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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표지의 발을 쓸어 보았다. 거칠고 닳은 누군가의 맨발이다. 그저 걷는 기능을 하는 발일 뿐 욕심도, 성냄도, 미움도 다 떨어져 나간 무욕의 발이다. 눈을 감고 싯다르타의 깊은 눈을 들여다본다. 지난 2천 5백 년 동안 싯다르타는 자신을 투영해 바라보는 영혼들 속에서 현존해왔다. 전륜성왕이 되리라는 예언을 뒤로하고 왕궁을 넘어 맨발 수행의 길을 걸으며 80여년을 부처의 생애로 살았던 사실보다, 나는 ‘사람의 맨발’ 첫 장부터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싯다르타' 라는 이름의 한 수행자의 삶에 매료되었다. 카샤파가 관 밖으로 나온 싯다르타의 맨발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울음을 울 때, 나 또한 한 인간의 장엄한 삶의 마감에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경외의 눈물이 흘렀다. 왕자라는 신분과 왕이 될 미래, 갓 태어난 아들, 화려한 옷을 입은 여인들, 진수성찬의 음식과 가죽신을 마다하고 모든 것에서 돌아서서 평생을 맨발로 걸었다. 바람처럼, 연꽃처럼, 사자처럼 어디에도 걸림 없는 자유인으로서 싯다르타의 인간적인 위대함과 정신적인 견고함에 누구도 감히 이르지 못할 길을 걸어간 이 정신적 영웅의 삶을 경외로 바라본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누구든지 올수 있는 길이라며 손짓한다. 사회가 어지러울 때나 자신의 일이 잘 되지 않을 때, 또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 나는 붓다의 지혜 속으로 들어간다. 싯다르타의 맨발 수행이 남긴 팔만 사천 법문은 어디에서나 보고 들을 수 있다. 붓다는 하늘에, 땅에, 꽃잎에, 물속에, 계절에, 초록빛, 태양, 호흡... 그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다. 드러나지 않는 현묘, 신이 되지 않은 완전한 인간의 참 자아는 시선을 돌리는 어느 곳에서나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아, 싯다르타여! 영원한 나의 순례자여······. 맨발은 싯다르타의 삶을 활불(活佛)과 동불(動佛)로 이끌었다. 나는 싯다르타를 고요와 명상 속에서 찾았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싯다르타는 오로지 사람들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전해주기 위해 오랫동안 걷고 걸었다. 맨발의 사문이 된 그는 가식 없이 진실하게 오직 자신의 내면을 자각하면서 섭씨 40도가 넘는 타는 듯한 인도의 자갈밭을 걷고 또 걸어 민중에게로 갔다. 맨발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에고의 성이 허물어지고 오직 순수한 본래 자기로의 회귀의 순간을 묵묵히 한 발씩 내어딛는 것이란 생각을 한다. 깨달은 존재로서의 붓다의 삶보다 인간적인 구도자 싯다르타의 삶에 초점이 맞춰진 이 책에서 붓다, 부처라는 말을 찾아보기 힘들다. 쿠시나가라에서 열반에 들 때도 그의 이름은 싯다르타로 불린다. 실제로 싯다르타는 붓다라는 완성된 존재로 불리길 결코 원하지 않았을 것 같다. 5년 전 열반에 드신 법정스님도 생애 마지막까지 어떤 수식어도 없는 ‘비구 법정’이었고, 그렇게 단순한 삶의 원형을 사는 것이 수행자의 모습이란 것을 알았다. 싯다르타의 정신은 후대의 수행자들이 스승의 길을 따라 걸으며 무소유와 맨발의 삶을 이어갔고, 2천 5백 년의 세월 속에서 그의 정신은 결코 마모되거나 흐려지지 않은 채 이어져 온 것이다. 싯다르타는 영원한 구도자의 표상이고, 시간이 아무리 흐르더라도 싯다르타의 맨발은 우리가 배워야 할 인간 내면의 궁극적인 현재이다. 영원한 구도자로서 싯다르타의 출가 정신은 우리들 가슴 속에서 시공을 초월하여 되살아나는 횃불이기 때문이다. 싯다르타는 자신이 겪는 허기와 배고픔을 통해 누군가의 가난을 생각했고, 난민으로 살고 있는 불가촉천민들을 위해 스스로 누더기를 입었다. 카스트 제도로 나뉜 차별사회를 평등한 사회로, 서로를 사랑하면서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맨발이 부르트도록 날이 선 모래 길을 걸었다. 천하를 분쟁 없는 화평의 상생, 화엄 세상을 이루기 위한 출가수행의 길은 오늘날 현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내리는 엄정한 죽비 같고 화두 같은 삶이었다. 길 위에서 태어나 살다가 길 위에서 열반에 든 싯다르타의 맨발을 생각한다. 어떤 것을 앞에 두거나 그것을 향해 쫓아가지 않는 ‘사람의 맨발’은 자비의 화현이 되어 지금도 내게로 걸어온다. 더불어 함께인 세상을 꿈꾸는 화엄의 사랑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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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책의 표지를 쓸어 보았다. 거칠고 닳은 누군가의 맨발이다. 욕심도, 성냄도, 미움도 다 떨어져 나간 무욕의 발이다. 눈을 감고 싯다르타의 깊은 눈을 들여다본다. 지난 2천 5백 년 동안 싯다르타는 자신을 투영해 바라보는 영혼들 속에서 현존해왔다. 전륜성왕이 되리라는 예언을 뒤로하고 왕궁을 넘어 맨발 수행의 길을 걸었던 한 수행자의 삶에 매료되었다.
