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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 지극히 현대적인 삶 가운데에 서 있는 어느 직장인 하나. 그는 그것조차 부족한지 날마다 뉴스 피드를 살피며, 온라인 커뮤니티의 뉴스 코너를 살펴본다. 그리곤 다가오는 주말에는 굿 뉴스를 듣기 위해 교회로 갔다. 아직도 뉴스가 부족한 건지. 굿 뉴스를 그 누구보다 빠르게 전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기독교는 그 이유로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도 재빠르게 이용했고 더더더 앞으로 나아갔다. 인류 과학과 지성의 발전에 한몫했던 인쇄술의 발전은 내 관심 분야가 아니기에 잘 모른다. 당연히, 기술이 발전하니 좋아졌으리라는 막연한 생각만 했을 뿐. 그런데 이번에 읽은 책에서는 “42,666퍼센트의 능률 향상”(32쪽)을 이루었다고 적혀 있었다. 직접 겪어보지 못했으니 그 엄청남을 어떻게 알 수 있으랴.
그나마 알고 있는 것으로는 UCC가 대세였는데 요즘은 그것조차도 숏폼 형태가 주류다. 이런 시대 앞에서 텍스트가 왜 중요하냐고 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어디서든 무슨 정보를 읽는다. 그리고 시나브로 젖어 들고 자신의 의견이었던 것처럼 이야기하게 되는 게 아닐까.
내가 날마다 조금씩 읽어갔던 내용들이 모여서 나를 만들어간다. 스스로 생각한다고 믿었던 모던 보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고 믿었던) 내가 변화되어 간다. 무언가를 읽고서 가만히 앉아서 생각하고 달라질, 성찰의 시간을 갖기보다는 움직이는 영상과 밀려드는 뉴스에 흔들리는 존재가 옆에 있는 게 아니라 나였음을 보게 된다.
그런데, 조금이나마 희망이 보인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책 읽기, 텍스트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날마다 책을 읽으려 노력하고, 누군가의 에세이를 보면서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몰아치는 뉴스 피드의 선정적인 정치 기사보다는 삶을 나누는 이들에게 끌리고 응원하게 되었던 게 아닐까.
분명히, SNS 세상은 인류에게 새로운 공론의 장을 펼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초록은 동색’처럼, 나와 비슷한 사람만 맞팔하려고 하며, 귀를 기울이지 않았나. 분명히,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다른 목소리에도 귀 기울이고 듣고, 경청하고 함께 나아가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굿 뉴스, 바이블이 필요하다. 시대를 읽는 눈을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통해서 배우고 무엇을 나누고 살아가야 하는지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속도(크로노스)에 맞추는 게 아니라 빛의 시간, 카이로스에 맞추고 나아가는 삶이 좋겠다고 생각해본다. 그러려면 빠르게 이동하기보다 주위를 돌아볼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걸어보는 게 좋으리라. 그 안내를 받고 싶다면,
성경을 통해서 받으실 수 있기를 바라며. 참, 이 책은 그 동기를 부여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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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하루에도 수백, 수만가지의 사건이 일어난다. 그 사건들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사건들을 읽고, 해석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모든것을 다스리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엇보다 이 믿음이 있을때, 사건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어떤 상황에도 하늘을 바라보는 거룩한 초연함을 갖출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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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지는 뉴스 가운데 갈피를 못 잡는다.
어떤 사건에 해석이 가해지면, 문제는 더욱 어려워진다.
무분별하게 소비되는 미디어 환경 가운데서,
덕, 환경, 미디어, 공동체 등에 꾸준히 관심을 갖고 저술활동을 해 온
저자는 쏟아지는 뉴스에 파묻히는 환경 가운데서,
현재와는 다른 상황이긴 하지만,
우리는 단테(Dante Alighieri), 파스칼(Blaise Pascal)과
머튼(Thomas Merton), 도로시 데이(Dorothy Day) 등을 통해
먼저 저자는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상황 가운데서
우리는 하찮은 정보에 주목하기보다는
다음으로 저자는 시간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리스도인들은 예표적 상상력을 갖고 시대를 읽어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공동체를 강조한다.
신뢰할 수 있는 공동체와 함께 할 때
복잡하고 빠르게 변하는 세상 가운데 우리는 살아간다.
이 책은 풍부한 과거의 유산과도 충분히 소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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