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끔 주변에서 큰 사람을 경험할 때가 있다. 꼭 나와 관계가 있는 분이 아니라 주차장 에서 혹은 마트에서 혹은 식당에서 가끔 품위와 평온을 보여주는 사람을 경험할 때가 있는 것이다. 순간의 찰라에도 그 사람이 보여주는 말과 행동과 태도에서 생전 모르는 나도 순간의 감동과 평온을 느끼거늘 그런 분을 가까이 보고 배울 수 있다면 이는 큰 행운일 것이다. 이책은 그런 책입니다. |
|
이제는 교수님으로 부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운 한동일 교수님의 새로운 책. 교수님의 수많은 저서 중 「믿는 인간에 대하여」와 「한동일의 라틴어 인생 문장」에 이은 세번째 접한 책이기는 하지만, 마치 10여년 전부터 교수님과 대화하며 곁에 있었던 제자와 같은 마음으로 이 책을 읽어 나갔다. 한때는 인생의 가장 큰 부분이었을 사제로서의 삶을 스스로 관두고(신앙인으로서의 삶은 계속되고 있지만), 세상에 홀려 남겨진 채(정신적으로)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을 새로운 삶 또한 묵묵히 수도자의 삶처럼 살아가고 계신 교수님의 삶에 큰 존경을 보낸다. 교수님이 겪었을 수많은 번뇌와 고민, 그리고 삶의 중심인 하느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올바른 삶’에 대한 치열한 고민들이 온전히 내 마음에도 전해지는 느낌이다. 책의 부제에서도 나와 있듯이 ‘삶을 위한 성경 강독’을 마치 교리교사처럼, 거기에 더해 자신의 고민과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현실적이고도 치열한 고민을 더해 더 깊이 있는 묵상을 함께 던져 주시는 듯 하다. 마치 ‘너의 신앙이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고, 때로는 힘들어도 너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라’고 하시는 듯, ‘네가 할 일은 그저 믿는 것이고, 오늘 하루를 (하느님의 뜻에 걸맞게)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고 바로 곁에서 말씀해 주시는 것 같다. 다시 한번 교수님과 함께 성경을 천천히 묵상하며, 앞으로 이어질 내 삶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올바로 살아가는 것’인지 깊이 고민해 보기로 한다. “돌아봄과 바라봄은 한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깊어지고 나아가는 것일 겁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일어나 가는 것입니다.” (시작하는 말 中) 비슷한 말을 미사 강론 시간과 주보에서 접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는 것’이라고. 그저 관념 속에서, 상상 속에서, 이렇게 저렇게 시뮬레이션을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일어나서 나아가는 것’ 바로 그것이리라. 나의 시작을 남 탓하는 것에 둘 것인지, 내 할 몫으로 둘 것인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한처음에는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일어나서 나아가기 위해서이며, 거룩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발걸음일 것입니다. 인간이 신에게 바칠 수 있는 최고의 봉헌물은 ‘매일 매 순간 결심한 것들에 대한 반복된 실패’일 거라고요. “하느님께 맞갖은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하느님, 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 (시편 51, 19) 치부라고 생각하는 것을 드러낼 수 있을 때 또 다른 깊이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것은 크나큰 용기이며 희망이 드러나는 표지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약함을 드러낼 때 우리 존재의 깊이와 넓이의 차원이 달라질 겁니다. 누군가에게 때로는 그 누군가가 바로 나 자신일지라도 나의 치부를 그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애서 포장하고 감추는 나의 모습이 겹쳐진다. 심지어 고해성사를 하면서도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에게 실망하신 건 아닐까?’ 등의 생각이 떠나지 않았음을 고백해 본다. 내가 내 스스로에게도 감추려 하고 떳떳치 못한 채 하느님을 만나러 간다는 것은 너무 큰 욕심은 아닐까 돌이켜 본다. 우리는 삶이 주어지는 한, 숨 쉬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 인간은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할 때 불행한 것이 아니라, 숨을 쉴 수 없을 때 불행해집니다. 말씀으로 인해 불이 붙는 것은 그 말씀이 이전과는 다른 삶과 생활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침묵의 공간에서 오히려 침묵하지 않는 내면을 발견하는 것처럼 말씀은 그렇게 우리 마음에 불을 지릅니다. 