카샤파가 관 밖으로 나온 싯다르타의 맨발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울음을 울 때, 나도 한 인간의 장엄한 삶의 마감에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경의의 눈물이 흘렀다. 왕이 될 미래, 갓 태어난 아들, 화려한 삶을 마다하고 모든 것에서 돌아서서 평생을 맨발로 걸었다. 바람처럼, 연꽃처럼, 사자처럼 어디에도 걸림 없는 자유인으로서 싯다르타의 인간적인 위대함과 정신적인 견고함에 누구도 감히 이르지 못할 길을 걸어간 이 정신적 영웅의 삶을 경외로 바라본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누구든지 올수 있는 길이라며 손짓한다.
맨발은 싯다르타의 삶을 활불(活佛)과 동불(動佛)로 이끌었다. 나는 싯다르타를 고요와 명상 속에서 찾았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오로지 사람들에게 가슴속 소리를 전해주기 위해 오랫동안 걷고 걸었다. 맨발의 사문이 된 그는 가식 없이 진실하게 오직 자신의 내면을 자각하면서 섭씨 40도가 넘는 타는 듯한 인도의 자갈밭을 걷고 또 걸어 민중에게로 갔다. 맨발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에고의 성이 허물어지고, ‘나’에서 일체 모든 존재에게로 향하는 숭고한 귀의와 공경을 묵묵히 한 발씩 내어딛는 것이란 생각을 한다.
깨달은 붓다의 삶보다 인간적인 구도자 싯다르타의 삶에 초점이 맞춰진 이 책에서 붓다라는 말을 찾아보기 힘들다. 열반에 들 때도 그의 이름은 싯다르타로 불린다. 실제로 싯다르타는 붓다라는 완성된 존재로 불리길 결코 원하지 않았을 것 같다. 후대의 수행자들이 스승의 길을 따라 걸으며 무소유와 맨발의 삶을 이어갔고, 2천 5백 년의 세월 속에서 그의 정신은 결코 마모되거나 흐려지지 않은 채 이어져 온 것이다. 싯다르타는 영원한 구도자의 표상이고, 그의 맨발은 우리가 배워야 할 자비이며 실천이다. 영원한 구도자로서 싯다르타의 출가 정신은 우리들 가슴 속에서 시공을 초월하여 되살아나는 횃불이기 때문이다.
싯다르타는 자신이 겪는 허기와 배고픔을 통해 누군가의 가난을 생각했고, 난민으로 살고 있는 불가촉천민들을 위해 스스로 누더기를 입었다. 카스트 제도로 나뉜 차별사회를 평등한 사회로,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맨발이 부르트도록 날이 선 왕모래 길을 걸었다. 천하를 분쟁 없는 화평의 상생, 화엄 세상을 이루기 위한 출가수행의 길은 오늘날 현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내리는 엄정한 죽비 같고 화두 같은 삶이었다. 길 위에서 태어나 살다가 길 위에서 열반에 든 싯다르타의 맨발을 생각한다. 더불어 함께인 세상을 꿈꾸는 ‘사람의 맨발’은 지금도 내게로 걸어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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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었다. 그 책에서 싯다르타는 현세와 영원, 고뇌와 행복이 실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고 해탈한 존재로 묘사된다. 반면 한승원의 <사람의 맨발>에서 싯다르타는 불교라는 종교의 신 혹은 교주가 아닌, 삶의 고통에 대해 고뇌하고 그 고통의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한 인간이다.
싯다르타는 전륜성왕이 되라는 신의 뜻에 따라 태어났다고 교육받았다. 그는 스승 비슈바미트를 통해 무엇인가를 소유함으로 행복을 누리는 ‘아르타(artha)’, 육체적 사랑으로 행복을 누리는 ‘카마(kama)’, 종교 도덕적 의무를 행함으로 행복을 누리는 ‘다르마(dharma)’, 그리고 영적인 해방을 통해 행복을 누리는 ‘모크샤(moksha)’에 대해 배운다. 하지만 그는 신의 존재에 대해 의심을 품고, 신의 뜻이 아닌 인간의 손으로 만든 세상을 꿈꾼다. 싯다르타는 결혼을 하고 부왕을 이어 농업과 경제를 활성화시켜 나라를 풍요롭게 한다. 하지만 세상은 결코 좋아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더욱 탐욕스러워졌고, 싯다르타는 그의 장인인 재정대신 다리나에 의해 태자궁에 갇힌다. 결국 싯다르타는 인간의 탐욕과 그 탐욕을 인정하는 허위의 신을 버리고 출가를 한다. 그는 구도자, 맨발의 사람이 된다. 당시 수행자들은 다음 세상에서 행복해지기 위해 고행을 행했다. 싯다르타는 그런 고행이 아니라, 지금 세상에서 인생의 고통을 없애는 지혜를 추구한다. 그는 가부좌를 하고 앉아 스스로 깨달은 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제자들이 몰려들고, 큰 교단이 형성된다. 그가 열반에 들며 제자들에게 말했다. “부디 게으름 없이 정진하여라.” 그는 철저하게 삶의 고뇌를 끌어안고 가는 절대 고독자로 살다 죽었다. 그의 제자 카샤파는 싯다르타의 맨발을 두 손으로 감싸 안고 통곡한다.
