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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이란 그렇다,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다. -프롤로그(10p)
비밀이다. 『소소한 풍경』의 저자 박범신이 말했다. 그랬다. 한 남자와 두 여자의 인생, 사랑, 저마다 삶에 임하는 자세는 충분히 비밀스러웠고 비밀이어야 했으며 비밀로 남아야 마땅했다. 시작부터 기존의 그의 작품과는 다른 인상을 받았다. 애써 이야기의 원형을 찾아가지 않기에 자유롭게 날갯짓하는 영혼들의 시시콜콜함, 같았다고 해야 할까. 누구의 인생을 두고 시시콜콜하다 말하는 건 실례가 될지 모르겠으나, 기실 그렇지 아니한가. 다른 누구보다 자신의 인생을 우위에 두는 것은 자명한 일이며 그런 본인의 인생에 비하면 타인의 인생은 시시콜콜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게 된다. 사실 나는 그들의 끝을 보고 싶었다. 어쩌면 그들의 발화점, 그러니까 태초에 잉태된 채로의 진실 낱낱을 알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한 남자와 두 여자, 한 여자와 한 남자 그리고 다른 여자, ㄱ, ㄴ, ㄷ 이라고 명명된 그들 각자의 인생을 시시콜콜 드러내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관심 없는 척, 실은 지대한 호기심을 숨죽인 태연함으로 가장한 채 말이다. 세 남녀의 사랑은 이해라는 차원을 넘어선다. 그리고 그 뒤에는 가시밭길 같았던 각자의 삶이 자리한다. 소설 속의 일차적 화자인 ㄱ, 그녀의 아버지가 남긴 선인장 가시의 그것처럼, 살짝 스치면 따끔하지만 깊숙이 누르게 되면 핏방울이 맺히게 되는 게 우리가 타인의 인생을 훔쳐보려 하는 심리와 묘하게 닮아있다. 그래서 사람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가 존재한다. 아니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다. 상처받아 핏방울이 맺히지 않을 적당한 거리, 삶의 면면을 훔쳐보기 할수록 사연을 내포한 가시들에 찔리고 상처 입는 건 누구나 비슷하다. 삶이란 그렇게 가시와 상처, 고름과 핏방울로 만들어진 존재다. 때로 삶은 독배를 마시는 기분 같을 때가 있다. 이를테면 마지못해 선택된 길과 예상하지 못한 벼랑 끝을 만났을 때이다. 순간이 지나고 나면 안도하지만 삶이 계속되는 한 독배를 든 항해는 끝났으나 끝난 게 아닌 게 된다. 삶뿐 아니라 사랑도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면 세상은 완전한 종결을 바라면서 바라지 않는 것 투성이들로 가득한 것 같다.
그들의 사랑은 '덩어리'였다. '덩어리'가 된 채로 서로를 탐했고 '덩어리'로써 각자의 깊은 상처를 어루만졌으면 오직 '덩어리'로써 서로의 존재가치가 성립되었다, 고 생각한다. 불온한 덩어리가 아니다. 작품에서처럼 신성시할 만큼은 아니지만 어찌 되었든 그들은 함께하는 순간을 기점으로 '덩어리'가 될 운명이었으며 서로가 생각하듯이 결코 난잡하거나 불온하거나 방탕한 시선으로 보이지 않는 운명 같은 실로 연결돼있다. 태초부터 죽음을 예견했던 것처럼 삶을 살아가고 자신의 삶을 타인에게 위탁했다가 비로소 찾아오는 과정을 거치고 온전한 인격으로 거듭나기 위해 어디서든 살아가려고 발악하는 이들의 합주는 그래서 구슬프다. 풍경은 몸짓에 불과하다는 말,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다. 그들 스스로 풍경이 되어 삶을 채색하고 덧칠하며 종래에는 깨끗한 백지를 남긴 것과 같이 무릇 인간의 삶이란 한 폭의 캔버스에 무수히 많은 점과 선을 그리다가 백지화되는 것과 다름없지 않던가. 이제, 웬만한 삶의 우여곡절을 보아서는 놀랍지 않다. 삶의 긴 항해가 선사한 선물이라면 선물이고 아니라면 또 아닌 인생의 진리란 그런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들의 삶이 아주 놀랍지도 않았고 썩 공감되는 것도 아니었지만 반감을 갖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소소한 풍경이다.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된다. 그들(혹은 저자) 또한 이해받고자 했던 게 아니니까. 예상하지 못한 반전은 어디든 잔류해있다.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ㄱ이 세탁기 옆 틈새로 보았던 비밀의 무게처럼. 딱 그 정도 크기로 삶을 뒤흔들고는 한다. 무어 그리 대수란 말인가. 소설의 소재가 주는 외설스러움, 일반적이지 않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우리에게 저자가 말하는 것 같다. 『소소한 풍경』이란, 살면서 휙휙 지나쳐가는 흔한 풍경에 지나지 않는, 까마득히 잊어버렸다가 불현듯 환기할 때도 있는 그런 삶의 지점을 포착한 것이다.
비밀이 없는 삶은 황막하다. 각자의 내면에 숨겨진 비밀, 그리고 이어진 관계에 따른 비밀, 을 공유하는 사이는 비밀의 틈새만큼 또 다른 비밀을 잉태하게 된다. ㄱ, ㄴ, ㄷ, 이 우습고도 의아한 초성체의 '이름'을 가진 자들. 그들 사이에도 비밀이 있었다. 지켜주고자 했기에 서로를 보듬어 안았다. 이름은 그 사람을 나타내는 징표임에도 이름이 아닌 익명으로 남기를 바랐던 이들이다. 그런 삶이 비루해 보이지 않았던 건 어디까지나 자의에 의한 '선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신기한 건 이들 모두가 가족으로부터 떠안은 상처로 이루어졌다는 데 있다. 오빠와 부모를 차례로 잃고 이른 결혼으로 상처를 갈무리하려 했던 ㄱ, 마찬가지로 형과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세상을 방랑하게 된 ㄴ, 진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오빠와 성적 학대의 가해자가 양부가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여 떠도는 신세가 된 ㄷ까지. 이렇듯 상처로 점철된 이들이 지향할 수 있는 건 그 가시를 모조리 뽑아(불가능에 가까우므로)버리는 게 아니라 본연의 자신을 이해하고 감싸줄 말이 필요없는 어떤 사이다. 그들 각자는 서로에게 그런 존재로 남았고 말이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말'보다 '육체'와 '정신'의 공유가 먼저였고 덕분에 세상에 진 빚과 같은 상처를 아낌없이 소진하고 떠나가는 듯했다. 떠난 자와 남은 자, 생의 빚을 청산하고 홀가분해진 자와 계속해서 갚아나갈 자들의 심해 사이에서 한바탕 유영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이런 삶도 있구나, 가 되었고 이런 아픈 상처를 가진 자도 위무 받을 수 있구나, 같은 생각이 드는 한편 선뜩하지만 애달픈 삶의 영속성을 슬쩍 엿본 것 같은 슬픔의 무게도 컸다. 작가는 그들을 기억에서 잊으라 했지만 쉽게 잊기 어려운 것은 그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 또한 그의 이야기 같았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이들은 대개 현실과 이상의 기반에 놓여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장한 자신의 이야기를 설파하기도 한다. 그런 느낌이었다. 작품관, 인생관, 사랑관, 등등. 노작가의 흠뻑 젖은 감수성을 몸소 체험한 것도 같았고, 누구나 가시로 자신을 꽁꽁 싸매고 있지만 속살은 여리디여린 인간일 뿐이라는 진실도 이 책을 읽고 난 뒤의 불편함이 주는 진실이다.
