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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탈역사
아서 C 단토, 철학자이자 미술비평가인 그는 1964년 <예술계>를 발표, 그것이 미학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놓았다고 말한다. 이 책은 아서 단토와 이탈리아 미술 비평가 데메트리오 파파로니가 예술을 둘러싼 여러 주제로 나눈 대화들을 담은 대담집이다. 단토가 철학자로 성장하기까지의 이야기도 담겨있다. 아서가 천착했던, 탈역사와 다원주의. 딱딱한 글쓰기가 아니라 대화체로 돼 있어, 읽기 편하다. 어려운 예술과 철학의 문제는 아무리 쉽게 써도 정신 차리고 집중해서 읽어야 할 듯한데, 조금 읽기 편하다.
이 책에는 ‘주디의 방에서’의 파파로니 해설과 함께, 예술과 탈역사라는 제목 아래 역사와 탈역사, 양식과 서사, 탈역사, 천사대 괴물, 분석철학으로서의 예술 비평이 실펴있다.
어떤 인공물은 예술품이 되고, 또 어떤 인공품은 예술품이 되지 못하는가?
도대체 왜 어떤 인공품은 예술품이 되고, 또 어떤 인공품은 예술품이 되지 못하는가, 단토 이전에는 이런 문제는 아무런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고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너무나 당연하니까, 예술품에는 나름대로 갖춰야 할, 형식이 있었다. 전시 공간에 들어있는 누가 봐도 즉, 고정관념 속에 형상화된 그런 것들, 거기에 덧붙인 설명 혹은 해설이, 눈에 보이는 작품, 딱 봐도 예술작품처럼 보이는.
그런데 무엇이 예술품을 한 갓 실제 사물에 불과한 것과 구별해 주는가, 20세기 이전 예술 이론가들은 이런 질문을 한 번도 제기한 적이 없었다. 예술로 여겨지는 것 대다수가 그 밖의 것들과는 너무나 달라 보였기에 아무도 이런 문제로 고심할 필요가 없었다.
세상은 보이는 대로 느끼고 생각하는 대로
단토는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 슈퍼마켓에서 볼 수 있는 것과 상자와 외향적으로는 구별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인공품이고 무엇이 예술품인가, 그는 “이론”이라고 말한다. 한 대상을 예술계로 끌어올려 그것을 바로 그것과 똑같은 실제 사물로 주저앉지 않게 부축해 주는 것이라고, 꼭 눈으로 봐야만 어떤 대상이 예술품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이론이라는 것을 무시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도식화, 틀에 갇힌 예술은 그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이런 역사는 끝난 것이다. 그의 이론이 “예술의 종말”이라 표현하기에 마치 예술이 끝났느냐고 오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술은 끝난 게 아니다. 눈으로 보는 예술에서 정신으로 받아들이는 예술로의 전환을 말하는 것이다.
단토가 보기에 작품에 점차 철학이 깃들면서 그것을 감상하고 해석하는 일은 ‘눈’이 아닌 ‘정신’이 맡게 되리라는 헤겔의 예언이 실현된 것이다.
현대미술의 서막인가, 뒤샹의 작품 <샘>의 이야기
1913에 미국 뉴욕에서 선보인 뒤샹의 레디메이드 남성 소변기 <샘>, 여기저기 자주 소개되기에 대충을 알고 있을 것이다. 현대미술의 시작이라고 불릴기도 한 그의 소변기와 워홀의 브릴로 상자는 어떻게 다른가, 소변기를 예술 작품으로 격상된 일상의 대상으로, 워홀의 상자, 이는 일상의 대상과 똑같은 예술작품으로, 전자(뒤샹의 작품)는 뒤샹의 말에 따르면 공장에서 만든 대상을 이용하는 것은 예술의 정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한 방식이며 자신의 작품은 뜻도 의미도 없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그것을 예술작품으로 규정되도록 해주는 서사에서 벗어날 수 없다. 후자(워홀의 상자)는 실제 브릴로 상자와 시각적으로 똑같아 보이기에, 양자의 차이, 뒤샹에서 워홀로의 진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미술, 방독마스크를 걸어놓고 아무런 설명이 없다. 이를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일상의 평범함을 전시 공간에 옮겨놓았을 뿐인데, 우리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게 예술품인가?, 무엇을 전달하려는 거지라는 당혹감을 느꼈을 것이다.
