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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덕이가 여기서 典當局을 始作한 것은 벌써 5年 前이었습니다. 시골 農家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집 한 채 밑천과 그 밖에 장사 밑천으로 1,000원이라는 돈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와서, 이리저리 自己가 이제 해나갈 營業을 求하다가 마침내 이 細民村에 典當局을 始作하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머리가 생각되는껏 생각하고, 몇 番을 籌板을 놓아본 結果, 그中 安全하고 밑질 근심이 없는 營業이 이 典當局이었습니다. 그것도 많은 밑전이면 모르거니와, 단 1,000원으로 典當局을 서울에서 始作하려면 이런 細民村 자리를 잡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5錢짜리부터 2원짜리까지, 이러한 標準 아래서 그는 營業을 始作하였습니다. 그러나 1年 뒤에 決算해본 結果, 그는 뜻밖에도 200餘 원이라는 損害를 보았습니다. 3年 뒤에는 그의 밑천 1,000원은 다 없어지고 집조차 어떤 陰險한 高利貸金業者의 손에 抵當으로 들어갔습니다. 4年째는 第2 抵當, 只今은 第3 抵當…… 이렇듯 나날이 다달이 밑천은 줄어들어가는 反比例 流質品은 묏더미같이 쌓였습니다. 그리고 또 그 流質品이란 것이 어찌된 셈인지, 處分할 때마다 그는 그 元金의 3分의 1밖에 거두지를 못하였습니다. 比較的 마음이 純眞하리라 생각하였던 細民窟의 사람들은, 그의 想像 以上으로 怜悧하였습니다. 그들은 典當局을 속이기에 온갖 手段을 다 썼습니다. 어떤 때에는 사내가 와서 눈을 부릅뜨고 典當을 잡혀갔습니다. 어떤 때에는 女便네를 보내어 눈물을 흘려가면서 哀願하였습니다. 사내의 호통에는, 삼덕이는 物件을 檢査해볼 餘裕도 없이, 窒怯하여 달라는 대로 주었습니다. 女便네의 눈물에는, 그는 때때로 달라는 以上의 돈까지 주어 보냈습니다. 사흘 뒤에는 꼭 도로 찾아간다. 或은 이것은 우리 집안에 代代로 물려 내려오는 物件이다. 이런 말을 모두 그대로 믿은 바는 아니었지만, 그리고 한 가지의 일을 겪을 때마다 이 뒤에는 마음을 굳게 먹으리라고 단단히 決心을 하지만, 及其也 그런 일을 만나기만 하면 그는 또다시 弱한 사람이 되고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5個年 동안을, 그 附近의 細民들에게 搾取를 當한 그는, 只今 쓰고 있는 이 집조차 얼마 後에는 公賣를 當하게 된 可憐한 境遇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金東仁(1900年~1951年)은 小說家. 號는 琴童ㆍ春士. 1919年에 우리나라 最初의 純粹 文藝 同人誌 ≪創造≫를 發刊하였고, 事實主義的 手法과 文章의 革新을 보여 주었다. 作品에 短篇 <弱한 者의 슬픔>, <배따라기>, <감자>, 長篇 <雲峴宮의 봄> 等이 있고 親日反民族行爲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