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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분업이 지금보다 더 뚜렷하던 시절, 학교에서는 가르치는 교과목에도 차이가 있었다. 남자 아이들이 망치질, 사포질을 한 끝에 작은 국기함을 완성하는 동안 여자 아이들은 덧버선을 뜨고 경단을 만들었다. 손이 무딘 나는 어느 쪽이었더라도 낙제점을 면키 힘들었겠지만, 특히 요리는 도통 모르겠어서 설거지를 늘 자처하고는 했다. 여전히 남자는 혹은 여자는 이러해야 한다는 사고가 존재는 하나 예전에 비한다면 많은 변화가 있었다. 특정 성의 전유물과도 같이 여겨졌던 분야에 드물게나마 진출해 있는 이들이 보인다. 다르다는 이유로 타인의 따가운 시선을 견뎌가며 지금에 이르렀을 거라 생각하면 안쓰러움과 더불어 존경의 마음이 든다. 인공지능(AI) 기술이 인류를 위협할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한다. 이미 많은 직종이 더는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고 있다. 미래에 살아남을 몇 안 되는 직업군에 목수가 속해 있어 놀랐다. 왜 기계는 이 영역을 대체치 못하는가. 나무를 다루는 일이 단순한 기술이라 여겼던 나는 순간 한 방 맞은 듯했다. ‘나무를 다루는 직업’이라는 책 제목을 통해 저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목수’라고 짧게 표현할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이를 풀어 쓴 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존재했을 것이었다. 허나 책 제목보다도 나를 사로잡았던 건 저자가 여성이라는 점이었다. 편협한 나의 사고는 다름을 틀림이라 읽고 해석하는 누를 범하려 들었다. 초반에 들었던 궁금증들은 이내 해소됐다. 나무를 다루는 일은 곧 생명을 다루는 것과도 같았다. 살아 있는 나무를 베어내 소비자가 요구하는 무언가를 만드는 과정은 창조이기에 앞서 파괴일 수도 있음이 불편했다. 그는 일종의 전직을 강행했다. 가구와 소품 등을 제작하는 일에서 조각으로 방향을 틀었다. 나무를 깎는 일은 경험해 보지 못한 바, 그가 매일 손끝으로 느끼는 감촉에 대해서는 어떠한 설명을 접해도 이해가 힘들 듯했다. 그러나 친히 그를 찾아와 함께 나무 깎기를 청하는 이들의 모습이 그려질 때마다 막연한 짐작이 가능했다. 한 때 유행했던 ‘힐링’이라는 단어를 찾아 온 그들의 행보를 통해 말이다. 사람들의 시선 또한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아, 저자와 마주한 이들은 왕왕 남성은 없는지를 물었다. 각종 자재를 전달하는 입장에서는 재빠르게 물건을 내려놓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고자 하는 마음이 발현된 나머지 더더욱 남성은 없는지를 묻곤 했다. 그 때마다 씩씩하게 대꾸하고 몸을 움직이며 그들의 불만을 잠재웠다. 나무와 교감하기 위한 부수적인 과정들이 내겐 지난해 보였으니, 열정이 부족한 나에게는 저자와 같은 길이 허락되지 않으리란 점이 분명했다. 혼자 하는 모든 작업은 외롭다. 나무는 아무리 손으로 매만진들 말이 없다. 동년배의 여성들과 따로 떨어져 지내지만 한 번씩은 얼굴을 맞대고 작업과정을 물으며 서로를 다독였다. 드묾이 곧 부재는 아니었다. 많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도리어 죽이 더 잘 맞았을 수도 있다. 이윽고 마지막에 도달했다. 그의 손길이 낳은 작품들에 그는 책의 마지막 부분을 기꺼이 할애했다. 산벚나무를 이용해 제작한 ‘나의 손’은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만 같아 보였고, 은행나무의 환생 ‘멜랑콜리아’는 보기가 무섭게 얼마 전 관람한 뭉크 전시회가 떠올랐다. 어느 것 하나 같은 게 없었다. 비로소 ‘나무를 깎는다’라는 단순한 말에 담긴 광활한 의미가 내가 와 닿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