이었다. 바로 이 1884년부터 1893년까지가 무당 진령군과 사내 이유인이 왕비 옆에 들러붙어 나라를 가지고 놀던 그 시기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에 쌀 한 섬과 돈 열 냥씩 바치면 나라가 평안하다”는 계시에 국왕 부부는 꼼짝없이 나랏돈을 제수비로 바쳤다.(『매천야록』) p 171
1894년 갑오개혁 때 진령군은 거열형을 선고받고 기록에서 사라졌다. 처형했다는 기록도 없다. 그냥 사라졌다. 이유인은 죽을 때 까지 권력을 놓지 않았다. 처형과 유배를 주장하는 상소에 고종은 처형은 유배로 낮추고, 유배는 몇 달만에 특사로 풀어주는 특별사면을 내리곤 했다. 귀에 발린 소리를 하는 이유인 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은 것이다. p 173
그 이유인을 정신문화연구원은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항일운동가’라고 적어놓았다. 애국계몽운동단체 보안회를 해산시키려 한 이유인을 보안회 부회장으로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선다고 적었고(『횡성신문』) 또 다른 애국단체 공진회가 탐관오리 제1적으로 붙잡은 이유인(『윤치호 일기』)을 ‘공진회사건으로 구속됐다가 이듬해 석방됐다’며 마치 좋은 일을 한 듯 기록했다. 2011년 충주 온 산을 뒤져 이유인 무덤을 찾아낸 김봉균이 말했다. ”그 어떤 방식으로도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없는 사람이라, 논문을 쓰려다가 말았다”고. 그런 사람이 항일운동을 했다고, 한다. p 177
지금은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 ‘비선실세’. 비선실세는 조선말에도 있었다. 고종과 민비의 뒤에 서서, 그들을 좌지우지하던 비선실세는 무당 진령군과 그의 양아들 이유인이다. 이들에 이야기는 몇년전까지 유명했던 비선실세 최순실 보다도 더 스펙타클하다. 정말 궁금하다면 책을 읽어보길!
3월 11일 고종은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민영환을 파견했다. 3월 29일 고종은 미국인 모스에게 경인철도 부설권을 양여했다. 4월 17일 역시 미국인 모스에게 평안도 운산금광 채굴권을 양여했다. 4월 22일 러시아인 니시켄스키에게 함경도 경원과 종성 사금광 채굴권을 양여하고 7월 3일 프랑스 기업 그리러사에 경의선 철도 부설권을 양여했다. 9월 9일 러시아인 ‘뿌리너’가 설립한 합성조선목상회사에 압록강 유역과 울릉도 벌목과 양목 권한을 허락했다. 이듬해 1월 18일 일본 황태후가 죽자 19일부터 27일까지 경운궁에 가서 상복을 입었다. (『고종실록』) 그리고 23일뒤 경운궁으로 고종이 돌아갔다. 이게 아관 1년 동안 고종이 한 일이다. p 199
조선에서 궁을 버리고 도망갔던 왕은 셋있다. 선조(임진왜란, 아주 길게 1회)와 인조(이괄의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무려 3회), 그리고 고종(아관파천)이다.
선조는 궁을 버리고 도망갔다가 돌아온 뒤, 임진왜란에서 승리한 이유는 전적으로 명나라 덕분이라 했다. 본인이 명나라와 가까운 의주까지 도망친 이유를 합리화하기 아주 좋은 방법이었다. 인조는 더이상 말하면 입 아프니 넘어간다. 그다음 고종, 고종은 일본이 민비를 시해한 후 신변에 위협을 느껴 러시아 공사관, 즉 아관으로 도주했다. 아관으로 도망간 고종은 그 기간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참 놀랍게도 고종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 아관으로 도망간 것 치고는, 너무 잘 살았다. 나들이 갈 것 다 가고, 일본 고위 인사들과 만남도 자주 가졌다. 아관으로 도망간 이유는 분명 일본에게 신변의 위협을 느껴서였을텐데 말이다. 심지어 본인 즉위 40주년 행사를 아주 성대하게 치르기 위해 나라의 국고를 끌어다 썼다. 경복궁 (건물 약 500동) 및 경운궁(現덕수궁) 중건을 포함하여 평양에는 360칸 짜리 대 궁궐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심지어 아관에 있던 그 기간동안 고종은 서양에 각종 이권을 팔아넘겼다. 학교에선 서양에 각종 이권을 빼앗겼다고 배웠지만, 실상은 달랐다. 고종은 서양에 각종 이권을 무상으로 양여하지 않았다. 고종 본인이 원했던 현금지급이나 매해 일정금액 지급하는 조건을 달았다. 본인의 호위호식과 엄청난 궁궐공사를 위해 자금이 필요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다만, 고종은 대외감각이 없어도 너무 없었기에, 뭐 좋게 말하면 순진하다고 해야할까? 그래서 헛물을 겨케된 상황이 늘어났을 뿐이다. 특히 미국에 양여한 운산금광 채굴권은 미국인 외교관 알렌을 절대 신임한 고종과 민비의 적극적인 지지도 있었다.
지금은 학교에서 어떻게 가르치는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가 배웠을 땐 이 모든 이권이 서양에 강제로 ‘빼앗긴’ 이권이었다.
한 정권이, 국가가 당연히 해야 할 바를 한다고 해서 이를 칭찬한다면 잘못이다. 근대화의 시기에 법제를 정비하고 정부 조직을 개편하는 조치는 칭찬의 대상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다. 이를 하지 않으면 비판을 받아야 한다. 고종이 한 일은 장차 황제로 등극해 머물 황궁 설계와 이권 양여와 미래의 황제로서 평상시에나 해야 할 의전이었다. p 200
나라가 평화롭고 안전하며 국고가 탄탄하고 전제왕권 시대라면, 고종이 추진한 대규모 궁궐 공사는 큰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때는 열강들이 아시아로 눈을 돌리던 서세동점의 시기였으며, 옆 나라 일본조차도 조선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때였다. 고종이 정말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조선의 왕이었다면, 주변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고, 어떻게 해야 조선이라는 나라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생각했어야 했다. 자기 자신의 안위가 아닌, ‘나라와 백성’을 생각했어야 했다.
하지만 고종의 대환장파티는 여기서 끝이나지 않는다.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의 황제가 된 고종은 제국 선포 2년 6개월 뒤인 1900년 4월 19일 ‘훈장조례’를 발표하고 근대 훈장제도를 실시했다. 대한제국 훈장은 크게 일곱 등급이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격이 높은 훈장은 금척대훈장이었다. 두 황제 광무제 고종과 융희제 순종은 모두 이 금척대훈장을 받았다. 황제들을 제외한 인물로 첫 번째 금척대훈장을 받은 사람은 1904년 대한제국을 방문한 독일 헨리 친왕이다. 헨리 친왕 서훈 나흘 뒤 또 다른 외국 인사가 금척대훈장을 받았는데, 일본 추밀원 의장인 일본 후작 이토 히로부미다. p 264
대한제국이 일본에 넘어간 세 가지 결정적인 조약은 1904년 한일의정서와 1905년 을사조약(2차 한일협약),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다. 기이하게도 그 세 고비마다 대한제국 황실은 훈장을 광범위하고 납득하기 어렵게 남발했다. p 267
(1904년 한일의정서를 맺은 직후) 이날 황제는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를 비롯한 일본공사관 직원 ‘전원’에게 훈장을 내렸다. 나흘 뒤 황제가 조령을 내렸다. “이토 히로부미를 특별히 대훈위에 서훈하고 금척대수장을 주라.” 다음 날 황제는 이토가 타고 온 군함 함장 대위 이노우에 도시오와 시바후 사이치로에게도 훈장을 하사했다. 명분은 ‘친목과 친애의 뜻’이었다. p 269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 정부는 창덕궁 흥복헌에서 마지막 회의를 열고 한일병합조약을 체결을 의결했다. 나흘 뒤 황제 순종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궁내부 민병석에게 금척대수장을, 내부대신 박제순과 탁지부 고영희, 농상공부 조중응 따위에게 이화대수장을 하사했다. 모두 10명이었다.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공포됐다. 나라가 사라졌다. p 270
대한제국 선포 후 고종은 ‘훈장제도’를 실시했다. 그 훈장을 지급한 시기와, 훈장을 받은 사람들을 보면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현 정부가 정권을 잡은 이후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고종’미화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망국의 왕이라 동정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해 애썼다거나, 심지어 고종이 아관으로 피신한 길(실제로 그길도 아니었지만)을 복원하며 관광자원으로 널리 알리기도 했다. 고종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헤이그로 보냈떤 특사들은 이런 연설을 했다. 그들은 연설에서 조선 정부의 학정과 부패를 낱낱이 고발했다. 하지만 이부분은 철저히 가려지고, 학교에서는 가르치지 않았다. 그저 고종이 (황제국 조선의)자주독립을 위해 헤이그로 특사를 보낸 사실만 가르쳤을뿐.
