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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이곳’에서 (2023) | 밑줄
"슬픔의 ‘이곳’에서 (2023) | 밑줄" 내용보기
갑각류와 같은 단단한 껍질도 없이, 찌르면 피가 나는 얇고 보드라운 피부를 지니고서 말이다. 나는 이제야 ‘무방비’가 ‘신뢰’의 다른 이름이었음을 깨닫는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타인이 나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혹은 나의 구조 요청에 일면식이 없는 누구라도 기꺼이 응답할 것이라는 믿음. (241-242)  최은미의 <그곳>은 배우기 전에 아는 것, 약속하기 전에 지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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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각류와 같은 단단한 껍질도 없이, 찌르면 피가 나는 얇고 보드라운 피부를 지니고서 말이다. 나는 이제야 ‘무방비’가 ‘신뢰’의 다른 이름이었음을 깨닫는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타인이 나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혹은 나의 구조 요청에 일면식이 없는 누구라도 기꺼이 응답할 것이라는 믿음. (241-242) 



 최은미의 <그곳>은 배우기 전에 아는 것, 약속하기 전에 지켜지는 것, 그래서 우리가 잃어버리고 나서야 뒤늦게 찾고 있는 것에 관한, 우리의 지옥 같은 이름을 앞질러 도착한 소설이다.

 <그곳>은 재난 상황 속에서 불현듯 출현한 사람들 사이의 돌봄과 친절을 포착해 그려낸다. 그러나 소설은 이를 재난/일상, 선/악과 같은 단순한 이분법을 통해 보지 않는다. 오히려 위해/안전, 고립/연결 등의 피상적인 대립을 적극적으로 흔든다. (242) 



 공동체를 지키는 사람들이 늘 ‘사람좋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거라는 건 환상이다.

 또 <그곳>은 ‘생명 보호’가 상당히 차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계속해서 환기한다... 결국 ‘보호’되는 인간 또한 통치 권력에 의해 층층이 나뉘어 있는 것이다. (243 “최소한의 시국 감수성”) 



 이는 달리 말해 우리의 일상이 다른 존재를 가두고 격리하고 침해함으로써 유지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처럼 소설은 ‘재난’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모순들을 직시한 다음, 그럼에도 마냥 절망하거나 체념할 수 없게 하는 힘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244) 



 그러나 가장 극한의 상황에 ‘나’의 눈에는 다른 것도 보이기 시작한다. “대피소가 쾌적할 땐 데면데면 흩어져 말도 안 섞던 사람들이 상황이 나빠질수록 옆 사람들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은 취약한 사람들을 돌보고, 기저 질환자에게 약을 공급했다. 또, 만약을 대비해 응급 처치법을 공유하고, 텐트를 돌며 환자가 없는지 살폈다. ‘나’ 또한 사람들의 친절에 힘입어 탈진할 때까지 텐트를 돌고 또 돌았던 것이다. 이 장면이 감동적인 것은 겉보기에 개인적이고 단절된 것 같아도 실은 사람들 사이에 연대와 유대가 언제나 잠재되어 있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244-245) 


=> 소위 엘리트라 하는 기자들을 최경영 정보분석가는 ‘영악한 양들’이라 칭했다. 구독자 댓글에서 선정했다는데 그것을 긴요하게 물에 불리고 뜸 들여 알맞게 차려낸다. 비닐하우스에서 귀하게 자란 모범생 들은 권력에 온순하게 길들여진다는 취지에서 오늘 이 표현을 썼다. 이 글을 읽으며 양의 또 다른 속성이 떠올랐다. 추울 때 떨어지고 더울 때 붙는 우매함, 아니 이기심과 기회 만능주의가 스쳤다. 김갑수 선생님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부자였던 사람들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고 했다. 발로 걷어찰 돌처럼 본다는 것일 게다. 그 말을 다 믿지도 옹호하고 싶지 않지만 친일파 족속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않을까.

 소설에서 난데없는 곰의 등장에 임시 ‘폭염 대피소’ 체육관으로 주민들이 대피한다. 대피한 공간이 집단 수용소를 닮아 스산해질 찰나 다른 면을 비춘다. 대공황 시기The Depression Era에 나왔던 <분노의 포도>의 인류애와 마지막 보루 생명을 향한 선의가 감돈다. 사정이 있겠지만 비도 해도 없는데 우산을 쓰고 몸을 최대한 가린 청년이 팝업된다. 이 세상이 유해하다고 판단하는 순간 우리는 갇힌 사육(제물) 동물이 된다. 너무 극단적인 표현일 수 있으나 연대와 유대를 믿어야 눈 위 발자국에 발을 포개 띄엄띄엄이라도 걸을 수 있다.

 



 이 제사는 표면적으로는 죽은 곰을 위한 것일 테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처음으로 사육장 바깥에 나왔다가 사살된 그 곰뿐 아니라, 우리가 살기 위해 가두고 버리고 죽인 모든 존재들을 향할 것이다. 이들은 인간/비인간의 분할에 의해 계곡 저편에 버려졌던 개를 위해, 국민/비국민, 남성/비남성의 차별로 인하여 말리산에 버려진 한 많은 유골들을 위해 절을 했을 것이다.

 여기서도 죽은 존재를 기리는 하나의 마음이 여러 사람들의 애도를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이 가슴을 울린다. ‘나’의 절은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겉으로 촉발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을 뿐, 자신의 생존이 누군가를 죽임으로써 가능하졌다는 데 대한 슬픔이 사람들 마음에 이미 있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245)


=> 위험물 곰이 제거되자 주민들은 대피소를 빠져나온다. 그 길에서 누군가 죽은 곰을 위해 절을 올린다. 잘 가시게 인사 예를 갖춘다. 그랬더니 다른 이들이 동조한다. 손을 보탠다. 이태원 참사 진상위가 꾸려지나보다. 유가족의 절제된 언어를 접하며 그래서 아프고 더 슬펐다. 악다구니가 아닌 이제라도 진실을 밝혀 재앙이, 제발 재발하지 않기를 바람이 소상해졌다.

 나는 저 길에서 기쁨과 감사를 먼저 가려낼 수 있을까, 정화와 정제의 말의 홀씨를 나눌지 자신이 없다. 이십대 초반 이태원 공간 추억이 있어서인지 유독 참사 현장의 상점 아저씨가 생각난다. 문을 열어 청년들을 대피시키고, 비탈길에서 떠돌지 않도록 흰밥을 올렸던 의인으로 내 가슴에 박혀있다. 어디 그뿐인가, 국회 출석 발언이며 생존자에게 스카프를 둘러 주시던 그 손길을 잊지 못한다.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어

 엄혹한 비교 사회에 대조가 뭣하지만 해야겠다. 옛날 그 시절 그 국민이 아니다.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고 업데이트해 사랑 받는 윗선과 윗분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함께 사는 세상이 되어야 하지 않나. 한덕수 총리의 지각 언변 몰락이 거론되던데 뭘 위해 그러시나요.

 절 하니까 이준석과 천하람 의원을 언급(이.천.명)하지 않을 수 없다. 개실망이고 쪽팔린다. 또 억울하다며 울 텐가. 미신적 주술적 아우라, 아니면 선거보조금에 혹했나. 멀리 보고 크게 가야 될 사람들이 답답하다 못해 속 터질 지경이다. 그럼에도 또 뽑아줄 손가락들 밉다 미워. 그 스펙에 그 머리와 혀가 아깝다 아까워 



 타인에 대한 배려와 타인을 해치지 않으려는 마음. 이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우리 안에 내재해 있을 것이라는 당연한 믿음... 지금 이곳에서는 그 신뢰가 흐릿해지고 있고, 그 신뢰는 흐릿해진 다음에야 우리에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니 슬픔의 ‘이곳’에서 <그곳>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내가 의지했던 친절의 순간도, 나를 살린 것들도,

   그것들은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다. (246)


