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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학교 교정에서 머리에 피를 흘린채 죽어있는 아이의 시체가 발견된다. 죽은 아이는 알고보니 오랫동안 왕따였고 그로인해 괴로운 학교 생활을 보내고 있었음을 알게된다. 일명 " 도령"으로 불렸던 아이의 죽음은 자살인가? 타살인가?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흔하디 흔한 왕따와 가해자의 이분적인 논리가 아닌 그깊은 곳에 숨겨둔 각자의 내면의 이야기로 오쿠다 히데오는 우리를 이끈다. 네명의 가해자가 나타나고 그들은 일본 청소년법에 따라 13살은 상담소로 14살은 경찰서로 이송되어 조사를 받기 시작하는데 , 그들은 한결같이 죽은 소년 나구라를 때리고 괴롭히기는 했지만 죽음에는 관여없다는 이야기를 하게 된다.
소년법에 의해 두가지 상황으로 갈리면서 그아이들의 부모의 입장도 두가지 스타일로 나눠지게 되고 또한 항상 부모들이 한결같이 하는 행동은 일본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부모가 되면 알렸나!! 자신의 자식은 그렇게 나쁜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믿음, 아니 소망을 갖고 싶어서 " 못된 친구를 사귀어서, 또는 못된 친구의 강압에 의해"라는 식의 책임회피를 하게 되는것 같다. 네명 소년의 부모들도 주모자의 행동때문에 괴롭혔다는 생각을 각자 가지게 된다. 그로 인해 서로가 같은 입장이면서 서로에게 피해의식을 느끼는 희한한 관계가 되게 된다. 여기에 돈만 밝히는 변호사 까지 가세하게 되면서 왕따라는 사회적 문제점이 결국은 어른들의 잘못된 인식의 시점부터 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또한 학교에서 벌이는 각 교사와 교장 교감들의 대처방식이 우리 교육의 현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에 놀라게 한다. 소설의 이야기보다 더욱더 끔찍한 현실을 생각하면 이소설속에 등장하는 인간들의 심리를 보면서 사실은 이정도의 심리였으면 하는 바램도 가지게 된다. 소설속에서는 소년의 죽음으로 인해 겉으로는 당당한척 하지만 다들 조금씩 그소년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때로 부당한 처사나 무리한 요구도 반발하면서 따르게 되는 모습을 그려준다.
경찰의 수사를 통해 네명의 아이들이 죽음에는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그 죽음의 이유와 진실을 조금씩 감추고 있는 것을 알게된다. 이야기가 진행되고 죽음의 진실에 다가갈수록 점점 더 비겁해지는 어른과 자신의 잘못에 당당히 나서지는 못하지만 그로 인해 더큰 죄를 받으려고 하는 순수한 소년들의 마음이 나타나게 된다.
사회적 왕따의 심각한 문제 앞에서 아무대안도 못내고 우왕좌왕 하는 우리의 현실을 소설속의 인물들, 기관들, 언론, 교육등을 통해서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같다. 누가 누군가를 괴롭히는 일들이 가해자든 피해자든 방관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문제가 되어 각자의 곁으로 다시 돌아올수 있음을 이야기해주는것 같다.
또한 이런 문제들에 대해 다들 침묵하고 있는 현실속에서 더이상 침묵하지 말라는 메세지를 보내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문제가 생겼을때 우리가 행동하지 않는 고요한 침묵은 더 나쁜 현실을 만들어가고 있음을 인지해야 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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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거리에서』 2권에서는, 1권에서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이치카와 겐타'와 '사카이 에이스케'의 진가가 드러난다. 나구라를 왕따로 몬 주모자인 줄 알았던 그들의 실상이, 실은 나구라를 위해 뭇매를 맞고도 묵언수행하듯 행동했으며 무엇보다 의로웠으며 정의로웠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다소 불쾌한 부분이 있다. 실제 일본의 여성 인권이 현저히 낮은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유난히 여성성을 약해 빠진 모습으로만 해석하는 '안도 도모미'와 '다카무라 마오'의 혼잣말이 읽는 내내 불편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사카이는 스스로 '남자다움'을 강요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야기의 맥락은, 나구라 유이치의 죽음 전과 후를 번갈아 조명하고 있는데 겐타와 도모미의 시점이 가장 두드러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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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유명한 소설가라고 하여도 그가 사는 동안 자신의 작품 모두가 완벽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연이어 좋은 작품을 세상에 내놓다가도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마치 세상 사람들을 비웃기라도 하려는 듯, 독자들의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엉뚱한 작품을 발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것이 전적으로 작가 자신의 잘못은 아닐지라도 독자들 중 몇몇은 그 작가에 대한 더이상의 사랑을 유보한 채, 새로 발견했거나 한때 좋아했던 다른 작가에게로 관심을 옮겨가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조금 얄미워 보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변심한 독자들을 일방적으로 매도할 것도 아니다.
오쿠다 히데오에게 있어 소설 <침묵의 거리에서>가 그런 작품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그는 기획 단계에서 자신이 생각했던 스토리 전개와 소재가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정확히 꼬집는 대단한 것이라고 한껏 기대에 부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누구나 그렇듯 이런 기대와 바람은 너무나 흔한 것임에도 그 순간에는 미처 알아채지 못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침묵의 거리에서>의 주제는 명확해 보인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날로 지능화, 흉포화되고 있는 청소년 범죄의 실상과 그것을 바라보는 각 계층의 서로 다른 시선을 조명함으로써 일본 사회 전체에 경종을 울리고자 했던 듯하다. 사실 청소년 범죄에 대한 문제는 비단 일본에서만 심각한 것도 아니고 우리나라의 실상은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우리나라의 학생들은 그래도...'하고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소설은 일본의 작은 도시 구와바타의 시립 제2중학교에서 시작된다. 학교 교정에서 발견된 한 학생의 주검을 두고 단순 추락사인지, 타인에 의한 살인 사건인지, 아니면 자살인지 추측이 분분한 가운데 경찰의 조사가 시작된다. 죽은 학생은 그 지역에서 포목상을 하는 부유한 집안의 외동 아들이었다. 주검에서는 추락과는 상관없는 다수의 상흔이 발견되었고, 경찰은 사고사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학생들을 조사한다. 경찰의 조사 과정에서 학생들 간의 집단 따돌림, 폭력, 금품갈취 등 지속적인 범죄가 있었음이 밝혀지고, 폭력에 가담했던 14세 이상의 두 소년은 경찰에 구속되고 14세가 안 된 두 소년은 아동 상담소로 보내진다. 경찰의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경찰과 학교, 피해자 가족과 가해자 가족, 언론과 학생들 등 그 사건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이 각자의 입장에서 그려진다.