“잔인한 지난 정권의 학정과 부패에 질려 있던 우리 한국인은 일본인을 희망과 공감으로 맞이했다. 우리는 일본이 부패한 관리들에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 만민에게 정의를 구현하며 정부에 솔직한 충고를 해주리라고 믿었다. 우리는 일본이 그 기회를 활용해 한국인에게 필요한 개혁을 하리라 믿었다.” 헤이그특사 연설문 中
고종이 독립을 위해 애썼다는 증거로 제시하는 독립협회 지원에도 반전이 있다. 독립협회에서 ‘입헌군주제’라는 안건이 나오는 순간, 고종은 독립협회에 등을 돌렸다. 온갖 자금과 인력을 동원해서 독립협회를 해산시켰다. 이럼에도 고종을 망국의 왕이라 미화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애썼다는 얼토당토 않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뭐,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최근이라면 최근부터 고종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이 곳곳에서 나오는걸 보면 말이다.
우리는 언제나 빛나는 역사만 배운다. 어떻게 보면 미화된 역사일수도 있고, 그림자만 철저히 가려진 역사일 수도 있다. 하지만 빛나는 역사 속에서 우리가 배울점이 얼마나 있을까. 진정한 교훈을 얻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배우기 위해선 빛나는 역사가 아닌 그림자 속의 역사를 배워야 한다. 그림자 속의 역사를 알리고, 많은 사람들을 깨우치려고 했었던 대표적인 역사서가 바로 류성룡의 『징비록』이다. 임진왜란~정유재란 이후에 집필된 바로 그 책이다. 당시 조선정부가 얼마나 무능했는지, 당시 조선의 일부 장수들이 얼마나 무능했는지, 조선이 무엇때문에 일본의 침략을 받았는지, 당시 조선의 최종결정권자였던 선조는 어떠한 행동을 했는지가 아주 적나라하게 나와있다. 물론 그 속에는 이순신 장군처럼 빛나는 기록도 있지만, 정말 슬프게도 그런 빛나는 기록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하다. 류성룡이 일부로 빛나는 역사를 축소한게 아니라,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도 그만큼 빛나는 역사가 없었기에, 당시의 조선은 부패할대로 부패해서 무능의 역사밖에 없었기에 그랬던거다.
비참했던 7년 전쟁이 끝난후 류성룡은 무능했던 조선을 바로잡기 위해, 류성룡은 위정자들이 들춰내지 않는 잘못들을 속속들이 들어냈다. 이유는 단 한가지, ‘지난 일의 잘못을 바로 잡아 훗날에 환란이 없도록 조심하기 위해’ 서였다. 그래서 『징비록』을 집필하였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그림자 속의 역사를 배우고 싶어하지 않았다. 임진/정유재란 발발한지 불과 50년도 채 안되서, 정묘/병자호란이 일어났다. 류성룡이 훗날을 위해 집필했던 『징비록』은 조선 사회에선 널리 읽히지 않았다는 방증이다(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오히려 임진/정유재란 이후, 인조가 재위하면서 조선정부는 더더욱 부패해졌다. 조선 정부의 부패는 한번씩 바로잡을 타이밍이 있었지만, 역시나 바로 잡지 못했고, 종국엔 일본에 의해 나라가 식민지가 되는 상황까지 치달았다. 이 모든 일은 조선을 침범한 외세만 잘못한게 아니다. 그런 상황까지 몰고간 조선 정부의 무능과 부패도 그에 못지 않은 잘못이다.
이후 몇 백년의 시간이 지나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이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위정자들, 국민들은 그림자 속의 역사를 배우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역사를 들추면 매국노라느니, 빨갱이라느니 매도하기 바쁘다. 이렇게 ‘징비’라는 단어 자체를 철저히 무시하는 이런 환경에서, 과연 우리나라가 정상적으로 굴러갈 수 있을까?
우리 근대사를 보면 대한민국 시기 군부독재를 비롯하여 전 정부의 국정농단, 현 정부의 독단 등 정권이 바뀌든, 이어지든 악순환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다음 정부는 다르겠지, 또 다음 정부는 다르겠지 하며 희망을 가졌지만, 매번 배신의 연속이었다. 심지어 다음 대선주자들의 행보를 보자니, 참으로 기가찰 노릇이지 않은가. 누가 대통령이 되든 이런 상황은 변하지 않을 것이며, 희망도 없어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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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사마다 재밌는 코너가 있다. 경향신문은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가 있고, 중앙일보든 동아일보든 대부분의 메이저 신문은 나름의 문화, 역사, 인문, 또는 정치 비사 코너로 독자를 유혹한다. 예전 집에서 신문을 받아볼 때는 그런 기사를 찾아서 읽으면서 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는 했다. <조선일보>에는 많은 이가 사랑하는 박종인 기자의 『땅의 역사』 시리즈가 있다. 이번 6권에서는 더욱 파격적이고 놀라운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시리즈물로 벌써 여섯 번째 이야기인데 이번 『땅의 역사 6권』의 주제는 흔적이다. '보잘것없되 있어야 할’이라는 부제와 더불어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을 가능성이 많은 건축물이나 비석에 담긴 역사적 사실을 보여준다. 이 땅에 남겨진 수많은 역사적 흔적들을 따라가며 알았을 수도 있고 몰랐을 수도 있는 이야기를 말해준다. 결국 땅도, 역사도 문화도 모두 살아가는 이야기요, 스토리 텔링이다.
지금은 갈 수 없는 북한땅의 함경도와 평안도지만 근왕병 모집을 위해 함경도로 떠난 선조의 제1왕자인 임해군과 그의 이복동생인 순화군은 ‘좋은 말이나 보화를 보면 반드시 이를 빼앗았고’ ‘적이 바로 보이는데도 백성을 흩어지게 할 생각밖에 없었다.’ 또 ‘사나운 종들을 부려서 민간을 노략하고 어지럽히는가 하면’ ‘수령들을 몹시 핍박해 인심을 크게 잃었다.’ 전시에도 아랑곳 않는 만행 행각 속에 두 왕자가 회령에 도착했다. 기다리고 있던 회령 사람들은 이들을 밧줄로 꽁꽁 묶은 뒤 성문을 열고 일본군에게 넘겨줘 버렸다. 적장 가토 기요마사는 이 광경을 보고 고소를 금치 못했다.
성균관 대사성과 한성판윤의 말도 안 되게 짧은 임기는 역사를 좋아하는 나는 익히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성남 달래내 고개에서는 경부고속도로가 탄생하기까지 지난 500년의 역사를 톺아본다. 이 모든 흔적들이 찬란하지만은 않았던 우리 역사에 대한 증언이다.
이 책은 그동안 우리가 바쁘다는 이유로, 또는 무심히 지나텼을 이 땅위의 흔적을 그려모아 숨겨져 있던 진짜 역사를 알려준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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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 아프다. 조선일보 박종인 기자의 필치로 우리 역사의 아픈 곳을 돌아보게 한다. 역사의 그 장면, 역사가 일어난 그곳으로...
