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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문장)을 쓰는 길.『고종석의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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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유... 글을 쓰려니 한숨부터 나온다. 꽤 오랫동안 그랬다. 『고종석의 문장』을 읽은 지금도 비슷하다. 열심히 쓰겠다는 결의는 온데간데없고 자신감마저 바닥을 친다. 잘 쓰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손에 들었는데 정작 맛본 건 좌절감이다. 책에서는 내가 지향해야 할 글쓰기를 강조하는 반면 내 글의 모든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나에서 열까지 내 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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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유...

글을 쓰려니 한숨부터 나온다. 꽤 오랫동안 그랬다. 『고종석의 문장』을 읽은 지금도 비슷하다. 열심히 쓰겠다는 결의는 온데간데없고 자신감마저 바닥을 친다. 잘 쓰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손에 들었는데 정작 맛본 건 좌절감이다. 책에서는 내가 지향해야 할 글쓰기를 강조하는 반면 내 글의 모든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나에서 열까지 내 글을 훈계하는 것 같았다. 그만큼 내 글에 문제가 많다는 거다. 어떻게 하면 더 깔끔한 글을 쓸 수 있을까. 『고종석의 문장』은 순전히 이에 부합하는 책이다. 2013년 숭실대학교에서 이루어진 강연을 정리한 책으로 작법과 테크닉보다 간결함과 깔끔함을 우선한다. 2002년 출간된 『자유의 무늬』를 교재 삼아 냉철한 첨삭을 하며 강의 내용에 힘을 싣는다. 논리와 간결함을 바탕으로 한국어의 아름다움이 배어나는 글이 그가 추구하는 글이라면 지양해야 할 것은 과한 접속사와 보조사, 번역 투 문체다. 알고 있었으나 개선하려는 열의가 턱없이 부족했던 게 사실이다. 머릿속을 어지럽게 부유하는 생각 정리를 하고 싶었던 게 글을 쓰는 이유였다. 그렇다 보니 자기 만족은 있었을지 모르나 좋은 글을 쓰지 못했다. 잘 쓰고 싶은 마음만 앞섰지 한글 고유의 아름다움은 차치하고 오문과 비문투성이로 전락한 글을 보게됐다. 앞서 터져 나온 한숨은 그런 연유다. 부끄러움, 질책, 자괴감 등이 중첩되면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 상태다.

 

 

고종석 씨의 글을 처음 접한 건 『해피 패밀리』라는 책을 통해서다. 절필 선언을 한 그가 마지막으로 내놓은 소설. 궁금했다. 절필 선언한 연유가 궁금했고 글을 향한 호기심도 일었다. 반전과 나름대로 가족의 화합도 내포한 썩 마음에 들어온 소설이다. 절필에 대한 아쉬움이 남았고 그 뒤로 고종석이라는 이름이 눈에 띄면 쉽게 지나치지 못했다. 그래서 이 책도 망설임 없이 선택했다. 시작부터 끝까지 좌절을 맛보게 한 그가 얄밉기도 했지만 논리적인 부연 앞에서 꼬리 내리는 건 선택한 내 몫일 수밖에 없다. 글쓰기 책 대부분이 원칙으로 삼는 주의점을 기본으로 해서 인문학적 성찰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는 책이다. 글쓰기 관련 책에 관심이 많다. 전업 작가가 아니라도 온라인, 블로그 등 열린 곳에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슷할 것이다. 정작 제대로 읽은 책은 두 세 권에 불과하다는 게 아이러니한 점이지만 말이다. 저자는 글쓰기 방법과 언어의 궁극적 고찰을 함께 하고있다. 여타 글쓰기 책과 차별화된 부분이다. 좋은 글쓰기 방법에 국한하지 않고 언어가 글이 되는 과정, 언어의 원천까지 조목조목 짚어준다. 강연을 엮은 책이라 딱딱한 느낌보다 조근조근, 때로는 강하게, 강약 조절을 해서 청강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가 강조하는 건 논리와 간결함,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내재한 글이다. 나는 셋 다 해당하지 않는다. 평소 내 문장이 번역 투에 가까운 건 알고 있었다. 오랜 습관화가 되어서인지 참 고치기 어렵다. 『고종석의 문장』을 읽으면서 기초부터 문법까지 새로 공부해야겠다 싶었다. 글 쓸 때 다양한 사전을 참고하라는데 사전 들춰본 지가 언제인지 까마득하다. 체화되지 않은 채로 포장에만 신경 쓰는 글은 싫은데 가만 돌아보니 내 글이 점점 그렇게 변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진솔한 글, 잘 읽히는 글을 쓰고 싶다. 감동까지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이 책은 두고 들춰봐야 할 책이다. 습관으로 굳어버린 오류를 바로잡으려면 끊임없이 상기하는 방법뿐이니까. 글을 잘 쓰면 좋겠다. 단순하지만 맹목적 일념으로 글쓰기 관련 책을 찾는다. 한 권이라도 더 읽어보면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에. 물론 읽는 행위로 그치면 거기서 끝이다. 저자의 말처럼 끊임없는 훈련을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확실히, 쓰지 않으니 퇴보한다. 글쓰기란 그렇다. 발전은 더딘데 퇴보는 한순간이라는 것을 공감하는 이들이라면 글쓰기가 재능보다 압도적 훈련에 좌우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쓰는 행위는 사유와 훈련이 꾸준히 뒷받침되어야 한다.

 

 

거듭 말하지만 글은 쓰지 않으면 퇴보한다. 꾸준히 쓴다고 해서 빠르게 발전하지도 않는다. 그야말로 고독한 수행과도 같다. 그가 예로 든 산문가의 글처럼 인내와 성실함, 노력이 고루 갖춰져야 점진적이나마 한결 나아진 글을 보게된다. 이는 꾸준한 쓰기는 물론 그 세월만큼 접한 다양한 책과 문장, 사물과 자연의 흐름을 체득한 결과이기도 하다. 잘 쓰고 싶으면 많이 읽고 쉼 없이 쓰며 다양한 지식과 교양을 쌓는 방법밖에 없다. 글쓰기 책에서 흔히 기본자세로 내세우는 방침이기도 하다. 알고 있으면서 왜 잘 되지 않을까. 반복 훈련의 부족과 안일함 때문이다. 쉽게 읽고 잊는 것도 문제라 하겠다. 한 권의 책을 재독 할 생각 없이 다양한 책을 읽겠다는 욕심이 앞서는 것도 그렇다. 많은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좋은 책을 거듭 읽는 게 낫다는 그의 말을 새기면서, 자기 위안하는 밤이다. 글쓰기가 한결 수월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달리 숙제만 가득 넘겨받은 기분이다. 좋은 글(문장)을 쓰는 길이 여기(『고종석의 문장』) 있지만, 아직 그 길의 끝은 멀기만 하다.

 

 

w*****8 2014.07.11. 신고 공감 1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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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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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글을(글이라고 하다니 가당치도 않지만) 쓸 때 간혹 맞춤법을 찾아 보긴 하지만 문법을 찾아보지는 않는다. 느낌이 이상하지 않는 지 몇번 읽어보고 괜찮다 싶으면 그냥 놔둔다.(감에 의존) 학교 다닐 때 배웠던 것 같은데 형용사, 부사, 용언, 체언 등에 대한 기억은 까마득하다. 이 책은 글을 쓰고 싶은(쓰려고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고종석의 강의를 모아놓았다. 그래서 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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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글을(글이라고 하다니 가당치도 않지만) 쓸 때 간혹 맞춤법을 찾아 보긴 하지만 문법을 찾아보지는 않는다. 느낌이 이상하지 않는 지 몇번 읽어보고 괜찮다 싶으면 그냥 놔둔다.(감에 의존) 

학교 다닐 때 배웠던 것 같은데 형용사, 부사, 용언, 체언 등에 대한 기억은 까마득하다.

 

이 책은 글을 쓰고 싶은(쓰려고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고종석의 강의를 모아놓았다. 그래서 직접 강의를 듣는 것처럼 술술 익힌다. 또한 잘못된 문장을 예로 들면서 무엇이 잘못인 지를 찾고 수정해놓아 실제 글쓰기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한 실용서이다.

 

간혹 우리나라 최고 위인인 세종대왕을 무시(사실 적시) 하는 내용도 있어 애국심에 불타는 사람들을 차갑게 만들기도 하지만 당대의 문장가로 꼽히는 고종석의 글쓰기 능력을 (혹시나) 나도 배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줘서 좋다.

 

조지 오웰을 예로 들면서 이 책은 시작하는데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 에서는 사람들이 글을 쓰는 이유를 네가지 동기로 분류했다고 한다.

 

첫번째 동기는 순전한 이기심, 순전한 이기심이라는 건 말 그대로 돋보이고 싶은 욕망때문이라는

두번째 동기는 미학적 열정, 아름다움에 취하게 되면 거기에 대해 뭔가를 쓰고 싶어지는 마음때문

세번째 동기는 역사적 충동,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를 위해 보존하려는 욕망이다라는 

네번째 동기는 정치적 목적,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욕망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 어떤 사회를 지향할 것인가, 그런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싸워야 할 것인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망 - 다시 말해 글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해 그 사람들의 생각을 바꿈으로써 세상을 더 살만한 것으로 바꾸고 싶은 욕망이라는

 

나는 왜 쓰는가? 생각해 보니 첫번째와 세번째에 가까운 것 같다. 돋보이고 싶고 어떤 것에 대한 느낌을 나누고 싶은 마음, 어쨌든 책을 읽었으면 실천을 해야 한다. 핵심 메시지를 내 것으로 만들어 보자

고종석은 "글쓰기는 압도적 부분이 재능보다 훈련에 달렸다" 고 했으니 말이다.