예술작품은 눈이 아닌 정신으로
단토의 예술이란 눈으로 보고 느끼고 해석하는 게 아니라 정신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말처럼, 작품은 ‘눈’이 아닌 ‘정신’으로, 느낌이다. 자신이 느끼고 해석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어떤 이해하기 어려운 이론이나 담긴 정신이 어쩌고저쩌고하는 해설보다는 보는 사람이 어떻게 느끼고 해석하는가, 어찌 보면 나만의 예술 세계인 셈이다. 그 누군가에 의해서 조작된 정의로 만들어진 대상화된 예술이 아닌,
<출판사에서 받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태그#예술과탈역사#아서C단토#데메트리오파파로니#박준영#미술문화#분석철학#예술의종말#탈역사#책콩카페#책콩서평단#책추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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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탈역사 _예술의 종말에 관한 단토와의 대화 오랜만에 예술에 관한 책을 손에 들었다. 미학을 이야기하는 책을 읽는 건 참 오랜만이다.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를 보고 '어떤 인공품은 예술품이 되고 또 어떤 인공품은 예술품이 되지 못하는가?'라는 화두를 제기해 이목을 끈 단토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글을 보고 호기심이 생겼다. 뒤샹과 앤디 워홀의 작품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도 그 시대의 예술을 바라보는 사회의 분위기도 궁금해졌다. 예전에 나는 미술의 형식을 파괴하는 다양한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이 왜 그토록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지 어떤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지 잘 알지 못했다. 책에서 이야기하는 글들을 통해 판단했던 것 같다. 책의 저자인 단토는 미국의 철학자이자 미술 비평가로 미술과 역사를 공부하고 판화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를 접하고 문제를 던지고 논문<예술계>로 위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해부하면서 철학적 미학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예술과 역사>는 단토와 파파로니가 예술을 둘러싼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나눈 대화를 옮겨놓은 책이다. 단토가 가진 여러 생각들을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지만 나에게는 조금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뒤샹의 레디메이드와 워홀의 모사품은 예술작품으로 격상된 일상의 대상과 일상의 대상과 똑같은 예술작품이라는 차이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책의 내용을 다는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예술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에 대해 들여다볼 수 있어서 좋았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담은 것에 예술은 그것에 더해 복잡한 해석을 남긴다는 말을 들여다보며 저마다의 작품에 감상자의 시선이 더해지는 것도 어쩌면 너무 당연해 보인다. 오랜만에 스케치 노트에 끄적거리며 나는 무엇을 그리고 싶은지 생각해 본다. 나는 화폭에 무엇을 담아내고 싶은 걸까? ※ 이 글은 협찬받은 도서를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내용입니다. #예술과탈역사 #아서C단토 #단토 #데메트리오파파로니 #미술문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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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끝나지만 삶은 계속된다 영화는 끝나지만 인생은 계속된다 인간이 살아있는 한 예술은 영원하다
이 책은 예술 철학자인 아서 단토와 이달리아의 미술 비평가 데메트리오 파파로니가 예술을 둘러싼 여러 주제로 일상적인 대화체로 나눈 대화들을 수록한 대담점입니다. 단토의 예술철학에 대해 깊이 들여다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파파로니의 해설이 들어가 있어서 어렵지만 잘 읽히고 흥미로운 텍스트입니다.
책은 작고 가벼워서 한 번 읽고 넣어두는 책이 아니라 가벼운 여행지나 전철에서 수시로 꺼내 읽기에 적합한 판형을 갖고 있습니다. 앞 부분에 들어있는 예술 작품을 감상하고 나서 두 분의 현학적인 예술 철학을 들어가서 살펴보고 나서 마지막에 나오는 색인에 들어있는 내용을 다시 훑어보면서 찬찬히 다시 읽어보기에도 적합합니다.
