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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천천히 움직여도 걷고 있는 이상 목적지에 닿게 마련이다. (173페이지 「여수 친구」)
걷는 것을 멈추지만 않으면, 계속 걸으면, 언젠가는 그 끝에 도달한다고 하던데... 그럼 그 끝에서 마주하고 싶은 것에 대한 열망이 있어야 계속 걸을 수 있지 않을까. 그건 개인의 몫일 거다. 각자가 바라는 거, 아픈 다리 두드려가면서 목적지에 도착하고 마주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 간절해지고 끝까지 걷게 한다. 막상 그곳에서 마주하는 게 얼마만큼의 만족감을 줄지는 모르겠으나, 모를 때는 또 그저 걷는 것밖에는 답이 없는 듯하다. 어쩌면 그곳에서 다시 유턴하여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지. 아마도 여행이란 단어는 그런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듯하다. 뭔가를 맞닥뜨리게 하는 것, 어느 한 지점에 도달하면 정면으로 마주 보게 하는 것, 다시 되돌아갈 곳을 기억하게 하는 것. 그래서 언제든 그 단어를 떠올려도 괜찮을 것만 같다.
여행을 주제로 일곱 명의 작가가 들려주는 ‘그 도시’의 ‘그들’의 이야기다. 속초, 정읍, 원주, 제주, 부산, 여수, 춘천. 그 짧은 이야기 속에 그들만이 가지는 그 도시의 색깔이 있다. 그리고 각자의 인생이 있다. 그 인생이 가끔은 후회도 만들고 웃음도 만들지만 그건 그곳에서만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부르는 그곳, 고향일 수도 있고 어떤 추억이나 기억이 만들어진 곳일 수도 있다. 저자들의 고향이기도 하고 인연이 만들어진 곳이기도 해서 그런지 한 작품 읽을 때마다 그 친근함과 편안함이 묻어나온다. 직접 경험한 자의 연륜 같은 몸짓이라고 해야 할까. 그건 어떻게 표현하기 어렵지만 미세하게 느껴지는 거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한 시간의 기록 같은 느낌이 짧은 소설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낯설기도 하고 어떻게 다가올지 염려가 되기도 했는데, 기우였다. 좋았다.
상당히 유쾌하게 들렸던 어릴 적 친구 네 명의 이야기(「말과 말 사이-원주통신2」는 딱 그 시간의 우리를 기억하게 한다. 십 대의 끝자락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친구가 되고, 살던 곳에서 적당한 현재를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유일하게 친구라 부르던 그들 사이의 유대감은 더 깊어진다. 고향이라는 곳은 그럴 수 있는 마법을 부리기도 하는 걸까? 외모가 좀 별로인 한 여자 친구를 두고 이어지는 그들의 이야기는 웃음과 함께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말 그대로 웃프다. 너무 솔직한 그들의 대화에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 나에게도 그런 남자 여자 친구들이 있었으나 그들과 같은 대화는 해본 적이 없다. 아, 그런 추억 하나 만들어놓을 것을. 아쉽군. ^^ 남편의 죽음 소식을 듣고, 낡은 재규어를 타고 속초로 향하는 여자의 이야기(「결혼기념일」)는 오늘날 많이 볼 수 있는 씁쓸한 현실의 한 장면이었다. 자신들의 꿈을 이루기 위해 가던 길에서 서로를 만나 결혼을 했고, 그 미래가 밝게 이어질 거로 생각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그들 사이에 남은 것은 자동차(재규어) 한 대뿐. 그 재규어를 타고 그곳을 향했던 여자에게 낡은 재규어가 발목을 잡는 것처럼 눈 속에 파묻혀갈 때, 지나간 시간의 후회와 함께 파묻히는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 묻고 싶고 지우고 싶은 게 생기거들랑 어느 눈 오는 날에 묻어봐야겠다. 