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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피부, xx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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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내 귓가에 들렸던 것은 '긴 울음'소리였다. 그 울음은 태어나자마자 타자로 규정된, 그러나 타자성을 상실해버린 한 흑인 지식인의 절규이자, 공유된 경험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언어'였다. 여느 사회과학서적과 같은 논리 정연한 글을 기대했던 나는 서론의 첫 문장: "대폭발이 오늘 당장 일어나지는 않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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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내 귓가에 들렸던 것은 '긴 울음'소리였다. 그 울음은 태어나자마자 타자로 규정된, 그러나 타자성을 상실해버린 한 흑인 지식인의 절규이자, 공유된 경험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언어'였다. 여느 사회과학서적과 같은 논리 정연한 글을 기대했던 나는 서론의 첫 문장: "대폭발이 오늘 당장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으므로(11p)"을 읽으면서 그 기대가 어긋나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처지가 다른 우리를 '이해시키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기억은 '몸의 기억'이다. 태어날 때부터 몸 속에 아로새겨진 그 기억은 절대로 공유될 수 없다. 그는 물음을 던진다. 그 물음은 우리를 향한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 자기동포에게 향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대화를 시도한다. "흑과 백, 양자는 모두 그들이 각각 숭배하는 조상들의 비인간적 목소리를 등지고 진정한 대화를 시도해야만 한다."(291p) 그러나 그 대화는 이루어지기 힘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몸짓'인지도 모른다. 나는 왜 이 책을 읽는가? 콜로니얼리즘colonialism에 관한 서지 목록에서 이 책이 별 다섯 개가 그려진 책이기 때문에서일까? 파농을 읽어야만 소위 학계에서 '콜로니얼리즘' 스터디의 현 논의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감을 잡을 수 있기 때문에… 아니면 같은 제 3세계인으로서 그들의 처지에 공감하고 연대하기 위해서? 잊어버리고 있었다. 나는 콜로니얼리즘 스터디에서 이 책이 가지는 정전canon적 위치에 매혹된 채 책읽기의 목적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이 책을 독파하면 콜로니얼리즘을 이해할 수 있겠지." 그러나 콜로니얼리즘의 언어는 몸의 기억을 둘러싼 투쟁이다. 그 공유된 몸의 기억을 가지지 못한다면, 우리가 이야기하는 콜로니얼리즘은 공중에 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단순한 이데올로기로서의 콜로니얼리즘은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현란한 말잔치로 끝날 수밖에 없다. 순간 책읽기의 목적을 망각했던 내 자신이 초라해진다. 파농의 말대로 "검둥이를 숭상하는 사람이나 검둥이를 혐오하는 사람이나 기실 우리에겐 매한가지로 역겨운" 것이다. 아직 나는 파농이 요청하는 '대화'에 낄 자신이 없다. 나는 그의 긴 울음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파농은 전체 장 중에서도 가장 절창인 '5장, 흑인성이라는 사실'에서 하나의 주체로 서지 못하는 '흑인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짤막한 대화를 인용해 보자. 흑인: 난 못해요, 엄마. 리지: 왜 못 해? 흑인: 내가 백인들에게 어떻게 총질을 해요? 리지: 그래? 그네들을 괴롭힐 다른 방도가 없잖아,안 그래? 흑인: 상대는 백인들이라구요, 엄마. 리지: 그래서? 그네들은 백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너를 돼지 잡듯 도살해도 괜찮단 말이냐? 흑인: 그래도 저들은 백인이잖아요. (174p) 파농은 이 대화를 분석하면서 흑인의 대사가 열등감의 표현이 아닌, '비존재'의 감정이라고 말한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도 잘 모른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건 나는 결코 선이 아니라는 것, 그것뿐이다."(174p) 그 '유명한' 사르트르 역시 그러한 '흑인성', '비존재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 역시 예외일 수 없다. 카투사KATUSA라는 독특한 제도 때문에 2년 동안 흑인들과 같은 사무실에서 같은 배럭스에서 살아왔지만 흑인들은 나와 같은 인간의 범주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좋은 흑인'이 있고, '나쁜 흑인'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쁜 흑인'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으로 간주되었다. 2년이 지난 지금 그 시절을 생각하면서 드는 감정은 분명히 '부끄러움'이다. 하지만 우리들 사이에서, 특히 흑인을 직접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흑인이라는 존재는 짐승과 비존재라는 범주 사이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는 것은 지나친 억측일까? 파농은 말한다. "그들은 어딘가 존재한다. 하지만 나와는 무관하다" 내가 파농의 역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즉 그와의 의사소통의 불가능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파농은 계속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노란 피부, xx가면을 가진 너/너희들, 36년이라는 식민지 경험을 가진 너희들 역시 우리 흑인들과 그리 다르지 않지 않나' 라고..식민지라는 공유된 경험을 가진 우리들이 함께 제국주의에 대해 생각해야 하지 않겠냐고.. 우리의 식민지 경험.. 우리 역시 현대사에서 식민지인이라는 굴레를 뒤집어 쓴 적이 있지 않던가. 우리는 유럽의 전형적인 제국주의가 아닌 파행된 제국주의-일본, 그리고 이후 미국-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 파행과 왜곡이 우리에게 더 큰 시련을 가져다 준 것도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다행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들은-힘이 미치지 못해서였겠지만- 제국주의의 가장 무서운 rule 하나를 시행하지 못했으니까. 그것은 식민지인들을 비존재로 만들어버리는 것, 즉 그들을 무화시켜버리는 것이다. 적어도 일본제국주의는 '인종주의 정책'을 추진할 수 없었다. 3년간의 미군정 기록을 보면 인종 비하적인 문구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은 자신의 선배인 유럽인이 아프리카에서 했던 것과 같은 차별의 논리를 만들어내지 못했다(혹은 만들지 않았다). 물론 경제적 침탈, 국내 사회구조의 왜곡은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커다란 시련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독립', '저항', '반탁'의 담지자들은 그 세력은 미약하였지만, 자신들이 정의로운 존재임을 떳떳하게 주장할 수 있었다. 해방 공간 이후 맞은 편 세력들이 끊임없이 자신들도 정의롭다는 사회적인 동의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 이는 포스트콜로니얼한 시대에 우리 선배들이 준 선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과거'가 아니라, '지금'이다. 파농의 말대로 "역사라는 육체는 내 행동의 천분의 일도 결정할 수 없다"(290p) 현재의 포스트콜로니얼한 상황에서 우리가 파농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재의 불합리한 상황에 대해 투쟁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그 투쟁의 대의명분은 '과거'의 굴레가 아니라 현재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우리(흑과 백)는 진정한 화해를 시도할 수 있다고 파농은 희망한다. "흑과 백. 양자는 모두 그들이 각각 숭배하는 조상들의 비인간적 목소리를 등지고 진정한 대화를 시도해야만 한다.

