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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사람들은 무엇을 의지해 살아가는 걸까? 예전에 아는 지인이 그런 말을 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그 슬픔에 어쩔 줄 모르다가도 가장 기본적인 욕구에 몸이 반응할 때 ‘이게 삶이구나, 나는 또 이렇게 살아가는 구나’ 했다고 한다. 어디 그것뿐일까? 내 삶의 의미 혹은 사람이 세상에서 사라졌는데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웃고 떠드는 모습에 당황했다고도 했다.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지 타인에게 소중한 사람들은 아니었을 테니까. 누군가를 보내고 다시 살아야겠구나 하는 의지는 얼마의 시간이 지나야 가능한 것일까? 아직 소중한 누군가를 보내본 적 없기에 나는 어떤 것도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죽음이 남의 이야기라고만 생각되지 않는다.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인가를 논하는 것처럼 이젠 어떻게 죽느냐에 대한 생각도 해야 하지 않을까? 또한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위해 가능하면 자살은 생각지 않았으면 좋겠다.
애위사(애도와 위안의 사람들)직원 차연은 장례식장에서 손예진을 담은 여자 원형과 마주친다. 그녀에게 관심을 가진 차연은 원형에게 말을 걸고 그 인연으로 술을 마시고 밤을 함께 보낸다. 자신은 함부로 여자에게 들이미는 사람은 아니라고 말하며 원형과 가까워지지만 그럴수록 불안하고 그녀에 대해 알고 싶어진다. 오래된 폴더 핸드폰,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이름이 적힌 보석함 등. 뭔가 기억이 떠오를 듯하며 떠오르지 않는다. 보석함에 적힌 이름은 언젠가 원형과 마주친 장례식장의 고인 중 한 사람. 묘한 느낌에 사로잡힌 차연에게 원형은 차연을 안다는 여자가 있다고 말한다. 그녀는 열세 살 이후 죽음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는 여자 이연. 이연은 동호회 회원 둘과 동반 자살을 시도했으나 홀로 살아남아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언제든 다시 죽으려 하는 이연을 차연은 조금씩 기억하게 되는데...
차연이 하는 일은 사랑하는 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 마음의 고통을 받는 이들을 위로하는 것이다. 애위사 사람들의 위로가 모두 성공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차연은 자신의 일에 충실하다. 이런 차연과 자살 희망자의 마지막 순간을 동행하는 안내인 역할을 하는 여자의 모습은 삶과 죽음, 뫼비우스의 띠와 같다. 삶은 시작이고 죽음은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반대 일 수 있다. 죽음이 시작이고 삶이 끝일 수도 있다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슬픔이 마음 안 가득 똬리를 틀고, 그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경우 또 다른 죽음을 만날 수도 있다. 뜻하지 않은 죽음도 있지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 그 자살이 외롭지 않도록 동행하고 뒤처리를 해주는 사람. 어떻게든 이 세상을 살게 하려는 사람과 스스로 선택한 죽음을 편안하게 안내하는 사람.