만보기를 차고 걸어야만 만 보를 채울 수 있는 걸까? 이 소설(「만 보 걷기」)에서 등장하는 한 문장처럼 그래야 할 것만 같다. 그냥 걸어도 만 보를 채울 수 있다고 하지만 그렇게 될 것 같지가 않다. 만보기를 차고 있어야만 그 만 보를 채울 수 있는 목적이 생길 것 같아서... 도중에 멈추지 말고 계속 걸어 꽉 채운 만 보 앞에서 어떤 것을 떠올리게 될지 궁금해지게 한다. 어쩌면 두 주인공 사이에서 사라진 아미처럼 그 걸음을 다 채우고 나면 아미에 대한 그리움이 옅어질지도, 그들이 함께 걷던 그 춘천 거리를 걷고 나면 지나간 시간처럼 사라지는 것들이 더 생겨날지도 모르지. 시골 어디, 그곳을 떠올려 본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떠나고, 나이 드신 분들이 지키고 있는 어떤 동네. 치매에 걸린 아내를 돌보며 살아가는 시골의 한 남자(「정읍에서 울다」). 서글픈 인생 한 자락 보는 것 같아서 내 마음에 아픔이 먼저 당도했던 작품이다. 도시에 사는 자식에게 싼값의 땅이라도 팔아서 보내줘야 하고, 누군지도 모르는 ‘정읍댁’을 찾아달라는 치매 걸린 아내와 대화도 해야 하는 일상. 그게 어디 정읍 그곳만의 일이겠나. 대한민국 구석구석, 어느 시골이라 불리는 곳의 모습일 테지. 늙어가는 모습의 한 장면 같았다. 아픈 건 당연했고. 타향살이하던 어떤 여자(이 작품에서는 소녀)를 실제로 보게 하는 순간이었다. 피부색이 좀 다르고, 다른 언어를 쓰고, 어느 버스정류장에서 두리번거리는 모습. 언젠가부터 익숙한 장면이지 않나. 주인공 카페 남자와 맨발 소녀의 소통법을 엿보는 듯했다. (「꿈꾸는 소녀」) 서로가 부산이 타향인 사람들, 저절로 따라오는 쓸쓸함과 외로움, 어쩌면 두려움일지도 모를 눈빛까지. 그 차가운 현실에서 내가 보내고 싶은, 조금은 따뜻한 시선을 배우고 있다. 나도 어딘가를 향해 한 발짝만 떼어도 곧 이방인이고, 그곳이 타향이지 않겠는가. 버스도 아닌 꼭 기차를 타고 가야 할 것만 같은 여수(「여수 친구」)다. 친구의 전화 한 통에 여섯 시간의 기차여행을 감행한 주인공이 마주한 것은 여수에서 챔피언 신을 모신 무당이 된 친구의 모습이다. 이상한 느낌 같은 것이었을까. 다시는 못 볼 곳인 것처럼 생각했던 불안은 현실이 된다. 곧 사라질 곳, 개발로 인해 철거될 곳. 그러니 봐두어도 좋은 곳이 되어버렸다. 어느 시간을 묶어둔 곳이기도 한 것처럼 추억이라 불러도 좋을 곳이었을 거다. 기억의 저장창고에 꼭꼭 담아두어야만 꺼내볼 수 있는 곳이 될 테지. 우리 사는 곳 어딘가 그렇게 된다는 것이 마음 한구석을 휑하게 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윤고은의 「오두막」이다. 제주도, 올레길, 낯선 남자와 여자, 아마도 사랑이 시작되고 있을 그때. 우연히 목격한 살인 사건의 주인공인 남자와 여자는 목격자이면서도 피해자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때 이후로 자책감에 시달리며 고통받기도 했다. 결국, 두 사람은 헤어졌고, 몇 년이 지난 후에 우연히 제주도에서 다시 만난다. 시간은 흘렀으나 그들에게 그때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았다. 바람에 쓰러져가는 오두막을 기대했던 것처럼 그들의 기억은 옆으로 조금 기울였지만,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래서였을까. 남자가 그곳에 정착해서 살아가고 있는 이유를 짐작해본다. 그 길에 고장 난 가로등을 보수하는 까닭, 밝게 비추는 곳곳을 보고 싶은 바람을 알 것도 같다. 불안하게 시작했던 사랑이 결국은 일 년도 채우지 못하고 끝나야만 했던 게 마냥 안타까워서, 약속한 것도 아닌데 우연처럼 다시 그곳에서 만난 두 사람이 같은 고통을 경험해서, 이제는 좀 괜찮아져도 되지 않을까 하는 안심을 주고 싶어서 내내 발을 동동 구르면 읽고 있었다.
