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책은 유행이 지난 다음에 읽는다.'고 말한 이가 벤야민이었던가. 이 책에 관한 그 수많던 논쟁들이 이 책의 '유행'에 대한 반증인건지 아닌지 나야 알길은 없다만, 책 내용보다는 외려 저자 중 한명이었던 임지현씨에 대한 강준만씨의 실명비판, 문부식씨와 중앙일보가 함께했던 기획기사 등등으로 그것이 국지적이건 아니건 결과적으로 당대(라고 해봐야 불과몇년전이지만)의 굉장한 '문제작'이 되었음을 부인할 이는 없으리라 생각된다. 나의 대학'생활' 몇년동안 그 영향력의 '범위'라는 측면에서 특별히 언급할만한 책을 두권쯤 꼽으라면 아마 손석춘씨의 '신문읽기의 혁명'과 바로 본서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만큼 이 책은 그만큼이나 양으로건 음으로건(?) 많은 독자들에게 복잡다기한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그 영향력은 심지어 이 책을 읽지 않았던 나에게까지 와 닿았었으니깐. 시간이 흘러 '이젠 유행이 지났다'라고 하기엔 이 책에서 제시한 문제의식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어쨌건 과거처럼 이 책과 그 저자들-대표적으로 임지현씨-에 대해 어느쪽이건 다들 흥분해서 이야기하게되는 시기가 지난 이 때 나는 비로소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책을 읽자마자 들었던 첫번째 생각은, '이 책은 정파적으로 잘못 이용되어왔다'는 것. '한국자유주의의 기원'(책세상)에서 저자인 이나미씨는 새는 진보와 보수가 아닌 '진보'의 날개와 '성찰'이라는 날개로 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 책은 '성찰'이라는 측면에 주목해서 그간 우리 사회 소위 진보세력이 사유하지 못해온것들. 즉, 과거의, 소위 '적들(?)의' 악습이었음에도 똑같이 답습해 온것에 대해 진지하게 화두를 던지고 있다. 국가중심주의와 가부장주의(물론 이 양자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가볍게 여겼던 수많은 부분들-일상, 군대, 무의식등등-에서 이어져 온 수많은 파시즘의 잔재 등등을 꼬집고 있는 이 책은 저자들의 의도대로 읽혔더라면 조금더 생산적으로 읽혔을 것이고 더 나은, 발전적인 이야기들이 이어질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 책이 이땅의 소위 '극우세력'에게 이용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 이 책을 '온전히' 잘 읽고 이용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고(그들이 이 책을 읽었다면 절대 이 책과 '우리안의 파시즘'담론을 자신에 유리하게 해석하진 못했을 것이다. 책은 곳곳에서 우리를 '성찰'하면서도 그들에 대한 비판의 끈을 놓고있지 않으니깐), 결국 '우리안의 파시즘'담론만을 이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문제는 이 책이 '파시즘'의 개념규정을 확실히 해놓지 않은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떠한 사회, 경제, 정치적 조건속에서 극우파의 이데올로기로 발전한 파시즘은 오늘날 여러 분야에서 혼용하여 쓰이기도 하며, 정파적인 언술로 이용될 경우 상대파에 대한 치명적인 공격방법으로 이용되기도 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바이다. 저자들이 파시즘이란 단어의 이러한 광범위한 사회적인 쓰임새를 알지 못했을리는 없고, 그렇기에 저자들은 우선 파시즘의 개념규정부터 명확하게 하고 넘어갔어야 했지만, 책에선 그렇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결국 온갖 곳에 '파시즘'이라는 단어가 마치 '빨갱이'란 단어 쓰이듯 불분명한 기준속에 여기저기 딱지가 붙혀지기 시작했고, 이러한 행위들은 결국 '빨갱이'의 창조자인 극우세력에게 좋은 도구를 제공한 셈이 되고 말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때문에 그들의 '미시적 폭력'의 담론은 그 결과적 현상뿐만 아닌 거시적 책임의 부문에서 마저 그 책임을 '민중'혹은 '진보세력'에게 거의 대부분을 전가하는 꼴이 되고 말았고 그 결과는 극우세력의 환호로 이어지고 만 것은 아니었을까? 때문에 개인적으론-공동작업의 한계일수도 있었겠지만-'우리안의 파시즘'같은 센세이셔널한(?)제목을 달기 위해선 우선 그에 대한 개념규정부터 명확하게 하고 넘어가는 것이 우선 아니었을까에 대한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어쨌건 확실한건, 이제 그 누구도 '우리안의 파시즘'론에 대해 흥분하며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차분한 마음으로 저자들의 '불편한'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읽을 수 있는 시기라는 이야기다. 민족과잉담론, 국가중심주의, 승리지상주의 그리고 어찌보면 이 책을 하나로 관통하는 중심 토픽이라 볼수있을 가부장주의 등의 담론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고 현실적인 문제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책-물론 그 수준과 만족도면에서 글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는 있다만-은 독자들에게 그 화두들에 대한 좋은 입문서가 되리라고 확신한다. |