=> 공기와 기류, 정기에 생각이 머문다. 작은 선거도 선거, 보궐선거 페어플레이~

이달의 사락 s********d 2024.09.24.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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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Vampire Writes Back (2020) | 밑줄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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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뱀파이어 소설의 ‘원조’로 떠올리기 쉽지만, 신화나 민담 속의 뱀파이어가 소설로 극화된 최초의 장면에는 존 폴리도리의 <뱀파이어>와 르 파뉴의 <카밀라>가 있다... 모두 퀴어로 등장하는데, 이는 뱀파이어의 괴기성이 성적 규범에서 벗어난 타자의 재현임을 확인시켜준다. (175) => 평론글이 작성된 시기가 2020년이고 고딕소설로 석사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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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뱀파이어 소설의 ‘원조’로 떠올리기 쉽지만, 신화나 민담 속의 뱀파이어가 소설로 극화된 최초의 장면에는 존 폴리도리의 <뱀파이어>와 르 파뉴의 <카밀라>가 있다... 모두 퀴어로 등장하는데, 이는 뱀파이어의 괴기성이 성적 규범에서 벗어난 타자의 재현임을 확인시켜준다. (175)


=> 평론글이 작성된 시기가 2020년이고 고딕소설로 석사논문 쓴 게 이십년도 더 됐는데 마치 어제 일처럼 이어 붙여준다. 카밀리에, 동백꽃. 서정적으로 소설에 담은 김연수 작가가 있는가하면 오래 전부터 여성 서사의 기폭제로 쓰임이 상징적이(고도 남는)다. 저기 폴리도리가 메리 셸리 부부와 유럽여행에서 괴담을 주고 봤던 그 의사분인지 궁금하다. 난데없지만 한동훈 대표의 첫인상이 드라큘라였다. 피 빨아 먹을수록 창백해지는 잘 차려입은 악마가 겹쳐보였던 것이다.



*

 요컨대, 뱀파이어는 “계급, 젠더, 섹슈얼리티, 국가, 그리고 인종이라는 다양한 층위에서 그 의미가 중층적으로 결정된 타자”인 셈이다..

 카밀라는 제국, 인종, 젠더적 타자일 뿐 아니라, 통제 불가능한 여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성애 가부장제의 공포가 투영된 존재인 셈이다. (176-177)


=> 위의 설명에 따르면 뱀파이어는 식민주의와 인종주의의 먹잇감이 될 법한 ‘매혹과 공포’의 타자에 속한다. ‘전염’성 때문인지 모순적 “폭력의 연쇄성”을 품고 그것을 끊어내는 교란 상징으로 여성 서사에서 즐겨 쓴다.

 나는 한 대표를 기생적(자생과 반대 의미에서) 권력욕과 악의적 소문 전파자로서 드라큘라와 등치시켰던 걸까. 성적 애매함이나 크리피하고 언캐니한 부분까지 들먹이진 않겠다. 그는 윤 대통령의 심복 부하이자 체형과 연령만 다른 정치검사의 전형으로 분류된다. 임명직 법무부 장관에서 총선 지휘부, 이어 당대표 선출까지 내 눈에는 참 편하게 꽃길만 걷는 것으로 보인다. 검증된 능력 하나 없이 말이다. 너무 야박한 평가인가.

 뱀파이어의 타자성을 빌미로 묻겠다. 그는 정녕 대선 급 거물이라고 자신을 인식하는가. 그리고 이번 만찬(체코 순방 축하연이라는)에서 대통령을 들이받을 차례나 체급이 되나. 오직 그 뒤엔 조중동 레거시 미디어와 불미스럽고 시끄러운 스피커들뿐인데 싶어서다. 공동정부의 출현이 감지되던 정권 초창기부터 나는 영부인이 중년 남성들에 의해 과잉 평가 포장된다고 생각했다. 정권을 잡은 것 보면 만만하거나 어느 날 갑자기 출연 물은 아니다. 유에프오 미확인 외계 비행 물체임은 분명하나 저 형체를 떠받치는 세력이나 지지대 없이는 불가능한 대선 승리였다.

 한 대표와 같으나 다르게, 요리 조리 영부인의 정체도 미끄러지며 포획되지 않는다. 불리하거나 도덕적으로 추궁 받을 땐 여성이자 아녀자로 둔갑하기 때문이다. 외유와 잠행 줄타기를 했던 그가 이번에는 어떨지 지켜볼 일이다. 대통령실은 갖은 의혹에도 눈치 보지 않고 외조를 하겠다고 감쌌다. 빈손 외교와 외신의 망신 보도에 과연 두문불출할지, 윤한 갈등과 비등하게 희한 갈등을 띄우는 상황에서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얼마 전까지 윤동희는 삼각대로 같이 확 접어야 할 기물이었다. 정말 다른 행보가 가능할까. 검언이 바짝 붙어준다면 모르겠지만 글쎄다.



*

 이 소설 자체가 ‘남성 지식/글쓰기’라는 액자 안에 둘러싸여 있고, 이 구조 안에서 여성은 여성을 악마화하고 죽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뒤집어 보자면 바로 이 지점에서 여성 글쓰기에 내재한 불온성과 전복성을 발견할 수도 있겠다. 남성 사회가 ‘공식적 승리’를 이루고도 허락하지 못했던 것, 박사의 주석과 편집자의 검토를 거치고 나서야(어쩌면 윤색을 한 뒤에야) 유통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로라의 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카밀라>의 가장 급진적인 해석은 ‘여성의 (다시)쓰기’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178)


=> 치고 보니 영부인은 최고권력자가 되기 위해 남편의 검사복을 입은(권력 도취에 차용인 것도 망각) 것이다. 남성의 승인 없이authorized 출판할 수 없었던 업계와 시장 속성과 일부 같다. 9월 초 이준석 의원의 요상한 정치 발언에 적지 않게 화가 났었고, 두 번째 여성 대통령을 뽑았냐는 말이 불쾌했던 이유를 이제 알겠다. 비혼 여성 대통령에 찧어대던 입방아를, 애 없는 김거니 스펙트럼에서 같은 세대 사람이라는 이유로 더 심하게 모욕당하고 상처 입는 중이라는 상황 인식이 된다.

 뱀파이어물 여성 서사에서는 힘의 불균형 뒤집기라도 실험 모의된다지만 이건 당최 뭐란 말인가. 성애적, 모성애적 함정 들. ‘관계 맺기와 성적 수행’ 사이 널뛰기가 불-미스럽고 고역이다. 몸이라는 외피와 성적 집착과 대상화 도구화. 그 왜곡 상이 구차하고 끔찍하다. 역사에 전례 없는 캐릭터도 아니라지만. 사익 추구형 미인계 관심종자의 병리(베리 씩) 상태를 전면에 내건 악성 모델이다. 극장성의 뒷면이 반극장성인 건 모르는 평면적 인물이라는 점에서 남편과 유사하며 그나마 끝이 보인다. 다만 어떻게 도달reach out할지 방법 그것이 문제로다.



*

 그런데 강화길의 <카밀라>는 르 파뉴의 <카밀라>를 상당히 의식하고 변용한 것으로 보인다. 원작의 ‘카밀라-베르타’ ‘카밀라-로라’라는 두 레즈비언 커플이 ‘유진-카밀라’ ‘지우-미아’라는 짝패로 등장하는 점도 그렇거니와 서술자 유진이 카밀라와 함께 사는 동안 피가 흥건한 악몽을 자주 꾸었다고 하는 점도 원작의 로라와 상당히 닮아 있다. 더욱이 두 소설을 겹쳐 읽으면, 유진(이자 로라)이 카밀라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마저 예견된 일처럼 읽힌다. (179)


=> 소설가 강화길은 내가 관심을 갖고 지켜본 작가 중 하나다. 요즘은 전반적으로 소설 알아보기에 게을러서 과거형으로 썼다. 굵직한 상징과 곤조로 거침없으나 짜임새 있게 소설 세계를 꾸려온 똑똑한 작가다. 나는 강 소설가를 보며 과거 편혜영 소설가를 떠올리곤 했다. 과거라 함은 편 소설가도 세월 속에 소설의 템포나 구상 흐름이 바뀌었다. 문단 권력의 화두를 정면에서 맞아야 했던 세대로서 강하게 급진적으로 끌고 나가는 측면이 따를 수밖에 없으리라.

