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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채색하듯이 글을 쓴다. 그가 그려내는 목가적인 풍경은 미색의 투명한 종이 위의 활자를 따라 눈으로 바탕을 그려내고 그 위에 색을 입힌다. 한없이 온난한 색채들로. 그 색채들의 위에서 기분좋은 충족을 느낀다. 색채는 온도와 같으며 눈 안에 새겨지는 활자로 남는다. 오로지 검은 잉크로 만들어진 그 풍경은 놀랍게도 다채롭다.
김광규 시인의 시집은 처음 만난 것이 아니다. 이전에 읽었던 시집에서 무한한 울림을 느꼈던 기억이 아직도 강렬하다. 가장 좋았던 시 구절은 사진으로 찍어두고 때로 찾아 되뇌어 보곤 하는데 그때 느꼈던 그 기분이 여전한 채로 다른 시집을 또 찾아 골라내었다. 수없는 고뇌와 순간의 자유로움이 엮어낸 미묘한 울림을 한 번 더 보여달라 채근하는 것처럼, 탐욕스런 독자의 자세로.
[ 해시계
전략
길 한가운데 서서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해시계를 바라본 적이 있다 낯선 도시의 여름 한낮 사진도 찍지 않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 해시계 잠깐 멈추었던 그 시간 지저분한 온갖 기억들 속에서 중요하지도 않은 그 순간이 왜 밤에도 빛나고 있는지 ]
매우 마음에 들어 한동안 사진으로 찍어두고 매일 보았던 시의 일부이다. 무심결에 정지된 한 시간들 중에서 유독 마음에 오래 남아 얼마나 지나고 나서도 문득 떠올라 온 마음을 헤집어 놓는 순간이 있다. 과거로부터 발을 돌리고 마음을 접게 만들었던 많은 일들 중에서 가장 밝게 빛나던 순간이, 한때 평이하고 범상했던 사소함에서 비롯되는 아이러니가 있다. '해시계'를 읽으며 떠올린 것이다. 그저 작은 것에 눈길을 주었을 뿐인데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강렬하게 마음을 사로잡아 눈을 감아도 까만 와중에 빛이 스미는 기억. 누군가가 같은 것을 읽고 다른 기쁨을 누려도 좋겠지만, 공감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옮겨보았다. 이곳저곳, 당신도 이 밤 동안 자신의 사소함에서 눈길을 돌리지 못하고 음미해보도록.
[ 듣고 싶은 일
맥주와 포도주는 물리지 않았다. 그러나 부르스트와 케제, 감자와 돼지고기, 닭튀김과 훈제 연어 따위에 넌더리났다. 한국 식당이나, 때로는 교민 가정에서 고추장, 김치, 된장국, 불고기, 잡채, 생선구이 따위를 배불리 먹고 돌아와도 외국시 번역처럼 좀처럼 만족할 수 없었다. 조선오이, 알타리무, 새우젓, 물오징어와 먹갈치, 메밀묵과 찹쌀떡 따위는 먹고 싶은 것이 아니라 창밖을 지나가는 소리로 듣고 싶었다. 귀는 낯선 침묵에 피곤해지고 입은 아무리 떠들어도 적적하기만 했다. ]
외국여행을 길게 해본 적 있다면 공감할만한 시였다. 혹은 남의 집살이를 해본 적이 있다면. 그 두가지 모두에 포함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이 시가 한눈에 느껴졌다. 마치 당시에 적었던 일기 한 바닥을 누가 찢어 붙여놓은 양 공감했다. 누가 눈치를 주고 하물며 신경이라도 쓰는 일은 없는데도, 남의 집 밥을 먹고 살면 늘 배가 고팠다. 끼니 때에 맞춰 차려진 밥상을 받아 배불리 먹고 물려도 빈 상을 받았던 것마냥 섭섭하고 아쉬웠다. 잘한다는 한식당에 가서도 먹고나면 이 맛이 아닌데, 싶고. 재미있게도 배부른 투정이 객지에 남의 집살이를 하다보면 튀어나오는 일은 누구나 마찬가지인가 한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괜한 예민함이 스스로를 축내었던 것도 같고 사실은 누구나의 일인 것만 같고, 떠나온 곳이 그립다가도 돌아온 것이 안심되기도 하는 복잡다단함을 표현해 놓았다. 시의 전문을 옮겨 놓지 않으면 아쉬울 것 같아 전부 옮겨옪은 시들이 많다. 아래도 그러하다.
