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리뷰 (32)

한줄평
평점 분포
  • 리뷰 총점10 53%
  • 리뷰 총점8 34%
  • 리뷰 총점6 12%
  • 리뷰 총점4 0%
  • 리뷰 총점2 0%
연령대별 평균 점수
  • 10대 0.0
  • 20대 0.0
  • 30대 7.0
  • 40대 8.0
  • 50대 9.0

포토/동영상 (7)

리뷰 총점 종이책
걷는다는 것은 사유의 다른 이름이다.
"걷는다는 것은 사유의 다른 이름이다." 내용보기
걷는다는 것은 한쪽 발을 들어 다른 쪽 발 앞에 놓는 단순한 행위이다. 하지만 이 단순한 행위는 그 행위에 어떤 동기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각각의 의미가 달라진다. 목적지를 정하고 걷는 것은 인간이 가진 하나의 이동수단이다. 인간이 가진 가장 원초적인 신체의 기능을 이용하여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한다. 이때는 목표지점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 목표지점을 향해 속도
"걷는다는 것은 사유의 다른 이름이다." 내용보기

걷는다는 것은 한쪽 발을 들어 다른 쪽 발 앞에 놓는 단순한 행위이다. 하지만 이 단순한 행위는 그 행위에 어떤 동기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각각의 의미가 달라진다. 목적지를 정하고 걷는 것은 인간이 가진 하나의 이동수단이다. 인간이 가진 가장 원초적인 신체의 기능을 이용하여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한다. 이때는 목표지점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 목표지점을 향해 속도전의 양상을 뛴다. 그래서 시선과 생각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에 집중된다. 주위의 풍경을 관람하며 걷는 것은 여행이나 관광이다. 그때의 걷기는 내가 보고자 하는 풍경과 시시각각 변화는 주위사물에 집중된다. 시선을 잡아끄는 여러 대상에 시선을 나누거나 또는 특정한 주위의 풍경에 시선을 고정하고 내 걸음은 내가 보고자 하는 하나의 대상을 향한다. 어떤 목적도 가지지 않고 걷는 것을 우리는 산책이라고 한다. 그 행위에는 어떤 목적도 없다. 이동수단으로서의 걷기처럼 시간을 다투거나, 풍경에 시선을 빼앗기는 관광이나 여행목적의 걷기가 아니다. 그러기에 그 시선은 한 대상에 고정하지 않고 허공을 향하고, 생각은 사유의 세계를 향한다. 걷는 이의 생각과 발걸음이 지향하는 곳이 없기에 자연적으로 그 시선과 생각은 자신을 향한 사유의 영역으로 귀속된다. 이것이 진정한 걷기이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두발로 사유하는 철학을 위한 걷기이다.

 

프랑스 철학자이며 파리12대학과 파리정치연구소의 정치철학 담당교수인 저자 프레데리크 그로는 걷기, 두발로 사유하는 철학을 통해 철학적 사유의 위대함은 책상머리에 앉아 남이 기술한 책을 요약해서 집필하여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가장 기본적인 행위인 두발로 걷는 행위릍 통해 완성된다고 얘기한다. 그러면서 철학자와 사상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그들이 걷는다는 행위를 통해 어떻게 그들만의 사상을 창조하고 완성했는지를 보여준다. 책상 앞에서 글을 읽고 또한 쓰는 것은 타인의 문체를 베끼고 재분류하고 옮긴 것이기에 이것은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그저 타인의 생각을 옮겨 적고 주석을 다는 것에 불과하단다. 체험이 없는 사상은 죽은 사상이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 기존의 문화와 도서관이 파놓은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무언의 생생한 체험을 위해 걸어야 한단다. 견고한 발걸음은 견고하고 강렬한 글을 쓰게 한단다. 글이란 무언의 생생한 체험의 결과물이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를 위해 걷고 또 걸으란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유명한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겨우 몇 줄만 빼놓고 전부가 다 길을 걷는 도중에 생겨났으며, 여섯 권의 공책에 휘갈겨 썼다네라고 고백할만큼 그의 철학적 사유의 대부분은 걷기의 산물이다. 그는 세상과 인간들이 내려다보이는 야외를 걸으며 구상하고 상상하고 발견하고 열광했다. 18세기 프랑스 상징파를 이끌었던 천재시인 아르튀르 랭보는 평생을 걸었다 난 그저 걸어다니는 사람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라고 할만큼 걷고 또 걸었다. 몇날며칠을 걷다가, 밤이 되면 별빛을 지붕삼아 길가에서 자기도 했다. 아덴의 사막을 걷기도 하고 낙타 몰이꾼을 대동한 대상들과 길을 떠나기도 했다. 그의 모든 시는 걷기의 산물이다. 18세기 프랑스의 정치 사상가이자 철학자인 장자크 루소는 자기가 걸어야만 정말로 생각하고 구성하고 창조하고 영감을 얻을 수 있다고 단언했다.

 

나는 산책할 때는 결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전원은 나의 사무실이다. 책상과 종이, 책만 봐도 지겨워진다. 작업 도구는 나를 의기소침하게 한다. 뭘 좀 써보려고 의자에 앉아도 도대체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재치를 발휘해야 할 필요성이 오히려 내게서 재치를 빼앗아간다. -장자크 루소의 나의 초상중에서-

 

순수이성비판으로 경험론과 이성론의 양극단을 종합한 비판철학을 구축한 이마누엘 칸드는 규칙성의 모델이었다. 그는 글쓰기와 독서 외에 매일같이 정확한 시간에 산책을 하기로 유명하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같이 오후 5시면 산책에 나섰다.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르셀 프루스트, 파리의 아케이드를 소재로 현대 자본주의와 모더니티의 근원에 대해 탐구한 미완성의 작품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남긴 발터 벤야민, 걷기를 무저항 운동의 방법으로 사용한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이렇듯 많은 철학자들이 그들의 사유의 수단으로 걷기를 택했다.

 

하지만 걷기가 사유의 수단만은 아니다. 걷는다는 것이 단지 정처없는 산책이나 외로운 방황만은 아니다. 걷기란 또한 자신의 성찰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이를 우리는 순례라 한다. “이승의 모든 인간은 순례자다라는 말처럼 삶 자체가 유배인 것이다. 순례란 세상의 떠들썩함과 전점 늘어만 가는 일, 마멸에서 벗어나기 위해 걷는 행위다. 그곳에서 마음을 거둬들이는 것, 떠난다는 것, 다시 출발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순례자는 매일 작별한다. 이곳에, 또는 저곳에 다시 돌아올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종교인은 자신의 신앙심을 돈독히 하고, 자신의 믿음이 충실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위해 목숨을 건 순례를 한다. 또한 커다란 잘못에 대한 속죄의 길이기도 하다. 종교인이 아닌 일반인은 세상 속에 갇힌 자신에게 절대적인 자유를 주며, 삶의 성찰을 위해 그 고행의 길을 걷는다. 자신을 성찰하고 세상의 이목과 규율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온전히 자유로운 몸과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기 위해서다. 이 또한 걷기이다. 수십 일을 온전히 옛날의 인간을, 원초적 인간을 자신 속에서 발견하기 위해 오랫동안 걷는 것이다. (112) 걷기를 통해 자신의 몸을 학대하고 그 고통을 통해 자신의 성찰을 꾀한다. 그래서 일부 종교인은 그냥 걷는 것도 힘든 그 길을 오체투지를 하며 걷는 것이다.

 

걷는다는 것은 곧 밖에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자유로운 공기 속에 있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또한 걷는 다는 것은 전진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사고를 위해 현실의 편안함을 뒤로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걷는다는 것은 또 다른 자유의 상징이기도 하다. 현실이 주는 일상의 구속으로 벗어나 자신만의 박자와 속도와 리듬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또한 걷는다는 것은 느림의 상징이다. 신자본주의 하에서 모든 인간들이 속도전의 양상에 휘말리어 그저 빠른 것만이 최선의 선인 양 추구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걷는다는 것은 그 속도전에 반발하는 하나의 저항이다. 걷는 사람의 느림이란 빠름과 정확히 반대인 느림이 아니다. 그것은 우선 발걸음이 보여주는 극도의 규칙성이자 일률성이다. (58)”

 

걸으면서 느끼는 에너지는 그 자신의 에너지, 움직이는 몸이 발산하는 에너지다. 걷는다는 것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땅의 에너지를 흡수한다. 땅과 순환의 일치이기도 하다. 인간은 땅으로부터 왔다. 그래서 땅을 디디며 걷는다는 것은 그 순환의 고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또한 걷는 것은 평정이다. 동일한 리듬의 반복에서 오는 안정감. 심장의 고동과 땅을 디디는 걸음걸음이 땅과 만나며 몸으로 전해오는 진동. 그리고 그 진동이 심장의 리듬과 동일시되면 완벽한 평정이 찾아오는 것이다.

