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학을 전공했다만 『철학 콘서트』에 나오는 고전 중에 읽은 것은 『자본』과 『도덕경』밖에 없다. 그래봤자 수박 겉핥기에 지나지 않은 독서였기에 ‘읽었다’라고 하긴 뭐한 수준이다. 고전의 중요성은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다만 그걸 몸소 실감하게 되었던 것은 지난 가을이었던 것 같다. 아무리 옆에서 말해봐야 소용없고, 중요한건 스스로 깨닫는 것이라던 가장 기초적인 진리를 함께 인식했던 순간이었다. 고전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철학책들은 시중에 참 많다. 그러나 철학 입문자들에게 고전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는 책을 찾기란 쉽지 않다. 더군다나 20세기보다 지적 능력이 퇴화한 21세기의 멍청한 독자들을 계몽할만한 개론서들을 찾기란 더욱 쉽지 않다. 그리하여 이 시대 철학에 입문하려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추천할만한 쉽고 재미있는, 그래서 철학하기의 흥미를 배가시킬만한 철학 개론서들은 몇 권 되지 않는다. 강단 바깥에서 철학하는 사람 중의 한 분인 황광우 씨는 그의 사회적 존재를 대변하는 듯 날로 ‘아카데믹’해져가는 강단 철학과는 다른 지평에 서 있어 보인다. 『철학 콘서트』는 ‘철학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철학하는 지혜’로 인도한다. 기존의 개론서들은 ''지식''에 머물거나 아니면 ‘철학하는 지혜’를 전공자를 위한 아카데믹한 포장으로 꽁꽁 감싸둔 나머지 초보자가 탐구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세상에 쉬운 건 없다. 특히나 존재와 세계의 본질적 원리를 탐구한다는 철학적 깨달음을 날로 먹겠다는 것은 도둑놈 심보다. 그러나 기존의 개론서들의 난해함에 대한 필자의 불평은 글쓰기의 형식이 건조하고, 이해를 돕기 위한 예시들도 터무니없이 적기 때문이다. 백번 양보해서 개론서들의 난해한 형식성은 나름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탓에 그런다 치고, 이번에는 철학 교양서들에 관한 투정을 늘어놓기로 하자. 대개의 교양서들은 부정확한 지식을 제공하고 뭐랄까, 단순한 정보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또한 참고문헌과 인용도 거의 없는 탓에 저자의 주관과 철학자의 인용이 혼재되어 읽히는 나머지 저자에 의해 해석된 것을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음식으로 치면 가공식품인 탓에 쉬운 맛은 있지만 질이 떨어진다. 지금까지의 불평은 『철학 콘서트』에 대한 사탕발림을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해도 좋다. 뭐 그렇고 그런 의도니까. 한 마디로 이 책은 다른 개론서들과 달리 쉽고 재미있다. 고로 흥미를 배가시킨다. 또한 여타의 교양서와 달리 인용과 저자의 논변이 구분되어 있으며 더 참고할만한 책들을 소개해놓은 점도 좋다. 다만 여기서 아쉬운 점은 인용된 원전의 각주처리가 없다는 것 정도. 이 책은 책 제목에서부터 근래 잘 나갔던 ‘**콘서트’ 시리즈를 벤치마킹한 것에서 알 수 있듯 개론서라기보다는 교양서에 가깝다. 그러나 그렇다고 값싼 지식을 담은 책은 아니다. 사람을 보면 작품을 안다. 열 명의 사상가와 고전을 바탕으로 철학 이야기를 들려주는 저자의 목소리에는 그만의 뚜렷한 색채가 느껴진다. 빨간색. 그렇다. 좌파적인 해석이다. 아니, 좌파적인 해석이라고 하니 우파적 해석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파적 해석? 그런 건 없다. 적어도 이 땅에선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좌파를 오해한다. 좌파적 가치란 절대 친북적이거나 소련식 독재의 옹호에 존립하는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사회적 특권을 누리는 계층도 아니면서 ''좌익''이라는 말에서 위협을 느낀다. 『철학 콘서트』는 좌파적 가치, 즉 ''사회주의''란 조화로운 삶을 향한 태도이다. 불평등과 불합리한 현실을 넘어 모든 사람이 조화롭게 사는 대동세상을 향한 실현 가능한 꿈을 꾸는 것이다. 저자는 열 명의 사상가들의 삶을 소개하고 그들의 고전을 인용함으로써 사회주의에의 꿈의 보편성과 유익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적어도 나에게 이 책은 그렇게 읽혔다. 더욱이 현실적인 맥락을 고려한 예시들은 자칫 고루하게 여겨질 수 있는 이야기에 묘한 활력을 불어넣는다. 저자의 안내를 받으며 우리는 지금의 자본주의 문명 아래서 용인되고 장려되어온 가치들의 정당성에 대해 자기 반성의 시간을 가져볼 수 있다. 뱀 발 ) 개인적으로는 공자, 예수, 토마스 모어, 아담 스미스, 맑스 에 관한 장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한 장, 한장이 저자의 논지가 분명하고 간결하다. 