풍경은 말이 없다. 그저 몸짓으로 자신의 삶을 전할 뿐. 인간도 풍경 속에 속한 하나의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 ㄱ, ㄴ, ㄷ, 그들처럼. 새삼 빽빽하게 우거진 숲을 다시 보게 된다. 너희는 어떤 사연을 갖고 오랜 시간 그곳에 뿌리내리고 있니, 같은 대답 없는 질문을 무수히 내 속에 갈무리한 채. 그렇게 풍경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고고하게 흘러가는 듯하다. 다만, 비밀이라는 아주 작은 틈새는 남겨놓은 채, 누군가 틈새의 기미를 알아챌 때 진지하게 그러나 소소하게 뒤편의 숨겨진 이야기를 털어놓으려는 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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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체의 탄생은 시원의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가고 있음을 내포한다. 생떼 같은 자식을 떠나보낸 뒤 일렁이는 검은 물결을 바라보며 서 있는 유족들의 아픔은 참척의 사고로 피붙이를 떠나보낸 시간 속으로 회귀하여 비통함을 더한다. 아직은 살아갈 날이 많이 남았다고 여겼던 자식들이 잠재적 가능성을 채 열어 보이기도 전에 물속에 갇혀 차가운 주검으로 화한 일은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도 멍울처럼 남아 있다. 기적을 바라며 치성으로 기도하던 이들의 마음이 무색할 정도로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는 인생의 단면을 표면화한다. 예기치 않은 죽음으로 불완전해진 가정의 구성원으로 살아남은 자들은 결핍을 숙명처럼 끌어안고 일상을 보내야 하는 애달픔이 곳곳에 자리한다.
시멘트로 뜬 데스마스크는 무의미한 존재를 의미 있는 존재로 자리하게 만드는 감수성의 촉수로 소소에서의 풍경을 불러내었다. 여명의 시간 우물에 두레박을 던져 퍼 올린 물로 정화수를 바치고 치성으로 기도하던 어머니의 굽은 등이 그녀가 쓴 소설 ‘우물’에서 떠오른다. 상수도가 보편화되기 전 우물물은 공동체의 생명을 지켜주는 젖줄로 생명을 길러내는 힘이 있었다. 퍼내도 마르지 않는 우물은 맑은 정령이 깃들어 있는 물로 생명체의 발아를 돕는 신령스러움이 내재한다. 대학에서 스승과 제자로 만났던 인연을 거슬러 지나가버린 시간을 붙잡고 그동안의 일화를 더듬어가는 길은 묵혀두었던 과거를 환기하여 현재적 시간으로 풀어내 유랑하며 살았던 한 영혼의 넋을 달래는 진혼곡이 될는지도 모르겠다.
정해진 궤도를 걸으며 착실히 인생을 살아가려고 마음먹지만 신념을 따르며 진솔하게 살아가는 일이 쉽지 않음을 절감할 때 변방에서 마음을 붙이고 살아가는 인물들의 표면적 삶은 치명상을 감내하며 사는 것처럼 보인다. 각박한 인생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는 변화무쌍한 삶 속에서 유동적인 형태로 꼴바꿈을 한다. 선인장의 잎이 제 육체를 온전히 지키기 위해 가시로 무장하여 공기 중에 포함된 미량의 수분을 흡수하는 물 공급 장치로써 생명력을 발휘하듯 주인공의 아버지는 선인장을 동지처럼 여기고 살다 이승을 떴다. 오빠와 어머니를 연달아 잃고 홀로 남은 'ㄱ'은 통렬한 아픔을 상쇄하려는 듯 문장에 매달렸다. 순백의 영혼으로 내재하는 오빠의 부재와 우연성에 의미를 부여하며 함께 살게 된 첫 남자와의 결혼이 종속 관계를 강요하는 욕망의 덫으로 변질되었을 때 'ㄱ'은 고립된 섬으로 화하고 말았다.
태양이 없는 곳에서 태양을 창조할 수 있는 게 사랑이라는 것을 믿었던 감상적인 순정에 앙갚음을 당한 'ㄱ'은 결혼 생활을 청산한 뒤, 지난한 아픔을 끌어안고 흐르는 강과 태양 아래 알알이 영글어가는 포도밭이 있는 소소로 내려온다. 혼자 살던 'ㄱ'은 물구나무서기를 계속 하던 남자 'ㄴ' 과 함께 삶으로써 둘이 공조하는 생활의 즐거움을 조금씩 찾아갔다. 함께 살면서도 따로 살고 있는 것 같고 따로 살면서도 함께 사는 것 같은 기이한 일상은 서로에게 뻗어 있는 비밀을 들추지 않는 암묵적인 약속으로 이어졌다. 간신히 국경을 넘은 탈북자 처녀 'ㄷ'이 여장을 풀어 베일에 가려진 셋이 함께 생활하며 기이한 동거는 시작되었다.
부모와 형제의 죽음을 목도하며 홀로 남은 이들이 겪는 정신적 아픔과 외상은 각자의 삶에 기생하는 숙주처럼 자리하여 한 덩어리로 살아 숨 쉬는 기틀을 마련해주었다. 우물을 파기 위해 이 땅에 온 것처럼 삽 한 자루로 용출하는 물을 선물한 'ㄴ' 은 생명의 젖줄 속으로 빨려 들어가 유랑하며 살아왔던 지난한 삶을 마감했다.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되어 같은 파동으로 정을 통했던 'ㄱ'과 'ㄴ'은 서로를 갈망하면서도 속박하지 않는 사랑을 보임으로써 'ㄷ'과도 사랑을 나누며 열락의 세계로 빠져들며 삼각관계의 불협화음보다는 셋이 한 덩어리로 연대하는 원으로 자리하였다. 한 침대에서 둘이 정을 통하는 광경을 바라보며 또 다른 소외감에 사로잡히면서도 둘을 시기하거나 원망하기보다는 함께 덩어리를 이루기를 바랐던 그들이었다.