삶은 선이고 죽음은 악이라고 말할 수 없다. 살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고 교과서적인 이야기를 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나는 죽음을 안내하는 사람보다는 살 수 있게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람 쪽에 서고 싶다. 정말 죽고 싶은 사람의 마음을 일반적인 사람들은 알 수 없다나? 맞다. 알 수 없을 것이다. 나는 평범하게 자연적으로 순리에 따라 죽고 싶은 사람이니까.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내 죽음으로 남겨진 자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싶지 않으니까. 우울하고 힘든 사람들이 많다. 가끔은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담고 얼굴을 찡그리기도 한다. 그 어떤 것에 정답은 없지만 그래도 이 세상은 살아볼만 하다고 믿고 싶다. 그 믿음에 비록 발등 찍힐망정.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앞으로 이런 직업이 생길지도 모르겠다고. 죽은 사람의 영을 보여주고 그의 마음을, 심정을 말해준다면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 힘으로 살아가게 될 거라고. 죽음이 고통일 거라는 상상은 하고 싶지 않다. 누구나 죽는 것. 가끔은 죽음을 대하는 내 마음이 편안해지도록 죽음 역시 삶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싶다. 죽음과 동시에 세상은 또 다른 생명의 탄생이 이뤄지는 무수한 띠로 이뤄진 원과 같은 세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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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장애재활 클리닉 박하 한차현 장편소설
자살이라는 말이 이렇게 쉽게 나올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말이라는 것이 참 무서운것이 '배고파죽겠다' 자살자의 동행녀 원형이 네일아트를 받으러 오시는 분들은 손톱손질을 한다기보다는 손을 잡아준다는 기분을 쌓고 있다. 슬픔장애재활 클리닉이 바로 그것이다. 참 맘에 드는 단어의 조합니다. 세월호 참사를 겪은 다음이라서 일까 하나하나 따로 봐도 그렇고 다 같이 합쳐 봐도 맘에 든다. 남은 사람들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싶은 차연, 혼자 떠나않게 와롭지 않게 지켜봐주는 원형, 자살을 원하고 기어코 그길을 찾으려는 이연. 어떠한 결론을 내리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하지만 삶이라는 것은 결코 가볍지 않는 것을 말하고 싶다. 남은 사람의 슬픔도 알아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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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장애재활 클리닉 - 비로소 나는 안녕합니다, 당신들 덕분에
차연 - 원형 - 이연, 그리고 죽음. 죽음을 옆에 둔 사람들, 각자 다른 의미의 죽음을 옆에 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관계를 통해 죽음을 생각해보게 하는 책.
슬픔장애재활 클리닉 작가는 한차현이다. 그리고 이야기를 끌고가는 주인공은 한차연. 작가가 본인을 주인공으로 삼은 듯한~ 한차현 작가의 작품은 처음 접해보지만 다른 작품은 어떨지 궁근해지게 하는 설정이었다.
소설 속 자주 등장하면서도 처음 시작의 배경이 된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동네~ 그래서 현실인지 아닌지 검색해보게 만드는 이야기! 지나치게 과장되지도 한숨나게 평범하지도 않은 이야기. 주인공 차연은 슬픔장에재활 클리닉을 만들고자하는 꿈을가지고 경험을 쌓는 중이다. 가까이에서 죽음을 접하고, 현실에서 방황하는 슬픔이라는 장애를 가진이들.. 그리고 그들이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도록 봉사하는 사람들. 그게 차연이 하는 일이다.
오랜 연예에 실패한 사람. 평생 헌신했던 조직으로부터 졸지에 배신당한 사람. 이십 년 동안 모은 돈을 한 순간 날린 사람. 지치지 않은 의욕과 열정 끝에 뭔가를 이루어냈건만 그럼에도 '내가 꿈꿔왔던 게 고작 이거였던가' 싶은 허무를 만나고 만 사람. 슬픔을 위로받을 권리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세상에 없어요. 안그렇습니까? P.104
슬픔의 종류는 다양하다. 비록 책 속에서는 죽음을 배경으로한 슬픔장애를 가진사람들만 등장하지만 슬픔장애애는 죽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한다.
그리고 죽음을 지켜주는 사람들. 원형이 봉사하는 모임에서 하는일이다. 차연이 하는 일과는 정반대로 죽음을 선택한 이들이 죽음을 이루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들의 마지막을 지켜봐주는 일이다.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막으려해도 결굴 죽음을 선택한다는 이론이다. 그들의 죽음을 막을 수 없다면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고 실패의 후유증이 남지않도록 도와야 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선 이연. 죽음에 실패로 동반자살을 시도했던 친구들을 잃고 '애위사'에서 차연을 만났고, 그리고 4년 후에는 원형을 만났다. 죽음을 선택한 이연을 죽음으로 이끌려는 원형의 일행과 다시 이연을 위로하려는 차연. 그 사이에서 이연의 선택은...
죽으려고 마음먹었던 사람은 계속 죽음을 옆에 두고 살테니 그냥 죽음을 맞이하도록 도와야한다는게 정당한 것인가? 우리가 주변에 있는 그들이 그렇게 떠나가도록 두는 것이 옮은 것인지. 생각보다 죽음은 가까이 있음을... 이야기하는 책. 그저 멀게만 느껴지고 남의 이야기일꺼라는 막연했던 생각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었다. 슬픔은 생각하면 우울에 빠지게 할 거라던것과는 달리 생각할수록 의연해지게 한다. 더 단단해지게 한다. 그렇지만 무뎌지는 것은 아니다.