고전을 압축하여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에 주목한 탓에 한 장, 한장이 저자의 논지가 분명하고 간결하다. 나는 이 책이 마음에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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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은 미지의 것에 대한 가설적 해석이다. 철학은 최전방의 참호이며. 과학은 안전한 후방이다." 윌 듀런트<철학이야기> 저자 황광우는 지난 1980년대 군부독재 시절, 부조리한 현실에 맞섰던 현장 노동자이자, 정인이라는 필명으로 《들어라 역사의 외침을》《뗏목을 이고 가는 사람들》 등을 출간하여 시대의 고민과 나아갈 길을 제시한 실천적 지식인이다. 그가 대학시절에 읽었던 《논어》《국가》《자본론》과 감옥에서의 《성경》《반야바라밀다심경》은 이 책을 쓰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삶의 무게가 그를 짓누를 때마다 그는 늘 고전을 되읽으며 삶의 지혜와 위안을 찾았다고 한다. 젊은 날에 아무 것도 모르고 읽었던 철학서와 인문서가 나에게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올지는 몰랐다. 중간에 외도로 문학에 심취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는 책은 아마도 인문서인 듯하다. 인생을 살아갈 때 공자와 노자를 몰라도 삶은 가능하다. 그러나 삶에 대한 깊이의 물음앞에서는 느껴지는 차이는 많이 틀리다고 생각한다. 논어를 읽으며 바라보는 세상과 논어를 모르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천지차이라는 생각이 요즘 드는 생각이다. 과거 현인들의 삶을 보면 그 현인들의 삶조차 평탄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다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현인들은 죽음앞에서 죽음을 초월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하지 못하느니 독배를 마시는 것을 선택하였고 토머스 모어 역시 자신의 영혼과 양심을 속이느니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한다. 그들은 과연 무엇때문에 무엇을 위해 죽음을 선택한 것일까? 우리의 유한한 생에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삶과 공존하고 있다. 그런 우리의 삶을 가치있게 진정한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이 철학이 아닐까 생각한다. 철학 philosophy라는 말이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philosophia에서 유래되었듯이 말이다... 유럽의 철학은 세계를 이해하는 보편적인 지식을 제공한다면 동양의 사상은 삶을 사는 아름다운 지혜를 준다. 서양의 철학은 기계론적 유물론에 입각한 것이지만 동양의 철학은 유기체적 자연관을 기초로 한다. 동, 서양 철학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철학이야기는 지루할 시간이 없이 펼쳐진다. 소크라테스가 무신론자이며 청소년을 타락시킨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게 되는 과정에서 멜레토스와의 설전을 통해 보여지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빈틈이 없다. 그럼에도 독배를 들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관습적이거나 일상적인 생각이 아닌 새로운 생각을 한 이유로 체포된 소크라테스는 철학하는 일을 그만두면 무죄로 해주겠다는 아니토스의 말에 " 참된 명예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 그리고 고매한 영혼에 대해서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이것이야말로 부끄러운 일 아니겠습니까? 하며 거절한다. 철학하는 자유를 포기하는니 차라리 죽음을 ... 달라 ..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슬퍼한 제자 플라톤은 정치가의 길을 접고 철학의 길로 들어서면서 정의로운 국가의 실현을< 국가> 에서 탄생시킨다. <국가>에서 그는 통치자의 사유재산을 폐지하며 부부공유제를 정치 지도자의 청빈을 위한 기본 조건을 내세우는데 이는 이상국가의 골격을 세운 것이 된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에서는 한 발 더 나아가 사회 전반에 걸쳐 사유재산을 폐지할 것을 주장한다. 이것은 <유토피아>가 정치사상사에서 획기적 의의를 갖는 것으로서 대중을 사회의 주체로 내세운 데 있다. 토머스 모어사 대중을 사회의 주체로 파악한 점에서 플라톤을 넘어섰다면, 애덤 스미스는 대중을 역사 변화의 창조자로 파악한 점에서 플라톤을 능가한다. 