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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값을 회수할 차례가 되었다 《부서진 사월》
"핏값을 회수할 차례가 되었다 《부서진 사월》" 내용보기
"베리샤家의 그조르그가 제프 크리예키크를 쏘았어요!" 이 작품은 '알바니아'라는 나라의 산악 지대에 남아있는 kanun(카눈)이라 불리는 관습법에 관한 이야기이다. 유튜브나 포털에서도 많은 정보가 검색되지 않는 폐쇄적이고 낯선 나라, 고대 함무라비 법전에 등장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같은 관습법이 실존한 이 나라는 그리스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유럽 국가 중 하나이
"핏값을 회수할 차례가 되었다 《부서진 사월》" 내용보기

 

"베리샤家의 그조르그가 제프 크리예키크를 쏘았어요!"


이 작품은 '알바니아'라는 나라의 산악 지대에 남아있는 kanun(카눈)이라 불리는 관습법에 관한 이야기이다. 유튜브나 포털에서도 많은 정보가 검색되지 않는 폐쇄적이고 낯선 나라, 고대 함무라비 법전에 등장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같은 관습법이 실존한 이 나라는 그리스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유럽 국가 중 하나이다.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되는 '카눈'은 일상생활의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규정해놓고 있지만, 그중 알바니아 관습법 카눈 中 26항 「살인」126조의 조항을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가령 어떤 이유로 한 가문의 누군가가 다른 가문으로부터 살해당하면 그에 따라 복수가 시작되고 상대 가문의 누군가를 '반드시' 죽여야만 한다.

 

"한 남자는 대문을 두드린 뒤, 문간에서 사람을 부르면서 하룻밤 신세를 지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관습에 따라 식구들은 그를 집안으로 들이고 음식을 내주고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으며, 관례에 따라 아침 일찍 가족 중의 남자, 할아버지의 막냇동생이 마을 어귀까지 손님을 배웅했다. 그런데 손님과 헤어지자마자 갑자기 총성이 울렸다. 카눈에 의하면, 누군가가 손님을 배웅하러 나갔는데 손님이 면전에서 죽었다면, 그가 손님을 위해 복수할 의무가 있었다. 반대로 이미 등을 돌아선 뒤에 쓰러졌다면 그런 의무를 지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시신의 방향이 문제였다. 낯선 남자가 땅바닥에 대고 얼굴을 마을로 향한 채 쓰러져 있었기에, 마을을 벗어나지 않은 이상 베리샤가가 이제 그를 위한 복수의 의무를 져야 했다. 그리하여 베리샤가 사람들은 크리예키크가와 원수지간이 되었다. 낯선 나그네가 그의 집 대문을 두드렸기 때문이었다." _p.39

 

『부서진 사월』의 베리샤家의 그조르그는 할아버지 대 방문한 손님을 대신해 핏값을 회수할 차례가 되었다. 그 사이 베리샤家에서 죽은 자는 마흔네 명이었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복수가 이어져 내려온 오랜 세월 동안 증오심은 식어버렸고 의무만이 남았을 뿐이다. 치욕은 오직 관습법에서만 출구를 찾을 수 있다고 관습법은 규정하고 있었다. 크리예키크가의 일족 중 한 명을 죽이는 일만이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었다. 피의 회수를 지연한다면 사람들은 그와 그의 가족에게 다리 아래로 커피를 건네기 시작할 것이다. 카눈의 관점에서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아버지는 그에게 형의 복수를 하라고 명령하면서, 친지에게 치욕을 안겨주지 않도록, 누구의 입에서도 그조르그 베리샤가 자기 형을 죽인 자를 노상 강도처럼 죽였다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그 자를 처치할 때 반드시 따라야 할 법칙들을 사전에 깊이 숙지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총을 쏘기 직전 경고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텐데! 시신을 반듯하게 눕히고 머리에 소총을 기대놓는 것도 잊지 않으면 좋으련만." _p.32

 

서로를 죽고 죽여야만 하는 이 부조리한 복수극이 어느 시대의 이야기일까? 대부분의 현대 국가에서는 개인의 사적 복수가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관습과 전통에 따라 복수를 해야만 하는 운명은 수 세기 전의 일이 아닐까 짐작했지만, 믿을 수 없게도 알바니아에서는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일이다. 2009년 방송된 다큐를 찾아보았다. 여전히 카눈에 의해 수만 명이 죽고, 복수를 피해 수많은 가족들이 은둔해 살아가고 있었다. 피로써 피의 대가를 회수하고, 다시 그 피로써 피의 빚을 갚는 복수의 방식으로 질서를 세운 그들에게 삶은 무엇일까.

 

그조르그는 3월 17일, 제프 크리예키크를 쏘았다. 그리고 중재인들에 의해 크리예키크가에서는 삼십 일간의 대 베사(약속)를 받아들여 휴전이 선언되었다. 총알 한 발이 그의 삶을 두 동강 내버린 것이다. 한편에는 살아온 이십육 년의 삶이 있고, 반대편에는 3월 17일에 시작되어 4월 17일에 끝날 삼십 일이 놓여 있다. 죽음의 4월, 그에게 더 이상 5월은 오지 않을 것이다. 남은 삼십 일간 무엇을 할 것인가.

 

"햄릿은 분명한 동기에 의해 살인으로 내몰렸다고 말해야겠지. 그런데 그는 그의 외부에 존재하는 동기, 때로는 그의 시대 너머에 존재하는 동기에 휘말린 거야." _p.134

 

이 작품은 핏값을 회수해야만 하는 주인공 그조르그 외에도 관습법에 대해 글을 쓰는 베시안, 핏값의 세금을 거둬들이는 피 관리인, 분쟁이 있을 때 중재하는 카눈 해석가라는 인물들을 통해 알바니아의 관습법인 '카눈'을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태어난 순간부터 정해진 운명처럼 복수를 하고, 복수에 의해 죽어야 하는 운명의 부조리함. 자유로운 것 같지만 태어난 순간부터 누구에게나 부여된 인간이 지닌 부조리함이 극대화된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만 같다.

 

이스마일 카다레, 알바니아, 카눈 그 어떤 것도 낯설지 않은 것이 없지만, 매해 노벨문학상 후보에 거론되는 이유를 이 한 작품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기에 많은 분들이 꼭 보셨으면 하는 작품이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s****i 2022.10.17. 신고 공감 2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