예수님의 위대함은 보잘것없는 가운데서 보잘것없는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나의 삶이, 너의 삶이 보잘것없지 않다고 말하고 가르친 데 있었습니다. 나의 부끄러운 모습까지도 사랑해 주시고, 나에게 희망을 놓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본다. ‘그래 잘하고 있다’고, ‘네가 할 것은 그저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라고 말씀해 주시며 모든 순간에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생각한다. 늘 곁에 계시는 것처럼, 나와 함께 나아가고 계심을 깨닫고, 매 순간 순간을 의미있게 보내야겠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2코린 12, 10) 빈곤과 가난의 반대는 풍요와 부유함이 아니라 ‘지혜’라고 성경은 역설합니다. 인간은 지혜에 의해 충만해질 수 있으며, 부유는 그 지혜를 아는 데서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일을 추진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그 일을 완수하는 성실함과 그 일에 동기 부여가 될 ‘이상理想’을 견지하는 강인함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 옳은 일을 묵묵히 끝까지 밀고 나가는 ‘강인함’을 갖춘다는 것. 그것이 아마도 신앙인으로서, 가장으로서, 사회인으로서 내가 견지하고 잃지 않아야 함 것임을 다시금 새겨 본다. ‘마음의 돌이킴’은 안 하던 짓을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타인을 죄짓게 해서도 안 되지만, 나 자신도 죄짓게 해서는 안 됩니다. (…) ‘죄짓게 한다’라는 것이 ‘걸림이 되게 한다’라는 뜻이라면 내가 나에게, 내가 너에게 걸림이 되었던 것은, 되는 것은 무엇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내가 나다”라는 말은 내가 온전히 채워졌을 때 느끼는 충만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충만함으로 다가서겠다고 결심한 순간, 바로 그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주님, 제가 알아야 할 것을 알게 하시고,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게 해주시며, 당신 뜻에 최고로 맞는 것을 찬미하게 하시고, 당신이 귀하게 보는 것들을 귀하게 여기도록 해주시며, 당신이 하찮게 보는 것들을 저도 하찮게 보게 해주소서. 저를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게 놔두지 마시고, 경험이 없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대로 판단하지 않게 해주시며, 눈에 보이는 것과 영적인 것을 올바로 식별하게 하시고, 모든 것을 초월하여 항상 당신 마음에 드는 뜻을 찾게 해주소서. (토마스 아 켐피스 『그리스도를 본받아』 中)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혀졌다는 「준주성범」의 바뀐 제목이 ‘그리스도를 본받아’라고 한다. 읽어야지 하고 장바구니에 담아놓기만 하고 아직 엄두도 못내고 있는데, 교수님의 이 책을 읽으며 올 겨울에는 꼭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어야 겠다. 거룩함이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특별한 날이 되고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 특별한 사람이 될 때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산다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고, 완전하다는 것은 자주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뉴먼 추기경) 내가 사랑하는 존재가 선한 것, 좋은 것을 향한다면 자연스럽게 나도 내 마음을 따라서 보다 좋은, 나은 선택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누구를 사랑하는가’라는 질문과 이에 대한 답이 예수를 모방하고 따르려는 열망이었고, 수많은 수도회가 생겨난 이유이기도 합니다. 특별할 것 없는 하루하루의 일상을 충실하게 살아간다는 것 또한 하느님께서 예비하신 나에게 맡겨진 소명을 다하는 것이리라. 언젠가 주보에서 읽었던 감자 깎는 수도사의 일화를 다시 떠올려 본다. 그저 단순하고 지루하기 그지 없던 감자 깎는 일이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소명’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거룩한’ 행위로 여겨지게 됐다는 내용인데, 내가 믿고 따르기로 한 존재인 예수님을 따라 그렇게 살아가 보고자 한다. 