각 지방의 매력을 느끼게도 하면서 동시에 낯섦과 쓸쓸함도 주고 있는 단편들이었다. 기억에서 사라지고 잃어버린 것들에 추억하게 하고, 누군가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도 만들어낸다. 우리는 자라고, 시간이 흐르면서 어딘가로 떠나고, 혹은 그곳에 정착하고 살면서 우리가 떠나온 곳을 잊는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 삶이 그곳을 기억하게 놔두지 않는다. 그럴 여유를 갖지 못하게 하는 삶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곳은 기억에서 점점 사라진다. 일부러 꺼내야 할 일이 아니고서는 쉽고 편하게 접근할 일이 드물다. 그런 현실을 파악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한 번쯤 전환점을 만들어주고 싶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이런 단편집을 만나게 된 건 어찌 되었든 반가운 일이다. 어떤 도시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이야기, 주인공들을 통해 기억하거나 배우게 되는 삶의 단면을 보여준다. 여행에세이나 여행안내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 그곳에 한번은 가보고 싶게 충동질하기도 한다. 그곳에서 그들의 이야기 속에 나의 시간을 집어넣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잊고 있던 기억과 갖지 못한 추억과 한 번쯤은 방랑의 기질이 나를 덮어버리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각 소설은 재미도 있었지만 여행이라는 주제와 어떤 도시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이 색다른 매력으로 다가온다. 별 기대 없이 펼쳤는데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읽은 작품집이 되어버렸다. 해외 도시를 다룬 전작 『도시와 나』에 이은 두 번째 책이다. 전작이 해외 도시를 말했다면 이번 작품은 국내 도시를 보여준다. 더 가까운 곳이기도 해서 그런 걸까, 친근함이 더 생긴다. 곧 나올 세 번째 작품은 북한의 도시라는데, 어떻게 그려질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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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급으로 유명하진 않지만 그래도 꽤 이름있는 소설가들의 단편집이다. 각기 한 도시를 배경으로 삼았다는 공통점으로 일곱 편이 묶여 있다. 속초, 정읍, 원주, 제주, 부산, 여수, 춘천 이 일곱 도시가 각 소설의 배경으로 등장한다. 서점에서 돈 주고 산 책이 아니고 <한겨레21> 추석 퀴즈 대잔치에 입상해서 책 40권을 선물로 받았는데 그 중에 끼여 있던 책이다. 소설 읽기를 참 좋아하면서도 80년대 이후 작품들은 몇을 제외하고는 거의 안읽는 편이라 이 책 역시도 책꽂이 구석탱이에 있는지도 모르게 꽂혀 있었다. 처자가 잠든 주말 오전 모처럼 책꽂이 앞에 앉아 책 제목들 보면서 힐링하고 있는데 이 책이 문득 눈에 띄었다. 폭풍같은 한 주가 끝난 시점이고 또 그 다음주를 준비하던 참이라 '그 길 끝에 다시'라는 제목에 공감이 되었던가보다.
저 일곱 도시들이 차이는 있지만 모두 나와 인연이 닿은 곳들이다. 내가 나고 자란 부산. 내가 첫 발령을 받았던 강원도 고성군. 생활권이 속초에 가까워서 거의 속초에 살았다고 해도 무방하다. 매주 지나다니던 미시령 터널, 영랑호, 청초호, 푸르디 푸른 동해바다 그리고 그곳의 바람. 지금 근무하는 원주. 언제나 다시 찾고 싶은 제주. 교원임용시험에 합격했던 약속의 땅 춘천. 그리고 여행삼아 들렀던 정읍, 여수. 옴니버스 소설은 역시나 순서에 관계없이 골라읽는 재미가 있는지라, 우선은 원주. 그리고 속초. 출생지 부산엘 먼저 들러야 하겠지만 배경이 해운대 바닷가라 고향과는 거리가 멀어 패스.
