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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이 소설은 두 개의 틀로 구성되어있고, 이를테면 성체험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죠. 일본소설 <가면의 고백>도 그런 맥락이지만, 조금 차이가 있긴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강아지의 죽음과, 신기루에 관한 이야기는 참 이상한 여운을 줍니다.
유미리 작가는 자신의 삶이 소설같다는 말을 했던 거 같은데.. 이 소설 <남자>에 그런 말이 나오더군요. 그리고 유미리의 소설은 이렇게 단언하기도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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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라는 말이 거슬리는가? 물론 유미리의 <남자> 이전에도 남자에 대한 책은 많이 있었다. 그리고 여성작가가 바라본 남자에 관한 이야기들도 있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을 최초라고 규정하는 이유는 이 책 속에는 남자의 몸과 마음이 동시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남자와의 성애 자체만을 서술했던 책들은 굳이 문학이라는 울타리를 빌리지 않아도 여기저기에서 손쉽게 접할 수 있다. 그리고 남자와의 순수한 사랑을 그려낸 글들이라면 동네 대여점이나 만화방에 가면 시시콜콜한 사랑까지 다 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을 과감히, 그리고 솔직하고 섬세하게 그려낸 책은 없었다. 그랬기 때문일까? 나는 유미리의 <남자>를 읽으며 해방감을 느꼈다.
솔직히 그녀가 이 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이라는 약간은 개방적인 공간 때문일 지도 모르겠지만 그보다는 유미리 개인의 자유로움와 기질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미혼의 여성작가가 남자의 몸과 성애를 다룬다는 것은, 그것도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남자의 몸 구석구석을 해부하듯 들춰본다는 것은 아직은 받아들여지지 않는 일일 것이다. 물론 유미리 못지않게 솔직대담한 작가이자 파격적인 문학관을 선보이는 배수아 역시 이와 비슷한 책을 쓴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책은 성애 자체나 남자의 몸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배수아 자신이 느끼는 남성성과 남성에 대해 자유롭게 그려낸 편이 더 맞을 것이다. 단순히 이 둘의 차이를 국가로 규정짓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인생자체가 소설이라는 유미리의 배경을 제외하고서라도 이 책은 충분히 파격적이다. 남성의 몸 부분부분을 따로 떼어놓고, 거기에 알맞는 에피소드를 삽입하는 것이나, 작가 자신이 포르노 소설을 쓰게 된 배경과 과정을 교차해서 그려내는 것은 작가 자신의 탁월한 문체감과 자신감이 겸비되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몸 자체에 경도되기 보다는 사랑과 배신, 추억, 아픔 등 복합적인 감정이 남자의 몸이라는 주제와 결합해서 보기 드문 수작을 연출해낸 것이다.
비록 이 책이 소설이라는 형태를 띄고 있다곤 하지만 나역시 다른 독자들과 다름없이 작품 속 인물을 작가 자신과 동일시하는 우를 범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문란하다거나 부도덕한 인물로 낙인찍거나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이 소설 속 주인공의 모습에 작가의 모습이 다만 10%라도 포함되어있다면 그녀에게 많이 아팠냐고, 이제 그만 아픔을 털어버리라고 말해주고 싶을 뿐이다. 유미리는 단순히 재일교포작가라고 분류할 수 없다. 그녀의 생각이나 시선이 한국의 여성들과 많이 닮아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만들어낸 남자라는 이야기도 다만 허구라고 단정짓기엔 석연치 않기 때문이다. 남자는 어떻다 라는 규정을 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남자 역시 여자와 같이 신체기관들로 이루어진, 같은 감정을 느끼는 사람임을 다시금 확인시켜준 소설이었다. 그리고 작가 유미리의 뛰어난 문장력을 마음껏 맡볼 수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유미리가 좋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비친 남자도 좋다. [인상깊은구절] 남자가 활력을 잃은 것만큼, 젊은 여성이 성을 자본으로 해서 부지런히 돈을 벌고 있는 것이 지금의 세태인 것이다.남자>남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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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리 소설을 처음 읽었고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고 좋은 작가란 생각이 들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서평을 쓸까 왔지만... 다른 이들의 글을 보니 삭막해진다. 왜 이리 우리 사회는 성에 관한 이야기나오면 이렇게들 흥분하는지 모르겠다. 정작 성에 관해서는 불감증이면서, 성에 관한 "이야기"에만 흥분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유미리의 이 글을 이년전인가 다빈치라는 일본잡지에서 연재되는 걸 보았다. 유미리는 우리 나라 여자 소설가처럼 그저 그런 작가이거니 해서 연재를 단 한번도 읽지 않았고. 이렇게 번역이 된 다음에야 우릴 말로 읽었다. 독자평중에서도 이게 소설이냐, 아니야는 논쟁이 있던데. 확실한 기억은 아니지만 연재당시에 그냥 에세이로 소개되었던 것 같다. 문학사상사란 출판사는 문학에 대한 아무런 사상도 없는 출판사이니, 에세이를 소설로 억지로 둔갑시켜 팔아먹는 건 그러르니 한다.