[인상깊은구절]
나는 주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게 절름발이의 겸양을 수용하라고 닥달한다. 어제 세상의 아침을 향해 깨쳐 일어나면서 나는 하늘이 철저하고 완전하게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을 보았다. 나 역시 똑바로 서고 싶었다. 그러나 내장이 다 드러난 침묵이 내게로 무너져 왔다. 날개가 마비된 채, 책임감도 없이 한 발로는 무(無), 다른 한 발로는 무한을 떡 버티고 선채, 나는 긴 울음을 울었다.
v*****e 2001.02.14. 신고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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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농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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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식민지 담론에 그렇게 관심이 있지 않은 사람이라도 파농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바로 우리가 유색인종이기 때문이며, 그런 연유로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혼란을 어떻게든 합리적으로 해결하고 싶을 때에는 파농을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 이 책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은 바로 그런 유색인종 지식인의 자기 고민이며, 정체성 혼란에 대한 자기 분석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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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식민지 담론에 그렇게 관심이 있지 않은 사람이라도 파농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바로 우리가 유색인종이기 때문이며, 그런 연유로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혼란을 어떻게든 합리적으로 해결하고 싶을 때에는 파농을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 이 책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은 바로 그런 유색인종 지식인의 자기 고민이며, 정체성 혼란에 대한 자기 분석이자 암시이다. 전반부보다는 아무래도 정신병리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는 후반부가 더 잘 읽히는데, 그 속에는 바로 유색인종이면서 백인의 제국 속에서 기생하는 나의 일그러진 모습도 있었다. 열등감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태생을 감추려하지만, 그것은 또한 쉽게 탄로되기 때문에 혼란은 더 극심해진다. 우열관계를 끊고 하나의 독립된 개인으로 자존하려는 욕망은 곧 '흑인들이 문명인으로 인정받으려는 나르시시즘적 욕망으로부터 탈주'할 때 가능하다. 그러나 파농 이후 무엇이 달라졌는가? 어느 누구도 그런 열패감의 굴레 속에서 빠져나온 것 같지는 않다. 내가 아는 태생적 주변자들은 적어도. 그렇다면 다른 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파농을 넘어서는 작업 말이다.
e****l 2005.02.02.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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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피부, 하얀 가면 (Black Skin, White Ma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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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피부, 하얀 가면 (Black Skin, White Mask)프란츠 파농 저/이석호 역 | 인간사랑 | 1998년 03월   책을 읽은 후, 나는 그의 책이 대상으로 삼았던 이른바 마르티니크의 프랑스 국적의 흑인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아프지만, 동양인이나 식민지시대를 경험한 우리들 뿐만이 아니라, 그러한 비극적 경험을 겪지 못했던 여타의 국가들 조차에도 이러한 참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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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피부, 하얀 가면 (Black Skin, White Mask)
프란츠 파농 저/이석호 역 | 인간사랑 | 1998년 03월

