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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 어둠을 겹쳐 입고 날이 빠르게 어두워진다 가지 속에 웅크리고 있던 물방울이 흘러나와 더 자라지 않는, 고목나무 살갗에 여기저기 추억의 옹이를 만들어내는 시간 서로의 체온이 남아 있는 걸 확인하며 잎들이 무섭게 살아 있었다 천변의 소똥 냄새 맡으며 순한 눈빛이 떠도는 개가 어슬렁어슬렁 낮아지는 저녁해에 나를 넣고 키 큰 옥수수밭 쪽으로 사라져간다 퇴근하는 한 떼의 방위병이 부르는 군가 소리에 맞춰 피멍울진 기억들을 잎으로 내민 사람을 닮은 풀들 낮게 어스름에 잠겨갈 때, 손자를 업고 나온 천변의 노인이 달걀 껍질을 벗기어 먹여주는 갈퀴 같은 손끝이 두꺼운 마음을 조금씩 희고 부드러운 속살로 바꿔준다 저녁 공기에 익숙해질 때, 사람과 친해진다는 것은 서로가 내뿜는 숨결로 호흡을 나누는 일 나는 기다려본다 이제 사물의 말꼬리가 자꾸만 흐려져간다 이 세계는 잠깐 저음의 음계로 떠는 사물들로 가득 찬다 저녁의 희디흰 손가락들이 연주하는 강물로 미세한 추억을 나르는 모래들은 이 밤에 사구를 하나 만들 것이다 지붕에 널어 말린 생선들이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전혀 다른 말을 하기 시작하고, 용암(熔岩)처럼 흘러다니는 꿈들 점점 깊어지는 하늘의 상처 속에서 터져나온다 흉터로 굳은 자리, 새로운 별빛이 태어난다 그러나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허름한 가슴의 세간살이를 꺼내어 이제 저문 강물에다 떠나보내련다 순한 개가 나의 육신을 남겨놓고 눈 속에 넣고 간 나를, 수천만 개의 반짝이는 눈동자에 담고 있는 멀리 키 큰 옥수수밭이 서서히 눈꺼풀을 내릴 때 - 박형준,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어둠을 겹쳐 입은 날”이라는 이미지가 나오는 첫 구절부터 눈에 띈다. 어둠을 겹쳐 입었다니? 밤은 어둠을 겹쳐 입고 온다. 새벽은 그럼 겹쳐 입은 옷을 하나하나 벗으면서 오는 것일까? 어둠을 겹쳐 입고 오는 밤은 “고목나무 살갗에 여기저기 추억의 옹이를 만들어내는 시간”이다. 왜 하필 고목나무일까? 고목나무는 가지 속에 웅크리고 있던 물방울도 제 몸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말라죽은 나무가 아닌가? 죽음이란 생명 활동이 끊긴 상황을 가리킨다. “추억의 옹이”라는 시구에 드러나는 대로, 고목나무는 지금까지 살아온 추억으로 죽음을 견딘다. 놀라운 건 그런 고목나무에도 여전히 “잎들이 무섭게 살아 있었다”라는 시적 인식이다. 고목에도 꽃이 핀다는 말이 있던가. 고목나무에 달린 잎들일수록 생에 대한 의지는 더욱 더 강하지 않을까? “서로의 체온이 남아 있는 걸 확인”하는 순간 고목나무에 달린 잎들은 생을 향한 들끓는 열정을 표현한다. 시인은 어둠에 덮인 천변을 걷는다. 소똥 냄새가 난다. 순한 눈빛을 한 떠돌이 개에 이끌려 시인은 어슬렁어슬렁 낮아지는 저녁 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키 큰 옥수수밭이 있는 쪽으로 해가 진다. 해가 지는 자리로 떠돌이 개가 사라지고, 천변을 거니는 시인 또한 사라진다. 모든 것이 어둠 속으로 스러진다. 퇴근하는 방위병이 부르는 군가 소리도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피멍울진 기억들을 잎으로 내민 사람을 닮은 풀들”도 어스름에 잠겨 시나브로 제 모습을 감춘다. 세상에 나온 모든 사물이 어둠 속으로 파묻히는 이 시간에 시인은 천변을 거닐며 소멸하는 대상들에게 무심한 듯 말을 건다. 손자를 업고 나온 노인이 보인다. 달걀 껍질을 벗기는 갈퀴 같은 손끝에 시인은 눈길을 모은다. 갈퀴처럼 거친 손으로 할아버지는 달걀 껍질을 벗긴다. 두꺼운 마음이 조금씩 희고 부드러운 속살로 변한다. 할아버지는 딱딱한 껍질 속에 숨은 부드러운 마음을 손자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일까 천변을 거니는 시인은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에서 펼쳐지는 호흡을 상상한다. 서로가 내뿜는 숨결로 두 사람은 하나가 된다. 사람과 사람이 친해진다는 건 결국 한 공간에서 숨을 쉬는 일이라는 걸 시인은 새삼 느낀다. 사람과 사물이 친해지는 방식도 마찬가지 아닐까? 어둠 속에 묻힌 사물들이 내쉬는 숨을 따라 시인 또한 숨을 내쉰다. 사물의 말꼬리가 서서히 어둠에 묻힌다. “이 세계는 잠깐 저음의 음계로 떠는 사물들로 가득 찬다”. 낮은 음으로 어둠 속 사물들은 고개를 숙인다. 밤은 휴식이 이루어지는 시간이다. 낮에 들떴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야 할 시간이 밤이다. “저음의 음계”는 곧 아기에게 들려주는 자장가와 같은 소리가 아닌가. 강물 위로는 서녘으로 넘어가는 햇살이 은은하게 비춘다. 강물이 “저녁의 희디흰 손가락들”로 연주를 하면, 모래들은 그들대로 미세한 추억을 모아 이 밤에 모래언덕 하나를 만든다. 