슬픔에 대한 편견을 깨주는 경험을 하게 해주는 이야기. 슬픔장애재활 클리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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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해 전부터 유난히 유명인들의 자살이 매스컴을 달궜다. 이 자살은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베르테르 효과라 하여 유명인의 자살을 모방하는 사례까지 있었다. 내 주변에도 우울증을 호소하거나 슬픔을 견디지 못해 자신을 괴롭히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 어떠한 이유에서건 이 슬픔의 결말이 자살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 죽음을 선택해야 했을까? 아무리 생각해 보지만 납득할 만한 근거가 없다. 그러나 죽은 이들은 말을 못하니 여러 가지 억측이 난무하다. 오히려 죽음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것이 더 설득력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참 묘한 소설이다. 애위사에 애도와 위로의 차연, 죽음을 안내하는 그녀 원형, 자살에 실패한 여자 이연이라는 인물 말이다. 이들은 묘한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 듯 하지만 마치 하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우연 아니 필연이었을까 차연과 장례식장에서부터 계속 인연이 되었던 원형... 그리고 집단자살에서 살아남은 이연을 각자 다른 방법으로 도우려는 두 사람이다. 차연이 마지막에 자신이 이연에게 계속 전화하겠다며 전화를 받으라는 것도, 이연에게 전화를 해도 좋다는 말도 의미있게 와 닿는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심히 우울하다.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주변사람들이 은근히 떠오르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의 어둠과 우울을 감춘 채 평범하게들 살아간다. 그렇지만 내면에 해결하지 못한 숙제들로 얼룩져 있다. 정말 자살유전자는 타고 나는 것일까? 자살이란 용납 가능한 방법이 아닐뿐더러 해결방안이 될 수 없다. 간혹 이런 생각을 한다. 천국이며, 지옥이며 상상 속에 있는 그곳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천국이 될 수도 지옥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가 당면한 이곳 바로 현실 속에서 우리는 극복과 도전을 통해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의 주인은 바로 나인데 그 인생조차 책임질 수 없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세상에서 당당히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서로 돕는 공생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날로그적 삶의 방식이 점차 쇠퇴하고 디지털화 되는 것이 너무 비인간적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좀 더 정적으로 삶을 온전히 이끌 수 있는 평화로운 시대가 왔으면 좋겠다.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처럼 오늘부터 나의 슬픔을 주변과 나누고 기쁨도 함께 나눌 수 있는 건강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랜만에 많은 생각을 갖게 하는 책이다.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소설이 되었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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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고, "슬픔장애재활클리닉은 정신적인걸까, 육체적인걸까?"란 생각을 했다. 차근차근 읽어나가다 보니,책은 술술 읽혀진다. 그리고 결론은 정신적인 '슬픔장애'였구나이다. '슬픔장애 재활 클리닉'은? 한때 방송에서도 많이 나오던, 자살모임을 가진 사람들과 관련된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슬픔장애 재활 클리닉'속 주인공? 한차연. 한차연이 하는 일은 처음 들어보는 직업이라 생소하면서도 호기심이 갔다. 정말로 있을법한 직업이라고 생각되어 찾아보았다. 없다...있을법한데...내가 모르니 검색을 더이상 할 수 없구나...ㅜ.ㅜ
죽음을 맞이한 후 남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일을 한다. '책을 읽으며 어떻게 위로를 하지?'했는데, 무속인이 있어, 죽은사람과의 접촉을 통해 산 사람과의 소통을 하면서 위로를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며 지내는 한차연. 손예진을 닮은 한 여자를 만나며 일이 발생하고, 자살모임을 알게 되며, 자신의 기억저편에 있던 한 여자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자살모임의 사람들을 만나며... 대충 이런 이야기이다. '슬픔장애 재활 클리닉'을 읽으며 나는 생각한다. 떠나는 사람은 슬프지 않다. 남은 사람이 슬플 뿐이다.-아루렐리우스<명상록> 이말에 완전 공감을 한다. 누군가의 죽음, 불의의 사고로, 혹은 자살로 죽음을 맞은 뒤에 남겨진 사람들이 슬프고 힘들지, 죽은사람은 말이 없다.
