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시리즈 너무 좋아요. 위대한 작가들의 에세이는 그 시대상에 대해 잘 알게 만들어준달까요. 같이 거리를 걷고 풍경을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디킨스의 관찰력에도 또 감탄하게 되고요.그가 바라보는 대상은 아주 다양합니다. 멋진 책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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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우(Henly David Thoreau, 1817~1862)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이라고 해서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2)을 만나고자 에머슨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서동석이 에머슨의 삶의 철학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작품들을 골라 번역한 '자연'(은행나무)을 읽었다. 일단은, 꽤 난해하고 지루했다. 지난번 소로우의 '월든'을 영어본과 번역본을 동시에 읽으며 느꼈던 짜릿함과 공감, 번뜩이는 재치, 위트 등은 없었다. 역자는 "에머슨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에머슨의 철학이 관념의 철학이 아니라 삶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p. 267)라고 하는데,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역자에 의하면, 이 글에서 에머슨은 인간, 자연, 그리고 신의 원초적 관계의 회복을 촉구한다고 하고 그의 종교관은 그대로 그의 삶의 방식에 적용돼 가식적인 삶이 아닌 진실한 삶을 추구했다고 했는데 실제로 어떻게 살았는지 예시가 없고 이론만 나열되어 있어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원작자의 표현 방법의 문제일까, 번역의 문제일까, 부족한 내 인문학적 소양을 탓해야겠지... 역자의 설명으로 간신히 이해한다. " 에머슨은 생태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자연(Nature)'을 발표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숲으로 들어가 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일상의 현실에서 삶을 관조하고, 그 속에서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며 자주적으로 사는 것이 지식인의 사명이라고 보았다. 소로우가 에머슨의 사상을 실현했다고 하는 관점은 자주적인 삶의 방식이 행복이란 측면에서 가장 경제적인 삶의 방식임을 소로우가 몸소 실증해 보였다는 점에 근거한다." (p. 266). 그래도, 제1장 '자연'에서 공감하는 몇 구절 건졌다. ".....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풍경을 소유하지 못한다." (p.14) 이 구절은 소로우도 비슷한 말을 했다. "나는 내가 바라보는 모든 것의 군주다."라고. "나는 채워지지 않는 영원불멸한 아름다움의 애호가다. 거리나 마을보다는 들판에 있을 때 나는 소중하고 천부적인 어떤 것을 발견하다. ...... 하지만, 이 즐거움을 만들어내는 힘이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속에 혹은 둘의 조화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러한 기쁨을 누리는 데는 절제력이 필요하다. 왜냐면, 자연은 언제나 휴일에 입는 나들이옷으로 치장하고 있지 않으며, 어제는 숲속 요정들의 떠들썩한 모임을 위해 향기를 뿜어내고 반짝이던 동일한 풍경도 오늘은 우울한 기운으로 덮여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은 언제나 영혼의 색을 가지고 있다. ....... 하늘은 그 가치를 못 느끼는 사람들에게 드리울 때는 장대함이 줄어든다." (P. 16~17). 에머슨이 실천 가능한 삶의 이론을 발전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좌절하고 낙담할 때, 소로우는 '자연 속에 뛰어들어 정서적, 지적 원기를 회복하는 능력'으로 삶의 균형을 이룬것 같다. 그래서일까, 장례식에서의 소로우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편안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비록 소로우가 에머슨보다 일찍 죽어 에머슨이 축도를 했다지만. 그래서, 에머슨이 소로우의 스승격이고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소로우가 더 친숙한가보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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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얇은 책은 근대 미학의 출발점 하나를 담고 있다. 