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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나라는 사람은 좋아하는 어떤 작가를 만나면 거의 맹목적이 된다. 처음에는 다소 비판적인 시각으로 이모저모 뜯어서 생각하기도 하고 마음에 안 드는 구석에 실망을 표하기도 하고 짜증스러워하기도 하다가 일단 그 단계를 넘어서게 되면 무조건 좋은 시각으로 작품들을 대하게 되는 것이다. 비평가들이 뭐라고 말을 하든, 다른 독자들이 뭐라고 불평을 하든, 한번 믿음을 바친 절대자에게 순종하는 신도처럼, 정작 작가분은 내게 아무런 부탁을 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그저 좋아서 읽고 또 읽고 되짚어보는 것이다. 그래서 작품이 좋으면 좋은 대로 내가 기쁘고, 부족하면 내가 도리어 안스러워져서 어쩔 줄 모르는 심정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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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윤학은 어떠한 정신적 포장도 거부한다. 그래서 시 이곳 저곳에 묻어 있는 그의 추억은 황량함을 환기시키게 된다. 그의 두번째 시집 {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는 첫번째 시집의 '방법적 죽음'을 더 확대시켜 폐허가 되어버린 세계를 객관화하여 드러내고 있는데, 또한 그 세계는 황량한 추억과 연결되어 의미의 습기를 머금게 된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이 그냥 스쳐 지나가 버리는 일상 생활의 시간을 정지시켜 어떤 폐허의 풍경을 찍어내는 방법을 사용한다. '-고 있다'라는 진행형 문장을 사용하여 인물이나 미물들의 움직임을 보여주지만 그 움직임들은 생명력 없고 무의미한 움직임이다. 그래서 움직임은 있으나 시간의 흐름은 없는 듯한 장면이 흘러나온다. 그런 이상한 움직임들로 가득 찬 세계가 바로 이 세계, 폐허이다. [인상깊은구절] 물결들만 없었다면, 나는 그것이 한없이 깊은 거울인 줄 알았을 거네 세상에, 속까지 다 보여주는 거울이 있다고 믿었을 거네 거꾸로 박혀 있는 어두운 산들이 돌을 받아먹고 괴로워하는 저녁의 저수지 바닥까지 간 돌은 상처와 같아 곧 진흙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 섞이게 되네 |
| 이윤학의 『먼지의 집』이 먼지를 통해 시간과 관계를 조명하는 책이었다면 이 시집은 그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비유는 좀더 상투적이 되었고, 아무 것도 독자에게 (보여) 주는 것이 없다. 지난 시집과 모든 것은 비슷하다. 김주연이 지적한 동물적 알레고리도 그대로 살아있고, 그 문체도 살아있다. 그러나 독자에게 그 시가 와 닿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내가 보기엔 그것은 사색의 부족 때문이다. 첫 시집에 실린 「제비집」이 제비를 두고두고 본 깊은 사색의 결과였다면, 이번 시집의 「횟집 간판 위에 새우」는 그저 하나의 스쳐가는 기억일 뿐이다. 그 새우는 우리가 늘 흔히 보는 것이고, 주변에 새우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도 모두 하나 씩은 있을법하지만, 우리는 그 글을 읽으며 쉽사리 마음이 편해지거나 불편해지지 않는다. 무감하다. 시인의 주소록에 새우의 주소가 남아 있는지를 우리가 알아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시를 우리가 읽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시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가 인간의 영혼에 호소해야 한다는 말은 항상 진리값을 가지는 것이다. 이윤학이 잃어버린 것은 그 지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