 어떤 특정 프레임 틀에 갇혀 활동 범주나 반경이 좁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모든 것에 장단이 있지만. 앞에서 양두구육 팔이가 바른말하는 척 상처주고 ‘분열 정치’ 편다고 욱했다. 나는 한번씩 정치 스피커나 활동가들이 성비로 따져 여성들이 많다면 물이 좀 다를 거라고 상상하곤 한다. 정치적으로 얄팍하게 악용만 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붙여서 하는 소리다. 뭘 다 싸워 이겨야 할 권투 링으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나보다, 라고 쓰려니 요새 여자들도 만만치 않다. 이 나라가, 이 세상이 어디로 갈지^^;



*

 이는 전염을 일으키는 뱀파이어 특유의 능력일 텐데, 카밀라는 로라가 자신처럼 될 것이며 그런 후에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 말한다. 놀랍게도 이는 유진이 카밀라와 헤어진 뒤 지우를 사랑하게 되는 것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게다가 결말로 다가갈수록 밝혀지는 ‘늘 밤에 깨어 있는’ 유진의 미스터리함은 카밀라의 이미지와 썩 잘 어울리기도 하고, 도시 괴담 속에 등장하는 ‘햇빛에 피부가 타들어가는 괴물’은 유진의 악몽에 등장하는 그녀 자신의 모습과 닮아 있기도 하다. (180)


=> 괴담의 음산함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잔인함의 황홀경’은 말할 것도 없다. 새벽에 사저 근처 편의점에 개 데리고 나온 영부인이 스친다. 자유롭게 밤에 나돌아 다니며 걍 살지 싶다. 과자와 음료, 바깥분도 알코올중독이 염려되는데 주류는 아닐 거라고 넘겨짚는다. 그런데 어떡하나 눈이 자꾸 와인 현수막에 가는데. 숨기고 가릴 수 없는 출신과 본색. 괘안는 망상 마시고 광고 전시 기획자 겸 자유부인답다 다워. 개 산책은 본인이 직접 광합성하며 하길 바란다. 겪어봐서 알 텐데 관대하고 인정 많은 국민 아닌가. 개 사과하면 끝날 개,돼지 취급 어쩌나, 60-70%가 악 력 반댈세



*

 강화길은 <카밀라>의 프롤로그에 있던 편집자의 논평만 없애버린 것이 아니라, 사건을 해결하는 남성 연대의 의례와 이를 보증하는 공식 문서 또한 삭제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카밀라와 미아 실종 사건에 대한 판결의 권한- 그 남자의 물증을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을 지우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지우는 목걸이의 진위에 대해 함구함으로써 미스터리는 풀리지 않은 채 소설은 종결된다. (182)


=> 나는 강 소설가의 열린 결말이 일종의 수라고 생각하는데 작가 본인은 다르게 말했던 것 같다. 이것저것 생각해보고 너도 그리 생각해? 묻게 해 텍스트 닫음이 또다른 열림과 하이퍼텍스트로서의 가능성을 보여 나는 긍정한다.



*

 전자의 19세기 몰락한 귀족이 가문의 위신을 타자성의 상징인 카밀라를 처단함으로써 회복하려 한다면, 후자의 21세기 남성-프레카리아트precariat는 생존의 불안을 여성을 악마화하는 이야기를 생산하는 것으로 해소하고, 심지어 이를 통해 금전적 이익을 얻으려고 한다. 그러나 르 파뉴가 남작에게 사건 해결의 결정적인 역할을 허락하면서 응분의 보상을 부여하는 데 반해, 강화길은 남자에게 어떤 신뢰도 표시하지 않는다.

 결국 <카밀라>는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않음으로써 미스터리도, 사랑도, 그리고 이야기도 계속되도록 내버려둔다. 카밀라와 미아의 행방은 여전히 알 수 없으며... 사랑이 지속되는 한 이야기는 계속해서 쓰일 것이다. 결국 강화길은 <카밀라>를 둘러싼 ‘남성 지식/글쓰기’의 액자를 걷어내는 것에서 나아가 여성의 이야기를 종료하지 않음으로써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자/쓰는 자’의 자리를 지킨 셈이다... 이렇게 계속해서 이어지도록 남겨둠으로써, 괴기성의 두려운 상징이었던 뱀파이어의 ‘전염’ 능력을 여성 서사가 계속될 수 있는 동력으로 전유하는 것이다. (183-184)


=> 신조어 프레카리아트를 통해 가중되는 생존의 불안이 상대를 제거 대상으로 롤플레이하는 양상을 지적한다. 신뢰하고 소통하지 않는 공동체는 희망이 없다. 전유라는 말 언제쯤 안 쓰는 사어의 날이 올까. 바로 전 인용처럼 소설의 양면이 좋아하는 ♪픽션에 걸맞다.



*

 우선, 소설에 진입하기 전에 ‘카밀라 수녀원’이라는 조어에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가부장제의 여성혐오 판본 중 가장 뿌리깊게 작동하는 것이 ‘숙녀와 창녀의 구별’이라고 할 때, 요녀의 이미지로 재현되어 온 뱀파이어 카밀라의 이름을 수녀원에 붙인 것이 어색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복지시설로 제공하였다. ‘카밀라 수녀원’이라는 멸칭에는 마을 사람들이 “께름칙하게” 여기는 여자들, “과거를 캐묻고 싶”은 여자들에 대한 비하가 담겨 있다.

 언뜻 모순적으로 느껴지는 성과 속의 결합은 가부장제의 왜곡된 여성 인식을 아주 투명하게 보여준다. 마치 뱀파이어 카밀라가 여성을 죽이든 여성과 사랑을 하든 가부장제 재생산을 가로막는 위협이었던 것처럼, 가부장제의 논리에서 ‘과거가 있는 여자’든 ‘수녀’든 정상 가정의 재생산을 담당할 수 없다는 점에서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다. (184-185)


=> 소설가 천희란은 아드리안 리치의 ‘레즈비언 컨티니엄(연속체)’을 서정적으로 본연의 색으로 그려나가는 작가다. 많이는 아니나 단편소설을 접할 때 받은 중복된 인상이다. 섹스와 세속의 역학 관계를, 자급자족 공동체의 탄생과 물밑 작업을 팽창적으로 다룬 소설로 기억한다. 자궁으로 축소하는 몸에 대한 반란을 종교적으로 승화시킨 자리가 수녀가 아닐까 싶다. <햄릿>에서 창녀 소굴로 극단적 (여성)혐오가 투척되나(이럴 때 셰익스피어 참 나빠~ 지극히 옛날 분이라 봐줌), 달리 써야 마땅한 자리 직이고 역사 층위다. |암호| 스톤 매트리스 확 마



*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카밀라>에서 카밀라는 로라에 의해 재현되었고, 로라의 글은 ‘남성 지식/글쓰기’의 보중과 검열에 의해 이야기로서 자격을 얻었다. 곧, 카밀라는 어머니로부터 부여받은 운명의 속박과 재연, 검열이라는 이중 구속에 처해 있었던 셈이다. 이처럼 카밀라를 둘러싼 중층 억압을 천희란은 ‘새로 태어난 카밀라의 글쓰기’로 해방하고 있다. <카밀라 수녀원의 유산>에서 서술자 카밀라는 운명으로부터 벗어난 글쓰기 주체로서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187)


=> 우리는 누군가의 몸에서 태어났다. 헬리콥터 패런츠로 유명한 한국 부모, 그중 모녀 관계는 끈적거리며 특수하다. 혈연으로 맺어지고 비혈연으로 동맹하는 관계까지 포함하면 유사 모녀 관계들로 넘쳐난다. 연속 경로이자 연속체로서의 텍스트성은 여전히 마르지 않는 샘, 연구대상이다.



*

 카밀라가 상속받은 것은 바로 여자들의 비극적인 역사가 보관된 문서고이다. 그렇다면 카밀라는 “이 거대한 저택의 유산을 어떻게 책임질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소설은 이에 대해서는 답하지 못한다. 다만 앞으로 시작될 이야기를 예고할 뿐이다...

 18~19세기 영국 고딕소설은 사회 계층/계급의 변동과 젠더 규범의 공고화 등 급변하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타자화된 존재를 가시화하고 그들의 욕망을 시험하는 장으로서 기능했다. 소설에서 재현되는 타자의 괴물성은 불온한 역량을 담고 있기도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통제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고딕소설은 그간 숱하게 반복되어왔던 여성성 재현의 스테레오타입을 뒤집고, 이성애 가부장제를 비롯한 지배 질서를 심문하는 시험대로서 기능하는 듯하다...