대담자들은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고 솔직하게 그러나 절대 오만하지 않게 전달하는 화법을 쓰는데 매우 매력적입니다. 시종 팽팽하게 유지되는 지적긴장과 읽는 이로서의 지적희열은 감동입니다.
이 책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와 가치, 영감을 얻으리라는 역자의 말씀처럼 많은 고민을 하게 하지만, 기꺼이 감수하고 싶은 멋진 텍스트입니다. 예술과 철학과 역사에 대한 좋은 시도를 이 책을 통해 배우면 좋을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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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탈역사 #아서 단토 #박준영 #컬처블룸 #컬처블룸리뷰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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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인공품은 예술품이 되고, 또 어떤 인공품은 예술품이 되지 못하는가?" 독자는 이런 질문을 속마음으로 해본 적이 있다. 특히 현대 미술 가운데 팝아트로 분류되는 일부 미술품들은 마치 낙서 같은 그림, 아무 의미도 없는 재활용 쓰레기처럼 보이기도 하는 물건들이 예술품이라고 전시된다. 뿐만 아니라 미술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기도 하는 것을 보고 독자의 예술 지식을 탓하다가 이내 고개를 숙이곤 한다. 사실 기존의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도 별 지식 없이 작품을 접해 왔다. 그저 기존 평에 기대어 작품의 질을 높이 보기도, 또 좀 낮게 보기도 했다. 한마디로 남 감상을 따라 감상했다는 자책감이 들 때가 많다. 그렇다고 예술이나 미술 평론을 따로 배울 필요도 못 느꼈다. 생계와 관계 없이 그냥 예술을 즐기는 차원이라 절실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때문에 작품 감상 기준이 비평가나 기존 예술가들이 평가한 대로 오락가락한다는 점은 인지하고 있었다. 이 책 『예술과 탈역사』는 사실 독자에게 굉장히 어렵다.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도 읽고 싶었던 이유가 저자이자 철학자인 아서 C. 단토가 예술의 종말을 주장해 굉장한 논란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다. 단토는 "예술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려면 이제는 철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책에 따르면 1964년, 단토는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를 보고 깊은 충격을 받는다. 그 충격은 단토의 미학에서 일종의 신호탄 역할을 했다. 왜 어떤 인공품은 예술이 되고, 또 어떤 인공품은 예술이 될 수 없는가? 앤디 워홀은 하고많은 상품 중 왜 브릴로 상자를 택했는가? 이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면, 이제 예술을 뭐라 정의내릴 수 있는가? 예술에서 철학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지고 사유했다. 그리고 통찰의 끝에, 그는 예술의 종말을 선언한다. 이 테제는 단토의 많은 저서들에서 여러 번 논의된 바 있지만, 그만큼 대중으로부터 여러 번 비틀리고 왜곡되고 오인되어 왔다.
이 책은 단토가 거듭 주장한 탈역사와 예술의 종말 개념을 재확인하고 오해를 바로잡으며, 더 나아가 워홀 말고도 다양한 현대 미술가들의 작품을 그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소중한 기록이라고 한다. 역자 박준영은 책 뒷 부분의 〈역자 후기〉에서 이 책에 실린 단토와 이탈리아 미술 비평가 데메트리오 파파로니의 대화에 귀 기울이다 정합성을 갖춘 1인칭의 건조한 글에서는 느낄 수 없는 우발성과 어긋남의 소소한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대담자들은 상대방의 의견을 분명하고 솔직하게, 그러나 절대 오만하지 않게 전달한다고 평가한다. 역자는 또 상호 존중과 배려의 분위기 속에서도 시종 팽팽하게 유지되는 지적 긴장과 거기서 오는 지적 희열은 독자들이 이 책에서 맛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라고 평가한다. 물론 독자로서는 역자의 수준에서 이 책을 읽지 못했다. 두 저자가 대담한 내용 중에서 서로 상대를 존중하고 자신의 주장도 분명히 밝힘으로써 담화를 이어나간다는 느낌은 받을 수 있었지만 그들의 내용에서 독자가 즐거움이나 희열을 느낄 수는 없었다. 그들의 대담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독자 판단으로 굉장히 높은 수준의 예술론을 다루고 있으며, 누구도 감히 함부로 내세울 수 없는 예술의 종말론을 이끌어낸다는 것을 예술 공부라고는 책 한 권도 제대로 읽지 못한 독자가 잘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소리일 것이다. 