| 재작년인가 작년인가, 당대비평을 통해서 우리 안의 파시즘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리고 제법 큰 파장까지 불러 일으켰다. 바로 그 문제를 제기한 임지현씨가 쓴 책이 바로 이 『우리 안의 파시즘』이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우리 안의 파시즘이 무엇인가. 이 개념은 과거에 '독재'라는 것에 저항했던, 운동세력들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눈에 보이는 구조로서, 혹은 실체로서의 독재(파시즘)는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운동의 목표 역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디로? 그 전에 그렇다면 어떻게 바뀌었는가? 임지현씨는 과거의 파시즘 구조가 미시파시즘의 형태로 녹아나 있다고 진단한다. 즉, 거대한 구조로서 파시즘은 사라졌지만, 그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온 개인들의 습성, 행동, 사고 속에 파시즘의 구조가 고스란히 존재하며 사회구성원들 스스로가 타인을 억압하고 감시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 예로 든 것이 '반공'교육을 받은 사회구성원들이 스스로 "빨갱이 사냥"에 동조를 하고, 나아가 그것을 스스로 일삼게 된다는 것(낸 몸 속의 반공주의 회로와 권력)과 진보진영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을 일삼는다는 것(진보. 권위 그리고 성 차별), 노동운동진영에서 조차 외국인 노동자는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2중, 3중의 차별을 받는 다는 것(한국의 '제3국인'. 외국인 노동자) 등이 있다.(이 책은 바로 이러한 챕터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이 책의 장점은 우선 필자진이 훌륭하다는 것이다. 이 책의 주저자인 임지현씨를 비롯해 이제는 꽤나 이름이 알려진, 박노자씨를 비롯해, 당대비평에 글을 기고하는 문부식, 권혁범 등 각 분야에서 말하자면 '알아주는' 필자들이 모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쓴 글 역시 결코 어렵거나 난해하지 않고, 일상생활의 영역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내용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내용이다. 진보를 생각하고 산다면, 자신이 운동을 한다고 한다면, 운동진영 자체가 하나의 구조가 되어 답답하게 느껴보았을터이고, 그런 사람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굳이 운동에 관여하는(직접적으로 참여하든 방관하든 말이다) 이가 아니더라도 사회과학이라는 것을 처음 구경(?)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역시 훌륭한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한국사회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고, 그 원인을 꼬집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앞에 적었듯이 쉽지 않은가! 그러나 이러한 장점 외에도 그 이면에 좋지 않은 점 역시 있을터. 그것은 바로 임지현씨가 당대비평에 글을 기고 했을 때, 일어났던 파장을 생각해보면 좋을 것이다. 그에 대한 비판 중 하나가 바로, 민중을 가해자로 만든다는 것이다.(민중이라는 개념이 애매모호하지만, 일단 이 단어를 쓰기로 하겠다.) 물론 민중이 스스로 억압하고, 타자를 배척하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며, 그렇게 된다면 지식인들은 당연히 그에 대해 비판을 가해야 한다. 그러나 임지현씨가 접근했던 방법은 그 이전에 구조의 억압을 무시하고, 민중에게 그 책임을 전가한다는 데 있다. 물론 임지현씨는 이를 부인하겠지만, 솔직히 그의 글을 읽다보면 지나치게 우리 안의 파시즘에 집착하여 과거 역사적으로 왜곡된 한국사회의 구조가 쌓아온 결과물을 무시하고, 백지상태에서 현재 민중 스스로가 우리 안의 파시즘을 행사하고 있다고 역설한다. 그렇다면 과거 억압구조의 결과까지 민중에게 돌리는 꼴이 아닌가. 그리고 "우리 안의 파시즘"의 개념 자체 역시 문제 삼을 수 있다. 