"중학생이 되자 같은 학생들 사이에도 어렴풋이 계층이 나눠지기 시작했다. 인기가 많은 아이, 없는 아이, 인정받는 아이, 무시당하는 아이, 모두 자신의 위치에 무관심할 수 없어졌다. 어떤 그룹에 속하느냐에 따라서도 학교생활이 180도 달라진다." (1권, p.302~p.303)
가해자로 지목된 4명의 학생과 침묵하는 주변인들. 가해자 학생들 부모의 직업은 다양하다. 그 중에는 싱글맘도 있고, 평범한 직장인도 있고, 할아버지가 현 의원인 지방 유지도 있었다. 가해자의 부모들은 자신의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백방으로 손을 쓴다. 학교에서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중간에서 어찌할 줄 모르고 갈팡질팡한다. 반면 사건 사고를 다루는 언론은 정보를 캐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아직은 어린 학생들에 대한 취재는 삼가자고 결의하기도 한다. 경찰에서의 수사가 종결되고 사건이 검찰로 이송되면서 가해자로 지목되었던 학생들이 풀려나게 된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바짝 긴장했던 학생들도 수사가 장기화 되자 조금씩 느슨해지기 시작하고 그에 따라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들이 속속 드러난다. 단순히 테니스부에 속했던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뿐만 아니라 피해자 주변의 문제 학생들과 선후배 간의 문제,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 했던 피해자 집안의 가정 교육 문제, 권력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자녀를 지키려 하는 가해자측의 입장 등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의 각종 부조리가 하나의 사건을 통하여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가해자로 지목되었던 학생들이 오히려 체구가 작고 사회성이 부족했던 피해자를 지켜주려 노력했었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문제 학생들의 폭력과 협박에 시달리면서 어디에도 소속될 수 없었던 피해 학생의 현실이 극명하게 그려진다. 그리고 요즘 학생들의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들의 일방적인 시각도 드러난다.
"아이들은 누구나 그런 잔혹성을 가지고 있지만 커 가면서 서서히 사라지는 게 아닐까. 중학생은 아직 그 성질이 남아 있고. 학교 폭력, 집단 괴롭힘이 가장 심한 연령도 중학생이야. 고등학생이 되면 강도를 조절할 줄도 알고 동정심도 생기지." (2권, p.306~p.307)
좁은 지역사회에서 한 사건으로 어느 날 갑자기 가해자와 피해자로 양분되는 갈등의 모습을 작가는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살아 있는 자들의 삶은 계속되는 까닭에 갈라진 틈을 메우고 새로운 관계를 정립해야 할 필요성 또한 작가는 주장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직은 미성숙한 아이들 사이에서 언제든 벌어질 수 있는 안타까운 사건을 두고 어찌 됐든 결말을 써야 하는 작가의 고민도 깊었으리라.
"하시모토는 그렇게 말하며 깨달았다. 중학생들은 일의 심각성을 모른다. 때문에 단순한 영웅주의에 도취되어 주변의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아이들은 생명의 존엄성도, 인생의 의의도, 사람의 마음도, 자신의 마음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2권, p.287)
이 소설에서는 오쿠다 히데오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유머와 재치가 보이지 않는다. 한시도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도록 만드는 흡입력도 찾기 어려웠다. (당연하겠지만) 다분히 추리소설의 성격을 띠는 이 소설은 만만찮은 작품의 분량 탓인지 긴장감이나 빠른 사건 전개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느슨하고 헐렁한 느낌마저 들었다. 다만 작품의 주제만 전면에 강하게 드러나는 것 같았다. 독자를 계도하려 하거나 어떤 다른 의도가 깔린 소설은 실패하게 마련이다. 주제가 작품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선명성은 돋보일지 모르지만 독자의 호응은 기대하기 어렵다. 소설은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현실의 재구성이다. 작가는 일반인의 생각과 행동을 면밀히 관찰하고 소설 속에서 생동감 있게 그려내야 하지만 독자들에게 소설을 읽는 재미를 함께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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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거리에서』는, 일본의 한 중학교에서 벌어진 남학생의 죽음을 두고 단순 사고가 아닌 학교 폭력에 의한 사망에 무게를 두고 전개되는 이야기이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와 가해자, 부모와 교사, 학교와 가정, 기자와 검사, 경찰과 언론매체 등 각계각층의 다양한 위치와 시점에서 풀어낸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사정을 저마다 합리화하기에 분주하고 바쁘다. 내 안위에만 급급하고 당장 눈앞의 현실에 오감이 반응한다. 가해자 부모에게는 죽은 학생의 애도보다 살아있는 내 아들의 안위가 걱정된다. 피해자 부모는 생때같은 자식을 잃어, 평소처럼 활보하고 다니는 아이들이 고까워 그 부모와 학교에게 분노한다.
또래에 비해 덩치도 왜소하고 소심한 부잣집 외아들 '나구라 유이치'가 학교 내에서 사망했다. 교정에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었고 학생들은 운동부실 지붕에서 나뭇가지로 건너뛰곤 했는데 5미터 아래는 나구라가 숨진 콘크리트 도랑이었다. 부검 결과, 사인은 두부 손상에 의한 출혈이었으나 등에 수없이 새겨진 시꺼먼 피하 출혈은 폭력의 증거였다. 교내 폭력에 의한 사망을 의심한 경찰은 지붕 위에서 다섯 명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나구라와 평소 어울렸던 테니스 부에 소속된 2학년 멤버들(이치카와 겐타(13), 사카이 에이스케(14), 가네코 슈토(13), 후지타 가즈키(14))을 상해죄로 조사한다. 증언에 따르면, 열 명 이상의 학생이 나구라의 등을 꼬집었고 명령은 체포된 사카이 에이스케가 했다고 한다. 나구라의 휴대 전화에 남겨진 메시지를 토대로 위 넷은 집단 괴롭힘을 저지르고 있었음을 확인한다. 나구라에게 상해를 입힌 가해자 소년들은 불과 몇 달 또는 며칠을 사이에 두고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열세 살은 아동 상담소로 보내지고, 열네 살은 소년법이 적용되어 체포가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체포한 14세 소년 두 명은 미성년자에다 전과도 없으니 상해죄만으로는 불기소 처분이 내려질 것이 불보듯 뻔하다. 경찰은 검찰로 사건이 송치되기까지 48시간 동안 경찰서에 묶어 둘 수가 있으니 그 동안 나구라 유이치 사망 사건의 진상을 밝혀야 한다. 과연 두 소년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죄로 체포와 기소가 가능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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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침묵, 이해와 방관 사이.