 강화길이 ‘전염’이라는 괴물의 능력을 끝없이 이어지는 여성 서사의 동력으로 전유한다면, 천희란은 ‘전염’을 대물림되는 가부장제 내 여성의 운명으로 보고 ‘어머니 살해’를 통해서 이를 끊어낸다... 강화길이 ‘전염’을 통해 여성의 이야기가 끝이 없도록 미해결된 잔여를 남기고 있다면, 천희란은 ‘전염’을 끝냄으로써 여성 글쓰기를 구속하던 것들을 걷어낸다.

 특히 이들 소설의 서술자가 남성 지식/글쓰기의 장에 포획된 여성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집행과 해석의 주체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고딕소설이 지배적 규범에 대한 가장 위협적인 위반의 욕망을 담아내는 용기라고 할 때, 이는 각종 성차별의 규범을 벗어나고자 하는 지금 여기 여성 서사에 매력적인 시험의 장소임에 틀림없다. (188-189)


=> 맺음말 ‘고딕소설이라는 시험대’가 하도 근사해 하나도 버릴 말이 없다. 엑기스로 이것만 읽어도 배부르겠다. 사실 마음이 무겁고도 가볍다. 이 삼십년 전 내 고민을 아직도 진행형으로 살고 있는 인생후배들. 위에서 강 소설가는 유채화에 천 소설가는 수채화에 비유하다시피 했다. 그런데 과격한 고리를 부리는 작가는 후자다. 무슨 연유로 나는 어머니 살해를 통과 의례쯤으로 넘겼을까. 어떻게 묘사하고 푸는지에 따라 어감과 논조가 다르다고 믿나보다.

 사실 젊은 남성들 입장에선 있던 거 뺐기고 (떠)밀리는 것 같아 억울한 면이 없지 않을 거다. 역사의식을 갖고 성찰하되 과거에 연연해 현재를 망치는 불상사는 없으면 좋겠다. 여성들이 무시무시한 철벽 차단어가 없어도 되는 시간이 오길 간절히 바란다. 한편 여성성이라는 전형을 깨고 나오기, 갇혀 있지 않고 자유롭게 향유하기, 그런 시간으로 옆으로나마 나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강유정 의원을 잇는 호기로운 평론가가 기분 좋게 너울댄다. ♪마지막 시

이달의 사락 s********d 2024.09.23.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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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론의 품격 (2015) | 밑줄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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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말마따나 선풍기를 한낮 발에만 쐬는 계절이 돌아왔다. 정지된 바깥활동 기간을 통해 안 사실이 나는 문학을 읽을 때 문학 세계에서의 복잡 다단과 심층 분석은 즐기지만, 일상생활은 지극히 단순 명료하기 지극히 바라는 1인이다. 머릿속은 한없이 자유롭고 여유로운 세상 부자이고 싶다. 그런 내가 음모론을 좋아한다는 홍사훈 기자와 공장장 따라, 뱀파이어 영화 즐긴다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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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 말마따나 선풍기를 한낮 발에만 쐬는 계절이 돌아왔다. 정지된 바깥활동 기간을 통해 안 사실이 나는 문학을 읽을 때 문학 세계에서의 복잡 다단과 심층 분석은 즐기지만, 일상생활은 지극히 단순 명료하기 지극히 바라는 1인이다. 머릿속은 한없이 자유롭고 여유로운 세상 부자이고 싶다. 그런 내가 음모론을 좋아한다는 홍사훈 기자와 공장장 따라, 뱀파이어 영화 즐긴다는 (이)태민 따라 그 주변을 쪼매 흘깃거린다.

 한국정치를 알기 전 정치판이, 정치계가 내로남불과 적반하장을 밑반찬으로 내는지 몰랐다. 짝과 격이 맞지 않는 페어링도 우후죽순 난무하다. 정언과 경언에 검언까지, 이 삼십년 방둑이 무너져 쏟아지게 생겼다. 언젠가 넋두리 삼았듯, 소설가의 고유 영역인 문학적 상상력과 창작 지면이 법기술자들=법꾸라지들에 의해 오염이 심각하다. 정준희 언론학자는 법문 자체는 오랜 기간 성문화된 형태물이니 존중하자고 하나 쓰는 자의 입과 글이 괴상('기이')하여 소름 끼치다 못해 미치고 팔짝 뛰게 생겼다, 점핑점핑 한 턱턱턱 스타카토 에브리바디-

 지킬 박사만 두 얼굴이 아니다. 그나마 다중 아니고 양면이면 다행이라는 시대에, 음모론도 두 얼굴의 양면을 띤다. 정부가 가짜뉴스 선동이라며 ‘분란으로 호도’하지 말라는 반국가세력들이 있다. 반면 ‘진실에 합당한 대답을 요구’하는 음모론 제기가 불거진다. 작용과 반작용의 시소 권력 게임. 일례로 민주당 김민석 수석 최고위원이 발의한 법안이 후자에 속한다. 충암고 세 사람이 왜 모였는지 ♪말해줘 사실을 말해줘 하는(여론이 들끓는) 거다. 시행 령과 계엄 령을 혼돈하는 분도 적지 않을 것 같다. 섬뜩한 말을 일상어로 앉힘도 참 별로다. 일단 계엄령이 내려지면 국회가 마비된다. 믿기지 않으나 그럴 수 있는 요지경에 다다랐다. 뭐 아직 똥인지 된장인지 더 잡셔봐야 하는 윗분들도 있더라. 갑자기 간접화법ㅋ 카더라 아닌 내 입수 정보가 있겠냐만.

 김희선 작가는 이름을 익히 들어 알 고 는 있 다. 그를 매개로 최근 핫한 음모론을 짧게라도 정리할 수 있어 유익했다. 뱀파이어, 엠파이어.. 둘다 가지고 노는 공동정부에 짜증 이빠이데스. e bye death 요새 이러고 놂. 흑마술의 주문이 걸린 나라꼴이 어쩔 수 없는 언어 테트리스 현상을 자초한다. 개인적으로 언어 ‘파동’을 믿기에 이럴 때일수록 정신 바짝 차리고 유심히 벼려 써야 하는데.. 나중에 보면 유행 지난 화장법처럼 멍~미 하겠지 싶다. 그래도 우격-다짐 괜히 멋부려본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진실일 수 없으므로 ‘나’는 최선을 다해서 음모론을 제기할밖에(59).”

 이지은 평론가의 글은 2015년산이며 더 지독한 ‘암군’(by 전우용)의 출현으로 헬조선2가 열릴 거라고 상상도 못했던 우리다. 김거니 여파~인가 ‘상관’도 연관, 연루, 알 바 말고, 상사 부하 직속-서열로 보게 된다. 오랜 축적 데이터주의라 짜깁기 누더기라 할지라도 부수거나 떼어내기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만해, 피곤해”(김어준 육성 지원^^) 거니대란 게이트 열려라 참깨. 김거니 픽 공천이 국정농단은 아니라고 잡아뗄 테니, 그 피로감을 에둘러 탬버린 흔들 듯 나라를 흔드는 애라고들 한다. 뭔 상관 타령ㅋ에서 수입산 쇠고기 파문도 스치고, 미국의 부정부패를 까발린 도축 정육 르포도 겹쳐 지혜로운 작가라는 믿음이 싹튼다. 지혜롭다고 함은 스마트가 질리게 남발돼 똑똑함조차 미진해서 그리 썼다. 때마침 아껴 써야 말도 효력이 있다는 주의ism.

 김 소설가가 ‘정신적 테러’도 미리 내다본 듯해 명민함을 더한다. 지금의 이스라엘이 나쁨이 드러나기 전의 이야기이긴 하다. 밥벌이라는 시지프스의 애환과 고충으로부터 자유한 자 거의 없다('겁없다')하나, 거듭 그가 치르는 값이 지나치게 큼이 서럽고 눈물겹다. 가수 비 채널에서 큐레이터가 미국의 레몬 속담을 들어 ‘눈눈이이’ 즙 넣기를 말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입에 담을 수 없는 온갖 가해를 당하는 제1(야)당대표. 대통 주변이 구태의연한 기득권의 베를린 장성 같다. ‘응분의 대가를 치’를 날이 올까. <어느 멋진 날>에서 작년 시월이 수면 위로ㅠㅠ 경기 일으키기보다는 시월의 어느 멋진 날의 마음가짐으로 임하자고 주문 건다.