원주를 배경으로 한 소설의 제목은 <말과 말 사이-원주통신 2>. 소설가 이름이 낯이 익다 했더니 대학 4학년 때 <최순덕 성령 충만기>라는 기묘한 제목의 소설을 읽은 적이 있었다. 책이라고는 읽지 않던 옛 고등학교 친구가 하도 추천을 하기에 읽었는데 나랑은 영 안 맞았다. 제목처럼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설정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어쨌든, <말과 말 사이>에는 원주 토박이인 네 명의 친구가 등장한다. 남 둘, 여 둘로 구성된 이 그룹은 숨기는 것 없이 모든 이야기를 공유하는 사이다. 그들은 응팔에 등장하는 친구들처럼 옛 추억을 사심없이 공유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그들 중 형자라는 여자에 대한 은근한 우월감과 관음증에 기반한 모임이다. 서른이 다 되도록 남자 경험이 없어서 넷이 술을 먹다가 한 남자(서술자)를 덮치려 한 적도 있지만 남자가 그를 한사코 거부할 정도의 박색.
그러던 어느 날, 형자는 원주에 주둔한 한 '흑인' 미군과 연애를 시작하게 된다. 나머지 셋은 은근히 형자가 언제 남자를 알게 될지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 가능성을 담보한 사람이 흑인이 되자 고민에 빠진다. 하지만 친구라는 껍질을 쓰고 있기 때문에 차마 그 우려를 형자에게 말하지는 못한다. 흑인의 그것이 매우 크기 때문에, 남자 경험이 없는 네가 그것을 받아들이기 얼마나 힘들 것인지, 또 인순이 이모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말이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형자는 매우 적극적인데, 무슨 이유에선지 둘의 연애는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사실 이 소설의 배경이 왜 굳이 원주여야하는지는 모르겠다. 미군 기지 가 있는 곳은 평택에도 동두천에도 있다. 흑인이 필요하다면 이태원과 홍대에도 널렸다. 지독히 못생기고 눈치가 없어서 자존감도 지독히 낮은 여자를 주인공으로 삼아 만든 시시껄렁한 이야기라 나도 깊이 몰입하지 못하고 시시껄렁하게 읽고 말았다. 이 작가는 나랑 안 맞는 걸로.
그 다음 행선지는 속초. 백영옥? 이 이름 역시 제법 들어본 작가인데 선입견을 갖지 않기 위해 정보를 검색하는 대신 그냥 읽기 시작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재규어(자동차!)를 타는 꽤 성공한 여성 직장인. 남편이 죽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고 속초로 내려가는 데서 소설은 시작한다. 이혼한지 오래된 그녀에게 소식이 닿은 날은 하필 잊고 있었던 결혼 기념일. 속초로 내려가는 동안 벌어지는 일들(휴게소에 들르거나 시동생을 만나거나 잊었던 추억의 장소들을 들르는 대단할 것 없는 사건들)을 시간 순서로 나열한 여로형 소설이면서, 각각의 사건과 장소로부터 촉발되는 추억담이 이어지는 회상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눈에 띈 것은 서사 구조의 긴장감보다는 감각적인 표현들이었다. 속초에 살아본 사람이라면 더욱 쉬이 떠올릴 수 있는 심상들.
"나는 미시령의 바람을, 쇠심줄처럼 질긴 바람의 뼈대가 만져질 듯한 거친 그 바람을 좋아했다." - 영동의 바람이란 정말 안 맞아본 사람은 그 무게감을 모른다. 달리는 시내버스가 흔들거리고 아파트도 건들거리게 만드는 것이 일상. 그 바람을 버티며 살았기에 영동 토박이들이 그리 고집세고 말씨가 억센 사람이 많은 것 아닌가 했다. 그 바람에게 쇠심줄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니 눈에 보이는 듯 손에 잡히는 듯하다. 지금도 준령을 넘어 황소같이 불어닥치고 있을 바람이 지금은 때론 그립다.
"웨딩 앨범을 펼쳤다. 웨딩 사진 속에서 우리는 웃고 있었다. 너무 환하게 웃고 있어서 사진 속 내 얼굴에 손을 갖다 대면 그때의 미소가 손가락 사이로 전해질 것 같았다." - 앨범 속 표정들 참 환하다. 기억이 난다. 전해진다 보다는 스며들 것 같았다는 어땠을지 메모해 보았다.