임지현씨가 우리 안의 파시즘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던 사회의 현상들은 대부분 전근대의 산물(가부장성)이나 민족주의(외국인 노동자 문제), 군사주의의 잔재 등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모순들을 민중의 자발적 억압·규제 매커니즘으로 해석하는 것은 섣부르고 주관적일 수 있다. 미셸 푸코 역시 구조를 과거와 달리 자발적 감시·억압 매커니즘으로 파악하고, 원형감시체계로 묘사했지만, 그의 논리는 치밀하게 역사적 맥락을 따져가면서 전개되어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푸코의 논리 역시 임지현씨와 비슷한 비판을 받는다.) 이러한 단점이외에 가장 크다고 볼 수 있으면서, 가장 현실적인 문제점은 임지현씨의 논의가 본의든 본의아니든 사회운동 혹은 시민운동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떤 억압에 대해 반대하는 논의를 전개한다면 우리 안의 파시즘이라고 그 저항세력을 비판한다면 꼼짝없이 걸려들 수 밖에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 단적인 예로 안티조선운동에 대해 당대비평에서 우리 안의 파시즘이라는 개념을 사용해서 비판했던 것을 상기해보라. 그리고 아직까지 전선이 복잡하고 다변화되었다 뿐이지 싸워야 할 파시즘은 아직 담아있지 않을까... 결론 내리자면, 임지현씨의 논의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의미심장하고 곱씹어볼 필요성은 충분히 있다. 그러나 그의 논의가 진보허무주의나 진보를 추구하는데에 있어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아무튼 적어도 한 번은 읽어보자! PS. 이 책의 이중성에 대해서는 바로 이 윗부분의 미디어 비평란을 읽어보자. 우리 몸 속에 있는 반공규율을 꼬집은 책이지만, 이 책에서 비판받아야 할 대상 1호인 극우 신문들은 오히려 쌍수를 들어 고마워 한다. 왜? 임지현씨는 진보세력 내부까지 비판의 범위를 넓혔기 때문이다. |
|
파시즘(fascism)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1차 세계 대전 후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조직한 파시스트당을 중심으로 형성된 정치적 이념, 20세기에 등장한 독재, 전체주의 체제나 운동을 총칭함"으로 정의한다. 전체주의나 독재의 특징은 정치경제와 사회문화적으로 '획일성'과 '일체성'을 강조하고 구현하는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즉 존재의 다름이나 생각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체제와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파시즘은 경제체제와는 관련이 없다. 자본주의도 파시즘으로 구현할 수 있고 사회주의도 파시즘으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파시즘의 반대는 민주주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파시즘은 20세기 내내 지구 상에 수 없이 등장했다. 이탈리아나 독일(히틀러) 뿐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도 천황제를 덧씌운 파시즘이었고 2차 세계대전 후 구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도 파시즘 체제였다. 그리고 스페인의 프랑코, 중동의 왕국, 아프리카와 남미의 쿠테타 국가, 북한의 김일성 체제와 남한의 박정희, 전두환 체제도 파시즘이었다. 메카시즘이 불던 1950년대 당시의 미국도 파시즘 체제였다고 할 수 있고...
이 책은 지난 20세기 전세계에 불어닥쳤던 '물리적, 폭력적 파시즘'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실제 우리나라의 경우도 폭력적, 물리적 파시즘은 외형상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헌법과 제도가 파시즘을 제어하는 (불안정하기는 하지만)기능을 유지하고 있고 형식적, 절차적, 제도적 민주주의는 갖추어져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저자들은 '파시즘'을 체제나 운동, 이념에 국한하지 않고 문화와 이데올로기까지 확장하려는 것이고 '파시즘'이 가능한 일종의 하부구조를 분석해 내려는 것이다. 과거 독일이나 이탈리아, 북한이나 남한을 생각해 보면, 파시즘 체제는 모든 것을 무력으로만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독일, 이탈리아에서도 수백 만명이 나치즘과 파시즘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였고 한반도 남북의 민중들도 마찬가지였다. 파시즘이 무서운 것은 그 폭력적인 내용이 상층에서 외형적으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아래의 피지배 계층에서도 다양하게 의식, 무의식 속에 뿌리내리게 되는 현상이다. 