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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위한 마지막 징검다리 돌을 스스로 들게 만드는 책...
"변화를 위한 마지막 징검다리 돌을 스스로 들게 만드는 책..." 내용보기
2011년 3월 11일. 그 날 일어났던 일본 원전 사태 이후로 일본 국민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인들은 'JAPAN AS NO.1'이라는 자부심으로 자신이 속한 일본 사회가 전혀 문제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잘 굴러가고 있다고 여겼다.  버스 안의 얌전한 승객들처럼 핸들을 쥐고 있는 정부를 신뢰하며 이렇다 할 토를 달지 않고 묵묵히 순응하는 편이었다. 그
"변화를 위한 마지막 징검다리 돌을 스스로 들게 만드는 책..." 내용보기

 2011년 3월 11일. 그 날 일어났던 일본 원전 사태 이후로 일본 국민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인들은 'JAPAN AS NO.1'이라는 자부심으로 자신이 속한 일본 사회가 전혀 문제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잘 굴러가고 있다고 여겼다.  버스 안의 얌전한 승객들처럼 핸들을 쥐고 있는 정부를 신뢰하며 이렇다 할 토를 달지 않고 묵묵히 순응하는 편이었다. 그러다 덜컥 사고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것도 차량이 전복될만큼의 대형 사고를.


 일본의 또 하나의 자부심이던 안전신화는 여지없이 붕괴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비판적 여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전 사업을 민영화시키고 지속적으로 사업 확장까지 시켜온 정부에 대한 신뢰 역시 그와 함께 가라앉고 말았다. 이제 사람들은 더이상 참지 않았다. 40%라는 초유의 시청률을 보여준 일본 드라마 '한자와 나오키'는 단적인 그 증거였다. 한자와 나오키는 주인공의 이름인데 그는 은행원이다. 조그만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은행의 악랄한 속임수로 기업은 도산하고 결국 자살까지 하게 되자 복수를 위하여 아버지를 파멸로 이끌었던 은행에 취업한 것이다. 하지만 은행원이 된 동기가 오로지 복수인 것만은 아니었다. 다시는 아버지와 같은 비극을 겪는 사람이 없도록 제대로 된 은행으로 만들겠다는 신념도 있었다. 그러나 그 은행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온갖 악행과 불법을 저지르며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인물은 사전에 잡초처럼 밟아버리는 곳이다. 당연히 신념을 관철하려는 한자와 나오키 앞으로 탐욕에 물든 상사들의 날카로운 발톱이 날아올 수 밖에 없다. 그냥 묵묵히 상사들의 명령에 순응했다면 생채기 하나 안 났을 삶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자와 나오키는 그러지 않았다. 타인의 눈물을 자아내는 불의가 있다면 결단코 바로잡으려 했다. 조직을 등에 업은 상사들의 발톱은 한자와 나오키에게 꽤나 깊은 상처를 남기고 그는 자주 파면의 위기에 봉착한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말을 하면서 더욱 결의를 굳건히 할 뿐이다. 그 말이 바로 '바이가에시'다. '당한만큼 반드시 돌려주겠다!'는 뜻이다. 그것도 백배, 천배로.



 바로 이것이 40%라는, 일본드라마로서는 참으로 경이로운 시청률을 이끌어낸 장본인이었다. 이 말은 원전 사태 이후에 변해버린 일본인들의 마음을 정확히 대변하고 있었다. 원전 사태는 많은 일본인들에게 믿고 순응했던 자신을 바보라고 여기게 만들었다. 더구나 뒤이은 정부의 은폐와 여론 호도 조작은 일본인들을 더욱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국가가 국민을 철저히 무시해왔음을. 가만히 있었더니 진짜 '가마니'로 여기고 함부로 해 왔음을. 한자와 나오키처럼 이를 갈지 않을 수 없었다. '바이가에시'는 그러한 그들의 마음이라 할 수 있었다. 더 이상 무시당하지 않겠다는.


 여기서 무시라는 말을 꺼내게 된 데는 연유가 있다. 바로 이것을 2011년의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이나 아프리카의 '자스민 혁명'등, 작금에 이르러 거세게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움직임을 가져오고 있다고 말하는 책이 있기 때문이다. 


현대에는 '우리'가 조각조각 흩어진 채 소우주처럼 난립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바꾸면 사회가 바뀐다고 공통적으로 여길만한 것을 찾기가 대단히 어렵다. (...) 그러나 현대에 사는 누구나가 공유하는 문제의식은 있다. 그것은 '아무도 내가 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게 되었다', '나는 무시당하고 있다'라는 등의 감각이다. 이것은 수상이든, 고급관료든, 비정규고용자든, 필시 공유하고 있다. 그것을 바꾸면 누구에게나 '사회를 바꾸는' 것이 된다고 말할 수는 없을까? (p. 370)

  