 

책을 읽은 후, 나는 그의 책이 대상으로 삼았던 이른바 마르티니크의 프랑스 국적의 흑인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아프지만, 동양인이나 식민지시대를 경험한 우리들 뿐만이 아니라, 그러한 비극적 경험을 겪지 못했던 여타의 국가들 조차에도 이러한 참담한 문화, 역사적 영향이 있어 왔고, 그리고 그것은 정말 한 교수의 입에서 끔찍한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 교수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아마도 앞으로의 세상은 계속 영원히 백인들이 지배할 것이다..'라는

 

이 이야기를 듣고서, 나는 아무런 반론도 하지 못했다. 그것은 우리들의 문화가 그 심리적인 발전의 궤를 달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들 문명의 기초가 서구를 바탕으로 한 것을 나는 부인할 만한 증거를 전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 이 책을 읽은 후에 이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우리들 자신도 자신들의 땅에 유폐된 존재라는 것을.

 

프란츠 파농의 개인적인 인생도 그의 이 첫번째 책과 함께 매우 흥미롭다. 프랑스령의 한 제도에서 태어난 흑인...자신을 프랑스인이라고 생각하며 그 정체성 또한 그렇게 형성되어 갔지만, 그는 인종주의라는 비참한 상황에 직면한다. 검은 피부를 한 백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또한 자기들 내부적으로 인종주의를 확대재생산하는... 상황...

 

어떨 때는 감정적으로 어떨 때는 냉정하게 프란츠 파농은 그의 글을 써내려간다. 그는 말한다. 자신이 객관적일 수 없다는 것... 을... 나는 프란츠 파농이 안타까워 했던 그 현실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곳에서도 그대로 간섭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아쉽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인간을 어떠한 편견없이 인간으로 평등하게 대할 수 있는가. 프란츠 파농이 진실로 원했던 것은 그러한 질문에 대한 사심없는 답이었을 것이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본서에서 일단의 종교적 영향에 대한 분석이 덧붙여졌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한다. 그것은 종교가 주는 그 인간정신의 심연에 대한 영향이 무척이나 크기 때문이다.