침묵은 상대로 하여금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십상이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잠정적 답보 상태가 바로 침묵이기 때문이다. 침묵은 득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무한한 독이 되기도 한다. 범죄자들의 묵비권 행사도 자신을 지키기 위한 임시방편적인 수단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죄를 미궁으로 빠뜨리는 필요악인 것처럼 말이다. 침묵 너머에는 분명한 진실이 숨어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침묵하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소년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는 왜? 라는 의문만 무한 증폭시킨다. 소년의 죽음은 과연 단순 사고인가, 사건인가를 두고 펼쳐지는 등장인물들의 대치 상황을 지켜보는 입장 역시 반반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세상의 어떤 일이든지 '이유' 없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원인이 제공되고 그에 따른 결과로 순환되고 있는 게 세상의 법칙이다. 소년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진실 찾기에서 완벽한 가해자와 완벽한 피해자를 가려내는 건 쉽지 않다. 오히려 그 자체가 모순으로 여겨진다. 소년의 죽음은 비슷한 또래 아이들의 틀 안에서 일어난 사고이자 사건이다. 타인에게 위해를 가했으면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하는 게 당연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의 '나이'이다.
13살과 14살, 법의 경계에 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아이들의 상반된 모습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안타까움과 함께 모순적 감정을 갖게 한다. 죄의 유무를 떠나 악행을 저질러도 어른이 만들어놓은 제도권 안에서 얌전히 수수방관하면 그뿐인 것이다. 인간적 마음, 인륜으로 따져보자면 물론 냉정한 잣대라 말할 수도 있을 테다. 하지만 이 한 살의 경계 덕분에 법의 사각지대에서 무조건적인 보호 대상이 되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침묵 너머, 진실은 어디에.
모든 인간의 양분법적인 태도를 이 책 안에서 목도할 수 있다.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 어떻게 보면 지나친 개인주의적인 면모로 보일 수도 있지만 남의 일이 아닌 내 일이 되면 누구나 비슷한 양상을 보이지 않을까 싶다. 마찬가지로 사건을 기사화하는 여기자 다카무라의 말처럼 나 역시 부모의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부모의 마음을 섣불리 짐작하기는 어렵다. 그들이 처한 상황의 고통, 이기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각자의 견해 앞에서 부조리한 것 아니냐는 태도를 고수하기도 했지만, 어떠한 상황 앞에서의 심정은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오쿠다 히데오는 가해자, 피해자 부모의 감정 대립 구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는데 어느 쪽의 입장도 딱 잘라 잘못됐다 말할 수가 없었다. 피해자의 부모는 잃어버린 자식의 죽음, 진상을 밝혀내기 위해 전력을 쏟는 건 당연하고 가해자의 부모는 그것으로부터 자식을 지키려는 건 당연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사회뿐 아니라 학교라는 테두리도 정글이나 다름없는 약육강식의 세계가 되어버려서 무섭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힘없고 연약한 아이들을 지켜줄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는 부실하고 기사 1면을 장식하는 아이들 세계의 끔찍한 일은 멈출 기미가 없다. 그래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관점을 떠나 소설 속 아이들 누구를 완벽한 가해자라고 지목할 수도 없다. 모두에 의해 이뤄진 모두의 범죄라고 해도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집단적 린치를 가한 이들뿐 아니라 그것을 묵묵히 지켜보고 묵인한 이들 역시 가해자다. 또한 중심에 있었던 소년 역시 받은 것을 자신보다 연약한 이들에게 되갚는 형식은,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인간의 근본적인 생리방식을 돌아보게 한다. 한편 『침묵의 거리』에서는 중학생의 왕따, 폭력, 죽음 같은 소재로 인해 작년에 출간됐던 미야베 미유키의 『솔로몬의 위증』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중학생의 죽음(자살을 가장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사고사)이라는 소재는 맥을 같이했지만 각 작가가 글로 풀어내는 메시지는 전혀 달랐고 『솔로몬의 위증』이 아이들의 자주적인 사건 해결방식으로 구성해나간데 반해 『침묵의 거리』에서는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두루 사건의 중심으로 끌고 왔다는 데 있다. 부모, 선생, 아이, 언론, 경찰 할 것 없이 모든 이들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섞여 있어서 정신없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고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가 궁금해지기도 했다. 13~4살이라는 나이는 어린아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온전히 철이 든 청소년이라 부르기도 뭣한 시기이다. 저자가 등장인물들을 빌어 시종일관 강조한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종잡을 수 없는 시기라는 데 동감한다. 그런 의미로 보자면 요즈음 세상 일어나는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하는 범죄의 무게는 높아만 가는데 범죄 연령은 현저히 낮아지고 있는 풍토에 생각이 미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 아이들의 행동을 범죄로 몰아가는 건 온당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집단적인 행동은 크나큰 역풍을 수반한다는 것을 간과하는 나이, 오쿠다 히데오가 시작부터 끝까지 강조한 그런 나이의 아이들을 다시 한 번 이해하려는 시도는 되었던 것 같다.