1980년 5월 계엄군의 무자비한 횡포로 다정했던 형을 잃고 연이어 아버지를 땅에 묻어야 했던 아픔은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며 유랑하는 생활에 익숙해진 'ㄴ'에게 밴드에서의 베이스 기타 연주는 새로운 삶의 영역을 확장해주는 탈출구였다. 조지해리슨을 동경하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음악의 완결성을 위해 역할을 다하고 싶었던 'ㄴ'은 동료의 오해로 음악을 접어야 했고 서서히 숨구멍을 죄는 일들로 살아있는 시간을 옥죄며 우물에서 물이 솟구쳐 오르는 날 지난한 생을 마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ㄴ'의 죽음을 둘러싼 수사는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 유예해 둔 채로 미완의 숙제로 남아 이가 빠진 동그라미가 다른 조각들을 찾아 나서는 행보로 이어진다. 'ㄴ'이 죽고 집을 나간 'ㄷ'을 찾은 'ㄱ'은 의지가지없는 영혼들이 서로를 포용하며 살았던 소소에서의 시간은 1:1의 사랑을 넘어서는 황홀함을 선물했다. 황홀함의 순간도 생명이 다하는 찰나 저마다 품고 살아 온 가슴 속 가시를 빼내지 못한 채 고집멸도(苦集滅道)로 향하는 길 위를 뚜벅뚜벅 걸어가는 이의 환영을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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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 ‘ㄱ’에게 있어서 전직(前職) 대학교수이자 소설가인 ‘나’는 스승이기보다는 키다리 아저씨였다. 촌에서 막 올라서 서울의 복잡하고 바쁜 삶에 적응하지 못한 ‘ㄱ’에게 편안함과 믿음을 안겨주는 그런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학시절 그녀의 곁에는 손가락이 기다란 하얀 손의 소유자인 ‘나’가 아닌 ‘남자1’이 있었다. “텃밭에서 지상 위로 얼굴을 내민 채 이슬비에 젖는 무의 밑동 같은1)” 그는 대학 4년간 그리고 졸업 후 결혼식을 올린 후 1년, 모두 5년간의 시간을 공유했던 그녀의 남자였다. 불행히도 섬유회사 회장님의 아들로 자라온 ‘남자1’은 뒷정리를 할 줄 몰랐다. 어쩌면 그에게 있어서 결혼은 자신의 뒷정리를 대신해 줄 하녀를 구하는 행위였을지도 모른다. 그랬기에 그는 그녀의 ‘유일한’ 주인이 되고 싶어했다. 결국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1년 만에 깨어지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혼인신고를 하지 않아 법적으로는 두 사람 모두 호적이 깨끗하다는 점이었다. 한 남자 어느 늦가을, ‘ㄴ’은 낡은 다세대주택에서 쫓겨난 채 그 외벽에 기대어 물구나무서고 있었다. 오직 그것만이 그가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일인 것처럼. 이것을 바라 본 ‘ㄱ’은 마치 버려진 고양이를 주워오듯이 ‘ㄴ’을 데려와 같이 살게 되었다. ‘ㄴ’이 전(前) 남편인 ‘남자1’과는 달리 사랑이라는 이름의 약탈행위를 하지 않는, 아니 할 수 없는 동숙자(同宿者)여서 그런 것일까? 혼자 사는 것이 좋다고 여기던 ‘ㄱ’도 “둘이 사는데 혼자 만약 이야기가 이렇게만 흘러갔다면 <소소한 풍경>은 흔한 로맨스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여자 여기서 등장한 것이 21살의 조선족 여자 ‘ㄷ’이다. 눈발이 히긋히긋 날리는 저녁에 그녀는 “키는 작고 눈은 동그랗고 어깨는 반듯하게 벌어진, 이야기 속의 소년 같은 얼굴3)”로 제 몸뚱이만한 가방을 끌고 셋방을 구하기 위해 ‘ㄱ’의 집을 방문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그녀도 ‘ㄱ’과 ‘ㄴ’의 기묘한 동거에 합류하였다. 그렇게 세 사람은 한 덩어리로 뭉쳐져 살아갔다. 사실 1남 2녀라는 조합은 한 남자가 두 여자 사이에서 방황하거나, 한 여자가 남자와 다른 여자 사이에서 번민하는 형태의 갈등을 빚어내기 쉬운 조합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ㄱ’이 여성인 ‘ㄷ’을 남자로 인식하는 바람에 이들은 독특한 사랑 이야기를 엮어나갔다. 이들의 사랑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리가 흔히 완전한 결혼제도라고 생각하는, 1부(夫) 1처(妻) 제도는 둘이었기에 좋은 관계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다른 관점에서 보면, “1대 1의 관계란 독점적 욕망을 전제로 삼게 마련이라면서, 그것이 사랑일지라도, 모든 존재는 독점을 지속적으로 허용하지 않으므로 그것은 불가능한 욕망이며, 그렇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상처를 불러올 뿐이거나, 그게 아니면 사랑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폭력성을 감춘 가짜 평화로 관계를 유지하게 될 뿐4)”이라는 ‘ㄴ’의 말을 긍정하게 된다. 그렇기에 ‘ㄴ’이 “셋이었기 때문에, 대체로 더 좋았다고 나는 기억해요. 셋으로 삼각형을 이룬 게 아니었어요. 셋으로부터 확장되어 우리가 마침내 하나의 원을 이루었다고 나는 생각해요. 역동적이고 다정한 강강술래 같은 거요. 둘이선 절대로 원형을 만들 수 없잖아요. 셋이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한 원형이지요.5)”라고 말한 것이 귀에 닿는다. 각각 상처 입은 사람들이었기에 모여서 하나의 원을 만들어 서로의 부족함과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었다. 하지만 ‘ㄴ’이 죽음으로써 그들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의 원(圓)은 깨어지고 서로 떠날 수 밖에 없었다. 행복은 이렇게 작고 대수롭지 않은, 소소한 것에서 시작해서 끝나는 것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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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이었다. 한참 열애를 하던 친구 녀석이 어느 날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고 했다. 그가 사귀던 여자 친구와는 나도 아는 사이였기에 조금은 의아했다. 얼굴도 예쁘고, 착한 아이였다. 그래서 친구에게 왜 헤어졌는지 물었던 것 같다. 그때 친구가 했던 대답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단 한마디뿐이었다. 그 말을 듣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더 묻지말라는 의미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 둘 사이에 있었을 변화를 내가 무슨 수로 짐작이라도 할 수 있었겠는가. 두 남녀의 사랑과 이별에 관한 한 주위에서 해 줄 수 있는 이야기가 그리 많지 않다. 그들이 두 사람만의 내밀한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얘기해줄리도 만무하니까. 거기에 상대가 괜찮은 애인데 왜 헤어지려는 것이냐, 다시 생각해보라는 등의 틀에 박힌 말들은 당사자에게는 아무런 의미없는 이야기일뿐이다. 전지적 관점에서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연애 소설의 독자입장이라도 될 수 있으면 몰라도.
이번 달엔 좀 유별난 사랑 이야기들을 만났다. 그 중 하나가 이 책 『소소한 풍경』에서 만난 이야기다. 아무리 지루함이 일상이 된 이들에게도 누군가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는 자극적인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만큼 남녀간의 사랑이야기에는 우리 두뇌 속 한 켠에 전기적인 자극을 주는 강력한 힘이 있다. 특히 자신이 경험해 보거나 상상하지 못했던 평범하지 않은 사랑 이야기는 그 속에 몰입하게 하는 힘이 있다. 그 몰입 덕분에 명료하던 정신이, 때로는 생각지도 못한 자극 때문에 온몸이 몽롱해지는 경험까지 하게 한다. 오직 두 사람만 간직하고 있어야할 내밀함 속에 은밀히 함께 하고 있다는 설레임 같은 것이라고 할까? 그런 사랑에 대한 갈망이라고 할까? 그래서 평범한 스토리를 담은 사랑 이야기라도 독자를 끌어들이는 마법과 같은 힘을 지니는지 모르겠다. 하물며 금기로 여겨지는 사랑 이야기라면 어떨까? 처음엔 혼란스럽다가도 이런 사랑의 현실적인 개연성이 느껴진다면 차분하게 상황을 이해하고 싶어질 것 같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 이야기처럼.
저 유명한 소설 안나카레니나의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 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는 문장에 사랑 이야기를 대입해 보면 이렇다. '행복한 사랑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사랑은 모두 제 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라고. '두 사람이 결혼해서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란 동화 속 엔딩은 진부하게 느껴지고 천편일률적이다. 결혼이 사랑의 완성이란 믿음은 성인이 되면 자연 벗어버리는 동심과 같은 것들 중 하나이다. 어쩌면 결혼하는 커플만큼이나 수 많은 불행한 사랑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렇게 얘기하면 사랑의 종착점이 모두 불행일거라고 단정해버리는 것 같다. 아마도 행복한 사랑 이야기보다 불행한 사랑의 이야기가 더 많이 회자되고, 관심을 받기 때문에 생긴 편견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의 이야기도 이런 생각에 무게를 더한다. 세상 모든 사랑이 다 그런게 아니라고 소설 속 누군가가 대변해 주었다면 좋았으련만.