그 점을 시비걸리기에는 유미리의 글이 너무 아깝다. 그녀의 솔직함, 대담한 묘사에 나는 반했다. 자심의 체험을 조심스레 내놓고 호들갑을 떨거나 발표 즉시 이혼(?)을 하는가 싶어 공포에 떠는 우리나라 작가들이 얼마나 불쌍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상깊은구절] 남자가 여자 몸 구석구석에 애착을 갖는 것은, 상상력을 작동시키지 않으면 성적인 흥분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유방을 좋아하는 것은 빨거나 주무르는 행위가 기분좋게 느껴지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상대방 여자가 기분이 좋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여자가 기분이 좋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
|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작가 유미리와 이 소설에 나오는 화자를 동일시했다. 그래서 '이게 뭐가 소설이야? 에세이구만..'하며 책 표지에 있는 <소설>이란 글자에 코웃음을 쳤다. 유아기적 독서 방법이었다. 이 책이 그리 흔치 않은 액자 소설 형식이라는 건 뒤에 나오는 작품 해설을 보고 알았다. 그러니까 이 책의 "나"는 유미리가 아닌 허구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걸 알았을 때의 황당함이란.. 그러나 내가 이 책을 그런 식으로 읽을 수 밖에 없었던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잘못된 독서에 대한 변명이랄까? 첫째, 유미리에 대해 아는 사람은 누구나 동의하겠지만 이 소설 속의 화자는 유미리와 거의 흡사하다. 화자가 겪은 일들은 대부분 유미리 자신이 직접 겪은 일들이다. 따라서 이 화자의 모델은 유미리 본인이다. (유미리의 대부분 소설의 여주인공이 그러하듯) 물론 모델은 모델일 뿐이고 확실히 이 화자에 허구적 요소가 있다니 결국 책 속의 여자는 가공의 인물일 뿐이다. 어쨌든 이런 배경 지식 덕에 나는 의심의 여지도 없이 화자가 유미리라고 착각했다. 둘째, <남자>를 읽기 얼마 전에 <훔치다 도망치다="" 타다="">라는 유미리의 에세이를 읽었다. 원제 <사어사전>인 이 책은 <남자>와 구성이 비슷하다. 즉, 특정 단어(<남자>의 경우엔 신체의 부분)를 각 장의 제목으로 달고 그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푸는 방식으로 글이 전개된다. 때문에 나는 <남자>를 <사어사전>의 연장선에 두고 읽은 것 같다. 따라서 자연히 <남자> 역시 에세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책을 잘못 읽기는 했어도 이 책은 확실히 파격적인 책이다. "아쿠타카와상을 받은 순문학 작가인 유미리가, 너무도 사실적인 묘사로 숱한 남성과의 갖가지 형태의 성체험을 대담하고 노골적인 필치고 그려냈"다는 점에서, 특히 " 그 주인공이 바로 유미리의 지난날과 오버랩되어, 바로 작가 자신의 자전적 고백 소설로 비쳐졌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사실 이 책은 노골적인 성애 묘사가 큰 특징이다. 그러나 이 점만 너무 지나치게 부각되어 광고 효과로 사용되는 듯한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물론 이 책은 야하지만, 그 야함이라는 것이 최소한 나에게는 에로틱하기보다 비참하고 슬픈 느낌이었다. 그것은 아마 존중받지 못한, 사랑받지 못한 행위이기 때문이리라. 어쨌든 이 책을 읽고 나는 유미리가 더 좋아졌다. 작품 해설에 자세히 나와 있는 유미리의 성장 배경도 그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다. 이처럼 큰 불행을 겪은 젊은 여자가 그 불행을 딛고 성공했다는 것, 자신의 비참했던 기억을 바탕으로 솔직하고 대담한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그 용기에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남자>사어사전>남자>남자>남자>사어사전>훔치다>남자>소설> |
| 우리 앞에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고백하는 한 창녀가 있다. 그녀는 '남자'라는 제목을 달고 자신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고 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이건 너무 심한 자학이야!"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것은 아마 이지메, 자살, 자해 등으로 가득찬 그녀의 과거라는 흔적 때문일 것이라고 그녀를 이해하려 했다. 결국 그녀 얘기 중간에 그녀는 타인으로 부터 "당신은 정작 섹스를 좋아하지 않죠?"