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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일본이 우리보다 10년가량 앞서 있다고들 말하곤 한다. 일본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사회현상을 마치 답습하듯 우리가 그대로 쫓고 있음을 깨달을 때마다 난 기분이 묘하다. 전 세계를 술렁이게 만든 경기침체 역시 일본이 앞서 체감했다. ‘잃어버린 10년’이라는 표현이 버젓이 유통될 정도였다. 모든 화두가 ‘경제’로 국한됐고, 경제를 살리겠다는 정치인들은 진실성 여부를 떠나 어김없이 표를 얻었다. 하지만 나아질 기미는 전혀 보이질 않고 있다. 오히려 안정적인 무언가는 빠르게 사라지고 있고, 부를 타고 나지 못한 사람들의 삶은 더욱 힘겨워질 따름이다. 상황의 영향이 클 것이다. 젊은이들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있다고 꾸짖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나름의 이성적인 판단 하에 행동을 한다. 일본인들이 보여준 무기력함 역시 그 상황에서 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어차피 어떠한 행동을 해도 벗어날 수 없으므로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기로 한 셈이다. 바라는 게 많으면 이루지 못하는 것도 많지만, 애당초 어떤 것도 열망하지 않으면 상처 입을 가능성도 없다. ‘초식남’이라고 불리는 부류가 그렇게 탄생했다. 학업, 일, 심지어 인간관계조차도 놓아버린 그들은 마치 ‘될 대로 되라지’ 체념이라도 한 것 마냥 어떠한 욕망도 드러내질 않는다. 꽤 괜찮은 기회가 주어져도 굳이 잡으려 들지 않는다. 일단 이미 안정화된 무욕망의 틀을 깨고 나와야 하는 위험부담이 문제다. 기회가 실패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행동을 주저케 하는 요인으로 작동한다. 어찌 되었건 삶은 굴러가고 있다. 굳이 무리해가며 욕망할 필요는 없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타이른다. 속으로는 끊임없이 직업을 가진 이들을 부러워하더라도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그런 식이다. 대신 나의 욕망이 들어차야 할 공간에는 타인의 욕망이 대신 들어가 있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을 묻는 대신 세상이 원하는 것을 묵묵히 따르기 때문이다. 자신은 아무런 보람도 느끼지 못하지만 모두가 부러워하니까, 남들이 추구하니까 나도 행해야만 될 거 같은 강박관념에 시달린 나머지 무엇이 내 욕망인지 정의조차 내리지 못한 채 그저 따른다. 저자들은 이러한 젊은이들의 모습을 ‘정어리’에 빗대었다. 사회 단위로 봤을 때도 정어리와 닮은꼴을 하고 있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어차피 전통적인 기제는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 붕괴한 시스템을 예전 모습 그대로 복원하는 일 역시 요원해 보인다면 이제껏 존재한 바 없는 색다른 무언가를 도입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성과주의가 자본주의의 파이를 키우는데 적격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평해왔다. 그러나 성과라 하는 것의 측정 자체가 객관적인지에는 많은 의문이 따르며, 나의 성과나 너의 성과보다 좋거나 나쁜 이유를 설명함에 있어서도 불신이 끊이질 않는다. 이토록 불안정한 체계라면 과감히 버리는 게 현명하다. 돈을 보다 많이 벌기 위해 일에 힘써 매달리고, 인정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며 전전긍긍하느니 차라리 굳이 인정을 받을 필요는 없는 환경을 형성해보는 게 낫다. 일을 하고 돈을 받는 게 아니라 일을 하는 사람들이 돈을 내는 식이 바로 그것다. 조금은 이상한 발상처럼 보이지만 돈까지 낸 이상 주인의식을 갖고 더 일에 매진할 수도 있다. 일종의 역발상이다. 저자들이 강조한 또 다른 한 가지는 증여다. 여기서의 증여는 경제적인 개념만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이득이 되는 무언가를 먼저 행하는, 즉 선행에 가까워 보인다. 조금의 손해도 감수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지배적인 환경에서 타인을 위해 무언가를 행한다는 건 다분히 비효율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증여야말로 돈을 뛰어넘어,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는 지니고 있을 사랑을 보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이왕이면 연장자가 행하는 게 좋다. 일종의 내리 사랑 방식으로, 받은 사랑을 다음 세대에 전해간다면 인류는 절망의 시대에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 결국 정답은 공동체였다. 오늘날 절망이 크게 느껴지는 것도 내가 이 세상에 홀로 놓여 있다는 자괴감에 압도당했기 때문이다. 비록 상황은 좋지 않으나 나와 같은 문제를 경험하고 있는 이들이 주변에 많으며, 오로지 내 문제만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함께 보다 나은 무언가를 꿈꾸어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면 더딜지라도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