감각적인 표현을 통해 잊을 줄 알았던 남편을 떠나보내는 진혼곡 한 편을 읽었다. 속초. 바다와 산으로 둘러싸인, 조금은 쇠락한 그곳의 분위기와도 잘 어울리는 듯했다. 이제, 정읍으로 갈지 춘천으로 갈지 정해야 한다. 선택은, 일단 수업 갔다 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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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작가의 단편을 모아 놓은 책을 읽을때면 각각의 느낌이 비슷하게 전해지곤 하는데 일곱명의 작가들이 국내 일곱 도시에 얽힌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펼쳐보이는 이 소설은 각자 자신들의 문체들로 써 내려가고 있지만 어딘지 이야기는 하나로 통한다는 느낌을 준다. 어느 지명을 떠올리게 되면 분명 좋은 추억도 있겠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추억도 있기 마련이다. 작가들이 떠올린 속초, 원주, 정읍, 여수, 제주, 부산, 춘천이라는 도시들에 얽힌 사연을 읽으며 한번쯤 다녀왔던 곳이라면 그곳에서의 추억을 더듬어 그 공간속에 책속의 주인공들을 올려 놓게 된다. 문득 내가 작가가 되어 이 글과 함께 여행을 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이혼한 전남편의 부음소식을 듣고 잘못된 길이라는 네비의 경고를 무시하고 미시령고개를 갈때부터 결코 행복하지 못했던 결혼생활을 떠올리게 되는 그녀는 내내 직장 상사에게 재촉의문자를 받게 되고 급기야 결혼 전리품으로 받은 늙은 제규어가 눈속에 갇혀 발목잡히는 신세가 되고 보니 네비의 경고음이 어쩐지 괜히 울리고 있는게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참 절묘한 이야기다.백영옥이라는 작가의 글은 사람들의 심리를 들었다 놨다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파킨슨 증후군을 앓고 있는 아내가 찾는 정읍댁을 찾아 수소문을 하던 손흥규의 늙은 노부부의 이야기에는 우리도 늙으면 이 두 부부처럼 서로가 아픈 상처를 가슴에 품고도 사랑할수 있을까 하는 가슴 뭉클함이 느껴지고 제주에서의 사건을 목격하고도 서로 모른채했던 두 남녀가 다시 제주에서 그 사건을 떠올리게 되는 온고은의 이야기는 언젠가 진짜로 일어났던 제주 올레길 살인사건을 떠올리게 해 더욱 스릴러 같은 소설이 되었고 원주의 4인방 친구들중 유난히 못생겨서 아직 경험이 없는 친구가 당황스럽게 흑인을 애인으로 삼은 이기호의 이야기는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그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듯한 이야기를 풀어 내고 있다. 각각의 개성있는 작가들의 문체와 이야기 전개 방식을 하나둘 읽어 내려가다 보니 어느 도시에서의 기억이건 그것을 떠올리는 형식의 글들이 때로는 미스터리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는 어딘지 참 닮은듯한 느낌이다. 작가들이 떠나고 싶어하는 여행지나 혹은 자신의 소설속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와 그들의 현재가 담겨있는 뒤편에 실린 작가들과의 인터뷰가 어쩐지 소설보다 더 흥미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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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다, 무진기행이 떠오르는 건. 바꾸어 말하면, 무진기행만한 소설을 또 못 봤다는 뜻이 되겠지. 무진기행과도 같은 소설을 쓰고 싶어 한 작가들이 있기는 할까? 소설 때문에 실제로 찾아서 가 보고 싶어 할 만큼의 배경인 도시, 그러나 무진은 없다는데. 작가가 못 되는 독자인 나로서는 이런 소설, 이런 도시가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바람만 품고 있을 뿐이고.
이 책에 등장하는 도시는 속초, 정읍, 원주, 제주, 부산, 여수, 춘천이다. 섭섭하게도 이 책에 실린 소설의 영향으로 가고 싶은 도시를 갖지는 못했다. 소설로 그려 낸 도시가 마냥 아름다운 게 아닌 탓도 있고, 소설에서 보여 주는 분위기의 도시라면 더더욱 안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건 좀 손해인 느낌이다. 그래도 내 기억력으로 따져 본다면 염려할 바는 못되겠다. 이 도시 중에 어떤 곳을 방문하게 된다 해도 나는 소설 내용을 기억하지 못할 게 뻔하므로. 아니다, 제주는 남을 것 같다. 너무 기막혀서. 좋은 쪽은 아니다.