 

논리 - 명료한 글쓰기가 내뿜는 치명적 아름다움

글에는 일단 논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독자가 그 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테니까요.

논리학이란 말할 것도 없이 명확함에 기여합니다.

논리와 수사 둘 중에서 만약 한가지만을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논리를 골라야 합니다.

심지어 문학작품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사 - 영혼을 선동하는 아름다운 글쓰기

글이 잘 읽히기 위해서는 화장을 좀 해야 합니다.

그걸 수사학이라고 합니다.

즉 수사학은 기본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적절하게 쓰이기만 하면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아주 강렬한 명확함을 줍니다

남용되지 않을 때, 수사는 글을 윤기 있게 만듭니다.

 

언어학 - 한국어 지식은 글쓰기의 온도를 높인다

'꿈틀꿈틀' 이나 '너울너울'을 외국어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누르퉁퉁하다'나 '푸르죽죽하다'를 외국어로 어떻게 옮길 수 있겠습니까?

한국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모양이나 빛깔이 많습니다.

그 말들을 글의 적절한 자리에 사용해보십시오.

생동감 넘치는 한국어 문장을 짤 수 있을 것입니다.

 

장문을 쓰지 말고 단문을 쓸 것,

퇴고를 할 것

쓸 데 없는 문장을 끼워넣지 말 것

~의해서, ~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등 쓰지 말라는 말, 표현을 명심할 것

 

한번 글을 쓰면 다시 읽으려 하지 않고 글을 못 쓴다는 한탄만 하는 나, 

나의 가능성을 믿고 글쓰기를 연습하자.

1년 후, 혹은 5년 후 돋보이고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글을 쓸 수도 있을 지 모른다. 하하하

이렇게나 긍정적인 마인드라니!!!

k*****7 2020.03.04. 신고 공감 14 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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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잘 쓰는 방법이 여기 다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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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단순히 저주받은 기억력을 보완하는 차원의 기록에서부터였지만,  글을 쓰는 일은 가끔 공적인 영역과 만난다. 꼼꼼히 읽어주는 이웃도 있고, 우연히 책에 대한 정보를 찾아다니다가 읽게 되는 익명의 네티즌도 있다. 이런 책을 집어 들었다고 하면, 오탈자와 비문이나 한 번 더 손보지라고 비웃을 사람도 있다. 어쨌든 막연히 이제는 좀 제대로 써야겠다는 생각이 생기자,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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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단순히 저주받은 기억력을 보완하는 차원의 기록에서부터였지만,  글을 쓰는 일은 가끔 공적인 영역과 만난다. 꼼꼼히 읽어주는 이웃도 있고, 우연히 책에 대한 정보를 찾아다니다가 읽게 되는 익명의 네티즌도 있다. 이런 책을 집어 들었다고 하면, 오탈자와 비문이나 한 번 더 손보지라고 비웃을 사람도 있다. 어쨌든 막연히 이제는 좀 제대로 써야겠다는 생각이 생기자, 글쓰기가 어렵게 느껴졌다. 잘쓰려니 잘 안된다. 그렇다고 해서 대충쓰면 잘된다는 것도 아니다. 뭘하든 시간을 투자하면 투자한 것 만큼은 성과를 보아야 하지 않을까. 공들인 시간만큼 늘지 않는게 글쓰기다. 인터넷 글쓰기는 글이라기 보다는 말에 가깝다는 저자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책에 대한 기록이니만큼 책의 상징성을 훼손하지는 않는 차원의 글쓰기를 위해 답보상태를 벗어나고자 하는 발상에서 글쓰기 관련 책들을 침대 옆에 쌓아두었다. <고종석의 문장>도 그 중 하나다. 강연 예약을 개시하자마자 순식간에 마감된 숭실대 강연을 그대로 녹취해서 인쇄한 책이다. 붓끝이 아닌 혀끝에서 나온 문장인데도 탈고를 거듭해서 잘 편집된 책처럼 문장이 유려하다. 문어체가 친근하게 느꺼진다. 글쓰기 강연인데 재미있는 읽을 거리와 인문학적 성찰이 넘쳐난다.

 

 

1. 글을 왜 쓸까

1984의 작가 조지 오웰은 글쓰는 동기를 네 가지로 정의했다. 작가는 첫 장에서 오웰의 글쓰기를 이렇게 소개한다.  첫번째 동기는 이기심. 돋보이고 싶은 욕망이다. 두번째는 미학적 열정이다. 어떤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그것에 대해 글로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다. 여기에는 언어 자체에 대한 아름다움도 포함된다. 황현상의 산문이나 에밀 시오랑의 에세이는 형태적으로나 혹은 견고함에 있어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글들을 쓰는  사람들은 언어를 조탁하면서 미적 쾌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세번째는 역사저 충동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를 위해 보존해 두려는 욕망을 뜻한다.  마지막은  정치적 목적의 글쓰기이다. 이것은 세상을 특정한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욕망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오웰이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떨어뜨리는 걸 감수하면서도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 미학적 열정을 버린 사례를 당시 스페인 내전과 관련된 역사적 배경과 함께 감명깊게 강의한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 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 되어 있었던 때였다. 조지오웰 <나는 왜 쓰는가> 더블 인용 25

오웰 자신은 천성적으로 정치적 목적의 글쓰기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결국 오웰이 살았던 시대가 양심적 예술가에게 정치적 목적을 지닌 글을 강제했기 때문이라고 고정속은 결론내린다.  비슷한 예로 지금은 이상한 행보를 보이고 있는 시인 김지하의 예를 들었다. 김지하 역시 등단 당시 전형적인 서정 시인이었는데 박정희 정권을 겪으면서 시대에 흡수되어 정치시인이 될 수밗에 없었다는 것이다. 저자 자신의 저서이자 강의의 교정 교제로 사용한  <자유의  무늬> 역시 세상사람들의 생각을 바꿈으로써 세상을 바꾸려는 욕망 때문에 쓴 글임을 고백한다.

 

나의 글쓰기는 오웰의 정의에 해당되는 게 없는 것 같지만, 굳이 따진다면 세번째 목적, 기록에 가까운 것 같다. 사실을 기록하기 보다는 책에 대한 감상과 내용을 기록하는 것이 처음 시작할 때의 목적에 가까왔다. 최소한 읽었는지 안읽었는지 정도는 기록할 목적이었는데, 좋은 책을 많이 접하다 보니, 읽은 내용과 책을 통해 얻게 된 성찰과 사유가 휘발되어 버리기 전에 내 글 속에 내 언어로 가두어 놓을 작정이었다. 왜 쓰는지, 어떻게 쓸 것인지, 계속 쓸 것인지는 더 생각해보아야 할 듯하다. 어떤 이유가 되든, 또 어떤 국면으로 글쓰기 작업이 전환되든 이쯤 해서, 글쓰는 것에 대한 제대로된 기반 지식을 확보해 두어야 하겠다.  

 

2.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계속 써야 한다. 필사는 도움이 안된다. 좋은 글을 많이 읽는다.  첫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인상적으로 쓴다(세계를 매혹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서문 첫 문장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처럼 인상적인 첫 문장이 중요하다). 한국어답게 쓴다. 외국어 번역체를 흉내내지 않는다. 문장을 간결하고 기품있게 유지한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자신의 글 <자유의 무늬>를 교재로 나쁜 문장을 좋은 문장으로 고쳐가면서 이론과 실제를 병행한 수업이 이어진다. 글(강의)의 내용은 글쓰기 자체의 실용적 목적에서 조금 벗어난 얘기도 있다. 그런 부분은 글쓰는 것의 근본 재료인 말, 한국어, 그리고 언어와 문자에 대한 이해와 철학을 이야기하는 것이어서 더욱 흥미로웠다.

 

■한국어답게 써라

한국어는 다른 자연언어에 비해 음성상징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의성어 의태어가 특히 발달한 언어다 외국어에 의성어는 제법 있어도 의태어는 찾아보기 어렵다. 허우적허우적, 너울너울, 둥실둥실 같이 모양이 연상되는 의태어를 외국어로 어떻게 옮길까. 한국어는 자연언어 가운데 색채 언어가 가장 발달한 언어다. 저자가 사전에서 찾아본 바에 의하면 붉은색에 해당하는 단어만 해도 60개나 가까이 된다. 영어나 불어에서는 고작 두 개다. 따라서 음성 상징과 더불어 색채 어휘를 풍부하게 사용하는 것은 문장을 한국어답게 만든다. 한국어에 의태어 의성어 색채 언어에 관심이 있고 글의 적절한 자리에 사용하면 생동감 넘치는 한국어 문장을 짤 수 있으리라는 것이 고수의 충고다.

 

번역체 느낌이 되는 말을 쓰지 않는다..  '~적''~적인', '~의'는 일본어에서 왔다. 빼도 말이 되면 뺀다. ~에의~로의 같은 겹조하는 절대 쓰지 않는다. '~하고 있는'과 같은 현재 진행형은 번역체 느낌이 나므로 쓰지 않는다. 대과거, 과거완료 ~있었다라는 표현도 쓰지 않는다. 있다로도 충분하다. 수동형태 표현은 되도록 피한다. ~화시키다~하다로 무조건 고친다.

 

단위를 나타내는 불완전 명사는 한국어답지 않은 표현을 쓰지 않는다. '두 개의 구슬''구슬 두 개'가 자연스럽다. 또한 한국어에서 수는 하찮은 문법적 범주다. 복수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상황이라면 ~들을 뺀다. 특히 한국어서 들은 주어가 복수이면 문장의 아무데나 갖다 붙여도 된다.  