폭정과 당쟁, 병자호란과 누란의 위기, 구한말 대한제국을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 1장 ‘폭정’에서는 스스로가 법임을 자처하며 나라 사정을 좌지우지했던 권력가 왕들의 폭력성을 다루고 있다. 그런 폭정에 동조하며 옳은 소리 한번을 하지 않았던 그때나 지금이나 비숫한 당시 위정자들의 행태를 드러낸다. 지금의 검찰청과 같은 조선의 감찰 기관이었던 사헌부를 자신의 뜻대로 학살했던 연산군과 성군이라 불리는 세종대왕, 고종의 지시하에 불법으로 진행된 능지처사로 두 번 죽음을 당했던 갑신정변의 주역 , 3일천하 고균 김옥균의 사연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 2장 ‘당쟁’에서는 조선의 붕당(예전에는 당파싸움으로 배웠던) 서인과 남인, 명분뿐이었던 ㅅ송시열과 송준길, 이완의 서인정권 주도하에 있었던 북벌론과 대립되는 반북벌론 등 자신들의 정치사상과 이념에 따라 편 가르기만 일삼았던 조선의 븡당 대립을 다룬다. 조선은 크게 동인계열인 남인과 북인(후기에 오면 이들은 거의 몰락한다), 서인계열이었던 노론과 소론의 사색 붕당의 시대를 지나 숙종말기 이후부터는 노론 일당 독재가 거의 정착한다. 경종대 소론의 마지막 반격인 신임사화 등이 있었으나, 결국 영조는 허울뿐인 탕평에서 노론 우위의 정국에서 정조와 노론의 타협정치 + 남인의 참여 였다가 순조 이후는 노론 벽파,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특히 서인 후에 노론이 되는 이 세력이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등에 업고 그들에게 유리한 관직 제도를 만들고 ‘밀실국혼’이라는 비합리적인 밀약을 통해 권력을 공고히 했던 부조리함 등을 이야기한다. - 3장 ‘비겁한 전쟁, 병자호란’에서는 청나라와의 사대관계에서 비롯된 국가적 수치를 다룬다. 나는 남한산성도 많이 갔고, 인조가 삼배구고두를 했던 잠실 송파 나루도 가보고는 했지만, 그런 국치를 금세 있고 비겁하게 정권을 유지했던 서인정권의 행태에서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얼떨결에 신분이 바뀌어 청나라 왕에게 시집보내진 의순공주의 사연, 청나라 권세에 힘입어 자신의 고향 조선을 등쳐먹은 역관 정명수의 말로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 4장 ‘허세의 제국, 대한제국’에서는 눈앞의 이익만을 위해 대의를 놓쳤던 당시 위정자들의 어리석음을 다룬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이후 내팽겨쳐진 관비 일본 유학생들의 암담한 결말, 자신의 척족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국정을 장악했던 명성황후(저자는 고종의 비 민씨라고 이야기하지만 아무리 잘못했어도 우리 스스로 그것을 깎을 필요는 없다) 의 만행을 이야기하고 있다.
읽다보면 울화통이 치밀어 오르지만, 아직도 그 교훈을 얻지 못한 채 우리나라의 정치권은 한치 앞도 전진하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아프기까지 하다. 책에 나오는 곳을 가보는 것은 내 가장 큰 취미 중 하나다. 일독을 권한다. 좋은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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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을 읽고 나니 2편도 마저 읽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 1편에서는 비교적 잘 알려진 내용 들이었지만 2편에서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도 나오고, 사건도 있고 그랬다. 바로 나쁜 놈들. 궁금했다. 얼른 읽었다.
이두황이라는 처음 들어본 이름이었다. 읽어보니 진짜 나쁜 놈이었다. 전주 사람들은 알지도 모르겠다. 전주 기린봉 초입에 묘비가 있다니... 참 오지랖도 넓다. 조선 국모 시해 사건에 동참하여 일제로부터 인정을 받고, 그 여파로 동학혁명을 진압하는데 앞장서 전라도지사까지 해먹었으니... 진정한 친일파였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이 부관참시하려고 이두황의 묘를 파해쳤으나 시체가 없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뼛속까지 친일파였으나 죽어서까지 행운아였다. 불교신자라서 화장했단다. 그런 중에 2013년 차길진이라는 인물이 잊혀진 이두황의 무덤을 다시 찾아내 2016년 시민단체가 기린봉 등산로 입구에 이두황 단죄비를 세웠다. 이 두 사람이 바로 동학혁명 때 이두황에 의해 무단 처형된 동학 접주 차치구의 아들과 손자이다. 역사는 돌고 돈다. 중국 무협지에서나 봤던 가문의 원수를 갚는 장면을 이 책을 통해 보는 재미가 있었다.
계속해서 나오는 이야기가 여자, 남자 이야기, 왕조 스캔들 이야기, 식민시대 이야기, 그리고 우리들 이야기로 이어진다. 읽으면 재미있지만 하나하나 소개하기에는 지면이 너무 부족하고 필력도 딸린다. 직접 책으로 접해보길 권한다. 아 참 그래도 참 재미있어서 이 이야기는 적어본다. 나라 팔아먹은 이완용이가 그래도 제나라 종묘에는 올라가고 싶었는지 누군가에 의해 이완용의 위폐가 은근슬쩍 끼워 넣어지다가 해방되고 어느 날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우스운 이야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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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과 인간, 그리고 조선 왕조의 역사를 주제로한 박종인의 땅의 역사의 일곱번째 작품이다. 오랜 연재 기간 동안 많은 내용과 충분히 제공되는 역사적 사료를 바탕으로 다양한 시각으로 역사 재해석을 시도한 땅의 역사 시리즈의 마지막으로 거의 완결판에 해당하는 것 같다. 물론 아직도 남은 이야기가 많아서 제 8권이 계속 출간될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또다른 색다른 주제와 내용으로 새로운 역사 해석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이번 제 7 권의 주제가 마음에 드는 것이 삭제된 기억이 주제인 것처럼 그동안 강제로 삭제되고 잊혀졌던 우리 역사의 아픈 기억과 함께 찬란하게 빛났던 순가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조금 낯선 역사의 진실을 파헤치는 노력과 새로운 시도가 여러모로 돋보이는 지점이다.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던 잘못된 지식이 특히 역사 분야에서 얼마나 많았는지 다시한번 느끼며 이 책을 통해 잘못된 역사 지식을 바로잡고 교정하는 기회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좋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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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봐도 참...답답하다. 01 1537년 경회루에서 벌어진 막장 사대(事大) 대참사 018 ‘주상 앞에서 중국 사신들은 심야까지 기생과 희롱하였다’ 02 1년 새 두 번 불탄 궁궐, 창덕궁과 창경궁 026 백성을 무시하고 권력만 좇았던 오군(汚君) 인조 ..... 역사의 재발견이 아닌 누군가 의도적으로 숨키고 안알린 원래있던 역사의 한편을 보는 느낌이다. 이런건 교과서에 넣거나 참고자료로 학생들이 배워야 할 책 같다. |
| 이땅의 참된 인간과 위선자들의 만행에 민초들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것도 같다.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 더더욱 안타깝고,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고통과 이땅을 배신한 자들의 처리는 어찌해야하는지 해결방안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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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 !!!!!!!!!!!!!!!
박종인 기자님의 『땅의 역사』 6권이 나왔다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정말로 얼마나 기다린 『땅의 역사』 시리즈인가?!!! 정말 진짜 이대로 완전 장기연재 가주세요, 기자님...흐어어허엏엏
자타공인 역사더쿠인 내가 다음 권을 기다리는 역사책인 박종인 기자님의 『땅의 역사』. 물론 기자님이 매주 올리시는 신문기사를 봐도 되고, 기자이 진행하는 땅의 역사 유튜브를 봐도 되지만... 내 습성과 환경상(?) 그게 잘 안된다. 역시 (회사에서ㅋㅋㅋ)책으로 봐야 제맛인듯!!
흠흠.
우리가 사는 이 땅에는 오랜 역사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있다. 우리는 그 역사를 학교에서 배우고, 매체를 통해서 배운다. 헌데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배웠던 역사는 생각보다 단조로웠다. 언제나 우리에게 자랑스러운 역사라던가, 뭔가 치욕스럽고 오점이 될 역사 같은데 이상하게 정신승리해서 결국 좋은 식으로 이야기한 역사였다. 뚜렷한 ‘공/과’가 있는 역사적인 인물에 대해서는 주로 ‘공’에 대해서만 배웠다.
아주 유명한 역사적 인물의 뚜렷한 ‘과’를 이야기 하거나, 우리에게 치욕스런 역사에 대해 돌직구로 말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우리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 매국노로 취급받는다. 물론 요즘은 과거에 비하면 이런 분위기가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그런 분위기가 남아있다. 이처럼 매번 좋은 말만 이야기하는데, 이보다 단조로운 역사교육이 또 있을까 싶다. 이러니 매번 나라가 위기를 맞이해도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그걸 계속 반복하는게 아닌가.