올해의 말씀으로 간직하고 있는 “그분 안에 머무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라는 요한 1서 2장 6절의 말씀을 다시 떠올려 본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우리 자신의 모습과 조우해야 합니다. (…) 우리는 깊은 데로 가지만, 이것은 다시 밖으로 나오기 위함입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기까지는 과거에 속하려는 나와 새로운 길을 가려는 나 사이에서 끊임없는 갈등과 몸부림을 겪기 마련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신성함은 그 자체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과정을 통해 드러납니다. 나에게는 나도 모르는 신성한 모습이 있습니다. 이미 있었던 것, 있는 것, 앞으로 있을 것 가운데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서 마치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살랑이는, 보일 듯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찾는 것. 나의 용기를 시험해볼 기회로 삼아야 할 일이 바로 그 과정이 곧 ‘식별’입니다. 생각이 바뀌었다고 몸까지 바뀐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회심이 어렵습니다. 생각이 아니라 몸이 바뀌어야 하니까요. (…) 거기에서 멈추면 정말 그것으로 끝이지만, 거기에 멈추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이 아닐 수 있습니다. (…) 현실은 부족과 결핍으로 아프지만 내가 ‘은총이 가득한 사람’이라는 생각 자체는 우리를 다시금 일어서게 합니다. 수없이 무너지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보아야 하는 현실 속에서 숨 돌릴 틈을 주는 것. 어쩌면 그것이 사람을 위한 안식일이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이유일지 모릅니다. 스스로를 담금질하는 것에도 쉼은 필요한 법입니다. 아마도 성경은 끊임없이 나의 진실한 모습을 똑바로 쳐다보라고 하는 것이리라. 거룩해지고 싶다는 희망이 그저 믿음 속에서 거룩해 지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거룩해지고자 하는 마음의 변화가 선행되어야 하고, 그리고 내 몸과 행동의 변화가 뒤따라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모습을 똑바로 쳐다보고, 그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널부러져 있지 말고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그 거룩하게 되기 위한 ‘거룩한 행위’를 지금 당장 하라고 말씀하는 듯 하다. ‘거룩한’ 사람으로 존경받고 싶거든, 거룩한 행위를 먼저 해야 하고, 내 안에 있는 수많은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늘’ 거룩해야 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나를 독려하시고 있다.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태도는 ‘인간이 인간에게 신이거나 늑대이거나 둘 중 하나’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대상 자체보다 ‘그를 바라보고 있는 나’는 그에게 신인지 늑대인지, 나의 어떤 작은 부분이 내가 그에게 신처럼 느껴질 수 있도록 하는지 생각해보게 합니다. 나의 신은 내가 만들어낸 것이다. 그래서 신을 칭송한다는 것은 곧 자기를 칭송한다는 뜻이다. 균형 감각이 있는 사람은 남의 믿음을 나무라지 않는다. (카렌 암스트롱 『마음의 진보』 中) ‘원래부터 귀한 인간’이란 것은 없고 ‘그렇게 생각하고 분류하는 인간’만 존재합니다. (…) 완전함이란 예수처럼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럴 수 있어야 온전한 어른이 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남이 어떤 잘못을 하는 것을 보거든 너도 그처럼 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전에 너도 그렇게 한 일이 있다면 바로 고치도록 노력해라. 너의 눈이 남을 살피는 것과 같이 남도 너를 살핀다.” (토마스 아 켐피스 『그리스도를 본받아』 中) 그저 나 혼자만 수도자처럼 맑고 고운 사람이 되고, 내 이웃과 사회의 아픔을 외면한 채 그저 ‘깨끗하게’ 산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누군가의 아픔을 공감하고, 이해하고, 그저 들어주는 것이야 말고 내가 할 전부일 것이다. 내 말을 하기 보다, 해결책을 내가 재단해서 내려주기 보다, 그의 아픔을 묵묵히 듣고, 같이 슬퍼하고, 같이 공감하는 것이야 말로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의 길이리라. 공감하는 사람이 되고, 공감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거룩함’일 것이다. ‘샬롬’의 원 의미는 ‘온전함’ 또는 ‘완전함’입니다. 우리는 온전해졌을 때 평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 나아가 성인의 공부, 신앙인의 공부란 매일의 일상에서 ‘샬롬’을 사는 것이겠지요.