 인용의 끝 두 줄은 김 공장장을 비추는 것 같다. 생각난 김에 <알릴레오 북스> 김어준 편 2부랑 ‘The살롱’ 금주 방송 봐야겠다. 봤고 소감을 남기자면 총수와의 분리불안을 호소하면서 ‘다뵈’ 빈자리를 ‘알북’이 대신함에 보상reward이라며 기뻐하더이다. 딴지일보, 나꼼수, 뉴스공장까지 26년 된 브로맨스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파토스(열정), 로고스(규칙), 에토스(신뢰) 삼박자를 갖춰 알흠다웠다. K-리그 글쟁이라는 유 작가의 낮춤과 옜다 잘생긴 천재로 높임에 흐뭇해들했다. 만수무강 기원과 함께.

 ‘더살롱’에서는 돼지머리 발 상 전투식량 식탐을 원초 기억과 미각에 사로잡힌 구순기 9수로 연결지었다. 아무데나 갈기는 개 같은/개만도 못한 개사랑 놀이와 행복 포르노(내 지음^^)에 국민은 상처 입는 중이다. 누구도 사랑 못하는 맹-추, 쑥‘맥’(by 유영만)의 시혜성 관계 추구에 놀아날 국민이 아니다. 엽기적으로 자애 로운 부부 상, 개의 피에타(by 전우용)에 ♪다 돌려나라는 말밖에 안 나온다. 


* * *

 

 음모론은 문제 상황의 책임을 용이하게 전가하고 회피하도록 기능한다(리처드 호프스태터). 다른 한편, 음모론은 현사회의 진실성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민중적 표현 양식이기도 하다(마크 펜스터). 지금 이곳에 던져진 수많은 답변에 대하여 음모론이 끊임없이 출몰하는 것은 이를 증명한다. 음모론은 진실에 합당한 대답을 요구한다. (57)

 

 음모론은 본질적으로 이야기다. 그것도 매우 까다롭고 매력적인 이야기다. 그럴듯하면서도 예상을 벗어나야 하며, 기승전결의 잘 짜인 플롯도 구비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진지하고 실증적인 추적 끝에 기상천외한 결론에 도달하는 극적 반전도 갖추어야 한다. 그것은 진실일 필요는 없으되, 진실이기에 합당한 것이어야 한다. 품격 있는 음모론이라면 말이다. 그렇다면 다시 묻는다. <라면의 황제>야말로 음모론의 품격을 묻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품격 있는 음모란 이런 것이라며 손수 보여주면서. 2015년 음모론의 왕국인 이곳에서. (58)

 

 카페트가 (페르시안) 진품인지 가품인지, 라면의 황제가 누구인지는 중요치 않다. 카펫이 진품에 버금가도록 아름답다는 것, 라면의 황제를 통해 라면의 신화를 만들어가겠다는 것. 이것이 정말 ‘상관’해야 할 무엇이다...

(김 작가가 소설에서 제시한?) ‘음모론적 독법’에 따라 나는 어제저녁 당신이 구매한 포장육이 사실은 외계인 고기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물론 나의 음모론이 사실일 리는 없겠다. “하지만 그게 뭔 상관입니까?” 우리가 ‘상관’해야 할 일은 그것이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컨베이어 벨트에 따라 생산되는 제품쯤으로 소비하고 있다는 것 아닌가...

 시간이 흐른다고 상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며, 반복된다고 고통이 휘발되는 것은 아닐 터. 이스라엘 총리가 당한 정신적 테러, 즉 습격 장면의 무한한 반복은 특별한 형벌이 아니라 상처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그것을 함께 살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음모론이란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었던가. 진실에 합당한 것은, 어떤 인간도(적군일지라도) 가족을 잃는 것에 같은 무게의 슬픔을 느낀다는 공감. 그러한 공감이 있다면 현재의 비극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는 희망.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삼류 기자의 가십은 품격 있는 음모론이 된다. / 음모론은 유령처럼 출몰한다. 존재도 비존재도 아닌 유령처럼. 진실도 거짓도 아닌 이야기들이 합당한 진실을 추궁한다. 음모론의 상상력은 우주를 헤매고, 신비주의의 언저리를 휘돌아 지구 반대편까지 나아간다. 긴 여정 속에서 <라면의 황제>는 황당하고 발랄하게 그러나 진지하고 유쾌하게, 우리 삶에서 그래야만 하는 것들에 대해 묻는다. (60-62)


인생 시~답지 않아 삼행 시  
ㅎㅎㅎㅎ
이달의 사락 s********d 2024.09.2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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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병의 사회적 형식과 돌봄의 탈가족주의 (2023) | 밑줄 위주
"감염병의 사회적 형식과 돌봄의 탈가족주의 (2023) | 밑줄 위주" 내용보기
고무줄 새총처럼 쭉 잡아당겨 뒤로 갔으니 이제 앞으로 푱하고 솟아오르자. 지겹다. 김건희에서 떨어져 극적으로 도약해버리자 한국.   (최경영)  하룻밤 사이 (밤)고구마 삶기 좋은 계절로 넘어왔다. 불과 몇 년 전 일인데 까마득하고 새로이 상기되는 구석이 다분하여 날씨도 소설도 시간차를 두고 다시 옴이 경이롭다. 세상 암담한 밤을 지나 어쩌면 이상한 공동정부를, ‘공동 운명’
"감염병의 사회적 형식과 돌봄의 탈가족주의 (2023) | 밑줄 위주" 내용보기

고무줄 새총처럼 쭉 잡아당겨 뒤로 갔으니 이제 앞으로 푱하고 솟아오르자. 지겹다. 김건희에서 떨어져 극적으로 도약해버리자 한국.   (최경영)

 



 하룻밤 사이 (밤)고구마 삶기 좋은 계절로 넘어왔다. 불과 몇 년 전 일인데 까마득하고 새로이 상기되는 구석이 다분하여 날씨도 소설도 시간차를 두고 다시 옴이 경이롭다. 세상 암담한 밤을 지나 어쩌면 이상한 공동정부를, ‘공동 운명’ 팬데믹을 거치며 확인한 시민의식 위에 쌓음이 다행이자 천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경제가 살고 활기가 돌아야 나라가 산다. 그런 점에서 공공 자원 인프라를 더불어민주당대표 이잼이 거론하는 거일 테다. 위의 최 정보분석가의 제안대로 이미 있던 낙인과 혐오 정치 극대치하는, 권력 질서의 실체를 바로 알아 제.대.로.살.고.싶.어.

 사는 온도차와 살림 격차는 있어 왔고 속 까듯 탈탈 털어보는 시간이 끔찍하지만 생선요리를 하려면 회 뜨기((유시민낚시아카데미 파~동)) 해부가 불가피하듯이 잘 건너가면 좋겠다. 그런 바람 때문인지 운좋게 읽었던 소설에 대한 진심 어린 분석이 찰지고 끈-덕지게 다가온다. ‘바이러스의 인간화’ 표식들과 ‘도덕성에 대한 심문’이 판을 친다. 듣고 싶은 말을 해갈해주는 해소(제)는 언제든 반갑다. 청과물과 떡집도 그제 어제 쉬어가는 긴 연휴가 힘듦이 아니라 숨 한번 크게 쉬는 이완기가 되었으면 한다.

 (전통)시장을 매일 횡단하지만 식품 구입은 마트에서 주로 한다. 일요일은 여름 끝물 (찰)옥수수 데이로 점찍고 만원을 들고 나섰다. 보기 좋게 꽝- 돌아오다 반찬 떨이를 만났다. 유영만 지식생태학자가 말하는 체험 아닌 경~험이라 우기며. 나물 반찬 아니면 마트에서도 사지 않는 반찬들이지만 내겐 만원이 쥐어져 있었다. 여섯 개, 양도 푸짐하고 꼬꼬마 시절 할아버지-할머니 사이에서 맛들린 입맛이 되감겼다. 두그릇 비움은 안 비밀. 까마득히 잊고 있던 짭조름함의 끝.