 

한국어는 격조사가 있기 때문에 성분의 위치를 비교적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 '이 가'와 '을,를' 붙이면 아무데나 끼워도 주어 목적어가 된다. 주어와 서술어의 사이, 또는 목적어와 서술어의 사이가 가까운 것이 좋다. 문장 성분들이 어디에 걸리는지 명료하지 않으면 뜻을 이해하기 힘들므로 목적어와 동사를 너무 떨어뜨리지 않는다. 그 사이 부사어가 너무 길게 끼면 그 부사어를 앞으로 뺀다.

 

■간결하게 써라

저자는 어떤 조사든, 주격 조사든 목적격 조사든 보조사든 빼도 의미를 흩뜨리지 않는다면 빼라주의이다. 간략함, 간결함이 좋은 문장의 미덕이다 라고 거듭 강조한다. '그러니까', '그러나'와 같은 접속 부사를 많이 쓰는 이유는 이걸 넣어야 논리적으로 연결된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인데 쓰지 않는게 간결하고, 문장과 문장 사이에 어떤 긴장감이 생긴다. 관형사 '그' 역시 없으면 말이 통할 때에는 뺀다.

 

자기 생각을 말하는 글에서 '개인적으로'는 쓸 데 없는 말이다. '거기에', '여기에'는 부사이므로 거기, 여기로 고친다. '역시도', '아마도'도 '역시', '아마'로 고친다.  '~한 것이다', '~한 일이다', 라는 말은 되도록 안쓴다.  명사 뒤에 붙는 '동안'은 어색하다. '~에 대한'도 구질구질하다고 말한다.

 

'~로서'는 자격을 뜻하고 '~로써'는 수단이나 방법을 뜻한다. 그런데 '~로써'는 무거운 느낌을 준다. '~함으로써'와 같은 말은  제1부사형 '~하여' 로 고친다.

 

■기품을 유지해라

글을 잘 쓰려면 글의 재료가 되는 단어를 많이 알아야 한다.가용 어휘가 모자라면 표현이 풍부해질 수가 없다. 어휘를 늘리는 방법 하나는 사전을 자주 들춰보는 일이다. 유의어 사전, 반의어 사전, 연관어 사전을 이용한다.

 

죽은 사람에게는 '씨'를 붙이지 않는다. 스포츠 선수나 연예인들 뒤에도 '씨'를 안붙인다. 이것은 기자들의 관습이다. 예술비평이나 문학비평일 경우에도 씨를 붙이지 않는다.

 

대립되는 두 소재에 대해 글을 쓸 때는 비슷한 분량으로 균형을 맞춰 글의 짜임새를 준다.

 

문장의 기본 법칙이다. 같은 단어를 반복해서 쓰지 않는다. 비슷한 조언들이 더 있다. '진부함과 상투성에도'처럼 비슷한 말을 거푸 쓰지 않는다. '그렇게 철없게'처럼 끝이 비슷비슷하게 끝나는 말을 반복하지 않는다. 글이 추례해 보인다.

 

긴장감을 유지하여, 문법적으로 틀린 말을 쓰지 않는다. '~하는 이유는 ~ 때문이다.'는 오문이다. '때문이다'와 호응할 수 있는 것은 '왜냐하면'이다. '이유는'을 쓰려면 '이유는 ~에 있다.',' 이유는 ~한다는 사실이다'로 써야 한다.

 

그 밖에도 기품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  격앙된 감정을 여과없이 드러내지 않는다. 그 예로 <자유의 무늬> 중 "그래도 지금 이 글을 쓰는 기분도 더럽기 짝이 없다"를 들었다. 이런 글을 쓰셨다니 고종석님 웃기기도 하고 귀여우시다. 영화나 드라마에 관한 글을 쓸 때에는 주인공과 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를 잘 구별해야 한다. 사람 이름을 언급할 때, 익숙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소개를 해줘야 한다. 글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유지한다. 외국인 노동자를 이주노동자로 하는 것처럼 부정적 이미지를 지니고 있던 말을 버리고 중립적 또는 공정적 뉘앙스를 담은 말을 쓰는 것이 글쓰기의 정치적 올바름이다. 하지만, 정치적 올바름을 실천하기 위해 글의 결을 해쳐서는 안된다는 것이 저자의 융통성이다.

 

3. 많은 사람이 걸으면 길이 되고,

많은 사람이 말하면 표준어가 된다. 저자는 말의 자기 변화에 대해 시종일관 긍정적인 입장을 보인다. SNS 언어는 사용자들끼리 유대감을 드러내기 위해 그 바깥 세상의 규율에서 해방되는 느낌을 위해 생겨났고 일종의 파롤 역할을 하면서 한국의 진화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한자어와 외래어의 사용에도 저자는 융통성있는 사용을 권하는 주의다. 말은 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것이지 문법학자들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 여러 분야의 다양한 말들의 유입이 언어를 더욱 풍성하게 한다는 저자의 입장에 동의한다.

g******1 2014.06.25. 신고 공감 12 댓글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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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쳐다보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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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에게 가장 매력적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모르긴 몰라도 노래 잘 부르는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연주가에게는 악기를 잘 다루는 사람이, 운동선수에게는 운동을 잘 하는 사람이, 배우에게는 연기를 잘 하는 사람이 단연 매력적으로 보이겠지요.  김연아도 그렇잖아요.  물론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미스코리아가 잘 생긴 사람보다는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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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에게 가장 매력적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모르긴 몰라도 노래 잘 부르는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연주가에게는 악기를 잘 다루는 사람이, 운동선수에게는 운동을 잘 하는 사람이, 배우에게는 연기를 잘 하는 사람이 단연 매력적으로 보이겠지요.  김연아도 그렇잖아요.  물론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미스코리아가 잘 생긴 사람보다는 오히려 돈이 많은 사람을 배우자로 고르기도 하니까요.

 

그렇게 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자신이 속한 분야에 익숙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 분야에 대해 아는 게 많아져 사람을 판단하는 데 실수가 적은 까닭일까요.  저는 그 이유를 '닿을 수 없는 그리움'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웬 뜬금없는 그리움 타령이냐구요?  일종의 동경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군요.  지금까지 살면서 넘을 수 없는 한계를 단 한 번이라도 경험했던 사람이라면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나 한계는 존재합니다.  선천적 재능을 요구하는 분야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연습을 통하여 어느 정도의 성취를 이룰 수 있는 분야에서도 그렇습니다.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고 했던 나폴레옹의 말은 순전히 뻥일 뿐입니다.  '천재는 99%의 땀과 1%의 영감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던 에디슨의 말도 뻥입니다.  인간의 욕심은 항상 더 높은 곳을 바라보기 때문이지요.  세상을 살다 보면 각고의 노력으로 이룬 얼마간의 성취가 한낱 쓰레기처럼 느껴질 때가 있게 마련입니다.  나보다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 나보다 운동을 잘 하는 사람, 나보다 잘 생긴 사람, 나보다 부자인 사람은 언제 어느 때나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 앞에만 서면 나는 한없이 작아지게 마련이지요.  머리가 다 아득해집니다.  노랫말도 있었던가요?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하는.

 

저는 그런 일을 시도 때도 없이 겪습니다.  뭐 하나 제대로 이뤄놓은 게 없기 때문입니다.  '제대로'라는 말도 참 어정쩡하지만.  암튼 저는 부단한 노력이나 뛰어난 재능 중 어느 것 하나 확실하지 않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런 까닭에 제가 만났던 사람 대부분은 저보다 잘났고 부럽기 그지없는 대상이었습니다.  내가 닿을 수 없는 곳, 내가 다다를 수 없는 저쪽 세계를 그리워하고 동경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성직자가 아닌 이상 아마 없지 싶습니다.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도 그렇지 않을까요?  사람이 영원히 사는 것도 아닌데 몇 년을 노력해야 스스로 만족할 수 있을까요?  십 년?  이십 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글쓰기를 업으로 하지도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겠지만요.  이 시대의 대표적인 문장가로 알려진 고종석의 글쓰기 직강 <고종석의 문장>을 읽고 들었던 생각입니다.

 

"음악이나 수학은 재능을 타고나지 않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다다를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글쓰기는 다릅니다.  물론 글쓰기 능력이라는 것도 저는 어느 정도 타고난다고 생각합니다.  말에 대한 감각, 말을 다룰 줄 아는 능력 같은 게 어느 정도는 타고난다고 생각하는데, 음악이나 수학과 달리 이건 충분한 훈련이나 연습으로 크게 개선할 수 있습니다."    (p.40 ~ p.41)

 

저자는 자신의 생각을 위와 같이 썼고 자기 경험을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저자를 탓할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저자와 논쟁하자는 얘기도 아닙니다.  어차피 논쟁을 해봐야 피차 확실한 근거도 없는데 쉽게 끝날 것 같지도 않구요.  1장 '글은 왜 쓰는가?'로 시작하여 책은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먼저 예문을 들고 이렇게 고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식으로 쓰인 이 책은 다른 글쓰기 책에 비하여 친절하구나 생각했습니다.  이따금 일반인에게는 조금 버겁겠다 싶은 전문적인 내용도 없진 않지만 그럭저럭 참으며 읽을 만합니다.