파시즘이 개인 속에, 가족 속에, 각종 집단 속에, 문화 속에 자리잡으면 그 자체로 '살아 숨쉬는 바이러스처럼' 우리를 지속적으로 내면화되고 규정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한국의 경우에도 봉건왕조에서부터 20세기 후반 군사독재체제까지 수백, 수천 년간 이어져온 파시즘 체제가 지배층 뿐 아니라 피지배층의 머리와 몸 속의 유전자 속에 박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민중들이 파시즘 체제에서 살아온 것은 굴복하고 체념하는 양태가 크지만 자발적으로 동의하고 편승하는 모습도 적지 않게 파시즘 체제가 유지되는 구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지배층이나 소위 수구우익집단들 뿐 아니라 이에 대한 대안세력이라 할 수 있는 운동권이나 좌파세력들 중 많은 이들이 역시 '자신만이 절대적 정의를 독점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이러저러한 딱지를 붙임으로써 자신의 헤게모니를 확보하려는 권력지향적 말과 글쓰기가 여전히 지배적이며, 좌파들의 논쟁 또한 권력지향적 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심지어 공공적 논의를 아예 사유화하려는 조짐까지 엿보인다(p.10)" 2000년 임지현씨의 이런 지적이 무려 12년이나 지난 2012년 5월에도 나타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한국의 파시즘은 안보와 국익과 효율과 편리와 시간을 내세운 획일화와 단순화와 전체주의를 의미한다. 주사파니 당권파니 반민주주의니 종북세력이니 하는 것은 이름만 바뀐 것 뿐이지 않을까? 구체적인 사실이나 근거, 사람과 행위를 명시하는 것이 아니라 '00빠'니 '00주의'나 '00파'를 제시하는 것은 편리와 효율을 가장한 집단적인 낙인찍기에 불과하다는 것이 틀린 말인가?
물론 저자가 지적하는 현상이 12년 후에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니다. 2000년 이후 활성화된 인터넷 사이버 공간에서도 계속되어 왔다. 사이머 공간의 의사소통 역시 쌍방향적 민주적 의사소통의 방식보다는 언어와 논리의 폭력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현실 정치공간의 논리를 그대로 재현해왔다. 즉 파시즘적 현상을 비판하는 논리 자체가 파시즘의 인식 지평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런 모습과 현실을 '우리 안의 파시즘'으로 규정한다. 임지현을 비롯한 권혁버! 김기중, 박노자, 김은실, 권인숙, 김근, 김진호, 전진삼, 문부식은 사회 구조 속에 도사리고 있는 반공주의 회로와 권력을, 전체저의적 법 질서의 토대로서 주민등록제도를, 인간성을 파괴하는 한국의 '군사주의'를, 한국 근대화 프로젝트의 문화 논리와 가부장성을,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우리들의 언어 안의 파시즘을, 한국 교회의 승리주의 파시즘을, 파시즘의 증식로로서 한국 건축을 통해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파시즘을 진단한다.
임지현은 일상적 파시즘의 재상산구조이 학교교육이 있다고 분석한다. 학교교육은 지배 권력의 요구에 따라 권력의 사회문화적 통제 원리를 담고 있을 뿐아니라 교실 내의 일상적 생활 속애서 은영중에 특정한 사회적 규범을 배우도록 한다. 그 규범을 거부하는 학생들은 문제어, 지진으의 아름으로 타자화된다. 그는 체벌 금지를 전후해 나타난 '왕따' 현상을, '명령적 복종 단계를 벗어나 근대화돤 규율 권력이 학생들에게 강제하는 자발적 복종의 극단적 결과'라고 주장한다. 전교조에 대한 역대 정권의 과잉 반응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한다. 1997년 서울대학교가 학생들의 요구에 따라 타교생이나 졸엄생들의 도서관 출입을 막기위해 학생생증 바코드를 만들었던 것도 공공성 대산 생산성이 대학과 대학생을 지배하고 있는 특권의식일 것이다.
또한 그는 가족이기주의와 가부장주의, 부계 혈통주의, 민족지상주의는 서로 아어지면서 획일을 강요하는 강압적 동질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개인의 권리는 민족과 국가의 이르으로 무시되고 민족은 같은 혈통이라는 보호막 아래 추상적인 일반의지를 표명하는 획일적 실재로 파악된다. 국가와 개인의 관계는 혼연일체의 민족이라는 신비적 모델로 대변되며, 그것은 독재권력을 정당화한다."
민주진보세력의 끝없는 내분과 분열상, 가족과 조직 내의 불협화음은 외부 이데올로기의 공세 뿐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생과 태도에서 비롯된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끝없는 성찰과 혁신'은 말이나 글이 아니라 결과로 드러나야 할 것이다. 나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꼭 일을 것을 권한다...
