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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보다 재미있는 불교 공부’라는 부제를 가진 ‘도쿄대학 불교학과’는 소설적 구성과 사실적 구성에 두루 의거한 불교 책이다. 이 책의 저자는 대학 졸업 후 자칭 백수 생활을 하던 서른 한 살의 나이에 4년 장학생으로 천태종 계열의 금강대학교에 입학한 경력을 지닌 정상교라는 인물이다. 이 과정을 마친 이후 그는 도쿄대학 불교학과에 입학해 문헌학적 고찰이라는 순탄치 않은 여정을 밟고 있다.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듯 조계종 계열의 동국대학교, 진각종 계열의 위덕대학교, 천태종 계열의 금강대학교, 원불교 계열의 원광대학교 등만이 4년제 정규 대학에 불교학과를 두고 있을 정도로 우리의 불교 인프라는 열악한 형편이다. 이 책의 저자 정상교는 남다른 사연이 있어 도쿄대학 불교학과를 택했다. 저자는 자신의 금강대학교 행을 죽도 밥도 아니었던 20대의 대학 시절을 공짜 유학을 통해 보상받으려는 현실 도피적 심리에 따른 것이라고 말한다.(117 페이지) 저자는 말한다. 자신의 불교 공부는 수행(修行)이 주는 법락(法樂)을 알기 위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세속적인 이유에서라고.(113 페이지) 유학비 지원이라는 조건을 보고 택한 금강대학교에서 저자는 같은 과 학생으로부터 불교 문헌학에 대해 듣게 된다. “불교학이라는 것은 원래 유럽 학자들이 만든 학문이라서 불교학 공부하려면 독일이나 불교논리학 연구에 강한 오스트리아 빈 대학교, 아니면 그런 유럽의 학풍을 이어받은 일본으로 가도 되고...”(122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서구의 지배자들이 인도 고전 언어인 산스크리트 언어로 된 문헌을 발굴, 연구하면서 시작된 문헌학의 일종이 인도학 - 불교학이다.(77 페이지) 그렇게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택한 저자의 불교학 공부가 ‘도쿄대학 불교학과’라는 결실로 우리 앞에 주어진 것은 역설적인 선물이라 할 수 있다. 그 만큼 이 책은 기존의 불교계가 모르고 있던 또는 포괄하지 못하고 있던 사안(事案)에 대해 깨달음을 주는 빛나는 책이다. 우리가 과학이나 예술, 그리고 인문사회학 등은 말할 것도 없이 종교에서 얻는 깨달음이란 우리가 그간 취해온 인식의 허점을 밝은 불 아래에서 비춰본다는 의미를 지닌 어떤 것이라 할 수 있다. 저자가 내게 준 선물 같은 진실은 이렇다... 1) 우리가 소승이라 부르는 집단이 당시 인도에서 주류 불교였고 대승이라 불린 세력이 비주류이자 소수파였다는 사실(29 페이지), 2) 대승불교 사상의 양대 산맥인 중관(中觀) 사상과 유식(唯識) 사상은 소승불교가 이룩한 체계화된 이론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는 사실(33, 34 페이지), 3) 12 세기 말 이슬람의 침입으로 인도 대륙에서 불교가 완전히 소멸했기 때문에 현재 인도어 계통의 불교 경전은 극소수만 발견되고 있다. 그러므로 만약 중국으로 전해진 불교가 중국인들에 의해 그들의 불교 이해의 체계에 따라 번역, 정리되지 않았다면 불교의 가르침은 인도와 마찬가지로 소멸되는 운명에 처했을지 모른다는 사실(43, 44 페이지.. 물론 불교가 인도에서 사라져 간 것은 이슬람 세력의 침공 외에 불교 내부적 요인 때문이기도 하다. 불교 내부의 문제란 불교가 타력 신앙적 행태를 보임으로써 힌두교화했다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62 페이지), 4) 불교가 인도에서 탄생해 중국으로 전파되었다는 상식은 옳지 않다. 초기 중국 불교의 기초를 만들어준 이들은 인도인이 아니라 서역인 즉 현재의 이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신장 위구르 등 중앙아시아 불교도들이라는 것이다(133 페이지), 5) 불교란 인도를 중심으로 하는 아리아인의 문명과 헬레니즘 문명이 교섭한 바탕에 이웃한 페르시아 문명이 함께 전해진 위에 그들 문화와는 성격이 완전히 다른 중국 문명이 결합된, 주요 세계 고대 문명을 거의 모두 결합한 인류 고대 문명의 복합체적인 성격을 지닌 종교이다.