그렇다. 인생은 나그네 길의 여정이다. 싯다르타는 길 위에서 태어나, 결국 평생을 맨 발로 걸으며 올바른 인생의 길을 가르치다 길 위에서 열반했다. 작가는 싯다르타가 생로병사의 인생의 고뇌에서 벗어나 결국 부처가 되었다는 사실보다, 그가 진정한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부조리하고 차별이 가득한 세상에서 올바른 인생 길을 걸어가야 하는지를 가르친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싯다르타는 신이 아니다. 한 평생 구도의 맨발로 고뇌하는 인간이다.
이 책은 현세의 행복인 아르타, 카마, 다르마, 모크샤를 위해 부처에게 절을 하고 기도를 드리는 자들에게 도전한다. 부처는 신이 아니라 고뇌하고 깨달은 자가 되기 위해 팔십 평생을 맨발로 산 구도자였다고! 그를 따르는 제자라면 맨발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어디 불교뿐이겠는가? 이 땅의 모든 종교가 올바른 삶의 길을 고민하고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 사원이나 성당 혹은 교회에 다닐수록 더욱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존재가 되어간다면, 그는 진정한 종교인이 아닌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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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맨발》
종교가 아닌 철학으로써의 불교, 신이 아닌 인간으로써의 부처 나는 이것이 궁금했다. 개신교 쪽에서도 종교, 신으로써가 아닌 그러니까 인간 예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얼마 전 소설 <서초교회 잔혹사>를 읽으며 인간의 탐욕이 신을 무기로 삼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나는 지금의 종교들이 제 모습을 잃었다는 것에 깊이 공감한다. 애초에 가르침은 왜곡되고 탈색되고 변색되어 그 누구보다도 더욱 재물과 권력을 탐하는 선봉에 서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런 일은 시대를 초월해 인간이 있는 곳은 어디든 똑 같았던 것 같다. 불교든 다른 종교든 늘 교단은 썩어 있었고 늘 신의 핑계를 대며 약자들을 수탈하고 권력의 정점에서 혹은 권력을 이어가기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싯다르타가 살던 때도 그랬다. 그는 한 나라의 태자로 태어나 모든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다. 그가 태어난 인도는 카스트제도가 견고한 곳으로 이 모든 차별은 '신의 뜻'이라는 말로 합리화 되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왜 인간의 세상에서 인간이 만든 제도와 법과 모순들이 늘 '신의 뜻'이라는 한 마디 말로 합리화되는지, 카스트 제도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은 부귀영화를 누리고 하위계급은 늘 수탈당하고 비인간적인 취급을 당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는 한 마디 말로 설명이 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가진 자는 더욱 가지려 들고, 재물이 쌓이면 색을 탐하고, 권력을 손에 넣고 싶어 하는지 그 원인과 해결책은 무엇인지 싯다르타는 알지 못했다. 싯다르타는 아버지인 왕을 대신해 나라를 통치하면서 이런 모순을 없애려 하였다. 그는 이런 모순을 만들어 내는 카스트제도를 없애기 위해 먼저 사람들을 교화하려한다. 경제제도와 농업을 손보게 되자 나라는 점점 풍요로워졌다. 그리고 그는 카스트 안에도 들지 못하는 불가촉천민에게도 살 기회를 만들어 주고 이를 자신의 개혁의 시발로 삼으려 했으나 자신의 장인이자 집정대신의 탐욕으로 인해 결국 개혁이 실패로 돌아가고 불가촉천민들은 가진 자들의 노예로 전락하고 싯다르타는 왕보다도 더 큰 권력을 가진 노회한 집정대신에 의해 태자궁에 유폐되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는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해야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지, 끊임없이 반복되는 탐욕의 굴레, 인간을 자신의 뜻대로 조정하고 부리는 폭력적인 신, 이런 허위의 신을 없애기, 위해 진정한 개혁을 위해 결국 출가를 하게 된다.