 

s****t 2009.01.11.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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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가면을 쓰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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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이라는 제목에서부터 이 책의 내용이 흑인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럼 하얀 가면은 백인을 뜻하는 것일까. 이 의문을 품은 채 책을 읽어나갔다.   유럽의 식민지배로 많은 문화들은 정체성에 혼란이 왔다. 프란츠 파농은 문화가 "비존재의 지대, 극도로 메마른 불모의 지역"을 헤매고 있다고 말한다. 존재하지 않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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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이라는 제목에서부터 이 책의 내용이 흑인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럼 하얀 가면은 백인을 뜻하는 것일까. 이 의문을 품은 채 책을 읽어나갔다.

  유럽의 식민지배로 많은 문화들은 정체성에 혼란이 왔다. 프란츠 파농은 문화가 "비존재의 지대, 극도로 메마른 불모의 지역"을 헤매고 있다고 말한다. 존재하지 않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아프리카와 서인도 제도의 흑인들의 모습을 고통스럽게 투사한 자화상이 바로 이 제목에 숨어있다. 이들은 많은 부분에서 열등감을 느끼고 심지어 같은 흑인들 사이에서도 서로 경계 한다. 파농은 이들에게 한 가지 교훈을 주는데 그것은 바로 “싸워라!”이다. 싸워야지만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것. 굉장히 슬픈 일이다. 책을 읽으며 내가 흑인의 검정색밖에 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흑인을 단순화시키기, 그것으로부터 그들에 대한 편견이 생겨난 것이다.

  파농은 이 글에서 흑인을 이차원적인 존재라고 칭한다. 한 차원은 자신의 종족과 관련되어있고 다른 한 차원은 백인과 관련되어 있다고. 게다가 언어란 절대적으로 타자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앙띨레스에 사는 흑인들은 불어 구사능력에 따라 백인화의 정도를 평가받는다고 하는데, 불어를 얼마나 잘 구사하느냐에 따라 인간 됨됨이가 가늠된다는 것이다. 흑인들은 왜 하얘져야만 존재함을 인정받는 것일까. 인종차별이 부르는 비극.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 조금 더 얘기해 보고자 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차이들이 존재한다. 셀 수 없을 만큼 광범위한 것들 중 인종차별은 아주 오래된, 우리에게 익숙한 문제이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나는 흑인이 아니고 백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적당히 하얗고 적당히 까만 아시아사람, 제 3자의 입장에서 바라봤을 때의 입장이 전부일 것이다.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이젠 끝나야 하는데.......멈추지 않고 앞으로도 끝날 것 같지 않다.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 쓰려하는 혹은 쓰고 있는 하얀 가면은 어쩌면 자신들이 원하는 모습, 혹은 그렇게 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이 세상에 대한 외침이 아닐까. 현재의 나로선 지금 어떤 가면을 찾아다니고 또 어떤 가면으로 내 진짜 피부를 가리고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h******3 2012.06.14.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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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둥이와 그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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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 -4]에서 발견하게 되엇다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 는 당대의 최고의 저자들이 모여서 이 책에 대한 해석과 마치 리뷰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장경렬 영문학 박사가 [검은 피부 , 하얀 가면]에 대해 쓴 글은 흑인에 대한 백인의 식민 지배와 그 과정에서 일어난 백인과 흑인간의 갈등과 생각들을 일목요연하게 적어놓았다.   처음에 읽을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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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 -4]에서 발견하게 되엇다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 는 당대의 최고의 저자들이 모여서 이 책에 대한 해석과 마치 리뷰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장경렬 영문학 박사가 [검은 피부 , 하얀 가면]에 대해 쓴 글은 흑인에 대한 백인의 식민 지배와 그 과정에서 일어난 백인과 흑인간의 갈등과 생각들을 일목요연하게 적어놓았다.