* 인상 깊은 문장 : "파시즘의 유산은 우리 안에 넓고 깊숙이 잔존해 있다. 권력자만이 아니라 그에 저항하는 자들까지도 매료시키고 사로잡는 권력의 위력. 모든 것을 가격으로 환산해야 직성이 풀리는 물신주의. 살아 남기 위한 나날의 각박한 생존 경쟁. 승리자가 되지 않고는 삶을 영위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초조함과, 승리하면 모든 것을 짓밟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권위주의. 이 모든 것 속에 파시즘은 오늘도 살아 있다.(p.255)" "이제 문제는 신체에 직접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저개발된 권력으로서의 군부 파시즘이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그것은 더 이상 재발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 또 재발한다 해도 새삼 그 폐해를 지적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투명할 정도로 가시적이며, 따라서 타격지점도 명백하다. 문제는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굴종하게 만들어 일상 생활의 미세한 국면에까지 지배권을 행사하는 보이지 않는 규율, 교묘하게 일상과 정신을 조작하는 고도화되고 숨겨진 권력 장치로서의 파시즘이다. 나는 그것을 '일상적 파시즘'이라 부르겠다. 일상적 파시즘은 전체주의 체제로서의 나치즘이나 이탈리아의 파시즘과는 존재 양식을 달리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체제의 배후에서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 전통이라는 이름의 문화적 타성들, 설명하기 힘든 본능과 충돌들 속에서 천연덕스럽게 자리잡고 있다. 말 그대로 '보이지 않는 테러'인 것이다. 일상적 파시즘은 그러므로 잡식성이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민주정이든 전제정이든 무엇과도 손쉽게 짝을 이룬다. 그것은 남과 북의 동질성을 확보해주는 연결고리이다. 일상적 파시즘은 한반도의 속살이다."(p.30) "후쿠야마의 비유이 의하면, 한국 사회는 말 안장 형의 사회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비대한 국가 기구와 혈연정 배타성에 사람들의 의식을 묶어두는 가족이 각각 큰 비중으로 사회의 위와 아래를 장악하는, 그렇기 때문에 중간 허리에 해당하는 시민 사회가 발전하지 못한 사회라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국가 기구와 가족은 각각 위와 아래로 분절되어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맞닿아 있다. 연고주의가 최소한의 관료적 합리성마저 밀어 내고 국가 기구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원칙이기 때문이다. 군부독재가 무너지고 민간 저우가 들어서면서, '소통령'이라는 독특한 용어가 나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수 년 전에 폴란드의 한 외교관이 내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왜 한국의 신문들은 선거 관련 보도를 하면서, 각 당의 정강 정책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허구한 날 몇몇 보스들의 이름만 거론하고 사람들의 계보만 그리냐고. 중앙의 정치가 그러하다면, 지방 정치에서는 종친회, 동문회, 향후회의 등장이 라장 중요한 예측 지표가 된다. 전통의 위력 앞에서 이러한 현상에 대한 비판은 곧 힘을 잃는다.이러한 현상은 기본적으로 사상 운동이나 시민 사회 운동을 억압해 왔던 한반도의 20세기가 낳은 기형아이다. 아념적 지향이나 공적 이해를 중심으로 모이는 것이 기본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에, 모든 집단 행위는 가문이나 동창회 또는 향후회의 형식을 빌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과도하게 성장한 국가의 권력 기구가 위로부터 파시즘을 강제하는 정치적 기제라면, 확대된 가족주의 혹은 연고주의는 밑으로부터 파시즘을 담보하는 견고한 문화적 기제이다. 가족이나 지역의 특수 이해를 넘어서 공적 이해를 추구하는 시민 운동의 부재는 결국 국가 권력에게 공공적 이해에 대한 해석의 독점권을 부여했다. '충'의 덕목을 강조하는 국가 권력은 조국과 민족의 이름으로 자신의 특수한 이해를 보편적 이해라고 강변했다.
국가 권력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세력 또한 조국과 민족이라는 코드를 공유암으로써, 국가 권력의 정통성을 문제삼았을 뿐 국가 권력이라는 존재 자체가 정당한가 하는 물음은 제기하지 못했다. 조국과 민족이라는 추상의 헤게모니를 둘러 싼 국가 권력과 저항 운동의 투쟁 속에서, 구체적인 인간들의 삶은 관심의 뒷전으로 물러났고 규율 권력은 조용히 일상 생활 속에 침투했다. 그리고 끝내는 저항 운동 자체가 권력의 코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성사의 관점에서 볼 때, 한국 사회의 이 같은 특징은 '근대'를 보는 독특한 시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다양한 입장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동도서기(東道西器)'론으로 압축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박정희의 '한국적 민주주의'가 자본주의 동도서기론이라면, 김일성의 주체사상은 사회주의 동도서기론이다. 양자의 공통점음 기술로서의 근대는 수용하지만, 해방으로서의 근대는 부정한다는 것이다.