이글을 읽으며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속의 슬픔장애는 다 갖고 있지 않을까 싶다. 슬픔장애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 되었다.
죽음보다는 살아있어 다행이라고 생각을 하지 않는가?
우리모두 위로 받으며 살자. 가까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너도 나도 서로가~~
한우리 서평단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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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스럽게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겪어 본 일은 아직 없다.. 하지만 감히 죽을 만큼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을 겪어 본 기억은 있다. 숨을 쉴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없고 몸은 일상을 겪고 있지만 정신은 허공에 떠도는 기억이 었다. 죽음과 다르다면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데 보게 될까봐 그것도 그 사람 곁에 다른 연인이 함께 하는 것을 볼까봐 전전긍긍했다는 것이다. 죽음은 완전히 다를 것이다. 결코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이기에 이별과는 느낌이 다를 것이다. 죽음이나 이별을 통해 마음을 추스리기 힘든 사람들은 주변의 도움이 필요하다. 속으로 침잠하기도 하고 죽음을 선택하기도 하고 각자마다 다른 선택을 한다. 일상이 힘들어지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할까? 소설의 소재는 그래서 무릎을 치게 만든다. 작가의 이름과 비슷한 주인공은 한차연이고 애도와 위안의 사람들의 직원이다. 그는 문상을 왔다가 <아내가 결혼했다><무방비도시>를 찍던 손예진을 닮은 여자를 만난다. 그녀는 홀로 밤을 세우기에 그는 밤을 세울거란 기대를 안했고 후회도 하지만 아침이 되어 떠나는 그녀를 따라가 함께 아침을 먹고 전화번호를 따는 데 성공한다. 떠난 사람을 잊지 못해 불행한 가족들을 위해 혼령을 불러 이야기를 나누고 편안하게 보내주기 위해 설득을 한다. 그런데 그 후 남은 가족이 자살하는 일이 슬프게도 종종일어나고 장례식장으로 문상을 가야하는 경우가 있다. 직원들 서로 가기 싫어하지만 결국은 누군가 가야 한다. 차연은 중학생인 아이의 문상을 가는 일을 맡는다. 그 아버지는 뺨을 후려치지도 저주를 퍼붓지도 않고 오히려 덕분에 딸아이가 며칠 동안 행복했다고 감사한다. 이럴 경우는 오히려 더 힘들다. 차연과 원형은 가까워지고 원형이 만들어 준 자리에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 모임은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걸 쉽게 생각하지 않는 모임이고 차연은 자살자를 위해 생명이 끝나가는 순간 곁에서 지켜봐준다는 걸 알게 된다. 성이연은 사흘 뒤 자살 예정이다. 그는 자살을 하려다 동료들만 죽은 후 살아가고 있는 인물이다. 원형과 성이연, 차연은 다른 사람들이다. 죽음에 대한 생각도 삶도 그러나 그들은 서로 얽혀 있다. 그리고 도우려고 한다. 비록 도우려는 방식이 다르긴 하지만 말이다. 평소 슬픔에 빠진 사람을 도와주는 일을 잘 하지 못한다. 그간 슬픔을 겪으면서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하고 비난 받은 일이 많다보니 슬픔을 표현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슬픔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는 것 같다. 슬픔은 표현해야 하지만 도와주는 방법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할까? 진정으로 위로하고 도와주는 것이 타인의 입장에서 가능할까? 소설을 읽는 내내 이런 의문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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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제목만 접했을 때에는 심리학 책인줄 알았다.
슬픔장애라는건 어떤걸까-하는 생각을 하며 먼저 보았던것 같다. 어쩌면 슬픔을 못느끼는 장애일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슬픔을 과하게 느끼고 있는 장애 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더불어 표지의 잔잔한 모습이 너무 예쁘게 다가오는것 같았다. ![]() 이 책의 화자는 작가 자신이다.
