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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저자분과 이 책, 독특하다. 1930년에 태어나신 저자분은 2015년 현재 85세이시고 번역가이자 필자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신다. 이 책은 번역서가 아니라 직접 쓰신, 노년의 자세에 대한 에세이다.
<폭주 노년>이라는 제목은 마라톤의 막판 스퍼트에서 따 왔다. 노년은 은퇴하고 조용히 놀면서 보내는 시기가 아니라 죽음 직전에 폭주하는 시기라고 하신다. 저자는 '최후 5킬로미터에서 승패가 결정된다. 내 인생에서 걸음이 멈춰지는 순간은 죽을 때뿐이라는 각오로 젊어서보다 더 미친 듯이 달려야 한다. (238쪽)'고 외치시며 젊은 번역자들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번역을 하신다. 체력은 떨어져도 인간의 지적 능력은 나이들수록 더 좋아진다며, 과거는 영재의 시대였지만 미래는 노재(老材)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신다. 노재,라구요? 정말 멋짐!
끝까지 일하고 달린다, 바로 이 점이 이 책과 나이듦에 대한 다른 에세이 서적의 내용과 다른 점이다. 은퇴 후 어른답게 너그러운 마음으로 자녀를 대하고 봉사하고,,, 이런 뻔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어른답게 존경받으려면 어찌어찌해라란 내용도 없다. 건강을 위해 절제하라는 말도 없다. 이분은 끝까지 마시고 달린다. 아놔, 어쩜 좋아! 딱 내 취향인걸! 맥주 아니라 소주파이시긴 하지만.
즐거운 여생은 다른 데 있지 않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생산적인 일을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최고로 즐거운 여생이다. - 66쪽에서 인용
인간은 천성이 나약하다. 특히 마흔을 넘어서면서 심리적으로 급격히 무너진다. 인생의 반을 살아오면서 앞으로 다가올 반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벌써 반이나 지나간 인생을 붙잡으려고 아등거린다. 어느 순간 미래에 대한 기대를 잊고 과거에 대한 추억과 후회에 붙들리는 것이다. (중략) 60이 넘어서라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면 여전히 청춘이다. - 89쪽에서 인용
꼬장꼬장하고 칼칼하게 노인들의 현실을 비판하는 문장을 쓰신다는 점에서는 마루야마 겐지와도 비슷하다. 그런데 이 저자분은 겐지 스타일에 유머를 더했다. 찐따 왕따 에 가정 폭력 운운하는 아래 인용 문단도 웃기지만, 부인이 등장하는 에피소드 부분은 정말이지 읽다가 뿜었다.
평생을 일해서 헌신해 왔더니 하루아침에 뒷방 늙은이 대접을 한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잇을 테지만, 그럴수록 현재의 자기가 어떤 모습인지 똑바로 눈을 뜨고 바라보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나이 들어 가족에게 '왕따'당하는 모습은 스스로 재현해 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가족 모두가 나를 사랑하고 있으리라는 착각, 내가 고생하고 노력해 온 만큼 지금부터는 가족들이 나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해 줄 차례가 되었다는 착각, 나는 죽을 때까지 가족 위에 군림하고 명령권자로서 권력을 누릴 권한이 있다는 착각이 머릿속에, 그리고 행동과 말에 배어 있다.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착각하기 시작하면 가족과의 단절은 기본이고, 가족으로부터 은연중에 '찐따'로 분류되는 슬픔까지 맛봐야 한다. 이것은 개인의 불행만이 아닌 가족의 불행이기도 하다. 사랑하고 존경해야 할 가장을 '찐따'로 여길 수밖에 없는 고통을 가족에게 가용했다는 점에서 보이지 않는 가종 폭력이기도 하다. - 214 ~ 215쪽에서 인용.
글 밀도가 매우 촘촘하다. 한 꼭지를 잘라 여러개 꼭지로 늘일 수 있어 보일 정도로 집약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한 문장을 여러번 반복하고 중언부언하면서 한 꼭지 분량을 늘려 쓰는 고약한 저자들은 반성해야한다. 작가의 정신 연령은 문장과 글 구성이 말해준다.
이분의 다른 책도 읽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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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으로 죽어가는 과정 중에 질풍의 시기가 아닌 때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려서는 놀이의 질풍에 사춘기에는 방황의 질풍에 학창시절에는 공부의 질풍, 그리고 밥벌이, 삶의 질풍을 겪다가 질풍이 잦아드는 시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멈춰버린 질풍은 공허를 만들고 그 공허 속의 외로움은 가족, 친구, 자식에게 늘어놓는 하소연으로 변질되거나, 경험을 앞세운 쉬운 훈계들로 채워져 주변 사람을 멍들게 한다. 결국 그렇게 사람이 멀어져 더 외로워지는 것은 아닐까?
책을 펼치고 조금 읽은 후에, 다시 책 앞으로 가서 저자의 생년을 확인하였다. 1930년. 오래 전 직장 상사가 1929년생이셨는데, 그 분이 쓰는 대부분의 글은 한문이었고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 없는 단어들이었다. 그런데 글이 이렇게 젊고 발랄할 수가! 나이를 사기로 드시는 분인가 싶은 생각을 하며 읽기 시작하였다. 내가 아는 노년과는 전혀 다른, 아니 낯선 노년이다. 젊어 보이려고 빨간 바지를 차려입고 나가는 그런 젊음이 아니라 머리 속 젊음. 노년을 노년에 묶지 않고 그저 욕망을 갖고 있는 한 사람, 나 자신으로 살겠다는 저자의 의지가 읽힌다. 나이에 집착하여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일보다는 자식 또는 직책과 명함 또는 현재 그게 없다면 과거의 직책에 대한 연연하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현재의 자기 것이 아닌 것을 그리워하면 사람은 스스로 초라해진다. 자신의 가장 찬란했던 순간에 멈춰서 썩어가는 그런 일을 하지 않겠다는 '폭주'는 환영할 일이다. 인간 수명을 생각할 때 얼마를 더 가야 끝날지 모르는 인생의 끝부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저자가 주는 이야기를 넙죽넙죽 받아 읽으며 책을 덮었다. 글은 군더더기 없이 늘씬하다. 유머도 꽉꽉 들어차 있다. 가정 폭력 피해자로써 글의 시원함을 생각하면 최근에 읽은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가 생각나기도 하자만, '인생-'의 시원함은 베일 것 같은 날카로움이지만, 이 책의 시원함은 탄산수 같은 자극적인 시원함이다. 이 폭주노년 분께 부드러운 수육에 위스키 한잔을 대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읽을 때는 부모님께 선물할까 생각하였지만, 그보다는 내 또래에게 권하기 좋은 책이라는 생각을 했다.