한국적 민주주의가 프랑스 대혁명의 성과들을 서구적인 것이라고 건너뛰었다면, 주체사상은 노동해방의 의미를 민족해방이라는 이름으로 거부했다. 한국적 민주주의와 주체사상은 결국 조국과 민족의 이름으로 민중을 억압하고 동원하는 동원 이데올로기라는 특징을 공유했다. 동원 체제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서는 민중의 자발적인 호응을 필요로 하였는데, 해방의 논리보다는 전통의 논리가 그러한 필요를 만족시켰다. 남과 북이 공히 학교 교육에서 '충'과 '효'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강조한 것 등이 그러한 예이다. 그것은 일상생활의 영역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가부장주의 또는 부계 혈통두의와 결합함으로써 파시즘의 아비투스를 강화시킨다. 위로부터의 파시즘과 밑으로부터의 파시즘이 변증법적 자기발전을 시작하는 것이다.
가부장주의나 부계 형통주의는 자연스럽게 혈통적 민족관으로 이어진다. 사회 전체가 가족주의적 연계에 의지하는 한, 그것은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혈통적 민족관은 인간의 정체성이 자율적 의지가 아니라 출생에 의해 결정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출생에 의한 선험적 정체성은 사유하는 자아를 부정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민족에 속해 있다." 식민지와 분단이라는 역사적 경험은 이 명제를 정당화하기에 충분하다. '우리'라는 당일한 정체성을 요구하는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파생된 이 명제는 이제 획일을 강요하는 강압적 동일성을 의미한다. 그 결과 개인의 권리는 민족의 이름으로 무시되고, 민족은 같은 혈통이라는 보호막 아래 추상적인 일반 의지를 표명하는 획일적 실재로 파악된다. 국가와 개인의 관계는 혼연 일체의 민족이라는 신비적 모델로 대변되며, 그것은 독재 권력을 정당화한다. 문제는 그것이 권력의 의지에 국한되지 않고, 한국 사회가 일반적으로 공유하는 집단 정서라는 점에 있다. 남과 북의 권력이 사용하는 담론 구조가 같은 것은 물론, 남한 운동의 담론도 같은 구조 속에 있다. 그 결과 남한의 운동은 남과 북의 정치권력 앞에서 이론적으로 무장해제 당했다."(p.41)
[ 2012년 6월 09일 ]
|
| 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처럼 임지현씨의 저작 대부분은 유사한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이념의 속살' 등에서 말이지요. 그러나 그 비판들이 모두 정당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저자의 주장에 힘을 실어줄 수 있을 정도로 권위주의적이고 폐쇄적인 사고로 저자의 글에 감정적 분풀이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습니다. 강단좌파라는 비아냥이야 뭐 전혀 틀린말은 아니지만 적에게 이로운 공격거리를 제공해준다는 논리는 더도 덜도 아닌 김정호와 대동여지도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더군요. 이른바 진보를 외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의심이 스스로를 향해있다고 해서 그걸 허무주의라느니 적에게 이로운 행위라느니 말하는건 진보주의를 지향한다는 사람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건마저 버리고 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민중에게 모든 책임을 지웠다는 논리에 대해서도 조금 다른 의견입니다. 저자의 분석 중에 그 분석의 과정 요건으로 부족한 부분이 전혀 없다면 일단 그 결론은 참이라고 인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임지현씨의 글이 모두 올바른 가정과 과정을 거쳤다고 장담하기엔 제 식견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결론을 감성적 판단을 기준으로 거부하면서 민중의 순수성을 의심한다는 비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조금 실례되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어처구니가 없는 말입니다. 마치 민중은 무조건 순수하며 정의라는 말처럼 들려서 말이지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민중은 이른바 대중이라는 집단과 구성원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합니다. 마지막으로 거시적 혹은 가시적 파시즘이라는 적에 의해 이용된 것은 임지현씨의 지적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운동가와 운동 집단 내부의 파시즘이라고 단언합니다. |
|
어느 드라마에서 본건데 이런 대사가 나온다 여자는 두 종류의 여자가 있다. 남자에게 사랑받는 여자와 그렇지 못한 여자. (무언가를 말할 때 이렇게 두 종류의 머가 있다라는 방법으로 자주 이야기 하게 되는 것 같다) 이 책을 읽은 지금, 나는 이런 생각이 든다 파시즘 적이다. 파시즘 적이지 않다. 마치 그 중간은 없는 것처럼 말이다.