시인 보들레르가 남긴 미술비평 두 편, 콩스탕탱 기스를 다룬 표제작과 들라크루아론을 묶었다. 분량은 184쪽에 불과하지만, 여기서 보들레르가 벼려낸 현대성이라는 개념은 이후 발터 벤야민과 미셸 푸코를 거쳐 20세기 모더니티 담론 전체의 씨앗이 된다. 표제작의 주인공 기스는 오늘날 미술사에서 그리 큰 이름이 아니다. 신문 삽화가이자 풍속화가였던 그를 보들레르가 굳이 현대의 삶을 그리는 화가의 전형으로 내세운 이유가 이 책의 핵심이다. 기스는 화실에 틀어박혀 영원한 아름다움을 좇는 대신, 거리의 군중 속으로 기꺼이 뛰어든다. 보들레르는 이 화가를 소요객이라 부른다. 군중이 물고기에게 물이 그렇듯 그의 활동 영역이 되는 존재, 세상 한가운데 있으면서 동시에 익명으로 숨어 있는 관찰자다. 그는 흘러가는 군중을 비추는 거대한 거울이자, 움직일 때마다 삶의 온갖 표정을 담아내는 만화경 같은 존재다. 여기서 보들레르의 유명한 현대성 정의가 나온다. 그에게 아름다움은 절반이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이라면, 나머지 절반은 일시적이고 덧없으며 우연한 것이다. 바로 그 덧없는 절반, 곧 유행과 풍속과 시대의 표정이 현대성이다. 과거의 예술이 시대를 초월한 객관적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재현하려 했다면, 보들레르는 정반대를 요청한다. 예술가는 지금 이 순간의 유행 속에서, 하찮고 스쳐 지나가는 것들 속에서 시적인 무언가를 길어 올려야 한다. 그가 남긴 문장, 모든 시대는 그 자신의 예술을 요청한다는 말이 이 태도를 압축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이 대조적인 두 예술가를 나란히 놓는다는 점이다. 표제작의 기스가 대중 속으로 뛰어드는 세상 속의 인간이라면, 이어지는 들라크루아론의 주인공은 대중을 경멸하는 고독한 천재다. 보들레르는 들라크루아를 고대와 현대를 통틀어 가장 독창적인 화가로 동경했지만, 정작 자신의 미학은 기스 쪽에 더 가까웠다. 이 모순이야말로 보들레르라는 인물의 핵심이다. 그는 부르주아를 혐오하고 조롱했지만, 그들이 자신의 주된 독자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영원함을 향한 갈망과 덧없음에 대한 매혹이 한 사람 안에서 부딪히는 것이다. 이 책이 네 관심사와 만나는 지점은 여러 겹이다. 우선 앞서 네가 읽은 마네와 모더니티 계보의 사상적 출발점이 바로 여기다. 보들레르가 현대의 삶을 그리라고 요청했을 때, 그 요청에 회화로 응답한 화가가 마네였고, 바타유와 클라크와 푸코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석한 그 마네의 현대성이 이 에세이에서 이미 개념으로 예고된다. 또 하나, 소요객과 군중과 도시라는 주제는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이어지는 도시 미학의 원천이다. 거리를 관찰하고 그 표정을 기록하는 자라는 보들레르의 화가상은, 지역의 풍경과 사람을 카드뉴스와 영상으로 담아내는 작업과도 묘하게 겹친다. 현대의 삶을 그리는 화가가 19세기에 신문 삽화가였다면, 지금 그 자리에 누가 있는가 하는 물음을 이 책은 독자에게 남긴다. 정리하면, 근대 미학과 모더니티 담론의 원천을 얇은 한 권으로 통과하는 책이다. 마네에서 벤야민, 푸코로 이어지는 사유의 뿌리를 확인하고 싶은 사람, 그리고 지금 이 시대의 덧없는 표정을 예술로 붙잡는 일이 무엇인지 되묻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은 짧지만 오래 남는 물음을 건넨다. 스쳐 지나가는 것 속에서 영원을 길어 올리는 일, 그것이 보들레르가 150년 전에 예술에 맡긴 과제이자 여전히 유효한 숙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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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많음 영향을 준 자연. 다른 여러 책을 읽다보면 많이 인용되는 책이라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다 어려운 책은 아니지만 다시 한번 마음 잡고 꼼꼼하게 읽어봤을 때 가치를 더 느끼게 되는 책이다 산책하고 있지 않지만 읽으면서 마음에 산책 시간을 주는 느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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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접수게 된 책이 알고 보니 이 책이 BTS 남준이 읽어서 화재가 된 것 같은데 참 영향력이 대단하다. 어떻게 보면 선한 영향력이니 긍정적이란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자연, 자립, 보상, 경험, 운명이라는 다섯 가지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 저자를 이해하고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느정도의 배경 지식이 필요해서 그런가 모든 내용들이 다 쉽게 와닿지는 않았다.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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