책 편집 상태는 편안하고 평범하다. 최근 빽빽한 글씨를 많이 보다보니 조금 넉넉한 줄간격이 이리 반가울 수가 없었다.
===================== 이 책에는 언급하고 싶은 부분이 너무 많지만, 저자가 건강보험이야기 후 건강자랑을 하다가 병원에 한 달간 입원하게 된 사연을 이야기 하는 부분이다. 술을 좋아하는 저자가 술마시고 온 후에 벌어진 거실 참극(?)에 이어진 욕실 제압으로 부상을 입게 된 저자의 이야기 일부다. 이 이야기의 결론은 자기 눈치를 보지말고 남의 시선만 신경쓰지말고 적당히 가식을 떨더라도 너절해지진 말자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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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의 마지막 날이 저물고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일년이란 시간이 얼마나 빠르게 지나가버렸는지, 다가올 2016년은 또 얼마나 급히 흘러갈지 가늠 조차 되지 않는다. 노년이 된다는 것이 이제는 무시할 수 없는 실체로 한층 바짝 다가오는 기분이라 노년에 대한 책에 저절로 눈이 가는 처지에 『폭주노년』이라는 자극적인 노란 책에 끌리지 않을 수 없다. 이상하게 질풍노도, 비행 청소년 만큼이나 폭주노년이라는 말도 입에 달라붙는다.
저자는 1930년생 말띠, 우리 부모님 연배다. 일제시대부터, 한국전쟁, 독재와 경제개발, 민주화 투쟁의 모든 시기를 견뎌내며 오직 살아남기위해 발버둥친 세대라 지금 젊은이들이 보기에는 그저 염치없이 자기 밥그릇만 챙기는 것으로 보일테지만, 징할 정도로 생명력을 가진 이분들의 목소리도 들어볼 만하다. 물론 저자는 평범한 노인이 아니라 정상범주에서 벗어나 표준편차 한참 밖에 위치한 특별한 노인이기는 하다.
노화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치매일정도로 지적능력의 감퇴가 당연시되지만 동작성 아이큐만 떨어질 뿐 언어성 아이큐는 더 좋아지며, 체력도 생각하는 것처럼 심각하게 쇠퇴하지 않는다고 한다. 심장과 근육의 예비근력이 떨어져 여유분이 없어지는 것이지 실생활에 필요한 체력은 줄지 않는다며 노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각과 감정의 힘이 쇠퇴하여 의욕이 없어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44-45쪽).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세상이 궁금하여 배우고, 일하고, 놀고 싶고, 호기심이 있다면 청년과도 같은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말은 흥미롭다. 인생이라는 긴 마라톤의 마지막 스퍼트라고나 할까? 나 또한 노화나 은퇴에 대해 두려움이나 불안함 못지 않게 기대감 또는 설레임도 있기때문에 씩씩한 80대 청년의 사자후가 반갑기 그지 없다.
저자는 끊임없이 여자를 좋아하는데 여자를 잘 모르겠다고, 남자에 대해서는 알만큼 알기에 남자가 싫다고 말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이 나이에도 남자를 잘 모르는게 아닐까 싶어졌다. 남녀공학에서 홍일점 노릇도 해보고, 지금도 남자동료들이 더 많은 직장에 근무하며, 집에 돌아가면 남자뿐이지만 저자가 하는 말 중 얼마만큼이 진실인지, 얼마만큼이 남자의 호기를 드러내기 위한 과장인지 판단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가지 서늘하게 깨닫게 된 것은 직장에서 은퇴하더라도 사회에서 은퇴해서는 안되며, 죽는 날까지 성숙과 배움을 위해 달리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눈물이 나올 정도로 많이 웃었다. 우리 부모님도 이렇게 신나는 노후를 보내시기 바라며 폭주할 내 노년을 위해서도 축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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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으로 인해 나는 노년에 대한 환상이 깨져 버렸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젊었을 때 어기적거리며 빈둥빈둥 거리며 시간만 허비하다가는 노년은 처참할 거라는 악담을 퍼부었다(내 노년이 두려워지기까지 하다). 그냥 확 깨는 책이다. 저자 스스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실화(맞겠죠?)를 들이대니 어쩔 수가 없다. 일단 60대에 시골에 집짓고 글쓰며 편하게 살려다가 빈털털이가 된 저자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야겠다. 한편으로는 그런 노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저자에게 고맙기도 하다. 덕분에 내 노년에 대하여 경각심이 생겼다. 신문기자로 30년을, 한국 생산성 본부에서 편집위원으로 10여년을 다닌 저자는 누가봐도 편안한 노후를 누릴 자격이 있어 보이고 마땅이 그런 노후를 누린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런데 노년에 빈털털이가 되서 (시골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순박하다는 건 커다란 착각일 듯) 조문갈 차비를 걱정해야 할 처지에 내몰리다니. 노년에 그런 벼랑끝에 몰릴 거라는 건 꿈에도 몰랐을 거다(세상은 노년이라고 봐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 벼랑 끝에 섰기 때문에 저자는 돌파구를 찾았고 열혈 노년을 살게 된 것 같다. 그 벼랑이 사그라져가던 불꽃을 활활 타게 하는 풀무질 역할을 한 것 같다. 아이러니컬하다. 위기 속에 기회가 있다는 건 진리인걸까. 이 책이 말하는 건 이런 거다. 살아 있는 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바쁘게 살아야 한다는 거다. 늙었다고 일할 생각을 접고 시골 어딘가에 집이나 짓고 편안히 살려고 하면 그건 죽음을 재촉할 뿐이란다. 그리고 몸은 늙지만 유일하게 뇌는 늙지 않으니 죽는 순간까지 열심히 뭔가를 하라는 거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저자의 말에 설득당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생각했던 편안한 노년이란 환상에 불과한 것임을 나는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돈이 많아서 일 안해도 먹고 살 수 있다고 해도, 세상을 위해 또한 자신을 위해 어떤 일을 한다는 자부심과 자신감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자원이다. 