이런식으로 영광스런 역사, 정신승리하는 역사만 배웠을 때 사회적으로 어떤 부작용이 일어났는지는, 우리 역사만 돌아봐도 알 수 있다. 우리가 제일 많이 알고, 제일 많이 배우는 6백년의 기간. 그러니까 조선까지의 역사적 사건만 역으로 나열해보자.
▶광복 이후 군부독재 시절 → 일제강점기 → 조선 후기 서구열강의 침입 → 조선 병자호란 → 조선 임진왜란 등등.
위 역사들은 우리 역사에서 꽤나 굵직한 사건들이고, 우리도 학창시절 분명하게 배웠다. 하지만 정말 우리가 제대로 알고 있는게 맞을까? 적어도 내가 학교에서 배웠을 땐 저런 치욕스런 사건들이 일어난 대부분의 이유를 ‘외부’에서 찾았다. 이 땅을 침입한 놈들이 나쁜놈이고, 독재를 한 인간들은 시대상황에 따라 어쩔수 없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근데 정말 과연 그럴까? 모든 이유는 외부에만 있었던 걸까?
조선 전기 내 평화에만 찌들어 외세 침입에 대한 대비는 등한시 했던 조선 정부. 일본보다 더 빠른 시점에 조총이 국내에 들어왔음에도, 그걸 개발하기는 커녕 외려 녹여서 사찰의 동종을 제조한 조선 정부. 거기다 일본이 쳐들어올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음에도 무시했던 조선 정부. 일본이 쳐들어오자 누구보다 먼저, 발 빠르게 도망간 조선의 왕!! 그것도 목적지는 조선 땅이 아닌, 조선을 벗어난 명나라. 모르긴 몰라도, 명나라에서 입국거부만 하지 않았어도, 조선은 임진왜란 중에 명나라의 속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뭐 이건 시작일 뿐이고, 임진왜란/정유재란 기간 내내 조선 정부의 문제는 너무 많아서 각설.
그렇게 일본과의 전쟁이 끝나고 30년도 채 안되서 일어난 정묘호란/병자호란은 또 어떤가. 임진왜란의 문제를 외부에서만 찾는게 아닌, ‘내부’에서 찾은 서애 류성룡이 《징비록》. 하지만 조선의 위정자들은 징비록을 외면했다. 그 결과, 조선 정부는 임진왜란 발발 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아주 문제적 상황에 있었고, 결국 정묘/병자호란이 터졌다. 더 슬픈 건 그 이후에도 변하지않았고 계속해서 치욕스런 역사는 반복되었다. 그 어떤 반성 하나 없이, 지금까지 말이다.
치욕스런 역사에 대한 반성이 없었기에, 우리 근대사를 비롯해 현대사도 문제가 많았고, 지금도 문제가 많다. 말그대로 현재진행형! 이게 얼마나 심각하냐면, 고종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전제하에 수많은 미디어 매체가 나왔고(덕혜옹주도 그렇고), 정부기관에서도 이에 동조했다. 관련 관광산업까지 꾸려가면서 말이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을 뿐.
그나마 다행인건! 그 누군가가 나서서 치욕스런 역사를 아무리 미화하고 정신승리를 한다고 해도, 절대 바꿀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흔적들이 아직 이 땅에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흔적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라져가고, 사람들 기억속에서도 잊혀지고 있지만.
새삼 정말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박종인 기자님처럼 역사의 진실이 담겨있는 흔적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았다는게T_T.
조선의 국립대학총장과 서울시장 평균 재임 기간은 3개월?!
오늘 날로 치면 국립대학총장에 준하는 성균관대사성과 서울시장에 준하는 한성판윤. 매우 중요한 직책이자, 권력이 있던 자리이며, 유능한 사람들은 한 번씩 거쳐갔던 직책이다. 헌데 정말 놀랍게도 조선 오백년간 그들의 평균 재임기간은 고작 3개월이었다. 3개월이면 요즘 말로 수습기간아닌가? 과연 일은 제대로 할 수나 있었을까? 조선 오백년간 성균관은 어떻게 운영되었고, 수도였던 한성(서울)은 어떻게 굴러갔을까?
조선을 함께 설계한 정도전은 그 설계도인 ‘조선경국전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학교는 교화의 근본이다. 여기에서 인륜을 밝히고 여기에서 인재를 양성한다.’ 땅의역사 6권 p 076
1) 오늘날의 국립대학총장, 성균관대사성
유학의 나라 조선. 조선이 건국되면서 유학을 가르치는 성균관도 당연히 존재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성균관은 유학이 들어온 고려말부터 존재했다. 역사가 깊은 교육기관인 것이다. 성균관은 공자를 포함한 역대 중국 성인을 배향한 대성전과 학생들을 가르치는 명륜당으로 구성되어있으며. 가르치는 과목은 당연히 유학, 즉 성리학! 지금도 성균관 명륜당 건물이 서울 한복판에 남아있고, 성균관 이름을 딴 대학교가 있을정도로 ‘성균관’ 이라는 이름은 조선을 대표하는 ‘국립교육기관’ 이었다.
대학 운영 전반에 걸친 최고 책임자가 대학총장이듯이, 성균관의 최고 책임자는 성균관 대사성이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지탱하는 유학자들을 양성하는 만큼, 조선 정부에서도 성균관을 향한 지원은 대단했다. 성균관 출신들이 정부 요직을 차지하는 것은 기본이기도 하고. 여튼 그렇게 중요한 성균관이고, 그런 성균관의 최고 책임자가 성균관대사성이니, 그 임무가 얼마나 막중했겠는가.
대사성은 성균관을 책임지는 기관장이요 지금으로 치면 국립대 총장이다. 품계는 정3품으로 여섯 판서보다 낮지만 성리학 교육 수장으로서 명예로운 직책이었다. 1392년 조선왕조가 건국된 이래 1910년 이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518년 동안 이 명예와 책임을 입은 대사성은 몇이나 될까. ‘2,101명’이다, 이백 명이 아니다. 이천백한 명이다. 평균 재임기간은 ‘3개월’이다. 3년이 아니라 석 달이다. 세종 때 최고 27.9개월이었던 대사성 재임기간은 갈수록 줄어들어서 ‘학문을 사랑한 군주’ 정조 때는 1.2개월로 급감했다. 고종 때는 1.3개월이었다. p 075
태조부터 연산군까지 1,425개월 동안 모두 96명이 대사성으로 근무했다. 평균 재직 기간은 14.8개월, 즉 1년 3개월이었다. 충분히 명예와 무게를 견디고 책임을 수행할 만한 기간이었다. 그런데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이 된 중종 때 대사성 평균 재임기간이 7.5개월로 급감한다. 중종 472개월 동안 대사성이 63명이나 바뀌었다는 뜻이다. 연산군까지 평균 14.8개월이던 대사성 재임 기간은 중종 이후 순종 때까지 2.5개월로 추락했다. 중종~순종 4,987개월 동안 대사성 숫자는 무려 2,005명 이었다. p 078
막중한 임무와 책임을 가진 성균관대사성의 평균 재임기간이 3개월이란다. 3년도 아닌 3개월. 요즘 회사 신입사원도 입사후 3개월? 신입 티도 못 벗고 업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런데 성균관대사성 평균 재임기간이 3개월!!!!!
실록을 비롯한 기록에 따르면 적어도 망나니 연산군때까지만 해도 평균 재임기간이 1년이 넘었었다. 그런데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 때부터 성균관 대사성 평균 재임기간이 폭락한다. 성균관대사성 자리는 아주 수시로 교체되었다. 조금 아이러니하다. 중종반정을 주도한 세력은 다름아닌 성리학을 맹신하는 사림세력이 아닌가. 성리학 교육을 대폭적으로 늘리고 지지해도 이상하지 않을판인데, 대체 왜 대사성 평균 재임기간이 뚝 떨어졌는가.