라는 물음에 어쩔줄 몰라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는 단지 살과 살이 맞닿아 있음에 그녀 자신은 안락함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그녀 가슴은 뻥 뚤려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뻥 뚤린 가슴을 그녀는 섹스로 채우려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습게도 그녀는 섹스로도 그 공허를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왜 유미리는 이런 얘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는 걸까? 나는 그녀 얘기를 들으면서 줄곧 "그녀가 자신의 얘기로 자신의 몸을 독자에게마저 내놓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얘기를 들을 독자는 그녀 얘기에 동정을 느끼기 보다 오히려 그녀의 신체에 대한 욕구충족으로, 그리고 여자가 생각하는 남자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할 것이며, 그녀를 엿보고 싶은 관음증마저 자극하는 것이 되기때문이다. 이는 마치 그녀의 섹스가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학적인 양태로 나타나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그녀를 소개한 포주는 바로 상업성, 그리고 자본주의였다. 이 둘은 그녀의 처녀성을 먼저 선점한 후, 그녀의 신체를 세상의 모든 독자에게 내놓은 것이다.(그녀의 얘기 전반에 그녀는 자신이 큰 힘에 무력하다는 것을 들려주고 있었다.) 즉 상업주의는 돈을 벌고, 그녀의 얘기를 듣는 사람들은 책 값이라는 화대로 자신의 쾌락과 여성에 대한 상상으로 자기만족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또 다른 자학으로 자신을 학대하는....... 마치 그녀의 얘기 속에 나오는 또 다른 얘기 속의 신참 창녀와 그녀를 독점하려는 포주의 얘기 처럼....... 아마 그녀는 이 글을 쓴 후 어느 어두운 방에 칩거하며, 난자당한 자신의 삶을 가쁜 숨으로 몰아쉬고 있는지 모른다. |
| 이책은 그 이름만으로도 화제가 되었던 유미리라는 재일교포 작가의 최초의 성애소설이다. 그녀의 인생역정만으로도 이미 소설 한권쯤은 쉽게 썼을 그 얘기로도 유명한 훌륭한 작가인 유미리가 남자의 신체부분 18개를 토대로 자신의 섹그 체험, 가상 소설등을 대비시켜가며 써내려간 소설이다. 그녀의 소설을 보며 일본 문학이 으례 그러려니 하면서도-솔직 담백한 성의 묘사-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그 묘사가 마치 내 자신의 몸을 노출시킨 듯한 묘한 마력이었던 것 같다. 자칫 성애 소설이라 하면 포르노 소설같이 되버릴 수도 있는 것을 유미리는 그녀 고유의 사실적이고 감각적인 묘사로 그 빛을 더하고 있다. 이미 性이라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뭇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켜왔다. 그것은 성이라는 것이 어느 특정 시대의 특정한 논리나 헤게모니, 패러다임등으로 휘둘려질 수 없는, 또한 그것으로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우리의 일상생활이기 때문이리라. 그만큼 성은 인간 본질의 문제이고 자연의 일부로서의 겸손함마저 요구하는 것이라 생각되어진다. 그러나 시대를 거치면서 이 문제는 많은 상업적 목적으로 인해 타락하고 지배 이데올로기의 문제, 헤게모니등으로 퇴색되어지고 변색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작가들 역시 많은 수가 그 상업적 목적이라는 자본의 논리에 묻혀 성의 문제를 감추고만 싶어지는 공공연한 비밀로 자리잡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 유미리라는 작가는 그러한 것들 모두를 충족시켜주기에 충분하다는 것이 내 의견이다. 상업적 목적, 진실된 성의 탐구 모두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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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리라는 사람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주말의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였다. 가족시네마로 주목을 받고 있었던 때였는데 가족 모두가 목욕탕에 들어가 있는 장면이었다. 그 중엔 그녀의 실제 가족들이 몇 명 있었거나 전부였거나 했던 것 같다. 그녀의 얼굴은 묘한 느낌을 주었는데 어쩐지 언론의 촬영을 거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니면 거부하지는 않겠으나 사실은 불쾌하다는 표정. 그리고 이 책을 집어들게 된 것도 표지의 또다른 복잡 미묘한 표정 때문이었다. 설명하기 힘든 사람이라는 느낌.