파시스트란 용어는 영화나 기타에서 자주 언급되는 단어라서 생소하지는 않다. 그렇다고 파시즘이란 용어가 생소한 것은 아니다. 다만 파시스트와 파시즘이란 용어의 어감은 참으로 다르다란 생각이 든다. 파시스트란 용어는 파괴적인 행동들을 일삼았던 이들을 두고 일컫는 말같고 파시즘이란 용어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용어라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파시즘이란 용어에 대해서 나와는 별루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게 아닌 것 같다.
생활 깊숙이 파시즘이란 용어가 녹아들어있고 앞으로도 벗어날수가 없겠구나란 생각이다. 파시즘이란 용어가 주변에서 사용될리는 없겠지만 나와 주변인들의 행동에 대해서 파시즘이라는 용어를 대입해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
|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군사정권도 이미 막을 내렸고 나름대로 '운동권' 이었던 현재의 대통령까지 배출해냈다. 자, 이제 파시즘은 사라진 것일까? 그러나 슬프게도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 중, 파시즘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어릴 때부터 시작되는 아주아주 평범한(!) 권력문화에 익숙한 한국인은 문화적이고 사회적으로 서서히 이루어지는 일상적인 파시즘에 천천히 점령당하여 결국 그것에 자신의 주권까지 빼앗기고 만다.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기이한 현상까지 보이는데, 이것이 한국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기에 아무도 이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 때문에 아무도 우리가 파시즘에 얼마나 절어있는지 모른다. 아니, 몰랐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는. "우리 안의 파시즘"은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이다. 따라서 너무나 당연한 일상도 "우리 안의 파시즘"을 통해 보면 "붉은빛"의 산성임이 여실히 드러난다. 주민등록제도, 군대문제, 동남아출신 외국인, 언어에 배어나오는 파시즘 등등, 책을 읽다 보면 "진보적이다"라고 자부하는 나마저도 이런 파시즘에 물들어있다는 것에 꽤나 놀랐다. 나이로 인한 권력과 성별에 따른 권력에는 상당히 민감했으면서도 한국의 역사와 언어, 국민 관리에 나타나는 파시즘에는 둔감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울 정도이다. 거대하고 명확하여 그 실체를 금방 파악할 수 있는 파시즘은 오히려 대항하여 물리치기 쉽다. 그러나 일상을 지배하고있으면서도 그 대상이 모호한 관습적 파시즘은 깨닫기도 어려우며 그것에 대항하기도 무척이나 어렵다. 민주화를 위해 몸을 던진다는 민주화 투사들도 집에서는 전혀 "민주적"이지 않은 가부장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점을 시사하는가. 겉으로는 모든 인간은 나이에 불문하고 평등하다고 말하면서도 나보다 나이 어린 사람이 나의 "동의(?)" 없이 말을 놓았을 때 은근히 분노하며 "예의가 없다"고 일침하는 나는 대체 어떤 인간인가. 일상적 파시즘은 이렇게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으며 항상 깨어있는 자세로 있지 않는 한, 우리가 이것을 인식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러니 반성과 태도의 변화는 또 얼마나 어렵겠는가. 이 책은 우리의 눈에 씌워져있던 껍질을 한 꺼풀 벗겨내준다. 그러나 거기서 책의 사명은 끝난다. 그 다음은 독자의 몫이다. 떨어져있는 꺼풀을 다시 뒤집어쓰고 그저그렇게 "편안하게"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계속해서 꺼풀을 벗어나가며 온몸으로 저항하며 살아갈 것인가. 선택은 언제나 그렇듯 당신이 하는 것이다. |
| <파시즘>이라는 단어는 함부로 입에 담기도 힘들만큼 그간 인류역사에서 부정적으로 자행됐던 수많은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들이 고도로 함축된 용어이다. 그다지 좋지못한 의미를 안고 있는 글자인 만큼 파시즘과 관련을 지어 역사훑어본다는 것 자체도 대단한 용기와 담력을 필요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이 파시즘으로 쓰였다는 것 자체도 놀랍기도 하고 약간은 긴장이 되기도 했다. 몇 명의 필자가 함께 저술한 이 책의 내용과 기획의도에 전적으로 찬성하는 입장은 아니다. 그러나 예상외로 이 책에 대한 평가가 절하되는 것 같아서 안타깝기도 하다. 이 책에서 살펴볼 수 있는 우리의 일상,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작고 소소한 것들 속에 웅크리고 있는 파시즘은 광범위하다. 