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리뷰 (2)

한줄평
평점 분포
  • 리뷰 총점10 50%
  • 리뷰 총점8 0%
  • 리뷰 총점6 50%
  • 리뷰 총점4 0%
  • 리뷰 총점2 0%
연령대별 평균 점수
  • 10대 0.0
  • 20대 0.0
  • 30대 0.0
  • 40대 0.0
  • 50대 8.0

포토/동영상 (1)

리뷰 총점 종이책 구매
[18-43] 전형적인 선악구도로 그린 궁중소설
"[18-43] 전형적인 선악구도로 그린 궁중소설" 내용보기
인현왕후의 생애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 1667~1701, 이하 ‘인현왕후’)는 조선 제19대 임금인 숙종(肅宗)의 2번째 왕후(王后)이다. 숙종은 세자 때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숙종이 왕으로 등극하자 김씨는 인경왕후(仁敬王后)가 되었다. 하지만 인경왕후가 천연두로 20세에 사망하자, 인현왕후가 1681년에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김석
"[18-43] 전형적인 선악구도로 그린 궁중소설" 내용보기

인현왕후의 생애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 1667~1701, 이하 인현왕후’)는 조선 제19대 임금인 숙종(肅宗) 2번째 왕후(王后)이다. 숙종은 세자 때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숙종이 왕으로 등극하자 김씨는 인경왕후(仁敬王后)가 되었다. 하지만 인경왕후가 천연두로 20세에 사망하자, 인현왕후가 1681년에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김석주(金錫胄, 1634~1684)와 그녀의 외조부이자 당시 영의정인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의 추천으로 갓 왕비를 잃은 숙종의 계비(繼妃)가 되었다. 그러나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의 여파로 폐위되고, 한 달 뒤에 그녀의 후견인이자, 서인의 상징 인물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도 정읍에서 사사(賜死)되었다. 5년 후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의 여파로 왕비(王妃)로 복위했다. 1700년 음력 3 26일 전후로 하반신이 부풀어 오르는 괴질이 발병해 신체가 썩어 들어가는 고통 아래 투병하다가 1701년 음력 8 14일에 창경궁(昌慶宮) 경춘전(景春殿)에서 사망했다.

 

 

인현왕후전에 비친 인현왕후

 

인현왕후전은 인현왕후의 탄생부터 왕비가 되었다가 폐위되고, 다시 왕비가 되어 죽을 때까지의 일대기를 다룬 고전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인현왕후는 억울하게 핍박 받는 착한 여성으로, 희빈 장씨는 악독하고 계략을 꾸미는 악녀로 각각 묘사되어, 전형적인 선악 이분법적 대립구도를 그리고 있다.

 

그렇다면인현왕후전에 그려진 것처럼 인현왕후는 성리학에서 얘기하는 전형적인 현모양처(賢母良妻)일까 

그녀가 속한 노론이 편찬한 숙종실록 17숙종 12 12 10일 기사만 봐도 사실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장씨의 교만하고 방자함은 더욱 심해져서 어느 날 임금이 그녀를 희롱하려 하자 장씨가 피해 달아나 내전(內殿)의 앞에 뛰어들어와, ‘제발 나를 살려주십시오.’라고 하였으니, 대개 내전의 기색을 살피고자 함이었다. 내전이 낯빛을 가다듬고 조용히, ‘너는 마땅히 전교(傳敎)를 잘 받들어야만 하는데,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할 수가 있는가?’ 하였다. 이후로 내전이 시키는 모든 일에 대해 교만한 태도를 지으며 공손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불러도 순응하지 않는 일까지 있었다. 어느 날 내전이 명하여 종아리를 때리게 하니 더욱 원한과 독을 품었다. 내전이 다스리기 어려운 것을 근심하여, 임금에게 권하여 따로 후궁을 선발하게 하니, 김창국(金昌國, 1644~1717)의 딸이 뽑혀 궁으로 들어왔으나 또한 총애를 받지 못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서 마침내 장씨를 책봉하여 숙원(淑媛)으로 삼았다.”

 

송자(宋子)’라는 존칭이 쓰여졌을 정도로 조선 후기 대표적 유학자이자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의 후광아래 소위 꽃길만 걸었던 인현왕후에게 있어서 역관의 딸인 희빈 장씨는 사랑의 라이벌이라기 보다는 자기보다 아래인 천 것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한, 그녀보다 8살 연상인 희빈 장씨의 적극적인 모습이 교만하고 방자하게 비춰진 것이 아닐까 

일단 그녀는 내명부(內命婦)의 첩지를 받지 못한, 승은(承恩) 궁녀인 희빈 장씨를 아랫사람을 시켜 종아리를 때려 신분의 격차를 육체에 각인시켰다.