 

그러나 도서관에서 책을 검색해본 분은 아시겠지만 글쓰기 관련 서적이 좀 많아야지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아주 쉬운 책부터 전문가용 서적에 이르기까지 서가가 모자를 정도로 차고 넘쳐나는 것을 많이들 보셨을 줄 압니다.  그 많은 책을 다 읽는다 해도(다 읽기도 어렵겠지만) 글쓰기 솜씨가 눈에 띄게 좋아질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오히려 제가 드릴 수 있는 팁 하나는 '위는 쳐다보지 마세요'입니다.  실수 좀 하면 뭐 어떻습니까.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닌데.  맘에 드는 글쓰기 책 한두 권 읽고 무작정 쓰다보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요?  결코 성에 차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이달의 사락 s*****l 2014.07.26. 신고 공감 12 댓글 15
리뷰 총점 종이책 주간우수작
고종석의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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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으로 상당히 유명하신 분이다. 우리집에 있는 책중에 2002년 지승호와 대담집 중 한편을 장식했지만, 그 이름의 유명세 만큼 그의 글을 접해본 기억이 없다.  트위터속에서 그의 몇마디는 까칠까칠하게 다가올때도 있다. 최근 기사에 숭실대에서 강의하는 모습을 어디선가 본 듯한데,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그 강의가 책으로 만들어 진것 같다. 카트에 담아두다가도 낯설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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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으로 상당히 유명하신 분이다. 우리집에 있는 책중에 2002년 지승호와 대담집 중 한편을 장식했지만, 그 이름의 유명세 만큼 그의 글을 접해본 기억이 없다.  트위터속에서 그의 몇마디는 까칠까칠하게 다가올때도 있다. 


최근 기사에 숭실대에서 강의하는 모습을 어디선가 본 듯한데,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그 강의가 책으로 만들어 진것 같다. 카트에 담아두다가도 낯설음으로, 결국 빙빙돌아서 시작하는 이유가 됬다. 책을 읽으며, 이분 가깝게 다가가기도 쉽지 않을 듯 하지만 살짝 매력있다. 그가 좋아하는 한국어 단어 '그윽하다'의 느낌은 아니지만 적절하게 설명할 단어가 마땅하지 않다. 


책속에서 언급된 글을 쓰는 네가지 이유가 모두 나에게 부합되는가 생각해 보게된다. 일견 맞는 것도 같다. 내가 블로그를 하는 이유는 잠시 무엇인가를 읽을때 내 머리속에 일어났던 생각을 기록하는 목적이다. 잠재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욕구, 누군가가 알아주었으면 하는 욕망도 있고, 정치적인 의사도 있다. 책 속의 정리가 차분히 돌아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누군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넘어 기억해주기 바라고, 혹시 작은 도움이 될수 있으면 하는 마음이다. 기억되고 싶은 욕구가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학창시절부터 국어받아쓰기를 제외하고 별로 재미 본 기억이 없다. 읽는 양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시절 국어1,2점수의 합과 수학점수가 박빙일 때가 많았다. 문과를 선택해야만 하는 여건이 그리 만족스럽지도 않았지만, 점수를 보면 기가찰 일이 많았던 셈이다. 그런데 사회에 나와서도 은근히 하이브리드 자동차 처럼 이 경계를 왔다갔다하며 살게된다. 팔자라는 것이 있겠구나 하다가도, 그렇게 생겨 먹은걸 어떻게 하나하고 자문자답한다.


책에서 학교문법이라고 정의하고 설명하는 부분은 아주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책속에서 저자가 바른 언어를 사용하고, 좋은 의사소통을 위한 글쓰기, 일상적으로 반복하는 못마땅스러운 용례 등은 대단히 실용적이다. 일상과 블로그를 하면서 조금씩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실수를 있는 그데로 남기던 자세와 글을 쓰는 태도가 스스로를 업신여기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금년들어서부터 내가 쓴글을 다시 읽어보고, 오타도 수정하고, 다시 정리하는 경우가 늘어간다. 그런면에서 좋은 글을 쓰지는 못하지만, 태도점수는 약간이나마 향상의 가능성이 있는 것인가?


문장을 간결하고 명확하게 줄이는 설명을 읽다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전문가의 말이 설득력있게 다가오는 부분이지만, 한 두번의 유사한 체험을 하고 만족감이 상승하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내 실력이 전문적인 글쓰는 직업과는 전혀 무관하고, 내용상으로도 금전과 제품, 기술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 재미없는 삶이다. 이런 조건에서 이 책과 나의 취미생활이 되어버린 블로그, 책읽기 사이에서 새로운 동기부여를 해주는 것 같다. 


글을 정리하면서, 논리에 대한 그의 말이 고맙다. 보고서와 문서 정리가 내가 쓰는 글의 대부분이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면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표현도 그 기반위에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오늘 읽고 나에게 스쳐간 생각을 정리하는데 보통 때보다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 단위단 투입이 많은 반면 효용은 같이 상승하고 있다. 생산적이다. 책을 읽는 몇일동안 이메일,문서정리하는 자세에도 조금 변화가 있다. 


문제는 일상에서 작은 나태함이 과거의 나로 빠르게 회귀시킨다. 언제 그랬냐는 듯 주저리주저리 두서없이 낙서를 한다. 내가 매일 무엇인가 쓸 때에 긴장하고, 성의를 다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된다. 나의 정리되지 않은 날것이기 때문이다. 길을 다니며 벗고 다니는 줄 모르는 이솝우화 임금님처럼...


책을 읽고 돌아보니, 이름보다는 그 사람의 단면을 하나 더 알게됬다. 한국어에 대한 작가의 세심한 애정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무엇인가에 이렇게 애정을 갖고 볼 수 있을까? 글쓰기 책을 보았는데, 내가 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애착을 가늠해보게 된다. 그리고 좀더 차분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이건..나랑 잘 안어울린다. 그것이 문제다.

k***i 2014.08.12. 신고 공감 8 댓글 12
리뷰 총점 종이책
글쓰기에 왕도란 없다. 《고종석의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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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매력적이다. 분명 그런 것 같다. 블로그에 글을 올리면서 초미의 관심사는 글 잘 쓰는 비결이다. 한 번도 글을 써 본적이 없다가 그야말로 어리바리한 상태에서 글을 쓰려고 하니 처음에는 얼떨결에 막 썼었다. 뭐 지금 생각해도 비문과 오타 천지라 부끄럽기 그지없지만 글을 쓰는 동안은 정말 행복했던 것 같다. 여전히 컴퓨터 자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매양 똑같은 비문과
"글쓰기에 왕도란 없다. 《고종석의 문장》" 내용보기

글쓰기는 매력적이다. 분명 그런 것 같다. 블로그에 글을 올리면서 초미의 관심사는 글 잘 쓰는 비결이다. 한 번도 글을 써 본적이 없다가 그야말로 어리바리한 상태에서 글을 쓰려고 하니 처음에는 얼떨결에 막 썼었다. 뭐 지금 생각해도 비문과 오타 천지라 부끄럽기 그지없지만 글을 쓰는 동안은 정말 행복했던 것 같다. 여전히 컴퓨터 자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매양 똑같은 비문과 오타를 날리고 있지만, 글쓰기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싶진 않다. 어쨌든 내 글은 오글거린다. 맞지 않는 문법과 어휘가 천지삐가리인 글들이 다수이지만 그래도 글쓰기는 매력적이다. 그래서인지 글 잘 쓰고 싶다는 소망이 하늘을 찌르고 분기탱천하여 글쓰기 책들을 열독하곤 하지만 이해가 더디고 까막눈이라 그런지 늘 답보상태에 머물러만 있다.그런 나에게 당대 문장가로 칭송받는 고종석의 문장은 희소식이나 다름없었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글밥만 삼십년 자신 선생께서야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나는 이미 풍월을 읊고도 남을 정도의 시간을 투자했는데 풍월은커녕 글쓰기 앞에서 가끔씩 멍해지는 나를 발견하고 있으니 대체 풍월은 언제 읊을 수 있을까.

 

이 책은 숭실대학교에서 진행 된 글쓰기 강의를 녹취 정리한 것으로 글쓰기에 대한 이론과 실전편이 실려 있다. 그렇다면 글은 왜 쓰는가? 갑자기 글을 왜 쓰냐고 묻는다면 머릿속에 몇 가지 이유가 떠올려질 것이다. 첫 번째 강의의 질문이자 주제는 바로 글을 쓰는 주체가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느냐 이다. 조지 오웰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네 가지 동기로 글을 쓴다고 정리하였다.

 

 

첫 번째 동기는 순전한 이기심이다, 순전한 이기심이라는 건 말그대로 돋보이고 싶은 욕망에 의한 것이다, 두 번째 동기는 미학적 열정이다.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싶은 마음으로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은 미학적 열정이다. 세 번째 동기는 역사적 충동에 의해서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를 위해 보존해 두려는 욕망에 의한 글쓰기다. 네 번째 동기는 정치적 목적을 지닌 글쓰기이다, 글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해 타인의 생각을 바꿈으로써 세상을 더 살 만한 곳으로 바꾸고 싶다는 욕망으로 쓰는 글을 말한다. 조지 오웰은 정치적 목적으로 글을 쓴 작가이다. 조지 오웰에 이어 사르트르와 롤랑 바르트를 통해 글쓰기의 목적이 왜 중요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글을 쓰는 목적이 글을 쓰는 주체를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저자는 글을 잘 쓰려면 좋은 글을 많이 읽어야 하며,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이 부분은 글쓰기 책에서 강조하는 공통적인 이야기이다.)

다음은 글쓰기를 하면서 참고하기 위해 적어두었다.

 

글쓰기 이론에서는 접속부사를 빼면 문장에 힘이 생긴다. (그리고, 그러나, 그래서)

-일본식 접미사 은 뺄 수 있다면 빼는 것이 좋다.

-부사가 -적인을 수식할 때 을 빼면 된다.

-부사는 관형사를 수식할 수 없다.