 

마지막 상태는 평정이다. 이것 역시 다른 것이어서 더 많은 초연함이고 더 적은 경탄이며, 더 많은 체념이고 더 적은 긍정이다.(207)

 

그럼 어떻게 걸어야 할까? 인간은 걷기는 배우지 않는다. 그저 태어날 때부터 걷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철학적 사유를 위한 제대로 된 걷기는 바로 혼자 걸어야 한다. 누군가와 동행하면 어쩔 수 없이 그들과 부딪치고 방해받는다. 기본적인 리듬도 타인에 맞추어야 한다. 니체나 헨리 데이비드 소로, 장 자크 루소 등 많은 이들이 언제나 혼자 걸었다. 우리는 혼자 있을 때도 대화를 하고 싶어 한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혼자 걸을 때 대화의 대상은 내가 마주치는 자연이다. 자기 자신이다. 혼자 걷는다는 것은 그 대화의 대상을 자연과 나로 삼는 것이다. 자연과 온전히 하나되어 그들과 대화하는 순간 나도 자연이 되고, 자연은 곧 나의 소유가 된다. 둘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 온전히 하나가 되어 원시의 자신과 마주하는 것이다.

 

현대인은 속도전에 사로잡혀 빠름의 논리에 매몰되어 있다. 그 빠름의 논리에 편승해서 왜 흘러가는지를 느끼고 생각할 틈도 없이 그저 흘러가는 것이다. 내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자의 리듬과 세상의 박자에 맞추어 흘러간다. 그러기에 거북하다. 내 리듬이 아니고 내 고유 의지도 아니다.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위해 가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당연히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이 없다. 하지만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내가 삶의 올바른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제 길을 찾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함에도 그저 빠름을 미덕으로 알고 방향도 모른 채 그저 나아간다. 중간 중간 멈춰 설 시간적 여유도 없다. 바쁘기 때문이다, 이런 속도전의 양상은 주위를 돌아보지 못하게 한다. 언제나 시선은 내가 도달해야할 목표-내가 선정하지 않은 누군가에 의해 주어진-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주위를 돌아볼 여유도, 이웃에 관심을 둘 여유도, 삶을 관조할 여유도 없는 것이다. 그럴수록 세상은 각박해져가고 피폐해져가고, 메말라 간다. 이런 신자본주의 논리를 기반으로 한 생산성의 증대를 위한 빠름의 논리에서 탈출해 자신만의 삶을 관조하는 데는 걷기 이상의 방법이 없을 듯 하다. 굳이 철학적인 사유를 위해서가 아니라도 홀로 나만의 시간으로 조용히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걷기라는 원초적인 행위를 통해 삶의 관조자가 아닌 자신의 인생의 주관자로서 내 삶의 방향을 한번쯤은 점검해 보는 것은 어떨까.

 

오래전부터 소망한 버킷리스트에 이루지 못한 항목이 하나있다. 산티아고 순례길 800키로를 걷는 것이다. 생각했다. 왜 나는 그 길을 걷고자 하는 것일까. 단순히 종교적인 순례길이어서가 아니다. 아니면 남들이 다 가는 길이어서도 아니다. 그 순례길에서 한국인을 만난 외국인들이 가장 의아하게 생각하는 질문이 있단다. ‘왜 많은 한국인들이 다른 동양인하고 달리 그 먼 곳에서 굳이 이 길을 걷기 위해 오는지 모르겠단다’. 어쩌면 그 질문이 지금 우리 삶을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지도 모른다. 지리산 순례길이나 제주도 올레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먼 곳까지 왜 길들을 떠날까? 많은 이들이 그 고행을 길을 선택해 많은 비용을 들여가면서 그 길을 걷고자 할까? 가끔씩 산을 즐겨가고, 지리산 순례길 등을 일주한 적도 있다. 혼자 자연 속에 들어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때, 스스로의 마음속에서 울려오는 냉철한 질문에 당황한 적도 있다. 그럼에도 왠지 아쉬웠다. 무언가 하다만 것처럼 온전히 내 자신의 살아온 여정과 마주하지 못한 아쉬움은 남았다. 어쩌면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철학자들이 목숨을 걸고 그 많은 길들을 걷고, 건강을 해쳐가면서 걷기를 그치지 않은 것은 내가 지금 이 땅에서 느끼는 것과 같은 이유는 아닐까. 완벽한 자유에의 갈망, 세상적인 일상의 규율에서 벗어나 완벽한 자유를 통해 해소되지 못한 육체와 사유의 정점을 맞이하기 위한 것은 아닐까. 내 몸의 원천이며 모든 것을 공유한 자연과의 절대교감을 통해 자연이 전해주는 절대 진리에 가까이 다가서고자 하는  앎을 향한 간절한 욕구는 아닐까. 걷기란 가장 원초적인 행위이면서도 철학적 사유의 다른 이름이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걷는다. 떠나기 위해 걷는다. 만나기 위해 걷는다. 다시 떠나기 위해 걷는다. (81)

 

 

걷기의 참뜻은 이타성(다른 세계들, 다른얼굴들, 다른 문화들, 다른 문명들)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문명화된 세계의 가장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걷는 다는 것, 그것은 바깥쪽에 있는 것이다. 일하는 사람들 바깥쪽에, 고속도로 바깥쪽에, 이익과 빈곤의 생산자들 바깥쪽에,그리고 겨울 해의 부드럽고 연한 빛과 봄에 부는 미풍의 상쾌함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더 나은 할 일이 항사 있는 진지한 사람들 바깥쪽에 있는 것이다.(141)

 

 

 

* 이 리뷰는 예스 24의 리뷰어 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h*****o 2014.05.29. 신고 공감 9 댓글 20
리뷰 총점 종이책
걷는다는 것은 단지 한 발을 다른 발 앞에 놓는 것이다.
"걷는다는 것은 단지 한 발을 다른 발 앞에 놓는 것이다." 내용보기
요즘은 운동으로 걷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아침 일찍 출근을 하다 보면 강변도로를 따라 걷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다들 바쁘게 걷고 있다. 그렇게 걷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은 걸으면서 무엇을 생각할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지금은 뜸하지만 예전에는 산엘 자주 갔었다. 아마 운동 삼아 갔을 것이다. 그런데 산을 오르면서 나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더듬어보
"걷는다는 것은 단지 한 발을 다른 발 앞에 놓는 것이다." 내용보기

요즘은 운동으로 걷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아침 일찍 출근을 하다 보면 강변도로를 따라 걷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다들 바쁘게 걷고 있다. 그렇게 걷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은 걸으면서 무엇을 생각할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지금은 뜸하지만 예전에는 산엘 자주 갔었다. 아마 운동 삼아 갔을 것이다. 그런데 산을 오르면서 나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더듬어보면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다. 일행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거나, 정상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생각하기에 바쁘지 않았나 싶다. 그 후론 시간을 가지고 걸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이처럼 걷는다는 것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몇 년전인가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책이 붐을 이루었을 때, 그 중 한 권을 읽고서 나도 그 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한달 넘게 오직 걷기만 하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 볼 기회를 가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마음 속에서는 언젠가 그 길을 걸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실현 가능성은 멀어지기만 하는 것 같다. 하다못해 아침저녁으로 산책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것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으니.. 가장 하기 쉬운 것이 걷는 것 임에도, 다른 스포츠처럼 장비가 필요하지도 않고, 단지 두 다리만 있으면 되는데도 말이다. 이 책은 이처럼 우리가 일상적으로 할 수 있는 걷기에 대한 철학적 사색을 담고 있다. 프랑스 파리12대학 철학교수인 저자는 걷기를 철학적 행위이자 정신적 경험으로 보고 있다. 그는 걷는다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또 제대로 걸으려면 어떤 마음자세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자신의 경험과 우리가 알고 있는 철학자들이나 작가들의 걷기를 통해 인문학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현대사회가 너무나 바쁘고, 빠르게 돌아가서 인지는 몰라도 요즘 들어 사람들은 느린 삶을 이야기하고, 또 그런 삶을 살고자 한다. 나 역시 이제는 도시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바로 느린 삶을 살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느리게 가는데는 걷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몸과 공간과 시간만 있으면 되는 걷기를 통해서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고,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산책만 해도 멈춤의 자유를 얻는다고 말하는 그는, 걷는 동안 우리는 이런저런 걱정거리가 안겨주는 부담을 덜고, 잠시나마 일을 잊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조직을 탈출하고 사회제도에서 벗어나는 일시적인 단절의 자유이자,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버린 자의 자유라고 한다.