그는 당시 수행자들이 행하던 고행, 천상에서 화려하게 태어나는 것이 목적인 고행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으며 오로지 현실 속에서의 해탈, 신의 뜻이 아닌 인간 중심, 모든 사람들의 근본적인 고통을 없애주는 지혜를 얻기 위한 깨달음을 추구했다. 그는 기도하면 모든 걸 이루게 해 준다는 신이 아닌 스스로 깨달은 자였으며, 철저하게 인간이었고, 혁명가였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를 신으로 떠받들고 있을까. 왜 우리는 절에 가서 불상 앞에서 영험하다는 바위 앞에서 왜 돈 잘 벌게 해달라고, 자식 합격시켜 달라고, 취직하게 해달라고 결혼하게 해달라고 건강하게 해달라고 빌고 있을까. 언제부터 부처가 신이 되었고, 언제부터 불교가 신을 믿는 종교가 되었나. 왜 불사를 일으키고, 등을 달고, 천도 제를 하고, 기왓장을 올리기 위해 신도들에게 돈을 내라고 하는가. 왜 절이, 종단이 재산을 가지고 수행자가 외제차를 가지게 되었는가. 왜 우리는 '혁명가'였던 싯다르타의 삶과 가르침을 배우고 따르지 못하고 그에게 발 복을 기원하게 되었는가. 이 소설을 읽으며 내내 드는 생각이었다. 그가 살았던 때나 지금이나 형태만 다를 뿐 인간사 내용은 달라진 바가 없다. 그가 살았던 나라는 아직도 계급제도를 유지하고 있다며 미개하다고 욕을 하겠지만, '돈'으로 만들어진 계급은 형태는 없지만 오히려 더 견고하지 않은가. 작가는 그리하여 싯다르타의 성불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출가'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했다. 그는 위대한 혁명가로써 부처가 되어 귀한 가르침을 남겼지만 우리네 삶은 여전히 어둠속을 헤매고 있다. 그러나 나는 가슴이 뛰었다. 인간으로써 싯다르타는 여전히 살아있고 그의 혁명정신 또한 이렇게 기억되고 있으니. <서초교회 잔혹사> http://blog.daum.net/yoonseongvocal/7343661 <어느 불교 무신론자의 고백> http://blog.daum.net/yoonseongvocal/7343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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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지 않은(?) 맨발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책 <사람의 맨발>을 만났다. 한승원님의 장편소설은 오랜만에 읽게 되는데 이 책 <사람의 맨발>은 싯타르타의 일생을 다루고 있는 책으로 싯타르타가 젊은시절 왜 출가를 했는지 작가의 영혼의 스승인 석가모니 부처님의 삶을 소설로 써 보는 것이 오랜 소망이었고 그 소망이 바로 이 책인 것이다. 작가는 이 책을 출가에 촛점을 맞추어 쓴 글이라고 한다. 큰 스승의 일대기를 읽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므로 자신의 종교와 상관없이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싯타르타는 기원전 5세기경 마가다국의 변방 카팔라 성의 태자로 태어났는데 친어머니 마야 황후는 싯타르타가 출생하고 7일만에 죽고 이모의 손에서 성장하게 된다. 아버지 슈도다나 왕의 명령으로 국정을 보살피게 되면서 백성들의 모두 잘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만 신분제도인 카스트 제도의 벽에 부딪히게 된다. 싯타르타가 태어났을때 예언가는 왕이 되거나 부처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아버지 슈도다나 왕은 싯타르타가 부처가 되는것을 막기위해 동생의 세 딸과 결혼시킨다.
계급사회로 인해 핍박받는 사람들과 탐욕으로 인해 지옥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잘 사는 마을로 만들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하던 싯타르타는 장인이 이미 모든 이권을 장악했음을 알게되고 장인을 몰아내려고 한다. 그런데 오히려 싯타르타가 궁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마는데 모든 것을 신에게 의지하려는 고독한 인간을 구제하기 위해 출가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것이 그의 나이 스물 아홉의 일로 6년 동안 떠돌아 다니며 고행과 명상을 거듭하지만 깨달음을 얻지못하고 결국 고행을 포기하기에 이르게 된다.어느날 홀로 나무아래에 앉아 선정에 들었다가 중도의 수행 만이 최선임을 깨닫고 제자들을 거느리고 중생들이 해탈의 길로 이르는 것을 가르치다가 80세에 열반하게 된다.
싯타르타의 출가는 사문출유라고 동문 밖에서는 늙은이를 보고, 남문 밖에서는 병든 이를 보고, 서문 밖에서는 죽은 사람을 보고, 북문 밖에서는 수행자를 보고, 마침내 출가할 뜻을 굳히게 되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 책에서는 좀 더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싯다르타가 말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이란 내가 지상에서 최고의 존재로서 우뚝 서 있다는 오만의 의미가 아니라 인간인 나는 오직 내 운명의 짐을 혼자서 지고 가야 하는 절대 고독자라는 뜻이라고 보면 되겠다.