-일본식 조사 -의 는 되도록 빼는 것이 자연스럽다.

-구어와 문어는 정확히 다르다.

-~에 있어서 ~에 있어서와 같은 일본어투 표현은 피하는 것이 좋다.

-복수 표현 ~들을 남용하지 마라.

-주어가 복수일 때 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

 

책을 다 읽고 이 리뷰를 쓰면서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내가 매일 하는 실수와 같이 ~것을 남발하지는 않는지, 중복된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접속부사를 또 연거푸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하는 별의별 생각을 하면서 쓰자니 머리에 쥐가 날 것 같다. 거기에 내가 얼마나 글쓰기를 우습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새삼 깨닫고 있었다. 자신의 글인 자유의 무늬의 문장들의 오류를 짚어 주는 고종석의 글을 읽으면서도 글쓰기가 상당히 심원한 언어의 표현이라는 점을 되새겨 보기도 하였다. 일반적인 글쓰기 책과 달리 언어학적 이해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 된 글쓰기 강의이다. 한편으로는 글쓰기에 대하여 원론적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도 남지만, 글쓰기가 원래 왕도란 없는 것이 아닌가. 30년 배테랑 역시도 노력이 반이라하니...




YES마니아 : 플래티넘 k********2 2014.06.24. 신고 공감 8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나는 왜 쓰는가? 이 새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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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궐선거 결과를 보고 하도 열받아 '이 개 같은 나라에서'라고 제목을 썼다가 지웠다. 고종석이 그의 책 '문장'에서 자고로 글은 기품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퍼뜩 생각났던 것이다. 읽지말 것을 그랬나? 이처럼 은근히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 그래, 읽었다. 원래 글쓰기마저 이런저런 코치를 받아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심이 없었는데 리뷰를 보니 하도 좋다는 말이 많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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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궐선거 결과를 보고 하도 열받아 '이 개 같은 나라에서'라고 제목을 썼다가 지웠다. 고종석이 그의 책 '문장'에서 자고로 글은 기품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퍼뜩 생각났던 것이다. 읽지말 것을 그랬나? 이처럼 은근히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 그래, 읽었다. 원래 글쓰기마저 이런저런 코치를 받아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심이 없었는데 리뷰를 보니 하도 좋다는 말이 많길래 글 솜씨도 없고 귀도 한없이 얇은 나는 덥썩 집어들 수밖에 없었다. 고종석은 '왜 글을 쓰는가?'부터 시작한다. 아, 그 전에 고종석은 이름 뒤에 '씨'를 붙이는 게 좋다고 했는데 난 그냥 생략하련다. 마음이 무간지옥에 빠진 것처럼 착잡하니 그 한 자 쓰는 것도 귀찮아진다. 이러면 또 글의 기품이 없어지는데 아, 모르겠다! 내가 지금 와인 마시는 것도 아니고 소주병 까고 있는데 기품이 어디서 나온단 말인가? 쓰다가 자판 위로 그대로 쓰러져 잠들 지도 모른다. 그러면 알 수 없는 자음과 모음의 수열들이 길게 펼쳐질 것이다. 흐음, 글의 앞은 기품이 흐르는데 뒤는 의미 불명의 긴 뱀꼬리라. 이거, 딱 '용두사미'가 아닌가? 그럴 바에야 한결같은 수준을 유지하는 게 차라리 더 기품을 지니는 길일 것이다. 하여, 자기 검열 따위 던져버리고 내키는 대로 쓰겠다. 당신은 지금 취중 작문의 현장을 보고 있다.


 그런데 지금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더라? 아, 맞다. '왜 글을 쓰는가?'였지. 사실은 써 놓은 글을 다시 읽어봤다. 고종석은 조지 오웰이 말한 네 가지의 글쓰는 동기를 가지고 그것을 설명한다. 내 경우로 말하자면 순전한 이기심에서 정치 목적인 동기로 옮겨가는 중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온라인에 지속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물만두님 추모 1회 리뷰대회 때였으니까 벌써 몇 년 된 것 같다. 정확히 얼마 되었는 지는 모르겠다. 술기운 덕분인지 기억이 안난다. 처음엔 그저 내가 좋아서 글을 썼었다. 방문자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내가 좋은 쪽으로만 썼다. 누군가에게 읽힌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았다. 그러다 차츰 방문자 수가 많아지면서 그래봐야 병아리 눈꼽만큼이지만 누군가 읽고 있구나 자각했던 것 같고 내 생각을 전달시키기 위한 쪽으로 글을 썼던 것 같다. 좋아서 쓸 때는 잘 쓰고 싶은 마음도 없었는데 누군가에게 읽히는 글을 쓰자 잘 쓰고 싶은 마음이 솟아나는 걸 어찌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오래 고여 있었던 그 마음이 결정적으로 이 책을 손에 잡게 한 것 같다. 내가 비록 문외한이긴 해도 예전부터 고종석이 글을 그것도 참 잘 쓴다는 것을 풍문으로 들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책은 이론과 실기의 이중나선처럼 되어 있다. 하나를 설명한 뒤 하나의 실전으로 들어간다. 나는 실전이 재밌었다. 여기서 예전 같으면 분명 나는 뒤에 '개인적으로' 썼을 것이다. 그런데 책의 실전 부분을 보니 '개인적으로'라는 말은 쓰지 말라고 하더라. '나는'을 이미 썼는데 왜 '개인적으로'를 또 쓰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나'가 개인적으로 말하지 집단적으로 말하던가?'라고. 읽는 순간 화끈했다. 자주 그런 표현을 썼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맞는 말 같아서 앞으로는 그러지 않기로 작정했다. 이처럼 시시콜콜하게 지적해 주어 난 실전을 흥미롭게 읽었다. 의외로 고쳐야 할 습관이 많아서 지금까지 내 글을 읽은 얼굴 모르는 모두에게 아주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좋은 글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의성어도 많이 배우고 색깔을 표현하는 말들도 많이 배우겠습니다. 되도록 중언부언 하지 않고 접속사는 꼭 필요한 경우 아니면 생략해서 문장과 문장 사이가 긴장을 낳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어에서 유래된 '의','적' 표현도 가급적 삼가고 말이죠.


 이런. 하나하나 열거하다 보니 책을 글 쓸때마다 사전처럼 옆에 놓아두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만큼 실전의 시시콜콜은 유용하다는 의미다. 소주가 바닥났다. 새벽에 이게 뭐하는 짓이야? 자조가 든다. 랭보처럼 지옥에서 한 철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 글쓰기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람 하는 생각도 든다. 위안도 희망도 안 된다. 그렇지 않은가? 오웰의 네 가지 동기는 하나만 빼고 다 헛소리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한 개인의 순수한 글쓰기에 있어서만큼은. 그 하나는 순전한 이기심이다.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온 것인가? 그래도 어쨌든 글은 남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쓰는 것 같다. 지금만큼은 이 지옥을 버티려고, 끝까지 버티려고 쓰는 것 같다. 다른 무언가로 뛰어들어서 이 짊어진 현실의 중력을 피하기 위해서 쓰는 것 같다. 정말로. 발 앞에 쓰러진 소주병처럼. 깨지지 않고 계속 뒹굴거리기 위해. 맞는 비유인건가? 여하튼 지금 내 생각은 그렇다. 사이먼과 가펑클은 험한 세상의 다리가 노래이길 바라고 나는 글이기를 바란다. 힘들면 힘들수록 많이 쓰길 바란다. 스티븐 킹이 말하길 글은 엉덩이로 쓴다고 했다. 이 참에 그 쪽 근육도 키워놓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리뷰란 결국 한 문장을 위한 쓸데없는 군더더기의 집합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이 좋다, 안 좋다를 말하는 그 한 문장. 이제와 깨닫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수고를 줄여주고 싶다.


 딱 한 문장으로 말하겠다. 이 책은 좋다. 이것만 읽기를...


다행히 자판 위로 안 쓰러졌다. 신의 가호일까? 이 나라에도 좀 주세요, 제발...


l****1 2014.07.31. 신고 공감 4 댓글 6
리뷰 총점 종이책
글쓰기 외전(外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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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한 잔 하시고 써 보세요.” 라고 글이 잘 안 써진다는 블로그 이웃께 농 섞인 댓글을 달았다. 어디서 봤는지 기억조차 없는 잡지의 귀퉁이에서 본 것이다. “나는 글이 잘 안써질때 술을 마셔요. 술기운으로 글을 쓰는 거죠.” 나는 술을 마시고 글을 쓴 적은 없다. 한 번 시도해 볼까 생각한 적은 있었는데, 워낙 술에 지고 들어가는 주량이라 몸속에 알코올이 일정 정도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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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한 잔 하시고 써 보세요.”

라고 글이 잘 안 써진다는 블로그 이웃께 농 섞인 댓글을 달았다. 어디서 봤는지 기억조차 없는 잡지의 귀퉁이에서 본 것이다. “나는 글이 잘 안써질때 술을 마셔요. 술기운으로 글을 쓰는 거죠.” 나는 술을 마시고 글을 쓴 적은 없다. 한 번 시도해 볼까 생각한 적은 있었는데, 워낙 술에 지고 들어가는 주량이라 몸속에 알코올이 일정 정도 이상 들어갈라 치면 일단 머리부터 지끈거려 오는 통에 글쓰기는 무슨! 턱도 없다. 그런데도 술을 한 잔 하시고 써 보라고 얘기한 건, 글이 잘 안 써진다는 것의 괴로움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고 있어서이다. 내가 무슨 작가도 아니고 연재를 하는 칼럼니스트도 아니고 글을 써야 얼마나 쓰겠냐마는 나름 인터넷 서점 블로그로 당당히 활동 중이고 파리 날리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지만 나름 색깔 있는 글을 쓴다고 자뻑한 채 살고 있다.