 

처음에 읽을때는 이해가 잘되지 않아서 간단한 사상같은것을 대조시켜보려고 인터넷을 찾아보게 되고 여러가지 자료를 찾아보게된 결과 "포스트콜러니얼리즘" 시대의의 사상이 깊게 뿌리 박혀 있었다. "포스트콜러니얼리즘"이란 간단하게 말해서 탈민족주의인데 이 책에 빗대어 표현하자면 흑인들의 백인에 대한 반감과 동시에 흑인이길 벗어나고 싶어하는 탈민족주의 사상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책의 본론으로 들어와서 이책의 주된내용은 위에서도 서술했듯이 흑인에 대한 백인의 식민 과정에서의 정신적 그리고 문화적 침식에 의한 암묵적인 식민 지배가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책의 가장 주되고 깊은 의미를 가진 Chapter 1 - <흑인과 언어> 가 모든 Chapter 의 밑바탕에 깔려있지 않은가 싶다. 언어는 곧 문화로 종속되고 그 문화가 곧 흑인들의 사상에 종속되기 때문에 백인들의  가장 효과적인 식민 지배방법은 언어에 의한 문화 지배에 의해서 흑인들을 자신의 그것으로 종속시키는 것이였다. 이 부분에서 흑인들의 이중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 있다. "흑인들은 백인들의 사상에 투쟁하면서 흑인에서 벗어나 백인이 되기위해 백인 언어를 배우고 스스로 백인의 노예가 되어간다는것이다."

 

그 다음으로 흑인 여성과 백인 남성 , 백인 여성과 흑인 남성 과 같이 서로의 이성에 대한 글이 기술되어 흑인 여성들이 백인 남성들을 우러러본다는 점이다. 그래서 결혼과 같은 교류를 통해 자신들이 흑인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내용으로 여지껏 말한 것을 모두 동틀어서 암묵적으로 흑인들은 항상 열등감을 가지고 산다. 자기들보다 우등한 존재인 백인들에게 열등감 즉, complex를 가지고 또 아이러니하게 이중성을 띄고 그 complex 를 극복 하기 위해서 또 백인들의 언어와 문화를 공부한다. 참으로 흑인들은 이중성을 띄고 여러가지 사상을 내포하고 있따고 본다. 이책에서 파농이 얘기하고 싶은 바와 같이 흑인들은 백인들에게 전혀 무시받을 이유가 없으며 항상 동등한 존재로 이해되어야하며 다소 식상한 주제 일 수 있지만 철학적 내용과 여러가지 정신적인 면에서 잘 풀어내 해석 한 것 같다.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 -4 ]참고

m********l 2010.05.30.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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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와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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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파란츠 파농이 그의 나이 27살에 쓴 저작. 프란츠 파농의 첫 저서이기도 하다. 파농은 서인도 제도의 마르티니크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알제리 혁명에 가담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 한국에선 이 책이 '제3세계 문학'으로 분류가 되어 있지만, 사실 문학이나 사회과학서적이라기 보다는 정신병리학에 관한 임상보고서 같은 느낌을 준다. 그는 '피부색', 즉 인종이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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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파란츠 파농이 그의 나이 27살에 쓴 저작. 프란츠 파농의 첫 저서이기도 하다.

파농은 서인도 제도의 마르티니크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알제리 혁명에 가담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

한국에선 이 책이 '제3세계 문학'으로 분류가 되어 있지만,

사실 문학이나 사회과학서적이라기 보다는 정신병리학에 관한 임상보고서 같은 느낌을 준다.

그는 '피부색', 즉 인종이 인간에게 어떠한 병리적 상흔을 남기는지 관찰하고 있다.

 

  백인에겐 하나의 사실이 있다. 스스로를 흑인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하는 사실말이다. 흑인에게도 하나의 사실이 있다.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그들 사상사의 풍요로움과 그들 지성사의 뒤떨어지지 않는 가치를 백인들에게 증명하려고 애쓴다는 사실말이다.

 

물론 그는 흑인이기에 흑인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백인이 되고 싶어하는, 흑인을 부정하는 흑인을 보라.

그리고 오륀지라고 혀를 굴려야만 하는, 오륀지를 위해 아이의 혀를 찢기까지 하는 한국인을 보라.

 

  자의적이면서 보편적인 흑인 신화의 노예인 교육받은 엘리트 흑인은 어느 단계에 이르면 자신의 종족이 자신을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낀다.

 

흑인들의 끊임 없는 자기부정은 바로 백인들의 끊임 없는 타자화에서 비롯한다. 그들은 이제 그것이 '병'인지도 알지 못한다.