 그것이 바로 62년의 동경에서 태어나 현재는 게이오기주쿠 대학에서 정책학 교수로 있는 오구마 에이지가 쓴 '사회를 바꾸려면'이라는 책이다. '한자와 나오키'의 인기는 그러한 무시당했다는 감각이 일본 저변에 확대되어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에는 '격차 사회'라는 말이 유행했다. 한 때 '1억명이 중산층'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인구에 회자될만큼 일본은 그동안 사회적 격차에 대해선 둔감한 편이었다. 그러던 것이 2011년을 기점으로 유행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 '격차 사회'란 말도 그 감각에서 발현된 것이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하면 격차에 대한 반감이 향하고 있는 대상을 통해서다. 일본인들의 반감은 '연 수입 10억엔 이상의 큰 부자에게는 향하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연 수입 300만엔 정도의 공무원이나 정사원만이 원망의 대상으로 떠오른다.(p. 371)' 이런 모습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날로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되고 있다면서도 우리들 원망의 이빨은 이건희 같은 재벌가들 보다 교사나 공무원 들에게 잘 들이댄다. 왜 그럴까? 바로 여기에 무시에 대한 감각이 깔려 있음을 이 책을 읽고서야 알았다. 대기업의 정사원 그리고 교사나 공무원들이 자주 원망의 화살을 받는 것은 오직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그들이 안정적이라는 것. 즉 그들은 테우리 안에서 보호받고 있다고 사람들은 느끼는 것이다. 격차의 심화는 날로 테우리 안에 보호받는 사람들의 수를 줄였다. 우리나라도 이미 비정규직이 절반을 넘었다. 날로 테우리 바깥으로 떨어져 나가는 이들이 많다. 사회안전망이 부족한 일본이나 전무하다시피한 우리나라에서 테우리 바깥으로 내몰리는 것은 한없는 불안과 마주하는 일이다. 거기서는 생존마저 위태롭다. 오구마 에이지는 말한다. 빈곤이란 사실은 사회 어디에도 자기 자리가 없다는 감각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현대 일본어의 '격차'라는 것은 단순히 수입과 재산의 차이만을 지칭하지 않으며 '나는 무시당하고 있다'라는 감각의, 일본 사회 구조에 입각한 표현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다.(p. 373)


 그들에게는 설 자리가 없다. 조르주 아감벤이 말한 법의 보호 바깥으로 밀려난 '호모 사케르'인 것이다. 깨끗이 무시된 자들. 원망은 거기에서 비롯되었다. 즉 그들의 원망이란 기실 나도 당당한 사회의 성원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호소에 다름아니었다. 그렇다면 사회를 바꾼다는 것은 진정 어떤 의미인가? 여기에 오구마 에이지는 이렇게 답한다. 되도록 많은 이들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감각을 가지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의 근본된 모습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무엇을 '나를 무시하는 존재'의 상징으로 보는가는 시대마다, 각 사회의 구조마다 다르다. 이 무시의 감각을 지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현실 사회에 존재하는 구체적 구조의 모습을 알아야 한다. 때문에 그는 책의 시작이 되는 1장에서 지금 일본 사회의 구조부터 살핀다. 그에 따르면 지금 일본 사회는 공업화 사회에서 탈공업화 사회로 변했다. 탈공업화 사회의 특징은 무엇보다 유동하는 정체성이다. 공업화 사회는 '종신 고용'이라는 말처럼 정체성이 안정적이었다. 오구마 에이지에 따르면 '전업 주부'도 공업화의 산물이라고 한다. 원래 일본에는 여성 취업률이 남성보다 높았었는데 이제 공업화 사회로 들어서면서 종신 고용으로 남성들이 안정적으로 임금을 지급받을 수 있게 되자 더 이상 바깥에서 일할 필요가 없게된 여성들은 가사에만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신 고용의 신화가 붕괴된 탈공업화 사회에선 더 이상 그런 안정의 획득이 불가능해졌다. 비정규직 비율은 날로 높아져가고 있으며 대학을 나와도 번듯한 일자리 잡기는 하늘의 별 따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그동안 일본 성장의 근간이 되었던 제조업이 크게 쇠퇴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제조업들은 임금이 상대적으로 낮은 중국이다 동남아 쪽으로 넘어갔다.  이제 일본은 다른 선진국들처럼 서비스업 종사자의 수가 제조업 종사자의 수를 크게 웃돌게 되었다. 이 서비스업 종사자 수의 증가가 바로 탈공업화 사회의 특징이다. 또한 대부분이 비정규직이다. 탈공업화 사회로 가면 갈수록 비정규직의 비율은 늘어날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공업화 사회만큼 통일된 정체성을 가지기가 어렵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서로에 대해 가지는 생각들이 그러하듯이. 거기다 서비스업은 직종도 또 의복도 천차만별이다. 때문에 정체성은 한없이 산포되고 그만큼 유동적이 된다. 이건 달리 말해 어떤 사안이 터졌을 경우 '이게 내 문제다'라는 감각을 가지기가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라는 감각을 만들기가 어려운 사회. 그것이 바로 탈공업화 사회이다. 이는 지금까지의 사회 운동 방법 역시 재고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동안 사회 운동 방식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쉽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당연했다. 그 때까지는 정체성이 어느정도 단일화 되어있고 항구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 너무나 많이 다변화된 정체성으로 '우리'의 문제로 가져오기 어렵게 되었다. 지금 일본은 그러하다. 우리나라 역시 점차 다가가고 있다. 사회 운동의 방법 역시 전면 수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모두가 무시받지 않도록 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우리'라는 감각을 어떻게 일깨울 것인가? 당연히 들 수 밖에 없는 의문이다. 오구마 에이지는 이를 위해 제법 긴 장을 할애하여 설명한다. 그는 민주주의의 참 의미를 답사하고 자유 민주주의의 한계 지점까지 나아간다. 그러면서 근대 사회와 철학의 역사까지 아울러 훑는데 이러는 까닭이 있다. 근본적으로 탈공업화 사회 자체가 가져다주는 상황의 어려움이다.