이런 기획은 산뜻해 보인다. 내 성향에는 아니었어도 누군가에게는 소설과 도시를 동시에 사랑할 수 있게 해 줄 테니. 같은 출판사에서 해외의 도시를 소재로 비슷한 기획을 한 소설집이 나와 있다. <도시와 나>라고 하는데 빌려 볼 수 있겠다. 해외의 도시는 그것대로 또 흥미로울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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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감성을 자극할 수 있는 책을 만났다. '여행' 언제나 들어도 가슴 설레게 만드는 단어, 하지만 생활에 쫓기면서 항상 가슴속에서만 품고 있던 단어. 그 생활이라는 것이 어쩌면 스스로가 쳐 놓은 굴레를 안일하게 지키고자 하는 또다른 한 켠의 내 마음이 강하게 작용해 밖으로 밀쳐내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그 길 끝에 다시] 여행 소설을 읽으면서 그동안 밀쳐 놓았던 다른 한 켠의 가슴에서 쿵쾅 쿵쾅 거리는 울림을 다시 듣게 되었다. 순전히 '이기호' 라는 작가의 이름만으로 선택하게 된 책이지만, 그 속에는 내가 여태껏 몰랐던 작가들이 나에게로 다가와서 무척 좋았다. 이 또한 나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독서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지금까지의 게으름과 아집의 결과인 듯하다.
책 속에는 얼핏 생각하면 내가 이미 가 봤던 장소라는 당연성을 가졌을 '속초, 부산, 제주, 춘천, 원주,정읍, 여수' 등등의 도시가 사실은 너무나 익숙하기에 가보지 않아도 갔을 듯한 착각이었음을 소설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자동차를 타고 그냥 한 번 휙~~ 하고 둘러봤던 곳을 정말로 가 봤다고 할 수 있을까. 책에서 말하는 그 장소에 대한 애틋하거나 특별하게 떠올릴 수 있는 사연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후에 떠올려 봐도 가슴에서 뭔가가 스르륵 지나가는 여운이라는 것이 있어야만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너무나도 감성적으로만 흘러버리는 이 순간도 내 가슴 한 켠에 묵혀 두었던 여행에 대한 열망이 또 다시 스멀스멀 일어남은 나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가을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고 뭔가 낭만이 깃든 멋진 추억이 아니더라도 스스로에게 찌든 생활인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을 갖도록 해 줘야겠다. 그것이 지난 뜨거웠던 여름을 견뎌낸 내게 줄 수 있는 최선의 선물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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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도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이젠 우리나라를 돌아봤다. 아 물론 책으로 ㅎㅎ (리뷰: 외로운 사람들 '도시와 나')
이혼한 남편의 부음을 듣고 찾아간 속초에서 맞이한 결혼기념일 (참 기분 묘하겠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정읍댁을 찾는 파킨슨 병에 걸린 악바리 아내, 원주에서 나고 자란 4명 청춘의 자신감 찾아주기, 그 날의 일 때문에 헤어졌는데 우연히 그곳 제주에서 재회하지만 여전히 서로의 감정을 숨기는 두 남녀, 할아버지의 나라에 시집왔지만 상처받은 소녀, 챔피언을 존경했는데 그 챔피언이 죽은 뒤에 어찌어찌하여 변호사가 아닌 점집을 차린 여수 친구, 블로그에 아름답게 그려진 춘천을 찾은 남자와 여자.
사랑했고, 미워했고, 존경했고, 숨겼고, 상처를 주고 받았고, 생각과 행동이 달랐고, 그리워했다. 그리고 그 길 끝에 다시 우리는 만난다. 같은 도시인데 외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도시와 나'의 외쿡 도시보다 우리나라의 도시 이야기가 더 공감이 간다. 같은 작가의 작품이고 배경만 다를 뿐인데. 역시 난 우리 것을 좋아하나보다. 골드 고마워요.