 

저자는 또한 걸으며 사색하고, 사색하며 얻은 영감과 통찰력으로 자신만의 사상과 작품세계를 열어간 철학자들과 작가들의 이야기로, 우리에게 걷기에 대한 사유를 해보게 만든다. 만성적인 두통의 통증에서 벗어나기 위한 치유책으로 걷기 시작한 니체는 걸으면서 사유하고 사유하면서 걸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많은 저작들이 쓰여졌고, 결국 니체에게 있어 글은 발에 대한 찬사였다는 것이다. 또한 걸으면서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두 팔과 오솔길의 리듬에 맞추어 시를 지었다는 프랑스 시인 랭보, 생각하고, 구성하고, 창조하고, 영감을 얻기 위해서 걸어야만 했다는 루소, 건강을 위해 의무적으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산책에 나섰던 칸트, 소요자의 체험은 걷기의 체험이라며 파리를 걸었던 벤야민 등, 이들의 삶에 걷기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자급자족 생활을 하며 삶에 대해 성찰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산책, 비폭력 평화주의자 간디의 걷기에 대해 이야기 한다. 소로에게 있어 걷기의 참뜻은 문명화된 세계의 가장자리에 서 있는 것이었다고 한다. 걷는다는 것은 일의 바깥쪽, 이익과 빈곤의 생산자들 바깥쪽, 즉 그것은 바깥쪽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한편 간디에게 있어서 걷기는 인내가 필요한 느린 에너지였으며, 저항 또는 평화를 상징하는 정치적인 걷기였다고 정의한다.

 

이렇게 걷는 다는 것은 다양한 행위를 내포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걷기에는 우리들이 매일 하고 있는 일상적인 걷기가 있는가 하면, 철학자들이나 작가들의 걷기와 같이 영감과 통찰력을 위한 걷기, 일정한 목적을 위한 상징적인 행위로서의 걷기, 그리고 온갖 위험부담을 안고 떠나는 순례자들의 걷기가 있다. 재생의 신화와 현존의 유토피아를 발견하기 위한 순례는 오직 걸어서만 갈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이처럼 저자는 걷기에 대한 다양한 양상과 그 특징들을 분석함으로써 걷는다는 행위가 복합적인 의미와 상징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우리는 걷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기쁨, 즐거움, 행복, 충만함 등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하는 저자는. 걷기가 우리의 몸과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갖가지 감각과 감정을 구분하여 설명해 주기도 한다. 그리고 걷기의 가치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혼자서 걸으라고 한다. 걷기 시작한 순간 나와 나는 동행을 하며, 육체와 영혼이 나누는 대화는 끝없이 계속된다고 한다. , 우리는 걸으면서 자기자신과 결산을 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바로잡고,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자신을 평가하면서, 결국 몸과 마음이 조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밖으로 나와 햇빛과 공기를 받아들이며 사유할 때, 얽매인 데 없이 자유로울 수 있다고 한다. 저자는 우리에게 집안에서, 사무실 안에서 갇힌 채로 살지 말고, 밖으로 나와 걸으라고 한다. 그리고 걸으면서 보고, 느끼고, 생각할 것을 권유한다. 책을 읽는 동안 나도 몇 번이나 밖으로 나왔다. 그렇지만 막상 걷고자 했음에도 어디를 걸어야 할지, 어떻게 걸어야 할지 당혹스러워 진다.

 

단지, 걷는다는 것은 한 발을 다른 발 앞에 놓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k*****1 2014.05.27. 신고 공감 7 댓글 6
리뷰 총점 종이책
현재라는 시간에 놓아두는 것, 걷기
"현재라는 시간에 놓아두는 것, 걷기" 내용보기
몇 년 전부터 불기 시작한 걷기 열풍에 편승하여 걷기 예찬론자가 된 것은 아니지만, 걷기로 인하여 삶에 생기가 넘치고 예전에 알지 못했던 걷기의 묘미를 깨닫게 되면서 나는 더욱 걷기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다. 그런 걷기의 즐거움을 배가시켜주는 책이 바로 이 책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프레데리크 그로는 ‘걷기’라는 행위에 대한 철학적
"현재라는 시간에 놓아두는 것, 걷기" 내용보기

몇 년 전부터 불기 시작한 걷기 열풍에 편승하여 걷기 예찬론자가 된 것은 아니지만, 걷기로 인하여 삶에 생기가 넘치고 예전에 알지 못했던 걷기의 묘미를 깨닫게 되면서 나는 더욱 걷기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다. 그런 걷기의 즐거움을 배가시켜주는 책이 바로 이 책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프레데리크 그로는 걷기라는 행위에 대한 철학적 사색을 고통의 순간에 오로지 걷고 또 걸은 니체에게서, 바람구두를 신은 천재 시인 랭보에게서, 몽상하는 고독한 산책자 루소에게서, 자본주의의 아케이드를 거닌 벤야민에게서 살펴본다. 뿐만아니라 1950년대 중반의 산업화되고 획일화된 사회에 반항적인 경향을 보였던 미국의 문학가 .예술가들이2차 세계대전 동안 대량 학살과 폭격 등이 무자비하게 자행되는 현실에 충격을 받고 인간이 과연 선한지 의구심을 품으면서 삶에 대해 진지한 의문들을 재구성하며 이들이 개인의 개성을 중시하고 인간 존엄성의 회북을 추구하는 한편, 자본주의와 몰인간성을 경멸하는 태도를 보이게 했던 것도 바로 이 걷기의 미학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창의성과 통찰력이 돋보였던 이들은 주로 재즈, 술에 빠져 살면서 자기도취적인 태도를 견지했으며, 미국 사회 속에 파고들어 대중을 열광시키는 동시에 분노를 사기도 하는 등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 시대를 풍미했던 예술가들을 비트 제너레이션이라 하는데  걷기라는 행위의 중심에는 이 비트 제너레이션이 찬양하였던 무한한 자유의 발견에 있다. 이들의 걷기는 자신을 재발견하고 오래된 소외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아를 , 잃어버린 정체성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걷다 보면 하나의 이름과 하나의 역사를 가지고 싶다는 유혹을 받게 되고 하나의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게 되면,  속박하는 사회적 의무를 벗어나 태곳적에서 시작된 생명의 자유를 느끼게 되는 순간들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니체가 걸음으로서 깨달았던 영원회귀라는 영감들은 걸음으로서 깨달았던 풍경들과의 노래였다. 천재 방랑시인 아르튀르 랭보에게 걷기는 분노의 표현이였고, 무가치한 결정의 표현이기도 하다. 랭보에게 길을 나선다는 것은 언제나 떠남을 의미했고,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파리로의 탈출, 런던에서의 배회, 벨기에 여행, 알프스 산맥 횡단, 사막 걷기, 무릎이 부풀어오르기 시작하여 병원에 실려가지 전에 머물렀던 하라르까지 걷고 또 걸었다. 그래서 랭보의 시에서는 늘 도망치는 느낌의 걷기가 있다.

 

. 길을 떠나자!

난 그저 걸어다니는 사람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반면 침묵 속에 걷는 철학자도 있다, 소로는 걷기의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서는 철저히 혼자여야 하고 고독해야 한다고 한다. 자연 속에 잠긴다는 영원한 간청으로, 나무들과 꽃들, 길의 색깔 등 모든 것들이 당신이 걷는 순간 말을 걸고, 인사를 하고, 관심을 가져달라고 요구한다. 바람의 숨소리, 곤충들이 윙윙거리는 소리,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 발을 땅에 내딛는 소리, 이 온갖 살랑거림이 당산의 현존에 화답하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한다.  심지어는 빗소리까지도, 가볍고 부드러운 빗소리는 당신과 함께 걸어가는 영원한 동무가 되는 순간을 느끼기 위해서는 철저히 혼자여야 하며,

 걷기 시작하였을 때는 절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한다. 걷다 보면 나무와 꽃 등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게서 호감을 얻기 때문이다. 결국 혼자가 아닌 걷기시작하자만 즉시 둘이 되는 걷기가 곧 소로의 걷기 철학이다.