사림은 연산군 때 ‘도의’를 외치다 각종 사화로 절멸된 뒤 초야에 묻혀 있던 세력이다. 그 사림 눈에 정부가 주도하는 관학인 성균관은 가치가 없었다. 철학과 고담준론과 명분을 가르쳐야 할 성균관이 공무원 입시 학원과 같은 경서 암기 학교로 전락해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종 때는 성균관에 등교하는 학생이 없고 과거시험장에만 나타난다는 보고가 있기도 했다. 무늬만 학교인 그 성균관이 연산군 때는 기생파티장으로 추락하더니 중종 때는 마침내 텅 빈 교정이 소를 잡아먹는 도살장으로 변해버렸다. 사림은 이를 세력을 확대할 명분으로 삼았다. “성균관이 도살장으로 변했다”는 보고는 국가가 망쳐놓은 성리학 교율을 자기들이 하겠다는 암시였다. p 080
사림이 만들었던 서원은 당쟁소굴이 됐다. 서원 철폐령이 수시로 떨어지더니 흥선대원군은 아예 400개가 넘는 서원을 40여 개로 정리해버렸다. 대사성 권이 또한 자유 낙하했다. 왕권이 강력하던 숙종 때는 567개월 동안 208명이 갈려나갔다. ‘학문을 숭상하고’ 자칭 ‘만천명월주인옹’이었던 정조 때는 최악이었다. 300개월 동안 대사성이 된 사람은 251명으로 평균 임기는 1.2개월에 불과했다. 심지어 정조 때는 하루에 대사성이 세 번 갈리기도 했다. p 081
알고보니 사림세력은 성균관을 버린 것이었다. 교육기관으로서는 더이상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왜? 성균관은 이미 망가질대로 망가져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림세력이 선택한 것이 바로 ‘서원’.
사림은 지방 곳곳에 서원을 만들고, 일명 ‘사액’을 받아서 그 힘을 키웠다. 그 시작은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웠던 백운동 서원을 ‘소수서원’으로 사액한 것. 그렇게 지방 곳곳의 서원들이 조선의 유학자 양성을 도맡게 되었다. 그럼 성균관은? 이름만 남은 허수아비일뿐.
자, 그렇다면.. 지방 곳곳에 설립된 사액서원들은 제대로 굴러갔을까? 성리학교육을 제대로 했을까? 일단 그들이 교육한 성리학은, 엄밀히 따지만 ‘주자학’이었다. 주자학의 병폐야 뭐 말해 뭐해. 몸집이 커져버린 서원들은 수많은 폐단을 일으켰다. 그 결과가 훗날 일어나는 서원철폐! 무엇보다 이런 서원에서 교육받은 사림세력들, 조선후기 정권을 잡은 그들은 조선을 갉아먹고 또 갉아먹었다.
고종시대 533개월에는 한 달 아흐레에 한 번씩 자그마치 398명이 대사성 벼슬을 달고 나갔다. 세도정치 주역 가문인 안동 김씨 대사성, 풍양 조씨가 배출한 대사성은 각각 74.1%, 68.3%가 세도정치시대와 고종시대에 몰려 있다. 고총 외척 여흥 민씨는 모두 31명이다. 조선왕조 전체를 통들어 여흥 민씨 대사성 50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고종 때 사람들이었다. 거기에 소년 대사성 민영익 또한 이름을 올린 것이다. p 083
수시로 교체되는 성균관 대사성에는 무려 만 18세 소년도 있었다. 그의 이름은 민영익. 바로 민비의 조카다. 민영익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춘계시험 삼일제를 치루고, 왕과 왕비의 빽으로 중간 시험은 모두 생략(^^)하고, 바로 마지막 시험인 전시를 통과한 인물이다. 그렇게 등과한 만 18세 소년 민영익은 최연소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만 18세가 서울대학교 총장이 되었다는 뭐 그런 이야기.
“1395년 임명된 초대 서울시장(판한성부사)부터 1907년 대한제국 마지막 서울시장(경성부윤)까지 512년 동안 서울 시장은 모두 2,012명이었다. 각 시장 평균 재직 기간은 3개월이었다.” 땅의 역사 6권 p 085
2) 오늘날의 서울 시장, 한성판윤 그렇다면 오늘날의 서울시장격인 조선시대 한성판윤은 어땠을까? 정말 놀랍게도 조선의 서울시장 평균 재임기간도 3개월이었다. 짜고치는 고스톱도 아니고 어쩜 이럴수가 있는지!
‘조선시대 한성부 판윤으로서 유명한 인물은 주로 조선 전기에 많았다. 그러나 이들의 정치적, 학문적 업적은 많이 알려져 있으나 한성부 판윤으로서의 행정 실적은 별로 기록된 내용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박경룡, 『한성부연구』 국학자료원, 2000)’
‘(조선 후기) 한성판윤은 사회가 혼란하고 정치가 안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단적인 예다. (류시원, 『조선시대 서울시장은 어떤 일을 하였을까』 한국문원, 1997)’
한성판윤은 품계가 종2품으로 장관급 고위직이다. 한 나라 수도 행정을 책임지는 최고위 공직자다. 그런데 전기에는 행정실적 기록이 없고 후기에는 불안정한 사회와 정치의 상징이라고 한다. 왜 이런 평가가 나올까. p 085
자타공인 기록의 나라 조선이다. 임금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인물들이 업적이 기록으로 증명된다. 그런데 어찌하여 수도 한성을 책임지는, 한성판윤의 업무 기록은 없는걸까? 놀랍게도 그 이유는 《경국대전》이 규정한 한성판윤의 업무에 있었다.
※『경국대전』이 규정한 한성판윤 업무※ 1. 호적, 시장, 가옥, 전답, 임야, 도로, 교량, 하천, 세금 등에 관한 세무 2. 민간 빚 문제(부채), 폭력(투구), 살인사건 검시권을 가짐 3. 어전회의 출석 및 대중국 외교관
1번 항목은 행정가가 당연이 해야할 업무이다. 2번 업무는 지금이야 사법부가 분리되었으나, 조선에선 수령의 업무였다. 문제는 3번!!! 한성판윤은 수시로 개최되는 어전회의 참석자 중 하나였고, 빈번하게 들락날락하는 대중국 외교관이었다.
막중하고 폭넓은 업무를 역대 한성판균은 제대로 수행했을까? 못했다. 왜? ‘서울 실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이직을 거듭했으니까’. 게다가 한성부 공식 업무는 ‘판윤이 좌기(출근해 업무를 시작함)한 뒤라야’ 하급 관리들이 업무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한성판윤은 수시로 어전회의에 출석해 국정을 논하고 중국 사신이 오면 의전을 맡아 자리를 비웠다. 그러니 조선국 한성판윤은 시정 장악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직책이었다. 그나마 석달밖에 근무하지 않고 전근을 가곤 하는 시장. p 087
무엇보다 조선왕국 사대부들은 소위 ‘9경’ 경력을 가문의 영광으로 여겼다. 9경은 정2품 의정부 좌우참찬, 육조판서와 한성판윤이다. 하지만 경력 관리 차원에서 한성판윤을 받아들였을 뿐, 실질적인 서울 행정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뜻이다. 이런 명목상 시장이 주는 행정 공백을 막기 위해 조선 정부는 장기 근무를 원칙으로 하는 ‘구임관’을 두었다. 한성판윤 자리가 수시로 바뀐다는 전제를 깔고 마련한 정규직이다. p 088
1864년 고종 등극 이듬해부터 1907년 고종 퇴위 직전까지 한성판윤은 모두 429명이었다. 43년 사이 한 해 열 명이 넘는 시장이 한성 행정을 책임졌다. 『고종실록』에 따르면 1890년에는 한 해 동안 모두 29명이 한성판윤 사무실에 짐을 풀고 짐을 쌌다. 그해 판윤 평균 재직 날수는 12.3일이었다. p 090
어전회의 참석과 대중국외교관. 이 두 가지만으로도 한성판윤은 본래 자신의 업무인 한성의 행정업무를 할 수가 없었던 거다. 한성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교량은 몇개인지, 인구는 몇이나 되는지 알아볼 시간조차 없었던 거다. 문제는 한성의 최고책임자가 매번 자리를 비우니, 한성의 하급 관리들도 당연히 행정업무를 할 수가 없었다. 한성의 하급 관리들은 ‘판윤이 출근해야’ 업무를 할 수 있었으니까.
결국 한성판윤도 성균관대사성 처럼 허울뿐인 자리였다.