'흑인은 백인과의 관계에서만 흑인'이 된다.

 

  그가 말라가시인인 이유는 백인의 출현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한 특정단계에서 그가 그 자신에게 진정 그가 인간인지 아닌지를 자문해야만 하는 이유도 인간으로서 그 자신의 실체가 도전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꼼짝달싹할 수 없는 코너에 몰려있다.

 

  아, 이 부끄러움, 수치, 지기 경멸, 그리고 오역질. 어떤 사람들은 내가 마음에 들 때, "너의 피부색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한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네 피부색" 때문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 어느 쪽이든 나는 이 끔찍한 순환론을 벗어날 수가 없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백인 남성과 흑인 여성, 백인 여성과 흑인 남성 간의 관계를 분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 때문에 파농은 6, 70년대 이후 페미니스트들에게 심한 공격을 받았다.

나도 '흑인에게 강간 당하고 싶어하는 백인 여성'에 대한 묘사는 충분히 그런 비난의 빌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백인의 여자가 되고 싶어하는 카페시아의 소설에 대한 분석을 가지고 그런 비난을 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은 것 같다.

물론 파농과는 별개로 식민주의에 관한 논의를 할 때, 항상 '강간'이 비유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비판적으로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또 하나 재미있는 점은 백인들이 가지고 있는 흑인에 대한 '환상' 혹은 '공포'다.

 

유태인들은 역사적으로 그들 자신의 선조 및 후손과의 관계에서 그들 인종의 종교적 정체성이 가학당한 것이다. 따라서 유태인들을 가학할 때, 가학자들은 주로 그들의 정체성의 뿌리를 거세한다. 박해받는 한 유태인, 그는 박해받는 한 개인이 아니라 박해받는 한 인종인 것이다. 그러나 흑인이 박해를 당하는 곳은 그의 신체이다. 흑인 자신의 구체적 인성의 상징으로서 신체가 고문을 당하는 것이다.

 

때문에 백인들의 머리 속에 자리 잡은 흑인들의 성기는 거대하고, 그들의 성적 능력은 뛰어나다.

흑인은 인간이 아니라 동물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백인 남성들은 자신들의 백인 여성들을 흑인 남성들이 강간할 것이라고 두려워한다.

반대로 백인 여성들은 흑인 남성에 대한 '공포'와 '욕망'이 마구 뒤엉켜 갈팡질팡 한다(바로 이 부분이 논쟁적인 부분이다).

 

첫 저작인만큼 표현이 좀 장황하고 굉장히 흥분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만, 그의 논지는 매우 명확하다.

 

  도구가 인간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 인간에 의한 인간의 노예화는 영원히 금지되어야 한다는 것. 한 인종에 의한 다른 인종의 노예화는 반드시 중단되어야 한다는 것. 인간, 그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내가 그를 찾아내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아마도 파농은 자신의 임상관찰 결과, 흑인들의 이러한 정신병리적 현상은 단순한 의료적 치료로 해결될 수 없는 것으로 판단한 것 같다.

이런 병들을 생산해내는 환경, 즉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뒤집지 않고서는 이 병을 이겨낼 수 없을테니까.

폭력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전혀 나오지 않는 것 또한 그가 아직 '현장'에 들어가기 전이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전에도 '인간사랑' 출판사의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아마 푸코의 '광기의 역사'였던듯), 이 출판사, 좀 특이하다.

어째 역자의 약력이 전혀 나와있지 않고, 역주는 하나도 달려있지 않은 건지;;

이 책을 역주 없이 읽으려면 많은 상상이 필요하다. 마르티니크라 하면 대체 몇 명이나 그게 어디에 붙어있는 건지 알겠는가?;

그리고 '피진'이니 '크레올'이니 하는 것들이 괄호에 묶인 원어조차 명시되지 않고 마구 쓰인다면, 과연 몇 명이나 이해할 수 있을까?

번역상으로는 크게 걸리는 부분은 없었지만(분명 번역이 쉬운 책은 아니었을 거다), 하지만 역주 없는 번역은 여전히 성의 없어 보인다.

1******n 2009.02.01.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