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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을 좋아한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그림이 많이 있는 아기곰 푸우 같은 책도 읽었지만 그림이 거의 없는 아라비안 나이트에 염소는 왜 종이를 잘 먹을까요 같은 주제를 다룬 상식책도 읽었고 간간이 기록사진이 곁들여있는 헬렌켈러 같은 위인 전기도 읽었으며 명화가 실린 백과사전도 읽었다. 언니가 읽다 놓아둔 문고판 주홍글씨라든가 아내의 학교 같은 책도 읽었다. 의미도 잘 모르면서 그냥 집에 있는 책은 아무거나 잡고 읽었다. 잔병치레를 많이 하고 유달리 숫기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밖에 나가서 노는 것 보다도 방에서 책읽는게 이유없이 그냥 더 좋았다.
나이가 들어선 좀 달라졌다. 독서습관도 많이 바뀌어서 닥치는 대로 읽는게 아니라 관심가는 분야 그리고 학업이나 일에 도움이 될만한 책만 골라 읽게 되었다. 그런데 편식을 하다보면 또는 영양상 불균형을 이루는 식습관을 갖고 있으면 어느순간 평소에 잘 먹지 않던 것들이 갑자기 먹고싶은 강렬한 욕구를 느낄 때가 있는데(어떤 전문가들은 바로 그 음식에 평소 결핍되어 있는 영양소들이 많이 들어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어쨌든 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평소에 잘 섭렵하지 않던 분야의 책들에 나도 모를 정도로 갑작스런 호기심이 생겨나서 수중에 가진 돈을 탈탈 털어 팔이 아플 정도의 책무게를 안고 집에 오거나 하는 적도 있었다. 물론 요즘엔 인터넷 서점을 이용하는 덕에 팔이 아프지 않아 무척 좋지만.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부터는 책을 읽는 것도 좋지만 책을 사모으는 재미에 책을 사기도 한다. 아마도 그 재미는 책장에 내 개성껏 골라져 가득 꽂혀져 있는 책들을 볼 때 마다 큰 부자가 된 듯한 충만한 느낌에 기인하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무작정 책이 좋아서일까, 책이나 독서 행위 그자체에 대해 다룬 책들에 대해서도 어지간이 사기도 하고 읽기도 했다. 그런 분야의 유수한 책들 중에서 최근까지도 나를 매혹시키는 책이 한 권 있는데 바로 ‘디지털과 종이책의 행복한 만남’이다. 신문의 신간 소개 칼럼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책이었는데 ‘앗’하는 짧은 충격음을 내며 당장 인터넷 서점에서 구입했다.
책제목부터가 범상치 않은데다 표지가 너무나 지적인(나는 책표지도 지적인 분위기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으로 처음 알게 됐다)이 책을 펼쳐서 책머리에 올라온 글을 보면서 그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저자에 대해 경외감을 갖게 됐다. 스스로 생각해도 조금은 호들갑스런 반응이긴 하지만 ‘지금은 디지털 시대, 우주적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제목아래 이어지는 서문에서 나는 진정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 쓰는 글에서만 묻어 나올 수 있는 종이 냄새와 비슷하지만 분명 다른 어떤 향기같은 것을 맡았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지만 디지털 시대에 오히려 가능성이 커지는 종이책의 희망을 구체적으로 찾아보자는 취지에서 쓰여졌다고 보면 되는데 이러한 집필 의도를 얼마전에 읽은 신문기사를 통해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두종류의 신문을 구독하는데 두 신문에서 아주 대조적인 기사를 발견하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었다. 한 신문은 디지털 시대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전자책보다는 종이책을 사본다는 것에 월등히 많이 응답했다는 것을 한 여론 조사를 통해 보여주면서 급격한 매체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여전히 굳건한 종이책의 효용을 이야기 했다. 며칠 뒤 다른 신문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전자책을 선보이며 네티즌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몇몇 온라인 서점들을 소개하면서 빠른 속도로 종이에서 디지털 매체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했다. 상당히 흥미를 끄는 논지였다.
이 두 기사는 분명히 표면적으로는 엇갈린 보도를 하고 있는 듯 보여지지만 한겹 표피를 벗기고 심층적으로 들어가면 둘 다 설득력이 있고 공감이 가는 이야기들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인류 문화를 차곡차곡 쌓아온 종이의 효용은 디지털 시대에도 결코 사그라 들지 않지만, 디지털 매체를 선호하는 새로운 수요가 계속 창출되고 있다는 식으로.