 영국의 저명한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는 이러한 사회의 특징을 무엇보다 '재귀성의 증가'로 꼽았다. 재귀성이 얼른 이해 안되면 '되먹임'으로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즉 존재든 사건이든 하나에 그치지 않고 자꾸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재구성해 나간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것은 훗설의 현상학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훗설은 말하기를 데카르트가 생각했듯이 주체와 객체는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향성' 속에서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 하였다. 즉 우리는 고정된 자아로서 타인과 세계라는 객체를 대하는 것이 아니며 그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변해간다는 이야기다. 또한 내가 변하면 내가 바라보는 객체도 변하게 마련이니 관계는 고정적이지 않고 가변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드라마 같은 데서 잘 나오는 이야긴데 앙숙처럼 지내던 남자에게 어느 순간 사랑을 느낀 여자를 생각해 보자. 사랑을 느낀 그녀의 눈에 이제 남자는 더 이상 같은 하늘을 두고 살 수 없는 원수가 아닐 것이다. 예전에는 밉게 보이기만 했던 행동도 이제는 사랑스럽게 다가올 것이다. 이 중, 어느 것이 과연 진짜 그녀일까?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미 변해버린 그녀는 더 이상 과거의 그녀에게 연연하지 않을 것임은 틀림없다. 훗설은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 '재귀성'은 바로 이것이다. 나도 너도 매일 변한다는 것이다. 나와 너가 만나 이루는 관계 역시 요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진짜다! 진리다!' 말할 수 없는 시대. 그것이 바로 기든스가 바라보는 탈공업화 사회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모든 것이 흐르는 물처럼 한없이 유동한다고 하여 '액체 근대'라고 부르기도 했다. 오구마 에이지는 이것을 가져와 '우리'라는 감각을 일깨우는 사회 운동 형성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출렁이는 바닷물 위에 하얀 백묵으로 선을 긋는 것과도 같이 어려운 작업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치할 수는 없다. 변화는 언제나 실제의 시도에서만 발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우리'라는 감각을 가지게 만들 좋은 계기가 닥쳐왔다. 그것이 바로 '원전 사태'다. 오구마 에이지가 특별히 6장을 일본 원전에 할애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바로 그 원전이 지금까지 잠재된 일본이 가진 모든 문제점들을 전면적으로 드러내었고 변화의 정당성을 촉구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원전은 일본인 모두의 생존을 위험하게 만들었기에 '우리'라는 감각을 갖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말하자면 원전은 모두가 '나의 문제'라고 여기게 만들어 변화를 위한 소중한 디딤돌이 되어 준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것을 어떻게 모으고 뻗어나가게 할 것인가에 있다. 그것을 위해 오구마 에이지는 현실 속에서 존재했던 전후 일본의 사회 운동 역사를 참조하려 한다. 지금까지 일본 사회 운동의 역사는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기에 그건 실패한 역사의 복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타산지석이라고 지나간 운동의 실패는 우리가 어디를 디디면 안되는지는 알려줄 수 있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조심스러움이 눈에 띈다. 그만큼 이 계기를 놓칠 수 없다는 뜻일테고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일 터이다. 비록 재귀성이 한껏 증가하는 탈공업화 사회에서 변화로 흐르게 만드는 사회 운동의 물꼬를 트는 일은 지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구마 에이지는 행여나 건너가지 못하여 발을 동동 구르는 길손이 있을까 하여 징검다리를 놓는 기분으로 작업을 이어나간다. '사회를 바꾸려면'는 바로 그런 책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 책은 그 원전 사태 때문에 쓰여졌다. 정작 저자인 오구마 에이지 자신은 원전 사태가 발생했을 때 병원에 입원해 있어 그 사실을 몰랐지만. 어쨌든 원전에 대한 반대운동이 한창 높아져 가고 그만큼 정부의 은폐와 억압 또한 치열해 지던 향후의 추이를 보며 쓰여진 것이다. 말하자면 이 책 역시 '바이가에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이 단호한 선언, 뜨거운 호소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차가운 지성의 책이다. 차분하고 냉정하게 논리적으로 그리고 분석적으로 좌초중인 일본 사회를 바꾸려면 진정 어떻게 하면 좋은가를  탐색하고 있는 것이다. 총 439페이지에 도합 9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나름 단단한 뼈대가 엿보인다. 무엇보다 사회를 바꾼다고 이야기할 때 흔히 따를 수 있는 위험인 '탁상공론'이 되지 않도록 만드려는 뼈대가.


 그렇게 이 책은 실천 가능한 대안을 마련하기 위하여 펼쳐진 진지한 모색의 작업이다. 일본 사회의 역사와 서양의 이론들까지 아우르는 내용은 꽤나 풍부하여 읽는 이의 흥미를 돋우고 현실 일본 사회의 구체적 모습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논의는 꽤나 진지하여 이 쪽에 별 관심이 없었던 이들도 읽다보면 여기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후기에 저자는 자신의 책이 교과서로 읽히지 않고 어디 독서모임 같은 곳에서 토론 거리로 사용되었으면 좋겠다고 피력했는데 과연 거기에 어울려 보인다. 굴비들을 한 쾌로 엮듯 분명 주제의 일관된 흐름이 있지만 그와는 또 별도로 전체에 걸쳐 이것저것 생각할만한 꺼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분명 저마다 다른 유동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서로의 마음에 대해 알 수 있게 만드는 하나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렇게 이 책은 저자 자신이 말했던 대로 해답이 아니라 촉발이다. 고민의 도착점이 아니라 사유의 출발점인 것이다. 참조할 수는 있으나 구애받을 수는 없다. 오구마 에이지가 내내 설파해온 대로 정답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강 건너편으로 건너가기엔 마지막 징검다리 하나가 빠져 있는 셈이다. 그건 길손인 우리가 놓아야 한다. 이 책을 읽고 고민하는 것 자체가 바로 그 마지막 돌을 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오구마 에이지도 이 책 어디에선가 말했듯이 목소리를 스스로 내지 않으면 누구도 돌아봐주지 않는다. 물론 무시가 점점 보편화되고 있는 세상에서 그건 어렵다. 하지만 어렵기 때문에 더욱 해야 한다는 당위가 성립된다. 그렇지 않아도 독자가 주저할 것임을 예상했던지 오구마 에이지는 다음과 같은 조언이랄까 응원이랄까 하는 말을 해 놓았다.


