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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랑
얼음 풀린 냇가 세찬 여울물 차고 오르는 은피라미떼 보아라 산란기 맞아 얼마나 좋으면 혼인색으로 몸단장까지 하고서 좀더 맑고 푸른 상류로 발딱발딱 배 뒤집어 차고 오르는 저 날씬한 은백의 유탄에 봄햇살 튀는구나
오호, 흐린 세월의 늪 헤쳐 깨끗한 사랑 하나 닦아 세울 날랜 연인아 연인들아 - 고재종, 「날랜 사랑」
따뜻한 바람에 몸이 풀린 냇물이 세차게 흐르며 여울을 짓는다. 눈과 얼음이 녹아 무리지어 흐르는 저 거센 물살을 은피라미떼가 차고 오른다. 은피라미떼는 산란기를 맞아 바다에서 민물로 올라온 은어를 가리킨다. 자기와 같은 생명을 퍼뜨리는 게 얼마나 좋은지 은어는 혼인색으로 몸단장까지 했다. 산란기가 되면 은어는 아가미 아래로 붉은색이 선명해진다. 시집 갈 때 신부 얼굴에 찍는 연지 곤지가 붉은색이 아닌가. 한 조각 붉은 마음으로 백년 서방을 맞는 여인의 마음을 시인은 산란기가 된 연어의 몸에서 보기라도 한 것일까? 혼인이란 성(性)이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일이다. 산란기를 맞아 세찬 여울물을 차고 오르는 은어 또한 다음 생명을 잉태하는 숭고한 일을 지금 준비하고 있지 않은가.
혼인색으로 단장한 은어들은 좀 더 맑고 푸른 상류로 가기 위해 거친 물살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물살은 물살대로 자기 갈 길을 가고, 은어는 은어대로 발딱발딱 배를 뒤집어 흐르는 물살을 차고 오른다. 은빛 은어와 은빛 물살이 맞물리며 퍼뜨리는 아름다운 이미지를 떠올려 보라. 시인은 은빛 은어가 은빛 물살과 만나 벌이는 이 이미지를 “저 날씬한 은백의 유탄”이라고 표현한다. 은어가 물결을 차고 오를 때마다 사방으로 물결이 튄다. 은빛 장관을 보는 눈만 즐거운 게 아니라, 물결이 튀는 소리를 듣는 귀 또한 즐겁다. 거기에 봄 햇발이 질 수 없다는 듯 찬란한 은빛을 발한다. 은어 몸에 닿은 햇발이 사방으로 튀며, 거세게 몸을 치솟는 은어에 놀라 유탄처럼 흩어지는 물살을 휘감는다.
시인은 세찬 여울물을 거슬러 오르는 은어들을 보며 모든 생명 속에 본능처럼 새겨진 거룩한 사랑을 본다. 거룩한 사랑을 실천하는 존재는 자기 이익에 연연하지 않는다. 자기 이익에 연연한다면 은어가 굳이 목숨을 걸고 바다에서 민물로 올라올 리가 없다. 연어는 민물로 올라가는 길이 죽음의 장소라는 것을 알면서도 주저 없이 민물로 가는 여행을 시작한다. “흐린 세월의 늪”을 헤치고 태어난 곳으로 거슬러 오르는 이 은어들의 여행에 시인은 “깨끗한 사랑”이라는 시구를 붙인다. 깨끗한 사랑은 새로운 생명을 낳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상황과 이어져 있다. 은어는 산란을 하자마자 곧바로 죽는다. 산란이 곧 죽음으로 이어지는 이 운명을 시인은 죽음을 넘어서는 사랑의 진경으로 생각한다.
사랑은 언제나 그 속에 죽음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을 육체의 죽음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선사(禪師)들의 깨달음 또한 자아를 ‘죽인’ 결과로 이루어지지 않는가. 깨끗한 사랑 하나를 닦아 세우려면 자기 이익에 매몰된 자아를 ‘죽이는’ 혹독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시인이 사랑이라는 말에 붙인 ‘깨끗한’이라는 수식어는 무엇보다 자기를 중심에 세우는 이 마음을 내려놓는 일과 관련이 있다. 자기를 중심에 세운 존재는 늘 사랑의 가치를 따질 수밖에 없다. 그들은 자기에게 돌아올 이익이 없으면 결코 깨끗한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려고 한다.