한마디로 책의 내용은 일반 독자들이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자 후기〉로 역자의 설명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평에서 한두 줄 인용해야 할 내용을 이 책 서평에 원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단토의 예술 철학을 비판적으로 개관하는 서문이고, 나머지는 파파로니와 단토가 주고받은 대화록이다. 특히 이 책의 주된 부분을 차지하는 대화록은 그 형식의 특성상 딱딱한 논문에서는 포착하기 어려운 단토의 미묘한 생각과 태도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다. ‘예술의 종말’이라는 단토의 유명한 테제는 그토록 잘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오해를 낳고 파악하기 힘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런 상황에서 단토의 예술 철학을 대담의 형식으로, 그러니까 일상의 언어로 접할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사유를 입체적으로 헤아려 볼 수 있는 무척 좋은 기회가 된다. 또한 그가 미술, 그중에서도 예술 철학과 분석 철학에 입문하게 된 내밀한 이야기도 엿볼 수 있다. 이 책의 대담자들은 저마다 전문 분야가 다르지만 모두 어느 정도는 철학자고, 미술가며, 미술 비평가다. 사안을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씩은 다를 수밖에 없으니 상대가 자신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고, 서로 오해가 생길 수도 있다(이런 오해는 때로 자기 논리의 허점을 회피하는 의도적 혹은 무의식적 전략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야기의 초점이 미세하게 틀어지기도 한다. 역자도 사실 내용이 다소 전문적이고 난해한 대목이 적지 않다고 밝힌다. 하지만 이 책을 집어 들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이라면 이미 모두 조금씩은 철학자이자 미술 비평가, 예술가일 것이고, 따라서 이 책에서 저마다 자신에게 필요한 값진 정보와 가치, 영감을 얻어갈 수 있으리라고 역자는 확신한다. 이런 어긋남을 지켜보며 독자는 화자들, 특히 단토의 논지를 오히려 더 깊고 선명하게 이해하게 될 것으로 예상하기도 한다.
이탈리아의 미술 비평가이자 큐레이터, 편집자인 파파로니와의 대화는 그의 넓은 식견과 탐구 정신으로 단토 사유의 여러 측면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이 대화(화가 밈모 팔라디노와 철학자 마리오 페르니올라가 참여할 때도 있다)에서 우리는 서로 날카로운 질문을 주고받는 대담자들의 생생하고 즉흥적인 토론을 지켜볼 수 있다. 단토가 이 시대에 던진 두 가지 화두인 ‘탈역사’와 ‘예술의 종말’이 가리키는 방향은 곧 다원주의 시대라고 역자는 본다. 이런 점에서 단토의 사유가 가닿는 영역은 비단 예술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책의 담화가 예술과 철학, 미학의 범주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긴 하지만 그 내용은 우리가 지금 발 디디고 살아가는 이 세상과 시대, 사회의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되돌아보고 가늠해 볼 수 있는 비전을 제공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역사의 종말이지 예술의 죽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역사로 구축된 세상에 얼마간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탈역사’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남은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이야기를 단념하지 못하는데 인간의 마음이 늘 사태를 서사적 관점에서 보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조만간 이야기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고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게 될 것입니다.”(p.84) 동시대의 예술의 주된 목적은 미적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는 하지만 단토는 미학을 동원하는 예술도 있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한편으로 그는 미학을 추구하는 것은 "예술사가 전개되는 동안 제작된 예술 대다수의 주된 목표"가 아니었다고 말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많은 전통적 예술과 일부 동시대 예술에는 틀림없이 미적 요소가 있다."라고 확언한다.