 

혼자 걸을 때 육체와 영혼이 항상 대화를 나눈다는 것을 느껴야 한다.

 

걷기에도 저마다의 철학이 있다. 나의 걷기는 무엇일까? 걷기를 처음 시작했던 것은 도저히 내가 현재의 삶을 감당하기 힘들었을 때였던 것 같다. 조금이라도 걷기를 시작했을 때, 상처 받았던 영혼이 치유되는 느낌은 걷기를 시작해야만 공감할 수 있다.  미래로 가는 길목에서 늘 주저하며 갈팡질팡하던 나를 현재에 머물게 하고 , 과거로만 회귀하려던 나를 현재로 되돌려 놓게 했던 것도 걷기로 얻은 것이었다. 니체가 걷기로 끊임없이 영원회귀로의 꿈을 꾸었듯이, 소로가 절대고독속에 자신을 놓아두려한 것도, 랭보가 삶에서 도망치듯 걸었던 것은 현재가 언제나 걷기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라는 시간에 나를 놓여두는 것, 나에게 걷기는 그런 의미였다. 

   

그리고 나는 그 조용한 오솔길을 걸었네.

내 몸은 평온 속에서 마셨지.

잠의 고요함과도 같은 재생을

그러나 훨씬 더 푸근한. 내 위와 앞, ,

그리고 내 주변의 모든 것은 평화와 고독. 

 

YES마니아 : 플래티넘 k********2 2015.08.26. 신고 공감 5 댓글 6
리뷰 총점 종이책
서쪽으로 향한 사람들
"서쪽으로 향한 사람들" 내용보기
운동이라면 질색을 하는 사람들에게 굳이 한 가지 운동을 선택하라면 다수가 걷기를 택할 것 같다. 내가 그랬기 때문이다. 나도 한때는 걷기운동열풍에 휩싸여 매일 서너 시간씩 집근처를 배회한 적이 있다. 그러나 혼자인 적은 별로 없고 늘 누군가와 함께 걸었다. 걷는 일은 단순하기 때문에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나눌 누군가가 꼭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걷기는 혼
"서쪽으로 향한 사람들" 내용보기

 

운동이라면 질색을 하는 사람들에게 굳이 한 가지 운동을 선택하라면 다수가 걷기를 택할 것 같다. 내가 그랬기 때문이다. 나도 한때는 걷기운동열풍에 휩싸여 매일 서너 시간씩 집근처를 배회한 적이 있다. 그러나 혼자인 적은 별로 없고 늘 누군가와 함께 걸었다. 걷는 일은 단순하기 때문에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나눌 누군가가 꼭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걷기는 혼자라야 한다고 말한다. 다수가 걷다보면 걷기를 통해 만나야 할 고독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혼자 걸어야만 주변의 모든 소소한 것을 호감으로 만날 수 있게 되고 세계를 자신만의 개별성으로 차지하게 된다.

 

이 책은 작가 자신의 경험에 의한 걷기 예찬과, 걷기를 통해 스스로를 위무 받은 위대한 정신들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니체에게 걷기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치유책이 되었다고 한다. 현실이 그에게 주는 고통을 걸음으로써 잊었던 것이다. 그리고 걷는 도중에 떠오른 영감으로 저녁에 책상에 앉으면 그날 걸은 거리만큼의 글이 써졌다고 한다. 그의 대표작들은 거의 대부분 걷기에 열중했던 십 년 동안에 써졌다고 한다.

도서관이나 서재의 책상위에서 구상된 책들은 피상적이며, 인용문과 주석으로 인해 둔중해져서 독자들을 질리게 만든다. 반대로 걸으며 구상한 사람들의 글은 얽매인 데가 없어서 읽는 사람의 영혼까지 자유롭게 한다. 니체는 걷기를 할 수 있게 만든 발에 대한 찬사를 많은 글로 표현했다. 걸으며 현재의 고통을 잊고, 걸으며 창작했고, 걸으며 행복해했던 니체의 삶이 아름다워 보였다. 운명이 그를 조금 더 오래 걷게 해주었더라면 이토록 걷기를 좋아했던 사색가 사나이가 후손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역작들을 더 많이 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대로도 괜찮았다. 걷기가 있어 그를 행복하게 살게 했으므로.

 

천재시인이라 불렸던 랭보에게도 걷기는 만족하지 못한 현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 되어주었다. 어디에도 머물 곳을 찾지 못하고 헤매다가 37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던 시인이 숨을 거둘 때까지 도망치고 싶었던 현실이 안타까웠다. ‘천재라는 존재들은 다 이렇게 시대와 사람들과 불화하기 마련인가 보다 그 사이에 걷기가 있어 다행이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호수 근처의 땅에 오두막을 짓고 자급자족의 생활을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소로는 이렇게 윌든에서 이년간 머물면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경제를 제안한다. 그것은 이익을 생각하는 대신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를 먼저 생각해보게 하는 내용이다. 걷기는 이익을 주지는 못하지만 커다란 혜택을 준다.

 

소로는 걷기에 걸리는 시간만큼 글쓰기를 한다. 글을 쓴다는 일이 다른 책에 관한 주석이 되어서도 안 되고 설명이 되어서도 안 된다. 경험에서 태어난 책은 어떤 방식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욕구를 제공한다. 책은 다른 경험을 통해 내 삶의 단조로움을 벗어나게 하는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싶은 욕구를 준다. 걷기를 통해 내 존재의 확고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소로는 미래는 서쪽에 있다고 말한다. 서쪽이란 야생이며 새로운 것이다. 개발하지 않은 자연이며 최초의 힘이다. 그래서 순수한 서쪽으로 눈을 돌린 소로는 문명화되지 않은 순수한 인간이기를 원했다. 소로는 걷기가 자신을 찾아가는 행위 보다는 자신을 재창조할 가능성을 가졌다고 말했다.

 

시계바늘처럼 정확한 산책으로 유명한 카트는 모든 면에서 흐트러지는 것을 보지 못한 성격을 가졌다. 일생을 같은 장소에서 단조롭게 살았지만 매일 했던 산책 덕분에 그의 내면은 늘 여행가로 지내고 있었다.

 

젊었을 때의 루소에게 산책은 영감을 찾는 구실에 불과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산책에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자신이 풍경의 일부가 되어 걷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처한 현실에 감사할 수 있었다. 루소에 관해 읽을 때 산책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픈 내 마음이 잠깐 동안 주춤거렸으나 나는 아직 늙지 않았으므로 젊은 루소처럼 산책으로 영감을 찾아 헤매도 되지 않을까 싶다.

 

걷는 일은 참 쉽다. 어떤 장비도 필요 없다. 단지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면 될 뿐이다. 나는 하루 동안 얼마나 산책을 할까? 막연하게 걷기가 좋다는 것을 알았지만 구체적으로 정리해보지는 않았다. 이 책을 통해 걷기는 지금의 내게 꼭 필요한 것이라는 걸 깨닫는다. 생각이 점점 굳어지는 요즘, 단단해진 머릿속을 말랑말랑하게 만들 수 있도록 자주 산책을 가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나가서 직접 봐야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있을 것이고 알아야 그다음에는 이곳에서 사는 것을 좋아하며 자랑스러워 할 것이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t******e 2014.06.06. 신고 공감 4 댓글 6
리뷰 총점 종이책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내용보기
걷기가 무척이나 좋은 운동이란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다른 특별한 도구가 필요하지 않고 오로지 두 발로 자신이 원하는 장소를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나 역시도 다른 운동에 비해 걷기 운동이 가장 맞는다. 체력이 그리 좋지 않고 힘든 운동은 처음부터 꺼려하는 면이 있어 될 수 있으면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기에 걷기만한 운동이 없다고 생각한다.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내용보기

걷기가 무척이나 좋은 운동이란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다른 특별한 도구가 필요하지 않고 오로지 두 발로 자신이 원하는 장소를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나 역시도 다른 운동에 비해 걷기 운동이 가장 맞는다. 체력이 그리 좋지 않고 힘든 운동은 처음부터 꺼려하는 면이 있어 될 수 있으면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기에 걷기만한 운동이 없다고 생각한다.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은 걷기가 가진 미학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천천히 느리게 걸으며 삶에 대한 깊은 생각을 가져 볼 수 있는 이야기는 걷기가 운동이 아니라 걸으며 만나는 주위 풍경에 매료되고 걷는 과정에서 오는 행복한 기분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책에는 니체, 아르튀르 랭보, 장 자크 루소, 이마누엘 칸트 등등 너무나 유명한 인물들의 걷기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게 전개된다.