 계산하며 다음에 사먹게 묵사발은 얼마냐고 물었다. 오래 오래 전 가족이 입원 중일 때 병문안 온 사람 편에 먹었던 ‘살겠는 맛’이 순간 묻게 했다. 삼천 얼마인데(마스크에 가려 끝말 몰것음) 삼천원에 가져가라 하신다. 수중에 만원뿐이라 다음에 사먹겠다고 하자 다음에 달라 하신다. 서로 다음에- 실랑이 하다가 내 발품 팔아 데려왔다. 몇천원 장사에서 그냥 가져오면 쓰나 싶었는데 할아버지는 다음을 기약하셨던 것 같다. 간장을 넣었으니 육수에 타먹으라 하셨는데 그게, 완전 내 스타일 비법 소스라서 남김없이 투여했다. 묵을 비롯해 오이와 당근도 굵직 길쭉- 마트에 길들여진 나지만 시장과 어르신의 품과 정서에 잠시 여름 밀 물 든 시간이었다.



 때가 때인 만큼 오고 가는 말이 폐부를 찌르더라. 관절 통증이 있는[바이겔 추천] 남-편 멀쩡해보여도 은근한 고통이 따르니 말이라도 넣으라 했다가 된통 혼났다. 미스터 스트레인저와 살을 맞대며 자식을 낳고 사는 자체로 대단한 거라고, 의무든 뭐든 처리해야 하는 서비스가 징글맞다 했다. 나의 대답은 아라따구 나는 하루도 못 참지, 이왕 사는 거 그렇다는 거지 쭈그림 자체였다. 그러다가 조카들이 자식을 낳고 사는 엄마와 아닌 이모의 차이가 별반 없다 했다. 이모가 살펴준 지난 감사함과 미처 그러지 못한 아쉬움을 말해 뭉클했다. 요 녀석들도 엄마가 되면 생각과 말이 바뀌지 않을까. 살아봄, 즉 경험이 허하는 고유 권한과 발언이 있으니까.

 명절 연휴 <외로움의 습격>을 읽겠다고 선포했으나 제목 때문인지 저만치 두고 지냈다. 흥미와 재미와 의미를 골고루 선사할 책이 분명함에도 손이..^^; 아직 만날 때가 아닌가보오, 다음에? 핑계를 댄다. 어느 정도 거리두기가 독서를 부른다, 아니 돕는다. 명절 낀 간절기, 가족주의와 성별 분업을 ‘문학적 상상력’으로 짓고 차림이 더 당김을 어쩌겠는가. “그이들과 더불어” 성장 확장, 숙성 발효.. 민들레 홀씨처럼 푸른버섯의 마술이 빚어지고 향 퍼지니

그리고 어차피 열차에서 내릴 수 없다면 슬기롭게 가급적 즐길밖에 없다. 아니면 숨쉼이 서로 고역이니까. 윤수영 아나운서의 휴가에 덩달아 클래식 청취도 푹 쉬어가며 그 자리를 데뷔 30주년 <딴따라 JYP>가 대신하고. 잘 들리는 말과 글만 쫓아도 인생 모자라. 누구나의 인생은 인디(독립)영화 같은 면이 있고.. 전에도 말했듯 말과 딸은 모양이 비슷, 헤헤 모라니


* * *


 코로나19의 세계적인 유행이 진행되는 중에 유럽과 중국 등 몇몇 국가에서 도시 봉쇄 정책을 시행했던 점을 기억하면, 카뮈의 ‘감옥살이’ 비유[<페스트> 원제가 <수인>일 뻔한 사연]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하겠다... ‘자기 격리’ ‘집콕 생활’로 마련된 ‘사회적 거리’는 지역공동체 대신 ‘자가’와 ‘가족’을 생존의 기본단위로 묶었고, 이에 각자의 ‘집’은 시민 정신의 실천과 통치 질서에 대한 순응이 교차하는 기묘한 장소가 되었다...

 열린 도시는 ‘의인화된’ 바이러스가 활보하는 위험한 장소로 인식되었고, 따라서 이곳에서 ‘우리 시민들’이라는 집단적 주체는 오직 ‘그 적들’에 대한 대타항으로 성립되었다. 생존이든 실존이든 인간의 삶은 주로 ‘안전한 집’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막 통과해온 디지털 시대 감염병이 만든 삶의 ‘형식form’이다...

 이렇게 감염병의 새로운 형식은 구체적인 삶의 국면에서 기존의 지배 질서와 착종되어 우리 삶을 강제했다. 팬데믹의 한가운데에서 생존주의에 밀려 논의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이제는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하지 않을까. 미래를 과거의 반복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146-148)

 

 <여기 우리 마주>의 ‘나’는 홈공방을 하는 동안 살림, 육아, 일 모두를 해내기 위해 분투하면서도 집을 공방으로 만든 데 대한 미안함도 가져야 했다. 그러니 ‘나’에게 감염병은 전혀 새로운 종류의 위기로 체감된 것이라기보다 이 부대끼는 노동과 죄책감 위에 얹힌 것이었다. 이도 저도 아니고, 어느 것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는 듯한 기분은 매우 익숙한 방식으로, 그러나 보다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차원에서 ‘나’를 덮친 것이다. (149)

 

 그러나 진짜 비극은 그와 같은 ‘업무 수행’으로 연출되지 않는다. 사적인 치부가 ‘역학조사’라는 이름으로 드러나고 심문당할 때 그것은 수치가 되고, 수치는 직접적인 폭력 없이도 매우 효과적으로 주체를 위축되게 한다...

팬데믹 기간 동안 특정 종교 시설이나 클럽 이용자에 대한 혐오가 폭발했던 것을 상기한다면, 방역을 명분으로 도덕성을 심문하는 것이 그저 ‘상상’이라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방역을 앞세운 통치 질서는 우리에게 얼굴을 가리라고 명령하지만, 동시에 확진자에게는 그 적나라한 민낯을 드러내라고도 한다. 그리고 그 명령은 매우 쉽게 사적인 삶까지 파고든다. (153)

 

 사람들은 병원 문을 막 나서는 ‘나’에게 병명을 묻더니, 이어서 치질이나 불안증, 스마트폰 중독 등 개인적이고도 일상적인 병증까지 캐물으며 그것을 과도하게 도덕성으로 연결 짓는다. 이는 팬데믹 시국에 만연했던 불안과 억측을 풍자하는 장면인 동시에 그 불안과 억측에 소설적 상상력이 어떻게 대응하는지 귀띔하는 두 개의 힌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마주>는 ‘나’의 깊은 곳에서 깨어난 어떤 것, 곧 ‘나’가 해결하지 못하고 묻어둔 어떤 것과 ‘마주’하는 서사라 할 수 있겠다. 물론 그 ‘어떤 것’은 전염성이 있는 탓에 이 소설은 ‘나’의 문제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154-155)

  

 개념에서 알 수 있듯 면역은 근본적으로 자기self와 비非자기self의 구분을 전제한다. 따라서 자기동일성을 구축하고 타자성을 변별.배제하는 면역 개념은 인식론적.정치철학적 문제와 유비적으로 이해되어 왔다... 즉 법적 소유권이든 정치적 국민국가 형성이든 혹은 의학적 차원이든 근대성에는 ‘타자의 부정을 통한 자기 보호’라는 면역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잠복성 보균자는 전파자냐 아니냐 하는 이분법적 질문을 비껴난다. 상태에 따라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부연하자면 대한민국 국민 서너 명 중 한 명이 잠복결핵보균자이며, 이들 가운데 5퍼센트 정도가 활동성 결핵으로 전환된다고 한다. 더욱이 소설의 ‘나’처럼 자신이 보균자인지 심지어 과거에 결핵을 앓았는지 모르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그렇다면 잠복성 보균자는 질병을 타자의 침입이 아니라, 자기와 비자기의 관계 리듬에 따라 비/활성으로 전환되는 ‘상태’로 인식하게 하는 존재라 할 수 있다. 발병하지 않은, 언제 발병할지 모르는, 발병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잠복성’은 피아를 구분하는 인식체계를 교란하는 것이다. 곧, 잠복성 보균자는 타자를 ‘식별’할 수 있다는 전제가 기실 불완전한 환상이라는 걸 드러낸다. (157-158)

  

 만조 아줌마는 과거 이웃의 아이인 ‘나’를 돌봐줬던 것처럼, ‘나’의 딸에게도 마음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술항아리를 보면서 ‘나’는 과거 만조 아줌마가 겁에 질려 있던 자신에게 해준 말을 기억해낸다...

 열두 살의 내게 그 말을 들려주었다. 나리 니 탓이 아니라고. 너를 그렇게 둬서 미안하다고...

