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이 책의 저자 알랭 드 보통도 프루스트의 작품을 애정하는 독자 중 한 사람이다. 또한 한국인이 사랑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한국인 정서에 맞는 책을 쓴 저자가 프루스트에 대해 어떻게 적었을지 궁금했다. 이 책 내용을 살펴보면 프루스트가 천식이라는 고통과 싸우면서 만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뿐만 아니라, 프루스트가 주변인들과 주고받은 편지, 대화, 그리고 프루스트의 삶을 보여준다. 그 속에서 작가가 느낀 통찰을 통해 우리가 삶을 현명하게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프루스트의 작품과 삶을 근거로 깨달은 통찰을 적어놓은 자기 계발서 같기도 하다. 또 다른 특징이 있다면, 이 책에는 프루스트 작품의 배경지식들이 꽤 많이 나오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에서 어떠한 점들을 바꿀 수 있을까? 책의 인상적인 구절을 몇 가지 가져와 본다. 성공적으로 고통받는 방법에 대한 내용이다. p95 한 사람이 경험하는 고통의 정도와 그 결과로 그 사람이 가지게 되는 사고의 깊이와의 관계를 그가 정의했다는 사실만으로 어쩌면 충분하지 않을까? 이것은 마치 정신이 까다로운 기관이다 보니, 어려운 사건들로 인해 부득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기 전까지는, 어려운 진실들을 한사코 받아들이기를 거절하는 것만 같다. “행복은 몸에 좋지만, 정신의 강인함을 발달시켜주는 것은 바로 슬픔이다.” 이 슬픔은 우리가 더 행복한 시절이라면 회피했을 일종의 정신적 체육 활동을 거치도록 해준다. 실제로 그와 말에 담긴 암시란, 우리가 정신 능력의 발달에 진정한 우선순위를 둔다면, 우리는 만족보다는 오히려 불행한 채로 있는 편이 더 나으리라는, 그리고 플라톤이나 스피노자를 읽는 것보다는 오히려 괴로운 연애를 추구하는 편이 더 나으리라는 것이다. … 연인이 충성을 맹세한다면, 우리가 왜 굳이 인간의 배신행위의 역학에 관해서 숙고해야 할까? 우리의 모든 만남을 존중해야 한다면, 왜 우리가 사회생활의 굴욕에 관해서 조사하고 싶은 의욕이 생기게 될까? 오직 슬픔 속에 빠졌을 때에야만 비로소 우리는 어려운 진실에 맞서고자 하는 프루스트적인 자극을 받게 된다. 모든 일에는 행복과 불행은 같이 온다. 행복한 일 뒷면에 고통이 숨어 있고, 고통스러운 일 뒷면에는 나를 강인하게 하는 정신력과 힘, 그리고 고통을 극복했을 때는 더 나은 결과를 가져다주는 행복이 숨어 있다. 고통스럽기만 한 상황에서 고통의 이면을 돌아볼 수 있는 지혜가 있다면 그 과정이 조금은 더 견딜만하지 않을까? (물론 이 진리를 프루스트는 이미 알고 고통을 즐기고 있었지만 말이다.) 책을 내려놓는 방법에 대한 내용 중 일부이다. p246 “사람이 무엇을 스스로 느끼는지를 자각하는 방법으로 말하자면, 어떤 거장이 어떻게 느꼈는지를 스스로 재창조하려고 시도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을 느끼는지 알기 위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책을 읽어야 한다. …… 프루스트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책은 우리가 느끼는 바를 충분히 자각하게 만들어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책이 우리를 눈뜨게 해주고, 우리를 예민하게 만들고, 우리의 자각 능력을 향상시켜줄지는 모르지만, 어느 시점에 이르면 그런 작용은 중지되고 만다. 이런 중지는 우연에 의한 것도, 가끔 그런 것도, 운이 나빠서 그런 것도 아니며, 다만 불가피한 것이고, 오히려 자명한 것이다. 왜냐하면 저자는 우리가 아니라는 순전하고도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어떤 책을 읽든지 우리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 오해되는 강제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 순간을 직면하게 마련이고, 그때부터는 인도자를 뒤에 남겨놓고 자신의 생각을 혼자서 이어나가야 할 책임감을 느낀다. 이 책의 마지막 파트이기도 하다. 프루스트의 작품을 읽다 보면 헤어 나오지 못하는 독자들도 많을 것이다. 나 또한 다른 의미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 나 같은 경우는 이해가 잘 안되서 허우적거리기 바쁘기 때문이다. 작품을 읽다가 보면, 프루스트를 숭배하게 되고, 레오니 고모가 마들렌을 사 온 제과점에도 가보고 싶을 뿐만아니라, 콩브레를 방문하고 싶은 유혹도 생긴다. 그러나 작가 보통은 마지막 부분을 이렇게 끝맺는다. p271 프루스트에게 바치는 진정한 경의는 그의 눈으로 우리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지, 우리의 눈으로 그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은 아닐 테니까. … 우리가 프루스트에게 바칠 수 있는 최상의 경의는 일찍이 그가 러스킨에게 내린 것과 똑같은 평결을 그에게도 내리는 것이리라. 즉 그의 모든 자질 때문에, 그의 작품에 너무 오랜 시간을 소비한 사람들에게는 결국 그의 작품이 어리석고, 광적이고, 속박되고, 거짓되고, 우스꽝스럽다고 증명되리라는 것이다. … 독서를 훈련으로 만든다는 것은 동기에 불과한 것에 너무 큰 역할을 부여하는 일이다. 독서는 정신생활의 문턱을 넘나드는 것이다. 독서는 우리를 정신생활로 이끌어준다. 그러나 독서 자체가 정신생활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책이라고 해도 결국에는 충분히 내던져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프루스트가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매료되었는데, 이 부분을 이해하고 책을 읽으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인상주의의 견해는 이렇다. 우리의 생각은 실제 현실과는 일치하지 않는데, 이 생각이 종종 오도된 보고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습관에 의해서 형성된다. p144 모든 성공적인 예술작품에 현존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특히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현실의 왜곡된, 또는 간과된 측면을 우리의 시선에 복원해 주는 능력이다. 어쩌면 프루스트의 글들이 지극히 주관적이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인상주의 화가들의 생각과 서로 통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우리가 현실을 왜곡하든 왜곡하지 않든 우리가 느끼는 감각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기에 본연의 의도를 찾더라도 결국엔 해석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프루스트 작품의 해석이, 해석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해석하고 있는 것 자체가 어쩌면 모순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중 어떤 순간을 사진처럼 기억하고 싶으신 분, 프루스트의 작품을 읽으면서 배경지식을 더 앍고 싶으신 분, 프루스트가 전하는 삶의 지혜가 궁금하신 분들께 이 책을 추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