 

제주도 올레길, 북한산 둘레길이나 지리산 둘레길, 부산의 갈매길 등 우리나라에도 걷기에 좋은 길을 많이 만들고 찾아다니며 걷는 사람들이 많다. 나 역시도 제주도 올레길은 3번이나 가서 총 11코스를 돌았을 정도로 걷기에 빠져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우리나라의 좋은 걷기 길도 있지만 책에서도 소개 된 순례자들이 찾는 '산티아고 순례길'은 평생에 꼭 한 번 걸어보고 싶은 길이다. 종교적인 목적으로 성지를 순례하는 순례자들도 있지만 순례자보다 일반인들이 더 많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만큼 산티아고 순례길은 그 길을 걸으며 힘들고 어려운 시간들을 보내며 나를 돌아보고 내 안에 쌓여 있던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는 시간이 되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지만 그리스인들의 걷기에 대한 이야기는 처음이다. 그리스인들은 걸음걸이와 생긴 모습을 보고 서로를 알아보았으며 짖는 짓한 말하기 역시 사람을 구별하는 요인으로 작용되었다니 흥미롭다. 걷기를 할 때 친한 사람과 함께 일 때도 있지만 혼자 걷기를 하는 경우도 많다. 다른 사람과 함께 일 때는 많은 이야기... 잡담을 하면서도 걷기를 하게 되지만 혼자일 때는 온전히 침묵 속에서 걷는다. 침묵이 주는 커다란 힘이... 중요성을 새삼 느낀다.

 

인생의 세 번의 위대한 걷기를 체험한 장 자크 루소는 걷기를 통해서 생각하고 구성하고 창조하고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16~19살 청춘기의 걷기는 연상의 유부녀에게 한 눈에 사랑을 느끼고 개종을 위해 길을 떠난다. 욕망이 담겨진 걷기였지만 루소의 걷기는 그를 행복하게 하는 초년의 걷기였다. 마흔 살의 루소는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위해 숲 속 길을 걷는다. 숲길을 하루 종일 걸으며 행복에 빠져들며 문화, 교육, 예술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하게 된다. 내 안에 있는 원초적 인간을 발견하는데 많은 시간을 쏟는다. 나이 들어 여러 나라에 배척당하고 쫓겨난 루소의 말년의 걷기는 경지에 오른 초연함의 부드러움을 갖춘 걷기라고 한다. 세상에 대한 기대와 욕망이 없어지고 자신을 내려놓는 시간이 되자 그에게는 편안한 시간이 찾아온다.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며 산책길에서 보는 나무와 돌들과 함께 호흡하며 편안함을 느낀다.

 

나는 편안하게 걷다가 마음 내킬 때 멈춰 서는 것을 좋아한다. 내게 필요한 것은 떠돌이 생활이다. 날씨가 좋을 때 서두르지 않고 아름다운 고장을 걷는 것, 그리고 다 걷고 나서 유쾌한 대상을 만나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내 취향에 가장 잘 맞는 삶을 사는 모든 방식이다.                 p121-

 

유독 우리나라 사람들은 빨리빨리가 몸에 배어 있다. 우리네 사회가 빨리빨리에 익숙해진 구조를 가진 요인도 있지만 우리 스스로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이 더 멀리 날고 싶어 하는 마음도 작용했을 거라 생각한다. 느림의 미학이란 걷기... 걷기의 의미와 즐거움을 새삼 느끼고 알게 된 이야기로 조금은 어려운 철학자, 위인들의 걷기는 나와는 거리감이 있지만 걷기가 주는 즐거움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철학적 사유의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는 걷기... 이제부터 걷기를 할 때는 주위 풍경을 즐기며 그것이 주는 즐거움, 내 안의 문제와 삶에 대한 생각을 들여다보며 걸을 생각이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q******5 2014.06.02. 신고 공감 4 댓글 2
리뷰 총점 종이책
걷기 예찬론자들의 삶을 통해 나를 돌아본다.
"걷기 예찬론자들의 삶을 통해 나를 돌아본다." 내용보기
강보에 싸여 엄마가 주는 대로 받아먹고 자라던 아이가 성장하며 기어 다니다 앉고 사물에 의지하여 두 발로 서서 걷기까지 그저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엎어지고 자빠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자기 나름대로의 방법을 터득하여 균형을 유지하여 걷는 활동으로 이어진다. 문명의 이기와는 거리를 두고 동네 친구들과 무리지어 두 팔을 흔들며 잰 걸음으로 움직이던 시절에는 하루해가
"걷기 예찬론자들의 삶을 통해 나를 돌아본다." 내용보기

   강보에 싸여 엄마가 주는 대로 받아먹고 자라던 아이가 성장하며 기어 다니다 앉고 사물에 의지하여 두 발로 서서 걷기까지 그저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엎어지고 자빠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자기 나름대로의 방법을 터득하여 균형을 유지하여 걷는 활동으로 이어진다. 문명의 이기와는 거리를 두고 동네 친구들과 무리지어 두 팔을 흔들며 잰 걸음으로 움직이던 시절에는 하루해가 짧을 정도로 동네 구석구석을 누비며 다녔다. 봄이면 지천에 흐드러진 삘기를 뽑아 먹고 오디가 익어가는 계절에는 뽕밭으로 숨어들어가 오디를 따 먹다 주인에게 들켜 줄행랑을 놓기 일쑤였던 시절 자연은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온몸으로 들판을 내달리며 풀벌레를 잡던 추억 속 풍경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아련한 향수로 사위어가던 감각을 깨운다.

 

   너 나 할 것 없이 궁색하고 옹색하였던 살림에 버스비를 아끼기 위해 십 리를 걸어 학교를 오가며 친구들과 교감을 나누었던 일들은 지금도 가슴 속 온기를 더한다. 동네를 거쳐 학교로 가는 동안 친구 집 앞에서 친구를 기다리며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아카시아 나무 이파리를 손톱으로 튕겨 날리며 권태로움을 메워갔다. 하나 둘 모여든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규칙적인 걸음을 내딛는 시간은 생각을 부추기고 연상하게 만들어 오감을 자극한다. 규칙적으로 몸을 흔들 때 살아나는 리듬이 운문시를 쓰는데 도움 되었다는 워즈워스는 발걸음을 옮길 때 단순한 단어들이 자연스레 입가에 떠올라 창작의 기틀을 이뤄 나갔다. 수도사가 기도문을 암송하며 오롯이 집중하여 걸을 때 피로가 느껴지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일화는 걷기의 잠재적 가능성을 발견하게 한다.

 

   뿌연 먼지를 내뿜으며 산모롱이를 돌아가는 완행버스 뒤를 내달리며 끝없이 이어진 길이 어디에서 끝이 나는 지 확인하여 보고 싶은 마음이 강했던 청소년기부터 구불구불한 길은 상상의 세계 속으로 이끌었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아무런 준비 없이 길을 나설 때는 이른 시간 내에 집으로 돌아올 것임을 알리는 반면, 비상식량을 챙겨 배낭을 꾸리고 여벌옷을 준비할 때는 제법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는 무언의 행동은 상대에게 마음을 비우고 빈자리를 채우라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단조로운 일상에 변화를 시도하고 딱딱한 분위기를 일소하려는 걷기로 보편적인 산책은 맡고 있는 일에서 벗어나 피폐해진 영혼에 휴식을 제공하는 일이다. 한가롭게 거리를 거닐었던 벤야민은 도시의 소요자로 군중 속으로 들어가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들여다보고 기존의 군중과 상품, 도시의 가치를 뒤집는 가운데 속력을 낼수록 절대적인 고독에 빠져드는 시간을 돌려주려고 했다. 그리하여 도시의 소요자는 여기저기서 가해지는 자본의 횡포와 탐욕이 낳은 소비주의의 충격에 맞서 소비하지 않고 소비되지 않는 삶을 실현해 간다.