역자는 파파로니가 「우연히 시작된 대화들」이란 〈서문〉에서 언급하듯 이 책은 단토와의 대담 외에도 단토의 예술 철학을 개관하는, 그러나 그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파파로니 본인의 독자적인 생각을 표명하는 해설 『주디의 방에서』를 포함한다. 역자가 이해한 바로 '주디의 방'은 예술과 삶, 혹은 허구와 실재가 공존하는(달리 말해 양자가 끊임없이 자리바꿈하는) 공간을 표상한다. 그리고 바로 이 사태의 핵심 계기는 역사 혹은 시간의 어떤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있다. 파파로니는 이 해설에서 여러 개별 작품의 '시간관'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면서 예술과 진리, 차용과 독창성, 해석과 동기(의도), 모더니즘과 탈역사 등의 문제를 논하는데, 단순히 보론(補論)이라기보다는 1~4장의 대담과 별개로 그 자체로도 탁월한 통찰이 돋보이는 흥미로운 에세이라고 강조한다. 대서사들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무엇이라도 가능한 시대, 소서사들의 시대가 열렸다. 거실에서는 TV가 사라지고 셀 수 없이 많은 유튜브 채널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이 책에서 예술계의 오늘과 어제와 미래를 조망한다. 예술계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특수한 구역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을 축소한 모델-어느 영역보다 세계의 흐름에 예민하고 민첩하게 변화가 일어나는 곳-이다. 이런 뜻에서 『예술과 탈역사』는 예술의 범주에서 더 나아가 한 권의 인문·역사서로도 기능한다. 나아가 단토가 제기한 두 가지 화두, 탈역사 개념과 다원주의 비전은 우리가 현시대를 진단하고 각자의 지난날과 앞날을 조망하는 데도 유용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참고로 역자가 앞서 언급한 대로 파파로니의 해설 『주디의 방에서』의 일부를 여기에 게재한다. "아서 단토가 보기에, 작품에 점차 철학이 깃들면서 그것을 감상하고 해석하는 일을 눈이 아닌 정신이 맡게 되리라는 헤겔의 예언이 실현된 것은 뒤샹에 이어 워홀의 브릴로 상자가 제기한 질문들과 더불어 20세기에 와서였다. 단토가 그의 '예술의 종말'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전념하게 된 중대한 순간은 그가 1964년 맨해튼 스테이블 갤러리에서 열린 워홀의 전시회를 방문했던 때와 일치한다. 어떤 것이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역사의 어느특정한 시기에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여겨지게 되는 이유를 그가 탐구하기 시작했던 것이 바로 그때였다. (중략) 뒤샹의 레디메이드와 워홀의 브릴로 상자는 평범한 대상으로 제시된 예술 작품들로, 둘 다 구상 미술의 서사 구조도 추상 미술의 구성 구조도 없다. 단토에 따르면 평범한 대상과 예술품의 차이는 이제 그 형태가 아니라 해석 과정에 근거하는데 브릴로 상자의 경우에는 서로가 서로를 지시하는, 즉 원본과 사본을 구별하기 힘든 한 쌍의 대상을 비교하는 방법이 쓰인다. 예술품에 대한 단토의 철학적 해석은 바로 이런 동일성과 차이를 인식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뒤샹과 워홀의 작품에 대한 비교 분석은 예술품의 고유성과 항상성을 숙고하게 한다."(p.39~54) 이 책을 국내 독자들에게 처음 소개하게 된 올해가 단토의 타계 10주기다. 이탈리아어 초판은 2020년에, 개정을 거친 영어판은 작년에 출간되었다고 한다. 시점이 시점이니만큼 한 가지 의미를 부여해 이 책을 소개한다면, 동시대의 가장 중요한 예술 철학자의 성취와 자취를 뒤돌아보고 기리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고 역자는 소감을 밝혔다.