군사주의, 가부장적 문화, 건축문화, 주민등록증 등등 책을 기획한 임지현 교수의 눈길은 너무나 예리하여 어떤 대목에서는 간담이 서늘해지기까지 한다. 기실 80년대, 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개인'은 없고 '집단'만이 득실거리는 시대였다. 그 와중에서 사회 구성원들 각자의 소중한 인격체와 성향들은 묻혀지고 또 그것이 당연시되었다. 그러나 점차 그간 묻혀진'개인'을 옹호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집단과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졌던 온갖 부조리한 양태들이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고 이 책 또한 그런 시도의 연장선 위에 씌여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단적으로 말해서 <우리안의 파시즘=""> 그간 역사에서 자행됐던 역사의 과오를 모든민중들의 탓으로 몰고가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홀로코스트의 참극을 저지른 히틀러와 독일 민중의 잘못이 동일하다는 말이며, 어떻게 광주 금남로와 도청을 무고한 이들의 피로 물들인 전두환이 파시즘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설령 일부 민중들이 이같은 정통성없는 독재권력에 동조했을지언정 다수는 악마적인 권력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역사를 이를 증명하고 있다. 대다수의 역사의 잘못과 과실에는 옳고 그름이 있으며 시시비비가 가려지고, 또 가려야한다는 게 중론이다. 그런데 동시대인들의 마음 속에서 파시즘적 성향이 농후했음을 역설한다면, 저자의 의도가 오도될 공산이 크거나 음험한 정치세력의 놀음에 오용될 수 있을 우려가 크다. 그러한 오해의 소지는 언론매체등을 통한 담론으로 얘기됐으면 한다. 또한 파시즘에 얽히고 설킨 수많은 이견들이 공론의 장에서 토론됨으로써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파시즘'이라는 용어와 그에따른 부정적 파급효과는 최대한 막았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우리안의>파시즘> |
| 박노자의 '좌우는...'을 읽는 직후에 읽었던 책이다 책을 읽은 소감이라면... 허탈하다고 할까? 분노를 금치 못하겠다고 할까? 파시즘은 정치적 이념이 아니라... 일상적 생활 구석구석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다... 비로소 이 의미를 알게된것 같다.. 시민단체 자원봉사를 하면서 인권에 대해서 생각해볼 기회가 많았는데 말로만 듣던 파시즘이 일상생활에서 개개인을 어떻게 지배하고 파괴해 가는지 직접 와 닿았다. 기존의 생각을 깨보고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고자 하는데 좋은책이다. 초강추다 |
|
우리나라 국민들 처럼 독재, 집단주의, 전체주의, 권위주의 등등 이러한 것들에 과민반응을 보이고 이러한 것들을 거부하는 국민들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삶은 정치적으로 드러나는 것들 뿐만아니라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들 속에서 이러한 집단주의적, 전체주의적 양상은 너무나 많이 드러난다. 이러한 파시즘적 경향이 우리 속에서 우리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일상적인 파시즘적 경향에 대해 상세하고 써 놓은 책이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파시즘적 경향에 유래에서 시작하여 그러한 것들이 사회 곳곳에서 어떠한 방식들로 나타나는지 자세히 써 놓은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 우리들을 알게 모르게 지배하고 있는 파시즘적 경향에 대해 공감하였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인지에는 놀랍기도 하다. 우리사회안의 파시즘적 요소들은 이 책에 나타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수도 있다. 이 책의 분량으로는 나타낼 수 없을 정도로 많을 수도 있다.
우리사회에 문제점 중 가장 큰 것이라 생각되는 집단주의적 파시즘적 경향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책이었다. 재미있게 읽었고, 의미심장하게 읽었다. 우리들을 알고 모르게 지배해오고, 또한 우리 스스로가 그것에 종속되어져 살아왔기 때문에 파시즘은 우리들을 여지껏 지배해오고 있는 것 같다. [인상깊은구절] 자신만이 절대적 정의를 독점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일부 좌파들의 도덕적 폭력은 극우 반공주의의 매카시즘적 폭력과 결을 같이한다. 상대방에게 이러저러한 딱지를 붙임으로써 자신의 헤게모니를 확보하려는 권력 지향적 글쓰기가 여전히 지배적이며, 좌파들의 논쟁 또한 권력 지향적 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