부자들 중에 상당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고 한다. 일이란 단순히 돈벌이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듯 하다. 젊어서나 늙어서나 일로 인한 보람은 삶의 활력이 된다. 따라서 노후 준비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나이들어도 할 수 있는 일거리를 준비하는 것이다. 저자는 기자 생활을 했고 일본어 번역도 했고 책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하니 80세가 넘는 나이임에도 번역과 글쓰기를 하고 있다고 한다. 100세까지 일을 하겠다고 하니 저자의 포부가 대단하다. 저자는 '폭주 노년'이라기 보다 '열혈 노년'이 더 맞다는 생각을 했다. 저자는 어떤 젊은이보다 더 뜨겁게 노년을 보내고 있는 듯 하다. 젊은이들이 반성해야 할 정도다. 저자가 노인들을 향해 하는 일갈 또한 이 책에서 눈여겨볼만 한 부분이다. 저자는 자기 생각에 갖혀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노인들에게 또는 권위주의에 사로잡혀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노인들에게 한 마디씩 한다. 인정하기 싫겠지만 현실을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변화를 모색하라고. 그래야 '왕따'와 '꼰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그런데 이 책에 언급된 분들 중에 이 책을 보면 기분 나쁠 분들이 있을 것 같다. 이 책에 가끔 나오는 저자의 이야기를 보면 우여곡절을 많이 겪은 분인 것 같다. 해방이 되어서 서울 시내에 나갔다가 뒷주머니에 톨스토이의 책 한 권이 있다는 이유를 신의주까지 끌려갔다가 도망쳐 나오기도 했단다. 정말 산전수전 몽땅 다 겪으신 분 같다. 인간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자주 움직이고 여기저기 관심 갖는다면 희망을 볼 수 있는 것 같다. 무언가 바쁘게 열중하는 사람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늙을 시간이 없을 것이다. '노년'이라는 생소한 단어를 만났다. '청년'도 있으니 '노년'도 있겠지. 노인보다 '노년'이 더 괜찮아 보인다. 노년의 입장에서 써내려간 글들은 노년이 아닌 이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을 줄 것이고, 노년에게는 진한 공감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게 있다. 그건 저자의 뜨거운 열정이다. 저자는 분노하고 또 분노하라고 한다. 세상을 향해 자신을 향해. 죽을 날만 기다리지 말고. 창창한 살아있음을 시끌벅적하게 즐기라고 외치고 있다. 이제 나에게 편안한 노년은 없다. 대신 뜨거운 노년을 꿈꾼다. -------------- 감히 단언하건대 인간 진화의 끝은 노화다. 인간은 갓난아기로 태어나 노인으로 죽는다. 다윈의 진화론이 거짓말이 아니라면 세월을 이겨 낸 생물체는 그전 기간의 생존체보다 과학적으로 강하다. 따라서 노인은 장년보다, 청년보다, 갓난아기보다 강하다. 얼굴만 해도 그렇다. 피부가 쭈글쭈글해지고 검버섯이 생기고, 누가 밑에서 잡아끄는 것처럼 턱살이 축축 처지는 까닭은 저 잔인한 태양 아래서 보다 오랫동안 버텨내기 위함이다. 자외선이 피부에 닿는 면적을 줄이고자 이마에 주름이 그어지고, 동공에 투과되는 가시광선의 양을 줄이고자 눈꺼풍이 아래로 처지는 것이다. 노화의 메커니즘은 효율이다. 인체의 모든 여력과 능력을 정신의 토대인 뇌에 집중시키기 위해 극단의 경제정책을 선택한 것이다. 그 선택이 비록 겉으로 보기엔 늙어빠진 추레한 몰골일지언정 인간의 본질로서는 생물의 한계를 뛰어넘는 진화의 결과물이다. 피부만 그런 게 아니다. 세포도 나이가 들수록 강해진다. 서른 살 암 환자는 눈 깜짝할 사이에 죽는다. 급성이다. 왜냐. 연약하기 때문이다. 암이라는 놈에게 젊은 세포는 힘 한 번 못 쓰고 먹힌다. 대거리질도 못 하는 생병신이다. 그에 비해 늙은 몸뚱어리는 지랄맞게 악착스럽다. 30대 암 환자의 치사율이 약 90퍼센트인데 비해 70대 이상은 30퍼센트에 불과하다. 늙은 암 환자의 열에 일곱은 암이라는 무시무시한 대적의 멱살을 틀어잡고 좌우로 흔들어대는 패기가 있다는 것이다. 그 힘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생존의 노하우다. 30년, 40년을 살아온 세포보다 70년, 80년을 버틴 세포가 더 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생존을 위해 자존심과 아름다움을 버렸기 때문이다. (6~7쪽) 잘나가고 번성할 때는 기품이라는 게 약이 되고 무기가 되지만, 추락해서 시궁창을 뒤적이는 생쥐 같은 처지가 되었을 때는 반대로 자기 비하와 환멸의 원천이 된다. (25쪽) 나는 그곳에서 나의 늙음을, 앞으로의 미래를, 나아가서는 죽음을, 훗날에야 니트로글리세린이라는 화약의 일종임을 알게 된 협심증 알약과 함께 땅바닥에 내던졌다. 잃어버린 나를 되찾고 싶었다. (28쪽) 그래서 나는 성경 한 구절을 갖다 댔다. 어느 날 사도 바울이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파했다. 그 이야기를 감명 깊게 들은 한 사람이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마침 그 집에서는 제사를 있었다. 당연히 귀신에게 드리는 제사다. 사도 바울은 망설이지 않고 제삿밥을 먹었다. 나중에 제자들이 왜 그런 부정한 음식을 먹었느냐고 타박하자 바울은 말한다. 목구멍으로 들어가는 게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목구멍에서 나온느 말이 사람을 더럽히느니라. 나는 사도 바울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묘막 또한 신의 섭리라고 믿으며 감사하게 여겼다. 신앙은 개판이지만 종교적이니 변명거리는 성경에서 잘도 찾아내는 게 나의 특기다. (36똑) 챔피언이 되어 의무적으로 방어전에 나서는 것은 지루하다. 마음이 약해진다. 어느 순간 귀찮아지고, 자신감이 자만으로 바뀌게 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한 번의 패배가 모든 것을 앗아간다. 