그리고 같은 노론에 속하는, 척화파의 거두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현손(玄孫)인 영빈(寧嬪) 김씨를 후궁으로 들여와 희빈 장씨를 견제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심지어 영빈 김씨는 명문 안동 김씨의 여식이라는 이유로 궁에 들어오자마자 숙의(淑儀, 2)의 첩지를 받았다. 숙종이 노론과 인현왕후, 영빈 김씨에게 핍박 받는 희빈 장씨를 보다 못해 내린 직책이 숙원(淑媛, 4)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얼마나 특혜를 받았는지 알 수 있다. 심지어 영빈 김씨는 1년도 되기 전에 소의(昭儀, 2)를 거쳐 (, 1)’의 바로 아래 단계인 귀인(貴人, 1)에 책봉된다.

 

뿐만 아니라숙종실록 21숙종 15 5 2일 기사를 보면, 인현왕후가 희빈 장씨에 대해 다양한 모함을 하였음이 드러나 있다.

투기하는 것 외에도 별도로 간특한 계획을 꾸며, 스스로 선왕(先王선후(先后)의 하교를 지어내어서 공공연히 나에게 큰소리로 떠들기를, ‘숙원(淑媛; 희빈 장씨)은 전생(前生)에 짐승의 몸이었는데, 주상께서 쏘아 죽이셨으므로, 묵은 원한을 갚고자 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경신년 역옥(逆獄) 후에 불령(不逞)한 무리와 서로 결탁하였던 것이며, ()는 장차 헤아리지 못할 것입니다. 팔자(八字)에 본디 아들이 없으니, 주상이 하셔도 노고(勞苦)하셔도 공이 없을 것이며, 내전(內殿)에는 자손이 많을 것이니, 장차 선묘(宣廟) 때와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비록 삼척 동자(三尺童子)라도 반드시 듣고 믿지 아니할 것이다.

더욱이 이제 조종(祖宗)이 묵묵히 도우심으로 원량(元良; 세자)이 탄강(誕降)하자, 흉한 꾀가 더욱 드러났으니, 그 누구를 속이겠는가? ! 국모로 한 나라에 임하여 신민(臣民)이 우러러 받드는데, 이런 간특(奸慝)한 정상(情狀)이 있음은 천고에 듣지 못한 바이다. 이것을 참는다면 무엇을 참지 못하겠는가 

아침저녁으로 말하고 행하는 것이 투기(妬忌)와 원노(怨怒)가 아님이 없는데, 이것도 부족하여 구고(舅姑; 시부모)의 말씀을 지어내어 과인의 몸을 업신여겼으며, 총애를 독차지하려고 난()을 얽고 겸하여 화()를 조정에 전가(轉嫁)시켰으니, 그 이른바, ‘서로 핍박하고 서로 알력(軋轢) 한다.’고 하는 것과 과연 방불하다. 천지 귀신이 위에 임해 있고, 곁에서 질정할 수 있으니, 결단코 속일 수 없음이 이와 같은데, 안으로 장심(將心; 거역하는 마음)을 품고 임금에의 도리를 잊은 흉역(凶逆)한 무리에게는 악을 징계하는 법이 없을 수 없다. 박태보(朴泰輔, 1654~1689)·오두인(吳斗寅, 1624~1689)·이세화(李世華, 1630~1701) 등의 아들·사위·동생 및 숙질(叔姪)을 아울러 영구히 삭탈(削奪금고(禁錮)하라.”

이런 점만 보아도 인현왕후전이나사씨남정기에서 그려진 현숙하고 어진 인현왕후의 이미지는 거짓임을 알 수 있다. 아니 어쩌면인현왕후전의 희빈 장씨는 실제 인현왕후의 성격을 가져와 묘사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우리가 보는 역사는 모두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에 솔깃해진다.

 

한가지 의외인 것은 정재(定齋) 박태보(朴泰輔)의 이야기가인현왕후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약 30%에 달한다는 점이다. 심지어인현왕후전 아름답다! 박태보의 충성은 고금에 없는지라, 후세 사람들의 본받을 바로다!” [p. 145]라는 문장으로 마무리 하고 있다.

박태보전이라고 할 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에 대해 지나치게 상세하게 묘사하는 것을 보면, 혹시 그의 후손이인현왕후전을 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w******f 2018.08.29. 신고 공감 10 댓글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