소설의 독자가 아니라 소설 속 제3자가 되어 등장인물 ㄱ,ㄴ,ㄷ을 보면 이들은 단지 무분별한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는 존재들일뿐이다. 좀 더 가까이 지켜봤다고 해도 서로 사랑한다고 표현하지 않는 이들이 사랑하는 관계로 보일 이유가 없다. 표현하지 않는 사랑이, 육체적 관계만을 추구하는 사랑이 사랑일 수 없다고 단정짓고 마는 것이 평범한 우리다. 그래서 남녀 간의 사랑을 제3자의 시각에서 사랑인가 아닌가를 따지고 드는 것은 섣부른 판단일 수 밖에 없다. 누구도 두 사람의 내밀하고도 복잡한 감정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 각각의 사연을 가진 불행한 사랑은 두 사람 외엔 누구도 공감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니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 섣불리 판단하면 ㄱ,ㄴ,ㄷ의 몸짓은 단순히 몸짓일 뿐 누군가의 이름으로 다가오지 못하는 것이다. 처음 ㄱ,ㄴ,ㄷ이 끝까지 ㄱ,ㄴ.ㄷ일 수 밖에 없었다면 그들이 보여주는 자극적인 행위만으로 그들을 판단하려 들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의 삶에 완전히 공감하지 못하는 우리가 완전한 사랑을 꿈꾸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각자의 마음 속엔 각자가 꿈꾸는 사랑이 존재한다. 그래서 그대가 곁에 있어도 늘 그대가 그리운 것이다. 둘이 꿈꾸는 것이 아닌 혼자 꿈꾸는 사랑을 추구하다보면 어느 새 견고할 것만 같던 사랑에 균열이가고 상처가 된다. 우리가 믿고 있는 사랑이 철저히 이기적인 욕심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사랑이 상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이란 감정에만 충실하면 자기 자신에게만 충실한 사랑을 하게 된다. 혼자 하는 사랑이 가장 쉽고, 둘이 하는 사랑이 좀 더 어렵고, 셋이 하는 사랑은 가장 힘들고 어려울 수 밖에 없는 이유다. 반대로 이 책에서는 셋이 사니 진짜 좋고 둘이 사니 혼자일때보다 더 좋은 세사람의 이야기를 펼쳐보인다. 커플이라 하기엔 짝이 맞지 않는 세 사람.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진 세 사람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 한 덩어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를 두번 세번 생각하게 된다. 내가 속해 보고 싶은 소소한 풍경이길 은근히 기대라도 하듯 말이다.
죽음이 깃든 어둔 방이 만든 몸뚱아리 속 가시들 때문에 우리가 비로소 덩어리질 수 있었다는 것은 진즉부터 이해하고 있었던 일이다.
덩어리지는 데 필요한 것은 깊은 이해지 '정보화'에 따른 사실이 아니다._(P.2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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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어 번역소설을 읽다가 오랜만에 읽게 된 우리글 소설. 참으로 시원하게 들어오는 우리말. 귀가 트이지 않은 외국어 실력으로 긴 여행길에서 돌아와, 인천공항에 내렸을 때의 기분이라 해야 할까. 읽고 있는데도 문장과 단어가 귀에 들리는 것 같다. 엄청난 소통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작가 박범신은, 소소한 이야기라며 소소하지 않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비밀이라고 말하면서 세상의 관습을 따르지 않는 두여자와 한 남자의 이야기를. 선인장 가시처럼 촘촘하게 박힌 상처를 품은 세사람 ‘ㄱ’ ‘ㄴ’‘ㄷ’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규범은 상식적인 우리 세상과는 다르다.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주민등록 뒤 번호의 1과 2로 사람을 구획 짓는 것은 당신들의 세상에 있는 규범이지 내 규범이 아니다. 내밀한 관계에 주민등록증 번호의 1과 2는 내게 의미가 없다.> 남자'ㄴ'과 여자'ㄷ'은 여자‘ㄱ’의 집에 동숙하게 된다. 구소소 마을의 외딴집, 그들의 세상에서는 서로를 구별하지 않는다. 거저 ‘덩어리’져 있다. 안는다, 얽힌다, 는 그들 세계의 언어가 아니다. 상대가 없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의 모습, ‘덩어리’일 뿐이다. 작가는 주인공의 입을 통해 그들의 모습을 ‘덩어리’라 규정한다. 본문 P84 <‘섹스’가아니라 ‘덩어리’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다. 나-그는 때로 ‘덩어리’가 된다. 나-그사이의 정적, 나-그의 몸뚱어리 속 가시가 훼손되지 않도록 하자는데 암묵적인 동의를 전제한 ‘덩어리’ 되기였다고 생각한다. 소유하지 않고 덩어리를 이루는 법을 우리는 알고 있었으며, 그렇게 때문에 당연히, 덩어리로 인한 어떤 소음도 발생하지 않는다. 피차 생의 가시를 촘촘히 내장하고 있었으므로> 세 사람이 서로를 구별하지 않고 덩어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작가의 색다른 시선이다. 어쩌면 사회 현상을 예민하게 짚어 내고 있다고 봐야 할지도 모른다. TV에서 집을 나온 청소년들이 서로 하나처럼 똘똘 덩어리진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사회는 덩어리에 대해 부정적이다. 주인공들도 잘 알고 있다. 그들의 가시는 ‘덩어리’의 균형을 무너뜨린다. 그들의 ‘덩어리’도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본문 p304에 분리 불안에 놓인 그들의 이야기가 있다. <셋이서 포개져 물속에 앉아 있으면 시간은 정지된다. 그녀가 손을 뻗어 흔들리는 나의 수초를 쓰다듬는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얹고 있다. “더 큰 욕조가 필요해” 그녀가 말하고 “풀장?” 그가 반문한다. “풀장은 너무 넓어 싫어 아저씨랑 언니란 편히 몸을 맞대고 있을 정도가 좋아.” 시냇물처럼 셋이 함께 조잘대며 흘러가고 싶은 게 그녀의 진짜 소망이다. “고향집 앞 시냇물은 언제나 재잘 거리면서 노래했는데.” 서로 씻겨주거나 비누 거품을 내어 장난을 칠 때도 있다. 욕실 전체가 물바다가 된다. “욕조 밑에도 물길이 있네.” 욕조 아래의 물구멍 마개를 빼면 이별의 시작이다. 시시각각 우리의 몸이 물 밖으로 솟아나온다. 우리는 재빨리 분리된다. 일시적인 관계의 죽음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대가족에서 핵가족, 그리고 개별화 되어가는 우리사회에 새로운 형태의 관계가 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 아직까지 1대1관계(일부일처제)가 상식인 우리 사회에서는 이 관계는 어디까지나 음지다. 작가도 그걸 알고 있다. 인간의 고유한 기억, 고유한 상처 때문에 ‘덩어리’지기는, 결국 실패 한다. 그렇지만 사회는 남녀, 1대1의 관계만이 아닌 다른 형태의 인간관계가 존재하고 또 다른 인간관계가 만들어지고 있음을, 잊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소설에서 ‘덩어리’지기는 남녀 관계, 육체적 관계에서만 쓰였다. 그러나 시각을 넓혀, 사회가 이기심을 버리고 타인의 상처를 감싸주는 사회적 덩어리지기가 이루어진다면 ‘소소한 풍경’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닐 것이다. 소설 속에는 세 사람 외에 주인공 ’ㄱ’의 지도교수인 소설가가 등장한다. 가끔 ‘ㄱ’의 의지처가 되어주기도 하는. 그 소설가의 귓속에 곰팡이가 산다. 참을 수 없을 만큼 귀속을 가렵게 하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 가려움은 사라진다. <사랑이라니, 만약 아침 빛 영롱한 지금 이 물결 위에 백합꽃 한송이 가만히 흘러오는 걸 보았다면 나는 당연히 그를 가리켜 사랑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물- 물길’이라고. 귓속은 더 이상 가렵지 않다.> 작가 박범신은 세상을 살아가는 가치를 ‘물-물길’에 두는 것 같다. 물은 경계가 없고, 물길은 자연스럽게 흘러가니까.....