줬다 뺏는 것처럼 더럽고 치사한 일은 없다. 견디기 힘든 상실이다. 그 러나 나처럼 여든이 넘어서도 갖지 못한 것을 소망하며 세상의 챔프들에게 도전하는 인간은 열망이 식지 않는다. 삶에 만족이 없다. 만족이 없다고 해서 부족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만족하지 못하기에 안주하지 않는다. 지금보다 나은 삶이 있다고 믿는다. 내일은 오늘보다 하루 더 늙을 뿐이고, 죽음과 한발 더 가까워지는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어제보다 나은 인간이 되었고, 내일은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도전자의 마음가짐이다. 어쩌며녀 내가 찾는 챔피언 벨트가 죽음이라는 영원한 안식인지도 모르겠다. 그 죽음이 달콤하게 느껴질 때까지 내 인생의 로드워크는 끝나지 않는다. (59쪽)노욕(老慾)아라 할만하다. 그러나 세계는 승자와 패자로 나뉠 뿐이다. 승자가 몇 살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늙은이가 물러나지도 않고 계속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게 눈꼴시다면 젊은 놈이 보란 듯이 실력으로 밀어내면 된다. 늙었다고 봐줄 필요 없이 실력으로 승부해서 처절하게 짓밟아 버리면 된다. 그 늙은이 또한 젊은 날에는 어느 노인네를 잔인하게 짓밟고 지금의 자리에 오른 것이니 인과응보라면 인과은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직 실력이 충분하다고 생각된다면 눈치 볼 것도 없다. 노욕도 좋고, 과욕도 좋고, 해괴망측도 좋다. 버틸 때까지 버티는 것이다. 떠나갈 때를 아는 자의 뒷모습은 아름답다지만, 떠나갈 때 떠나가지 않고 독하게 매달리는 자에게는 기회가 한 번 더 온다.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찾아온다. 더군다나 떠나는 나의 아름다운 뒷모습은 나만 못 본다. 그따이 허세는 젊어서나 ㅂ려야지 나이가 들면 집착해야 한다. 작은 기회도 놓쳐서는 안 된다. (64쪽) -> '눈꼴시다면'이 아니라 '눈꼴시리다면'이 아닐까? 나는 여자를 좋아하지만 여자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남자를 싫어하지만 남자에 대해서는 조금 안다. 남자라는 동물의 머릿 속에는 자기밖에 없다. 남아 선호 사상 때문이라는 어느 패미니스트 편집자의 충고를 기억하고 있다. (69쪽) 그렇다고 자기 식구를 부를 때 직함을 넣는 것은 비위가 상한다. 큰아들이면 큰아들이지 박 이사가 뭔가. 누가 봐도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다고 여겨지는 이사라는 직책을 가볍게 입에 담음으로써 마치 나는 그런 류의 구조적인 신분 체계에 순은하지 않는 독립된 인간이다, 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처럼 들리지만, 속내는 너희들은 이사님이라고 부르는 자가 내 큰아들이다, 그래서 너희는 꼬박꼬박 이사님이라고 불러야 하고, 나는 '박 이사'라고 불러도 된다고 우쭐대고 싶은 심보다. (71쪽) 이와 비슷한 예로 엄마들이 자기 아이를 부를 때 이름 대신 '아들, 이리 와봐'라는 표현을 쓰는 일이 잦다. 나는 이곳도 마음에 안 든다. 아들 낳았다고 유세를 떠는 것처럼 들린다. 특히 젊은 엄마들이 사람들 보는 데서 어린 자녀에게 '아들, 그러는 거 아니라고 했지'라고 하는 말을 듣게 되면 정신머리가 썩었구나, 하고 혀를 차고 싶어진다. 상대적으로 '딸, 그러는 거 아냐'라는 말은 별로 못 들었다. 유독 아들을 가진 엄마들이 멀쩡한 이름 놔두고 '아들, 아들' 노래를 한다. 그 아이는 자기 이름으로 사는 게 아니라 아들로서의 삶을 은연중에 강요받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비약인지는 모르나 성별과 가정에서 후차적으로 부과된 신분이 개인이라는 인격체 앞에 놓인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은 아이들은 커서도 직함에 얽매인다. 남들이 인정해 주는 직함을 얻으려고 자신의 능력과 소질을 무시하고, 자신의 행복이 아닌 타인의 평판과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를 꿈꾸게 된다. 그때부터는 삶의 주체가 '타인'이다. 내가 남을 위해 살게 되는 것이다. 수십 년을 그렇게 살다가 나이 들어 은퇴하면 자기 이름 앞에 새겨져 있던 직함의 상실에 마치 세상 다 잃은 것처럼, 단지 직(職)에서 물러났을 뿐임에도 자기 자신이 사라지는 것처럼 착각하고 괴로워한다. 삶이 완성되어야 할 시기에, 인간으로서 가장 행복해야 될 정점의 시기에 추악한 본능만이 꿈틀대는 빈껍데기가 되는 것이다. 그 슬픔을 이겨내고자 아들을 박 이사라 부르고, 친구를 김 원장이라 부르고, 남편을 최 교장이라 부르고, 아내는 임 권사라고 부른다. (72쪽) 희망은 의지가 되어주지는 않아도 우리 인생을 끝까지 운반해 주는 역할에는 충실하다. '젊은이는 미래에 대한 희망에 살고 노인은 과거의 추억 속에 산다'는 말이 있는데, 60이 넘어서라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면 여전히 청춘이다. (89쪽) "우리에겐 정신적인 삶이 없었으니까요." "정신적인 삶이란 뭐지?" 얼 쇼리스는 뜻밖의 대답에 흥미를 느꼈다. "극장, 연주회, 연극, 미술관, 강연, 철학 같은 거죠." 살인을 저지른 여 죄수의 입에서 그녀의 삶이 인간의 기본에서 벗어나 나락으로 떨어진 이유가 정부의 복지 정책도, 이탈자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는 교육체계도 아닌 '사유저거 빈곤' 때문이라는 말을 듣고 얼 쇼리스는 가난한 사람들에겐 물질적 의식주 외에도 정신적 의식ㅈ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84쪽) 정신노동보다 더 숭고한 가치가 육체노동에 있다. 생산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뭔가를 생산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은 기본이요, 방구석에 틀어박혀 텔레비전 드라마나 보면서 요즘 젊은 것들은..., 하고 혓바닥 끝만 차댈 게 아니라 젊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그들에게 직접 살아 있는 노하우를 전수해 주는 희생이야말로 더욱 숭고한 가치로서 우리의 후반생을 수놓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93쪽) 인내는 청춘의 별곡이다. 