그들의 침묵이 전하는 무게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침묵한 이유 또한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고 나아가 서로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었다는 걸.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침묵이라는 게 모든 일을 한순간에 덮을 수 있을 거라는 안일한 사고방식 역시 그 연령대의 아이들이라서 가능한 일이지 않았나 하는 씁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침묵함으로 인해 당장 서로의 의리는 지켰을지 모르나 그 때문에 상처받는 누군가는 영원히 남는다는 진실, 이제 막 험난한 질풍노도의 시기로 들어선 아이들은 알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서로의 안전망 안에서 오늘이 무사하면 내일도 무사할 거라 믿는 이들이 바로 그 또래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왕따, 집단 폭력 등의 단어가 사라질 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우려스럽다. 그들을 지켜주는 소년법이 외려 그들을 법의 사각지대로 내몰고 있는 건 아닌지, 오쿠다 히데오의 메시지는 그랬다. 『침묵의 거리』에서를 통해 부모의 입장, 사건을 지켜보는 제삼자의 입장, 아이들의 입장, 두루 한 번쯤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나는 어느쪽의 입장도 될 수 없고 지켜보는 입장일 뿐이다. 그래서 작품을 읽고 어떤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앞서 언급했듯이 나는 모두가 이해되지 않는 동시에 이해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그들이 침묵한 이유는 책을 읽는, 어떤 자리, 상황에 있는 당신들이 판단할 몫으로 남겨두는 게 낫겠다. *1, 2권 통합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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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이 되는 큰 아이를 보면서 앞으로 펼쳐질 아이들의 세계가 솔직히 걱정된다. 아닐 거라고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친구들과 원만하게 잘 지낼 거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면서도 이런 책을 만나면 순간 숨이 ‘턱’하고 막힌다. 그래서 엄마들 사이에서 이런 이야기가 있다. 중학생이 되면 남자 아이건 여자 아이건 우르르 몰려다니게 하지 말라고. 분위기에 휩쓸려 ‘아’가 ‘어’가 되고, 주변인이 주동자가 될 수 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를 24시간 따라 다닐 수 없다. 결국 아직 우리 아이들의 세계가 언론이나 책에서 표현하는 것만큼 잔인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한 여름. 학생들이 귀가한 시간. 선생님들은 기말고사 시험 문제 출제로 바쁘다. 그 침묵을 깨고 들리는 전화벨 소리. 아직 아이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학부모의 전화다. 전화를 받은 교사는 나구라 유이치를 찾아 학교 순찰을 돌고, 그의 시체와 만나게 된다. 경찰은 죽은 유이치의 시체에서 묘한 흔적을 찾아내고, 죽음이 사건인지 사고인지를 찾기 시작하는데... 처음엔 침묵을 지키던 아이들에게서 조금씩 진술이 나오고 사건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과연 유이치는 어떻게 죽게 된 것일까?
아이들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왕따를 당하는 아이에게는 그 만한 이유가 있다고 말하지만 최근엔 그냥, 혹은 심심해서도 이유가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왕따라는 것 앞에 자유로운 아이들과 부모는 없을 것이다. 존재감이 없어도, 때론 너무 튀어도 아이들의 질시 어린 시선이 머문다. 그리고 누군가를 향해 시작되는 왕따는 그래서 잔인하기만 하다. 우리는 흔히 우리 아이 만큼은 결코 그럴 일 없다고 말한다. 그렇게 자기 최면을 걸어서라도 아이를 지키고 싶어 한다. 나도 부모이기에 그들을 향해 뭐라고 말할 수 없다. 어떤 입장에 설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아이들에게는 어른이 모르는 얼굴이 있는 법이다. (1권 40쪽) 중학생은 잔인하다.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잔인한 시기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 잔인함은 혼자 서는 과정에서 터지는 고름 같은 것이다. 다들 더는 어른들에게 울면서 매달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들끼리 생존 게임을 시작한다. (1권 70쪽) 아직 어리다고 생각한다. 중학생이면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어른이 되는 과정을 스스로 버티고 견디는 모양이다. 그 안에서 부모는 어떻게 개입하고 간섭할지 생각해볼 문제다. 홀로 서는 과정이니 부모는 지켜만 보겠어. 라고 단정할 수 없고, 무조건 간섭할 수도 없다. 그래서 사춘기 중학생 아이들은 폭탄 같은 존재라고 말하는 모양이다. 책을 읽으며 아이들을 생각했다. 좋은 것만 보고, 좋은 생각만 하며 자라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 아픔도 겪어야 하고, 그 안에서 배신을 당할 수도 있다. 인간관계 앞에서 초라해지고 답답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어떤 충고나 사랑으로 감싸 안을 수 있을까?
아이들의 왕따 문제는 언제 읽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가해자와 피해자로 구분되어진 부모는 그래서 더욱 이기적으로 변하는 모양이다. 책을 읽으면서 두려웠다. 과연 어떤 과정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인지... 나구라라는 캐릭터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성격이나 품성을 갖지 못했다. 특히나 아이들이 싫어하는 고자질쟁이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가해자를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그런 캐릭터라 더 안타까웠다고나 할까? 때론 피해자가 되고도 그 어떤 동정 여론을 얻지 못한다는 것. 그게 순간 슬퍼지기도 했다. 또한 부모의 재력에 따라 나서는 순서가 있다는 것도...
아이들은 순진한 것 같으면서도 잔인하다. 자신이 왕따였던 사실을 잊은 채 또 누군가를 왕따 시키는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이 아이들의 인성 교육은 누가 시켜야 하는 것일까? 이런 아이들이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된다면 그 아이들은 어떤 모습일지 솔직히 겁난다. 공부만 잘하면 되고, 돈만 많으면 된다는 식의 논리가 자리 잡은 것 같아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내 아이를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중요하고,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성공이라는 개념도 이제는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지났고, 우리 아이만 한 마리 학처럼 고고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어떤 것이 아이들을 위해 최선인지 어른들이 고민해야 할 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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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책을 다 읽고 마지막 장을 덮었을때 나는 참았던 날숨을 내쉬었다.
아아. 아이들은 이렇게 밖에 행동할 수 없었을까. 그들의 침묵으로 인해 상처를 받은 사람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부모의 입장에서 아이들의 사소한 행동거지 하나에도 예민해질 수 밖에 없다. 나 또한 아이들의 사춘기 시절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았고, 혹시라도 엇나가지 않을까 늘 조바심을 쳤던 것 같다. 가장 예민하다는 중학교 시절, 아이들의 반항기가 극에 달한다고 해서 중학교 2학년을 오죽하면 중2병이라고 했을까. 그만큼 가장 예민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탁구공 같은 그들의 나이. 그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라면 모두들 공감하지 않을까 싶다.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는게 아이들의 따돌림 문제였다. 그래서 아이들이 읽는 동화나 청소년 문학에서 가장 많이 다루어지는 소재가 또한 따돌림의 문제였다. 이 책도 따돌림과 그에 따른 한 아이의 죽음을 다루었고, 아이의 죽음을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한 아이가 시체로 발견되었다. 죽은 지 몇 시간은 된 듯 하다. 아이가 있었음 직한 곳은 테니스 운동부실, 창밖으로 보이는 커다란 은행나무 밑에 피를 흘리며 시체로 발견 된 아이. 시체를 발견한 중학교 교사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 그리고 사건 취재를 하려는 기자, 죽은 아이의 부모, 죽은 아이를 따돌리고 아이에게 상해를 입혔다는 네 명이 아이들, 그리고 네 명의 부모가 이 글을 이루는 주축이다.