주인공 이름이 한차현이기 때문인데, 한편으로는 작가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책을 읽는 내내 주인공 이름을 외우다보니 자연스레 작가 이름을 외우게 만드는 그런 엄청난 일을 무의식중에 심어버렸기때문이였다. 더불어 책이 재밋었기때문에 나도 모르게 다음 책이 나온다면 또 보게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었다. 어쨋튼 ! 주인공인 차현은 애도와 위안의 사람들 이라는 곳에서 일을 한다. 소위 애위사 라고 부르는 곳. 애위사는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힘들어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 해주는 전문 업체(?)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한 장례식장에서부터 시작된다. 차현은 그 곳에서 하룻밤을 꼬박 지새며 손예진을 닮은 원형을 보게 된다. 그리고 따라가서 그녀에게 밥을 먹자고 하고, 번호를 따낸 후 몇일 후에 전화까지 걸어서 다시 만난다. 그리고 그 둘은 술을 머리 끝까지 마시게 되고 자연스레 원형의 집으로 와서 자게 된다.(물론 순수하게 자게 된다) 그렇게 인연이 닿게 된 두 사람. 원형의 이야기로는 차현을 알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궁금하기도 한 차현을 원형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함으로써 조금씩 풀어가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면서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고, 그 사람과의 묘한 인연이 밝혀지게 되면서 또 다른 모임이 알려지게 된다. 책을 읽는데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잘 읽히는 책이였고 재밋게 읽은 책이였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더라면, (나만 어려웠던 점일수도 있는데) 가끔 가다가 이게 도대체 누구 얘기지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몇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던 부분이 두세군데 정도 있었던것 같다. 이 책을 보면서 죽음과 삶에 대해서 많은 생각하게 했던 것 같다. 나로 인해서 누군가가 슬퍼한다면, 내가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면.. 그리고 어디선가는 한번쯤 얽혔을 수도 있다는 그런 것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했었다. 차현이 차리고 싶다고 말했던 곳이 '슬픔장애재활클리닉'이였다. 만약 그런 곳이 생긴다면 - 사람들이 당당하게 많이 이요할 수 있을까? 하는 슬픔 의문과 그런 곳이 생긴다면 자신의 감정을 못이기고 조절 못하는 사람이 줄어들 수 있겠다는 기대감을 같이 갖게 생각하는 책이였다. *본 서평은 한우리 북카페에서 제공받은 책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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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장애재활클리닉]슬픔장애증후군에 대처하는 소설~
기쁨을 나누면 두 배가 된다고 한다. 슬픔을 나누면 반으로 준다고 한다. 하지만 기쁨 바이러스처럼, 슬픔 바이러스도 전염성이 강해서 더 확산되는 건 아닐까. 세월호의 참사를 보며 전 국민이 우울 모드에 빠지는 걸 보면 말이다. 그래도 슬픔을 나누어 작은 위로가 된다면 기꺼이 나누고 싶다. 우린 이웃이니까.
어쩌면 일생동안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필요하지 않을까. 삶이란 축복이면서도 고통이기도 하니까. 행복이면서도 슬픔이기도 하니까. 각본 없는 드라마기에 하루에도 여러 번 기쁨과 슬픔이 교차 한다.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하고, 타인을 위로하기도 한다. 그렇게 우린 인생을 살고 있다. 만약 오랜 슬픔을 간직한 슬픔장애인이 있다면 어떤 위로가 필요할까. 어디에 전화를 해서 비상위로든 긴급위로든 받아야 할까. 소설에서처럼, 애위사.
애위사. 애도와 위안의 사람들. 슬픔을 넘어서는 마음의 힘. 명함에 있는 이름은 한차연. 작가랑 닮았다. 훗~ 작가의 의도일까. 나중에 한차현도 등장한다. ㅋㅋ
사랑하는 이를 갑자기 잃었을 때, 그 슬픔 그 허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세상 누가 우리의 고통을 위로해줄 수 있을까요? 슬픔을 넘어서는 마음의 힘. 애도와 위안의 사람들.(책에서)
애위사가 하는 일은 이런 거다. 6살 민서가 유치원 승합차를 탔다가 교통사고로 죽게 되자 그 가족들에게 민서를 위한 진혼의식을 치러주는 일이다. 장례식장에서 밤샘을 해주는 아르바이트는 기본이다. 우울증으로 자살한 부인을 위한 위로제를 하기도 하고, 유명 아나운서의 자살의 원인이 된 야구선수 문제를 해결하기도 한다.