역사는 철인의 지혜에 의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환경을 만들고자 하는 대중의 창의에 의해 발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행복에 대한 철학적 사상은 <국부론><도덕감정론> 에서 보여지듯이 자본주의적 가치관을 넘어 진정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는 새로운 경제학을 필요로 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시대이다.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가 윤리학을 쓰고 나서 경제학을 집필한 것처럼 이 시대는 경제학을 바르게 이끌어줄 윤리학의 정립을 요청하고 있다. 소련의 붕괴로 마르크스의 사상을 몰락한 것으로 보고 있는 지금 영국 영론 조사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상가로 마르크스를 꼽았다. <철학콘서트>에서는 마르크스의 사상이 사상의 역사에서 최초로 노동을 철학의 무대에 호명한 것이 가장 큰 공적이라고 말한다.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의 돼지로 변신한 마르크스의 사상과 로빈슨 크루소의 섬에서 보여지는 노동에 대한 사고는 마르크스의 핵심 사상인 "역사유물론"으로 세계사를 바라보게 한다. 여기서 저자는 21세기는 자본주의의 강 언덕에서 사회주의의 강 언덕으로 건너는 뗏목을 띄울 시기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그만큼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과 잉여가치론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새로운 탈출구가 되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 <공자> <노자>< 퇴계> <예수><석가>의 삶과 사상의 이야기들도 아주 재미있다. 현인들의 삶을 보면 사상의 탄생배경을 더욱 잘 이해하게 되는데 난해한 사상에 앞서 그들의 삶을 이해하게 되면 사상의 이해가 더 빠르다는 사실이다. 이 책의 10인의 현인들은 인간의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였다. 그로서 그들의 사상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배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 현자들을 만난지 24년만에 이 책을 완성하였다고 하며 플라톤의 <국가>를 완독하는데 27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으며 <논어>를 완독하는데 6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인문과 고전을 읽는 일은 그만큼 사유의 깊이가 있어야 한다.<철학콘서트>는 다소 어려울 수 있는 사상을 자연스러운 문장과 중간중간 유머와 재치의 표현으로 글 읽는 재미을 더 해 준다. 철학에의 쉬운 접근을 하고 싶다면 아마도 많은 도움을 줄 듯한 철학입문서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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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현재 23세살의 대학생이다.
휴학을 두번이나 했었고
원래대로 학교를 다녔다면 난 지금 사회인이 되어 있어야 한다.
2년 간의 휴학생활 그리고 아르바이트..
여느 대학생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우리내 한국에서 대학생들은 맘 편히 공부라는 걸 하지 못한다.
학자금 이자, 생활비, 교통비, 책값 등등
이 모든 걸 스스로 충당하기 위해선
학교생활과 알바를 같이 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일을 하다 가끔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곤했다.
나는 왜 지금 일을 하고 있을까? 나는 지금 뭘 원하고 있지?
이러한 생각들이 내 머리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또아리를 틀기 시작하면
어느새부턴가 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무언가를 잡아보려고 발버둥치기도 했다.
그러나 나에게 돌아오는 건 공허함 뿐이였다.
두려웠었다. 왠지 내 삶이 누군가에 의해 움직이고 평가받고 하는게 정말 무서웠었다
아마도 모든 현대인들이 다 그러했으리라
만약 그때에 이 책이 나왔었더라면....
흔들리는 나를, 아니 자기 자신의 주체성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모든 현대인들에게
자기 자신을 다 잡아주고, 내 안에 나를 우뚝 세울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고 있는
이 책이 조금만 더 빨리 나왔었더라면 하는 독자의 작은(?)바램이 들었다.
^-^
이제 당신도 그 알 수 없는 불안감 속에서 탈출하여
나와 같이 노래를 불러봤으면 좋겠다.