먼저 왕따를 시키고 죽은 아이를 꼬집어 상해를 입혔다는 네 명의 부모는 모두들 자신의 아이는 착한 아이라고, 절대 그럴리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경찰에서는 열네 살이 넘은 두 명의 아이들에게는 상해죄로 체포하고, 아직 열네 살이 되지 못한 두 아이는 아동상담소로 데리고 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죽은 아이 나구라 유이치에게 상해를 입혔으나 절대 모르쇠로 침묵하는 아이들이다. 돌아오지 않는 아이들 때문에 마음 고생하는 엄마들이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은 엄마나 사는게 사는게 아니다. 음식도 제대로 넘길수 없고, 부모들은 자식 걱정에 잠도 잘 못 잔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자기 자식이 먼저다. 자기 자식으로 인해 죽었을지도 모를 아이의 엄마가 안타깝긴 하지만, 엄마는 내 자식은 죄 없다며, 상처 받는 걸 원하지 않는다. 엄마의 마음은 그렇지만, 아이들은 부모에게도, 경찰에게도, 검사에게도 몇가지 쯤은 침묵하고 이야기를 한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든 그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아직은 미성숙한 아이들 특유의 행동일지도 모른다. 학교에서, 더군다나 자기 반의 아이가 죽었는데도, 며칠이 지나면 아이들은 언제 그런 아이가 있었느냐는 듯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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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작가는 나구라 유이치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수도 있는 아이들의 내면은 보여주지 않는다. 아이들은 그저 검사와 경찰과의 질문에서 짧은 대답을 할 뿐이다. 반면에 아이들을 대변하는 부모들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아이들을 걱정하는 학교의 교사들과 어떻게 해서든 죽은 아이를 죽게 만들었을 아이들을 찾고 싶은 경찰관의 입장과 사건을 취재하는 젊은 여기자의 내면이 들어있을 뿐이었다.
죽은 아이의 엄마가 알고 싶은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책을 읽는 독자들도 궁금할 수 밖에 없다. 나구라 유이치는 그저 자살인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떠밀렸는지 의문에 차 있다. 몇 명의 입장외에 하나의 이야기가 그들의 처음 반 배정을 받았던 때로부터 진행이 된다. 중간중간에 끼어져 있는 그 글은 하나의 얼개로 엮어져 마지막까지 우리의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한다. 마지막의 결말은 정말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중학교 3년은 인생에서 가장 힘든 서바이벌 기간 같아. (2권, 307페이지)
지극히 공감가는 구절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느낄 듯 하다. 나 또한 가장 힘겨웠던 시간이 중학교 시절이었던 것처럼.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아직도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한다는게 안타까울 뿐이다. 내 아이가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싶어 안도의 숨을 내쉬었던 엄마들. 나 또한 그런 마음이 든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 글을 읽는 동안 많이 부끄러웠다. 책 속의 부모들이 이기적이었던 것처럼 나의 모습 또한 지극히 이기적인 모습이 비춰졌으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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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와 제목에 대한 느낌> 이런 느낌의 표지는 별로지만, 방황 혹은 자유롭게 유영하는 어린 청춘들을 나타내는 모습으로 봐주니 괜찮다. 제목은 참 멋지다 생각이 드는데 안고 있는 내용들은 서글프다. <이책은> 민음사의 서평 의뢰 받은 도서. <저자는>
<책내용 맛보기>
<책읽은 소감> 내 아이가 중학교 2학년였던 때는 어땠나? 훌쩍 크리라 싶어 교복을 크게 샀는데 키는 크지만 덩치는 커지지 않는 아이. 1학년 때와는 달리 조금씩 멋을 내면서 교복이 크다느니...초등때 비하면 중학생만 되어도 굉장히 큰 어른 같단 생각이 드는데 고교생이 되면 중학생은 얼마나 어렸던지 싶을만치 어린티가 많았다. 그런 갓 어린 티를 벗어난 중학 1학년은 13~15세. 대개는 14세다. 학교에선 초등학생이 아닌 중학생임을 강조하면서 학교 규칙에 더 엄격함을 강조한다. 점차로 부모보다는 친구를 좋아하기 시작하는 나이다.
내겐 아들만 하나요 10년 이상을 함께 해 온 아들 하나인 엄마 둘과 남매를 둔 엄마 한명이 있다. 엄마 나이들은 제각각인데 아이 셋은 같은 나이요 한 명은 한살 어리다. 소년티가 물씬 풍기던 아들이 중학생이 되어 약간 큰 교복을 입었을때 왠지 다 큰 것 같은 뿌듯함과 내 아들이 젤 잘나 보이는 아들바보 엄마는 이 과정을 겪어 본 사람만이 안다. 초등 애에서 갓 어른이 되는 과정 안으로 접어든 아이들, 중학생. 아직은 애에 더 가까운 중학교 2학년생 13살 남학생이 죽었다. 학교 안에서 발견되었다. 늦은 귀가에 맘 졸인 학부모의 전화로 시험문제를 출제하던 샘이 발견했다.
작은 동네의 장점이자 단점은 혈연, 지연으로 똘똘 뭉친 관계의 공동체라는 것. 포목상을 하는 부모의 독자인 나루구 유이치가 죽었다. 13살의 중학교 2학년생. 첫 아이를 유산하고서 어렵사리 갖어 낳은 아이 유이치. 그 아래 또 낳으려 애썼건만 유산이 되었다. 독자인 아들은 생김새도 곱슬기 있는 머리에 유독 작은 아이였다. 부잣집의 도련님이라 불리는 아이는 온 집안 사람들의 사랑을 넘치게 받는 아이로 외동이 특유의 자신만 아는 스타일이 있었다. 그건 주는 사랑만을 받은 사람의 자신도 모르는 자연스런 행태지만 아이들에게는 왕따 당하는 스타일 아닌 스타일임을 유이치의 부모도 몰랐고 유이치와 같은 테니스부에서 친했다는 네 명의 부모들도 몰랐다. 학교 샘들도 몰랐다.
