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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트러지지 말게. 안 그러면 수레바퀴 아래에 깔리고 말 테니까.” 이 책의 주인공인 한스가 신학교의 교장에게서 들은 말이다. 독일의 작은 시골에서 태어난 한스 기벤라트는 목사, 선생님, 아버지, 학교장까지 그 지역의 모든 기대를 받는 아이다. 한스는 어린 시절의 행복을 모두 포기하고 신학자나 학자가 되기 위해 학업에 매진하고, 매우 우수한 아이들만 갈 수 있는 신학교의 학생을 뽑는 주 시험에서 차석으로 합격하게 된다. 신학교에서 더욱 노력해 상위권을 유지하지만, 신학교에서 만난 자유롭고 학업보다는 시와 예술에 관심이 있는 헤르만 하일너와 친해지게 되고, 그 영향을 받은 한스는 하일너가 퇴학하자 결국 다음해 신경쇠약으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집으로 돌아오자 주변에서의 시선은 완전히 뒤바뀌고, 한스는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우울감에 시달리게 된다. “한스, 기계공이 되고 싶냐, 서기가 되고 싶냐?” 한스는 아버지가 이 말을 했을 때 굉장히 놀라 했다. 그리고 나도 놀랐다. 어떻게 지금까지 이렇게나 열심히 한 한스가 기계공이나 서기를 할 수 있나. 그런데 1800년대 말 독일에선 그랬다. 한번 미끄러지면 다시 일어날 수 없다. 나는 이때 “수레바퀴” 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것 같았다. 세상은 거대한 수레바퀴이다. 그리고 그 수레바퀴는 계속해서 굴러간다. 수레바퀴 위는 상류층, 부자들과 학업에서 성취를 얻어낸 사람들, 수레바퀴 아래는 “낙오자” 들이 수레바퀴에 깔린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수레바퀴 위에서 열심히 뛰던 사람들 중 일부는 수레바퀴에 깔리게 된다. 즉, 계속해서 뛰지 않으면 깔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에도 수레바퀴가 존재할까? 과거에나 현대에나 수레바퀴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 수레바퀴의 종류는 제법 다르다. 현대의 수레바퀴는 수레바퀴에 깔리더라도, 다시 수레바퀴 위로 올라올 수 있는 “발판”이 있다. 현대에서는 비록 쉽진 않더라도, 자신이 어릴 때 성적이 나쁘더라도, 어른이 되어서 사업 등 다양한 발판들이 존재한다. 또한, 현대에 빈부 격차가 커지고 있다고는 하나, 여전히 “중간”이 존재한다. 즉, 수레바퀴 위도, 아래도 아닌 사람들이 존재한다. 반면에, 한스가 살던 시대의 독일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어린 시절, 일부 특출난 아이들만 수레바퀴 위로 올라가고 나머지는 아래에 깔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한스는 어릴 때 열심히 공부하여 수레바퀴 위로 올라 갔지만, 끝내 그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수레바퀴에서 미끄러져 버린 것이다. 현대와는 다르게, 마치 수레바퀴에 기름을 칠한 것 같이 중간 없이 바로 바닥까지 미끄러진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조선시대에 높은 신분으로 태어나면 수레바퀴 위에, 반대는 아래가 되는 것이고 한스의 주 시험이 과거시험이 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한스가 현대에 태어났으면 어떠하였을까? 현대에는 수레바퀴 위로 가는 것도 가능하고, 중간도 존재한다. 만약 한스가 현대에 태어났다면, 그는 미끄러지더라도 중간에서 다시 노력하여 위로 올라 갔을 것 같다. 나는 그것이 안타까웠다. 나는 수학을 좋아한다. 그래서 과학고등학교를 지망하고 있다. 공부를 좋아한다는 측면에서는 한스와 나는 닮았다. 나도 한스처럼 내성적이고, 한스만큼은 아니지만 나 자신에게 하는 기대와 부모님의 기대도 받고 있다. 그런 나와 한스의 차이점은 “기회” 이다. 나는 현재 수레바퀴에 깔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위에 있지도 않다. 하지만 나는 수레바퀴 위로 올라갈 수 있다. 과학고등학교에 떨어지더라도 대학교가 있고 또 그 미래가 있다. 그런데 한스는 단 한번의 기회밖에 주어지지 않았고, 그 기회를 놓친 한스는 낙오되었다. 즉 나의 결론은 이 세상에는 커다란 수레바퀴가 있다. 그 수레바퀴는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항상 존재한다. 옛날에는 수레바퀴 위로 올라가는 것이 어려웠다. 하지만 현대에는 다양한 발판이 있다. 즉 많은 기회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기회가 있음에 감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