콘서트에 필요한 건 다른 건 ...아무것도 없다.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나와 당신 그리고 이 책 뿐이면 된다. [인상깊은구절] 세상을 향해 의미있는 꽃 한 송이를 던져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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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불허전이라는 말이 즐거움으로 느껴질 때, 독서는 참 재미있는 추억이 되고 경험이 된다. 황광우님의 철학콘서트는 베스트셀러라는 명성만큼이나 주위사람들로부터 추천을 받았던 책이었다. 책장에 넣어두고도 읽을 책을 선택하려하면 자꾸 손이 가는걸 참았다가 이제서야 읽게 된 이 책은 재미와 즐거움, 그리고 작은 깨달음을 선물해 주었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저자의 탁월한 능력은 익히 알려져 있듯, 황지우시인의 동생이라는 그의 가족관계가 새삼스럽게 다가올 정도로 뛰어나다. 형의 그늘이 아닌 각기 뛰어난 성찰을 이루어내는 형제들의 흔적들은 부러우면서도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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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오래 꽂혀있던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두 권이나 된다. 출판사가 다르고 샀던 시점이 다르지만 둘 다 펼쳐서 몇 장을 넘기지 못했다. 원문도 아닌 번역본이라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난해한 것은 아니지만, 너무 장황하게 전개되어 도무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 글의 흐름을 잡기가 어려워 이내 읽기를 포기하곤 했다. 그러다 책장 정리를 위해 10년도 훌쩍 넘긴 어느 해에 읽었던 이 책을 집어들었는데, <소크라스테스 변명>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이제야 감이 왔다. "내가 플라톤을 처음 만난 것은 대학 신입생 때였다. 대학 입학식을 마치고 돌아온 나에게 한 선배는 대학 4년 동안 책 두 권만 읽으라는 것이었다. 한 권은 공자의 <논어>요, 다른 한 권이 플라톤의 <국가>였다. ... 물론 선배는 나에게 만만치 않은 조건을 주문했다. 국문이 아닌 원문으로 읽으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이 책의 내용보다도 더 인상적인 것은 철학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 철학을 경험한 작가의 소소한 이야기가 담긴 서문이었다. 4년이라는 긴 시간을 투자할 만큼의 가치라는 의견때문에 지금이라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논어>와 <국가>. 마감 임박의 문구보다 강렬한 끌림을 받았다. 논어는 과거 몇 번 시도하다 실패했는데.. "내가 본격적으로 공자를 만난 것은 1990년, 서른세 살의 일이었다. 이때 <논어>를 완독하는 데 꼬박 6개월이 걸렸다. ... 자연과학은 20대에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인문학은 인생의 깊이만큼만 이해된다." 단 한 번도 수개월을 투자한 적은 없었으니 논어 독파에 실패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했던 일. 과거 시도했던 시점보다 조금 더 세상을 알게 된 지금 조금은 더 이해하기가 수월해지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 더 용기가 생긴다. "인간의 가치는 그의 사상과 행동이 공동체의 선을 위하여 얼마나 기여하는냐에 달려 있다고 한다." 작가가 서문 마지막에 남긴 글이 철학을 꼭 읽어야한다는 어떤 조언보다도 강렬하게 마음에 와 닿았다. 본문에 소개된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자신의 철학 논조를 고집하느라 때로 고개를 갸우뚱하게 비 현실적인 길로 들어서니, 단 하나의 철학이 세상을 이롭게 할 순 없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여러 철학자들처럼 생각하고 고민하는 사람이 결국 세상에 이롭게 만들 수 있을지 않을까? 철학과 친해져봐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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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죽었다고 인문학자들이 말했던가. 그렇다면 과연 인문학은 무엇이며 왜 그토록 절실하게 요구되는가? 위기에 처한 사회를 살릴 수 있는 건 인문학의 부활뿐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인문학이 절실한 건 현대 사회의 삶에서 인간다움이 사라지기 때문은 아닐까. 김영민 교수는 인문학은 ‘사람의 무늬’를 뜻하는 것으로 ‘인간의 무늬를 살피고 헤아리는 공부인 셈이고, 마찬가지로 인문학의 진리란 인간의 무늬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설렁설렁 말하자면, 인간의 무늬 속에 진리의 조건을 두게 되면서 철학적 근대가 열린다.’ 라 했다. 그러니까 철학은 어려운 게 아니라 인간과 세상을 연구하는 것으로 우리의 삶과 가깝고 밀접한 관계에 있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철학 콘서트』에서 저자 황광우 역시 시대를 아우르는 위대한 철학자들을 사상을 통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에 대해 말한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석가, 공자, 예수, 이황, 토머스 모어, 애덤 스미스, 카를 마르크스, 노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름만으로도 덜컥 겁이 나는 사람들이다. 저자는 이런 마음을 아는지, 아주 친절하게 그들을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들려준다. 시대와 환경이 천차만별인데도 불구하고 현자의 이야기는 현재를 사는 우리의 삶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으니 참으로 신기하다. 인간이 있는 그 어느 곳에서나 탐욕이 끊이지 않았고 세상을 바꾸려는 이가 존재했던 것이다.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소크라테스에게도 적이 있었으니, 그것은 공권력이었다. 철학 하는 일을 그만두면 무죄로 하겠다는 재판관의 제언을 무시하는 소크라테스는 정말 껄끄러운 존재였을 것이다.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던 그의 신념은 어디서 온 것일까.