노땅은 참지 않아도 된다. 아니, 참아서는 안 된다. 억제하고 참고 견디는 것은 머리 꼭대기에 피도 안 마른 어린 자들이 성숙되기 위하여 통과하는 의례다. 노땅은 참을만큼 참았고, 견딜 만큼 견디고, 버틸 만큼 버텼기에 도중에 죽지 않고 이 나이 먹도록 살아남았다. 이제는 참아온 것들을, 견뎌온 것들을, 억제해 온 것들을 터뜨릴 때가 되었다. (100쪽) 늙은 이의 분노는 권리가 아니다. 의무와 책임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분노해야 될 상대는 '나'다. 참고 봐주며 넘어가서는 안 될 자기모순을 늙었다는 핑계와 약해빠진 몰골로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웃어넘기고 참아넘기고 방관하게 된다. 그런 나를 증오해야 한다. (100쪽) 나는 항상 화가 나 있다. 세상 돌아가는 꼴이 마음에 안 든다. 그 중에서도 내가 제일 마음에 안 든다. 그러니 밥상머리에서 치를 떨며 젓가락질을 한다. 머자마자 소화가 된다. 술을 마셔도 취하질 않는다. 정신이 쉴 틈이 없다. 뇌 수치는 올라가도 당과 콜레스테롤은 절대로 올라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몸의 영양분을 제일 먼저 소비하는 곳이 바로 뇌이기 때문이다. 머리를 쓰지 않으니까 먹은 것들이 잔뜩 쌓여 몸 여기저기서 썩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노인 냄새의 정체다. 인간의 머리는 분노하고 질투할 때 최고로 빠르게 돌아간다. 어마어마한 열량과 열정을 소비한다. 그러니 앞으로는 억제하지 말고, 참지 말고, 인내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것은 미덕이 아니다. (101~102쪽) 우리 운명은 세상과 싸우는 것밖에 없다. 어려서는 가난과 무식과 싸우고 젊어서는 독재와 싸우고, 중년에는 세계경제와 싸우고, 늙어서는 초연하게 살다 가라는 세상의 묵시적인 명령과 맞서 싸워야 한다. 싸우지 않는 의병은 포로가 될 뿐이다. 포로가 조롱받는 것은 당연하다. (108쪽) 이제는 잠들 때 경매로 빼앗긴 예전 집 생각이 안 난다. 성경에 이에는 이, 경매에는 경매라는 구절이 왜 있는지를 깨달았다. (118쪽) 눈도 늙고, 귀도 늙고, 다 늙어도 뇌는 안 늙는다. 나이가 들면 지력이 떨어진다고 하는데 누가 지어낸 거짓말인지는 몰라도 매우 악의적인 구라다. 나의 경험에서 우러난 산 증거가 그렇게 말해주고 있다. (119쪽) 각자가 저지른 행위는 정치인 한 명의 결단, 독재자 한 사람의 출현보다 월씬 큰 힘을 갖고 있다. 나 한 사람쯤이야, 라고 생각하지만 실개천이 흘러 흘러 여울과 강으로 모여 바다를 이루듯 나 한 사람의 실천이 세대를, 시대를 변화시키고 대표할 수도 있다. (123~124쪽) 우리의 오늘을 만든 장본인은 10년 전 '나의 실천'이었다. 오늘의 하잘것없는 실천이 두려워지는 이유다. 이를 보면 세상 이치가 수학으로 증명되는 이유가 있다. 어떤 일의 결과는 항상 '원인'에 '시간'을 더한 값이다. 자연이 그렇고, 사람이 그렇고, 사람이 살아간 일생이 그렇다. (127쪽) 부모를 돈으로 알고, 부모를 방바닥에 패대기치는 막장 아들, 딸, 며느리, 손자가 세상에 등장하는 까닭은 전적으로 우리 탓이다. 학교가 그렇게 만든 것도 아니고, 돈만 아는 세상이 그렇게 만든 것도 아니다. 나쁜 친구를 사귀어서 그리 된 것도 아니다. 내 뱃속에서 나온 내가 맞은 열매다.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아는 법이다. 포도나무에 포도가 열리고 복숭아나무에 복숭아가 열린다. 선인장에 가시가 돋는 것은 자연의 위대한 섭리다. 내가 돈처럼 굴었으니 자식들이 늙은 아비를 돈으로 여긴다. 사람으로 안 보고 돈으로 여긴다. 아이들 앞에서 엄나가 식모처럼 하녀처럼 굴며 다른 것 다 필요 없고 좋은 학교 나와서 좋은 직장만 얻으면 너에게 이 애미는 더 이상 바랄 게 없다는 식으로 조기교육을 시켜 놓았으니 아이들이 결혼해서 자식을 낳고도 엄마가 아픈데, 쓸쓸하고 외로운데 찾아와주지를 않는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 좋은 대학 나와서 좋은 직장 다니고 있는데 나를 왜 찾아왔냐는 식이다. 나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아들, 딸이 그 모양인데 며느리가 시부모를 온전히 섬길 리 없다. 사위가 처가 알기를 코에 든 바람처럼 뱉어내는 것이 당연하다.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도 없다. 온전히 가슴으로 상처를 삭힌다. 약도 없고, 고쳐 줄 의사도 없으니 자식에게 받은 상처는 영원히 아물지 않는 생채기로 눈만 뜨면 피가 흐른다. (145~146쪽) 혹은 나는 이미 소녀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미 변했는데 나 혼자 그 변화를 못 알아차리고 예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생존하기를 용쓰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소한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고, 억울하고, 화가 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듦이 억울한 이유는, 지금보다 더 나이 든다는 게 겁나는 이유는 내가 소녀처럼 감수성이 예민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는 것처럼 눈치가 보이고, 별 것 아닌 일에도 파르르 살이 떨리며 화를 내게 되는 까닭은 내가 어려졌기 때문이다. (153~154쪽) 우리 몸은 타인과 똑같아서 내가 가만히 있으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낯섦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이 인간도 갈 데까지 갔다라고 판단해서 스스로 생명의 순환을 놓으려 한다. 우리 몸이 더 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래 살고 싶다면 내 몸에게 더 살아야 되는 이유를 납득시켜줘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납득시켜야 할까? 인간의 몸은 변화에 최적으로 적응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인간의 몸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최고의 연료는 변화다. 