 

   휘황한 빛으로 퍼져가는 햇살 아래 균형을 잃지 않는 가운데 생체 리듬을 갖추어 생기 있게 움직이며 사는 일이 축복처럼 여겨진다. 하루가 다르게 소진해 가는 원기를 북돋우며 활기 넘치는 생활을 이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는 마음이 들 때면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집을 나서 동네 한 바퀴를 돈다. 깨어나지 않은 벼이삭 끝에 맺힌 이슬은 바람이 흔들릴 때마다 곡예를 하다 이내 떨어지고 만다. 쇠잔해가는 육신을 움직여 지면의 단단함을 확인하며 땅에 발을 내딛는 일련의 시간들은 사회적 외형을 용해해버림으로써 비움을 즐거움으로 치환하는 과정에 자연이 주는 선물을 받아들이는 시간이다.

 

   미혹함에 휘둘려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 채 흥분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면 편한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선다. 노기(怒氣)를 알아차린 뒤 그 기운을 삭이며 이성적으로 행동하려는 시도로 걷는다. 걷기는 자신을 바로잡고, 스스로에게 말을 걸어 생각을 열어주어 새로운 마음을 다잡기에 그만이다. 맹목적인 생산 제일주의에 반기를 들고 대영제국의 소금 세에 맞서기 위해 느리게 걷는 소금 행진으로 인도인들을 규합해간 간디는 인간 본연의 청빈함을 구현하여 갔다. 규칙성의 대명사로 불리는 칸트는 건강한 생활을 염두에 두어 매일 혼자 같은 길을 산책하며 권태를 소멸하였고, 걷기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떠난 장소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점을 들어 운명을 만들어 갔다. 걷는 행위 너머에는 충만함으로 가득해진 존재의 즐거움이 곳곳에 깃든다. 길을 가다 돌 틈에 피어난 이름 모를 야생화를 보면서 질긴 생명력을 떠올리고, 인기척에 놀라 귀를 쫑긋 세우고 갈 길을 잊고 오도카니 앉아 있는 다람쥐의 앙증맞은 모습은 소소한 행복을 준다. 가시적인 성과에 얽매어 실적을 낳는 일에 골몰하느라 여유를 찾지 못한 이들에게 자연 속으로 내딛는 걸음은 세상과 자연, 그리고 인간 본연의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는 사색의 공간으로 작용한다.

s*****d 2014.07.09. 신고 공감 3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걷는다, 철학한다
"걷는다, 철학한다" 내용보기
‘걷기’와 ‘철학’. 조금은 연결짓는 게 낯선 이 조합이 로제 폴 드루아는 아주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으로 전제하고, 전개하고, 또 결론짓는다.  드루아는 ‘걷기’란, 특히 인간이라는 종(種)의 단독파생형질인 ‘두발로 걷기’란 매우 불안정한 것이어서 일단은 추락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본다. 그러나 인간은 그 추락을 저지하고, 혹은 추락을 저지하기 위해서 재빨리 다음 발을
"걷는다, 철학한다" 내용보기

걷기철학’. 조금은 연결짓는 게 낯선 이 조합이 로제 폴 드루아는 아주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으로 전제하고, 전개하고, 또 결론짓는다.

 

드루아는 걷기, 특히 인간이라는 종()의 단독파생형질인 두발로 걷기란 매우 불안정한 것이어서 일단은 추락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본다. 그러나 인간은 그 추락을 저지하고, 혹은 추락을 저지하기 위해서 재빨리 다음 발을 앞으로 내밀고, 다시 추락의 위기에서 다시 한 발을 내밀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인간이 안정적인 자세에 만족했다면 이 불안정한 두 발로 걷기라는 놀라운 발명품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물론 과학적 설명은 좀 다를 수 있다).

철학도 다를 바 없다는 게 드루아의 주장이다. 철학 역시 영혼의 평온을 거부하고, 문제를 끄집어 내는 데서 시작된다. 질문을 하며,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진다. 그렇게 비틀거리다가 자세를 바로잡지만, 다시 질문을 던지며 비틀거린다. 그렇게 정신은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걷기와 철학은 서로 은유한다.

 

걷기와 관련된, 많은 철학자들을 소개한다.

어떤 철학자는 정말 걷기와 철학하기를 거의 동일선상에 놓았던 철학자도 있다.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서나 칸트, 티야나의 아폴로니우스, 루소, 니체 같은 이들이다. 그들의 철학을 걷기로 이해할 수 있는 철학자도 있다. 이를테면 붓다도 그렇고, 데카르트도 그렇고, 헤겔도 그렇다. 마르크스도 빼놓을 수 없다.

직접적 관련성을 갖거나, 은유적으로 관련성을 갖거나 할 것 없이 드루아의 관점에서는 철학하는 것은 걷는 것이다. 앞으로 걷는 것. 여기서 앞으로가 중요하다는 것은 소로에 대한 글에서 나타난다. 드루아는 소로의 걷기가 퇴행이라고 규정한다. 문화 밖으로, 문화에 맞선 걷는 것, 야생으로 들어가기 위해 걷는 것, 그리고 그것을 과대평가하는 것은 지독하고 위험한 악취를 풍긴다고 쓴다. 드루아는 이른바 진보를 믿는다. 믿는다기 보다는 걷는다는 것의 본질은 빠르거나 느리거나 비틀거리거나 바른 자세이거나 모두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철학도, 뒤를 돌아볼지언정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칸트에 관한 중요한 에피소드가 문득 끼어든다.

그런데 어느 날, 기계가 고장 났다. 칸트가 여정을 바꾼 것이다. 그가 정신을 딴 데 판 것도 아니고, 아픈 것도 아니었다. ... 이날, 그는 급히 신문을 사러 가야 했던 것이다.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났고,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대한 보편적 선언이 선포되었으며, 민중이 공화 체제를 쟁취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151)

- 칸트의 걷기를 멈춘 그것. 그것은 또 다른 걷기였던 것이다. 역사의 걸음.

 

나는 걷는 걸 좋아한다. 음악을 듣지 않으면서 걷는다. 매일매일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풍경을 보는 것을 좋아하며, 걸으며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연구 주제를 생각하며, 논문을 어떻게 써야 할 지를 구상한다. 내일은 누구를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해야 할 지 가늠해보기도 한다. 이런 걸 철학이라고 할 수 없을 지 모르지만, 그래도 걷는다는 것은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생각하는 것을 조금만 넓히면 철학이다.

걷는다는 것은 철학하는 것이다. 이제 그다지 낯설지 않다.


 

YES마니아 : 골드 이달의 사락 n*****m 2017.11.28. 신고 공감 2 댓글 2
리뷰 총점 종이책
걸으면 자유로울까
"걸으면 자유로울까" 내용보기
책을 읽기 전부터 이 책을 보면 내가 걷기를 좋아한다고 쓰겠지 했다. 나는 오랫동안 걸었다. 햇수는 길지만 걸은 시간까지 긴 건 아니다. 학교 다닐 때는 날마다 한시간 이상 걸었지만, 그 뒤에는 며칠에 한번 걸었다. 이건 지금도 그렇다. 예전에는 가끔 버스를 타기도 했는데, 버스 타 본 지 오래되었다. 다른 탈 것도. 버스 요금 얼마나 하는지 모른다. 천원 넘을 것 같다.
"걸으면 자유로울까" 내용보기

      



책을 읽기 전부터 이 책을 보면 내가 걷기를 좋아한다고 쓰겠지 했다. 나는 오랫동안 걸었다. 햇수는 길지만 걸은 시간까지 긴 건 아니다. 학교 다닐 때는 날마다 한시간 이상 걸었지만, 그 뒤에는 며칠에 한번 걸었다. 이건 지금도 그렇다. 예전에는 가끔 버스를 타기도 했는데, 버스 타 본 지 오래되었다. 다른 탈 것도. 버스 요금 얼마나 하는지 모른다. 천원 넘을 것 같다. 내가 다니는 곳이 다 걸어다닐 만한 거리기 때문에 차를 타지 않는다. 몇해 전에는 다른 운동을 안 하니 걷기라도 해야겠다 생각하고 날마다 잠시라도 걸으려고 했는데 그렇게 오래 하지 않았다. 날마다 걷기도 버릇 들이면 할 수 있을 텐데. 어디선가(라디오 방송일지도) 하루에 20분만 걸어도 여러가지에 좋다는 말을 들었다. 여러가지라고 했는데 건강이다. 걷기는 몸뿐 아니라 마음에도 좋다. 기분 안 좋을 때 잠시 걸으면 기분이 나아진다. 이렇게 말하니 내가 기분 안 좋을 때 걷는 것 같구나. 그건 아니다. 기분이 안 좋았는데 걸었더니 나아진 걸 느꼈을 뿐이다. 일부러 걸으려고 해야 할 텐데. 책을 봐도 기분이 괜찮기 때문에 좀더 편한 쪽을 한다.

