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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평론가 고미숙의 근대화 3부작 마지막인 『위생의 시대』는 부제로는 《병리학과 근대적 신체의 탄생》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병과 위생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 근대화과정을 거치면서 어떻게 변하고 고착화 되었으며 그로 인해 지금 우리네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분석한 책이다. 우리의 전통의학은 민간요법과 한의학에 근거를 하고 있다. 이 둘을 집대성한 책이 바로 허준의 《동의보감》이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몸은 내경과 외경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경은 몸 안의 풍경, 외경은 몸 바깥의 형태이다. 내경에서는 우리 몸은 정. 기. 신. 혈. 몽. 성음. 언어. 진액. 담음. 오장육부. 포(자궁).충 .소변 .대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오장육부와 정. 기. 신은 이해한다고 해도 소변, 대변은 의외이다. 하기야 똥, 오줌도 우리 몸밖에 배출되기 전에는 우리 몸의 일부였다. 그것이 바깥으로 나오는 순간 우린 그것을 더럽다고 외면한다. 충은 세균을 비롯한 각종 기생충과 벌레들을 의미한다. 인정하기 싫지만 우리 몸의 많은 부분은 그들이 장악하고 있다. 우리 몸에 머무는 세균의 숫자는 우리 몸의 세포수와 비슷하며 우리 몸무게의 약 10%에 해당된다고 한다. 물론 이중에는 몸에 이로운 세균도 있지만, 해로운 세균도 있다. 이렇듯 균은 우리의 삶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이렇듯 우리 몸은 온갖 이질적인 존재의 집합체이다. 즉 똥, 오줌은 물론 균(충)도 우리 몸과 동반자적인 관계이고, 우리의 전통의학은 그 존재의 당위성을 인정하는데서 출발한다. 근대화 과정에서 도입된 서양의 병리학은 이 세균을 우리의 삶과 동반하는 관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퇴치의 대상으로 본다. 니체가 《반 그리스도》에서 언급한 것처럼 병원은 병을, 기독교는 정신의 질병을 필요로 한다. 근대화 과정에서 도입된 병리학은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기독교는 병리학적 이데올로기를 차용하여 이 둘을 퇴치의 대상으로 접근한 것이다. 해방이후 병원과 의사에 대한 맹목적인 존경과 기독교의 엄청난 전래는 이런 의식을 근간으로 했다. 이 둘의 접근은 병을 치료하는 의사의 권위를 성직자의 지위로 격상시켰으며 병과 죄악을 동일시하게 되었다. 병은 병원에, 죄악은 교회에 맡기고 병리학은 도덕적 규율까지를 포괄하게 되었다. 여유로움과 느긋함을 죄악시 하고, 성적인 타락을 방지하고자 정절 및 순절에 대한 과도한 도덕적 관념을 주입했던 그 시대의 계몽사상의 근원에는 이러한 논리가 작용한 것이다. 이런 사상은 게으름과 성적 타락을 병중의 가장 말질로 규정하게 되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힘을 행사하는 거처는 신체, 곧 ‘영혼과 육신’으로 이루어진 개별구성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오버랩’된 두 체계는 서로 뒤섞여 병리학은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기독교는 병리학적 체계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43쪽)
세균을 동반의 대상이 아니라, 퇴치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병리학의 도입은 현대인들의 청결에 대한 강박관념을 야기했다. 집집마다 설치된 샤워실이 그 대표적인 증거이다. 우리네 전통사회에서 목욕이란 집안에 특별한 대소사가 있을 때나 하는 연례행사였다. 한데 병리학의 도입으로 촉구된 과도한 청결의식은 거의 강박증에 가까워졌다. 세균을 몰아내기 위해, 감염을 방지하기 위해, 그러다 세련된 도시매너를 위해 이제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씻고 또 씻는다. 위생이 습속이 되고 마침내 무의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현대 도시인의 과도한 위생관념은 엄청난 물 소비를 가져오고, 세계적인 물 부족 현상의 원인이 되었다. 더불어 그렇게 씻어 대는데도 아토피를 비롯한 각종 피부질환은 더한층 기승을 부린다. 그 원인이 지나친 위생과 청결에 있다는 건 이제 상식이 되었다. 병리학의 궁극의 목표는 세균의 씨를 말리는데 있다. 하지만 이는 자만이었다. 세균은 이에 굴하지 않고 지속적인 돌연변이를 유발하고 어떤 항생제로도 듣지 않는 슈퍼바이러스로 변이했다. 세균과 질병과의 적대적인 대치는 세균의 강성을 불러왔다. 근대에 가장 무서운 질병이 결핵과 매독이었다면 현대에 있어 가장 무서운 질병은 암과 에이즈이다. 뭔가 유사하지 않는가. 병명은 바뀌었지만 그 근원은 유사하다. 즉 기존에 병이 더 강해진 것이다. 게으름과 성적타락을 가장 큰 죄악으로 생각했던 근대화 과정의 병리학과 기독교의 논리가 질병으로 구현된 것이다. 근대의 질병은 이제는 쉽게 치유할 수 있다. 그럼 모든 질병이 치유되었는가. 그건 아니다. 계속 새로운 질병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걸 치료하기 위해 끊임없이 병원과 의료시설의 신세를 져야한다. 암과 에이즈의 치료법이 개발되고 나면 우리가 이제까지 모르던 어떤 새로운 질병이 우리에게 도래할지 모른다. 