헌종 때는 1848년 11월 30일 형조판서 이돈영이 1618대 한성판윤에 임명됐다. 그런데 그날 마침 이돈영이 지방에 출장 중이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러자 헌종은 즉시 한 해 전 판윤을 지냈던 김영순을 판윤으로 임명했다. 이돈영은 하루살이 판윤이 됐다. 1799년 9월 27일 1293대 판윤에 임명된 서유대는 다음 날 무관직인 금위대장으로 전보되고 판윤은 이의필로 교체됐다. 이유는 불명이다. 이렇게 하루 혹은 하룻밤 만에 시장직에서 내려앉은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니다. 역대 판윤 2,012명 가운데 153명이 열흘 만에 자리에서 나갔다.
세도정치시대엔 헌종과 철종 때 한성판율을 지낸 이가우 별명은 ‘판윤대감’이었다. 이가우는 10년 동안 모두 열 번 판율을 지냈다. 그런데 그가 판윤직을 수행한 기간은 총 1년 3개월에 불과했다. p 088
한성을 제외한 지방관을 보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지방관은 『경국대전』과 『대전통편』에 임기가 정해져있다. 관찰사는 360일, 중급 수령은 900일, 하급수령은 1,800일이다. 하지만 이 임기를 제대로 채운 수령은 단 한명도 없었다. 1746년 제정된 『속대전』의 변방 수령은 1년으로 임기가 짧았다. 1506~1894년 부산 동래 각급 수령 인사를 기록한 「동래관안」에 따르면 388년 동안 임기를 만료하고 교체된 수령은 전체 280명 가운데 25명 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동래관안」에는 교체 이유도 명백하게 기록돼 있지 않은 인사도 7%나 됐다. p 089
수도 한성이 그러할진데 다른 지방들은 어땠을까? 조선이 망하지 않고 오백년을 굴러간게 놀라울 정도다. 진작에 망해도 이상하지 않았으나, 백성들의 힘으로나마 허울뿐인 조선이 유지될 수 있었던거다.
그렇게 허울뿐인 책임자 자리를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갔다. 일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니, 그저 자리만 오고갔으면 좋으련만, 때마다 의전행사가 진행되었다. 옛 사람 보내고, 새 사람 반기고. 그때마다 세금이 낭비되고, 노동력이 동원되었다. 위민하는 책임자는 일절 보이지 않았다. 이게 조선 5백년의 속살이다.
정체는 숨겼지만, 이건 역사적 의미가 있는 사료다?
우리나라 곳곳을 다니다보면 역사적인 흔적을 알리는 표석이 정말 많이 알려져있다. 근데 그 표석들을 잘 보면, 이상하게 자랑스러운 역사만 새겨져 있거나, 알고보니 만들어진 역사가 새겨져 있는 곳도 많았다. 예컨데 북촌한옥마을. 현재 우리가 아는 북촌 한옥마을은 고관대작이 살기는 개뿔, 조선시대만해도 바위산이었던 곳이다. 구한말기에 독립운동가 정세권님이 일제에 삶의 터전을 빼앗긴 조선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곳이다. 그걸 조선의 고관대작이 살았던 곳이라고 서울시는 몇년째 홍보하고 있다.
또 다른 사례22 로는 역시나 서울 인사동에 있는 경인미술관. 지금은 겁나 감성돋는 카페로 유명하지만, 실상은 민씨 척족이자 거부 친일파 민영휘의 저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은 내가 갔을 때만해도, 그 어디에도 없었다. 아마도 지금도 없을듯? 참고로 그 자손들은 나미나라공화국(일명 남이섬^^)으로 많은 돈을 쓸어 모으는 중.
또 다른 사례 333 으로는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곳곳에 세워졌던 신사의 흔적들이 있다. 내 특성상(?) 어두운 역사가 남아있는 장소를 자주 찾아다니는데, 그중 한 곳이 바로 일제 신사(사찰) 터다. 대부분 눈에 띄는 흔적은 사라졌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배의 흔적인 계단이나 석물들이 남아있는 경우가 꽤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이 언제부터, 왜, 이곳에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아! 단 한곳, 광주광역시의 광주공원빼고. 광주시는 광주공원은 일제 신사의 흔적에 대해 정확하게 안내하고, 일제의 잔재라는 것 또한 안내하고 있었다. 반대로 포항이나 목포, 경주는 그런 안내는 커녕 오히려 관광지 홍보용으로, 한마디로 치욕적인 역사는 없애고 홍보하고 있었다. 아예 일언반구 없던 지자체도 있었고. 뭐 지금은 달라졌을지 모르겠지만?
여튼 뭐 이런 식이다. 어두운 역사는 뒤로 숨기고, 빛나는 역사만 조명하거나 혹은 빛나는 것처럼 역사를 만들어서 광고하거나. 이 책에서 소개하는 정독도서관 부지 내에 있는 ‘역사적 사료’라고 하는, 커다란 돌덩이도 그렇다.
서울 화동 2번지 정독도서관 본관 건물 뒤편, 정독독서실 건물 앞 철책 속에 커다란 돌덩이가 있다. 돌에는 한자 24글자가 새겨져 있다. 뜻은 이러하다.
‘둥근 우물돌이다. 아마 고려 때 것 같은데 샘은 매립돼 흔적이 없고 돌만 우뚝하다. 광무4년(1900년) 겨울 평재(平齋)가 적다.’
옆에 안내판이 있는데 이렇게 적혀있다.
‘이 우물에 새겨진 명문을 해석한 결과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료라 여겨져 현재와 같이 관리하게 되었다. 2000년 8월 1일 정독도서관장’
앞 글을 적은 사람 ‘평재’는 1905년 대한제국 외부대신 자격으로 을사조약에 도장을 찍었던 평재 박제순이다. 우물돌이 남아 있는 바로 이 자리는 박제순이 살던 집터다. p 181
그렇다. 정독도서관은 부지 내에 있는 커다란 돌덩이가 있는데, 이게 ‘역사적의로 의미있는 사료’라고 판단하여 보존한다는 것이다. 어떤 역사적 의미가 있는지, 단 한마디도 없이. 하지만 정독도서관이 말하는 역사적 의미, 한자를 읽고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면 바로 캐치할 수 있다. 왜? 정독도서관이 보존한다는 그 돌덩이에, 대놓고 한자로 쓰여있으니까. 심지어 그 한자를 세긴 이가 누구인지도.
그는 다름아닌 바로 평재 박제순. 을사오적이다. 아주 대표적인 친일파 거물이다.
즉, 아주아주 넓은 정독도서관 부지 중에서 저 돌덩이가 있는 저 곳은 을사오적 박제순이 살던 집 터 였다. 조금 더 들여다보면, 현재 정독도서관 부지는 친일파 박제순을 포함하여 조선 말 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꽤 많은 역사를 담고 있다.
1884년 양력 12월 4일 김옥균이 일으킨 갑신정변은 만 46신 만에 실패로 끝났다. 주모자들은 망명하고, 망명하지 못한 자들은 거리에서 죽었다. 가족은 연좌해 처형되거나 자살했다. 그리고 재산은 파가저택, 집을 부수고 못을 만들어 흔적을 없애버렸다. 1894년 3월 28일 고종 정권이 보낸 자객 홍종우에 의해 청나라 상해에서 암살된 김옥균은 4월 14일 한성 양화진에서 ‘조선왕조 최후의’ 사후 능지처참이자 부관참시를 당했다. 5월 31일 고종은 역적 처형을 축하하는 대사면령을 발표했다. 그런데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며 조선에 갑오개혁 정부가 서자 고종은 이듬해 1월 22일 김옥균의 관작 회복 칙령을 내렸다. p 183
1884년 갑신정변 주모자였던 김옥균의 저택도 그 곳에 있었다. 김옥균 옆집에는 갑신정변을 같이 주도했던 서재필도 살고 있었다. 역시나 현재 ‘정독도서관’ 부지에 속해있다. 하지만 갑신정변 실패, 주모자들의 처형 및 망명 등으로 인해 갑신정변 주도자들의 집과 땅은 헐리고 팔리고 그렇게 사라졌다. 갑신정변 주모자들에 대한 고종의 분노는 끈질기고 집요했다는건 안비밀. 뭐, 이에 대해서 할말은 많으나, 생략하고!
1899년 개혁을 원했던 그들이 살던 그 땅에 관립중학교가 개교했다. 그 한 켠에 거부 친일파 평재 박제순의 집이 있었다. 이후 1910년 한일병탄조약으로 나라는 사라졌고, 관립중학교는 ‘경성고등보통학교’로 바뀌었다. 박제순이 죽은 뒤, 박제순 저택이 있는 부지까지 ‘경성고등보통학교’에 편입되었다.