 ... 그 시간을 짧게나마 경유했다는 것이, 그것이 고마웠다.” 만조 아줌마의 양조장은 서하와 수미가 그들을 염려하는 사람들 ‘속에서’ 서로를 ‘마주’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 시간은 그녀들의 문제가 오직 그녀들‘만’의 문제로, 고독하고 외롭게 헤쳐가야 할 문제로 주어진 것이 아님을 넌지시 알려준다. ‘나’ 또한 수미와 서하를 위해 “만조 아줌마가 예전의 나에게 그런 시간과 공간을 내주었던 것처럼” 자신의 공방을 기꺼이 열어두고자 한다...

 너뿐이 아니라고, 너만이 아니라고, 가족이어서 해줄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받아들이라고, 가족이 아니어서 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걸 믿어보라고, 가족 아닌 그이들이 저기 있다고. (159-161)

  

 이질성의 인정과 공동성의 확보를 ‘돌봄의 탈가족주의’에서 시작하길 제안하는 <마주>는 어쩌면 최은미 소설세계의 전환을 예고하는 텍스트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마주>가 질병, 고립, 노동 등 삶을 고되게 하는 것들에 대항하는 힘을 사람들 ‘사이’에 오래전부터 ‘잠복해왔던’ 것에서 발견해내고 있어 작가가 인간 공동체에 대한 신뢰를 재발견하는 것으로도 읽힌다.

 재난적 상황을 다룬 근작 <그곳>에서도 확인되듯, 팬데믹, 기후 위기 등 압도적인 규모의 재앙을 직면했을 때, 작가가 눈을 돌린 곳은 ‘늘 있어왔던 것’, 그러나 ‘인지하지 못했던 것’들이다. 이를테면, 이웃의 아이를 연민하는 마음, “트럭이 나를 보면 멈출 것이라는 걸 내가 알”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 같은 것.

 역시 중요한 건, 이 소중한 (돌봄)마음이 실은 너무 사소하고 당연한 것이라 혈연이나 국적 혹은 그 무엇으로 사람을 나누고 배제하기 이전에 이미 저질러져(commit; 내 첨가 물^^)버린다는 것이다. <마주>식으로 말하자면, 그것이야말로 평상시에는 알지 못했던 인간 공동체의 면역이다...

 사과는 그해의 햇빛과 바람에 따라 각기 다른 산도와 당도를 지녔을 테고, 따라서 매년 술도 다른 맛과 향으로 익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한 항아리의 술은, 혹은 한 명의 사람은 보살피는 사람의 정성에 힘입어, 그리고 항아리 안의 무수한 미생물 혹은 비자기non self와 들끓으며 각자 다른 빛깔로 숙성해나가는 것이다. 재밌는 건, 익어가는 술은 언제나 조금씩 증발하면서 주위를 취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만조 아줌마의 술은 인간에 대한, 인간 사회에 대한 완벽한 은유가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기 중에 녹아든 술은 가족 이데올로기나 편협한 이해관계 로 혹은 폭력적인 권력으로 사람들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양조장 근처에서는 천사들마저 취해 있기 마련이므로. (162-163)  

이달의 사락 s********d 2024.09.2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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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서사의 모색과 한계(2021) | 밑줄만(이었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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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X세대 청년의 세계 인식은 어느새 시효가 만료된 듯하다. 2010년대 한국사회는 신분이 세습되는 봉건 (헬)조선으로 표상되었고, 위시 리스트보다 포기 리스트가 훨씬 더 길게 작성되었다. 오늘날 청년은 ‘죽창’(무쓸모 기술)과 ‘자기계발서’라는 도무지 양립할 수 없는 소재로 표상되곤 하는데, 전자는 ‘평등한 종말’을 후자는 ‘(능력에 따른 차별적) 평등 대우’를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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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X세대 청년의 세계 인식은 어느새 시효가 만료된 듯하다. 2010년대 한국사회는 신분이 세습되는 봉건 (헬)조선으로 표상되었고, 위시 리스트보다 포기 리스트가 훨씬 더 길게 작성되었다. 오늘날 청년은 ‘죽창’(무쓸모 기술)과 ‘자기계발서’라는 도무지 양립할 수 없는 소재로 표상되곤 하는데, 전자는 ‘평등한 종말’을 후자는 ‘(능력에 따른 차별적) 평등 대우’를 의미한다. 양자의 평등이 얼마나 같고 다른지, 얼마나 비관적이거나 건설적인지 따지는 일은 뒤로 미루더라도, 불평등에 대한 청년의 분노를 읽어내는 일은 어렵지 않다...

 최근 정치권에서는 ‘이십대 표심’에 주목하면서 청년을 호명하고, 문화산업 분야에서는 핵심 소비 계층으로 MZ세대를 설정한다. 담론 속에서 청년은 유례없는 구직난과 극심화된 양극화로 인해 고통받는 안쓰러운 존재로 그려지기도 하고, 다른 한편에선 ‘자기계발서의 논리를 내면화한 괴물’로 표상되기도 한다. 청년 담론이 비대해져감에 따라 ○청년의 실제 얼굴은 사라지고 입맛에 맞게 호명되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

 그렇다면 ‘헬조선’ 담론 이후 청년 현실에 대한 한국문학의 응전(맞대응)은 어떠했을까. 청년의 분노와 욕망을 구체적인 삶의 지평에서 그려냈던 것일까. 아니면 부지불식간에 청년 담론을 재생산하거나 기성세대의 도덕감을 일방적으로 강요한 건 아니었을까. 우리는 여전히 현실 바깥의 대안을 가늠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실패를 정확히 파악하는 일은 중요하다. ○실패를 성공으로 착각하지 않아야 탈출 욕망에 담긴 변혁 의지를 지켜낼 수 있기 때문이다. (65-66)

 

 

 <한국이 싫어서>의 적나라한 비판이 한국사회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 측면도 없지 않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소설은 애초부터 더 잘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과 함께 소비되었다. 이 모순이 시사하는 바는 탈출 욕망이 기실 살아남고 싶은 욕망과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니 ‘탈조선 서사’는 지옥 같은 현실을 바꾸는 것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단지 살아남기에 ○좀더 유리한 곳으로 이동할 뿐이다. 그리고 새로 도착한 곳에서 ‘헬조선식 근성’이 경쟁력이 있다면, (재탕?) 그렇게 살아남는다...

 <한국이 싫어서>가 탈조선 서사로 대표될수록 ‘탈출’의 의미는 그저 좀더 경쟁력 있는 곳으로의 이동으로 ○납작해진다. 이 탈출은 지옥 같은 현실을 개선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지옥의 습성을 가지고 새로운 공간을 개척(적응과 변신?)한다. 확장된 지옥은 더 많은 마이너리티를 양산할 것이고, 새로 탄생한 마이너리티의 탈출 욕망은 또다시 지옥 확장의 동력이 될 것이다. 사회에 대한 분노와 청년의 희망을 담은 ‘탈출기’가 ○‘생존기’로 퇴색되면서 악순환의 폐쇄회로를 건설하는 데 기여하고 마는 것이다. <한국이 싫어서>의 실패 지점은 알고 보니 생존기였다는 게 아니라, 생존기가 탈출기로 오인되면서 ○대안 세계를 찾는 일 자체를 망각하게 하는 데 있다. (68-69)

 


 이들 셋은 ‘발목에서 사서 어깨에서 팔라’라는 주식시장의 명언을 그대로 실행하여 인생 역전 성공 사례의 주인공이 된다. 당장 2~3억으로 인생이 뒤바뀔까 싶을 수도 있지만, 지송과 다해에게 이 돈은 비공채 직원을 차별하는 회사에서 벗어나 ○자기 사업을 해볼 수 있는 밑천이자 밑 빠진 독의 구멍을 막아줄 전세 보증금이다. 누군가에겐 이제 ‘겨우’ 출발선에 선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이들에겐 ‘드디어’ 남들과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해볼 수 있는 도약이다...