 부당한 것에는 항의해야 한다는 체험을 이미 해봤고, 막상 해보면 재미있고,그렇게 어렵지도 않다. 바로 그런 습관을 몸에 익힌 사람들이 그만큼 늘어나면 사회는 바뀌게 마련이다.(p. 276 ~ 277)


 무엇이든 처음만 어려운 법이다. 몸에 배이게 되면 더는 고민할 것도 없다. 그 첫 단추를 이 책으로 시작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l****1 2014.07.11. 신고 공감 5 댓글 5
리뷰 총점 종이책
연행되면 무섭잖아. 물대포 맞으면 아프잖아.
"연행되면 무섭잖아. 물대포 맞으면 아프잖아." 내용보기
대의민주주의제도는 현대 국가의 근간이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대의민주주의제도를 만들고 발전시키는 데 수백 년이 걸렸다. 혁명과 전쟁과 살상과 암투와 결탁을 이어오며 만들어 낸 최종 결과물이다. 현대 정치의 골격이기도 한 대의민주주의제도를 한국은 수십 년 만에 응축했다. 한국전쟁 이후 오랜 독재 시기에는 제대로 이것을 구현하지 못했고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 비로소 조
"연행되면 무섭잖아. 물대포 맞으면 아프잖아." 내용보기

대의민주주의제도는 현대 국가의 근간이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대의민주주의제도를 만들고 발전시키는 데 수백 년이 걸렸다. 혁명과 전쟁과 살상과 암투와 결탁을 이어오며 만들어 낸 최종 결과물이다. 현대 정치의 골격이기도 한 대의민주주의제도를 한국은 수십 년 만에 응축했다. 한국전쟁 이후 오랜 독재 시기에는 제대로 이것을 구현하지 못했고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 비로소 조금 맛보게 되었다. 대의민주주의제도를 결정하고 대표하는 것은 ‘선거와 투표’이다. 고대 그리스 폴리스처럼 직접민주주의제도를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한 근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선거와 투표’는 민심과 민의를 국가 정책과 운영에 반영할 수 있는 유일하고 가장 강력한 방법이었다. 한국의 정치와 선거가 세계 그 어떤 국가보다 질이 떨어지고 수준이 낮은 것은 일견 이해가 된다. 87년 이후 제대로 된 선거와 투표를 해 본 것이 불과 30년도 되지 않는 것이다. 독재정권 아래 선거는 선거가 아니었고, 투표도 투표가 아니었다. 짧은 기간 동안 선거와 투표를 하며 한국 사람들은 두 번의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정치적인 방향성의 차이를 논하기 전에 나는 이것만으로도 한국 사람들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자민당이 수십 년 동안 해먹던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물론, 두 번째 정권교체 이후 이 대의민주주의제도의 골격인 선거와 투표가 공정하게 치러졌는지 말이 많고 의심이 많아 졌지만.

나는 적어도 정치적 의제와 정치 구조에 대해서 비판과 음모와 공격이 오가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의 중요한 발전 동력이라 생각한다. 지금보다 더 선거제도나 투표제도에 대한 다양한 비판과 토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지금은 암울해 보이고 도무지 달성될 것 같지 않은 정권교체도 언젠가는 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그런데 이 책은, 이런 대의민주주의제도가 최상의 제도나 방법이 아님을 주장한다. 선거와 투표도 오롯이 민심과 민의를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 「사회를 바꾸려면」은 도발한다. 현대 국가를 구성하고 운영하고 유지하는 근간을 흔드는 것이 아닐까 걱정될 정도 이었다.(책을 다 읽고 나니 그런 걱정은 기우였음을 알게 되었다)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만 참으면 된다고 여기며 입시경쟁을 뚫고 올라왔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오고 나니 진리탐구의 전당은커녕, 학생들만 엄청 뽑아놓고 볼품없는 강의를 억지로 듣게 하고 수업료 올리기에 바쁘다.” (p.320)

 

이 부분만 읽으면 한국의 사회학자가 한국 사회를 진단하면서 쓴 문장으로 보인다. IMF이후 한국사회, 특히 대학과 대학생이 겪고 있는 사회적 진통을 표현한 듯 보인다. 그런데 이것은 60년대 후반 일본의 대학에서 전공투 운동이 벌어지게 된 배경을 설명한 것이다. 무려 50년 전 일본의 대학과 대학생들이 겪었던 일이다. 일제 강점기 이후 일부 의도적으로, 일부 어쩔 수 없이 한국은 일본의 제도와 풍습, 사회체제와 학문, 문화와 의식을 답습했다. 일본이 80년대 겪었던 부동산 버블붕괴와 장기적인 경기침체를 지금 한국이 겪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일본을 가리켜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자꾸만 한국의 미래를 미리 보는 것 같았다. 미래에서 온 사람이 ‘앞으로 한국은 이렇게 될 거야.’라고 예언하는 것 같았다.

 

저자인 오구마 에이지는 젊은 사회학자다. 책의 전반부에는 지금의 민주주의가 정착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이론적 배경을 자세하게 언급하는 데, 사회학·철학책 몇 권 읽는 것 같이 짜임새 있고 내밀하게 분석한 것이 돋보였다. 특히, 나치스의 집권과 마르크스·레닌주의 이후 방법론적으로 ‘전위당’으로의 방향성과 ‘사회민주주의’로의 방향성에 따라 어떻게 진보·좌파가 형성되고 실패했는지에 대한 분석은 굉장히 재미있었다.