시인은 깨끗한 사랑을 닦아 세우기 위해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을 “날랜 연인아 연인들아”라고 부르고 있다. 시 제목인 ‘날랜 사랑’과 이어진 이 시구들에는 좀 더 맑고 푸른 상류로 올라가 깨끗한 사랑을 이루려는 연어의 꿈이 스며들어 있다. 꿈을 꾸지 않으면 연어의 몸은 결코 혼인색으로 바뀌지 않는다. 맑고 푸른 물가로 가는 위험한 비행도 실행할 리 없다. 연어는 민물로 거슬러 오르는 험난한 여행을 펼침으로써 다음 세대들이 꿈꿀 자리를 아름드리 마련해준다. 생명의 꿈은 언제나 다음 생명이 꾸는 꿈으로 이어지는 법이다. 생명이란 서로서로가 이어진 거대한 그물망을 형성하고 있지 않은가. 날랜 연인들은 바로 이 생명의 그물망을 잇기 위해 맑고 푸른 상류로 끊임없이 올라간다. 자신을 내버린 자리에서 피어나는 ‘날랜 사랑’이 참으로 아름답지 않은가.
2. 사랑
간밤 뒤란에서 뚝 뚜욱 대 부러지는 소리 나더니 오늘 새벽, 큰 눈 얹혀 팽팽히 휘어진 참대 참대 참대숲 본다 그중 한그루 톡, 건들며 참새 한 마리 치솟자 일순 푸른 대 패앵, 튕겨져오르며 눈 털어낸 뒤 그 우듬지 바르르바르르 떨리는 저 창공의 깊숙한 적막이여
사랑엔, 눈빛 한번의 부딪침으로도 만리장성 쌓는 경우가 종종 있다 - 고재종, 「직관」
큰 눈이라도 내리는지, 간밤 뒤란에서 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올곧은 게 대나무라고 하지만, 바람이 세차게 불거나, 큰 눈이 내리면 대나무는 한쪽으로 휘어지거나 아예 부러지기도 한다. 이것은 대나무의 자연이다. 곧은 것이 자연이라면, 휘거나 부러지는 것 또한 대나무의 자연이다. 사람들은 곧고 곧은 대나무에 반하는지 모르지만, 휘거나 부러지는 특성 없이 어떻게 곧고 곧은 특성이 나올 수 있을까. 큰 눈을 맞아 팽팽히 휘어진 참대숲을 시인은 오늘 아침 기꺼운 마음으로 본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대나무에 얹힌 큰 눈이 아래로 쏟아져 내릴 형국이다. 말 그대로 아슬아슬한 균형이라고나 할까. 대나무는 끝내 견디려 하고, 큰 눈은 기어이 대나무를 이겨내려고 한다.
참새 한 마리가 대나무 한 그루를 톡, 건들며 하늘로 치솟는다. 일순 푸른 대가 패앵, 하늘로 튕겨져 오르며 온몸에 쌓인 눈을 털어낸다. 우듬지가 바르르 떨린다. 참새 한 마리가 아니라면 대나무는 그 모습 그대로 큰 눈을 견뎠을 것이다. 견디고 견디다 못 견딜 것 같으면 스스로 부러져 내렸을지도 모른다. 참새가 대나무를 도와주기 위해 일부러 하늘로 치솟지는 않았으리라. 참새는 본능처럼 하늘로 치솟으며 대나무 한 그루를 건드렸을 뿐이다. 큰 눈에 눌려 있던 대나무는 바로 그 순간을 기회 삼아 온몸을 짓누르던 큰 눈을 털어내고 우듬지를 바르르 떤다. 우듬지만 떨었을까. 우듬지에서 내려온 떨림이 뿌리까지 이르러, 한겨울을 힘겹게 견디던 뿌리 또한 부르르 몸을 떨었을 것이다. 참새 한 마리의 몸짓이 대나무 한 그루를, 나아가 참대숲을 온통 울리는 이 기막힌 현상을 보라.