작가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계급사회라고 꼬집는데 예전에는 신분이 계급을 결정하는 계급사회였다면 지금은 자본주의 계급사회라는 것이다. 충분히 이해되는 부분이다. 싯타르타처럼 계급사회를 무너뜨리고 모두가 잘 사는 사회를 만들려는 지도자가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이 큰 문제라면 문제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여든 살 까지 사람들에게 올바른 길을 가르치기 위해 내내 험한 길을 맨발로 다니기를 주저하지 않은 싯타르타같은 지도자 말이다. 예전부터 들었던 생각이지만 우리국민들은 참 지도자 복이 없는 것같다. 작가가 말하는 출가정신은 이 땅에 살고있는 모든 사람들이 가슴 깊이 새기고 실천해야 할 정신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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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고 고된 삶을 산 인물을 소설을 쓴다는 건 힘든 작업이다. 힘들었던 삶을 글로 표현하는 것도 힘들거니와 그 삶을 소설로 재현하는 것도 여간 쉬운 게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에 소재로 쓰려고 한 인물이 위대하고 대단한 인물이라면 더 힘들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한승원 작가는 붓다의 가르침을 소설로 완성했다. 그의 전작인 《아제아제 바라아제》에서 두 여승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통해 수행의 진정한 의미와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 전달하려 노력했다면 이번 소설 《사람의 맨발》에서는 붓다의 출가를 통해 붓다가 전하려고 했던 가르침이 무엇이었는지를 소설로 통해 그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
소설은 붓다의 어린 시절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소설로 그려지고 있다. 기원전 5세기경 마가다국의 변방인 카필라 성의 태자로 태어나 전륜성왕이 되기를 바랐지만 싯다르타는 카스트 제도라는 계급의 벽에 부딪히게 되고, 결국 그 벽이 싯다르타의 출가를 결심하게 하는 큰 이유가 되기에 이른다. 왕이라는 자리에 오르는 것을 거부하고, 권력과 재물을 모두 버린 채 출가를 선택한 싯다르타의 선택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신이 마련해준 네 가지 목표가 있는데 그 네 가지 목표 중에서 첫째는 아르타(Artha)이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소유하는 게 아르타이고, 두 번째로 신이 인간에게 마련해준 것이 사랑을 뜻하는 카마(kama)다. 거기에 인간의 사랑이 너무 넘쳐서 자기 본연의 참된 자아를 잃어버릴 수 있음에 그것을 방지하고, 종교적, 도덕적으로 의무를 가지게 하기 위해 다르마(dharma)라는 목표를 내려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유의 욕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은 모크샤(moksha)라는 네 번째 목표를 인간에게 내려주게 된다. 신이 인간들에게 내려준 이 네가지 목표에 대해 싯다르타는 부정하면서 칼을 든 전륜성왕이 되기 보다는 인간이 사는 땅을 같이 밟고 다니면서 중생들과 희노애락을 함께 나누고자 출가를 선택한 것이다. 비슈바미트라는 말을 잃고 명히 싯다르타의 두 눈을 응시했다. 지금의 인간 세상의 구도를 헝클어버리고, 전혀 새로이 판을 짜겠다는 싯다르타의 말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만일 이 말을 브라만의 사제들이 듣는다면 어찌 되겠는가. 싯다르타에게서 태자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들 것이다. 옆에 앉은 크샨티데바도 말을 잃었다. 그들은 벌어진 입을 닫지 못했다. 싯다르타의 영혼은 범상한 영혼이 아니었다.(본문 67쪽 中) 영화에서 본 듯한 다이내믹한 상황이나 극적인 결말은 아니었지만 이 책을 덮은 순간 싯다르타의 맨발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의 맨발에서 중생들의 희노애락을 보았고, 그의 맨발을 통해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열반한 싯다르타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인간을 구제하기 위해 신을 거부하고 출가를 선택한 붓다의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나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맨발인가? 발이 아프다는 핑계로 발을 꽁꽁 싸맨 채 재물과 쾌락에만 눈이 멀지 않았는지 내 자신에게 되묻고 싶다. 하지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할 수 없다는 게 씁쓸할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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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가 출가한 이유는 사찰에 가면 팔상전이나 영산전이라는 전각이 있다. 이 전각은 팔상도를 봉안한 곳을 말하며 이 전각에 봉안된 팔상도는 부처님의 일생에서 중요한 장면을 8가지 장면의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을 말한다. 팔상도의 구체적인 이름은 도솔내의상(도솔천에서 내려오는 모습), 비람강생상(룸비니 동산에 내려와서 탄생하는 모습), 사문유관상(사문에 나가 세상을 관찰하는 모습), 유성출가상(성을 넘어가서 출가하는 모습), 설산수도상(설산에서 수도하는 모습), 수하항마상(보리수 아래에서 마귀의 항복을 받는 모습), 녹원전법상(녹야원에서 처음으로 포교하는 모습), 쌍림열반상(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는 모습)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일생을 이해하고 그가 출가를 한 근본적인 이유를 알아 부처님의 가르침의 궁극적인 이치를 알게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싯다르타라는 기원전 5세기경 마가다국의 변방 카필라 성의 슈도다나 왕과 마야왕비 사이에서 태어났다. 