 

 

“나치스가 정권을 쥔 것은 결코 폭력혁명을 통해서가 아니었다. 보통선거권에 의한 대의제 민주주의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p.168)

 

흔히 히틀러의 나치스가 정권을 잡게 된 것은 불법적인 방법이나 폭력혁명을 통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끔찍한 2차 대전의 원인이 되었고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아우슈비츠 학살, 유대인에 대한 정신병적인 공격 등으로 미루어 보아 분명히 히틀러와 나치스는 정상적인 인간과 인간들의 집합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히이만을 통해 악의 평범함과 편재성을 악몽처럼 경험한 현대인들은 아히이만의 얼굴에 히틀러와 나치스의 얼굴을 오버랩해야 한다. 1차 대전 이후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독일의 경제는 극우 폭력 단체를 양산했고, 지독한 실업난과 구직난에 허덕이던 청년들은 너도나도 이곳에 몰려들었다. 결코 폭력을 동원하거나 강제로 끌어 낸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방법을 통해서 선출된 권력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대의민주주의제도가 현대국가를 운영하고 유지하는 데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될 수 있지만 그 제도로 인해 선출된 권력에 대해 무한대로 부여한 정통성은 한순간에 괴물 내지는 악마로 변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방법만 정상적이고 이후 과정과 결과가 비정상이라면 선거와 투표는 무의미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2차 대전 이후 전범들에 대한 체포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고 그들에 대한 처벌도 이뤄지고 있는 유럽에서, 신나치주의와 인종주의가 젊은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하지만 이 아이러니가 정상적인 선거와 투표로 또다시 나치스와 같은 괴물을 탄생시킬 수 있다는 증거가 된다는 생각에 이르니 끔찍하다.

 

대중문화 평론가인 강헌씨가 진행한 팟캐스트 방송 <전복과 반전의 순간>에서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순간」이라는 책을 읽은 소감을 이야기 하면서 대의민주주의제도의 한계를 지적한 적이 있었다. 요약하자면 이런 것이었다. “선거라는 것을 통해 선출된 자들이 결국 똑같은 자들이다. 뽑아놓은 저놈이 제대로 안 해서 다시 다른 놈을 뽑아도 결국 그들은 움직이고 지배하는 것은 그 위에 있는 다른 자들”이라는 것이었다. 한국의 정치상황과 묘하게 맞물리면서 뇌리를 강하게 때렸다. ‘아 맞다! 결국 한국이라는 사회를 움직이는 이들은 저들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보이지 않는 자들일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이르자 더욱 정치에 대한 혐오가 강해지는 역효과가 나기는 했지만, 선거와 투표 그리고 대의민주주의제도가 가장 이상적이고 훌륭하고 효율적인 방법은 아니라는 것에 강헌씨와 오구마 에이지와 내가 비로소 동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과 내가 같은 반열에…….

 

 

“같은 마르크스주의라 해도 노동정당이 다수의 의석을 차지하여 복지사회를 지향하는 사회민주주의가 아니라, 소수 정예멤버의 전위당을 조직하여 혁명으로 정권을 잡는다는 레닌주의의 영향이 두드러졌다.” (p.282)

 

일본과 한국은 레닌주의의 영향이 두드러졌다. 나는 현재 한국 진보정치의 괴멸의 시작은 레닌주의가 득세한 과거 7,80년대 대학운동권의 선택에 있다고 생각한다. 6.4지방선거에서 통진당 사태를 일으킨 통합민주당과는 다른 정의당과 노동당, 녹색당마저 괴멸한 것은 길지 않은 진보정당의 정치적 실험이 실패했다는 방증이다. 책에서도 언급하는 것처럼 일본에서도 50년대 이후 대학운동권에서는 레닌주의에 입각한 ‘전위당’조직 활동이 운동의 주체가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의 50년대와 한국의 70년대는 ‘전위’가 필요했다. 당시 일본과 한국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의 숫자는 극소수였고, 이들은 자신의 안위와 영달만을 추구하지 않고 대중을 계몽하고 영도해 보다 나은 사회를 이끌어 간다는 소명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교육이 일반화 되고 사회 전체적으로 문맹의 비율이 낮아지면서 자연스레 ‘사회민주주의’형태로 변모해야 했는데, 여전히 ‘앞서서 나가니 따르라’라는 식의 객기만 남게 되었다. 이석기씨가 같은 정당 사람들과 모임을 하면서 전혀 실정에 맞지도 않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대화를 나누며 즐거워 한 것을 보면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전위의식’의 폐해가 심각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이것은 이석기씨와 통진당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전체 좌파조직과 정당에 치명타를 입혔고 앞으로 좌파정당이 원내에 진입할 수 없으리라는 절망을 심어주게 되었다. 이제 아무리 노동당, 녹색당 간판을 들고 나와도 “저런 저..저.. 저 놈들 통진당하고 똑같은 패 아니야! 빨갱이 놈들!”이라고 하면 끝이다. 게임 끝.