시인은 참대숲에서 펼쳐지는 이 기막힌 순간을 “저 창공의 깊숙한 적막이여”라고 표현하고 있다. 바르르 떨리는 우듬지 위로 깊디깊은 창공이 펼쳐져 있다. 창공(蒼空)은 말 그대로 푸른 하늘을 의미한다. 푸르고 푸르러 깊이를 모르는 적막한 하늘 속으로 대나무 푸른 소리가 흘러든다. 대나무는 푸른 하늘을 머리에 인 채로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땅 속 깊이 뿌리를 박은 덕에 대나무는 저 창공이 펼쳐내는 깊숙한 적막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큰 눈을 털어낸 대나무가 바르르 몸을 떨면 창공 또한 바르르 떨며 몸속 깊이 그 떨림을 받아들인다. 공명이다. 참새 한 마리의 몸짓이 깊숙한 적막에 빠져 있던 하늘에 숨구멍을 낸다. 공중으로 치솟는 참새를 하늘이 왜 온몸으로 끌어안겠는가. 생명은 다른 생명이 있기에 비로소 생명으로 거듭나는 법이다.
자연에서 펼쳐지는 신비한 현상에 눈길을 주던 시인은, 바로 그 현상에서 우리네 마음을 유혹하는 사랑의 감정을 이끌어내고 있다. 사랑이란 결코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다. ‘짝사랑’이라는 말을 사람들은 사용하지만, 사실 짝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공명이 없는 사랑을 어떻게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시인은 “사랑엔, 눈빛 한번의 부딪침으로도/ 만리장성 쌓는 경우고 종종 있다”라고 쓰고 있다. 눈빛이란 공명을 의미한다. 참새 한 마리가 하늘로 치솟으면, 대나무는 패앵 소리를 내며 우듬지를 떨어 눈을 털어낸다. 뿌리까지 울리는 이 떨림은 그대로 하늘로 올라가 창공이 펼친 깊숙한 적막을 가만히 흔든다. 아주 작은 떨림이 거대한 떨림으로 확산되는 이 순간을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무엇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시인은 눈빛만으로 이루어지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한 눈빛과 다른 눈빛이 만난 자리에서 사랑이 피어오른다. 불과 불이 만나 더욱 큰 불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말하면 어떨까. 눈빛이 마주친 순간 연인들은 깊이를 모를 사랑에 빠진다. 한 그루 대나무의 떨림이 참대숲 전체를 떨리게 하듯, 연인의 눈빛을 본 것만으로도 그의 몸은 주체할 수 없이 떨린다. 그는 왜 눈빛 하나에 이토록 온몸을 떠는 것일까? “저 창공의 깊숙한 적막”을 그 떨림 속에서 확인했기 때문이다. 눈빛과 마주하기 전까지는 느낄 수 없었던 적막이 눈빛과 마주하는 순간 온몸으로 휘감아 들어온다. 가슴이 턱 내려앉는 이 느낌, 이 공명이 무엇보다 사랑이 비롯되는 지점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이미 눈빛 한번 부딪친 것만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무너뜨릴 수 없는 사랑의 만리장성을 쌓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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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은 순간을 영원처럼 사는 존재가 아닌가 한다. 그러기에 시인의 삶은 순간을 영원처럼 사는 삶인 것이다. 우리들이 무심코 놓치고 살아가는 수많은 그 순간들을 시인은 영원으로 되돌려 놓는다. 시인의 시집 한 권이 그렇고, 시 한 편이 그렇다. 고재종 시인은 그렇게 순간을 영원처럼 살아내고 있는 시인이다. "날랜 사랑"에서 우리는 고재종 시인의 삶을 볼 수 있다. 순간을 영원처럼 살고 있는 시인의 손과 발은 흙과 맞닿아 있고, 마음은 언제나 영원의 강물을 흐르고 있다. 