아이들의 세계는 어른들의 자로 재기엔 세대 차이가 너무나 크다. 더구나 신조어가 등장하면서 더더구나 말이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자신들끼리 그냥 맘에 안들면 왕따가 되기도 하고, 그런 왕따였던 아이가 다시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시집살이 당한 며느리가 시집살이 시키는 시모가 되는 거랑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싫어하며 어느새 답습하는 사람과 싫어서 절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뿐이다. 인정이 메말라가기 때문에 타인의 감정에 공감은 떠나서 이해조차 하지 않으려는 이기주의가 생긴 것이다. 나 이외의 혹은 내 가족 이외의 일들에는 모르쇠. 그냥 귀찮아서 모르쇠. 관심없어서 모르쇠. 그런 무관심이 조장하여 야기되는 범죄도 많아졌으니 사람들은 저마다 고독하다며 고독을 치유할 방법들엔 모르쇠가 아닌가...
같은 동네, 같은 학교, 같은 반의 친구가 죽었다는 사실에 정작 아이들은 그다지 충격을 받는 것 같지 않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들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더 고통을 느끼며, 어느새 형성된 관계망 속에서도 괴로움을 토로할 수가 없다. 내 자식이 연루되어 내 자식의 장래에 미칠 영향을 먼저 계산하게 되고, 정작 연관이 없다해도 미심쩍게 바라볼 시선에서조차 막아주고 싶은게 부모맘여서다. 죽은 소년의 등에서 발견된 수많은 멍자국들. 오랜 시간을 꼬집혀 제각각의 색이 다른 흉터가 발견되자 집단왕따를 염두에 두게 되는데...샘들도 당황하는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테니스부의 2층에서 뛰어내려 은행나무 가지를 붙잡고 착지하는 건 종종 사내아이들의 담력 시합의 장이 되었다. 공교롭게도 그 아래 도랑에 쳐박혀 사망한 아이. 등의 상처로 인해 네 명의 아이들이 용의선상에 오르고, 죽은 유이치의 손에서 나무껍질이 발견되자 사건인지 사고인지 심각성은 더해간다. 둘은 14세라 상해혐의 체포가 되고, 둘은 13세라 아동보호소로 보내지는 현실. 친한 친구들이라고만 여겼던 부모네들은 다른 아이들이 저지른 일에 같이 있었을뿐이라 믿고 싶다. 체포된 아이의 부모는 법이 잘못된 거라 분노가 일고, 아동보호소 부모는 그나마 다행이라 여기지만 네 명의 대상자에 오른게 신경 쓰인다.
피말리는 시간들은 다 마찬가지다. 죽은 유이치의 부모만 억울하고 답답한게 아니다. 학교는 학교대로 가해자로 지목된 아이들도 명쾌한 결론이 나오기 전까지는 선량한 학생이니 보호해야고, 피해자인 부모네에게 무조건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 시험은 일정대로 또 치뤄야 한다. 시험을 미루면 대다수의 학부모가 또 난리법석일 것이다. 신문 기자들도 지간지냐 중앙지냐 따라서 기사도 맘대로 못 다루고, 검사, 변호사 등 연관이 있는 모든 이는 다 촉각을 곤두세우나 또 모든 이는 다 무심할 뿐이다.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한 아들이 비명횡사했는데 해는 뜨고 밤은 오고 여전히 가해자라 여겨지는 유이치 친구들이 등교하는게 기막히다. 그 부모네들이 찾아오지 않는게 괘씸하고 분노가 일지만 어쩌지 못한다. 네 명의 부모네도 살아 있어도 산 게 아니다. 그 일로 자식들이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 지 싶어서 말도 제대로 못건넨다. 하물며 유이치 부모를 찾아가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야한다는 양심이 있지만, 그렇게 한다면 범죄를 인정한다는 식이 될까봐 그마저도 못한다. 그러자니 좌불안석이요 그 중 한 집은 동네를 떠나고픈 마음이 굴뚝이지만 무리하게 산 집이 문제다.
중략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로 남을 잰다. 자신의 경험치 안에서 혹은 보고들은대로 대개는 그 범주 안에서 이루어지지 싶다. 결혼해 자식을 낳았어도 자신들이 직접 키워보지 않았다면 진정 부모네 맘을 알지 못한다. 가늠해 헤아리는 것과 실제 상황에 부닥쳐도 저마다 받아들이는 감정은 다를테지만 그런 상황마저 접하지 않은 사람들이 어찌 알까. 자식을 키우는데는 정답은 없고 현답만이 자리한다는 말에 매우 공감한다. 내 아이가 유치원생이라면 오로지 매체를 봐도 지나가는 유치원생만 보이고, 중학생이면 중학생 또래들만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다. 지극히 당연한 부모맘이다.
옛날에는 저 먹을 건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이 있어서 자식을 많이도 낳았다. 생기는대로 낳다 보니 위안 아닌 위안하는 말이 생겨난 것일테고 정작 피임법이 제대로 전파되지 않아서였겠지. 여럿이 나누는 삶을 여러 형제자매가 있었을땐 자연스레 체득하면서 자랐기에 나누고 협동하고 양보해야함을 아는 사회여서 인간적이지 않았나 싶다. 그러자니 다 좋을 수는 없는법이라서 결핍이 나름 많았기에 그렇게 자란 세대는 자식을 조금만 낳았다. 조절이 가능한 세대였던데다 하나 둘만 낳아 올인하는 것.
아이 스스로가 부닥쳐 단련되고 깨달아 약아지는 경지를 알게 하지 못한 채, 모든걸 부모가 다 막아주는 삶으로 키워지니 저 자신의 감정만 소중한 그런 존재들을 양산해 냈다. 괴롭다는 건 고통이고, 고통을 감내한다는 건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한 삶이라는 방식이 성립해 목숨 귀한 줄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다. 실패나 좌절을 맛보지 않게 부모가 미리 다 선행해주고 최고라는 헛된 자부심만 자꾸 심어준 결과는 얼마나 참담한지. 정작으로 귀한 마음은 속으로 담아두고 겉으론 엄격하게 키우는 어른들의 훈육법이 고리타분하다 여겼었다. 그게 삶의 지혜였다는걸 나이먹어가면서 알게 된다.