 

이 책 「고종석의 문장」을 읽기 전까지 고종석씨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예전에 그의 책 「서얼단상」을 읽었는데, 대구에 살고 있던 대학생의 눈에 그 책은 충격이었다. 전라도 사람이 살아 온 삶의 궤적이 새드무비 같았다. 일정 기간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왕조시대부터 현재까지 그런 폭력적인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에 놀랐다. 이후 그의 이름을 잊고 있다가 트위터 팔로우를 하면서 다시 알게 되었다. 그의 책을 읽은 지 십 수 년이 지난 채 트윗만으로 그를 판단하게 되었는데, 솔직하게 말하자면 별로 재미없는데 재미있는 척 하는 아저씨 같았다. 트윗상의 용어로 ‘썩개(썩은 개그)’라는 말이 있는데, ‘썩개’를 자주 날리시는데 나는 전혀 재미가 없고 공감도 되지 않았다. ‘이 아저씨 뭐야~ 재미도 없고.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리고’ 그런데 계속 그를 팔로우 한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절필선언> 때문이었다. 그가 어떤 인터뷰에서 “트위터는 글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말이라고 생각한다.”라고 했는데, 유명한 작가이던 사람이 느닷없이 절필선언을 한 것에 과도한 정치적 명분을 입히고 싶었던 나는 이후 그의 트위터를 주목했다. 그런데 맨날 ‘썩개’나 날리는 통에 ‘싱거운 사람’으로 치부하고는 했다. 그의 인터뷰대로 트위터는 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그의 글을 읽어야 했다. 이 책을 읽으며 그의 글과 생각을 만나게 되었고, 그의 글과 생각은 ‘별 실 없는 사람’이라는 내 머릿속 편견이 사라지게 만들었다.

 

 

“마르크스하고 엥겔스가 쓴 <공산당 선언>의 서문 첫 문장은 다 아시지요?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이렇게 인상적인 말이 없습니다.” (p.47)

 

이 책은 글쓰기 강좌를 엮었다. 글이라고는 하나 말에 가까운 글이다. 실제 그의 강연 내용은 그대로 녹취한 것인지 편집 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오히려 나는 구어체의 문장이 좋았다. 실제로 자리에 앉아 강연을 듣는 것처럼 가까웠다.

글쓰기 강좌인 만큼 새겨들어야 할 부분이 많았다. 이 책을 읽기 전부터 혼자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글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이었다. 내 글이야 대부분 블로그에 올리는 것인데, 이 블로그질도 3년 정도 하다 보니 무림의 고수가 너무 많은 것이다.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 써도 읽는 사람이 별로 없으면 여간 힘 빠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제목을 특이하게 쓰자.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인상에 남도록 쓰자. 라고 생각했다. 나도 다른 블로그 이웃들의 글을 읽을 때 솔직히 띄엄띄엄 읽을 때가 많다. 글의 처음과 마지막 부분을 훑을 때도 많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럴 개연성이 많으니, 인상적으로 쓰고 기억에 남도록 쓰자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생각이 글로 이어지면 말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쉬운 일은 없는 터. 노력하고 있으나 잘 되지 않는 부분인데, 책에서 유명한 작가가 이 부분을 언급하니 괜스레 우쭐해진다. ‘뭐, 나는 이미 그 부분을 알고 있었습니다만~!’ 입 꼬리도 살포시 올라간다.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프롤레타리아가 이 혁명으로 잃을 것은 쇠사슬뿐이고 얻을 것은 전 세계다!”

“숨이 확 막히지 않습니까?” (p.48)

 

맞다. 숨이 막힌다. 감동받아서? 저자의 의견에 동의해서? 아니다. ‘왜 나는 저렇게 쓸 수 없나?’이다. 왜 나는 저렇게 쓸 수 없을까? 마르크스와 엥겔스 형님들이야 역사를 그야말로 몸으로 아로새긴 대단한 분들이지만, 공산당 선언을 쓴 나이가 서른·스물여덟이다. 나는 저 형님들 나이를 훌쩍 하고도 더 많이 넘긴지 오래인데 왜 나는 저렇게 쓸 수 없을까? 코웃음들 치지 마시라. 원래 배포와 배짱은 커야 어디 가서 뻥이라도 칠 수 있는 법. 나는 감히 마르크스와 엥겔스 형님들과 나를 비교하고 있다. 최소한 죽기 전에라도 한 번 써보고 싶다.

고종석씨는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강조한다. 「이방인」의 첫 문장도 언급한다. 「설국」의 첫 문장도 대단하다. 나도 그런 문장을 쓸 수 있다. 책에서 저자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글쓰기 연습’이다. 글쓰기는 타고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타고난 것이라면 사람들 불러 모아 글쓰기 강좌를 하는 것은 거짓말이고, 이런 책을 낸다면 더더욱 큰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이다. 거짓말이 아니라면 나도 마르크스, 엥겔스, 카뮈, 야스나리 형님들처럼 절대로 잊히지 않을 첫 문장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노무현씨가 후보로 뽑히기를 바란다.” <자유의 무늬>, 35쪽

“앞서 이야기했듯, ‘개인적으로’는 삭제하세요. 필요 없는 말입니다. ‘뽑히기를’에서 ‘를’이 필요할까요? 격조사라 할지라도, 그게 없이도 말이 통하면 삭제하세요. ‘후보로 뽑히기 바란다.’ 좋은 문장은 간결한 문장입니다. 물론 간결함 때문에 명확성이나 섬세함을 잃어서는 안 되겠지만, 좋은 문장의 특징 하나는 간결함입니다.” (p.145)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든 것은 고종석씨가 자신의 글과 문장을 가지고 강연을 했다는 것이다. 자기 글과 문장을 노골적으로 폄하하기도, 칭찬하기도 하는 능수능란함에 박수를 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책을 다 읽고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쓰기 위해 이전에 내가 써 놓았던 리뷰 하나를 출력했다. 이 책에서 언급한 고종석씨의 조언에 기초해 내 글에 빨간 펜을 그으며 퇴고를 해보려는 심산이었다. 그런데 하다 보니 A4용지 곳곳에 빨간 펜이 가득해 흡사 부적 같아 보였다. 너무 부끄러워 차마 내놓을 수 없어 포기했다.

책을 읽으며 ‘내가 바로 저렇게 쓰고 있다.’라는 번쩍거리는 깨달음이 줄곧 이어졌다.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의 강렬함보다 개인적으로 더 강조하는 바는 문장의 간결함이다. 김훈과 한창훈, 마루아먀 겐지와 유시민씨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거추장스럽고 난잡하게 늘어놓는 단어와 단락을 극도로 싫어하면서도 내가 쓸 때는 잘 안 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간결함. 간단함. ‘명확성이나 섬세함을 잃지 않으면서 호흡이 짧은’ 그런 문장을 쓰고 싶다.

쓰는 사람도 경쾌하고 명확하게 의미를 전달할 수 있고 보는 사람도 숨차지 않고 인상 깊게 남을 수 있는 간결하고 단순한 문장을 써야 한다. 내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다.

인정받는 글쟁이라고 하는 고종석씨도 자신의 이미 책으로 출간한 문장을 가지고 가차 없이 비판하는 것을 보니 뭐, 나는 아직 희망이 있다. 잘 쓸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이 배짱이 희망고문이 되지 않아야 할 텐데.

 

 

“글에서 접속부사는 없으면 없을수록 좋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접속부사가 반드시 필요하지 않을 경우엔 빼는 것이 훨씬 좋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글이 간결해 보이고, 문장과 문장 사이에 어떤 긴장감이 생깁니다.” (p.117)

 

접속부사. 하… 저자가 이미 내 글을 샅샅이 살펴본 것만 같았다. 사우나에서 발가벗고 마주한 느낌이다. 책에서 이 부분을 읽고 내 글을 톺아보니 접속부사 천지였다. 그래서, 그리고, 그렇지만, 그러나 등등. 저자는 긍정접속부사는 되도록 배제하고 부정접속부사는 되도록 최소화하라고 강조하는 데, 나는 긍정이든 부정이든 가리지 않고 마치 접속부사가 글의 생기를 불어 넣는 것으로 착각하고 도배질을 하고 있었다. 내 글이 총총히 들어 찬 A4 몇 장을 무람없이 찢어발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도배질된 접속부사 때문이다. 크헉! 단락의 초입부터 등장하는 접속부사를 마다 빨간색을 칠하다 보니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었던 것이다.

지금 이 서평을 쓰면서도 극도로 조심하고 있다. 오히려 너무 경계하다 보니 자연스레 들어가도 좋을 접속부사를 쓰지 않는 것은 아닌 가 걱정이 되기도 한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일부 언론이 사용하고 있는 ‘30년 동안의 삼김시대’라는 말이 사실과 부합하느냐 하는 것이다.”