“내 견해는 ‘죽음’이 명백히 뜻하는 바대로 예술이 더는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 전개상 적절한 다음 단계로서 확신을 주는 서사에 힘입지 않아도 어떤 예술이든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끝나는 것은 서사(narrative)이지 서사의 대상(subject)이 아니다.” 예술 자체가 끝난 것이 아니라 예술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과 더불어 예술을 비평하는 일정한 방식이 끝난다는 말이다.(p.84)
저자 : 아서 C. 단토(Arthur C. Danto) 미국의 철학자이자 미술 비평가. 웨인주립대학교에서 미술과 역사를 공부했으며 판화가로 활동하면서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철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다양한 교수직을 역임하다가 1966년에 정교수가 되었다. 1984년부터 2009년까지 『네이션』의 미술 비평가로 활약했으며 미국철학회장과 미국미학회장을 역임했다. 그의 주 관심사는 사고, 감정, 예술 철학, 표상 이론, 철학적 심리학, 헤겔 미학, 그리고 메를로퐁티와 니체, 장폴 사르트르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다. 단토는 1964년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를 보고 ‘어떤 인공품은 예술품이 되고, 또 어떤 인공품은 예술품이 되지 못하는가?’라는 논지의 화두를 미술계에 제기해 이목을 모았다. 같은 해 발표한 논문 「예술계」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해부하면서 철학적 미학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2013년 10월 89세를 일기로 타계한 단토는 수많은 평론과 저서를 남겼다. 주요 저서로는 『예술의 종말 이후』와 1990년 미국도서평론가협회 평론 부문을 수상한 『만남과 성찰』을 비롯해 『일상적인 것의 변용』 『브릴로 상자를 넘어서』 『비자연적인 기적들』 『미래의 마돈나』 『앤디 워홀』 『무엇이 예술인가』 『미를 욕보이다』 등이 있다.
저자 : 데메트리오 파파로니(Demetrio Paparoni) 이탈리아의 미술 비평가이자 큐레이터, 작가, 편집자. 카타니아대학교에서 근현대 미술사를 가르쳤으며 지금은 이탈리아 신문 『도마니』에서 미술 비평가로 일하고 있다. 1983년에 현대 미술 매거진 『테마 첼레스테』와 동명의 출판사를 설립하여 2000년까지 운영했다. 주요 저서로는 『악마: 시각적 역사』(2019) 등이 있다. 단토 생전에 그의 담당 편집자로 일했으며, 단토와 주고받은 대화를 정리해 본서로 출간했다.
역자 : 박준영 한때 영화를 만들었고, 미학을 잠시 공부했다. 현재는 미학을 실천하는 내 나름의 방식이란 핑계로 번역을 하고 있다. 관심 분야는 분석 철학과 현대 예술이며, 옮긴 책으로는 나이절 워버턴의 『그래서 예술인가요?』와 벤체 나너이의 『미학』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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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타미라 동굴에 있는 벽화를 보면 놀랍습니다. 18,000 ~ 14,000 여년 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마치 사람이나 소가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네요. 고대 그리스의 대리석 조각, 유럽의 회화 등을 보면 예술가들은 어떻게 저렇게 조각하고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예술은 아름다움을 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시대 상황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는데 사진이나 영상을 남길 수 없던 시대에 기록의 역할도 하였네요.
예술은 철학과 미학, 역사 등 여러 분야의 관점에서 볼 수 있는데 '예술과 탈역사' 의 저자는 현대의 철학자이자 미술 비평가인 단토와 나눈 대화를 정리해서 이 책을 내었습니다. 단토는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는데 예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고대나 중세, 근대의 예술 작품을 보면 예술에 대해 잘 몰라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밀로의 비너스, 다 빈치의 모나리자, 모네의 수련을 보기 위해 전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미술관을 찾습니다. 하지만 현대 미술로 올수록 점점 난해해집니다.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뒤샹은 시중에 파는 남자 소변기에다가 사인을 해서 전시회에 출품하였으며, 워홀은 마트에 파는 세제 상자를 똑같이 그렸는데 처음 보면 누구나 당황스러울 것입니다. 지금은 예술가가 이를 최초로 시도한 행위에 가치를 두면서 예술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현대 미술관에 가면 재미있지만 과거의 예술과는 단절이 된 것처럼 보여서 이질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정교한 대리석 조각과 성당 천장에 그려진 그림이 예술이었다가 소변기나 세제 상자를 보면 이제 예술은 사라진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찾아보니 저자는 워홀과 그의 작품에 대한 책을 여러권 썼네요. 저자가 초기에 쓴 워홀에 대한 논문은 예술계의 관심을 집중시켰는데 예술이 종말을 맞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말 자체만 보면 쉽고 자극적이어서 사람들 사이로 빠르게 퍼져나갔는데 저자는 자신이 말한 예술의 종말이라는 개념을 사람들이 오해하였다고 합니다.