시인의 삶을 통한 시집인 "날랜 사랑"은 그 삶의 흔적이다. 나는 듯이 빠른의 의미를 가진 '날랜'. 사랑의 날램을 고재종 시인은 직시한다. 아니 사랑뿐만 아니라 우리들 일생이 날래다는 것을 시인은 직시한다. '나를 키운 것은 팔할이 바람이다'라는 서정주 시인의 말을 변용 한다면, 우리들을 키운 것은 팔할이 사랑일게다. 시인은 사랑에 대한 어줍잖은 설명을 하려 하지 않는다. 마치 그림을 그리듯, 세밀하고도 거칠은 붓터치로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일상을, 사랑의 가락들을 그려내고 있다. 소리가 없는 무성 영화의 한 장면을 보듯이 펼쳐지는 '그 순간'은 고재종 시인의 영근 모습을 아주 잘 보여준다. 순간을 포착해내는 능력. 그리고 그 순간을 영원으로 치환시키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에서의 시간적 개념은 단순히 실연 당한 남자가 앉아있는 시골의 기차역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구리반지를 일그러뜨리며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후회막급한 심정은 눈물이 되고, 흰 들국화가 되어 피어나는 것이다. 장례식장에서의 흰 국화의 이미지가 겹쳐지면서, 실연의 순간은 보냄의 순간으로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흰 들국화는 사내가 오기 전부터 그 자리에 피어있었다. 하지만 모든 사건이 종결이 될 무렵 피어오른 것으로 보이게끔 하는 저 능청스러움은 시인의 역량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순간 속에 피어오른 흰 들국화의 향기는 바람을 타고 영원할 것이다. 순간을 영원처럼 살아가는 시인의 시도 흰 들국화의 향기와 다름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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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심만이 희망이다. 이는 고재종시인이 처음 시집부터 지금까지 끊질기게 붙잡고 있는 화두이다.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난다'는 옛말이 있다. 농심이란 바로 콩을 심어 놓고 콩을 기대하는 마음이요 팥을 심어놓고 팥을 기대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콩을 심어 놓고 금괘를 기대하는 세상이다. 아니 아무 것도 심어 놓치 않고 수많은 것을 기대하는 세상이다. 고재종시인은 바로 자신의 시를 통해 이런 농심을 말하고 있으며 농심으로 돌아갈 때만이 우리가 진정으로 꿈꾸는 세상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시가 단지 이런 농심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고재종 시인의 시는 참으로 아름답다. 투박한 농촌의 삶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고 순수한 언어로 우리 인간의 삶을 아름답게 투영하고 있다.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중 '날랜 사랑'이라는 시가 있다. <얼음 풀린 냇가 /세찬 여울물 차고 오르는 / 은피라미때 보아라 / 산란기 맞아 / 얼마나 좋으면 / 혼인색으로 몸단장까지 하고서 / 좀더 맑고 푸른 상류로 / 발딱발딱 배 뒤집어 차고 오르는 /저 날씬한 유탄에 /봄햇발 튀는구나 // 오호, 흐린 세월의 늪 헤쳐 / 깨끗한 사랑 하나 닦아 세울 / 날랜 연인아 연인들아> 그의 언어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세상의 어떤 언어가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는가? [인상깊은구절] <맑은 날> 