소설 속에 나오는 온즈카 난봉옥은 가시가 없는 선인장이다. 우리 모두 상처로 인한 가시가 자라지 않길...
<아래 사진은 우리집에서 키우는 귀갑난봉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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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나에게 기묘한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기도 한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짜릿해지는 경험을 바라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그런 일이 한 번쯤은 있었다. 평소에는 잊고 살지만 뒤척이는 잠자리에서 문득 생각날 때가 있다. 혼자만의 경험, 지극히 비밀스럽고 은밀한 그 기억이 그렇지 않아도 뒤척이던 몸을 더 안달 나게 만들기도 한다. 그냥 그 기억과 경험 그것 자체로 좋은 것이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고 시중에 떠도는 도덕이나 상식의 기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철저하게 비밀스럽고 은밀한 것이기 때문에 들킬까 염려할 필요도 없다. 이념이나 가치 판단의 여지 또한 필요 없다. 그저 속으로 키득거리거나 살포시 입 꼬리를 올리기만 해도 된다. 톺아가며 따질 필요도 없고 애면글면 몸부림 칠 필요도 없다. 그래서 좋다. 편하다. 철저하게 나만의 것이다. 대단할 것도 저장해 둘 필요도 없다. 가만히 뒤척이며 입 꼬리를 올리면 그만이다. 그런데! 그 사람도 그럴까? 뭐? 그 사람이라……. 맞다. 그 사람도 그럴까?
홍상수 감독의 영화 <오! 수정>은 충무로에 리얼리티를 이식한 홍 감독의 연출력만큼이나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너무 솔직하고 너무 리얼해 충격적이었다. 남녀가 함께 있지만 전혀 다른 생각을 한다는 명제는 너무 흔하고 당연한 듯 보이는 것이지만 잊고 지낼 때가 많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확증편향의 최면에 빠지지 않았더라도 저 여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착각을 하는 남자는 전체 남자들 중 대다수이고 저 남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착각을 하는 여자도 전체 여자들 중 꽤나 많을 것이다. 사람은 그런 것이다. 영화 <오! 수정>에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연인의 몸을 더듬는 것이 어떤 그(그녀)에게는 사랑의 행위가 될 수도 있고 어떤 그(그녀)에게는 폭력일 수 있다는 내밀한 비밀을 대형 스크린을 통해 확인하니 옷을 벗고 있는 것 같이 화끈했다. 그렇게 다른 것일 테다. 그렇다. 사람, 사람과의 관계는 그렇다.
ㄱ - 밝을 소(昭昭)
구 소소(昭昭)는 충분히 음울하고 슬픈 곳이다. 개발의 반대편에서 사위어 가는 소소의 풍경은 이 소설 전체의 메타포다.
“혼자 사니 참 좋아!” “둘이 사니 그것도 좋네!”
ㄱ은 주인공이다. 중심이다. ㄴ과 ㄷ과 있을 때도 주인공이었다. ㄴ의 죽음 이후 경찰서에서 형사에서 조사를 받을 때도 줄곧 주도권은 그녀에게 있었다. 불가항력으로 혼자 남게 되었지만 분해되어 가는 소소(昭昭)에서도 그녀는 밝다. 객관적으로 그녀는 밝을 수 없다. 부모님을 잃고 오빠도 잃었다. “나는 여전히 죽음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죽음이 지우개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지워지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누구에게는 가시처럼 박히는 것이 죽음이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선인장은 그녀 자신이다. 극한의 환경일수록 강한 가시를 드러내는 선인장처럼 그렇게 존재한다. 갑자기 ㄴ과 함께 살게 되고 갑자기 ㄷ과도 함께 살게 된 ㄱ이지만 소소(昭昭)하게 “혼자 사니 참 좋아!, 둘이 사니 그것도 좋네!” 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정상적이지 않다. 분명하다.
“희로애락이 완전히 거세된.” (p.34)
ㄴ과 함께 파묻힌 시멘트 데스마스크를 보고 ㄱ은 희로애락을 떠올린다. 말도 안 되는 레토릭이다. ㄱ에게서 찾을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ㄱ은 친오빠의 죽음과 ㄴ의 죽음을 동일시해야만 한다. 그래야 자신에게 닥치는 죽음의 그림자를 걷어낼 수 있다. 갑자기 찾아온 ㄴ과의 섹스에서 환희를 경험하고 한 번도 그런 적 없는 ㄴ의 과거까지 찾아다니며 마음속 깊이 묻으려 하지만 벗어날 수 없다. ㄴ이 죽은 뒤에야 그가 밴드의 베이스주자였으며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조지 해리슨을 꿈꾸던 뮤지션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희로애락이라는 감정이 모두 메말라 선인장의 가시처럼 거칠게 존재할 뿐인 자신에게도 소유욕의 발로라는 착각마저 불러일으키게 한 ㄴ을 찾아 나서지만, 그것 또한 ㄱ자신을 위한 자위다.
“나-ㄴ-ㄷ은 서로에게 어떤 요구도 하지 않는다.”
결국 ㄱ에게 ㄴ과 ㄷ은 소소한 풍경일 뿐이다. 정말 풍경이었던 것이다. <오! 수정>에서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던 연인의 각자 생각의 차이가 하늘과 땅 정도였던 것처럼 ㄱ과 ㄴ과 ㄷ은 함께 살면서 한 덩어리가 되었지만 ㄴ의 죽음 이전부터 ㄱ에게는 그저 풍경인 것이었다. 그녀를 살게 하는 선인장과 같이 끈질기게 삶을 이어가는 매개일 뿐이다. ㄱ에게 기억되는 ㄴ과 ㄷ은 서로 아무런 요구조차 하지 않고 통성명조차 하지 않으면서도 언제든 한 덩어리가 될 수 있는 모순된 연결이다. ㄱ에게 있어서 ㄴ과 ㄷ은 작은, 소소(小小)한 풍경이었다. 그래서 밝을(昭昭) 수 있다. 그 밝음(昭)이 모순적이라 해도 말이다.
ㄴ - 근심스러울 소(騷)
“셋째 날은 부서진 헛간의 문과 지붕을 고쳤고 넷째 날은 물이 새는 주방 수도꼭지를.. 다섯째 날엔...” “나는 우물을 파면서 자주 2층의 당신을 올려다보지요.”
