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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친구와 일찍부터 술을 마시다. 얼큰하여 술집을 나서다. 일찍부터 마신 탓인지 아직 그리 늦은 시각은 아니었다. 서점에 들르다. 술값 치르고 난 뒤라 주머니 사정은 뻔한 터, 시집 코너로 가다. 어라, 눈에 띄는 제목에 동명이인이지만 눈에 띄는 시인의 이름.. 빼어들고 보니 친구가 "야 그거 너 얘기잖아."
그랬던가. 언제부터인지 술자리의 시끄러운 분위기 속에서도 나는 유리되어 있었고 무인도 속에서 혼자 지냈던 로빈슨 크루소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단 말인가. 집어 들고 집에와서 술기운에 읽어 내리다. 시인이 바라보며, 생각하며 술을 마신다는 그이는 누구일까? 누구이기에 그 역시 다른 이들에게 로빈슨 크루소라 불리우는 인물이 되었을까? 가끔씩 제목에 이끌리며 꺼내들게 된다. 로빈슨 크루소는 시 속의 인물일까? 시인 자신일까? 아님 나일까? [인상깊은구절] 취해도 쉽게 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는 우리는 오랜만이라며 서로 눈빛을 던지지만 어느새 슬그머니 비어비린 자리들을 세며 서로들 식어가는것이 보인다 가슴 밑바닥에서 부서지는 파도 저마다 물결 속으로 떠내려가는 것을 느낀다 오갈 데 없는 사람들 사이의 한 섬, 그 속에 갇힌 한 사람을 생각한다 외로움보다 더 가파른 절벽은 없지 살다 보면 엉망으로 취해 아무 어깨나 기대 소리 내서 울고 싶은 그런 저녁이 있다 어디든 흘러가고 싶은 마음이 발치에서 물거품으로 부서져가는 것을 본다 점점 어두워오는 바다로 가는 물결 무슨 그리움이 저 허공 뒤에 숨어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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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시읽기 노래책시렁 126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김수영 창작과비평사 1996.2.28. 낱말을 하나하나 벼리듯 글을 엮습니다. 밭을 한 땀 한 땀 온힘을 들여 가꿉니다. 설거지를 꼼꼼하게 합니다. 밥을 멋들어지게 차립니다. 꽃잎에 손끝을 대고서 눈을 감습니다. 두 팔을 벌려 폴짝폴짝 뛰면서 구름한테 나아가려 합니다. 마당에서 빙그르르 돌면서 봄날 찾아온 제비를 따라 휙휙 어깻짓을 합니다. 뚜벅뚜벅 걷고 보니 어느새 다 옵니다. 터덜터덜 걷다가 풀밭에 풀썩 앉아서 멍하니 해바라기를 합니다. 꾸벅꾸벅 조는 아이를 품에 안고서 고갯마루를 넘습니다. 언제나 똑같은 하루란 없습니다. 모두 다른 새날입니다.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은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기에 술이 떠오른다는 뜻일까요, 술을 바친다는 뜻일까요, 술을 같이 즐긴다는 뜻일까요. 여러 가지를 아우른 뜻이기도 할 테고, 심심한 하루를 털어내려는 몸부림이기도 할 테지요. 숲에 사는 늑대가 하늘에 대고 울부짖습니다. 숲을 파헤치는 모진 사람들 때문에 아파하는 숲을 그리면서 울부짖어요. 봄을 맞이한 풀개구리에 멧개구리가 봄비를 반기면서 노래해요. 목청껏 노래하고, 날벌레를 날름 잡고서 노래합니다. 어디로 튀든 좋습니다. 어디로 가든 길입니다. 눈가림을 하지 않는다면, 눈속임으로 겉몸을 감싸지 않는다면, 그저 노래가 됩니다. ㅅㄴㄹ 나는 이제 꼬리를 감추지도 않는다 / 송곳니를 숨기지도 않는다 / 허공을 향해 밤새도록 숨이 끊어질 듯 울부짖는다 (울부짖는 늑대/15쪽) 시냇물 따라 저도 모르게 꺽꺽 울다가 징검돌에 나앉아 사팔뜨기 큰 눈을 껌벅거리며 사방을 둘러본다 // 젖은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얼마나 맑은가 (난쟁이 청개구리/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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