‘여러분은 덩치가 크고 혈통이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덩치만 크고 굼뜬 말입니다. 이런 말에게는 착 달라붙어 괴롭히는 등에가 필요합니다. 나, 소크라테스는 여러분의 등에인 것입니다.’ p. 38
진정 그는 아테네를 사랑한 것이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등에, 이토록 강한 신념으로 이 사회를 구하고자 하는 인물이 존재하는가? 아니, 우리는 등에를 모른 척 하거나, 죽이려는 재판관은 아닌지 두고 두고 생각해야 할 문제다.
하나를 가지면 둘로 채우고자 남을 것을 빼앗으려는 마음, 소유에 대한 감사를 잊은 채 욕심을 부리는 마음을 버리라는 석가의 가르침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을 집착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내가 너를 이만큼 사랑하는데 너는 왜 나를 그만큼만 사랑하느냐에서 시작하는 관계, 버리면 끝날 수 있는 고통을 부여잡고 있는 내 모습이 글귀에 겹쳐 나를 흔든다. 이런 깨달음을 얻기까지 석가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고통 속에서 보내야 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굳이 가지 않아도 될 길을 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세상이다. 사회의 구성원으로 관계를 맺고 살기에 우리는 수많은 이해 관계에 속해 살고 있다. 이타심처럼 보이지만 그 본연에는 이기심이 존재하고 있는 게 당연한 것이다. 해서 우리는 이중적인 삶을 살기도 한다. 한비자의 말을 들어 설명한 부분은 무척 인상적이다.
저자는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의 의식이 그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가 그의 의식을 결정한다. 인간이 어떤 사회관계 속에서 살아가느냐에 따라 그의 의식이 결정되는 것이다.’ p. 203
모든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역시 어렵고 난해하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과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더욱 그러하다. 밑줄 긋고 싶은 구절과 마음을 울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가슴에 새겨두려는 마음만 있어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괜찮다. 저자도 살아온 인생의 깊이만큼만 이해된다고 하지 않는가. (자연과학은 20대에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인문학은 인생의 깊이만큼만 이해된다. 21세기의 현대인이 여전히 플라톤과 공자로부터 인문학을 배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p. 15)
한 번에 끝나지 않고 곁에 두고 자주 펼쳐본다면 더 좋을 것이다. 우리의 생이 제대로 흘러가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사고가 우리의 인생 속으로 시나브로 스며들면 얼마나 근사하고 멋진 생이 되겠는가. |
| 이 책이 『철학 콘서트』가 아닌 『철학 패키지여행(9박 10일)』이나 『10인의 철학인과 함께 춤을』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재미난 상상을 해봤다. 흥미진지하게 마지막장까지 붙들고 있던 책을 손에서 내려놓은 순간, 눈을 감고 편안하게 음악을 감상했다기보다, 옛 성인들의 삶을 살짝 엿보고 돌아온 듯한 스릴감을 느꼈다. 그들이 들려주는 심오한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느라 몸이 고되긴 하지만 '값진 여행이었어'라는 감탄이 절로 나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의 저자는 자연스레 가이드가 되어 날 이끌었다. 철학을 이해하기 위한 여행은 혼자 떠나는 것보다 가이드를 동반한 패키지여행이 더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상가들이 그러한 주장을 펼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거나 그들의 삶을 살짝 엿봄으로써 그들의 생각(가치관)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일화들은 단편적인 이야기에 불과 했다. 그러나 가이드가 이러한 일화들을 체계적으로 조합해주고, 잘 이해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풀어 설명함으로써 철학을 소설처럼 재미있고, 흥미롭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10명의 철학자를 만나게 되는 순서의 기준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생겼다. 