ㄴ은 존댓말부터 시작한다. ㄱ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그렇다. ㄱ이 조그마한 귀퉁이에라도 걸쳐진 장면을 모조리 기억해내는 ㄴ에게 ㄱ은 존재의 이유다. 어찌할 수 없는 존재적 무력 앞에 시위하듯 한 물구나무서기를 ㄱ은 가볍게 웃어 넘겼다. ㄴ의 근심은-소(騷)- ㄱ의 밝음-소昭-로 잠시 동안 잊을 수 있었다. 그것이 결국 ㄴ을 파멸케 했지만 ㄴ의 죽음 이후의 독백에서는 후회나 원망 따위는 없다. 둘째 날, 셋째 날, 넷째 날, 다섯째 날……. 거듭해서 ㄱ을 기억해낼 뿐이다. ㄱ에게는 그저 풍경 같을 뿐이었으나 ㄴ에게는 존재였다. 준비된 죽음을 마무리하기 위해 우물을 파내려가는 ㄴ에게 ㄱ은 동경의 대상이다. 우물을 파면서도 2층을 기웃거린다. ㄱ에게 ㄴ은 그저 포크레인이었다. 그렇게 줄곧, 끊임없이, 쉴 새 없이 삽질을 할 수 있는지 모르는 수수께끼였을 뿐인데, ㄴ에게 ㄱ은 달랐다. 그때부터였다. 처음 ㄱ과 몸을 섞게 된 그 밤. 2층에서부터 걸어 내려오는 ㄱ의 발소리는 죽음을 예비한 ㄴ을 흔들었다. 가만히 뒤에서 침대에 누워있는 자신을 안아주는 ㄱ의 몸에서부터 파장이 일었다. 자신을 껴안은 채 눈물을 흘리는 ㄱ으로 인해 ㄴ의 존재 전체가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ㄱ의 기억 속에서는 줄곧 무미건조하고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으려 했던 ㄴ이었는데, ㄴ에게 ㄱ은 달랐다. 소중한 존재였다. 함부로 할 수 없고 쉽게 다가갈 수도 없는 선인장 같은.
“나의 멸진(滅盡)을 눈물로 배웅해준 당신.” “사멸로 가는 듯 한 구소소의 분위기가 좋았어요.”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ㄱ은 성가시지 않았다. 혹시라도 죽음의 과정을 완성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었던 방해꾼이었다. 먼지가 사라지는 것으로 자신의 죽음을 비유한 ㄴ의 지고지순함, 그 사멸해 가는 순간마저도 ㄱ을 귀퉁이에 넣으려는 한결같음에 박수를 보내야 하나? 나는 잘 모르겠다. 이런 게 사랑이라면 너무 애달프고 어렵다. 어쨌든 ㄱ과 몸을 섞은 후 단 한번이라도 조지 해리슨 이야기를 꺼냈다면 발그레 흥분하는 ㄱ과 함께 밤새도록 조지 해리슨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처음부터 사멸의 구렁텅이로 향한 ㄴ에게 어쩌면 결과는 정해져 있는 것이었다.
“그게 전부예요. 당신이 몸을 구부려 세탁기 버튼을 누른 것과 내 몸의 우물 속으로 투하된 것은 동시였을 거예요. 나는 그렇게 믿어요. 당신-나, 혹은 나-그녀, 혹은 당신-나-그녀가 완벽하게 덩어리진 순간이었다고요.”
우물로 떨어지면서도 ㄴ은 ㄱ을, ㄷ마저도 끌어들인다. 너무 착한 사람인지, 너무 바보 같은 사람인지 나는 단정할 수 없다. ㄴ의 말처럼 우물 속으로 투하된 것인지, 투하한 것인지도 무의미 하다. 그래서 ㄱ이 경찰로부터 조사를 받고 ㄷ이 ㄴ을 밀었다는 행위 자체로 ㄱ으로부터 받는 의심도 무의미 하다. 처음부터 ㄴ은 죽음을 위해 소소(騷)했다. 그의 근심스러운 ㄱ과의 동거가 해피엔딩이 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뭔 놈의 사랑이 이런 가 모르겠다.
“단지 소소한 풍경이었다고 나는 생각해요.”
ㄴ에게도 단지 소소한 풍경이었을까? ㄴ은 죽음 이후에도 그렇게 기억하고 싶어 한다. 언젠가 한번은 겪었을지 모를 짜릿했던 그 기억을 간직한 채 부유하던 먼지가 완전히 없어지듯이 그렇게 사라졌다.
ㄷ - 하소연할 소(訴)
“우리, 도자기 마을에 가서 사기그릇 깰 때, 내가 울었잖아!”
ㄷ에게 ㄱ과 ㄷ은 하소연이다. 목숨을 걸고 탈출한 뒤에도 끔찍한 일을 겪었다. 신고하지 않고 돌봐준다는 것으로 엄마가 있는 옆방에서 짐승에게 몸을 내줘야했다. ㄴ이 우물로 투하된 후 떠나온 곳에서도 몸을 내주고 삶을 이어간다. 그 돈을 중국에 있는 짐승에게 보낼 수밖에 없다. 엄마가 그곳에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ㄷ은 하소연하고 싶은 것이다. 문득 찾아간 소소(昭)에 위치한 ㄱ의 집에서 ㄷ은 ㄱ의 밝음과 ㄴ의 근심은 안중에 없었다. 일단 그들에게 하소연(訴)하고 싶었다. 몸을 섞는 ㄱ와 ㄴ을 찾아간 그 방안에서도 바보같이 밝게 웃는 ㄱ의 눈길을 피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황망함, 놀람 따위는 안중에 둘 수도 없었던 기가 막힌 참담한 과거를 건너 온 ㄷ의 존재방식이다. 야동에 등장하는 쓰리썸은 지극히 음란하고 자극적이지만 그들의 쓰리썸은 섹스가 아니라 덩어리다. 감정과 느낌이 배제된 덩어리. 책에서 여러 번 표현되는 덩어리 그 자체다. 그냥 덩어리. 셋이서 삼각형이 아니라 둥근 덩어리가 된 것은 ㄱ,ㄴ,ㄷ 모두에게 이유가 있다. ㄱ에게는 놀이였고 ㄴ에게는 위로였고 ㄷ에게는 절박함이었다. ㄱ에게 있어 그들의 쓰리썸은 하나가 되는 착각이었고 ㄴ에게 그들의 쓰리썸은 ㄱ을 확인하는 순간이었고 ㄷ에게 그들의 쓰리썸은 생존의 확인이었다. 한 방에서, 한 침대위에서 덩어리졌지만 ㄷ에게는 여전히 결핍이다. 질펀한 쓰리썸 이후에도 ㄷ은 혼자서 또다시 자위를 해야 했다. ㄷ에게 쓰리썸이나 덩어리짐은 의미 있는 듯 무의미한 일이었다. 어쩌면 ㄷ도 그녀만의 우물을 파고 있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ㄴ의 죽음 이후 바다에 연한 작은 도시에서 여전히 자신의 몸으로 생존을 확인할 수밖에 없는 간절한 하소연이다. 자신을 찾아 온 ㄱ에게 또 몸을 들이밀었지만 ㄱ은 거부했다. ㄴ이 부재한 현재에는 덩어리짐마저 할 방법이 없다. ㄱ에게는 지나치는 풍경이었고 ㄴ에게는 ㄱ만이 존재하는 도자기 마을에서의 기억도 ㄷ에게는 절실한 존재확인이다. 거푸 물어본다.