“내 관심은 일부 언론이 사용하는 ‘30년 동안의 삼김시대’라는 말이 사실과 부합하느냐 하는 데 있다.” (p.192)

 

자신의 책 <자유의 무늬>를 재차 퇴고하면서, 정리된 문장은 깔끔 그 자체다. 아니 왜 처음부터 그렇게 쓰지 않았소. 라고 묻는다면 너무 잔인한 일이 될 것이고, 이렇게 대중 강연에서 자기 글을 드러내놓고 칼질하는 자체가 대단한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앞의 문장이 특별히 잘못되었거나 의미전달에서 뒤 문장과 큰 차이가 없지만 글이 주는 느낌은 확실히 다르다. 또 고백을 하건대, 나는 한 번 쓴 글은 다시 퇴고를 잘 하지 않는다. 무슨 리뷰대회 같은 것을 위해 쓸 때도 그렇다. 귀찮기도 하지만 다시 내 글을 자세히 살핀다는 것이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퇴고만큼은 꼭 해야겠다 싶다. 문서프로그램에서 맞춤법 점검하는 것조차 귀찮아 하지만 내 글을 보는 사람이 몇이라도 된다면 그들을 위해서 퇴고를 해야 할 것 같다. 뭐, 퇴고 하지 않아도 수상쯤은 가끔 하기도 하지만 뭐, 크흐흠……

 

 

“빨갛다, 뻘겋다. 새빨갛다. 시뻘겋다. 빨그스레하다. 뻘그스레하다. 발갛다. 벌겋다. 발그레하다. 벌그레하다. 붉다. 불그스레하다. 발그스름하다. 벌그스름하다. 빨그스름하다. 뻘그스름하다. 불그무레하다. 불그죽죽하다.” (p.110)

“‘꿈틀꿈틀’이나 ‘너울너울’을 외국어로 어떻게 옮길 수 있겠습니까?...사전을 통해서 능동적으로 단어들을 익히기도 해야 합니다. 한국어의 의태어/의성어들, 색채어휘에 관심을 쏟으십시오.” (p.111)

 

한국어에 풍부한 색채어휘와 의태어/의성어는 굳이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주지의 사실이다. 일상생활에서 유용하게 활용하는 만큼 글에서는 활용하지 않는 이유는 오해 때문인 것 같다. 색채어희와 의태어/의성어가 많으면 글의 수준이 낮아 보인다거나, 난잡해 보인다는 오해. 나만 그런가? 소설을 위한 글쓰기가 아닌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블로그에 서평을쓸때도 그렇다. 하지만 글쓰기 연습 차원에서라도 한국어를 익혀야 할 필요를 느낀다. 사전을 본 지가 어언 20년 가까이 된다. 유의어/반의어 사전 같은 것은 사야할 필요를 못 느꼈다. 뭐, 혹시 아나? 내가 10년 쯤 후에 소설을 쓰겠다고 박박거리고 있을지… 그때를 위해 색채어휘와 의태어/의성어 공부는 좀 해두는 편이 좋겠다.

또 하나 내가 개인적으로 강조하는 글쓰기는 ‘재미’다. 소설이든, 서평이든, 칼럼이든 뭐라도 재미가 있어야 한다. 껄껄 넘어가게 만드는 것에서부터 히히 입 꼬리가 올라가게 만드는 것까지 재미가 있어야 한다. 재미가 있어야 본다. 나도 재미없는 글을 보는 것은 곤욕이다. 일반화시킬 수는 없지만 내 생각은 ‘재미’다. 곧 서평을 쓰게 될 김현진의 「뜨거운 안녕」이 딱 그랬다. 결코 웃을 수 없는 상황을 기억해 내면서 독자를 웃음 짓게 만드는 힘. 그것이 좋은 글과 문장의 매력이라 생각한다. 나도 그런 글을 쓰고 싶다. 대학 때 끄적인 글들을 가끔 들여다보면 내가 쓴 것을 읽으면서 혼자 좋아서 낄낄거리는데…… 세상풍파에 찌들다 보니 날만 서 있다. 거칠기만 하다.

 

그래도 뭐, 앞으로 더 잘 쓰겠지.

고종석씨보다 더 잘 쓸게 될 줄 누가 알어.

 

l****h 2014.07.05. 신고 공감 4 댓글 4
리뷰 총점 종이책
나는 오늘도 한국어로 글을 쓴다: 아름답고 정확한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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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은 가장 시인답지 못하게 살아온, 그래서 시 앞에서는 항상 주눅들고 부끄러워지는 사람이 쓴 시들을 모은 것이다. 그러나 30년 이상의 오랜 세월을, 시인에게는 피와 살과 같은 모국어권을 떠나, 또 의사라는 조금은 엉뚱한 직업인으로 살면서, 자식들조차 읽지 못하는 시를 몸에 동여매고 살아온 것을 생각하면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보이게 안 보이게 상처받
"나는 오늘도 한국어로 글을 쓴다: 아름답고 정확한 글쓰기" 내용보기

이 시집은 가장 시인답지 못하게 살아온, 그래서 시 앞에서는 항상 주눅들고 부끄러워지는 사람이 쓴 시들을 모은 것이다. 그러나 30년 이상의 오랜 세월을, 시인에게는 피와 살과 같은 모국어권을 떠나, 또 의사라는 조금은 엉뚱한 직업인으로 살면서, 자식들조차 읽지 못하는 시를 몸에 동여매고 살아온 것을 생각하면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보이게 안 보이게 상처받거나 주위가 낯설 때 시를 써보겠다고 조용한 구석을 찾았다. 그때마다 안간힘 쓰며 씌어진 시는 내게 따뜻한 위로와 힘을 주었다. 그래서 누가 내 시를 읽으면서 작은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 나는 더없이 행복할 것이다. 세상에 비슷한 누군가가 있어 서로를 위로할 수 있다면 그보다 값진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환갑을 맞아 엮어낸『마종기 시전집』의 책머리에 선생이 쓴 글이다.

 

간혹 그런 질문을 받는다.

외국에 살면서 한국어로 된 책을 왜 그리 많이 읽느냐? 너한테 한국어로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느냐?

 

이 질문의 이면에는 그들이 차마 하지 못한 본질적 물음이 숨겨져 있다.

 

너는 이미 모국어권을 떠났다.

너는 외국에 산다.

너는 영어로 말하고 영어를 쓰면서 산다.

이곳에서 성공하고 더 높이 올라가려면 오히려 네 나라 말과 글을 버리고  영어에 집중하는 게 낫지 않겠니? 합리성이나 실효성의 측면에서 너는 시간 낭비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니? 네 나라 말과 글을 굳이 고집하는 건 네 앞 길에 장애물을 쌓아올리는 게 아니니?

 

그들의 염려와 걱정에도 일리가 있다.

그렇다면 나는 그 모든 걸 알면서도 왜 한국어로 된 책을 읽고, 한국어로 글을 쓰는 것일까? 그것도 매우 성실하게 말이다.

 

내가 외국에 살기 때문에 더 그렇겠지만, 이제 한국인이라고 해서 굳이 한국어로 글을 써야 할 이유는 없다. 한국인이라는 것과 한국어 말을 하고 한국어로 글을 쓴다는 것 사이에는 필연적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이라도 영어나 중국어, 스페인어로 글을 쓸 수 있다. 아마 직업상의 이유나 이런 저런 까닭에 하루의 대부분을 그 말을 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한국어는 인류가 사용하는 수많은 다양한 언어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태어나고 인생의 상당 부분을 한국에서 보낸 나에게 있어서 한국어는 유일한 모국어이다.

모국어라는 것은 말 그대로 'mother tongue',  엄마의 혀이자 입말이다.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들었던 말이며, 내가 처음으로 입을 떼 발음한 말이기도 하고, 처음으로 받은 연애편지의 설렘과 기쁨을 느끼게 해준 언어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 수백 가지 언어가 있고, 인간과 언어의 관계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자의적인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모국어'라고 부를 수 있는 언어는 단 하나 밖에 없고, 적어도 나에게 있어 그 언어는 바로 한국어이다.

 

다시 위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저와 유사한 질문들을 받았을 때 내가 답변 대신 들려주는 게 바로 마종기 시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 나라 시인 중에 마종기라는 분이 있는데, 그분은 미국에서 의사를 하고 계셔. 그런데도 한국어로 꾸준히 시를 쓰시고, 그걸 꾸준히 발표를 하셔. 심지어 의사들이 하루 종일 사용하는 직업적 언어는 시의 언어와는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잖아. 그런데 왜 그분은 구태여 한국어로 시를 쓰실까? 일관성이 결여된 걸로 보일 수도 있고, 일의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 봐도 그건 매우 불필요하고 쓸모 없는 일처럼 보이기도 하잖아. 그런데 나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아. 내가 한국어를 버리지 못하는 것은 아마 그분이 한국어로 시를 쓰는 이유와 동일하겠지. 예를 들어 내가 학교에 다니며 영어로 레포트를 쓰든, 직장에 다니며 서류나 보고서를 영어로 작성하든 그것은 의무적인 글쓰기일 뿐이야. 그 글쓰기들은 나에게 어떠한 자유도 허용하지 않아. 어찌 보면 본연의 ‘나’와는 무관한 것들이야. 하지만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모국어로 된 글을 읽거나 쓸 때는 이야기가 달라지지. 그것은 본연의 ‘나’와 부합하니깐.

 

외국에 살다 보면 한국어 어휘력이 급격히 줄어든다. 평상시에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다 보니, 말을 할 때든 글을 쓸 때든 영어 번역투의 어색한 문장들이 나오기도 한다. 지금 내가 쓰는 한국어는 외국어특히 영어에 감염되었다. 가끔씩은 한국어 단어들이 떠오르지 않아 조사를 뺀 대부분의 명사와 동사들이 영어가 되기도 한다하루 하루 외국에 사는 시간이 늘어날 때마다 조금씩 모국어를 잃는다는 건, 마치 치매 걸린 노인이 순간 순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지할 때처럼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런데도 끝끝내 한국어로 된 글을 읽고, 한국어로 글을 쓰는 일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바로 나의 모국어이기 때문이다.