사람의 길은 하늘에 닿는다 // 그날 새벽에도 / 요강을 들고 나와/ 시린 푸성귀밭에 /자기의 마지막/ 따스운 오줌 한방울까지/ 철철 부어주고/ 그는 갔다 // 그날따라 하늘은 / 티 한점 없이 쟁명했나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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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91 시와 나락섬 ― 날랜 사랑 고재종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1995.5.10. 요즈음 시골에서는 헬리콥터를 흔하게 봅니다. 어느 때가 되면 마을마다 헬리콥터가 여러 대 떠서 새벽부터 저물녘까지 골골샅샅 날아다닙니다. 마을에 헬리콥터가 뜨면 집집마다 대문과 창문을 꼭꼭 닫습니다. 지지난해까지는 헬리콥터가 뜰 무렵 면소재지에서 면내방송을 해서 장독 뚜껑도 닫으라고 알렸으나, 지난해부터는 헬리콥터가 뜨든 말든 면내방송을 아예 안 합니다. .. 모진 돈들막 귀영치의 / 씨톨 하나도 깨우는 속삭임이여 / 논두렁 밑 양지녘엔 / 벌써 저리 냉이꽃 반짝이네 .. (우수) 요즈음 시골에서 뜨는 헬리콥터는 ‘농약 뿌리는 헬리콥터’입니다. 이제 시골마다 할매와 할배 나이가 대단히 많습니다. 그야말로 요즈음 시골마을 할매와 할배는 손수 농약을 뿌리기 어려운 몸이 됩니다. 마을 할매와 할배 말씀으로는 ‘마음 같아서 날마다 농약을 뿌리’고 싶다는데, 몸이 따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리하여, 마을마다 돈을 모아서 농협 헬리콥터를 빌립니다. 조금 덜 늙은 할매와 할배는 경운기를 끌고 손수 농약을 뿌리지만, 많이 늙은 할매와 할배는 돈을 들여 헬리콥터를 부르고는 신나게 농약을 뿌리도록 시킵니다. .. 사람의 한평생은 아름다워라 / 윗논에서 논을 갈던 칠순 박영감 / 옆논에서 보리 베는 김영감 불러 / 한됫박 탁배기를 나눠 마시듯 .. (새참) 헬리콥터 소리가 들리면 빨래를 걷어야 하고, 아이들을 모조리 집으로 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헬리콥터는 새벽부터 저물녘까지 골골샅샅 돌아다니니, 농협 일꾼이 낮밥이나 샛밥 먹느라 살짝 쉬는 때에도 빨래를 내다 널지 못합니다. 아이들이 마당에조차 나가 놀지 못하고 맙니다. 농약 뿌리는 때가 되면 아예 마을을 떠나서 도시로 나들이를 갑니다. 헬리콥터 소리가 귀청을 찢기도 하고, 농약 때문에 숨을 쉬기 어려우며, 빨래이든 집안일이든 도무지 할 수 없는데다가, 아이들은 시골에 살면서도 바깥에서 뛰놀지 못합니다. 별이 돋는 깜깜한 밤에 집으로 돌아오면, 아직도 농약 냄새가 자욱합니다. 재채기가 그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농약 헬리콥터가 돌아다닐 때부터 온 마을이 고요합니다. 헬리콥터 소리를 빼고는 아무런 소리가 없습니다. 개구리도 더 노래하지 않고, 제비도 몽땅 사라지며, 흔한 참새와 까치마저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습니다. 헬리콥터가 뿌리는 농약은 온갖 풀벌레를 싸그리 죽이고, 풀벌레를 잡아먹는 새까지 몽땅 죽음길로 내몹니다. 농약 뿌리는 헬리콥터가 온 마을과 들과 숲을 휩쓴 뒤에는 시골에 아무런 소리도 노래도 없는 나날이 이어집니다. 그저 경운기 소리와 마을방송 소리만 덩그러니 울릴 뿐입니다. 나비와 벌도 사라집니다. 이리하여, 오늘날 시골에서는 아이들 웃음소리도 목소리도 듣기 어렵습니다. .. 나락섬에 불을 지르고 돌아온 이제풍씨 / 속 끓는 아내가 차려주는 쌀밥을 먹는다 / 울대를 치는 오열도 함께 꼭꼭 씹어서 // 군청에 농기계를 반납해버린 오근선씨 / 군청 앞 식당에서 김칫국에 쌀밥을 먹는다 / 가슴 뿌리부터 치밀어오르는 걸 애써 누르며 .. (오늘도 쌀밥을 먹는다) 고재종 님이 빚은 시집 《날랜 사랑》(창작과비평사,1995)을 읽습니다. 시골에서 흙을 일구는 아재가 빚은 시집입니다. 