첫 부분이 눈길을 끈다. 손예진을 닮은 문상객…….<클래식>의 손예진이 아니고, <아내가 결혼했다>의 손예진을 닮았다. <오싹한 연예>의 손예진이 아니고 <무방비도시>의 손예진을 닮았다. 그렇다면 소설의 분위기도 그렇다는 얘기다. 장례식장 103호의 31세 남성은 차에 연탄불을 피워 자살했고 개인 부채가 8천만 원이라는데……. 남색치마에 하얀 이마, 손예진을 닮은 문상객은 혼자서 밤을 새는 이유가 무엇일까. 애위사 명예를 걸고 장례식장 투어를 하고 있는 차연은 104호에서 밤샘을 한다. 병원을 나오면서 손예진을 닮은 여자를 쫓아 아침을 함께하게 된다. 손예진을 닮은 여자는 누구일까, 차연의 직업적인 애도와 위로가 슬픔을 가진 이들에게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슬픔은 삭히는 게 아니라 떠나보내는 거라고.(62쪽)
네일 아티스트 원형과 애위사 직원 차연의 만남. 카페 페이스에서 만난 슬픔장애재활클리닉 멤버들. 원형이 간직하고 있는 보석함이 든 상자와 구형의 은색 애니콜 폴더 전화기. 죽은 이들을 위로하고 싶다는 의뢰인 성이연. 하지만 정작 위로가 필요한 건 그녀였으니……. 진정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그녀 자신이라니! 죽은 이보다 더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남은 자들이었다니! 죽음은 삶의 완성인가 아니면 또 다른 시작인가. 성이연과 원형은 동일 인물일까.
자살 안내자들의 이야기, 자살 클럽 이야기가 섬뜩하게 다가온다. 자살은 클리닉의 한 방법이 아닐 텐데…….
마지막에 펼쳐지는 차연과 성이연, 흰 와이셔츠 남자 이야기는 그대로 스릴러다. 죽음을 막기 위한 숨 막히는 접전! 이들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마주하는 이야기가 무슨 미스터리 같다.
깊은 슬픔도 오래가다 보면 슬픔장애가 된다. 치유가 힘들거나, 헤어나기 힘들거나……. 그래서 심한 우울증에 빠지기도 한다.
애위사. 이런 직업이 실제 있을까. 일본에서는 인생응원단이 있다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인생응원단은 은퇴 노인들이 주축이 되어 기운 잃고 힘든 이들에게 힘찬 응원을 보내는 일을 한다.
모두가 위로가 필요한 세상. 누가 누구에게 위로를 해야 할까. 누구나 죽음은 피할 수 없다. 그러니 죽음은 늘 곁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담담하게 맞을 수밖에.
삶이 호락하지 않듯, 죽음 또한 호락하지 않다. 생도 선택의 여지가 없지만 죽음도 선택의 여지가 없는 법이다. 물론 더불어 함께하는 위로하는 이가 있다면 더욱 힘이 되겠지. 그래도 애초에 생을 사는 동안 결국 슬픔도 오롯이 홀로 견딜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죽은 이의 넋을 위로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남은 자들의 슬픔도 위로해야 하는데…….
과학이 해결해 줄 것인가. 종교가 해결해 줄 것인가. 우린 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방황하다 삶을 완성한다. 과학이 좀 더 발전한다면 이생과 저승을 연결하는 화상통화가 가능해질까. 아니면 웜홀을 타고 이승과 저승을 왕복할 수 있을까.
슬픔장애에 대처하는 소설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지게 한다. 밥 잘 먹고 잘 자고 마음껏 웃자. 억지로라도...... 처음 읽는 저자의 소설이지만 글맛이 있다. 다음 소설도 기대가 된다.