환경이 계속 변하고, 생각이 변하고, 감정이 변한다면 우리 몸은 그 변화에 적응하고자 내장과 혈액, 뇌의 활동을 조절한다. 따라서 조절이 끝날 때까지 죽지 않고 살 수 있다. 조절이 끝나면 또 다른 변화로 우리 몸을 긴장시킨다. 그러면 우리 몸은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고자 또 일정 기간 자생력을 키우는 것이다. 이런 사이클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자가 장수한다. (158~159쪽) 우리 가족은 내가 세상을 모른다고 만날 타박이다. 그 나이 먹도록 '그런 것도 모르냐'고 멸시한다. 그때마다 칭찬받는 기분이 든다. 내 평생의 자랑이 이 나이 먹도록 '그런 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때문이다. 나는 세상을 모른다. 그래서 세상이 궁금하다. 너무 궁금하다. (160쪽) 병원에 한 달 가까이 누워 있자니 사는 것 같지가 않았다. 답답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가슴에 기브스 비슷한 것을 두른 채 보름도 안 돼 퇴원했다. 내 집에 오니 살 것 같았다. 양심의 가책이라곤 개털만큼도 느끼지 못하는 가해자와 함께 지내는 편이 허연 가운 입고 상식적인 질문만 던지는 의사보다 훨씬 반갑고 즐거웠다. (182쪽) 닭은 제집이 아닌 곳에서는 홰치지 않는다. 아무리 세상이 드넓다한들 수닭이 제멋대로 홰를 치며 거드름 피울 곳은 제가 사는 우리의 횃대밖에 없다. 요즘 노인들은 내 집에서는 횃대를 잃고 밖에 나가서 성화를 부린다. 병원에 가서 간호사에게 시비, 파고다 공원에 가서 공짜 밥 얻어먹는 처지에 반찬 투정을 하고, 2호선에 들어앉아 배부른 임산부에게 노약자석에 앉지 말라며 딴죽을 건다. 자기 횃대를 잃고 남의 횃대를 기웃거리는 것이다. 자기 새끼한테는 끽소리도 못하고, 자기 마누라한테는 끽소리도 못하고, 자기 며느리한테는 끽소리도 못하고 처음 보는 남의 자식, 남의 며느리, 남의 아내에게는 과감히 날개를 드러낸다. 하지만 인간은 짐승이 아니다. 똥 싸질렀다고 해서 전부 내 영역이라고 우길 수는 없다. 눈치 보며 살자는 말이 아니다. 눈치를 보지 않되 자기 눈치부터 보지 말자는 것이다.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져 언제 이리 늙었나, 주름 좀 보게, 이제 갈 날만 남았구나, 법석을 떨며너 내가 보지 못하는 남의 시선 앞에서는 내가 어떻게 비춰지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살아간다. (182~183쪽)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이토록 각박해지고 흉흉한 세상이 되었기에 늙어서 애들이나 할 법한 아르바이트 자리를 기웃거려도 욕이 되지 않는다. 늙어서도 일하는 게 창피하지 않다. 오히려 덕이 되고, 자랑이 된다. 사지 육신이 멀쩡하다면 무슨 일이라도 해야 되는 세상이 되었다는 게 얼마나 고마원지 모른다. 세상 믿고 살다간 늙어서 제명에 못 죽는 시대가 되었음이 얼마나 황송한지 모른다. 늙어서도 내 한 몸 믿고 개갤 때까지 개개 볼 각오를 다지게 해준 정부에 표창이라도 주고 싶은 마음이다. (188~189쪽) -> '개갤 때까지 개개'가 아니라 '개길 때까지 개겨'가 아닐까? 현실은 머리를 다쳐 피가 나는데도 돈이 없어 병원에 못 가 구더기가 생긴다. 먹고 죽을 약 살 돈도 없는 것이다. 내가 죽으면 차갑게 식어 버린 늙은 내 몸뚱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누가 돈을 대줄 것이며, 장례 비용은 어디서 마련할 것인가, 라는 걱정이 앞선다. 장례식장에 사람들이 와줄까, 친척들이 올까, 연을 끊은 아이들이 찾아와줄까, 같은 고민은 끼어들 틈이 없다. 살아서 죽은 내 육신의 처리 비용을 걱정해야 된다는 것, 그게 바로 고독사의 청체다. 천지간에 죽어 버린 나를 처리하는 데 들어가는 돈이 없어 잠을 못 이루고, 죽어서까지 남에게 손 벌려야 되는 처지에 비관하는 것이아말로 고독사의 진짜 의미인 것이다. (192쪽) 노인이 병든 몸을 이끌고서라도 지하철을 타고 종로2가를 찾는 진짜 이유는 거기가 나이 들어 갈 수 있는 유일한 '바깥이기 때문이다. (193쪽) 배부른 자들이 배고픈 자를 동정할 수 있듯이 살 날이 하도 많이 남았기에 젊은 것들은 죽음을 동경할 수가 있다. 그런데 죽음이 더 이상 남의 얘기가 아니게 된 노인에게 제임스 딘은 결코 매력적이지 않다. 그저 내일 아침에는 눈이 떠질까? 이대로 잠들면 영원히 못 일어나는 게 아닐까? 죽어 있는 나를 보고 우리 애들이 놀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잠드는 사람에게 죽음은 막연한 사건이 아니다. 세상이 나에게 가하는 최후의 폭력, 가장 잔인한 폭력 그 자체다. (201쪽) 인구 오천 만이 3천7백만으로 줄어드는 원인은 전쟁도 아니고, 기아도 아니고, 전염병도 아니다. 출산율 감소다. 좋게 말해 출산율이지 엄밀히 따지면 사회적 자살이다. 사회심리학적인 수명이 역사라고 한다면 그 역사의 주체가 되는 구성원의 인위적 감소는 집단 자살이다. (206쪽) 인생은 끝없는 착각의 연속이다. 망각이 있기에 인간이 고통을 잊고 살아간다고 하는데, 착각이 있기에 인간은 내일을 기대하며 기다림을 견뎌낸다. (211쪽) 집에 잠시 들르는 게 고작이던 가장이 사회라는 속박의 올가미에서 벗어나자마자 새장에 갇혀 날갯짓을 잊어버린 애완조가 된다. 익숙한 얼굴들을 쫓아다니며 관심을 구걸한다. 그것이 참견이든, 동행에 대한 강요든 본질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떼를 쓰는 데 불과하며, 권태로움을 이기지 못한 인간의 박악과도 같다. (211쪽) 우리의 늙음이, 우리의 노후가 처음 출근하던 날 아침에 회사 정문에 들어서면서 30년 후 이곳을 나설 때는 지금보다 당당하고 행복해지겠다고 다짐했던 것과 달리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현실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어디에서 뭐가 잘못됐는지를 이제 와서 규명해 본들 한 살이라도 젊어지는 것도 아니다. 내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음을 자책하고, 자책의 일환으로 이대로 가다간, 아니 이미 내 상태가 '늙은 찐따'임을 인정하고 벗어날 준비와 계획을 세워야 한다. 하루라도 빠를수록 좋다. (217쪽) 죽은 후에 누가 나를 알아주든, 욕을 하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다. 