 

감염을 달리 해석하면 섞임과 스밈이다. 또한 한국어의 세 가지 층위가 고유어, 한자어, 외래어라고 할 때 외국 생활을 통해 고유어나 한자어에 대한 어휘는 줄었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모국어로 사유하고 모국어에 대한 기억과 모국어로 하는 기억이 존재한다면 한국어로 글쓰기는 가능하다. 정확성아름다움을 모두 가진 문장을 쓸 수 있다

 

이 책에 기록되었듯이 세상에는 자기 표현의 욕구에 의한 순전히 이기적인 글쓰기도 있고, 미학적 열정에 의해 글을 쓸 수도 있고, 역사적 충동에 의한 정치적 목적의 글쓰기도 가능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여기에 ‘회복(치유나 위로의 글쓰기로 치환될 수도 있다)의 글쓰기’와  ‘본원적 글쓰기’를 덧붙이고 싶다.

물론 이 둘은 앞서 언급한 세 가지 글쓰기와 중복되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들로 수렴되지 않는 고유함을 가지고 있다.

 

가령 1960년대 파독 광부가 고단한 하루를 마감하며 샤워를 하며 느꼈을 감정, 그것을 문장으로 쓴다면 그게 바로 ‘회복의 글쓰기’나 ‘본원적 글쓰기’가 되지 않았을까? 혹은 프리다 칼로가 그림으로 표현한 감정들은 단순한 자기 표현의 욕구나 미학적 열정을 뛰어넘는다고 할 수 있을텐데, 이러한 감정을 문장으로 쓴다면 그 글쓰기와 가장 유사한 것이 바로  ‘보이게 안 보이게 상처받거나 주위가 낯설 때’ ‘조용한 구석을 찾아 할 수 있는 것’, 즉 모국어로 글을 쓴다는 것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고종석의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은 다음과 같은 표제어들로 구성되었다.

 

1) 입술, 2) 감추다, 3) 메아리, 4) 미끈하다, 5) 혀놀림, 6) 가냘프다, 7) 발가락, 8) 손톱, 9) 잇바디, 10) 꽃값, 11) 모름지기, 12) 바람벽, 13) 그네, 14) 무지개, 15) 미리내, 16) 누이, 17) 엇갈리다, 18) 궂기다, 19) 어둑새벽, 20) 켤레, 21) 간지럼, 22) 밴대질, 23) 눈물, 24) 딸내미, 25) 속삭임, 26) 스스럼, 27) , 28) 한숨, 29) 보름, 30) 그믐, 31) 거품, 32) , 33) 그대, 34) 구슬, 35) 어루만지다, 36) 서랍, 37) 버금, 38) 비탈, 39) 엿보다, 40) 주름

 

모국어 입술로 환기되는 어떤 추억이 존재한다면, 이 언어의 아름다움을 평생 기억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눈물이나 주름’, ‘이나 보름이라는 토박이말을 기억한다면, 모국어로 글을 쓰는 행위를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우리가 [수선화]라고 발음하는 것과 [dӕfədɪl]이라고 발음하는 대상은 분명 같은 식물이지만, [수선화]라고 발음할 때 환기되는 기억이나 추억은 모국어이기에 가능한 것들이다. 말하자면 모국어는 원초적인 감정의 우물인 셈이다.[i]

 

영어나 스페인어 문장을 읽거나 쓰면서도 글의 아름다움이나 문장의 결과 무늬를 느낄 수 있다. 명확하고 간결한 문장을 읽으며 감탄하고 섬세한 문장을 읽으며 눈물지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에게 모국어에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과 기쁨은 오로지 한국어만이 줄 수 있다.

 

고종석은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라는 글에서 좋아하는 한국어 단어 열 개를 꼽았다.

가시내’ ‘서리서리’ ‘그리움’ ‘저절로’ ‘설레다’ ‘짠하다’ ‘아내’ ‘가을’ ‘’ ‘그윽하다’.

 

이런 단어들은 언어 자체가 주는 아름다움도 내재하지만, 이 아름다운 한국어들은 오로지 한국인이기에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물론 우리가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은 지극히 우연의 소산이지만, 우리가 한국인으로 태어났기에, ‘모국어로서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명료한 글, 영혼을 선동하는 아름다운 글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언어로도 가능하다. 그러나 적어도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에게 있어 한국어로 아름답고 정확한 글을 쓴다는 것은 글쓰기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고종석의 문장』이 ‘한국어 글쓰기 강좌’ 시리즈의 일환으로 출간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한국어를 사유하는 방식과 한국어로 사용하는 방식은 조금씩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한국어에 대한 애정은 동일하다는 점이다.

고종석은 이미『감염된 언어』에서 순수한 국어를 주장하는 것은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일어난 것처럼)  전체주의나 집단주의에 닿아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른바 토박이말과 한자어와 유럽계 어휘가 마구 섞인 혼탁한 한국어 속에서 자유를 숨쉬고, 또 한문투로 휘어지고 일본 문투로 굽어지고 서양 문투로 닳은 한국어 문장 속에서 풍요와 세련을 느낄뿐 아니라 자기와는 영 다르게 생겨먹은 타인에게 너그러울 수도 있게 된다고 말한다. 언어순결주의라는 것은 외국어의 그림자와 메아리에 대한 두려움인데, 이것이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박해나 혼혈인 혐오, 북벌, 장애인 멸시까지 파생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순화의 충동이란 흔히 죽임의 충동임을 지적한다.

 

한국이라는 영토 안에 거주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동일한 방식으로 한국어를 사용하고, 한국어로 사유할 수는 없다. 내가 사용하는 한국어는 이미 감염된 언어이다. 하지만 고종석이 이미 지적한 것처럼 감염섞임과 스밈의 다른 말이다. 이것은 달리 해석하면 한국어의 확장이 될 수도 있다. 한국에 있는 사람들과 동일한 애정으로, 아니 그보다 더한 노력과 관심으로 나는 한국어로 된 글을 읽고 쓴다. 그것은 하루를 마감하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일종의 제의이기도 하고, 정체성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의 일환이기도 하며, 동시에 모국과 단절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소통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나는 오늘도 한국어로 글을 쓴다.

 



[i]  고종석은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에서 “사랑은 가장 원초적인 감정이고, 고유어는 그 원초적 감정들의 우물”이라고 말했는데,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모국어야 말로 사랑이자 사랑의 우물이다.

YES마니아 : 로얄 c*****g 2014.07.07. 신고 공감 3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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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정확한 글쓰기란 무엇일까? (고종석의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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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뭐, 나도 “아름답고 정확한 글”을 쓰고 싶으니까.저자는 마치 바로 내 앞에서 칠판을 놓고 강의하듯이 글을 전개한다. 친숙한 작가들과 그 글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차곡차곡 펼쳐 보인다. 호~ 이 책 뭔가 있지 싶다!고종석은 서울과 파리에서 법학과 언어학을 전공했다. 신문기자 생활도 했고, 그간 비평집, 서간집과 소설집 등을 다수 냈다. 글쓰기
"아름답고 정확한 글쓰기란 무엇일까? (고종석의 문장)" 내용보기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뭐, 나도 “아름답고 정확한 글”을 쓰고 싶으니까.

저자는 마치 바로 내 앞에서 칠판을 놓고 강의하듯이 글을 전개한다. 친숙한 작가들과 그 글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차곡차곡 펼쳐 보인다. 호~ 이 책 뭔가 있지 싶다!

고종석은 서울과 파리에서 법학과 언어학을 전공했다. 신문기자 생활도 했고, 그간 비평집, 서간집과 소설집 등을 다수 냈다. 글쓰기 달인의 경지에 이른 저자가 이제 글쓰기에 관한
책을 썼다.

글쓰기란 재능이 아니라 훈련이다!
저자에 따르면 글쓰기는 수학과 음악과 달리 충분한 훈련이나 연습으로 크게 개선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 글을 쓰는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글이 나아진단다. 하긴 유명 작가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비록 처녀작이 형편없어 혹평을 받더라도 말년에 이르면 농후하고 심오한 작품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계속 쓴다면 말이다.

모든 뛰어남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타고나는 겁니다. 음악이나 수학은 재능을 타고나지 않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다다를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글쓰기는 수학이나 음악과는 다릅니다. 충분한 훈련이나 연습으로 크게 개선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글 쓰는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글이 나아집니다. 그렇다는 건 글쓰기가 재능에 달린 게 아니라 많은 부분이 훈련에 달려 있다는 걸 뜻합니다. 재능도 필요하지만, 노력이 훨씬 더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글쓰기 연습을 하는 겁니다.

이 책은 분명 기존에 나와 있는 수많은 글쓰기에 관한 책들과 차별적이다. 수강생들과의 문답식으로 구성된 본문은 글쓰기에 대해 호기심어린 나 같은 독자들을 위해 참으로 다행스런 방식이 아닐 수 없다.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듯한 감정이입과 몰입이 가능하다. 

본론으로 들어가면 저자의 전공인 언어학에 관한 지식으로 덤으로 얻을 수 있다. 맞춤법이나 문법 같이 글쓰기에 필요한 스킬도 익힐 수 있다. 특히 허용되거나 허용되지 않는 허영에 대한 단서도 얻을 수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정작 글쓰기에 대한 저자의 지론은 언어학적 서술과 교차하는 탓에 듬성듬성하다는 것. 독자는 헨젤이 표시해둔 반짝이는 조약돌처럼 글쓰기의 요체를 잘 주워담아야 한다.

이제 저자의 강연에 동참해 보자. 내 자리, 내 서재에서 말이다! 수강료는 채 2만원도 아니 든다. ^^


YES마니아 : 로얄 h*******c 2014.06.20. 신고 공감 3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