그녀를 몰랐으므로 그녀의 살아온 자취가 그렇게도 복잡하고 고통과 결부되어 왔었는지도 몰랐다. 주목받는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그녀의 모습에서 매우 지적이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문제 있는 가정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인 엘리트라고 생각했었다. 그랬기 때문에 속표지의 그녀에 대한 짧은 역사에도 놀랐고, 소설이라고 쓰여있으니 소설로 읽어야겠는데 읽어보면 본인의 이야기도 나오는 것 같고 어디까지가 소설이고 어디까지가 에세이인지 감을 잡기가 어려웠다.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픽션이 가미된 논픽션, 혹은 논픽션을 바탕으로 한 픽션일까. 그것이 더욱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읽을 수 없게 한다. 더구나 그녀의 문체는 숨을 한번 흡~하고 들이마시게 하는 약간의 긴장감과 조금은 가슴이 저리는 객관성을 가지고 있다.
성에 대해서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이야기를 풀어놓는 작가들은 많다. 아마도 일본에는 더욱 많을 것이다. 나에게는 이 이야기가 성적인, 혹은 포르노 소설을 써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에 근거한 글로는 별로 읽혀지지 않았다. 솔직하고 과감하다고는 할 수 있겠지만 별로 말초적인 느낌을 주지도 않았다. 오히려 참고 스며낸 고통에 가까운 느낌을 갖게 했는데 아마 그녀의 책 표지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던 표정이 그것을 포함하고 있지 않나 한다. 책의 내용에 관해서는 격찬하거나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무엇을 읽었는지 잘 알 수도 없고 특별히 느낀 무언가나 나 자신의 생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얻었다고도 할 수 없다. 그저 "그녀의 책을 한권 읽었다" 라는 경험만 남아있다. 하지만 이 책으로 인해 그녀의 다른 책들도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인상깊은구절] 나는 작품에서 남자를 그리려면 신화적인 존재로 등장시킬 생각이었다. 남자의 얼굴이나 성격도, 육체도, 신화성으로 채색된 것이어야 한다. 정장 차림으로 도심의 빌딩가를 걸어 다니는 광기와 지성과 늠름한 육체를 가진 남자...... 그러나 현실 속에서 만나는 사람은, 좀스럽고 믿음직스럽지 못한 육체와 정신을 가진 남자들이었다. 나에게서 떠나간 눈을, 귀를, 손톱을, 그리고 엉덩이, 입술, 어깨, 팔, 손가락, 머리칼, 뺨, 이빨, 페니스, 젖꼭지, 수염, 다리, 손, 목소리, 등을 가진 남자를 나는 그리워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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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리의 『남자』는 소설과 에세이의 중간 형식 그러니까, 소설을 빙자한 에세이거나 에세이를 빙자한 소설이다.게다가 이 책은 여성의 시각에서 본 남자의 육체라는 싱겁지 않은 내용을 취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라 해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것으로 또는 그렇게 떠들썩하게 광고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소설로서의 의미두기에는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시정잡배의 성적 호기심을 채워주는 꽤나 고급스러운 문화 생산물이라는 점에서는 나쁘지 않다.