밤이 되면 낮 동안 침묵했던 사물들이 하나하나 입을 열기 시작한다. 지붕에 널어 말린 생선들이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전혀 다른 말을 하면, 어둠에 물든 하늘에서는 “용암(熔岩)처럼 흘러다니는 꿈들”이 터져 나온다. 환한 대낮에는 무의식 세계에 갇혀 있던 사물들이 어둠을 틈타 이 세상으로 흘러든다. “점점 깊어지는 하늘의 상처”에 나타나는바, 시간이 흐를수록 하늘은 점점이 짙은 어둠으로 물들어간다. 어둠이 흉터로 굳은 자리에서 “새로운 별빛이 태어난다”. 하늘의 상처에서 태어난 별빛은 어둠에 묻힌 사람들에게 가야 할 길을 알려준다. 밤하늘에 뜬 별을 보고 자기가 가야할 길을 엿본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어둠은 세상의 모든 사물들을 품안으로 끌어들이는 대신, 하늘에는 뭇 생명들이 가야 할 새로운 길을 그린다. 땅으로 가는 길은 어둠에 묻혔지만, 하늘로 가는 길은 어둠 속에서 어김없이 빛을 낸다. 어둠과 밝음이 교차하는 게 자연이라고 말해도 상관없지 않을까 새로운 별빛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이 밤에 시인은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라고 선언한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소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소멸은 ‘옹이가 진 추억’과 다르지 않다. 나무에게 옹이는 생명의 흐름이 멈춘 곳이 아닌가. 옹이에서 한번 길을 멈춘 나무는 다른 길을 거슬러 올라가 생명을 잇는다. “흉터가 굳은 자리”에서 “새로운 별빛”이 태어난다. 시인은 가슴에 쌓인 허름한 세간살이를 하나하나 꺼내 저문 강물에다 떠나보낸다. 거기에는 “순한 개가 나의 육신을 남겨놓고 눈 속에 넣고 간/ 나”도 포함되어 있다. 떠나보낸 것들은 언제나 추억으로 남는다. 옹이가 진 추억들. 이런 추억이 아니라면 우리가 어떻게 ‘소멸’을 견딜 수 있을까? 멀리 보이는 키 큰 옥수수밭이 서서히 눈꺼풀을 내린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수천만 개의 반짝이는 눈동자”는 더욱 선명해진다.
수천만 개의 상처를 품은 하늘을 바라보며 시인은 시간과 더불어 소멸하는 것들을 상상한다. 모든 것이 소멸되는 세상에서 ‘소멸’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무언가가 태어나는 게 자연이듯이, 무언가가 소멸하는 것 또한 자연이다. 소멸을 말한다는 건 그러므로 자연을 말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소멸을 소멸로 받아들이는 자연, 정확히 말하면 사라질 무언가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을 받아들이는 자연 말이다. 가슴에 새겨진 허름한 세간살이에 집착해봤자 마음만 아플 뿐이다. 보내야 할 것은 기꺼운 마음으로 보내야 한다. 그래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 어둠에 물든 밤하늘에는 새로운 별이 뜨고, 어둠이 물러난 하늘에는 세상을 밝히는 해가 뜬다. 소멸을 인정하는 순간 새로운 생성이 일어난다고나 할까? 소멸을 이야기하는 일은 이리 보면 생성을 이야기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소멸과 생성은 둘이면서 하나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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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시는 분명 밝고 긍적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쓸쓸하고 우울하다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 것이다. 「갈대」에서 시인은 ‘커다란 항아리 속에 몸을 쪼그리고 우는 것처럼’이나 ‘이번엔 갈대의 춤 속에서 비애가 씻기고 있다’고 말한다. 「시외버스 정거장」에서도 시인의 목소리는 우울하고 쓸쓸하다. 하지만 이런 감정에 시인이 취해서 마구 뱉어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감정에 흔들리고 있지는 않지만 그 쓸쓸한 감정을 껴입은 채 서 있는 시인의 형상을 봤다고 하면 이것은 지나친 상상인 것일까. 그는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애착과 사물에 대한 연민에서 시가 발생된다. 「달팽이」에 보면 달팽이의 껍데기를 ‘자기에 대한 연민’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시인의 시선이 반영된 것이다. 사라져가는 달팽이에 대한 애착과 애정을 드러내고 있다. 박형준 시인의 언어는 잘 다듬어진, 그래서 읽는 동안 시인이 언어를 잘 다루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시인은 해바라기 씨를 생각이라고 보는데, 이렇게 사물을 바라보는 독특한 눈이 좋았다. 