잠자기 전에 이런저런 생각 때문에 우울해지기도 하는데, 자고 일어나면 그것을 조금 잊는다. 다 잊은 건 아닌지 그날 걸으면 잠자기 전에 왜 그렇게 바보 같이 생각했을까 한다. 지금 기분보다 더 전에 안 좋았던 게 걸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된다. 신기한 일이다. 이런 말 창피한테 요새 일어날 때 늘 우울하다. 일어나는 게 즐거우면 좋을 텐데. 좋은 날 보내자고 생각하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한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잘 모르겠다. 이럴 때 걸어야 할지도. 걸으면 아무 생각도 안 하고 모든 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나도 걸으면서 아무 생각 안 할 때도 있다. 그저 걷기만 한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질 때도 있다. 거의 쓸데없는 거다. 아니 아주 쓸데없지 않은가. 밖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는 집에 가서 무엇무엇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걸을 때는 해야겠다, 하고 싶다 하는데 집에 오면 별로 못한다. 사람은 본래 이런 것인가. 무엇인가 하려는 뜻이 얼마 지나지 않아 꺾이다니. 아니 꺾이는 것은 아니고 숨이 죽는다고 해야겠다. 생각보다 많이 못해도 걸어서 기분은 좀 괜찮으니 다행인가.

여기에서 말하는 걷기는 가벼운 산책이 아니다. 걷기 여행에 가깝다. 니체, 랭보, 루소, 소로는 꽤 오래 걸었다. 니체는 머리가 아파서 오래 걷고 밤에 글을 썼다. 랭보는 집을 떠나 멀리까지 걷고 시를 썼다. 루소, 소로도 걷고 글을 썼다. 걸으면 쓸 게 떠오를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경험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나는 오래 걷지 않아서 별로 떠오르지 않는가 보다. 사람이 말을 타고 다닌 건 언제부터일까. 옛날에 말 타고 다닌 사람도 있었지만 걸어다닌 사람이 더 많았다. 우리나라 사람도. 유럽 사람은 산책 시간이 따로 있기도 했다(다른 나라 사람도 걸었을지도). 차 마시는 시간도 있었구나(이건 지금도 있겠다). 왜 이런 말을 했느냐 하면, 옛날 사람은 여유롭게 살았구나 싶어서다. 책을 읽다보니 이런 생각도 들었다. 누구나 한가하게 사는 것을 좋아하고 그렇게 하고 싶어할까다. 요즘은 느리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 말에 스트레스 받는 사람 없을까. 자신이 해 보고 좋으니 다른 사람한테도 해 보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누구한테나 느린 게 맞는 건 아닐 거다. 이건 내가 다른 사람이 하는 말에 흔들려서 그런 건지도. ‘그렇게 해야 할까’ 하면서. 그나마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책을 볼 때뿐이다. 걷기는 나한테 잘 맞는다.

어떤 책을 보면 좀 자유로울까 했는데, 이 책을 보니 책을 보기보다 걸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잠깐이 아니고 오래 걸어야 할 듯하다. 죽 걷는 건 아니다. 멈추고 싶을 때 멈추어도 괜찮다. 이것을 알아도 오래 걷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앞으로 걸을 기회가 있으면 좀더 걸어야겠다. 집착을 버리고 싶어서기보다 무언가 쓸 게 떠오르까 해서다. 영국 낭만주의 시인 워즈워스는 걸으면서 시를 썼다고 한다. 생각이 막힐 때도 걸으라고 하지 않는가. 이것을 쓰기 전에 걸었다면 더 나았을까. 걷는 데는 다른 기술은 필요 없다. 이 말을 이제야 했다. 달리기는 숨차고 힘들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천천히 걸으면서 여기저기 둘러보는 거 재미있다. 사람과 자연. 내가 잘 보는 건 자연이다. 자주 다니는 길에 꽃과 나무가 많은 건 아니지만 가끔 보면 기분 좋다. 햇빛과 바람을 만나는 것도. 칸트는 다른 사람과 조금 다르게 늘 같은 시간에 같은 길을 걸었다. 칸트를 보고 시간을 알기도 했다고. 그렇게 살기 답답하고 힘들 것 같은데. 칸트는 한쪽 눈이 안 보였다고 한다. 눈 때문에 그렇게 살았던 건지도. 17세기에 여성이 공원을 걸은 건 남자를 쉽게 볼 수 있어서였다. 이 말 재미있어서 썼다.

나는 걷기 좋아한다. 니체처럼 오랫동안 걷지 않고 랭보처럼 멀리까지 걷지 않지만. 간디는 인도를 위해 걸었다. 어떤 사람들은 가진 게 없어서 자유롭다고 했다. 이 말 맞다. 사람은 가진 것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누군가와 이어지고 싶은 건 사람이 가진 욕망이기도 해서, 그것을 아주 끊는 건 어렵다. 걸을 때는 잠시 모든 것에서 멀어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에서도. 멀리까지 못 가도 걸어야겠다. 걷지 않는 것보다 걷는 게 낫겠지.



희선




☆―

길을 걷는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걷다 보면 꽃 같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서 호감을 얻기 때문이다.
.
.
.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걷기 시작하자마자 바로 둘이 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걷고 난 뒤에는 더욱 그렇다. 내 말은 심지어 혼자 걸을 때에도 몸과 영혼이 언제나 마주이야기 나눈다는 거다. 나는 일정한 속도로 걸으면서 내 몸을 격려하고 그의 비위를 맞추고 칭찬한다. 나를 끌고 가는 이 튼튼한 다리……. 말 목처럼 내 허벅지를 툭툭 치는 것같이 느낀다. 오랫동안 낑낑대느라 몸이 힘들어하면 나는 내 몸을 격려한다. 자, 좀 더 애써봐. 넌 잘해낼 수 있어. 걷기 시작하자마자 나는 둘이 된다.  (89쪽)


이달의 사락 n***8 2015.05.02. 신고 공감 2 댓글 4
리뷰 총점 종이책
걷기, 그 바깥쪽에 서는 것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걷기, 그 바깥쪽에 서는 것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내용보기
걸을 때마다 지구를 밀어본다. 그래서 크게도, 작게도 발자국을 떼어 본다. 내가 지구를 얼마나 밀 수 있는지 생각하면서. 내가 얼마의 지구를 밀면서 앞으로 나가는지, 얼마의 지구를 또 밟아버리는지 생각하면서.   나처럼 걸으면서 온갖 잡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나에게는 마구 떠오른 잡생각이 누군가의 걷기에서는 철학으로 변모하는 모습에 놀랐다. 니
"걷기, 그 바깥쪽에 서는 것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내용보기

걸을 때마다 지구를 밀어본다. 그래서 크게도, 작게도 발자국을 떼어 본다. 내가 지구를 얼마나 밀 수 있는지 생각하면서. 내가 얼마의 지구를 밀면서 앞으로 나가는지, 얼마의 지구를 또 밟아버리는지 생각하면서.

 

나처럼 걸으면서 온갖 잡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나에게는 마구 떠오른 잡생각이 누군가의 걷기에서는 철학으로 변모하는 모습에 놀랐다. 니체, 랭보, 루소, 소로, 칸트, 간디 등,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중에 내가 아는 철학자들이다. 난 철학에 무지한 편이다. 그들이 걷기에서 철학을 말한다. 그들의 걷기가 그들의 양식이 되고 일생이 된다. 그들의 전부가 된다. 후세의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게 되는 모태가 된다. 오로지 걷기를 통해서.