갑신정변 주모자 김옥균과 서재필. 그리고 을사오적 친일파 박제순. 현재 정독도서관 부지가 담고 있는 역사다. 하지만 정독도서관은 이 모든 내용중에서 일부만 선별하여, 나머지는 숨겼다. 그리하여 친일파 박제순은 사라지고 위에서 언급했던 ‘역사적 사료’라는 우물돌이 남았다. 김옥균의 집터를 알리는 비석이 있지만, 서재필의 집터를 알리는 비석은 없다.
고종, 나라가 사라졌지만 나는 사랑을 하련다.
조선 역대 왕 중에서 나라와 백성를 버리고 도망간 왕이 셋 있다. 이미 모두에게도 유명한 선조와 인조, 그리고 고종이다. 선조와 인조의 몽진은 정말 유명한데, 고종의 몽진은 생각보다 인식하는 사람이 적다. 참으로 이상하다. 우리는 분명 고종의 ‘아관파천’을 배웠는데 말이다. 분명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도망갔는데, 그 누구도 이걸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도망갔다’고 인식하지 않는다. 아마도... 최근 20년간 일어난, 그것도 지자체와 각종 미디어에서 주도한 고종 미화(예컨데 독립운동 지원이라는 개소리)에 대한 부작용이 아닐까 싶다.
제 기득권과 권력,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다 팔아넘긴, 고작 무당 한 명에게 의지하여 수많은 재산을 갖다받친, 못 살겠다고 들고 일어난 동학농민군을 개틀링건으로 쏴죽인, 바로 그 사람 고종을 말이다.
‘갑신정변 주역인 김옥균과 박영효를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냈던 고종은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낸 적이 없었다. 을사조약과 합방으로 을사오적이 호의호식하는 것보다 더 황실은 편안한 일상을 보냈다. 식민지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은 분명하다. 고종이 뛰어난 지략가로 외세를 잘 이용하고 나라의 근대화를 위해 절치부심하고 굶주리는 백성을 위해 눈물로 베갯잇을 적셨다고 해도 그 책임은 면할 수 없다.’
2004년 김윤희, 이욱, 홍준화라는 세 역사학자가 쓴 『조선의 최후』에 나오는 글이다. (…) 일본은 40년 넘도록 그 나라를 이끌었던 이 황제를 죽이거나 신분을 떨어뜨려 모멸감을 주지도 않았다. 오히려 일본은 고종과 그 가족을 천황 황명으로 조선왕과 조선공에 책봉해 식민시대 내내 우대했다. p 238
고종은 갑신정변 주모자들을 증오했다. 자객을 보낼정도로. 부관참시를 할 정도로. 왜 그정도로 증오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갑신정변은 근대국가로 가기 위한 개혁이었고, 이는 즉 전제왕권의 몰락이었다. 왕권을 매우 중요시한 고종에게는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세계가 공화국으로 가고 있을때도, 이 작은 땅 한반도에서 왕을 하던 고종은 시대에 역행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던 인물이다. 대한제국 헌법만 봐도 전부 ‘대황제께옵서~’로 시작한다. 일제가 조선 침략을 위해 여러 조약을 맺을 때도, 참 이상하리만치 조선 왕족의 처우만은 유지했다. 심지어 일본의 황족에 준하게. 뭐 이정도면 말 다한거 아닌가.
그런 고종이다. 자신의 안위만을 챙기는 사람이니 일제가 우리 백성들을 어떻게 희생시키던, 신경조차 안썼을 위인이다. 그러니 계속 후궁이 늘어났겠지?
1897년 10월 20일 상궁 엄씨가 아들을 낳았다. 제국을 선포하고 일주일이 지난 날이었다. 이 아들이 영친왕 이은이다. 아들이 태어나고 이틀 뒤 고종은 엄 상궁을 후궁인 귀인으로 승격시켰다. 3년 뒤인 1900년 8월 3일 고종은 또 다른 후궁 귀빈 이씨를 정2품 후궁 소의로 봉했다. 소의 이씨 또한 일찍 딸을 낳았는데 요절했다. p 242
‘고종이 전 상궁 엄씨를 불러 계비로 입궁시켰다. 민 왕후가 생존해 있을 때는 고종이 두려워하여 감히 그와 만나지 못하였다. 10년 전 고종은 우연히 엄씨와 정을 맺었는데, 민후가 크게 노하여 죽이려 했지만 고종의 간곡한 만류로 목숨을 부지하여 밖으로 쫓겨났다가 이때 그를 부른 것이다. 시해 사건이 발생한 지 겨우 5일 째 되던 날이었다.’ (황현, 『매천야록』)
넉 달 뒤 고종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달아난 ‘아관파천’도 엄상궁이 주도한 일이었고, 1897년 2월 경운궁으로 환궁하고 8개월 뒤 영친왕이 태어났으니 이은은 그 러시아공사관에서 잉태된 아들이었다. 을사조약 직전인 1905년 10월 5일 황제 고종은 황귀비 엄씨에게 서봉대수훈장을 수여했다. 서봉장은 1904년 3월 신설한 여자 전용 훈장이며 황귀비는 그 첫 수훈자였다. p 243
조선의 마지막 옹주, 고종의 막내딸이라는 덕혜옹주. 과연 고종의 자식은 덕혜가 끝이었나? 땡. 답은 아니다. 덕혜가 막내딸은 맞으나, 그 뒤로도 고종의 자식이 둘 이나 더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죽었지만.
1911년 7월 20일, 식민화 이후 ‘황귀비’에서 ‘태왕비’로 명칭이 바뀐 엄씨가 죽었다. 장례는 8월 20일 치러졌다. 1912년 고종에게 딸이 태어났다. 이 딸이 고종이 아꼈던 외동딸 덕혜옹주다. 어머니는 궁녀 양춘기였다. 덕혜옹주가 태어난 날은 양력 5월 25일이었다. 열 달 회임 기간을 역산하면, 엄비 장례 기간에 덕혜가 잉태된 것이다. 1852년생인 고종은 그해 환갑을 넘겼고 양씨는 서른 살이었다. 창덕궁에 살던 고종의 맏아들 순종은 38세였다. p 244
덕혜가 고종에게 막내딸은 맞지만 막내 자식은 아니었다. 덕혜가 태어나고 2년이 지난 1914년 7월 3일 밤 고종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아들을 낳은 여자는 궁녀 이완덕이었다. 나이 열 셋세 세수간 궁녀로 입궐했던 이씨는 스물여덟살에 승은을 입고 이듬애 아들을 낳고 광화당이라는 당호를 받았다. 고종은 예순두 살이었다. (…) 한 해가 지난 1915년 8월 20일 예순셋 먹은 고종에게 또 아들이 태어났다. 친모는 서른세 살 먹은 궁녀 정씨였다. 정씨는 보현당이라는 당호를 받고 후궁이 되었다. (…) 고종은 또 김옥기라는 또 다른 궁녀를 후궁으로 들였는데 자식을 낳지 못해 후궁지위에는 오르지 못했다. 훗날 순종이 그녀에게 삼축당이라는 당호를 내렸다. 이들 후궁은 모두 고종 생전부터 급료를 받았다. p 246 ~ 247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도망갔던 그 때 엄상궁을 품에 안고, 엄상궁은 영친왕 이은을 임신했다. 엄황귀비가 된 엄상궁. 1911년 엄황귀비가 죽었다. 이때는 이미 조선이라는 나라가 사라진뒤다. 조선은 사라졌지만, 조선왕족은 호의호식하던 그 때다. 뭐 여튼. 고종은 엄황귀비 장례기간에 양씨 궁녀를 품에 안았고, 양씨는 덕혜를 임신했다. 덕혜가 태어나고 2년뒤, 이번에 고종은 이씨 궁녀를 안았고 역시나 아들을 임신했다. 또 2년 뒤 고종은 정씨 궁녀를 안았고, 아들을 임신했다. 그리고 또 김씨 궁녀를 안았다.
