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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오 헨리 단편소설 몇 편을 읽었다. 시와 거리가 먼 나 같은 사람이라면 짧은 시간에 잃어가는 감성을 찾고 기분전환을 하는 데 단편소설이 제격이다. 더구나 이야기 끝에 놀라운 반전과 감동이 펼쳐지는 오 헨리 작품들은 오랫동안 따스한 여운이 남는다.
이 책에는 오 헨리의 단편소설 56편이 실려있다. 내가 소개할 작품은 <사랑의 헌신>과 <인생은 연극>, <하그레이브스의 가면>으로 모두 페르소나와 깊은 관련이 있는 작품들이다. 세 작품 속 주인공들의 페르소나가 그들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으리라.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헌신도 지나쳐 보이지 않는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사랑의 헌신>은, 재능 있는 예비 예술가 부부 이야기다. 조와 딜리어는 각각 그림과 피아노에 재능있는 젊은이들이다. 자신의 재능을 살리기 위해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와 공부하던 중 만나 서로 사랑에 빠져 작은 아파트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가난한 학생 부부다. 사랑하는 예술과 사람이 함께 있으면 만사가 해결된 듯 싶지만 먹고 사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는 조가 우연히 자신의 그림을 보고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에게 팔았다는 거나, 딜리어가 장군의 어린 딸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알바를 얻었다는 것은 모두 그들의 재능을 살리고 예비 화가와 음악가라는 페르소나에 어울리는 일자리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현실은 그들이 바라는 페르소나에 어울리는 일을 호락호락 허락하지 않는다는 게 드러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체면 때문에 기피하는가. 고학력 청년실업과 비혼이 늘어가는 우리 현실과 잘 맞물리는 이야기다.
"무대는 세상이고, 모든 배우는 그저 남자와 여자일 뿐"이며 "인생은 연극"이라는 셰익스피어의 말을 자주 인용하는 '나'가 어느날 알고 지내는 기자에게서 들은 진짜 연극 같은 이야기가 <인생은 연극>이다. 20년 전 결혼식 첫날 사라진 남편 프랭크가 다시 돌아오길 기다리며 홀로 살아온 아름다운 헬렌은 이제 서른여덟이다. 그러니까 헬렌은 20년 동안 그의 '아내'로서 다른 사람들의 청혼을 거절하며 버텨온 거다. 그녀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문구점이 시들해지자 비어있는 3층의 방 둘을 세놓기로 한다. 그리고 얼마 안 가 40대 초반의 두 남자가 각각 방을 얻으러 온다. 한 남자는 라몬티라는 이름의 바이올리니스트로 20년 전 기억을 잃은 후 바이올린을 배워 생계로 살아온 남자다. 다른 남자는 20년 전 헬렌의 결혼식에 온 남편의 친구 존으로 그날 헬렌의 방에 몰래 들어와 사랑을 고백하고 달아난 사람이다. 다시 찾아온 그가 헬렌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서 그간의 진실이 밝혀지는 감동적인 이야기다. 사랑하는 남녀의 인연이 이들처럼 정말 끈질긴 걸까, 아니면 순전히 연극 같은 이야기일까.
"제 직업은 모든 인생을 제 것으로 만듭니다"라고 말하는 하그레이브스는 무명의 젊은 연극배우다. 그는 하숙집에 들어온 남부지방의 노신사 탤벗 소령과 그의 딸 리디아 양과 친해진 사이로 매일 밤 탤벗 소령이 들려주는 남부 이야기를 열심히 경청하는 유일한 손님이다. 아직도 고풍스러운 남부 신사의 옷차림을 고집하는 탤벗 소령은 자신의 주택을 임대주고 워싱턴에 와 하숙 생활을 하고 있다. 남부의 전통과 역사 이야기를 담은 '비사와 추억'이란 제목의 원고를 써서 책으로 내려고 하는 그의 경제 사정은 딱하기 그지없다. 어느날 마지막 남은 돈으로 전쟁극 연극표 두 장을 사온 소령은 딸과 함께 보러 갔다가 충격을 받는다. 무대에 올라온 배우가 자신과 똑같은 옷차림으로 분장하고 자신이 들려준 이야기와 같은 대사를 읊조리고 있는 하그레이브스가 아닌가. 연극에서 큰 성공을 거둔 하그레이브스는 분노한 탤벗 소령에게 감사와 위로의 표시로 200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하지만 거절당한다. 그리고 바로 그날 다른 공연이 예정돼 있는 극장 가까운 곳으로 하숙을 얻어 나간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한 흑인 남자가 탤벗 소령을 찾아오는데, 그는 오래 전 탤벗 소령의 부친에게 염소 세 마리를 얻어 해방되어 나간 흑인 노예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는 오래 전 진 빚을 이제 갚겠다고 찾아온 거다. 진정한 배우는 연기로 자신의 진가를 드러낸다는 생각이 드는 가슴 뭉클한 이야기다.
셰익스피어는 "인생은 연극"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여러 개의 역할에 따른 페르소나를 쓰고 살아가는 우리 인생을 생각하면 정말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의 참모습을 모른 채 사회적 페르소나와 동일시해 살다보면 중년 이후의 내면 세계가 피폐해진다고 칼 융은 말한다. 앞에 소개한 각각의 이야기에서는 예비 예술가, 아내, 남부 신사의 페르소나와 자신의 직업상 페르소나를 쓰고 살 수밖에 없는 연극배우를 만날 수 있다. 모두 녹록치 않은 자신의 인생을 충실하게 살아가다 뜻밖의 반전에 감동한 사람들이다. 우리에게도 그런 반전과 감동이 있는 인생을 기대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