어느날 유미리는 편집장(어느 출판사의 편집장인지는 내 알 바 아니지만)인 다카니시로부터 포르노 소설을 써달라는 제의를 받는다.그리고 이 제의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고심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사실은 남성의 실체에 대해 써보겠다는 의도를 가진 적이 없을뿐더러 남성의 몸 어딘가에 애착을 느껴 본 적도 없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노트에 무언가 끄적거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카나시에게 포르노 소설을 쓰는건 힘에 부치지만, 연애 소설이라면 써보겠으며 일년 후에 원고를 매듭짓겠다는 팩스를 보낸다.
여기까지가 작가가 소설도 아닌 에세이도 아닌 이 작품을 쓰게 된 배경이다.그리고 책은 명조체 90%에 고딕체 10% 정도의 비율로 액자형식을 띠며 전개된다. 명조체의 부분에서 작가는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풀어내고, 고딕체 10%에서 작가는 다카나시로부터 애초에 부탁받았던 포르노 소설을 써보고자 한다.
하지만 애초의 의도야 어떻든 작가는 자신이 만났던 많은 남자들,그리고 그 남자들의 육체 여기저기(눈, 귀, 손톱, 엉덩이, 입술, 어깨, 팔, 손가락, 머리칼, 뺨, 이빨, 페니스, 유두, 수염, 다리, 손, 목소리, 등)를 그리 즐겁지만은 않은 목소리와 더불어 휘파람이라도 부는 것처럼 음울하게 쳐다본다.그리고 책의 중반 이후에는 작가가 가장 최근에 사랑했던 한 유부남, 그리고 그 유부남의 아이를 잉태한 자신, 그리고 그 유부남과의 이별 여행(어색하대로 이름붙이자면)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애초에 "나는 남자만이 여자의 몸을 구하는 일방적인 에로스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몸을 구하지 않을 수 없는 에로스의 교환에 의한 연애,사랑을 낳는 몸이 존재하는지 어떤지를 쓰고 싶은 것이다."라고 말했던 작가가 자신의 의지를 얼마나 구현시켰는지 의심스럽기는 책을 모조리 읽은 다음까까지도 마찬가지이지만 꾸며낸 것이 아닌 논픽션으로 자신을 이야기했다는 점에서 나름의 적확성을 가지고 연애의 에피소드를 짚어 낸 부분이 많은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가령 이런 부분 "...8년 가량 연극계에 있었던 내 경험으로 말한다면, 애인역을 맡게 되면(그러니까 연극에서 남자를 사랑하는 여인의 역을 맡게 되면) 진짜로 애인 관계로 변화하는 확률이 상당히 높다.이것은 사랑이 얼마나 유희성과 연극성에 뒷받침되어 있는가를 얘기해주고 있다."에서는 정곡을 찔린 것처럼 지나간 시간 진행되었던 내 연애의 한 토막 떠오르게한다.
게다가 "남자의 팔은 저울과 비슷하다.자신의 팔 안에 안주할 수 있는 여자에게 기우는가, 팔을 깨물고서라도 밖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여자 쪽으로 기우는가, 남자는 이 두 가지 타입으로 나누어지는지도 모른다."라고 말할 때는 이 여자 정말 남자에 도통한 것 아니야, 싶어지기도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비참한 것은, 정면으로 칼에 찔리는 것이 아니라, 등을 찔려 심장이 관통되는 것이란 걸 (이 부분에서 나는 하나비의 어떤 장면을 연상하게 되었다. 그 장면에서 형사에게 깔려있던 도둑인지 강도인지가 쏜 탄환이 형사의 등을 뚫고 피와 함께 튀어 나온다.얼마나 놀랬던지.) 남자들은 모르는 것일까. 무엇인가를 지키기 위해 무엇인가를 버리려면, 그 버리기로 한 것과 정면으로 마주보아야 한다.결코 등을 보여서는 안 된다. 아기를 낳자, 하고 나는 생각했다..."라는 부분에서는 자신이 자신을 버린 유부남의 아이를 낳기로 결심한 배경을 그럴싸하게 써놓는 것으로 남자에 대한, 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해에까지 다가서려 애쓴다.