(137 페이지), 6) 우리들은 항상 삼국시대의 선진적인 우리나라가 (미개한) 일본에 불교를 전해주었다고 되뇌지만 현재 우리나라 불교학은 일본 불교학의 학문적 성과 아래 강하게 묶여 있다.(148 페이지), 7) 인도학 - 불교학 연구는 유럽 제국주의의 아시아 침략과 뗄 수 없는 관계로 시작되었지만 아이러니칼하게 그 결과 중요한 고사본(古寫本)들이 보존되게 되었다는 사실(201 페이지) 등....중국으로 전해진 불교가 중국인들에 의해 그들의 불교 이해의 체계에 따라 번역, 정리되지 않았다면 불교의 가르침은 인도와 마찬가지로 소멸되는 운명에 처했을지 모른다는 지적은 나에게 하나의 반성 거리로 다가온다. 나에게는 특별한 이유 없이 중국을 싫어하는 나쁜 버릇이 있는데 저자의 지적을 수용한다면 오히려 불교의 명맥을 이은 중국에 대해 감사함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저자에 의하면 인도의 불교도들은 깊은 선정(禪定) 상태에 들어가면 육체가 죽음과 유사한 상태에 놓이지만 그로부터 깨어나면 육체가 죽은 상태임에도 식(識)의 활동만은 여전히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 식(識)을 알라야식으로 명명했다.(131 페이지) 저자는 알라야식을 프로이트의 무의식,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컴퓨터가 입력한 가상현실 등에 비유하지만 단순 비교는 어렵다고 말한다.(160 페이지) ‘도쿄대학 불교학과’를 통해 우리는 지관(止觀)의 의미에 대해 새롭게 알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지(止)란 마음의 파도를 잠재우는 것을 말하고 관(觀)이란 무아, 무상, 일체 개고의 진리를 통찰하는 것을 의미한다.(161, 162 페이지) 또한 여러 삼장법사(三藏法師) 가운데 쿠마라지바, 진제(眞諦) 삼장 법사, 불교 삼장법사 등을 제외한 현장(玄奘) 삼장법사만이 토종 중국인이라는 사실(256, 257 페이지) 등을 알게 된다. 그러나 가장 치열한 것으로 꼽을 것은 수(隋) 나라 승려 담천(曇遷: 542 - 607)이 ‘망시비론(亡是非論)’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만일 어떤 이가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을 나쁜 것이라 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 것을 바른 것이라 여긴다면 그것은 결국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을 비난하는 것이므로 여전히 옳고 그름을 따지는 해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60 페이지) 이는 불교가 신비주의적인 것도 도피적인 것도 허무주의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뜻한다. 저자는 이를 시비를 논하고 투쟁하는 이 세속에서 진실한 붓다의 가르침을 찾을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한다. ‘도쿄대학 불교학과’의 ‘소설보다 재미있는 불교 공부’라는 부제는 저자가 도쿄대학 불교학과를 택하게 되기까지 자신이 걸어온 길과 영향관계 등을 소설 형식으로 풀어놓았음을 알게 하는 이름이다. 물론 드라마틱한 상황을 리얼하게 보여주었음에서 기인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그 대표적 사례가 도쿄대학 불교학과의 학문 분위기 또는 연구 풍토이다. 저자가 전하는 도쿄대학의 원전과 언어(산스크리트어, 티베트어, 팔리어, 한문 원전 등)에 대한 철저하고 치밀한 분석은 실감있게 다가온다. “단어 하나 하나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있어야 당시 인도의 불교도들이 왜 그런 사상을 낳았는지 알 수 있지 이런 과정을 생략한 채 한문 번역어인 연기(緣起)나 공(空)만 가지고는 원어의 뜻을 알기 어려워집니다.