 

많은 존경받는 철학자들이 걷기를 통해 자신의 사고를 정리하고, 새로운 사상을 떠올리며, 자신을 정립한다고 이 책은 말한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 등장하는 철학자들은 상당히 괴짜이고 평탄한 삶을 살지는 못했다. 자기에게로의 강한 침착으로 인해, 겉으로 드러나는 그들의 삶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걸음으로써 리듬을 가지고, 생각의 운율을 맞추며, 그 생각에 몰입하게 되어 결국에는 걷지 않으면 행복해 지지 않는, 타인의 시선이 아닌 자신의 시선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는 그들의 영혼이 슬펐다. 그리고 나도 걸음으로써 느껴지는 그런 감정들에 순간 흠찟 놀랐다.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오롯한 혼자로 자신의 생각에 빨려 들어간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니까.

 

이 책은 지은이가 걷기에 대한 짤막한 단상들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위대한 철학자의 걷기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그들의 책과 생애를 통해 되집어 보기도 한다. 랭보도, 니체도, 루소도, 프루스트도 좋았지만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걷기가 참 좋았다. 작은 걷기, 좁은 걷기를 말하는 그의 말은 내가 매일 할 수 있는, 누구나 생각만 하면 할 수 있는 걷기를 말한다. 왠지 거창하게 유럽배낭여행을 가야할 것만 같은 걷기를 내 동네어귀를 천천히 돌아도는 그런 걷기로 격상시킨다.

 

'걷기위해 아주 멀리까지 갈 필요는 없다'라는 말은 아무리 자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걷기의 참뜻은 이타성(다른 세계들, 다른 얼굴들, 다른 문화들, 다른 문명들)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문명화된 세계의 가장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걷는다는 것, 그것은 바깥쪽에 있는 것이다. -141p-

 

또 하나, 나는 걸으면서 떠오르는, 생각의 폭발을 모두 기억하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그래서 거의 걷는동안만 생각을 하고, 걷기의 멈춤과 동시에 그 생각들은 흔적없이 증발해 버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이 생각을 어떻게 붙잡아 둘까를 궁리했었는데 소로는 '걷기에 걸리는 시간과 똑같은 시간을 글쓰기에 할애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고 한다. 한방 먹었다. 그 정도의 노력도 없었구나 해서.

 

이 책을 읽기 전까지 걷기에 대한 이런 목적성, 혹은 무목적성에 대해 이렇게 많고도 다양한 철학의 이유와 증거가 있을 줄 몰랐다. 이러한 철학과 걷기를 연관시켜서 방대한 지식을 들이미는 작가의 역량이 놀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걷기란 나에게 지구를 밀고 결국에는 앞으로 나아가는 활동이라고 말하겠다. 그 규칙적이고도 단단한 리듬에 지구가 반응해 주는 걷기는, 그래서 생각하면 늘 입가를 올라가게 한다.

 

마지막으로 소로의 말 외에 생각해 볼 만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86p) 걷기 위해서는 혼자여야 한다. 다섯 명이 넘으면 고독을 함께 나누기란 불가능하다. ...... 결국 타인을 자주 만나다 보면 우리는 다시 고독해진다. 대화는 우리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의 차이에 대해 말하도록 한다. 그리고 타인은 우리를 우리의 역사와 정체성 속에 존재하는 우리 자신에게 아주 서서히 되돌려 보내는데, 이것은 곧 몰이해와 거짓을 의미한다. 마치 그런 것들이 존재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202p) 즐거움은 기쁨과 달라서 덜 수동적이고 더 까다로우며, 덜 강렬하고 더 완전하며, 덜 국지적이고 더 풍요롭다. ...... 즐거움이란 어떤 긍정의 부수적 결과이다.

 

(293p) 사람들 말대로 단조로움은 권태로움에 맞서도록 해야 한다. 권태로움은 계획의 부재, 전망의 부재이다. 할 일이 없어 자기 주변을 뱅뱅 도는 것이다. ......권태, 그것은 부동성에 대한 공허한 저항이다. ......권태, 그것은 매 순간 되툴이 되는 불만족이며, 시작하는 것에 대한 싫증이다. 무슨 일이건 시작하자마자 바로 지겨워진다. 시작하는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s*****5 2014.06.06. 신고 공감 2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걸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걸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내용보기
바늘 하나도 들어가기 힘들 것 같은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오는 풀을 볼 때 '생명의 경이'를 느끼지 않는 이가 있을까. 금방이라도 휩쓸릴 것 같은 강가의 비탈에 뿌리를 내린 나무를 볼 때 심장이 뛰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삶이 무언가를 이뤄야 하는 수단성을 띤 것이라면 우리에게는 여전히 자동차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에게 하루 하루가 느끼고 감동해야 할 목적 그 자체라면 이
"걸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내용보기

바늘 하나도 들어가기 힘들 것 같은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오는 풀을 볼 때 '생명의 경이'를 느끼지 않는 이가 있을까. 금방이라도 휩쓸릴 것 같은 강가의 비탈에 뿌리를 내린 나무를 볼 때 심장이 뛰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삶이 무언가를 이뤄야 하는 수단성을 띤 것이라면 우리에게는 여전히 자동차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에게 하루 하루가 느끼고 감동해야 할 목적 그 자체라면 이제 우리는 걸을 필요가 있다. 그것들은 자동차를 타거나 KTX를 탈 때는 볼 수 없는, 걸을 때서야 비소로 보이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에서 나를 해방시켜주는 모든 것은 나로 하여금 속도에서 멀어지게 만든다'는 저자의 말은 왜 걷기가 철학과 같은 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걷기는 우리가 속박되어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떼어 놓는다. 속도, 경쟁, 편의, 그 어느 것도 걷기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내가 가장 객관적이 될 수 있는 상태는 바로 내가 나에게서 빠져 나와 있을 때이다. 걷기는 이를 가능하게 해주고 이는 바로 철학적 사유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어떤 것이 되겠다는 사회적 의무가 아닌,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기 위한 자유의 출발점인 것이다. 


니체는 사회적 압력과 성취의 부담으로 인한 두통과 통증을 견딜 수 없어 1879년부터 휴식의 시간을 갖는다. 이 시기는 니체의 삶을 구성하는 위대한 시기로 그는 걷고 또 걸으며, 도서관의 곰팡이 나는 책들이 알려주는 고루한 지식이 얼마나 덧없는지 알게 된다. 걸으면서 하는 사유의 자유로움에 취해 있던 니체는 1880년대 중반 몸이 쇠약해져 걸을 수 없게 되었을 때까지 그의 사상의 깊이를 완성한다. 루소는 열여섯살에서 열아홉까지 흥분과 열기로 가득한 걷가의 삶을 보냈지만, 그 뒤 20년 동안은 마차만 타면서 '신사'로서의 삶을 살아야만 했다. 신사로서의 삶이란 명예와 인정을 얻어야만 하는 속박과도 같은 삶이었다. 그리고 마흔이 되어서 그는 다시 사교계를 떠나서 산책에 나선다. 그 시기에 그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쓴다. 


위의 단편적인 사례에서 눈치챘겠지만 이 책에서 '걷기'는 곧 철학 그 자체이다. 속도를 벗어나 혼자만의 시간에서 사색한다는 것은 위인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시간이었다. 니체, 랭보, 루소에서 소로까지, 또 칸트, 벤야민, 프루스트, 간디까지 그들에게 걷는다는 것은 일종의 의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신기하게 저자는 그들이 예찬한 걷기에 대한 글귀들을 모아서 철학과 절묘하게 조화시켰다. 


여론과 편견, 전통, 환상, 외관 등 파리에서 런던, 뉴욕에서 보스턴과 콩코드까지 우리 지구를 뒤덮고 있는 이 충적토를 통과하고, 교회와 국가, 시, 철학, 종교에서 벗어나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견고한 기반에, 움직이지 않는 바위산에 도달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 바로 이거야! (p.144)


내가 어렸던 시절 우리는 걸을 일이 많았다. 많이 걸었고, 많이 느꼈으며, 삶의 여백은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은 걸을 기회가 없을 뿐더러, 잠시의 공백에도 이어폰이 끼어들고, 기다리는 시간에는 스마트폰이 쥐어진다. 이제 우리에게 우리를 돌아볼 시간이란 없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이러한 책이 주는 메시지는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잃어버린 전체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YES마니아 : 로얄 c****o 2014.06.06. 신고 공감 2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