 

 

“사회운동에 있어서 문제를 인식하는 방식(frame)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론이 프레이밍(framing)이다. 현상학적인 사고를 통해 말하자면 단지 사회문제에 한정되지 않고, 인간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현실 그 자체’를 인식할 수 없다. 인간은 현실세계의 복잡성을 감축시켜 도식화하여 이해한다. 그러므로 인식의 틀을 바꾸는 것이 운동에서 중요한 경우가 많다고 파악한다.” (p.387)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이 괴멸한 한국 좌파정치의 마지막 희망이 될 것 같아 언급한다. 사회운동에 있어서 문제를 인식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여론조작이나 정치적 선전과 선동으로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한국의 선거 당일 밤 TV에서 지도에 양당색깔을 입혀 표시한 선거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다. 아무리 네거티브가 판을 치고 정치적 상황이 바뀌어도 선거결과 지도는 바뀌지 않는다. 동서의 구별이 확실하다. 그만큼 프레임을 바꾸는 것을 쉽지 않다. 하지만 이 방법밖에 없다면 이것에 올인해야 한다. 다른 방법이 없다. 여론전에서도 밀리고 가지고 있는 돈과 정보와 힘도 없고 대중들에게도 완전히 비호감으로 낙인찍힌 상태다. 그렇다면 물러설 곳도 없는 것이다. 방법도 없고. 지난 지방선거를 앞두고 팟캐스트 방송 중 하나가 <지방선거 데이터 센트럴>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말 그대로 지방선거 후보자들에 대한 데이터를 나열한 방송인데, 경악했다. 일단 제대로 된 공약을 가진 후보자가 거의 없었고, 음주운전쯤은 기본 장착 옵션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허탈했던 것은 새누리당, 새정치연합, 진보당, 녹색당, 정의당, 노동당 후보들의 공약이 거의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공약 같은 것이야 유권자들이 보지 않으니까 대충 해놓고 시장에 가서 인사나 더 하고 악수나 더 하자는 것이었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정치의 이런 구태와 낮은 수준의 선거행태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책에서 언급하는 사례가 도움이 될 듯하다.

 

 

“‘풍요로움보다 자연을 지켜야 한다.’라는 프레이밍만으로는 좀처럼 사람들을 사회운동의 장으로 이끌어낼 수 없다. ‘만들고 안 만들고는 주민투표로 결정해야 한다.’라는 프레이밍을 제시하면, 사람들이 문제를 인식하는 방향을 바꿀 수 있게 된다.”

 

“저 쪽은 나쁜 놈들이야! 저 쪽을 뽑으면 다 망해!” 라는 식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삼척시장에 당선된 김양호 시장은 선거 기간 내내 <핵발전소 전면 백지화>를 내세웠다. 상대편 후보가 <핵발전소 유치>를 내세운 것에 반대되는 것이었다. 김양호 시장이 당선되었다는 것은 삼척시민들의 민심과 민의를 제대로 읽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례는 극히 일부다.

 

 

“독일 녹색당 ‘당신들은 우인가, 좌인가?’ ‘우리는 우도 좌도 아니다. 앞이다!’” (p.388)

 

“우리는 우도 좌도 아니다. 앞이다!”라고 재치 있게 받아칠 만한 녹색당원은 한국 녹색당에는 없는 걸까? “당신 빨갱이요?”라고 하면 화를 내거나 무시하는 정도에 불구하면 대중의 관심은 받을 수 없다. “우리는 앞이다!”라고 말해 논점을 전환하고 전혀 다른 판국으로 사안을 주도할 수 있는 프레임 연구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한국의 진보정치·좌파세력들은 그럼에도 끊임없이 대중과의 소통에 주력해야 한다.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그들만의 프레임을 만들어야 한다. 소수지만 <기본소득>같은 개념은 새로운 것이다. 전혀 한국 사회에서는 적용될 수 없을 것 같지만 끊임없이 이런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어 내야 한다. 이것을 대중에게 호소하고 설득해야 한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일본에서는 거리에서 벌이는 데모가 거의 잊힌 것이나 다름없어 높이 평가받지 못하는 운동수단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 책에서는 오히려 데모의 의의를 강조했습니다.” (p.7)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일본에서는 대규모 데모가 장기간 지속되었다. 월스트리트 아큐파이와 재스민 혁명, 이라크와 우크라이나의 대규모 데모와 시위. 저자는 선거와 투표를 통해 선출된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하지 못할 것이라고 본다. 나도 그렇다. 하지만 데모를 통해 한국 사회가 변화할 수 있을까? 나는 회의적이다. 대의민주주의제도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지난 시간이 아깝거나 다른 묘안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 알제리와 한국의 브라질 월드컵 조별 예선 2차전 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광화문광장에 모인 사람의 숫자가 8만 명이라는 뉴스를 보고 나는 절망했다. 왜냐하면 세월호 시위에 참석한 가장 많은 숫자가 그것에 반도 되지 않는 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뭐, 월드컵 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월드컵 응원은 즐기는 것이고 세월호 시위는 뭔가 불법적이거나 위험한 일, 내지는 잡혀갈지도 모를 일로 생각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사회를 바꾸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도 바꾸어야 한다. 아니 이미 바뀌고 있다. 그 길을 피해갈 수는 없다. 침묵을 지키다가 서서히 침몰하든가, 어느 시점에선가 대파국을 맞이하든가, 명백하게 좋은 방향으로 바꾸려는 노력을 하든가 어느 한 길을 선택해야 한다.” (p.278)

 

저자는 여러 번 울리히 벡의 「리스크 사회」를 언급하면서 사회 어떤 계층이든 원전사고와 같은 국가적 재앙이 닥쳤을 때, 자신의 계층을 이용해 그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냥 관심 끄고 혐오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해도 파국은 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명백하게 좋은 방향”이 무엇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지만 가만히 앉아서 파국을 맞고 싶은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움직여야 하는데, 원전사고를 겪은 일본인들보다 한국인들은 전 사회적 리스크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는 게 아닌가 싶다. 거리로 나가 조금만 인도로 진출하면 집시법 위반으로 경찰서에 끌려가야 하고 한여름이나 한겨울 상관없이 물대포를 맞아야 하는 두려움과 귀찮음을 벗어던지면서까지 데모를 하러 나갈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당신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 당신이 바뀌기 위해서는 당신이 나설 것, 낡아빠진 말 같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말의 의미가 새롭게 재활용되어야 할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p.428)

 

책에서 아쉬웠던 것은 용두사미다. 결론이 애매모호하다. 저자 스스로도 “낡아빠진 말 같지만”이라고 언급했듯이,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이제 당신 스스로 나서라. 거리로 나가라.” 이게 얼마나 한국 사람들에게 먹혀들지 모르겠다. 「88만원 세대」와 「분노하라」를 읽고 몇 사람이나 짱돌을 들고 거리로 나갔는지 모르겠다.