“(294 페이지)란 불교 논리학 박사인 이시다씨의 가르침은 그대로 지금 이곳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특히 누군가의 번역이 맞는지 틀린지도 모르면서 사상을 논하는 것은 텍스트의 내용과 상관 없는 개인적 감상문일 뿐(291 페이지)이라는 말은 일반인인 나에게까지도 반성을 촉구하는 죽비(竹篦)의 일격으로 다가온다. 학부생에게 집중포화의 질문 세례를 가하는 그들은 틀리는 것보다 해석 근거를 공부하지 않고 스터디에 참석하는 것을 가장 나쁜 학습 태도임을 일깨운다.(294 페이지) 저자의 책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다. 나가르주나의 ‘중론(中論)’을 설명하며 저자는 ‘바람이 분다’는 말에서 바람이라는 단어에는 이미 분다는 뜻이 담겨 있으니 불고 있는 바람이 분다는 뜻이 되어 중복의 오류에 빠진 것이라 말한다.(285 페이지) 하지만 바람이 분다는 표현을 공기의 흐름이 있다고 말하면 어떨까? 그런가 하면 소승불교라는 몇 군데의 표현(쿠마라지바는 소승불교에 출가하였다가...: 278 페이지, 나가르주나는 불교에 출가하여 처음에는 소승불교를 배웠으나..: 301 페이지 등)은 거슬린다. 그것은 저자가 소승을 대승의 뿌리라는 의미로 칭한 것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승불교가 주류를 이룬 동아시아에서는 이들 부파(아비다르마)를 소승불교라 낮춰불렀지만..”(283 페이지)이란 말을 함으로써 소승은 그들 부파가 스스로를 부른 이름이 아니라 자칭 대승이 부른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적시(摘示)했음에도 그런 말을 한 것 때문이기도 하다. 불교를 배우면서 늘 느끼는 것들 중 하나는 극단에서 벗어난 중도의 실천 수행을 할 것을 가르친, 모든 생은 멸진(滅盡)되었고 고귀한 삶을 살았고 해야 할 일을 다 이루었으니 다음 생에 존재할 그 어떤 조건 지어짐도 남아 있지 않다고 선언한, 계율과 자신을 등불로 삼아 무상한 현상을 무상이라 통찰하며 스스로를 밝히며 나아가라, 게으름 없이 나아가라고 설법하신 붓다의 위대함이다. 그것은 결국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타력 불교가 아닌 자력 불교이고, 신비와 허무 등에 치우친 불교가 아닌 논리적이고 중도적인 불교임을 알게 하는 선언이다. 저자의 다음 책이 기대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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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리뷰와 같은 불교 지식은 없어, 이 책에서 전하고자 하는 지식에 대해서는 뭐라고 평을 할 수가 없다.) 다만 내가 이 책에서 얻은 뜻 밖의 수확이라면, 잡념에 대한 아주 생생한 묘사를 만났다는 것이다... 약간은 추상적이고 허공에 뜬 듯한 개념이었던 잡념이라는 것이 눈 앞에 생생히 보이게 되었다.... 욕쟁이 할머니가 장맛비 개똥 이야기하듯이 쉬운말로 잡념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 실상 그 이후의 책 내용이라면 개인적인 내용이 1/3 농담이 1/3 지식이 1/3이라 설렁설렁 넘겨 읽기는 했지만, 위 장면 하나로 대만족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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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내용상으로는 크게 건질게 없지만 정말로 정말로 많이 웃었다. 모처럼 웃어볼 분은 한번 일독을 권하는 바입니다.
이책은 내용상으로는 크게 건질게 없지만 정말로 정말로 많이 웃었다. 모처럼 웃어볼 분은 한번 일독을 권하는 바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