이 책은 소크라테스→플라톤→석가→공자→예수→퇴계 이황→토머스 모어→애덤 스미스→카를 마르크스→노자의 순서로 일정이 진행된다. 만약 이 순서가 시대순서라 한다면 맨 마지막의 노자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때문에 시대순서는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이는 가이드가 추구하는 사상 즉, 가치관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노동운동을 했다는 가이드의 이력을 통해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혹시 마르크스와 노자의 사상을 설명하기 위해 나머지 8명의 철학자들이 초대된 것은 아닌지. 그런 불온한 생각도 해 보았다. 그렇지만 마르크스의 사상이 대단하다는 것에 나 역시 동의한다. 철학의 무대에 노동을 불러들인 마르크스. 비록 10명의 철학가의 사상 중에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그의 이론을 진정으로 이해한 사회가 실현된다면, 그 것은 우리 모두가 꿈꿔왔던 유토피아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박하고 평화로운 삶을 지향한 노자. 어떤 서평에서 밝힌 바와 같이 나 역시 소박한 행복을 꿈꾼다. 따라서 21세기 유토피아라고 소개한 황 가이드의 표현에 100% 공감한다. 나 역시 물과 같은 삶을 살다 가면 좋으련만. 내가 과연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지금 우리가 철학가들과 대화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남긴 책을 읽는 것이다. 황 가이드는 패키지여행에서 옵션으로 고전읽기 시간을 추가해 주었다. 그 중에서 《국가》, 《유토피아》,《정의론》,《자본론》은 나중에 진지하게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꿈틀 솟아났다. 이 책이 고전여행의 좋은 안내자가 되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라면 이미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 어느 날 문뜩 철학으로의 여행이 떠나고 싶어지면, 난 간편한 짐과 함께 망설임 없이 한권의 책을 집을 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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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하는 나의 길..... 세상은 항상 외길이 아닌 두갈레 이상의 길이 있다. 마음과 현실이 상이한 길이라든가 남을 기만하고 이용하려는 무리들의 유혹 그런 달콤한 길. 자신이 판단의 결정을 해야 하는 세상이지만 난 항상 이해와 배려로 살아 왔다.
한땐 많은 암초에 부딛쳐 자신을 후회도 해 보고 정석을 거닐던 각오도 많았지만 불신으로 자신을 형성하긴 너무도 초라한 세상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이해나 보은을 베풀면 반회적으로 더욱더 감회하여 목적의 일들도 더욱 성실히 하려 한다는 진실의 숫셈은 속설이 돼 버린 말을 믿고 이상 하리만큼 손해와 위험을 감수하며 배려를 베풀지만 우린 사욕이나 욕망의 이기에서 벋어나지 못했다.
문제는 상황이나 본연적 사고이다. 상황은 항상 타인의 비유꺼리를 제공 하고 갖은 양심의 기만 가운데 살아가기 때문이다. 항상 준비하고 매번 주의 하여 돌다리를 건너듯 세상을 살아야 하지만 그것도 지쳐 나 자신을 잊어 버릴때가 가끔은 있다.
유혹은 방심의 틈을 노리고 주위의 헛점을 파고 드는 것이 특성이지만 그 모든것은 자신에 의지에 달렸다. 후회보다 더 한 것이 회한이 되고보니 미리 후회되는 일을 삼가해야 하는 인내가 필요하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턱도없는 권유나 특이한 조건을 내세워 자신을 유혹하는 무리들은 특히 경계해야 하는 것이 내가 아는 삶의 일종이다.
나아가지 못한다 하여 무리수를 두거나 이상적 망상을 갖는다면 다음엔 그런 일들의 공백을 메꾸어 나갈수가 없다. 어떤 후배의 기막힌 언변도 그렇다. 사업은 그렇고 그렇고 항상 각박한 기미을 보이던 그가 파라다이스의 각오를 밝힌다. 각별한 후배지만 조건을 충족하긴 너무 거리가 멀다.
정석을 빗긴 조건에 너무 나약한 플랜이다. 다음에 나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전가 할수 있는 전제이다. 바보적 헛점을 들고 종일 설득하려 노력 하는 모습이 측은하기만 하다. 익히 전적이나 행실을 알지만 마음에 두는 건 혹여 배려가 은혜나 보은으로 삼아 그의 후배가 열심히 살수 있을까 하는 전환적 바램이다.