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요한 13, 15) “사실 하느님은 네가 위로 없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법을 배우기를 바라시고, 너를 온전히 그분께 내맡기길 바라시며 고통을 통해 더 겸손하게 되길 바랍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 『그리스도를 본받아』 中) “확고한 목표가 없는 영혼은 길을 잃고 만다. 사람들이 말하듯 도처에 있다는 것은 아무 데도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몽테뉴 『에세1』 中 「무위에 관하여」) 인간 존재의 의미를 묻습니다. 함께 할 때 나의 실패와 너의 실패가 의미가 있고, 삶이 힘들지라도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하고자 한다면 다른 세상을 꿈꾸고 또 꿈꿀 수 있습니다. 함께 고통을 겪을 제일 첫 번째 대상은 ‘내가 나다’이겠지만, 우리는 그것을 통해 ‘내가 너다’로 이어지는 것이 십자가의 가치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함께 고통을 겪는 십자가는 공감의 장소입니다. 열리기 위해선 들어야 하고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너’보다 훨씬 부조리하고 모순된 ‘나’를 듣고 보는 것입니다. (…) 아픔은 나눌 때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아픔을 보기 시작할 때 작아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어야’ 합니다. ‘나’에 대해서, ‘서로’에 대해서, ‘우리’에 대해서.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도록 하려는 것은 헛수고이다. 다만, 무엇을 해야 할지 보는 것이 당신의 본분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이 잘 있는(지내는) 것이 내게 가장 중요합니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마치는 말 中) 교수님과 함께 긴 대화를 마친 듯하다. 이제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를 어렴품이 깨닫는 대학 입학하던 풋풋한 그 시절 청년처럼 답답한 구석이 조금은 뚫리는 기분이다. 삶의 정답은 없을 것이고, 누구의 삶이 누군가의 삶 보다 더 거룩하다고 비교하는 것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에 대해서 계속 고민하고 생각하다 보면, 진정 ‘잘 살고 있다’, ‘그래 점점 거룩해지고 있어’라고 하는 순간이 다가올 것이라 믿는다. 그저 내가 할 것은 ‘믿고’, ‘묵묵히 나의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가고’, ‘다른 사람의 감정에 깊이 공감하고’, ‘내 스스로에게 솔직해 지고’, 그렇게 ‘오늘’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리라. |
|
◈이스라엘의 구약시대 후반기에 요나라고 하는 인물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그들의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음을 선포하라고 명령하셨을 때, 그는 순종하기 싫어서 다시스로 가기로 결심했다. 그가 하나님의 명령과는 반대로 다시스로 가려고 항구로 나가 보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었고 뱃삯으로 낼 돈도 수중에 있었다. 현재 허락된 상황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고, 요나처럼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게 될 경우 “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여기에 있구나”라고 착각하게 된다. 게다가 배도 순풍을 타고 잘 나간다면 “아, 하나님은 니느웨로 가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래도 내가 다시스로 가는 것을 허락하신 것 같아”라고 자신을 위안할 것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그렇게 간다면 결국은 풍랑을 만나서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갈 뿐이다. ◈하나님은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여러 번에 걸쳐서라도 말씀해주신다. 따라서 상황을 보고 성급하게 결정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묻고 확실하게 가르쳐달라고 여러 번 구할 필요가 있다. 다만 내 안의 잘못된 동기나 불순종,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데 걸림이 될 수 있는 문제들이 있지는 않은지 끊임없이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면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내 마음 가운데 확신과 평강을 부어주시면서 길을 열어 가실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