살아서 하고 싶은 일, 하고 싶은 말,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살아야 한다. 그래도 성이 안 차는 것이 인생이거늘 나 죽었을 때 장례식에 사람들이 적게 찾아오면 어쩌나, 지레 걱정이다. 휑한 장례식장이 눈에 아른아른하면서 꼭 내가 인생 잘못 살아왔다는 선고를 받는 심정이 된다. 그래서 괜한 인심, 선심을 베푼다. 이런 게 바로 노망이다. 방금 저녁 밥상을 물렸는데 왜 저녁밥을 안 주냐며 시비 거는 것은 배곯며 살아온 지난날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된 일종의 자기 치유일 뿐이다. 벽에 똥칠하는 건 마음에 응어리진 설움과 진짜로 하고 싶었던 욕망이 배설되지 않고 자기 안에 갇혀진 것에 대한 회개의 심정에서 나온 행동일 뿐이다. 우리가 정말로 걱정해야 될, 그리고 조심해야 될 노망은 건방지게도 죽은 후를 염려하는 꼴같잖은 교만이다. 그런 교만이 우리를 인간 이하의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나의 죽음이 나의 것인 양, 죽은 후의 가족을, 세상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미천한 발상에서 존엄사가, 고독사가, 유언장이 생겨난 것이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참으로 철학적인 질문이다. 인간이 이 땅에서 지속되는 한 끊이지 않고 울려 퍼질 질문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확히 말하면 답이 없는 게 아니라 답을 찾아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죽으라고 태어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살라고 태어난 존재가 죽음을 이야기한다는 건 자기 존재에 대한 부정이다. 나는 나를 부정하고 싶지 않다. 별 볼일 없는 늙은 몸일지라도 삶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싶다. 삶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싶다. 아직도 못 한 것이 많고, 못 먹어 본 술이 산더미다. 훗가이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이혼녀를 생각해서라도 당분간은 죽는다는 생각을 못할 것 같다. (236~237쪽, 이 책의 끝부분) <단어> 1) 단독자(單獨者): 인간은 날 때부터 혼자다. 부모가 있든, 사랑하는 배우자가 있든,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는 자식이 있든 인간은 결국 자기만, 자기 목숨만을 의지하고 챙기며 살아가는 단독자(單獨者), 백과사전에 등재된 모든 생물들 중에서 가장 이기적인 동물이다. 이기적이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을 저버리고 제 손으로 목숨을 끊는다. 저 하나만 이 고통에서, 끝없이 울리는 빚쟁이들의 전화벨 소리에서 벗어나면 그만이라는 욕심의 실천이다. (26~27쪽) 2) 구육(拘肉): 이 교장이 나를 어떻게 이용하든 내 관심은 오직 젋은 초등학교 교사들이 들고 온 데낄라에 꽂혀 있었다. 처음 마셔보는 멕시코 술맛은 선인장 가시처럼 내 혓바닥을 아릿하게 자극했다. 교사들이 구육(拘肉)을 그처럼 잘 먹는다는 것도 이 교장 덕분에 알게 된 사실이다. 초등학교 3학년 담임을 맡고 있는 여교사는 술에 취해 앵두 같은 입술로 감탄사를 내뱉으며 구두(拘頭)의 골까지 빼먹었다. 평소에는 저 입술로 아이드 앞에서 '탄일종'을 불렀을 거이라고 생각하니 술맛이 더없이 좋았다. (52쪽) 3) 펀치 트렁크: 예순이 넘어 '펀치 트렁크'가 엄습해 온 것이다. 펀치 트렁크란 복싱 선수들이 말년에 자주 겪게 되는 특유의 노망이다. 선수 시절에 맞은 펀치가 뇌에 지속적인 충격을 가한 탓에 나이가 들수록 뇌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피가 잘 안 돌면 뇌의 표면부터 마르기 시작한다. 결국 돌조각처럼 바짝 말라 뇌가 조금씩 떨어져 나간다. 이에 따른 증상으로 알츠하이머나 파킨슨병이 유발된다. 무하마드 알리가 대표적인 펀치 트렁크 환자다. 매부도 젊음을 담보로 걸었던 승부에서 패배자가 되었다. (57쪽) 4) 느린맥: 평생토록 승부의 세계에서 심장이 쪼그라들 정도로 긴장했던 탓인지 예순넷에 '느린맥'이라는 심장 이상이 발견되었다. 느린맥이란 보통 서맥이라고 하는데, 심장박동 수가 1분에 60회 밑으로 떨어져 몸의 신경들이 마비되는 증상이다. 방치했다간 동맥경화, 뇌막염, 뇌종양, 고혈압으로 죽게 된다. (61~62쪽) 5) 안티고네: <안티고네>를 읽은 참가자들은 전통적 관습과 국가의 형법 사이에서 갈등하는 오이디푸스와 그녀의 친어머니 안티고네가 겪어야 했던 온갖 절망과 슬픔을 가르치는 교수보다 더 생동감 있게 받아들였다. 그들의 삶 자체가 가족을 위해 범죄를 저지른 대가로 감옥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 (85쪽) 6) 조락: 그런데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청히 지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의 내일이, 한 달 후가, 일 년 후가, 십 년 후가 빈껍데기로 조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29쪽) 7) 홑청: 늙은이는 연애소설을 읽으면 안 되고, 연애소설을 써도 안 되고, 내가 무슨 대통령도 아닌데 누가 알아준다고 자서전 같은 걸 쓰겠느냐는 '자격'에 억눌려 지내면 빨지 않은 홑청을 두르고 돌아다니는 것과 같다. (167쪽) 8) 반동(反動): 유년의 아스라한 추억은 그리움보다는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가난과 궁핍의 잔혹함에 눈을 떠버린, 그래서 고생하는 부모님을 보면서 나 때문인가 싶어 죄스러운 동시에 저분들처럼은 살고 싶지 않다는 반동(反動)이 가슴속에서 끓어올랐다. (205쪽) 9) 찐따: 왕따로 낙인 찍히기 전 단계에 '찐따'가 있다. 굳이 설명하자면 '찐따' 중에서 '왕따' 한 명이 선별되는 셈이다. '찐따'라는 말은 원래 6.25 때 나온 말이다. 휴전 조약이 체결된 후 지뢰를 밟고 다리를 잃은 상이군인들이 일거리를 찾지 못해 거리를 배회하며 금품을 갈취하거나 무전취식을 일삼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을 가리켜 '찐따'라고 불렸는데, 이는 '다리 병신'이라는 뜻으로 겁날 게 없는 상이군인에게 대놓고 '다리 병신'이라는 말을 할 수 없어 '찐따'라는 은어로 그들을 지칭했던 것이다. (213쪽) <궁금, 의문> 1) 이 교장은 내가 엉뚱한 곳에 투자했다가 전 재산을 말아먹고 알거지가 돼 현재 묘막집에서 남양 홍씨 잿밥이나 차리는 늙고 가난한 출판 노동자라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동료 교사들에게 이런 사정은 일언반구 꺼내지도 않았다. 