요약하자면 일제의 침략으로 조선이라는 나라는 사라졌고, 조선의 백성들은 일제의 수탈로 수십, 수백, 수천이 죽어나갔다. 또 누군가는 독립운동을 하는 힘든 삶을 선택했다. 그런 상황에서 고종을 비롯한 조선왕족은 일본 황족에 준하는 위치를 보장받고, 호의호식하며, 매해 새로운 후궁을 들였다. 이 후궁들은 당연히 급료를 받았다. 조선왕족들에게 지급되는 급료는 당연히 조선 백성들의 고혈로 이루어진 세금이었다.
진짜 제발 고종, 순종, 덕혜옹주 기타 등등 독립운동을 했다더라,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더라, 하는 거짓뉴스좀 그만하자. 뭐, 조선왕족의 피를 이는 누군가는 독립운동 지원을 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적어도 저들은 하지않았다. 심지어 망해가는 나라의 마지막 왕족이라고 동정도 필요없다. 뭐 덕혜야 동정을 안할래야 안할수 없긴 한데, 적어도 고종이나 순종은 동정 조차도 필요 없지 않나?
적어도 고종은 아버지에게 권력을 빼앗은 시점부터, 민비와 그 척족들에게 온갖 뇌물을 받으며, 백성들의 피눈물에는 꿈쩍않던 사람이니.
대구시가 말하는 시대상황에 굴하지 않는 민족정신은 대체 무엇인가
이번엔 위에서 말한, 일본 황족에 준하는 위치를 보장받는 조선 왕족 순종의 이야기.
1907년 7월 20일 헤이그밀사 사건을 빌미로 고아무제 고종을 퇴위시킨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바로 그해 12월 고종과 엄귀비 사이 아들 영친왕 이은을 도쿄로 보낸다. 영친왕은 순종에 이어 조선 왕위를 물려받을 왕세자였다. 그리고 히로부미는 갓 황제가 된 순종을 통감 자격으로 배종해 1909년 1월과 2월 두 차례에 걸려 북쪽과 남쪽으로 순행시켰다.
왕세자 영친왕 유학은 명목상 권력자인 전주 이씨 왕실을 식민체제에 정신세계부터 길들이려는 조치였다. 이왕 순행은 조선왕조 내내 대중이 한 번도 보지못한 군주를 대면시켜 식민 조선인에게 자발적은 복종을 유도하려는 계획이었다. 천황 메이지를 일본 전국에 여행시켜 ‘근대화 방법을 놓고 분열돼있던 여론을 집켤시키고 중앙정부 중심의 정치체제를 확립할 수 있었던’ 메이지유신 경험을 그대로 써먹은 작업이었다.
1909년 1월 4일 융희제 순종이 이렇게 선언했다.
“임금 자리에 오른 뒤 도탄에 빠진 백성 생활을 구원할 일념뿐이었다. 하여 직접 지방 형편을 시찰하고 그 고통을 알아보려고 한다. 통감인 공작 이토 히로부미에게 특별히 배종할 것을 명한다.” (『순종실록』) p 251
일본으로서는 대한제국 황실의 위엄을 빌어 민심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통감부는 관보를 통해 구체적인 일정을 공개했다. 사진가 2명을 따로 고용해 전 일정을 모두 사진으로 남겼다. 남순행과 서순행 전 일정에 거쳐 통감부와 일본에 거칠게 저항하는 민심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구시대 권위를 상징하던 황제를 앞세운 선전극은 성공적이었다. p 252
순종이 일제의 허수아비였는 사실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순종이 행한 모든 일은 일제의 계획하에 일어난 일이니 말이다. 그런데!! 아주 놀랍게도 일제와 순종의 행보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여, 세금 74억원을 투입한 지자체가 있다. 바로. 대구광역시
1910년 한일병합조약 이후 7년이 지났다. (…) 5월 15일 열차 편으로 서울로 복귀한 순종은 6월 8일 다시 열차를 타고 부산을 거쳐 일본 도쿄로 향했다. 1912년 메이지 천황이 죽었을 때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도쿄 참배를 주장한 적이 있었는데, 마침내 그 동상 계획이 구체화된 것이다. 모든 일정은 총독부가 일본 궁내성과 함께 기획했고, 순종은 일본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순종은 일본 육군대장 정장을 입었고, 가는 곳마다 황족에 준하는 예포 21발로 환영받았다. p 253
9일 순종 일행은 부산에서 황족 깃발을 게양한 일본 군함 히젠함을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효고현 마이코에서는 방직회사에서 일하고 있던 조선 여공 120명이 나와 환영했다. 나고야에서는 동생 영친왕을 만났다. 6월 13일 도쿄에 도착한 순종은 다음날 오전 천황 다이쇼를 만났다. 배석했던 곤도 시로스케에 따르면 ‘덕담이 오가고 이왕 전화는 다시 절을 하고 물러났다.’ 옛 황제의 권위와 식민 권력의 권위를 중첩시켜 식민 조선 백성들에게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내려는 거대하고 정교한 이벤트였다. p 254
2017년 4월 대구 중구청은 순종이 걸었던 달성공원 앞 도로를 ‘순종황제 남순행로’로 조성하고 순종 동상을 세웠다. 국비 35억 원 포함해 74억 원이 투입됐다. 동상 앞에는 ‘시대상황에 굴하지 않는 민족정신’이라고 적혀있다. p 255
A부터 Z까지 일제의 계획 하에 진행된 순종의 남순행. 이토 히로부미와 모든 일정을 같이한 남순행. 거기다 아주 많은 기록이 남아있는 남순행.
대구광역시는 이런 순종의 남순행을 ‘시대상황에 굴하지 않는 민족정신’이라고 드높이고, 세금 74억원을 들여 순종의 동상을 조성했다. 대구시가 말하는 ‘민족정신’이 대체 무엇인지, 누가 나한테 좀 알려줬으면 좋겠네? 세금 74억원을 들일만큼 위대한 민족정신이 대체 뭔지 정말 궁금하네. 아 너무 궁금하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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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남한산성에서도 잠시 출연한 정명수의 이야기가 가장 인상 깊었다. 천민으로 태어난 정명수가 평생을 조선에서 살았다면 그의 이름 석자는 영원히 기억되지 않았을 것이다. 지옥같은 신분제도 속에서 분노한 정명수는 청으로 건너간다. 거기서 말을 배우고 출세해 조선으로 돌아와 복수를 자행한다. 사실 그 시절에 인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같은 한자문화권이라한들 외국어를 마스터하는 것도, 거기서 또 출세를 한다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비상한 머리와 독기를 좋은 곳에 썼으면 희대의 호걸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신분제 하의 한계 속에서 어림도 없는 얘기일수도 있고, 정명수 본인이 그런 한계를 더욱 깊이 인지해 절망했을 수도 있다. 능력 있는 사람일수록 그걸 펼치지 못하는 좌절감이 큰 것으로 들었다. 여하간에, 그는 복수에 성공했다. 조선의 여자들을 품었고, 조선의 남자들을 유린했고, 조선왕 부럽지 않은 패권을 누렸다. 만족했을 것이다. 평생을 저들의 발밑에서 살다 이제는 발 아래에 두고 있으니. 그런 정명수의 최후는 명확치 않다. 주살당했다는 얘기도 있고 폐서인됐다는 얘기도 있다. 그의 최후가 주살이건 폐서인이건 그것이 권선징악 정의구현 사필귀정일지. 정명수가 될 수 있었으나, 정충신을 택했던 이들을 조선왕조에서 얼마나 선양했을지. 배움이 짧아 잘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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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의 땅의 역사 시리즈는 나올때마다 구매하는 책이다. 글이 쉽고 재밌다. 편향적이라는 일부 시각에도 동의한다. 저자의 시각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그게 당연하고. 그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잘 읽힌다는 장점 하나가 이 책의 매력이다. 현장을 발로 밟고 문헌을 뒤져가며 취재하고, 글을 다듬어내는 작업. 지나간 시대의 역사를 반추하며 얻는 것은 좌절이 아니라 희망이자 기회였다. 아마 저자의 뜻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이번 권에서는 여러가지 의미에서 기억해야할 인간 군상들이 나왔다. 시대의 흐름에 족적을 남기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역사에 이름이 적힌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새삼 두렵다. 저자의 깐깐한 시선에서 경외를 받는 이들의 삶 또한, 그래서 다시 다가온다. 모르던 이들을 발굴해줄 때는 더할나위 없는 감사를 느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