책 뒷장 날개에 보니 '낯선 해외 도시를 다룬 '도시와 나'와 국내 도시를 여행하듯 이야기하는 '그 길 끝에 다시'에 이어 올 가을엔 북한의 도시들과 인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고 한다.' 외쿡 한국 그리고 북한. 흥미롭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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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란 그런 곳이다. 가는 사람은 멀리 가고 오는 사람은 먼 곳에서 온다. 그날도 아마 서울 경기 지역에서 굳은 결심으로 가출하여 내려온 이들이 있었을 테고 그들처럼 친구도 올라간 거였다. 커다란 하천을 통해 낮은 곳으로 흐르는 육지의 물과, 수평을 흐르는 해류의 바닷물, 그리고 철썩이는 파도가 만나서 뒤섞이는 곳이 항구인데 그런 탓에 이곳에서의 삶이란 수직과 수평의 이동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여수 친구」173~174쪽)
가끔 D 도시를 생각한다. 적확하게 말하자면 그곳에서의 나를 그리워한다. 꿈과 사랑이 시작되었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소중한 인연을 만든 곳이다. 아니다, 꿈은 이루지 못했고 이별의 상처가 남아 나를 패배자로 만든 도시다. 그럼에도 그곳을 떠올리면 명랑해진다. 내 기억에 남은 모습은 실재의 그곳과 다르지만 말이다.
『그 길 끝에 다시』속 소설에도 D 도시를 만날 수 없었다. 7명의 작가가 선택한 도시는 가깝고도 멀었다. 속초, 원주를 제외한, 부산, 정읍, 여수, 제주도, 춘천은 낯설지 않았다. 각각의 도시를 담은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곳에 동행한 이들이 떠올랐다.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는 이도 있다. 문득 그들과 나 사이의 거리가 왜 이렇게 멀어졌을까, 생각한다. 생이라는 직업에 최선을 다하느라 그랬을까. 안부를 전하는 일도 의무로 전락해버렸다.
뒤늦게 전 남편의 부고를 전해 듣고 결혼식을 했던 속초에서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백영옥의 「결혼기념일」, 파킨슨 병에 걸린 아내가 기억하는 정읍댁이 아기 때 폐렴으로 잃은 첫 딸이라는 걸 알게 되는 손홍규의 「정읍에서 울다」, 원주를 떠나지 못하는 동갑내기 친구들의 소소하면서 특별한 일상을 유쾌하게 풀어 낸 이기호의 「말과 말 사이」, 아름다운 섬 제주에서 벌어진 잔인한 살인사건을 들려주는 윤고은의 「오두막」, 정착과 부유의 삶에 교차하는 여수의 풍경을 담은 한창훈의 「여수 친구」, 관광지라는 화려함 뒤에 감춰진 쓸쓸한 도시의 뒷모습을 몽환적으로 표현한 함정임의 「꿈꾸는 소녀」, 여행자가 발견한 춘천의 진짜 모습을 만날 수 있는 김미월의 「만 보 걷기」속 사람들도 다르지 않다. 잠시 머문 도시에서 맺은 인연이기 때문이 아니라 현대인의 삶에 쉼이라는 여유가 존재하지 않아서다.
고백하자면 이런 종류의 테마소설집을 좋아한다. 그에 반해 그에 대한 느낌을 전하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어렵다는 말이다. 백영옥과 손홍규의 소설은 사랑, 결혼, 이별, 죽음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졌고 이제는 세계적인 도시로 성장한 제주에 대해 숨겨진 진실을 밝히듯 범죄를 다룬 윤고은의 소설은 신선했다. 풍경화를 묘사하듯 담담한 한창훈과 김미월의 소설은 마치 작가의 이야기는 아닐까 착각을 불러온다. 이 책이 인상적이었던 건 수록된 작가 인터뷰였다. 어떤 작가는 소설의 내용과 이어지는 공적인 느낌의 인터뷰였고, 어떤 작가는 작가 개인의 사적인 인터뷰였다. 자신을 잃어가는 아내를 통해 삶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보여주는 「정읍에서 울다」의 작가 손홍규가 물음표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그렇다.
‘단어가 그렇듯이 문장부호도 하나의 발화거든요. 단어는 마음에 안 들면 대체할 수 있는 다른 단어를 찾을 수 있지만 문장부호는 그런 호환이 어렵잖아요. 특히 이 소설에서는 물음표로 담을 수 없는 어감을 살리기 위해 고심했어요. 부부의 대화는 대부분 묻는 말과 대답하는 말로 이루어졌지만 묻는 말에는 물음 너머의 의미가 담겨야 하고 대답하는 말에도 대답 너머의 의미가 담겨야 해요. 물음표를 사용하면 삭제했을 때 마땅히 물음표가 있어야 할 자리였기 때문에 반쯤을 물음의 흔적이 남게 마련이고 또한 물음표가 없기 때문에 물음 너머를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 같았지요.’ (작가 인터뷰 중에서, 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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