처음 대하는 작가인데 그 이름은 많이 접했다. 오 해피데이를 사놓고는 못 읽은 상태서 선물만 했구나. 첫 대면인데 유려하지 않은 문체를 쓰면서도 세밀한 상황묘사를 한다. 감정선의 복잡미묘한 상태를 잘 표현한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건 사안이 죽음이면서 특히 어린 학생이 죽었기에 그를 둘러싼 인간군상이 많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 그 연관된 사람들의 제각각 반응과 상황이 조금은 지루하게도 여겨졌다. 왜냐면 명쾌한 결론도출이 쉽지 않은 사건인지 사고여서다. 모두가 하나같이 내탓은 아니요, 다 네가 그랬잖아 식의 항변일색이다. 부모네는 특히 더한데 그게 나도 부모여서 공감이 갔다. 가해자라 볼 수 있는 부모맘도, 피해자인 부모맘도, 멈칫대기만 해서 답답해 보이는 교사 입장도 이해가 갔다. 이해가 가는 것과 그렇다해도 죄의 경중이 있음은 엄연히 다르다고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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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라는 입장에서 범하기 쉬운 오류 중의 하나는, 자기 자식을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 동시에 부모가 많은 것을 감싸 안아야 아이에게 사랑을 주는 것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잘못된 것도 내 자식이니까 이해하게 되고, 내가 이해해주지 않으면 큰일 날 것처럼 생각한다. 한없는 배려, 타인이 아닌 오직 자기 자식만이 그 사랑과 배려의 대상이다. 내가 지켜본 여러 가지 경우를 떠올리니, 그게 옳은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단순한 착각에서 멈추는 것이 아닌 아이의 성장과 직결된 문제이기도 하다. 그 아이가 공부를 잘하고 일류대학에 진학하고 명함 내밀기 좋은 직업을 가지게 된다고 하여도,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인성을 배제한 채로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인간이 인성이 없이 산다는 게 어불성설이겠지만...
평범한데도 경험과 상식이 없다는 점이 소년 범죄의 비극이다. 저지르고 난 뒤에야 자신들이 얼마나 엄청난 짓을 했는지 깨닫는다. (1권 203페이지)
중학교에서 2학년 남학생 한 명이 사망했다. 학교의 운동부 교실 근처, 커다란 나무 밑에서 시신이 발견된다. 단순한 사고인지 누군가에 의해 사망한 사건인지 아직은 모른다. 이제 시작이다. 사고인지 사건인지를 알아내야 하고, 그 죽음의 진실을 밝혀야만 한다. 투명하게 드러나야 할 것들이 하나씩 밝혀질 때마다 가슴은 답답해져 온다. 신체적으로 왜소한 아이, 경제력이 뒷받침되는 집안 배경을 갖고 있다.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아이의 신분을 대변한다. 그런 아이에게 학교라는 공간은 왕따와 폭력의 주인공이 되게 했다. 음료수 셔틀과 점점 익숙해지는 폭력이 학교에서 아이가 살아가는 생존법이었다. 아이의 사망으로 새롭게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읽는 나에게 기함을 하게 했다. 처음 듣는 얘기여서가 아니다. 이 책에서 들려주고자 하는 이야기의 분위기를 미리 짐작하지 못해서도 아니다. 그동안 들어왔고 알아왔던 이야기에 좀 더 생생함을 맛봤다고 해야 할까. 더 깊이 듣고자 한다면 그 이상의 것들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올까 봐 두렵기까지 했다. 아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미움을 만들고 어떤 식으로 그 미움의 대상에게 표현하는지 구체적으로 듣는 기분이었으니까. 더욱이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처음 접했던 것이 아니니 새삼스러울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오쿠다 히데오의 『침묵의 거리에서』를 통해 만났던 느낌은 조금 달랐다.
나는, 이 작품에 대해 상당히 오해했다. 청소년을 주제로 한 그저 그런 소설, 뻔한 이야기, 왕따나 학교 폭력, 그리고 훈계하는 마무리. 읽기도 전에 내 머릿속에 이 책의 스토리를 그렇게 집어넣었다. 그런데 내 눈에 비친 것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기본적인 틀은 비슷하다. 왕따와 학교 폭력에 시달리던 한 소년이 죽었고, 그 죽음이 사고인지 사건인지를 파헤치는 과정을 즐길 수 있는 미스터리적인 요소도 있었다. 결국, 소년은 피해자였고 가해자도 찾아냈다. 그때부터다. 내 시선을 사로잡았던 것은, 직·간접적으로 내가 경험했던 장면들을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다시 보게 한 것이다. 피해자는 분명 죽은 소년이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가해자는 죽은 소년과 함께 테니스부 활동을 했던 네 명의 동급생 소년들이다. 피해자 소년의 죽음으로 등장하는 여러 인물의 태도가 내 시선을 붙잡았다.
피해자 소년 부모의 태도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터트릴 수 있는 울분의 한 방식으로 보인다. 내 아들은 죽었으나 그 죽음을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죽은 아들은 돌아오지 못한다. 마음의 병은 깊어가고 일상은 마비되었다. 그래서 학교에서 취하는 태도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고, 가해자에게 분노를 포장한 도의적인 책임을 묻기도 한다. 이게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아들의 학교생활을 알게 된다. 집에서는 마냥 예쁘고 귀한 아들인데, 항상 좋은 것만 해주고 싶어서 운동복마저 최고급으로 입히고 싶었을 뿐인데, 돈 있는 사람이 있는 행세 하는 것뿐인데... 그게 최선은 아니었던 거다. 학교라는 공간, 여럿이 어우러져 함께 해야 하는 시간, 그 시기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었을 학교에서 부모의 넘치는 사랑 표현은 아들에게 좋은 효과를 내지 못한다. 다른 아이들의 시선, 평등함을 알기도 전에 위화감부터 배우는 계기를 만들었던 게 아니었나 싶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것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었을까. 그 어떤 것도 이제는 소용이 없다. 아들은 죽었으니까. 이제 없으니까.
죽은 소년에게 가해자로 지목된 소년 네 명의 부모를 주목해야 한다. 부모들이 자주 하는 착각, ‘내 자식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 자식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거대한 착각 속에서 자식의 허물을 감싸기 바쁘다. 자식인데 내가 감싸주지 않으면 누가 해줄까 싶은 맹목적인 헌신 같다. 분명한 건 네 소년이 가해자라는 점이다. 직접 언어적·신체적 폭력을 가하기도 했고, 직접 가담하지 않았어도 가까이에서 방관자 역할을 했다. 그러니 가해의 범위는 똑같다. 그런데 이 소년들의 부모는 죽은 소년에 대해, 소년의 부모에 대해 배려하지 않는다. 내 자식이 그럴 리가 없다는 믿음으로 시작된 착각은 보통의 부모들이 가질 수 있는 마음, 잘못은 했으나 아이의 성장과 미래를 위해서 선처해달라는 틀에 박힌 호소를 남발하는 것과 같다. 그럴 때마다 나의 못된 심보는 그들(가해자의 부모들)에게 반대의 경우를 꼭 경험하게 해보고 싶어진다. 당신의 아들이 피해자가 되어 죽었다고 생각해 보라고. 이럴 때 볼 수 있는 건 침묵뿐이겠지. 알고 있다. 침묵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러니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계산법은 여기에 넣지 말라는 얘기다. 진정, 자기 자식을 위하는 길이 선처를 호소하고 감싸 안는 것이 아님을 안다면 그런 태도를 보이지 말라고. 자식을 키운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일 거다. 자식을 ‘올바로’ 키운다는 게 더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기계가 아니니 인간의 눈으로 똑바로 보고 올바로 키우는 게 당연한 일 아닌가?