왕위 계승이 보장된 태자로 봉해지고 궁궐에서의 화려한 삶을 포기하며 출가하여 백성들의 고통의 근본원인을 찾아 그것을 해결하고자 6년간에 걸친 수도생활 끝에 깨달음을 얻고 팔십 평생을 길거리에서 중생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삶을 살았다. 2500년이 넘는 시간동안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불교의 석가모니 부처님이 그다. ‘사람의 맨발’의 저자 한승원 작가는 그동안의 작품에서‘서민들의 애환과 생명력, 한(恨)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다루어온 작가’로 일컬어지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영혼의 스승인 석가모니 붓다의 삶을 소설로 써보고 싶은 오랜 염원을 담아 이 작품을 완성했다고 한다. ‘사람의 맨발’에서 작가가 주목하는 부분은 ‘출가’에 있다. 무엇이 태자의 신분으로 보장되어 있는 삶을 버리고 출가를 하게 되었는지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신격화된 절대적 존재라기보다 모든 인간이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실존적 고뇌를 거듭한 싯다르타라는 한 인간에 보다 주목한 것이다. 작가가 그려가는 싯다르타의 이야기는 부처님의 일생에서 중요한 장면을 8가지 장면의 그림으로 그려놓은 팔상도를 따라가고 있다. 고행 후 깨달음을 얻고 중생을 구도하려는 과정에 중신을 둔 것이 아니라 태어나 왕자로 살며 누리고 있던 호화로운 삶에서 카스트라는 철저한 계급 사회에서 백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구체적 삶의 흔적을 찾고 그들의 고통의 원인이 무엇이며 근본적인 해결방법은 없는가에 대한 구도의 길이었다는 점을 부각시켜 주장하고 싶은 무엇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싯다르타가 열반에 든 후 7일 만에 찾아온 제자에게 관을 뚫고 발을 내밀었다. 출가 후 평생 맨발로 걸었던 그 발을 내밀어 자신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는 의미를 보다 명확히 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작가 역시 이 점에 주목하여 사람의 맨발이라는 이야기를 풀어갔다. 혼자만의 깨달음에 만족하지 않고 신분의 고하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의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대승적 차원에서 싯다르타의 삶을 재구성하고 있다. 이는 곧 독자들이 싯다르타의 맨발을 통해 출가 정신을 잊지 말고 참다운 자유인으로 살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여전히 계급사회인 현실에서 싯다르타의 출가정신을 통해 우리사회에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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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한승원님은 영혼의 스승인 석가모니 부처님, 붓다의 삶을 소설로 써보고 싶은 오랜 염원을 이 책 『사람의 맨발』을 통해 인류 역사 속에 실존했던 한 인간으로서의 붓다(싯다르타)가 젊은 시절에 왜 출가를 했는지 싯다르타의 출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고있다. 기원전 5세기경 인도 마가다국의 변방 카필라 성의 태자로 태어난 싯다르타는 태어나자마자 이모의 손에 성장하게 되고, 왕인 아버지의 명령으로 국정을 보살피게 된다. 백성들이 모두 잘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지만 결국 싯다르타는 신분 차별이 엄격한 카스트 제도의 벽에 부딪히게 된다. 싯다르타가 부처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동생의 세 딸과 결혼을 시키고, 아들까지 낳게 되지만, 장인에 의해 태자궁에 갇히고 만다. 계급사회로 인해 핍박받는 사람과 탐욕으로 인해 지옥의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고뇌에 빠진 싯다르타는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결국 전륜성왕의 신발을 벗어던지고 맨발의 부처, 사람의 맨발을 선택한다. 그가 태어났을 때 전륜성왕이 되거나 부처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남기고 죽은 예언가의 말이 거짓말처럼 맞아 떨어진 것이다. 스물아홉 살에 출가의 길을 선택한 싯다르타는 약 6년 동안 떠돌아다니면서 고행과 명상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이르지만 원하던 깨달음은 얻지 못한다. 결국 싯다르타는 스스로 고행을 포기한다. 그런데 어느 날 홀로 나무 아래 앉아 고요히 선정에 들었다가 중도의 수행만이 최상의 길임을 깨닫는다. 깨달음을 얻은 싯다르타는 이후 제자들을 거느리고 중생들이 해탈로 이르는 길을 가르치다가 80세에 열반에 든다. 이 책은 싯다르타의 성불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출가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말한다. 출가는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나 스님들만 하는 것이 아니며, 특정한 사람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도 출가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여행 중에 와불(臥佛)의 맨발을 볼 때마다 붓다의 ‘맨발’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곤 했던 저자가 길 위에서 태어나 평생토록 온 세상의 길을 맨발로 걸어 다니며 사람의 길에 대하여 가르치다가 길 위에서 열반한 석가모니 부처님, 붓다(싯다르타)의 맨발이란 무엇인가? 스스로 자문을 해 오던 중에 이 책을 탄생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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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사월 초파일 무렵이 되면 깊고 짙푸른 산속 사찰에 알록달록 드리워진 화려한 연등 모습이 마음을 맑고 고요하게 정화시켜 준다.개인과 가족의 안녕과 축원을 담은 연등은 하해와 같이 넓기만 한 부처의 중생구제를 연상케 한다.어느 종교이든 교리가 있겠지만 부처(Budha)의 가르침은 탐욕을 멀리하고 무소유의 정신으로 해탈을 깨닫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부처의 상징인 싯타르타의 일생을 되짚어 보면서 속물근성으로 가득찬 중생의 한사람으로서 미망(迷妄)에 빠진 '나'는 무엇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자문자답해 보는 시간을 갖어 본다.