너무도 궁색한 내가 보기엔 없음으로 인하여 나아가지 못한 오랜 수렁에 녹슨 바퀴이다. 전형적인 기만의 기미도 보이지만 참으로 난망한 결정의 하소연이다. 다시태어 난다는 것...... 그만한 인고와 노력없인 불가능한 일 이다. 자신을 난자질 하지 않고는 시련을 쉽게 넘을 수 없다.
그 후배 아픈 시련을 삼킬수 있을까? 자꾸 나의 마음엔 기웃 거리지 말라고 신호을 보내지만 여린 마음을 두는 건 삶의 반전을 믿고 싶다. 그에게도 진솔한 삶의 기회을 그리고 인생의 형식을 꼭 알려 주고 싶기도 하다. 그렇다고 다음에 내 자신의 회한에 갇히면 한참을 후회 할 건데 그러한 기미를 열어 주는 건 나에겐 너무도 경솔한 일이기도 하다.
균형을 갖춘 의미적 일도 아닌 구상적 사업의 통찰은 결국의 책임의 시비가 붙을 가능도 있고 습관적 형식의 부실한 삶을 이해치 못하는 어려움도 깃들 것이다. 뭔가의 구원이 필요하다. 나에게도 너에게도... 그럼으로 조금씩 나아가는 그런 길을 걷고 싶다.
방법은 그것이다.
함깨 구원 하는 것... 그리고 난관에 갇힌 모든 이을 구원 하여 주는 것. 갈등의 판단...... 순전히 나에 마음에 결정에 달린 일을 다음에 후회하고 싶지 않다.
정석적인 범위에 든다면 어찌 구원이 어려울까?
배려속에 순전히 불리한 게임의 자처를 행해야 하는가? 갈등, 갈등, 갈등........나의 용기로 다시 거듭 태어나면 좋을 일을....... 지금의 마음에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갈등을 판단할 방법은 없는가?
조금은 냉정히 선과 후를 구별해야 하는 것인가? 모른 채 그렇게 눈을 감아야 하는 것인가? 그렇게 다시 나의 마음처럼 내에 자신을 믿어 볼 것인가? 악행이 아닌 선행의 배려는 항상 존중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과연 세상은 무엇을 가르키려 하는 가?
생존인가? 이유적 이해와 배려인가? . . . 참으로 혼미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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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인문학책을 즐겨 봐왔지만 철학 분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 아쉬움을 가지고 있던차 10명의 철학자들의 사상을 쉽고 재미있게 정리하였다는 책이 철학부문 1위자리를 오래동안 고수하고 있는 것을 보고 약간의 흥분감까지 느끼며 첫장을 넘겼다.
그러지만 다 읽고 난후 처음의 기대와 달리 무엇인지 모를 산만함과 허전함이 느껴졌다.
소크라테스부터 마르크스같은 서양의 전설적인 철학자들과 노자, 공자로 대표되는 동양사상의 정수들, 그리고 예수와 부다같은 인류를 대표하는 종교지도자들의 핵심적인 가르침과 그들의 숭고한 삶의 향취를 이 책 한권을 통해 속성코스로 맛볼수 있었던 것은 나의 아둔한 머리를 일깨우는데에 분명 좋은 경험이었다.
그러나 뭐랄까.. 이 책에는 분명한 집필의 방향성과 전개 체계가 없는 느낌이다.
어느 파트에서는 성현들의 고결한 인생여정과 최후를 독자에게 전달함으로써 아련한 감동을 주는가 하더니... 그 다음 파트에서는 그런 느낌은 간데없고 대학 논술고사를 치르는 것처럼 복잡한 사상의 그물만을 치열하게 얽어놓는다.
소크라테스와 예수가 전자의 경우라면 애덤스미스와 마르크스의 이야기는 후자의 경우이다.
저자 자신이 노동운동가이기 때문에 자본과 노동이라는 주제를 특별히 자세히 전개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너무 장황하다. 특히 소크라테스 파트에서 인간적인 고소한 재미를 안겨주던 구어체가 뒷부분에 가서는 오히려 복잡한 사유전개중에 눈치없이 툭툭 끼어듬으로써 전체적인 통일성을 잃고 산만함을 주는데 일조를 한다.
내가 알고싶은 것과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것인가.. 그렇다면 통일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을것이다. 책을 사는 사람은 나이니까.
또한, 개인적으로 불교사상에 해박한 편은 아니지만 반야심경의 색즉시공만을 강조함으로써 불교의 가르침이 공허함에만 있다하여 불교와 노자를 비교하여 우위를 가늠하는 식의 논지는 매우 불만이다.