부모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 감정이 상할 수 있는 말이 자기 자식에 관련된 말이다. 몇 년 동안 친구의 아이를 지켜보다가 아이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어렵게 말을 꺼낸 적이 있다. 주변에서 친구의 아이 또래의 아이들을 자주 보다 보니 자연스레 어떤 게 옳은 것이고 어떤 게 조금 잘못된 것인지 보는 눈도 생겼다. 하지만 아이가 없는 내가 아이를 직접 키우는 사람에게 얘기하는 건 상당히 민감한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계속 친구의 아이를 봐야 할 입장에서 해줄 수 있는 말이라 생각해서 악역을 자처했다. (내가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말을 하는 경우, 좋은 얘기는 거의 없다.) 내가 몇 년 동안 지켜본 너의 아이는 이런 점은 아닌 것 같다, 조금 더 관심 두고 지켜보거나 전문가의 상담을 받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아이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너희 부부의 많은 것을 보고 있는 아이가 저절로 보고 듣고 배우면서 보이는 행동이라 생각된다, 등등. 아주 조심스럽고 솔직하게 얘기했으나 친구의 반응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좋은 이야기도 아니고, 자신의 아이를 두고 하는 말이 좋게 들릴 리가 없다. 그렇게 얘기를 하고 몇 달이 흘렀을 때 친구가 울면서 전화를 했다. 유치원 담임교사와 상담하고 왔는데 담임교사가 몇 달 전에 내가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하더라고 했다. 그때 내가 했던 말을 듣기만 했는데(아이도 안 키우면서 말하는 입장이었으니...), 유치원에서 똑같은 말을 듣고 오니 겁이 나더라는 것이다. 그마저도 담임교사는 얼마나 말을 돌려서 좋게 들리게 했겠느냐고, 실제로는 더 심각한 상태인 것 아니겠느냐고... 유치원에서는 보통 3월에 개원을 하면 어느 정도 아이들을 지켜보다가 4월쯤에 학부모 상담을 한다. 아이의 유치원 생활을 잘 살펴보고 그 생활을 부모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직접 지켜본 사람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니 아주 엉터리 상담은 아니다. 내가 생각했을 때, 혼자가 아닌 단체생활에서 아이의 문제가 더 잘 보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활에서 발견되는 아이의 문제점을 해결하거나 보완하지 않으면,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더 문제점이 쌓여갔으면 쌓여갔지 덜어지는 건 쉽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다. 아이에게 조건 없는 부모의 희생과 헌신으로 감싼 배려와 이해가 아니라 한 명의 인격체로, 자라나면서 계속 경험하게 될 사회(학교나 직장 그 외)라는 공간에서 어떤 자세와 사고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 부모의 가장 큰 역할이 아닐까 한다. 어디 가서 거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고품격의 가르침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책 속의 주인공들은 중학교 2학년이다. 곧 고등학생이 되고 성인이 될 것이다. 지금 자신들이 왕따와 폭력의 대상으로 삼았던 한 소년의 죽음이 앞으로 자신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알고나 있을까. 아마도 지금 당장은 모를 것이다. 그렇다고 모른 채로 자라서도 안 된다. 그래서 그 모름을 알게 하는 게 부모의 역할이라고 본다. 그 임무를 수행할 사람도 부모밖에 없다. 부모가 그 역할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자식을 보듬어 안는 시선이 아닌 객관적인 시선을 가져야 한다. 쉽지 않겠지만, 좀 더 먼 거리를 가야 하는 자식을 위하는 마음가짐으로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각자의 위치에서 취해야 할 태도, 알고 싶고 드러내야 할 진실이 있기 마련이다. 학교와 선생의 입장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현명한 다리 역할을 해야 하고, 학교 안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책임과 반성을 해야겠지. (아, 이 뻔한 말밖에 할 수 없는 게 가슴이 아프지만...) 경찰이나 검찰에서는 분명하고 투명하게 드러나야 할 사실과 진실을 밝혀야 하는 의무를 망각해서는 안 되겠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립의 시선에서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보도해야 하는 언론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과 피를 나누었다고 무조건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의 소중한 자식에게 객관적인 시선을 가져야 하는 부모의 태도다. 내 자식의 잘못은, ‘내 자식’이란 수식어를 뺀 ‘잘못’으로만 판단해야 하는 시선이다. 누군가는 이런 시선을 잔인하다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게 무엇을, 누구를 위해 취해야 할 태도인지를 분명하게 상기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오쿠다 히데오의 메시지가 썩,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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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본 지금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슬프다, 우울하다, 화난다, 어이없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작가는 ‘모든 일에는 흑백을 가릴 수 없는 면이 있기 마련이라, 100퍼센트 악도 100퍼센트 정의도 없다’ 고 했습니다(악을 말하고 선이 아닌 정의를 말했군요. 정의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쩐지 이 말을 따라 글을 쓴 것 같습니다. 작가가 한 말 틀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을 보고 제가 생각한 것은 사람한테는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다였어요. 여기 나오는 사람은 거의 현실에서 달아나고 있습니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다. 이것은 제가 그렇게 본 것이지 저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아이는 아직 어려서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몰라서 다른 아이를 따라하고 아이들과 한 약속을 지켰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른, 부모는 자기 아이가 아니면 괜찮고, 자기 아이한테만 나쁜 일이 없기를 바랐습니다. 부모는 아이들 사이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려고 하지 않고 그냥 시간이 흘러서 아이가 다시 웃는 일상을 살아가기를 바라더군요. 자기 아이한테 큰일이 없으면 어떤 일이 있었든 상관없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자기 아이가 귀하면 남의 아이도 귀한 법인데 요즘은 이것을 잊어버리는 부모가 많은 듯합니다(자기 자식만 생각하는 부모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