시인의 시세계는 여리고 미학적이었다. 여리다는 것은 시인이 가지고 있는 세계에 대한 시선이었고 미학적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이다. 어떤 소재에 대해, 그것을 전개시키는 것도 언어로 미화시키는 것도 시인은 능숙하다. 하지만 시인의 문제점은 바로 너무나 시들이 낡고 늙었다는 것이다. 예전의 기억에 얽매여 있고 과거에 대해서 거의 많은 부분을 이야기 하고 있다. 시인은 지나간 것들을 추억하고 그리워 하고 있으며 유년에 너무나 많은 것을 집착한다. 왜 그리 과거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것이 시인의 개인적인 사정에 있다고 치더라 손, 나는 개인적으로 그가 현실을 이야기 해주었으면 한다. 너무나 동떨어진 느낌이다. 아름다운 시이기는 하나, 절실한 그 무엇이 빠진 느낌이다. 좀 더 치열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의 시에는 절실한 시인의 목소리가 느껴지지 않는데 나는 그것이 과거에 얽매이는 시인의 기본적인 시세계 때문이라고 본다. 박형준 시인의 유의해야 할 것이다. 독자는 과거에 없다는 것을 말이다. 독자는 현재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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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올이 풀리면 모두 풀려 나가듯, 조그만 소리에도 잡히지 않는 시. (낮에 읽었을 때 좋은 시가 정말로 좋은 시라지만) 차라리 낮보다 늦은 밤이나 새벽에 읽는 게 나은 시. 박형준 시인의 신춘문예 당선시 <家具의 힘>이 눈에 들어 고른 시집이었다. <家具의 힘>은 다소 직접적이지만 신인으로서의 패기뿐만 아니라 '꼬집기'의 역량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게 좋았다. 그러나 막상 그의 첫 시집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를 읽고 난 후 <家具의 힘>에서 느껴지던 어떤 패기보다는 다소 '추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아픔을 어쩌지 못해 자꾸만 뒤돌아보고 있는 듯 했다. 그러므로 덩달아 나의 머리도 아팠다. 그의 내면세계에 공감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몇 번씩 반복해 읽어가며 그를 알아가게 되었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추상시'의 종류는 (쉬운 정의로!) 딱 두 개로 나눌 수 있을 듯 하다. '뭘 어떻게 써야 할 지 몰라서 난잡하게 자기 내면세계를 적은 시'와 '자기 내면의 묵은 아픔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어 고통 받는 시'로 말이다. 박형준의 경우는 후자에 해당된다 생각한다. 그의 시를 읽다보면 구구 절절한 아픔은 아니지만, 뭔가 시리도록 아픈 느낌을 받게 된다. 그의 오래된 아픔이 그의 시로 하여금 추상적이도록 만든 것은 아닐는지. 그의 갇힌 내면에 공감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아픈 척'하는 시보다야 백 번 천 번 낫다 생각한다.
<자투리 생각> 그의 시 속에는 다양하고 독특한 시선들이 흩뿌려져 있다. 이해되지 않는 시라 하더라도 좋은 이미지는 적어도 한 줄씩은 포함되어 있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상적이기 때문에 묻힌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자기 내면세계의 아픔에 연연하여 갇혀있기보다 아픔을 밝음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시안(詩眼)도 길렀으면 한다. [인상깊은구절] (생략) / 家具란 그런 것이 아닌지 / 서랍을 열 때마다 몹쓸 기억이건 좋았던 시절들이 / 하얀 벌레가 기어나오는 오래 된 책처럼 펼칠 때마다 / 항상 떠올라야 하거든 / 나는 여러 번 이사를 갔었지만 / 그때마다 장롱에 생채기가 새로 하나씩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 그 집의 기억을 그 생채기가 끌고 왔던 것이다 / 새로 산 家具는 /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만 봐도 / 금방 초라해지는 여자처럼 사람의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 먼지 가득 뒤집어쓴 다리 부러진 家具가 / 고물이 된 금성 라디오를 잘못 틀었다가 / 우연히 맑은 소리를 만났을 때만큼이나 / 상심한 가슴을 덥힐 때가 있는 法이다 / 家具란 추억의 힘이기 때문이다 / 세월에 닦여 그 집에 길들기 때문이다 / (후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