[ 쓸모 없는 친구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무슨 용건이 있어서 만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빚 갚을 돈을 빌려주지도 못하고 승진 및 전보에 도움이 되지도 못하고 아들딸 취직을 시켜주지도 못하고 오래 사귀어보았자 내가 별로 쓸모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그는 오래 전에 깨달았고 나도 그것을 오래 전에 알아차렸다 그래도 내가 모른 척하는 것을 그도 오래 전에 눈치챘을 터이다 만나면 그저 반가울 뿐 서로가 별로 쓸모 없는 친구로 어느새 마흔다섯 해 우리는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
만나면 가장 좋은 이가 바로, 쓸모 없는 이들이다. 쓸모 있는 이들은 쓸모가 좋지 그가 좋은 것과는 또 다르다. 쓸모도 없는데 자꾸만 찾게되고 만나면 좋은 것은, 그저 그가 좋은 것이다. 내 쓸모 없는 친구들을 떠올리며, 내가 그들에게도 쓸모-없겠지만-없는 이기를 가만히 떠올려본다. 시인이 이런 잔잔함을 건네어 줄 때마다 시를 읽으며 현실을 돌아보고 사소한 안부를 묻고 조금 낄낄거리다가 또 그 안에 깊이 빠져든다. 도대체 시를 읽고,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나는 지극히 실용적인 물음에 이런 답을 돌려주고야 만다. 내가 당신을 한 번 더 떠올리고, 때로는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고.
[ 어딘가 달라졌다
어딘가 달려졌다 그는 두 팔로 운전대를 감싸안고 고개를 잔뜩 앞으로 내민 채 전후좌우로 쉴새없이 눈을 돌리다가 신호가 바뀌기도 전에 쪼르르 달려나가고 교통경찰이 없으면 종로 한가운데서도 날쌔게 왼쪽 골목길로 꺾어들어간다 구멍에서 머리만 내밀고 바깥 세상을 살피는 생쥐처럼 반짝이는 눈 재빠른 움직임 그렇구나 운전을 시작한 뒤부터 그의 눈빛과 몸놀림이 달라졌구나 착하고 맑은 사슴의 눈으로 한때 어릿거리며 천천히 걸어오던 명륜동 길로 보행인들을 헤치고 자동차를 몰면서 그는 변해야 산다고 말했다 그는 젊어진 것 같았다 ]
이 시는 조금 새로운 분위기였다. '그'의 변화들은 착하고 맑은 사슴의 눈을 가진 그를 생쥐처럼 반짝이는 눈을 한 이로 바꾸어 버렸다. 천천히 어릿거리며 걷던 사람은 자동차를 몰면서 전과 같은 눈동자의 보행인들을 헤치고 재빠르게 움직인다. 얼핏 그의 변화는 신호도 지키지 않은 채, 지극히 조급한 몸놀림을 하고 있는 옹졸한 그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런 그의 변화를 '젊어진 것 같'음으로 말하며 부정을 긍정으로 가려 덮어놓는다. 여기서 문득 어리둥절 해지는 것이다. 젊어진다는 것은 어쩌면 생기와 활력이라는 의미를 가져다는 주는 일일텐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의 변화는 성마르고 부주의한 조급증에 시달리는 그것이다.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젊음이란 것이 그런 것일까, 생쥐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제 앞 길만 헤쳐가려는 성급함이 그가 보는 젊음인 것일까 못내 아쉬운 의문이 드는 것이었다. 나는 오래되어 그 길로 늙음이란 것이 그런 것이라 여겼는데, 그런 생각의 고착을 단길에 해체해버리는 시였다.
시인의 시를 두고 처음에 색채들의 조화같다 표현하였는데, [제 4부 서문 밖 여울] 편에서 그 회화적 표현들은 심화된다. '해질녁'의 [ 6월 하순 해질녘/ 뒷산에서 뿌듯이 풍겨오는/ 밤나무꽃 뿌연 냄새/ 구석구석 퍼지는 어둠을 비켜가며] [눈이 쌓여/ 하얗게 뒤덮이는 산과 들에/ 언제 깨질지 모르는/ 얇은 얼음 같은 / 평화가 깃들이고 - 얇은 얼음 같은 ] 정적인 평화까지도 눈에 보이는 한 장면으로 담아낸 시들을 보고 있자면 하나의 주제가 있는 전시회장을 둘러본 듯한 기분이 든다. 목가적이고도 여상하여 도리어 엄숙한 면면들을.
시집은 '가진 것 하나도 없'다지만, 지금 빽빽히 들어찬 건물들 사이로 지는 해의 빛깔처럼, 다정한 글자들이 빼곡하다. 선연히 눈 앞에 채색되어지는 시가 기다리고 있는 김광규 시인의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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