이렇듯 병리학은 신체를 결핍과 질병의 온상으로 본다. 이는 신체에 대한 경멸과 불신이 저변에 깔려있다. 내 몸이 무엇인가 부족하니 늘 관리해주고 보수해주어야 한다. 최근 서양에서 유행한다는 애를 출산한 다음 자궁암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궁을 미리 들어낸다던지, 유방암을 예방하기 위해 유방을 미리 절제하는 안젤리나 졸리의 경우가 바로 우리의 몸을 관리와 보수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서양의학의 시각을 극단적으로 대변하는 것이다. 이는 지금 대한민국의 성형 붐과 무관하지 않다. 자신만이 가진 외모의 장점은 인정하지 못하고. 남보다 못한 부분만 도드라진다. 이는 자기부정의 극치이다. 자신의 개성을 없애고 누군가를 닮아가기 위한 몸부림. 여기에서 자신에 대한 존중감이 생길 리 없다. 이러니 현대인의 자기부정은 갈수록 증대되고, 이는 자기 생명에 대한 부정으로까지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급증하는 자살율도 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똥과 오줌도 마찬가지다. 근대화 이전 똥, 오줌도 하나의 자산이었다. 농사를 짓는데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똥, 오줌을 잘 모아두고 그걸로 퇴비를 만들고 농사를 지었다. 한데 서구 문명은 ‘위생과 건강’이라는 표상으로 똥과 오줌을 더럽고 불결한 것으로 인식했다. 근대화 과정에서 위생적으로 가장 먼저 시도되었던 것이 화장실의 분리와 오물의 처리였다. 농경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처리되던 똥과 오줌을 처리하는 분뇨 처리업이 따로 등장하고 이를 한꺼번에 모아 처리하다보니 자연을 오염하고 훼손시켰다. 이런 행위들이 한국영화중 처음으로 천만을 돌파했다는 영화 ‘괴물’에 나오는 괴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눈에 보이지만 않게 만들면 위생적으로 문제가 없는 것처럼 인식하고 온갖 오물들을 하수도를 통해 강으로 흘려보낸다. 현대인의 가장 흔한 질병이 감기이다. 감기에 걸리면 무조건 병원을 찾아간다. 하지만 우스갯말로 ‘감기는 약을 안 먹으면 이레, 약 먹으면 칠일’이다. 즉 감기는 무조건 시간이 지나야 낫는다는 것이다. 감기를 가장 잘 낫게 하는 방법은 잘 먹고 푹 쉬면된다. 그렇게 한번 심하게 아프고 나면 몸도 개운해지고 가벼워진다. 몸이 재부팅되는 것이다. 몸에 감기가 든다는 것은 몸의 발란스가 무너졌다는 것이다. 즉 감기는 몸이 허약해졌음을 나타내는 바로미터고 몸이 쉴 때가 되었음을 나타내는 지표이다. 그런 감기를 약으로 다스리려고 하다 보니 감기의 변종인 ‘사스’등으로 그 난리를 치루는 것이다.
몸은 많은 객체들의 집합체이다. 또한 몸은 자연의 일부이고, 자연 또한 몸의 일부이다. 그러기에 몸은 자연과 분리되어 존재할 수가 없다. 몸과 자연의 상호 의존적 관계를 인지하는 것. 그것이 현대의 위생담론에 의해 자연을 세균의 온상이나, 우리의 몸에 병을 일으키는 숙주로 생각하고 자연과의 절대 분리를 도모하는 사고는 우리 몸과 자연의 괴리감만 더 키울 뿐이다. 유럽에서는 ‘자연학교’라는 것이 있어 어린애들을 자연 속에서 뛰어놀게 하고 가끔 흙도 집어먹게 한다고 한다. 그런 어린애들이 더 건강하고, 아토피 등에 강한 저항력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병리학은 신체를 결핍과 질병의 온상으로 본다. 신체에 대한 경멸과 불신이 저변에 깔려있다. (5쪽) 이런 인식은 지금의 성형중독과 병원 권력을 탄생시켰다. 내 몸의 주인인 내가 내 몸을 인정하는 못하는 딜레마에 빠져있는 것이다. 이에서 벗어나 몸이 살아 움직이는 공동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우리 몸이 이질적인 똥과 오줌과 충의 집합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자연과 상호 교류하며 살아가는 공동체라는 것을 인정하며 상생을 도모하는 것이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우리의 사고가 아닌가 한다. 그동안 개인적으로 습득한 건강지식에 의해 변하지 않는 상식이 있다. ‘세상에 병이 있으면 그 약 또한 있으며 그 약은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우리 몸에 병이 들었을 때 그 병을 치유하는 약은 바로 우리의 일상, 자연 속에 있다는 것이다. 감기가 잘 들지도 않지만, 가끔 무리한 일정 등으로 몸살감기가 찾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하룻밤 푹 자고 나면 낳는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감기가 찾아왔을 때 딱 한번만 약을 먹지 않고 버티면 된다. 그럼 그 다음부터는 몸이 알아서 면역기능이 활성화되고 알아서 치유를 한다. 조그만 질병에도 병원을 찾아 몸에 약부터 털어놓고 보는 현대인의 의료 상식에서 언제 우리 몸의 면역기능이 활성화되겠는가. 내 몸을 믿고 내 몸의 치유력을 믿는다면 몸도 그 믿음에 반응할 것이다. 우리 몸을 믿고, 우리 몸에 존재하는 이타적인 것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 그 이타적인 존재를 자연으로 인정하고, 나아가 자연과의 상생을 도모하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가 찾아야 할 이시대의 병리학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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