언니~! 그때 말이야~! 도자기 마을에 갔을 때 있지? 알지 언니? 그때 내가 도자기 깼잖아~! 그 도자기 마을에서 언니~! 언니 기억나지? 어? 기억나지? 어?
목구멍까지 올라온 절실함이 하소연이 되어 흩어진다. ㄴ이 먼지처럼 부유하다 떨어진 것처럼 ㄷ또한 여전히 부유한다. ㄴ처럼 떨어질 지, 언제까지 부유할 지 알 수 없지만 가쁘게 매달린다. ㄱ과 ㄴ과 ㄷ은 함께 소소(昭昭)에서 살았지만 누군가는 웃고(笑昭), 누군가는 근심했으며(騷), 누군가는 하소연을(訴) 하고 싶었다. 그들이 한 덩어리가 되었어도 그렇게 다르게 소소소(昭騷訴)한 풍경으로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첫 번째 계약은 우물이 완성되면 흩어져 각각의 길을 따라 떠난다는 것, 두 번째 계약은 그러므로 우리에겐 과거도 미래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게 사랑이라면 나는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 잠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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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와 제목에 대한 느낌> 처음봤을때 뭐래? 그러다 사람의 형상이네... 다 읽고 나니 덩어리진 풍경이구나... <이책은> 오래전 읽었던 '은교'의 느낌이 고스란히 남아 그 이름만으로 구매한 책. <저자는>
<책내용 맛보기>
<책읽은 소감> 의미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
살다보면 통상적으로 형성된 고정관념들이 매우 많다. 그 중에서도 어떤 정형화된 이름을 듣게 되면 퍼뜩 떠오르는 느낌. 같은 이름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누구나 지레짐작하는 동질의 느낌이 있다. 때문에 작가는 선입견으로 상상할 이름을 주지 않았다.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는걸 원하지 않았다.
결혼을 했으나 호적에 표시를 안해 동거한게 된다. 그런 남편의 이름을 부르기 싫어 남자1이라 명명한 그녀는 ㄱ. ㄱ의 집에 알 수 없는 끌림으로 기거하며 동거한 남자이기에 ㄴ. ㄱ과 ㄴ이 기거인듯 동거하는 상황에 더불어 함께 기거하며 동거하게 된 조선족인 줄 알았지만 탈북녀는 ㄷ.
비밀 젊은 날 결혼을 앞두고 잠시잠깐 몸담은 직장. 후배인 아가씨가 비밀이라며 말했다. 죽을때까지 지켜줘야 한다고. 알았다고 대답을 했는데 어떤 비밀였는지 기억조차 없다는 사실. 그토록 원했던 완전한 비밀이 되었다.
ㄱ=그녀, ㄴ= 남자, ㄷ=더불어 로 다가온 세 인물은 공유할 비밀을 가졌다. 셋이 만든 공동의 비밀이다. 기묘한 의식처럼, 의식같은 교감을 한다. 내가 말하지 않았는데 네가 내가 원하는걸 그대로 알아듣고 반응한다는 행위. 일심동체라야만 비로소 가능한 것을 철저한 타인들이면서 어떤 힘에 자동적으로 끌려 본능이 행한 비밀 정사. 단순한 배출이 아닌 그걸 통해 자유를 느끼고 평안해지는 경지.
풍경 찰나의 미학이 사진이라 생각한다. 정지된 순간이자 시간들. 그 안에서는 숨을 쉬지만 멈춤이다. 그 찰나의 시간을 기억하는 사람만이 그리는 풍경이고 풍경이 된다. 늘 같은 모습인 것 같아도 풍경은 쉼없이 변화한다. 미세한 변화라서 감지가 어려울 때도 있지만 식물을 키워보면 안다. 하물며 풍경이라면 매일 보는 사람만이 알터.
그네들은 덩어리진 풍경이었다. 그네들의 입장에선 그저 소소한 풍경. 그 소소한 풍경에 방해물은 없었다. 철저한 타인들이 교감을 통해 각기 다른 가시가 유연해지는 경지. 그 가시의 깊이와 넓이는 모르지만 나만큼 너도, 너만큼 나도 가시가 있구나 라는 동질감. 그 동질감이 부르는 갈망을 자신도 모르는새 끌려서 덩어리가 되고 그 안에서 숨구멍을 만난다.
홀림 오랜 세월을 함께 해도 모르는게 한 길 사람 속이거늘, 가시를 가진 사람은 가시 가진 사람을 홀리나 보다. 물구나무 서기를 하는 가느다란 팔이 가여워, 물구나무 서기해서는 죽지 않는다고 말하는 ㄱ. 어느새 둘이 사니 참 좋네...
그런 ㄱ의 초월한 듯한 태도는 얼마나 큰 시련을 당했으면 나올 수 있나...의례히 따르는 질문도 없고 없는 듯 있지만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는 안주인. 왠지 모르나 알 것 같고 마치 처음으로 맞이한 편안함 같음. 아마도 혼자 사니 참 좋네...
얼마나 사무쳤으면 그런 말이 나왔을까. 자기들끼리만......너무해요...... 단순히 덩어리 지는 그 상황만을 말함이 아니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들 속에서 자기들끼리만......너무해요.....를 접했길래 질투도 아닌, 부러움만은 아닌 그 소리가 자연스레 나왔을까. 셋이 사니 참 좋네...
저마다의 상실의 깊이가 얼마나 큰 지를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경우가 있고, 깊디 깊고 넓디 넓어서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지경이 있다. 내면의 상실은 보이지 않는 채로 가시를 형성하고 그 가시는 자신안으로 구부러져 자신을 해치는 경우가 있고 밖으로 뻐쳐 누군가는 묻지마 행동이 되기도 한다. 자신이든 타인이든 가시가 길수록 뿌리도 긴 법. 그 누구라도 다친다. 그 가시가 말랑해지는 지경을 접하면 가시는 마치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굳은 채로 남는다. 새살이 돋으면서 살아나갈 힘을 얻는다.
내밀하게 간직한 비밀은 보존되어야 한다. 덩어리 지며 황홀한 홀림을 맞이하던 시간들을. 그 홀림때문에 살의를 느꼈던 순간을. 끝내 닿고자 파내려간 우물로 침잠하고자 염원하던 그 잠수를. 영원한 안식을. 소소한 풍경을. 한 줌 유골로 뿌려져 비밀은 산산조각이 난다. 영원히 흩어져 조각은 찾을 수가 없다. 다시는 만나질 덩어리가 아님을 안다. 다시는 이룰 수 없는 풍경이다. 그럼에도 풍경은 소소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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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어떤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사랑이란 것은 이러이러하다 라고 단 몇 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까. 각 개인이 느끼는 사랑에 대해 사랑은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사연으로 각자의 사랑을 써나가니까. 아마 수많은 사랑의 정의들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나 아닌 타인의 사랑을 이러쿵저러쿵 말할 필요가 없다. 그들에겐 그 사랑이 아주아주 간절한 것일수 있음을 알지 않는가. 우리가 사랑할때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다. 우리도 한때는 그런 사랑을 했으므로. 또한 우리가 해보지 못한 사랑을 꿈꿀수도 있으므로.
칠순을 바라보는 청년작가 박범신 작가는 또 하나의 사랑이야기를 썼다. 한 남자와 두 여자가 사랑이라고 부를수도 있는 이야기이다. 어쩌면 한 남자와 한 여자 그리고 한 여자와 다른 여자의 이야기이다. 이들은 사랑은 비밀이고 침묵이다. 누군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건넨적도 없으면서 무언의 이야기를 마음속으로 해도 서로는 이해했다. 한 집에 살면서 사랑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아도 이들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들이 사랑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수 있을까.