단토가 주장한 것은 예술의 종말이 아니라 역사의 죽음입니다. 역사에서는 그동안 많은 사상이 등장하면서 이야기를 만들어 왔습니다. 그 사이에서 예술이 발전해 왔는데 예술을 이해하는 방식 중 하나였던 서사가 끝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철학과 예술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아서 어떤 의미인지 쉽게 와닿지는 않는데 예술 자체도 의미가 있지만 현대 미술처럼 예술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가치를 갖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원서의 제목에는 Post History 가 들어가 있는데 History 이후 예술을 설명하는 새로운 방식이 등장하면서 대체하게 될지 그렇지 않으면 예술은 순수하게 예술로만 남을지 궁금하네요.
책은 그렇게 크고 두꺼운 편은 아니지만 전문적인 내용이다보니 읽어나가기 쉽지 않았네요. 그래서 책에 나오는 사람이나 내용들을 검색하면서 읽었는데 이것저것 찾다보니 예술과 비평에 대해서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이번 주말에는 한번 현대 미술관으로 가서 다양한 현대 예술 작품들을 봐야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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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예술을 감상하는 시각은 모두 다르다. 때문에 하나의 작품을 보더라도 느끼는 감정, 생각 등이 모두 다르다. 시각이 다르다는 것은 개인이 겪는 사건 즉, 개인의 환경이 다르다는 의미와 같다. 따라서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다. - 단토는 1968년에 이러한 시선에 대해 화두를 던진다. 당시 앤디 워홀이 발표한 작품 '브릴로 상자'를 보고 '어떤 사물은 예술품이 되고, 또 어떤 사물은 예술품이 되지 못하는가?' 그리고 그 해 '예술계'라는 논문을 통해 철학적 미학의 흐름을 바꾼다. 단토의 화두는 첫 문단에 언급한 시각을 의미한다. 내가 현대 예술을 어려워하고 좋아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로, 나는 예술로 받아들이기 힘든 사물이 누군가에게는 예술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 이 책은 서문과 해설, 그리고 단토의 대담, 역자 후기로 구성되어있다. 서문이 생각보다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도 특이했고, 그림이 가장 앞에 위치한 것도 특이했다. 그림에 대한 설명이 부연될 법도 한데 사진의 출처(이름)외에는 불친절하다. 그래서 글을 읽다보면 이해가될까 싶었는데, 음....? - 단토가 이야기하는 예술의 종말이란 것은 관객이 사물을 바라볼 때 더이상, 시각적인 것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사고하는 것에 따라 예술이 완성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즉, 작가의 철학이 우선되기보다, 작품이 어떤 사물로 보이는 것보다 관객의 철학에 따라 예술품이 구성된다는 것이 아닐까? - 아무렴 어떨까. 나는 아직도 현대 예술을 이해 못 하고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싶지 않다. 그것이 내가 예술을 바라보는 철학이다.
<해당 도서는 무상으로 지원 받았으며, 직접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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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아트의 대표 작가인 앤디 워홀은 1964년 슈퍼마켓에서 빈 상자 몇 개를 주워다 똑같은 수백 개의 나무 상자를 만든 후 〈브릴로 상자〉라 이름 붙인 후 뉴욕의 화랑에 전시했다. 예술철학자이자 미술평론가인 아서 단토는 〈브릴로 상자〉를 접한 후, '예술의 종말'을 선언했다.
