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억 7천만 년의 고독』에서 건축학적 상상력을 통하여 문명비판의 장광설을 보여주었던 함성호는 이번 시집에서도 "사라진 길을 질주하는 이십세기의 문명의 무모"함을 통해 '우리의 죽음'을 직시하고 있다. 세기말적 현상에 대한 냉소적이며 허무적인 통찰을 보인다는 점에서 그의 시는 문명비판적이다. 그러나 그의 시는 단선적인 문명비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부정적 현실 공간에서 물러서거나 비켜서지 않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부정적 현실 공간을 재편성하는데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함성호는 '진정한 아웃사이더'가 되기를 자청한다. '진정한 아웃사이더'는 "다른 현실을 보는" '맹인'이다. 그렇다면 함성호가 설정한 '현실/비현실'은 어떤 것인가. 이 문제는 그의 시적 전략을 통해서 규명된다. 그가 각주에서 제시한 바에 의하면, 그는 "광기에 사로잡힌 탐미주의의 공간을 반모더니티를 간직한 아나키한 공간으로 개조"하고자 한다. 따라서 그가 생각하는 '현실'의 공간이란 이성중심의 합리주의가 지배하는 근대 이후의 자본주의적 도시공간이다. 반면 그가 새롭게 창조하고자 하는 '비현실'의 공간은 "20세기 서구 모더니즘이 죄악시했던 모든 것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공간으로 그의 시에서는 「聖 타즈마할」과 「푸른 직육면체」로 대표된다. 표면적으로 볼 때 「聖 타즈마할」의 공간은 현실도피적이며 쾌락주의적인 향취가 묻어나는 자기함몰의 공간으로 보인다. 그러나 「聖 타즈마할」은 "순간순간에 진실"함으로 인해 자신이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 수 있는 공간이며, 그리하여 '불멸'을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시인은 '불멸'의 공간에 다다르기 위한 계단은 "금지된 지식으로 가는 입구"라고 얘기한다. 함성호의 시집에 그토록 빈번하게 등장하는 밀교적 이미지와 신화적 상상력의 변주들은 '금지된 지식'의 해체를 통한 "의미가 아닌 흔적"의 궤적을 따라간다. 그 궤적을 따라가는 그의 시는 「푸른 직육면체」에 이르기 위해서 끊임없이 여행한다. 그가 꿈꾸는 「푸른직육체」의 세계는 "언제나 새롭게 존재하는 / 모든 공간의 비밀을 엿볼 수 있"는 곳으로, "시간이 사라지고 소리만 남아" "모든 형태가 사라지"고 '새로운 구축'을 이루는 공간이다. 「푸른 직육면체」를 꿈꾸는 함성호는 유년시절의 기억을 불려내 "물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기도 하지만 그 스스로 그러한 그리움이 "너무 멀어져버린 처음"임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푸른 직육면체」의 '새로운 구축'을 이루기 위해 '현실'의 그는 어떤 길을 갈 것인가. 여기서 그는 두 가지 노선을 제시한다. 우선적으로 그는 "모더니즘과 전쟁, 그 순수, 결벽증, 완벽함이 주는 / 완전성의 환상"이 결국 "도착(倒着)―청소―학살의 도식으로 귀착"됨을 '현실'의 폭력을 통해서 규명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도식을 증명하기 위해 보스니아 내전, 미얀마 내전, 체첸 공화국에 대한 러시아의 공격, 베트남전 등을 시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전쟁을 소재로 '현실'의 광기를 드러내고자 한 그의 시도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다. 「녹색 리본」을 제외한 나머지 시편들의 경우 시상이 방만하게 전개되거나 소재적 차원의 인용에 머무르는 한계를 보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그는 「푸나의 여인」과 「REBIS」등에서 새로운 인간적 유대를 모색한다. "내 정든 육신에 깃들인 다른 육체"의 이미지나 "여성과 남성의 생식기를 동시에 갖고" 있는 육신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새로운 '교통'(스피노자)의 방식을 육체 이미지로 제시한 것으로, 세기말의 문명적 '현실'에서 '우리의 죽음'을 목격한 그가 '현실'을 돌파하기 위해 자신의 육신을 변형하려는 전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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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의 시인은 문명 세계에 대한 강력한 비판력을 가지고 있다. 더 나아가 문명 자체를 전복하려는 전위적인 정신을 소유하고도 있다. 그 전위적 정신의 궁극은 '유일한 자'라고 말해지는 절대적 자아가 건축하는 공간을 창조하는 것에 있다. 이 전위적 정신은 시 장르 자체의 관습에도 항거하는 성격을 지닌다. 그래서 시어의 함축성을 거부하고 지적인 산문으로 일관하는 시를 시인은 창작한다. 그렇다면 시인이 의지하는 곳은 어디일까. 문명 세계에 극단의 전위적 항거가 절대적 자아에 대한 동경으로 나타나는 것이 그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 유년과 고향에 대한 향수가 시인의 고독한 전위성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그 문명 세계와 서정성이 맞닿았을 때, 때로 참으로 아름다운 시를 시인은 연출한다. [인상깊은구절] 모든 길들이 나를 부른다 꽃의 제국-. 모든 길들이 나를 부른다 지도여, 지도여, 터벅터벅이여 저벅저벅이여, 소리를 아는 귀여 사흘 초파일과 아흐레의 밤이여 이 젓가락 장단 같은 생이여 상상하지 못할 길이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천지사방이여 그 길, 그 길은 울창한 거울의 길 바퀴여, 몸의 상처여 걸어도 걸어도 해져도 내가 닿지 못하는 지적이여 이유없는 억울함이여, 분통이여, 우우 나를 버린 그대여 부관참시의 사랑이여, 너무 막 살았음으로 너무 망가져버린 육신이여 성인의 말씀이 나를 망쳤다 당역을 정차하지 않고 지나는 검은 열차의 이끌어가는 힘과, 이끌려가는 힘이여 바람과 같이 걷는다 나는 빨리 이 첨단에서 보수로, 반동으로 나아가고 싶다 쉬어갈 그늘 하나 없는 이 길 물에 대한 그리움과는 상관없이 사막이여, 불의 갈증이여 너무 멀어져버린 처음이여 독자적으로 떨어져 있는 꼬리여 때로는 落果-, 모든 추락하는 의지는 한 세계를 버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