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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전환전이 된 1차 진주성 전투를 다룬 그래픽노블이 하나 나왔습니다. 진주성 전투는 승리와 패배, 영광과 굴욕, 환호와 비애가 교차합니다. 이는 1차에서는 수성에 성공했으며 2차에서는 함락되어 군민이 몰살되는 비극이 있었기 떄문입니다.
진주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마저 반드시 함락을 하라고 집착을 했으며 1차에는 3만을 동원한데 이어서 2차에 10만에 가까운 병력을 동원하여 간신히 함락했습니다.
2차 진주성 전투는 1593년 6월(음력)에 벌어진 전투로 조명연합군이 한양을 회복되고 일본군이 남부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히데요시가 엄명해서 조선 침략군을 모두 동원해서 진주성을 공략한 것입니다. 1차 진주성 전투에 대한 보복과 전쟁 주도권을 회복, 전라도 침공을 노린 것이라고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진주성이 가진 전략적 지위이기 때문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경상좌도에 자리 잡은 일본군을 진주성을 거점으로 조선군은 반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들판의 양떼, 성안의 사자라고 평가를 받던 조선군은 수성전에는 제역활을 하고 있었고 경상 좌도에 장기 주둔을 목적했던 일본군에게 진주성을 버려둘 경우 이곳에서 조선군이 끊임없이 반격해온다면 화근이 될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2차 진주성 전투 이후 성 자체를 완전히 박살낸 것이 그 목적이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이러한 왜군의 행보는 진주성과 김시민 장군의 1차 진주성 전투의 승리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일개 판관이었던 김시민 장군은 전임 목사가 병사하자 군민을 수습하여 피난길에 돌아와 진주성을 지키면서 이곳을 근거지로 주변의 관군과 의병과 더불에서 반격에 나섭니다. 그리고 진주성을 공략하기 위한 3만의 왜군을 상대로 처절한 수성전을 펼치게 됩니다. 그 과정을 한번 읽어보시라고 권합니다.
그런데 다만 아쉬운 점은 조선군의 이미지에서 최근의 연구 성과는 나름 갑옷과 투구를 챙겨입었다 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포졸복은 조선군이 나와서 이 부분은 반영이 되었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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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전환전이 된 1차 진주성 전투를 다룬 그래픽노블이 하나 나왔습니다. 진주성 전투는 승리와 패배, 영광과 굴욕, 환호와 비애가 교차합니다. 이는 1차에서는 수성에 성공했으며 2차에서는 함락되어 군민이 몰살되는 비극이 있었기 떄문입니다.
진주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마저 반드시 함락을 하라고 집착을 했으며 1차에는 3만을 동원한데 이어서 2차에 10만에 가까운 병력을 동원하여 간신히 함락했습니다.
2차 진주성 전투는 1593년 6월(음력)에 벌어진 전투로 조명연합군이 한양을 회복되고 일본군이 남부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히데요시가 엄명해서 조선 침략군을 모두 동원해서 진주성을 공략한 것입니다. 1차 진주성 전투에 대한 보복과 전쟁 주도권을 회복, 전라도 침공을 노린 것이라고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진주성이 가진 전략적 지위이기 때문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경상좌도에 자리 잡은 일본군을 진주성을 거점으로 조선군은 반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들판의 양떼, 성안의 사자라고 평가를 받던 조선군은 수성전에는 제역활을 하고 있었고 경상 좌도에 장기 주둔을 목적했던 일본군에게 진주성을 버려둘 경우 이곳에서 조선군이 끊임없이 반격해온다면 화근이 될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2차 진주성 전투 이후 성 자체를 완전히 박살낸 것이 그 목적이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이러한 왜군의 행보는 진주성과 김시민 장군의 1차 진주성 전투의 승리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일개 판관이었던 김시민 장군은 전임 목사가 병사하자 군민을 수습하여 피난길에 돌아와 진주성을 지키면서 이곳을 근거지로 주변의 관군과 의병과 더불에서 반격에 나섭니다. 그리고 진주성을 공략하기 위한 3만의 왜군을 상대로 처절한 수성전을 펼치게 됩니다. 그 과정을 한번 읽어보시라고 권합니다.
그런데 다만 아쉬운 점은 조선군의 이미지에서 최근의 연구 성과는 나름 갑옷과 투구를 챙겨입었다 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포졸복은 조선군이 나와서 이 부분은 반영이 되었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