《마하 바라따》를 참고로 하여 싯타르타의 삶을 서사적이고 휴머니즘에 입각한 《사람의 맨발》은 싯타르타가 세속의 탐욕을 모두 벗어 버리고 홀로 맨발로 고행을 하는 과정을 개연성 짙은 필치로 들려 주고 있다.부처의 생애에 대해서는 어설프게 알고 있었지만,불교와 관련한 작품을 많이 남기고 향기로운 불교색채가 좋아한 나머지 이번 한승원작가의 작품에 대한 기대와 설렘은 결코 저버리지 않았다.싯타르타가 탄생할 무렵의 인도 왕조와 신분계급,사회상을 어느 정도 이해의 폭을 넓혀 주었으며,왜 싯타르타가 힘과 권력,명예가 대대손손 누리고도 남을 왕족 출신인데 왜 출가를 하여 사서 고행을 했을까.그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싯타르타의 눈에 비친 신분제도 즉 카스트(Caste)제도 중에 짐승만도 못한 생활을 하는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들의 비천하고 노예과 같은 삶을 보면서 싯타르타는 왕족이라는 신분,기득권 등을 훌훌털어 버리고 중생구제를 위해 유리걸식,탁발과 같은 비천한 생활을 하게 된다.
왜 사람들에게는 계급이 있을까.왜 계급 높은 사람은 계급이 낮은 사람을 꾸중하고 모질게 구타를 할까. -P46
태자로서 부왕인 슈도다나의 뒤를 이을 싯타르타는 룸비니아 동산에서 태어난다.어머니 마야 왕후는 제왕절개를 한 끝에 어렵사리 싯타르타를 낳게 되지만 출혈이 심해 안타깝게도 운명을 달리하고,프라자파티에 의해 양육과 훈육을 받게 된다.또한 태자 교육청에서 무사와 제왕학에 대해 스승을 두고 엄격한 교육을 받기도 한다.모두가 싯타르타를 차기 왕으로 상정해 놓은 상태이고,전륜성왕(轉輪聖王:통치의 바퀴가 굴러 세상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성스러운 왕)을 기대하고 있었다.그런데 싯타르타는 농사대전에 참가하여 농부들이 힘들게 일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면서,양치기,밀,뽕나무,양잠,잠실을 직접 관장하면서 명주 도시를 조성하기도 했다. 기존 사회의 무질서와 비인도적인 행태와는 거리를 두고 출가를 하기로 결심한다.싯타르타에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해 많은 번민을 했을 것이다.신분제도가 신의 뜻이라는 점도 그에게는 매우 회의적이었고 불가촉천민들이 살아 가는 양상은 헛간에 사는 짐승만도 못한 토굴이 거처였으며,그들끼리의 암투와 살벌한 몸싸움은 흉악하고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그의 뇌리에는 자신부터 탐욕을 벗어 버리고 모두가 사랑과 행복으로 가득찬 세상을 만들어 나가고 싶었을 것이다.
세 명의 부인을 둔 싯타르타는 야소다라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이목구비를 비롯하여 자신을 챙겨 주는 마음 씀씀이 등이 그의 마음을 사로 잡아,둘 사이에서 낳은 자식 라훌라가 있었다.그리고 제정대신이면서 장인인 다리나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잠시 싯타르타는 연금생활을 하기도 했다.그는 전륜성왕을 뿌리치고 중생을 사랑과 화평으로 구제하며 일반 백성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고 그 고통을 몸소 느껴보고자 고행길을 마다 하지 않는다.부왕 슈도다나를 비롯한 궁궐에서는 그의 출가에 대해 걱정과 우려의 나날이었지만,마부를 비롯한 두 스승이 환궐을 강권하기에 잠깐 부왕과 왕비,아들,장인과의 만남이 이루어진다.출가후 그가 깨달은 해탈을 몸소 실천하면서 80세에 가까운 나이가 들면서 사라나무 숲에서 제자들의 종신을 받으며 열반에 들어 가게 되었다.