 소설이 넌지시 말하는 바는 암호 화폐 열풍이 단지 일확천금을 노리는 허영심으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정직하고 묵묵하게 일해서는 최소한의 조건도 갖추기 어려운 현실에서 ‘무난이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방법은 현실 논리를 초과한 ○행운밖에 없다는 것이다. <달까지 가자>는 그러한 ‘무난이들’에게 위로가 되어주기로 한 듯하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소설은 실패하고 만다. 소설이 행운을 통해 탈출구를 마련해주기로 한 이상 ○그 이면의 진짜 현실은 모른 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피차 알지만 속이고 속아야 소설의 효용이 극대화된다. 소설에서마저(커뮤니티 게시글 고백처럼?) 깨고 부수고 낙담하고 절망하는 삶을 경험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그러나 동화의 마법을 걷어치우고 보자면, 서사에 설득되기도 힘들거니와 설득된다고 한들 여전히 갑갑한 현실에서 분투하고 있는 이들에겐 또다른 박탈감을 선사하고 만다. (71-72)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이들이 특별한 악인이 아닐뿐더러, 심지어 ○자신들의 행위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준삼과 기현은 비겁하고 야비한 방법으로 살아남으려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항상 그들을 몰아붙이는 더 큰 부정과 부패가 등장한다. 챕터마다 각 인물을 초점화하여 서술하는 이 소설을 따라가다보면 독자도 이들 행위의 문제점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이들은 수세에 몰려 있고, 사회 초년생의 위태로운 위치는 그들의 행위를 ‘거대한 구조에 끼여 어쩔 수 없이 동조한 일’ ‘살아남기 위해 불가피하게 행한 일’로 인식하게 만든다. 게다가 비극적 결과에는 ○언제나 더 나쁜 악당의 활약이 있었기에 이들의 잘못은 희석되기 쉽다...

 거대한 악과 청년을 대결 구도로 설정하는 순간 청년은 약자의 위치에 처하게 되고 그들의 행위는 ‘살아남기 위한 일’로 정당화되면서 윤리적인 면죄부를 받기 쉽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이해로는 청년들을 연민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있겠으나, 그들을 ○내모는 세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한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자는 악당으로 길러질 것이고, 살아남지 못한 자는 세계에서 추방될 것이기 때문이다...

 혁오 엄마의 조언은 승자의 겸손을 가르치고는 있지만, 이것은 질시와 따돌림을 최소화하면서 승리를 유지하는 방법이지 승자와 패자의 구분을 약화시키거나 상대화하는 방법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 경기에서 승자와 패자가 나뉘더라도 그 과정이 즐거울 수 있다는 것, 다른 경기에서는 승패가 바뀔 수 있다는 것, 승패로만 규정할 수 없는 각자의 역할과 특기가 있다는 것, 그래서 승패가 야구 선수를 판단하는 기준의 전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그는 “역할에 상관없이 오랫동안 야구하는 것”(<볼펜의 시작>)을 목표로 삼고 있다. 혁오는 ‘승패를 떠난 야구’를 하겠다고 하지만, 그의 룰을 찬찬히 살펴보면 이것이 과연 야구가 맞기나 한지 의문이 든다. 혁오의 야구는 프로 리그의 룰에 저항하고 있다지만, 그 자체로 새로운 의미를 창안하지 못함으로써 사실상 프로 리그 승패에 결박되고 만다. 승리의 반대편으로 움직인다고는 하나 결국 혁오의 역량은 승패에 따라 조절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내쳐지지 않을 정도로는 쓸모 있는 투수”가 되는 한에서 자기 리그를 운영한다. 따라서 “역할에 상관없이 오랫동안 야구하는 것”이라는 목표에도 사실 ‘프로 리그에서’라는 전제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하게 따져봐야 할 것은 윤리적 잣대의 비일관성이 아니라, ○경쟁 시스템을 개인의 윤리로 해결하려는 태도이다. 기현과 준삼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는 ‘구조 탓’이라는 것이 혁오에게 적용되지 않을 리도 없고, 또 ○오늘날 ‘타고난’ 재능이라는 것이 구조와 분리된 순수 개인의 역량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들쑥날쑥한 잣대는 공정성에 대한 불만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고, 혁오에게 강요되는 죄책감은 ‘공생’이라는 가치가 개인의 성장을 가로막는 희생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게 한다. 개개인의 다양한 역량이 자유롭게 조화될 세계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천재적 개인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맞춰주는’ 방식은 천재와 아닌 자를 ◎나누는 세계를 ‘별 탈 없이’ 유지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배려하는 자나 배려받는 자나 모두 행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불행의 에너지는 기존의 잣대를 더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크다...

 “바보야, 그건 볼이었어!” ‘나’는 9회말 투 아웃 투 스트라이크 스리 볼을 맞이한 타자처럼 쫓기며 회사와 집을 오가다 ‘해고’라는 공을 맞았다. 그런데 조성훈은 이 공이 스트라이크가 아니라 볼이라 한다. ○더 이상 스스로를 쥐어짜게 하는 세계의 룰에 속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제발 더 이상은 속지 마. 거기 놀아나지 말란 말이야. 내가 보기에 분명 그 공은 이제 부디 삶을 즐기라고 던져준 ‘볼’이었어.” ...

 오늘날 청년에게 ’볼 넷‘이란 승부를 피하고 죄책감을 해소하기 위해 의도할 수 있는 결과가 아니라, 죽도록 노력해도 겨우 받아보는 성적표일 것이다. 따라서 위의 ’볼 넷‘에 부여된 대안적 해석이나 공생의 상징은 청년 현실에 비추어 설득력을 갖기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돌파구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바깥을 가늠하기는 쉽지 않지만, 장소만 바꾼 생존의 몸부림을 탈출로 오인하거나 현실의 장력을 가뿐히 넘을 수 있는 행운을 기다리는 일로는 모순적인 현실의 바깥을 모색할 수 없음이 분명해 보인다. 바깥을 상상하는 일은 어렵고, 청년 탈출기는 실패하기 쉽다. 그러나 그 실패는 한계 지점까지 나아간 성실한 실패여야 할 것이다. 그래야 실패한 그 자리에서 누군가 다음의 걸음을 꿈꿀 수 있다. (73; 75-80)

 



*겟 어 베러 잡, 징글 헬 습성, 한바탕 속시원한 수다에 그침, 떡상/떡락 존버, 2호선 순환선이나 코인 열차나, (건물)주님, 인증 ‘숏’, 점괘, 이민 가거나 영끌 투자하거나, (최상위가 아닌 이상) 기량의 이면, 먹고사니즘, 생계형 악의 평범성....... 

 거.참.어.렵.지.만 정립한 언어와 계보 서사가 있다는 감사함! 가을장마 온다네여, 굿바이썸머    ♪태양을 피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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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론글의 시작이 야구 소설이고 마무리도 야구 소설이다. 스포츠와 청춘 인생 풀이가 흥미롭다. 은유로서 야구는 당긴다. 승패가 나야 하는 룰과 플레이의 전시장. 그 대입 사이에 들어간 장강명과 장류진의 두 소설만 읽어 안다.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는 장씨 작가들이다.

 큰조카가 언어 장벽이 없다면 외국 나가 사는 건 어떠냐는 물음이 되감겼다. 떠남이 탈출이 아닌 또 다른 적응 필살기가 될 법함에도 과거 현상도, 이팔청춘 세대에만 적용되지 않는 듯하다. 전세 사기와 가상 화폐와 주식 투자인지 투기인지 인생 크게 한방 신드롬이 여전함이 페이지가 넘어가거나 끝난 이야기가 아님을 시사한다. 

 모임에서 이런 교육 현장과 괴물 양성 시장을 만든 장본인, 학부모임을 시인하고 사과하는 분이 계셨다. 저마다의 이해관계와 이득에 따라 분노하고 단체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조국 전 장관에게 자녀들의 입시가, 문통에게 아내분이(가족 수사로 번짐), 이잼에게 기득권이 악마화의 온상지라면 윤동희는 무엇이 스모크건이 될 지 귀추가 모아진다, 주목. 아무래도 이제 막 오십대에 합류한 세대의 공분 폭발이지 않을까. 진보 연합 대학생들이 나서기 시작했다지만.

 한번씩 말했듯이 최상위 포식자들은 소설 안 읽는다. 그리고 어느 일정 계급 선까지 드문드문 인물로 등장하고 단편 단면적으로 노출될 뿐이다. 주변에 상류층 있으면 물어봐주오. 그들에게 소설이란, 콕 집어 한국소설이란 읽을 만한지. 그럴 가치가 있고 공감이 가냐고 물으면 너무 비인격적이고 야박하려나. 이상하게 꼬였네 스크류 바

이달의 사락 s********d 2024.09.19.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