오직 자기 필요에 따라 타인의 화려했던 과거의 신분을 끌어다가 현재의 자기 위상에 마구 덧칠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51쪽) -> '노동자라라는'가 아니라 '노동자라는'이 아닐까? 2) 그러는 동안 세피아는 폐차가 됐고, SUT 차량을 구입했다. (118쪽) -> 'SUT'가 아니라 'SUV'가 아닐까? 3) 전 재산이 27만 원뿐이라는 전씨 성을 가진 전직 대통령 스타일로 만들어놓았다. (172쪽) -> '27만 원'이 아니라 '29만 원'이 아닐까? 4) 세상에 하나뿐인 엄마가 돌아가시게 생겼는데 그런 모습을 무슨 신기한 구경거리라도 되는 양 관찰하고, 철학적 사유를 덧칠해 세상에 발표하려는 그녀의 지성인다운 욕심에 대해서는 너그럽게 용서해 줄 수 있다. 왜냐하면 다음 문장에서 그녀답지 않은 비열함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사르트르에게 어머니에 대하여, 아침에 본 모습을 그대로 이야기해다. 그리고 내가 거기서 읽을 수 있었던 것들을 몽땅 다 이야기했다. 거절당한 탐욕, 비굴할 정도의 겸손함, 희망, 참담함. 결코 스스로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던 고독함을. 그 고독함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고독함이고, 삶에 대한 고독함이었다.' -> 보부아르의 이 문장들에서 나는 '비열함'을 느낄 수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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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지독하게 절망스러운 상황은 맞지 않는 게 분명히 좋을 것이다. 그게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라 그게 문제겠지만.
이렇게도 저렇게도 살아가는 세상, 마음을 비우든 욕심을 채우든 저마다의 생이므로 정해진 답은 없을 것이고, 남이 이리저리 하라고 한다고 해서 그 또한 그대로 따르는 것도 그리 지혜로운 일은 못되는 것 같고. 이것도 잘 받은 교육의 폐해일까, 정답이라는 것을 택한 게 아닌 것처럼 여겨질 경우의 찝찝하고 모자란 듯한 이 느낌은.
거칠고 씩씩하고 단호하게 보내고 계시는 작가의 노년에 박수를 드리고 싶다. 나이가 정말 무슨 상관이람. 이 세상을 남보다 좀 더 많이 누리고 있다는 것일 뿐, 순전히 나이 많은 것으로만 더 대접받을 일도 더 배려받을 일도 없는 것이라고 여긴다면, 요즘과 같은 노인을 향한 젊은이들의 비호감이 좀은 줄어들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우리가 젊었을 때 봤던 노인의 처지와 지금 우리가 가까이서 겪는 노인의 처지는 확연히 다르다. 우리가 그때의 노인들이 우리로부터 받았던 공경심을 지금의 젊은이들에게서 받을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면 이것만큼 큰 착각도 없으리라. 노년은 이미 너무 길어졌고, 나이와 관계없이 삶은 누구에게나 고달파졌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는데, 무조건 봐 달라고 요청만 하고 있어서는 갈등밖에 생길 게 없다.
폭주까지는 아니더라도 쉼없이 걷기는 해야 하는 시대다. 내 몫 내가 찾아 챙기고 꾸리면서,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할 수만 있다면 도움을 주면서, 그만 쉬겠다는 생각 따위는 아예 기웃거리지도 말고,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이대로. 건강에 조금 더 유의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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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대의 끝자락에 서있다. 나는 굳이 분류하자면 회의적이며 부정적인 성향인 사람이다. 이건 싫어도 어쩔 수 없다. 아빠를 보면 나 역시 유전적으로 그런 성향인 모양이다. 따라서 나는 늘 80대가 되면 나에게 무엇이 남을까? 이런 고민을 하고는 한다. 지금도 가진 것 별로 없는 초라한 청춘이지만, 80대가 되면 정말로 남은 거 하나 없을 초라한 노인이 될 것 같은 두려움에 휩쌓인다. 따라서 노인네가 폭주한다는 이 책의 제목은 나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처음엔 단순히 이 책이 재밌을 것 같아서 샀다. 노란 표지에 그려진 "철없이 사는게 좋다"라는 문구나, 조그맣게 그려진 바이크에서 느껴지는 유치함, 그리고 글 자체의 담백함 때문에 이 책이 시간을 때울 정도로 재밌고, 가벼운 내용의 책일 것이라는 예상을 하며 읽어나갔다. 하지만 내용은 생각보다 무거웠고 처절했다. 환갑이 넘어서 재기해보고자 아득바득 지냈던 노인의 얘기가 처절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무리 타고난 사람의 성향이라는게 있다지만 나이 60 넘어서 독하게 살기란 쉽지 않다. 일단 노인이라는 프레임에 신체와 정신이 모두 갇히게 되고, 아무리 건강하고 똑똑해도 절대적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두려움과 타성에 젖어 살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열심히, 아니 지독하게 사는 노인은 노인들이 점점 늘어난다고 하는 고령화 시대에서도 희귀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이러한 희귀 표본의 이야기인 셈이다. 이 책에서는 나이듦의 가치를 성토한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를 토대로 노인답지 않게 살아가는 희망적인 표본의 얘기를 들려준다. 삶의 방식은 여러가지이나 나같이 늙으면 모든게 멈출 것 같은 두려움을 갖고 사는 사람들에게 한가닥 희망을 보여주는 책이다. 노인 같지 않은 담백하고 젊은 문체 역시 이 책의 가치를 더해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