책이 용두사미이다 보니 리뷰도 용두사미다. 이건 핑계다.

 

l****h 2014.07.02. 신고 공감 1 댓글 1
리뷰 총점 종이책
데모할 수 있는 사회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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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의 안타까움을 겪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한국사회에 분노했다. 정부의 무능력함 때문에 더욱 용서할 수 없는 감정이 들끓고 있다. 수많은 생명을 담보로 할 정도로 우리 사회 안전망이 이렇게까지 허술했는지,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정부의 구조 능력이 이 정도로 비민주적이었는지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울리히 벡은『위험사회』에서 사회가 발전할수록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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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의 안타까움을 겪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한국사회에 분노했다. 정부의 무능력함 때문에 더욱 용서할 수 없는 감정이 들끓고 있다. 수많은 생명을 담보로 할 정도로 우리 사회 안전망이 이렇게까지 허술했는지,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정부의 구조 능력이 이 정도로 비민주적이었는지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울리히 벡은『위험사회』에서 사회가 발전할수록 위험이 발생하는 것도 그만큼 많아진다고 경고했다. 그리고는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정부의 능력마저 비민주적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위험은 누구에게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평등하게 일어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위험에 따른 사고를 어느 개인만의 불행 탓으로 돌릴 수 없다. 무엇보다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질병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사회적 질병을 정부가 비민주적인방법으로 치료한다고 하면 우리는 더 이상 정부를 믿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이게 참 아이러니하다. 우리가 투표로 선택한 정부는 국민의 행복을 위해 정성을 다해야 한다. 하지만 정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고 있으면 우리의 뜻과는 다르다는 것에 실망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정부의 주인(主人)이라고 의심하지 않았던 것은 너무나 순진하거나 바보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심을 가지고 오구마 에이지의『사회를 바꾸려면』을 읽었다. 저자는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행동하라!고 소리 지른다. 그것도 모자라 길거리에서 사람들과 함께 행진한다. 행동하라!는 말을 오래도록 들어왔기 때문에 전혀 낯설지 않았다. 쉽게 말하면 데모 혹은 시위하는 행동으로 우리의 생존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 같은 인재(人災)가 날 때마다 정부는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면서도 조용히 있으라는 완고한 주장만 되풀이 해왔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런 말을 듣고 입 다물고 있기가 어렵다.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내보내면서 묵묵히 참고 사는 데도 인내심이 바닥을 훤히 드러낼 정도로 불편하다.

 

우리가 사회를 바꾸려는 목적은 간단하다. 지금 보다 더 좋은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바람이다. 그러면 저자의 주장대로 사회를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오늘날 대의민주주의 시대라고 하더라도 ‘민주주의의 위기’는 간과할 수 없다. 투표를 통해 우리의 대표를 뽑았으나 우리의 희망이란 그 한 순간에 불과해졌다. 루소가 지적한 것처럼 투표가 끝나고 나면 노예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데모를 하면 사회가 바뀌게 되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데모의 부정적 이미지가 부각되다보니 대중의 참여마저도 회의적이다. 투표도 안 되고 데모도 안 되었을 때 제3의 선택, 즉 무관심하면 그만이지 싶다.

 

이런 상황에서 저자가 민주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행동하라!를 실천전략의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여기서 말한 행동은 투표보다는 데모인데 데모크라시(democracy)의 데모를 풀이하면 ‘피플즈 파워’(people' power)이다. 저자가 민주주의의 역사를 분석하고 유용성을 재검토하는 것은 정치적 구호내지 행동만을 요구하는 사회현실에서는 데모의 성격이 결여되었다는 반증이다. 대중의 참여 없이는 사회를 바꾸기가 어렵다는 것을 누구나 공감한다. 하지만 데모의 성격이 ‘관계론’이 아닌 ‘개체론’이라고 한다면 사회를 바꿀 수 없다. 개체론에 따르면 나와 너는 대립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관계론에 따르면 나와 너는 서로가 만들고 만들어진다. 즉, ‘인간은 개체가 아니라, 행위와 관계와 역할의 연결체’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정치가와 관료는 악마가 아니며 그렇다고 신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데모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분명 상대방이든 자신이든 저마다 한계가 있다. 그래서 서로 간에 상대방을 이해하며 대화하면서 공동으로 만들어나간다는 자세가 중요하다. 데모라는 운동에서도 이와 같은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우리는 개별적인 차이를 넘어 더욱 더 관계지향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만 데모에 참가하는 사람에게 힘이 생기며 활기가 뿜어져 나와 ‘나’를 넘어선 ‘우리’가 만들어지게 된다.