** 한우리 북카페 서평단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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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일이나 나쁜 일이나 그것이 타인의 것일 때에는 작게 보이지만 내것일 때에는 무척 크게 느껴지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생각일 것이다. 가족을 혹은 가까운 이들을 먼저 떠나 보내는 아픔을 겪은 이들은 타인의 고통을 나누어 가지는 일에 어찌보면 좀더 능숙해질 수 있다고 본다.한번 겪어 보았기 때문에 좀더 고통 대처에 처음인 사람보다는 의연함이 있다.하지만 큰 일을 처음 겪는 이들은 슬픔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헤매이는 이들도 있는게 그 슬픔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슬픔으로 자신의 생을 가두는 이들도 종종 보게 된다. 실례로 친정아버지를 보내 드리며 나 또한 심한 고통에 시달렸고 바로 몇 달 후에 애견이 갑자기 죽는 일이 발생해서 그 해를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게 몸과 마음이 몹시 고통에 시다렸다.마음이 괴로우니 몸에서 여기저기 빨간불이 들어와 타인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친정엄마가 몹시 힘든 시간을 보내셨는지 갑자기 혈압이 생겨 약을 드시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약을 드시고 계시다. 엄마는 아버지를 보내드린 큰 아픔에서 몸과 맘이 많이 상하셨다.이제 어느 정도 단련이 되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그 후유증은 몸이 기억하고 있는 듯 하다.
슬픈 일을 한번 겪고 다시 겪게 되면 단단해져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슬픔 안에 자신을 가두게 되는 경우가 있다. 내것이 아닐 경우에는 잊어버리라고 쉽게 말할 수 있지만 쉽게 잊혀지지 않는 슬픔이 있다. 평생 가슴에 남아 자신을 짓누르는 슬픔에 아파하고 치유가 되지 않아 슬픔장애에 빠졌다면 누군가는 치유를 해줘야 할텐데 그런 일을 하는 일들이 여기 있다. [애도와 위안의 사람들] 일명 '애위사' 에 차연은 슬픈 일을 겪은 이들을 찾아가 그들의 슬픔을 달래주는 일을 한다. 자식을 먼저 보냈거나 혹은 부모님을 보내드렸거나 죽음이라는 이유에도 가지가지가 있다. 누군가는 먼저 떠나보낸 이들은 한동안 슬픔에 빠져 자신의 일상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걷도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이들이 '애위사'에 일을 맡긴다. 영혼을 불러내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편안하게 보내주는 형식적이지만 그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슬픔을 다독여 준다. 그렇게 삶과 죽음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듯 장례식장을 밥먹듯 드나들면서 보내는 차연,그의 눈에 어느 젊은 죽음 앞에서 의연하게 혼자 지키고 있다가 꾸역꾸역 밥을 잘 챙겨 먹는 젊은 여자를 발견,그녀는 손예진을 닮았다는 이유로 쫒아가게 되고 그녀와 밥을 먹고 그녀의 원룸에까지 찾아가게 된다. 그녀의 정체는 무엇일까.
차연이 '애위사'라면 손예진을 닮은 여인은 자살을 하는 이들의 마지막을 지켜 주고 마지막 가는 길까지 끝까지 지켜주는 모임의 한 여자라고 해야하나.암튼 그렇게 하여 둘은 묘하게 얽혀가게 된다. 그가 내민 명함의 '애위사'를 알아 보게 해주었던 인물이 있다고 말한 그녀,그렇다면 애위사를 말해준 여자는 누구일까? 원형이 그녀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하여 찾아갔던 곳에서 뜻하지 않은 일을 겪게 되고 그녀의 '성이연'을 찾아 헤매이다 자신의 고객이기도 하면서 그녀와 함께 잠을 잤다는 것을 생각해 내면서 그녀를 '자살'이 아니라 동생과 남은 삶을 살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 그녀가 자살을 택하게 된 것일까? 거기에 혹시 자신의 술버릇 때문에 함께 잔 과거가 한몫을 하는 것은 아닌지. 차연은 애위사 일을 하면서 '슬픔에 빠진 사람을 위로하는 일이,그럼 쉬울 줄 알았어요? 이번 기회에 알아둬요. 슬픔은 삭히는게 아니라 떠나보내는 거라고." 라고 말하며 슬픔을 떠나보내지 못하여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삶의 희망을 찾아 주기 위하여 부던히 애를 쓰다가 만난 자신의 과거속 인물인 성이연을 꼭 삶의 희망의 그늘로 끌어 들이려 노력을 한다.