색즉시공은 하나의 방법론이다. 상과 집착을 버림으로써 참된 삶을 충실히 사는 것이 불교의 가장 중요한 목표이며 그것을 이루기 위한 수행과정의 시작으로써 색즉시공의 개념이 있는것이지, 공 자체가 불교의 핵심은 아니다.
이런 식의 저자의 불균형적인 시선이 군데군데 보이지만 내 스스로가 그것을 비판할 철학지식이 없으므로 더 이야기 할 수는 없다.
아무튼,철학의 바다에 처음 발을 적셔보려는 독자들에게 인류를 대표하는 10인의 성현들의 삶과 사상을 쉽게 전달하고 이를 토대로 보다 깊은 공부를 이끌어 낸다는 점에서 이 책의 의미가 있는것 같다. 그러나 이 책으로 인해 공부를 시작하려는 의지가 꺽인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같다.
마르크스 부분을 부랴부랴 건너뛰고 마지막 노자 부분을 훑어본후 책장을 덮으면서 문득 뷔페 식당이 생각났다.
뷔페는 여러가지 음식을 입맛대로 골라 먹을 수 있는 행복한 곳이다. 동서양의 음식과 육해공의 재료를 총망라한 산해진미들이 그득한 곳이다. 그러나 뷔페 식당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음식의 종류만 다양하게 많아서는 곤란하다. 조리하는 주방장의 실력도 뛰어나야 하고 중식, 일식, 한식을 따로따로 그룹별로 정리해서 손님들이 발길이 골고루 닿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면에서 이 책은 맛있는 것은 너무 많으나 다 맛보기엔 너무 산만한 뷔페식당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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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에만 있으면 임고 공부한 것 말짱 까먹고 바보가 될 것 같아서 오래전에 사두었던 책인데 왜 이제 읽었지 싶을 만큼 재미있다. 생각해보면 대학원에 오기 전에도 이렇게 재미있게 읽었을까 싶기도 하다. 어쩌면 책읽기도 타이밍이다.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한 표지의 그림이 재미있다. 예수님을 중심에 두고 공자, 노자, 토마스모어, 붓다, 애덤스미스, 이황, 플라톤, 소크라테스, 마르크스의 캐리커처가 그려져 있다. 책 한 권에 이들 모두를 소개하고 있다니 대단하다. 철학자들은 왜 그렇게 책을 어렵게 쓰는지 한 문장을 세 번씩 읽어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아 머리가 아플 때가 많다. 이 와중에 "철학콘서트"는 유명한 철학자 10명의 사상과 그들의 고전을 꼭꼭 씹어 쉽게 들려주고 있으니 잘 읽어진다. 오페라에서 유명한 노래들만 들려주는 갈라콘서트처럼 이 책은 한 권의 철학 갈라콘서트이다.
하지만 쉽고 재미있다고 해서 가볍게 읽히는 것만은 아니다. 저자 황광우님은 시인 황지우님의 동생이라고 하시니 철학자의 사상들 사이에 종종 등장하는 저자의 개인적인 생각들이 우리나라 정치, 경제 상황을 빗대어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떤 시대 어떤 상황에도 의미 부여가 가능하고 취할 부분이 있으니 철학자들과 그들의 고전은 위대하다. 다양한 철학을 재미있게 소개받는 것도 큰 선물인데 우리나라 사람으로서의 저자가 읽어주는 철학이라 더욱 재미있었다.
저자의 틀을 거쳐 접하는 토마스모어, 애덤스미스(+존롤즈), 마르크스의 사회학과 경제학이 신선하다. '고대의 노예제적 생산관계, 중세의 농노적 생산관계, 근대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이후 정보화 사회인 지금에서야 사회주의로 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어쩐지 요즘 우리나라에 불고 있는 공동체, 공유, 자연지향적 삶이 낯설지 않다 했더니 토마스모어의 '유토피아'나 노자의 '무위자연'으로 가까워져 가고 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언어는 사상이다. 서양 사상가들의 언어를 알아야 서양인들에게 좋은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동양 사상의 정수를 알아야 그들의 질문에 의미 있는 답변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인의 철학과 시심을 아는 것은 물론이다. 지난 100년 우리의 현대사가 서양의 문명을 따라 배우는 과정이었다면, 이제 우리는 서양인에게 의미 있는 사상의 꽃 한 송이를 건네줄 때가 되었다.(p.281 에필로그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