인간은 자기 운명의 무거운 짐을 홀로 짊어지고 혼자서 헤쳐 나가는 실존,그 절대 고독의 운명을 짊어지고 태어났다.세속의 모든 욕망,모든 착취와 탐학,모든 전쟁,모든 시기 질투와 복수,모든 질병과 모든 죽음의 공포에 찌들어 있는 중생들이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혜,그것은 해탈(解脫)이다. -P2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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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이라는 제목을 달고 화제가 되었던 사진 한장이 있었다.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이었다. 오랜 연습과 고된 훈련으로 제멋대로 찌그러져버린 못생긴 발.. 그 생김새가 말해주는 인내의 세월이 아름답다는 말이겠지만 그 후로도 우리는 성공한 사람들의 발을 사진찍어 올리며 아름다운 발 시리즈(?)를 만들어냈다. 박지성의 발, 이상화의 발처럼 말이다. 문득 생각난 동화 한편 때문에 책을 읽다가 슬그머니 웃음이 나기도 했다.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눈, 코, 입, 귀, 손, 발이 서로 제가 더 잘났다고 떠들어댔다는 동화말이다. 결국 그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몸뚱이 자체를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게 발일테니 어쩌면 발이 더 큰소리 칠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에 살풋 웃음이 난 것이다. 발은 사람의 모든 장기를 그 안에 담고 있으면서도 온갖 더러운 것을 밟고 다녀야 한다는 것 때문에 수모를 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손이나 발만큼 그사람의 역사를 표현해주는 존재도 없지 싶다. 그만큼 발의 중요성은 두말 할 필요가 없을 터다. 그래서 그 발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사람의 맨발이라는 제목을 보면서 내심 우리가 알고 있는 부처의 모습보다는 또다른 부처의 모습을 기대했었다. 그런데 한방 맞은 느낌이랄까? 뭔가 색다른 것을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마저도 내려놓지 못하는 나의 욕심이었다는 걸 알게 되니 한편 부끄럽기도 하다.
싯다르타는 샤카족의 태자로 태어났다. 어머니 마야 왕후가 아이를 낳고 7일만에 죽자 이모 마하 프라자파티 왕후의 손에 의해 길러진다. 자라는 과정이야 왕세자 교육을 받는 우리네 역사속의 왕자와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그들만의 계급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싯다르타가 출가를 하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카스트 제도는 브라만(승려계급), 크샤트리야(무사계급), 바이샤(工商계급), 수드라(노예계급) 등 4개 계급 외에 수드라 이하의 계층으로 구성돼 있다. 수드라 이하의 계급이란 것은 불가촉천민이라 불리는 '다리트(Dalit)'로 온갖 멸시와 배척을 받으면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3D 업종에 종사한다. 이들은 인도 인구의 15%를 차지한다. 이보다 더 낮은 계급도 있다. '부족민' 또는 '트리발(Tribal)' 로 일컬어지는 토착민들인데 약 5,000만 명정도나 된다고 한다. 다리트와 트리발은 아예 카스트에 끼지도 못하는 열외 인간으로 사람대접을 못 받는다. 계급으로 나뉘어진 인간사회를 어떻게 해보지도 못한 채 열반에 든 석가모니도 그렇고 인도가 내세우는 위인 마하트마 간디도 어쩌지 못했던 것이 바로 카스트 제도인 걸 보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열반에 든 후 제자 가섭에게 관밖으로 발을 내밀어 보여주었다는 일화도 그렇지만 부처와 제자들과의 일화에 대한 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모든 것이 '신의 뜻' 이라는 말로 정당화시켜버리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어 고뇌에 빠진 싯다르타가 마침내 출가를 결심하고 성을 나서는 장면은 항상 알 수 없는 기대감에 부풀게 한다. 원래 없었던 것이라거나 非想非非想處 와 같은 어려운 말들은 차치하고라도 八正道만큼은 그대로 가슴속에 우뚝 세워두고 싶은 욕심이 난다. 마음이 고통에서 멀어질 수 있는 방법이라는 팔정도는 中道를 말하기도 하는데, 해탈에 이르는 바른 길은 감각적 쾌락을 구하는데 있는 것도 아니고, 지나친 고행으로서 자신을 괴롭히는데 있는 것도 아니며, 그 양 극단을 떠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인도가 불교의 발상지임에도 불구하고 불교신자가 그다지 많지 않은 이유를 혹자는 불교의 남녀평등 사상이 카스트제도에 반하는 까닭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것은 어쩌면 내부의 권력다툼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수행중인 싯다르타를 찾아와 했다는 악마의 말이 생각난다. "인간은 그때그때 죄를 짓고, 참회하고 신께 빌어 용서를 받으며 살아가도록 점지되어 있다"는. 그러니 신께 복이나 구하면서 살라는 그말은 왠지 서글픈 여운을 남긴다. 솔직하게 말해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내용이었지만 부처를 '영혼의 스승'이라 말하는 작가의 말처럼 이 책은 영혼의 스승에게 바치는 헌정글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듯 싶다. 부처의 일생중에서 출가에 더 큰 의미를 두고 글을 썼다고 한다. 아이에게 읽혀도 될 만큼 쉽게, 이해하기 편하게 쓰여진 글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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