하지만 결국 남자의 실체라는 것,인간의 실체라는 것이 얼마나 희미한 것이냐 하는, 또는 나 아직도 그 유부남을 사랑한다,하는 쓸데없이 축축한 감상으로 글은 마무리 된다. 이렇게. 그는 핸들을 잡은 채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것 봐, 니게미즈 (신기루의 일종, 초원이나 아스팔트 길 같은 데서 멀리 물이 있는 것같이 보이다가, 가까이 가 보면 또 멀어져 가는 대기 현상 - 역주)야."
"니게미즈가 뭔데?"
"니게미즈를 몰라? 봐, 저기, 길이 물에 젖어 있는 것처럼 보이잖아."
"저기 물이 고여 있는 데 말야?"
"……정말. 신기루 같네."
내가 먼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치기도 했다.
"봐, 저기도 니게미즈, 길이 흠뻑 젖어 있네."
살뜰하고 쓸쓸하게 읽을 필요는 없지만 이 추운계절 바닥에 배깔고 드러누워 발가락 까딱거리며 읽기에 적절하다.고개 크게 주억거릴 필요 없으니 머리 아플 일도 없다. [인상깊은구절] 욕망이라는 것은, 어떤 인간이라 할지라도 사회가 인정하는 일정한 수위에서만 유지할 수 있다......욕망은 싹이 잘리고, 기껏해야 인간은 한두 개의 욕망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들은 경제의 불황보다 욕망의 불황에 허덕이고 있는 느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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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흥미위주로 이 책을 읽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조금은 그녀를 가깝게 느끼게 되었다고나 할까, 나는 그녀를 감히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그를 위한 사회가 정해놓은 여자의 일상을 살고자 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그녀는 자신의 본연의 모습-글을 써야 진정으로 살 수 있는-을 잃게 될까봐 두려워했다. 그를 사랑하게 된다면 자신은 글을 쓸 수 없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그녀는 그와의 헤어짐을 결심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도 처음에는 '그를 얻게 된다면, 그래서 완벽히 일상안에서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문학을 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완벽한 사랑을 얻을 수도, 일상안에서의 완벽한 행복 따위는 가능할 수도 없을 거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상황들이 어쩔 수 없이 헤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스스로 마음안에서 그를 버리기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결코 버려지지 않는 그를 버렸다, 라고 거짓말을 하기조차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그녀 자신의 생활을 담보로 한 그녀 문학의 진실함, 그 위대한 힘을 믿는다. [인상깊은구절] 그는 나에게 손을 내밀어 현실과 허구의 틈새에 빠져 가고 있는 나를 틀림없이 육지로 끌어올려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계속 만나면, 나는 그의 자식을 낳고, 둥지를 튼 어미새처럼 청소와 세탁, 쇼핑을 하고, 그와 자식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두 사람이 먹은 접시를 닦고, 그의 보호를 받으면서 함께 늙어간다. 그렇게 되면 나는 글을 쓸 수 없을 것이 틀림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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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소설이 지니고 있는 사소설적인 성격은 언제나 잠들어 있던 독자의 오래된 질문을 깨운다. 이거 소설인가요 아니면 진짜 있었던 일인가요? 유미리의 <남자>는 유미리의 수필집이나 그의 소설을 몇권 읽은 팬이라면 또야 할 정도로 비슷한 주제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어두운 유년기와 유부남과의 사랑.
하지만 이 책이 단지 이전 소설의 변주곡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들게 하기 보다 새롭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좀더 관조적이 되는 듯한 시선과 새로운 글씨기 형식탓일 것이다. 기존의 어두운 결말에서 벗어나 희미하나마 희망의 빛을 보여주었던 전작 <골드러시>에서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느낌이다. [인상깊은구절] 욕망이라는 것은, 어떤 인간이라 할지라고 사회가 인정하는 일정한 수위에서만 유지할 수 있다. 현재는 최강국의 대통령, 세계적인 대스타라 하더라도, 가정을 가진 채 동시에 애인을 사귀는 일은 어렵게 되어 있다. 열대우림을 벌채하는 것처럼, 욕망은 싹이 잘리고, 기껏해야 인간은 한 두개의 욕망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들은 경제의 불황보다 욕망의 불황에 허덕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 이빨골드러시>남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