'어떤 인공품은 예술품이 되고 또 어떤 인공품은 예술품이 되지 못하는가?' 과거의 미술작품은 이것은 미술작품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익숙한 물건을 그리거나 조각을 해도 작가만의 예술관과 기법들이 반영되며 재해석됐고 대중들은 익숙함 속에서 낯선 '무엇'을 찾는 즐거움을 즐겼다. 그러나 팝 아트의 등장 이후, 일상 작품들이 어떠한 해석이나 재현 없이 예술작품이라 불리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게 됐다.
『예슬과 탈역사』는 이탈리아의 미술 비평가이자 큐레이터, 편집자인 파파로니와의 대화를 담은 대담집으로 예술의 계념과 의미에 대해 들려준다. 책은 우선 단토가 말한 '예술의 종말'을 문장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단토는 “역사의 종말이지 예술의 죽음이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이전까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방식(역사)과 이별한 시대가 왔다는 의미로 예술을 다원주의로 접근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느 시대나 새로운 계념이 등장하면 논란이 일기 마련이다. 사진기가 처음 발명됐을 때 사람들은 회화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했다. 그러나 예술은 여전히 건재했고 사진기로는 구현할 수 없는 미술만의 새로운 기법과 해석을 만들었다. 단토의 말도 같은 의미로 다가왔고, 요즘 화두인 AI가 그린 그림으로 자연스럽게 생각이 옮겨갔다. AI는 사진기의 발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제 누구나 단순한 키워드 몇 가지로 원하는 그림을 순식간에 그려내는 세상이 됐다. 예술가들이 수십 년간 전문 교육을 받고 자신만의 예술관을 확립해가는 것을 단 몇 분 만에 해내는 AI를 보며 모두가 예술가가 될 수 있는 현실에서 우리는 예술의 미래를 어떻게 예측할까. 예술의 이후의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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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말하는 탈역사는 post historic age를 말한다. 왜 post를 탈이라는 한자로 번역했을까? 그럼 포스트 모더니즘은 탈 모더니즘이 되나?
post는 후, 뒤라는 의미라고 영어사전에 나오고, 탈은 벗어나다, 벗다, 전부, 기뻐하다, 느리다 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post와 탈은 그 접점이 없어 보인다.
저자가 말하는 post historic age는 앞으로는 historic age라 불릴만한, 즉, 어떤 이즘이나 주의 등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post modernism의 post와 비슷한 맥락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이를 탈로 번역한 것은 일본의 영향인지, 중국의 영향인지를 모르지만, 제대로 된 번역이 아니라 본다. 그러니 탈역사라는 말 자체가 주는 어색함이 웃긴다. 역사는 우리와 함께 하는데 역사를 벗어나다니...
저자가 말하는 ism시대의 종말은 이미 예견된 바였고, 잘은 모르지만, 이미 이 전에 누군가에 의해 주장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19세기 이후 예술 분야에서 더 이상 주의나 ism은 힘들다는 게 당시의 정설아니었던가? 근데 왜 이 당연한 것을 단토가 주장한 게 맞나? 관련해서 아는 게 없으니 헷갈리다.
이 책은 파파로니와 단토의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모아 정리한 것이다. 책을 보면 나온지 얼마 되지 않는다. 단토가 죽은 지 올해 십년 밖에 안 됐다고 한다. 미술사를 공부하긴 했지만, 단토라는 이름은 생소하다. 아직 현대의 인물이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하지만 좀 더 세밀하게 공부하면 현대 미술사에서 언젠가 한번은 더 만나게 될 것 같다. 책만을 두고 말하자면 어렵다. 일반인 뿐만 아니라 예술을 사랑한다는 사람 조차, 현대 미술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웬만큼 미술을 사랑하는 사람도 다가가기에는 어려운 책이다. 한편으로는 작은 작품 하나로 이렇게 풍부하게 말이 오갈 수 있다는 것도 놀랍다. 얼마나 대단한 언어술사들인가.
내가 생각하는 에술과는 별개의 예술서이지만, 그래도 차근차근 한번은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읽는 만큼 얻어갈 수 있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왜 종말을 말하는지, 왜 post를 말하는지 궁금하다. 읽다보면 그 부분에 대한 답도 얻지 않을까 싶다. 어렵지만 손에서 놓지 않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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