비밀의 사랑을 나누는 소설의 주인공들은 이름이 없다. ㄱ, ㄴ, ㄷ이라는 이니셜로 ㄱ이라는 여자가 들려주는 ㄴ, ㄷ의 이야기라고 해야겠다. ㄱ은 학교에 다닐때 '우물'이라는 짧은 소설을 써 교수의 눈에 들었으나,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10년만엔가 ㄱ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자신이 살았던 집에 시멘트로 된 데드마스크가 나왔다고 했다. 이에 호기심을 느낀 작가는 그녀에 대한 소설을 써볼까 싶었다.
그녀는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대학 교정에서 함께 걸었었던 남자 1의 사랑을 진짜 사랑이라고 생각했었던 것 하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옭아맸었던 이야기를 건넨다. 우리가 봐도 남자1은 ㄱ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래서 ㄱ은 남자1과는 다른 사랑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사랑해'라고 절대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사랑임을 느끼는 것을 바랬는지도 모른다.
내가 남자라고 부를 때 남자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내 속에 있으나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으므로, 나는 '남자'라는 이름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해한다. (57페이지)
이 소설의 주제어를 말한다면, 선인장 가시, 덩어리, 비밀, 죽음일 것이다.
먼저 선인장 가시를 볼까. 선인장은 가시를 품고 있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밖으로 나온 가시가 있고, 안으로 들어간 가시가 있다. 누군가 자신에게 다가오면 가시로 찌르기도 한다. 더이상 다가오지 말라며 가시를 내세운다. 장미 가시나 선인장 가시에 찔려본 사람은 알리라. 그 따가움을. 아주 작은 가시인데도 곧장 핏방울이 나오게 만든다. ㄱ에게 선인장 가시는 사랑의 한 표현일수도 있었다.
구소소의 부모님 집에 들어왔던 ㄱ과 ㄴ, ㄷ이 한 침대에 서로 엉켜 있을때의 모습이 덩어리이다. 덩어리는 엉켜있음이다. 세 사람 ㄱ과 ㄴ, ㄴ과 ㄷ, ㄱ과 ㄷ은 한데 엉켜 있음을 표현한 말이다. 아무런 경계도 없이 그들은 서로 덩어리져있었다. 그들이 처음 만나고 얼마되지 않아서부터 헤어지는 순간까지.
비밀이라는 단어를 볼까. 세 사람이 함께 살았던 그때의 시간들, 자신이 살았던 집에서 남자의 시멘트 데드마스크가 발견 되었다. 하지만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ㄴ의 죽음, ㄷ의 떠남은 그들에겐 말을 하지 않았어도 다 이해하고, 마음속으로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ㄴ의 죽음은 비밀에 부쳐졌다. 이들 세 사람의 사랑 또한 비밀이었다.
ㄱ,ㄴ,ㄷ의 만남은 모두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기억들이 살아 숨쉰다. 바람꽃을 따러 간 오빠의 실족사, 후에 이어진 부모님의 교통사고를 겪은 ㄱ의 아픈 기억. ㄱ에게 ㄴ은 늘 우물파는 남자였지만, 5.18 광주에서 형과 아버지를 잃었던 ㄴ은 이제 실어증과 치매에 걸린 엄마만 있을 뿐이었다. 죽음은 그들 세 사람을 옭아매는 가시였고, 비밀이었으며 덩어리짐이었다.
소소한 일상이 훗날에 가서 보면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들에게 소소한 일상들이 이처럼 소소한 풍경을 만들어낸 것일까. 시작부터 말하지 않아도 이별의 시간을 알고 있었다. 예정된 시간을 알고 있었던 이들에게 소소한 일상은 그 어느것보다 소중한 시간이었으리라. 욕망이 뭉쳐진 열망의 시간들이 이들에게는 소소한 풍경이었음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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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풍경' 제목이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책이다. 솔직히 글 잘 쓰시는 우리나라 대표작가임에는 동의하지만 개인적으로 나와는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분이 박범신 작가님이다. 헌데 이번에 읽은 신간소설 '소소한 풍경'은 기존의 가지고 있던 생각을 바꾸게 된 책이다.
주인공의 이름부터 기존의 형식에 흔히 볼 수 없었던 ㄱ, ㄴ, ㄷ과 ㄱ의 대학시절 교수 '나'란 인물이 등장한다. 스토리를 이끌고 있는 인물은 나란 인물이 아닌 'ㄱ'이다. ㄱ의 이야기를 토대로 스토리를 풀어가는 방식인데 ㄴ, ㄷ의 부분에서는 그들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 몽환적이면서도 독특해서 책속에 빠져들게 하는 묘미가 뛰어나다. 특히나 마지막 ㄷ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자꾸만 마음을 잡아당긴다.
전혀 기억도 못한 옛 제자의 갑작스런 전화도 놀랐지만 자신을 밝힌 ㄱ이 던진 한 마디... "시멘트로 뜬 데드마스크 보셨어요?"란 이야기에 나란 인물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나는 ㄱ의 소식을 수소문하게 되고 결국 그녀를 찾아간다. 그녀 역시 그가 올 줄 알았다는 듯이 그를 맞으며 자신과 한 남자, 한 여자의 사랑과 이별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세 사람 모두 가족을 잃은 쓰라린 상실의 아픔을 가진 인물들이다. 말더음이 오빠지만 여동생 ㄱ을 끔찍이도 아꼈던 오빠의 마음이 화를 불러오게 되고 오빠의 죽음은 나비효과처럼 부모님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ㄴ은 한순간의 어린 마음이 가진 이기적인 행동이 형과 아버지를 죽음으로 이끌고 만다. ㄷ은 순수하지 못한 이기적인 욕망을 가진 검은 마음의 남자로 인해 오빠를 잃고 결국에는 엄마와도 떨어져 조선족 처녀로 생활 전선에 뛰어든 처지다.
ㄱ의 집에 한 달 전부터 들어와 살고 있는 ㄴ과 포도를 가꾸는 ㄱ.. 그들의 집에 불쌍한 모습의 ㄷ이 기거하게 되면서 세 사람 사이에는 기묘한 감정이 공존하다. ㄱ의 말대로 남녀란 이름으로 일반적으로 불릴 수 없는 그들의 관계... 덩어리진 셋이란 이름으로 살아가는 그들은 서로에게서 위로를 받지만 우물의 완성은 곧 그들의 이별을 뜻한다.
사람들과의 관계는 결국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상대의 이야기를 들으며 형성해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허나 '소소한 풍경'의 인물들은 서로의 과거나 기본적인 정보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로지 현재에 충실한 관계를 맺고 그 속에서 서로에게 신뢰와 애정을 느끼는 사는 세 사람이다. ㄷ은 가장 행복한 순간에 세 사람이 함께 죽고 싶다는 느끼고 실행에 옮기지만...
소소한 풍경이란 제목이 만들어 내는 이미지대로 세 사람이 만들어 가는 소소한 일상은 한 몫의 수채화를 보는 듯 한 무척이나 아름다운 책이란 느낌이 주며 다가온다. ㄱ이 이혼 후 부모님과 함께 살던 고향집으로 내려와 살던 지명이 '소소'라 책의 제목이 말한 소소가 지명인지 아님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소소한 일상의 모습을 담아 놓은 것인지 헷갈리지만 결코 소소하지 않은 그들의 일상이 매력적으로 느껴진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