저자의 집필 의도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책 속으로 들어가보면 지금 이 시대 많은 반향을 일으켰던 또는 지금도 일으키고 있는 많은 책들에 대한 품평이 조목조목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아날로그 매체로서의 책의 장점이 드러나는데 종이책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에 푹 젖게 된다. 이어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책의 장점을 더 키울 수 있다는 것과 e북에 대한 전망이 깊이있게 다루어진다. 이와 관련해 21세기 책의 변화에 대해 저자는 자크 아탈리의 생각을 들려준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성인 중의 한 사람인 자크 아탈리는 다음 세기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은 유목민이 될 것이라는 독특한 주장을 하는데 유목민은 자기집을 가지고 어디든지 이동할 수 있으며 주요 오아시스와 항상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유목민의 첫번째 물품이 바로 책이라고 한다. 현재 10억의 삶들이 평생 적어도 한 권의 문학 작품을 읽는데 50년 후에는 이 수가 30억으로 늘어날 것이다. 이 이유만으로도 책은 어느 것도 대신할 수 없는 사물이다. 읽기의 편안함, 한 장씩 뒤적거릴 수 있다는 점, 종이의 밝기와 질 때문에 오랫동안 책을 대적할 만한 것은 없을 것이다. 10년 혹은 20년만 지나면 집에만 박혀 사는 독서가는 소형 프린터를 통해 인터넷에서 선택한 책을 집에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일단 어떤 책을 인쇄해 한 번 읽은 후에는 그 내용을 지우고 다시 다른 책을 인쇄할 수도 있단다. 경제적으로 시간적으로 자유롭게 되면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지 않은 채 개인 서재에 틀어박혀 책만 읽으며 살았으면 딱 좋겠다는 나같은 사람에겐 아주 적격인 그런 시대가 정말 올지도 모르겠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두부 베듯 나누어 하나의 시대는 거(去)하고 하나는 시대는 래(來)한다는 식의 이분법적인 사고를 경계하며 종이책에 대한 한없는 애정을 보여주는 저자는 앞으로의 출판시장은 디지털 시대의 눈부신 기술과 결합한 아날로그적인 종이책의 장점을 키우는 방향으로 발전해 나갈 것이라고 전망한다.
나? 나도 종이책을 좋아한다. 그런데 화면으로 보는 책도 좋아한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실시간 오르는 뉴스를 보면서도 두 종류의 신문을 구독하고 있다. 책도 많이 사지만 e북도 즐긴다. 종이는 종이대로의 촉감과 깊이있는 역사성이 좋고, 디지털은 순발력있게 톡톡 튀며 내게 뛰어오르는 게 귀엽고 매력있다. 난 보수적인 측면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변화를 수용하고 즐기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한 영화평론가가 오래된 흑백 [인상깊은구절] 책장을 손으로 직접 넘겨가면서 줄을 치거나 주요한 부분을 옮겨 적으며 읽는 것이 아니라면 진정한 읽기가 아니다. 여기서 새롭게 발견된 것은 바로 인간의 직접적인 참여를 통해 이뤄지는 '신체성'이다. 이것은 디지털 때문에 새롭게 발견된 아날로그 세계, 그것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직접 만지고 넘기는' 과정에서 느끼는 촉감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주목이다. |
| 요즘 인터넷은 선택이 아니라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adsl이니 케이블해서 초고속망이 저렴한 가격으로 일반가정에 급속히 보급되면서 이제는 웬만한 정보나 자료는 도서관보다는 인터넷을 사용해서 찾는 것이 더 효율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더구나 이런 대중화에 힘입어 다양한 내용과 참신한 아이디어로 무장한 e-콘텐츠의 등장은 이미 젊은 세대를 사로잡은 지 오래 되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책도 종이라는 매체대신 디지털이라는 e-book방식으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이는 대세처럼 보인다. 기존의 모든 아날로그의 개체들이 디지털의 눈부신 발전에 힘입어 그 자리를 대부분 디지털에게 내준고 있는 현 시점에서 종이로 만들어진 아날로그식 책도 디지털의 거대한 물결 앞에 안전할 수 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대세에도 불구하고 e-book이라는 것이 지금의 종이책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장담은 아무도 하지 못한다. 한 때 e-book 맹신자들이 이런 주장을 했었지만 지금은 그들도 이런 주장에서 한발짝 물러서 있는 상태이다. 그렇다면 전자책인 e-book이 종이책을 몰아낼 날이 과연 올 것인가? 이런 질문에 이 책은 하나의 답변을 하고 있다. 오히려 종이 책이 몰락하기보다는 지금보다 더 낳은 형태의 종이책 또는 아날로그 책이 나올 것이고 또한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완전히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공존하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참으로 의미있는 주장이라 생각한다. 더욱이 저자가 현재 출판된 책들에게 그런 가능성이 충분히 있음을 보여주는 실전적 사례들을 하나하나 분석해 놓은 내용을 보고 있으면 더욱 이런 저자의 주장에 수긍이 가고만다. 물론 그렇다고 종이책의 미래가 디지털이 대세인 현실에서 분명 밝다고만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종이책의 미래가 밝기 위해서는 종이책도 이젠 디지털의 장점을 수용하여 변화하고 대중의 변화에 발맞추어 변신하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것이 저자가 이 책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일 것이다. 항상 선지자들은 대부분은 다수의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했지만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역사가 그들의 이야기를 증명해 주었다. 이 책도 그런 선지자적인 책이라 생각한다. 전자책과 종이책이 서로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적이고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저자의 의견이 먼 훗날 실현되는 모습을 볼 수 있길 기대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