슬픔 한가지 간직하지 않은 이들이 어디 있을까? 길을 막고 물어보면 모두가 슬픈 일 한가지 안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모두가 슬픈 것은 아니다 삶의 희망을 찾아 죽음이 아니라 삶이라는 바다에서 유영하기 위하여 열심히 담금질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그렇지 못한 이들이 가끔 있다. 성이연처럼 아직 어린 동생이 있지만 엄마가 폐암으로 돌아 가시고 자신에게 안겨진 슬픔을 이기 못해 자살을 꿈꾸는,아니 실행에 몇번 옮겼지만 아직 기회가 오지 않은 이들. 그들이 삶을 마감하게 도울 수는 없다.어떻게 해서든 살게 해야한다.죽음이 불러 온 빈 공간을 다른 무엇으로도 채우지 못하고 슬픔에 허덕이는 슬픔장애증후군이 있는 이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었던 애위사 차연과 자살하는 이들의 마지막까지 지켜보는 일을 하는 네일아트 원형이 러브라인이 그려지는 듯도 하고 미스터리식으로 풀려 가는 것도 갔았지만 결론은 아니라는 것.가끔 어느 프로에서 보면 가족이 슬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서로에게 골을 만들어 가족을 단절시키는 경우도 종종 보았다.그런 가족에게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연습을 시키듯 서로의 입장에 되어서 과거와 현재의 상황극을 통해서 서로를 이해하고 단절의 벽을 허무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한 아주 자그마한 슬픔이나 그외 일들이 얼마나 큰 단절을 혹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지 그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연습이나 재활클리닉이 현대인들에게 필요한지도 모른다.요즘 흔하게 힐링이나 치유라는 말을 듣게 되는데 많은 이들이 공감을 하는 단어일 듯 하다.그만큼 현대는 알게 모르게 마음의 병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시대인데 큰 슬픔을 간직하고 있으면 마음이 병은 더 클 듯 하다.
물도 고이면 썩게 마련이다.슬픔도 마음에 고이면 병이 된다. 슬픔을 삭히지도 못하고 떠나보내지도 못하고 마음안에 가두어 병을 만든 이들이 마지막 탈출구처럼 '자살'을 선택하게 놔두어서는 안된다.그러지 않아도 우리는 자살율이 제일 높은 나라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데 흥을 많이 간직하고 살아왔던 우리가 왜 이렇게 변해 버린 것일까? 너무 '빨리빨리' '대충대충'을 외치면서 냄비처럼 빨리 끓었던 것은 아닐까.로또 하나에 인생역전을 꿈꾸며 인생한방을 꿈꾸는 이들이 과연 로또로 인생역전을 만들었을까? 쉽게 얻은 정상은 쉽게 내려오기 마련이고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게 마련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저 남이 내린 결론에 편승하여 '빨리빨리'를 외치던 우리들은 너무 빨리 달려가려고만 했기 때문에 자신을 돌아보며 슬픔을 떠나보낼 시간적 여유를 갖기 보다는 그냥 지나쳤던 것은 아닐까? 현재가 고통스럽다고 슬프다고 죽음이 답일 수는 없다. 한번 현실에 부딪혀 보지도 않고 자신의 삶에 종지부를 찍는 다는 것은 너무 허무한 일이다.성이연이 자신이 내린 결론에서 벗어나 차연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한번 다시 살아보겠다는 의지로 보인다.자신의 죽음에 반기를 든 애위사 차연이 그리고 차연에게 성이연이 자신들이 처한 현실에 희망이길 바래본다.사랑은 사랑으로 치유하고 사람은 사람으로 그 아픔을 달래는 것이다.모두에게 슬픔장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치유의 시간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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