늘 흙을 만지고 밟고 보듬고 돌보면서 삶을 일구는 고재종 님이니, 아무래도 고재종 님 싯말은 흙말이 됩니다. 흙에서 길어올린 노래요 시이며 이야기입니다. 흙을 먹으면서 사는 사람들 이야기가 흐르는 시입니다. 문득 우리 사회를 돌아봅니다. 요즈음에는 시골에서 흙 만지면서 시를 쓰는 사람을 찾아보기 매우 어렵습니다. 흙 만지면서 시를 쓰는 사람도 찾아보기 어렵지만, 흙 만지면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만화를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 사람도 대단히 드뭅니다. 흙 만지면서 춤·노래를 펼치거나 연극·영화를 이루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흙 만지면서 교사나 교수로 일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흙 만지면서 시장이나 군수 일을 하는 사람은 있을까요? 흙 만지는 국회의원은 있을까요? 흙 만지는 법관이나 의사나 공무원은 있을까요? .. 내 마음의 불타버린 작은 숲에는 / 세월의 바람을 정갈하게 빗질하던 / 고고한 솔 한그루 자라지 / 않는다, 거기 동박새며 뱁새떼 / 우수수 오르고 우수수 내리던 / 잡덤불 속 생의 따뜻한 숨결은 어디 / 갔는가, 꿈의 산정을 치닫던 노루 한마리 .. (불타버린 숲에서) 흙을 만지는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나 시장이나 군수는 아예 없다고 할 만합니다. 이리하여, 시골지기 삶을 헤아리는 정책이나 문화나 행정이나 교육은 아예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골 초·중·고등학교에서 교사가 학생한테 시골일을 가르치거나 보여주는 일은 없습니다. 시골에서도 학교는 모든 아이가 오직 서울이나 큰도시로 나가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고록 하는 시험공부만 시킵니다. 시집 《날랜 사랑》을 조용히 읽습니다. 앞으로 흙내음이 감도는 시는 얼마나 더 만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앞으로 시골에서 흙을 만지면서 시를 쓰겠노라 당차게 외칠 만한 사람은 나올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다니면서 시를 배우려는 젊은이 말고, 시골에서 손수 흙을 가꾸면서 시를 익히려는 젊은이는 나올 만할까 궁금합니다. .. 노타리 쳐서 물 방방히 실어놓은 / 내일쯤엔 모낼 논에 / 어디선가 날아내린 흰 고니 두 마리 / 그 긴 부리로 무언가를 콕콕 찍어댄다 .. (문득) 모든 사람이 꼭 흙을 만져야 한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나 ‘흙에서 자란 밥’을 먹습니다. 쌀밥이든 보리밥이든 흙에서 자랍니다. 시멘트나 아스팔트에서 자라는 나락은 없습니다. 딸기도 수박도 참외도 토마토도 능금도 포도도 모두 흙밭에서 자랍니다. 요새는 소와 닭과 돼지한테 사료와 항생제만 먹이지만, 예부터 모든 고기짐승은 짚이나 풀을 먹었습니다. 풀과 곡식을 먹을 적에도 ‘흙’을 먹는 셈이요, 고기를 먹을 적에도 ‘흙’을 먹는 셈이에요. 시골에 살든 도시에 살든 우리는 늘 흙을 먹는 삶이니, 흙을 만지지 않는다면 내 삶을 제대로 바라보기 어렵다고 할 만합니다. ‘흙을 만지지 않아도 삶을 이루지만, 흙을 만지지 않으면 삶을 삶결 그대로 바라보기 어려울’ 뿐입니다. 시골지기가 나락섬에 불을 붙여서 태우는 아픔이나 생채기를 함께 느낄 만한 ‘도시 이웃’을 그려 봅니다. 시골지기가 농약을 쓰도록 부추기는 현대문명을 헤아려 봅니다. 시골지기와 어깨동무를 하려는 ‘도시 이웃’이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가만히 손을 꼽아 봅니다. 4348.4.14.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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