 

단순히 정부를 압박을 가하는 수단으로 데모를 벌이는 것은 생생하지도 않고 호소력도 없는 불행한 의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 보다는 사회 전반의 체질을 바꿔나가는 데 힘을 보태야 한다. 그래서 일까? 우리 또한 어느 순간 “데모를 해서 무엇이 바뀌는가?”라는 질문에 “데모할 수 있는 사회를”, “대화를 해서 무엇이 달라지는가?”라는 질문에 “대화할 수 있는 사회를”, “참가한다고 무엇이 달라지는가?”라는 질문에 “참가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를 바꾸려는 저자의 새로운 가능성과 행동을 보면서 과연 우리 사회가 바뀔 수 있는지?를 예측해볼 수 있는 것도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



p******0 2014.06.01.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사회를 바꾸려면 - 오구마 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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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은 ‘사회를 바꾸려면’이지만, 그 안에 생략된 말이 있다. ‘좋게’이다. 사회를 나쁘게 바꾸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 모든 정치인과 교육자, 성직자, 부모, 노동자, 심지어 자본가도 사회를 좋게 바꾸고 싶어한다. 그런데, 누구나 사회를 좋게 바꾸기를 바라지만 아무도 사회가 좋게 바뀌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 집권하는 것이 ‘사회를 바꾸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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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은 사회를 바꾸려면이지만, 그 안에 생략된 말이 있다. ‘좋게이다. 사회를 나쁘게 바꾸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 모든 정치인과 교육자, 성직자, 부모, 노동자, 심지어 자본가도 사회를 좋게 바꾸고 싶어한다. 그런데, 누구나 사회를 좋게 바꾸기를 바라지만 아무도 사회가 좋게 바뀌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 집권하는 것이 사회를 바꾸는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규제를 다 풀어서 기업하기 좋은 환경이 되는 것이 사회를 바꾸는방안 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복지를 늘려야 한다는 사람, 능력 있는 사람이 더 많이 가지는 것, 능력이 없더라도 최소 생계는 유지되는 것이 사회를 좋게 바꾸는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보면 사회를 바꾼다라는 것이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우리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거꾸로 말하면 현대에는 우리가 조각조각 흩어진 채 소우주처럼 난립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바꾸면 사회가 바뀐다고 여길 만한 것을 찾기가 대단히 어렵다.

 

저자는 방대한 양에 걸쳐서 민주주의를 설명하고, 일본에서 사회를 바꾸기 위해 일어났던 운동의 역사에 대해서 서술한다. 남의 나라 이야기라서 조금 지루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저자가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 제안하는 방법은 자못 귀 기울일 만하다. 바로 대화와 참여를 통해 공통의 가치를 찾아나가는 것이다. 2천년도 더 이전에 소크라테스가 진리를 찾아나갔던 그 변증법적 과정이라고나 할까?

 

데모를 해서 무엇이 바뀌는가? 라는 질문에 데모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라고 대답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지극한 말이 아닐 수 없다. “대화를 해서 무엇이 달라지는가?”라고 하면, 대화를 할 수 있는 사회, 대화가 가능한 관계를 만들 수 있다. “참가한다고 무엇이 달라지는가라고 한다면, 참가할 수 있는 사회, 참가할 수 있는 자신이 탄생한다.

 

직접민주주의가 불가능한 현대사회지만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어울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한국의 대통령은 투표를 통해 당선되었지만 2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인 지금 30%도 안 되는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 담배세 인상과 근로소득세 증가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들고 있고, 투표를 통해 당선된 국회의원들의 입법활동에 찬성하고 지지하는 국민들은 여전히 언제나 소수 일부이다. 왜 그럴까?

 

그렇다면 역시 중요한 것은 토론이 활성화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참가하고 있다는 기분이 고조되며, ‘모두가 어우러져 결정했다라는 마음이 들게 된다.

 

인간은 소외되고 있다는 감정을 가장 싫어한다. 반대로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은 그 사람을 고양시킨다. 게다가 자신이 영향을 받는 정책과 의사결정이라면 충분히 논의되고 토론되어서 모든 문제가 다루어졌다는 느낌을 받을 때 비로소 자신에게 유익하지 않은 정책이라도 동의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정부가 하는 일의 방식은 정 반대가 아닌가.

 

아주 먼 과거에는 좋은 세상을 만들려면 철인이 필요하다고 했다. 덕이 있는 왕이 다스리면 사회는 잘 굴러가고 모든 구성원은 적어도 불행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주 멀지 않은 과거에도 사회는 일부의 엘리트 층이나 많이 배운 지식층이 바꾸는 거라고 생각했다. 의식 있는 몇몇이 나서서 대중을 계몽하고 이끄는 방식으로 세상이 바뀌는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해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안다. 정치인이 시민을 대변하고 올바른 의사결정을 할거라고 응답한 일본국민의 비율이 3%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면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일반 시민을 소외시키고 민주적이지 않은 시스템인지 잘 말해준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공론의 장으로 나와야 세상은 바뀐다. 민주적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그런 것 아닐까?

 

부당한 것에는 항의해야 한다는 체험을 이미 해봤고, 막상 해보면 재미있고,그렇게 어렵지도 않다. 바로 그런 습관을 몸에 익힌 사람들이 그만큼 늘어나면 사회는 바뀌게 마련이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노동은 살기 위한 수단이다. , 먹거나 쓰거나 하면 사라져버리는 것들을 만드는 행위이므로, 아무리 반복해도 무상과 허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에 비해 활동은 그 자체가 목적인 행위, ‘작업은 목적으로 이어지는 행위인데, 현대는 그 두 가지를 잃어버리고 오로지 노동만이 지배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 자체가 목적인 즐거운 일을 하고 있을 때, 인간은 돈이라든가 결과를 그다지 생각하지 않는다. 그 자체가 허무인 행위를 하고 있을 때, 인간은 돈과 결과를 원하게 된다.

 돈을 받고 관계하는 데 익숙해지면 모든 관계를 그 자체로는 즐길 수 없는 것, 즉 돈이라도 받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노동으로 간주하게끔 감각이 뒤바뀌어버리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언가 자기를 넘어서는 것과 접속하고 있지 않으면 살기가 괴롭다고 여김을 알 수 있다.

 

c****s 2015.02.21.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