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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 속을 걷다』- 김신용
(사망은 말고,) 라는 그 말이 장난스럽게 들린다. 꿈과 현실, 장자의 나비가 된 꿈.
이 숨 쉬고 있는 현실이 꿈이라면, 그래서 벽돌이 머리에 떨어져 내가 죽는다면 그 순간 꿈에서 깨어날지도, 그래서 (사망은 말고,) 라고 말했던 아닐까.
어떤 것이 꿈이고 어떤 것이 현실인지 사람들도 모른다. 아마도…
〈붉은 감〉을 읽으면서 마지막 연에 집중할 수 있었다. 마지막 연에
“쪼아먹어 다오”
“타는 심장, 스스로 가슴 찢어 땅에 내던지기 전에”
감정이입이 제대로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가 떠오른다.
빈 가지에 홀로 걸려 있는 ‘감’하나. 사람들이 따가지 않은 감. 선택받지 못하고 가지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까치밥이 되어야 할 운명을 지닌 감.
타는 심장이라고 했다. 답답한 심정을 드러내는 말일까? 땅에 내던지고 싶을 정도로 답답한 현실이 싫다는 말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홀로 가지 끝에 사람들로 선택받지 못한 감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어떤 무리의 사람들 집단에 들어가려 했지만 그 집단으로부터 따돌림을 받는다면 답답할 수밖에 없다. 괜히 공장에서 일을 하던 때가 생각이 난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었던 나.
하지만 도대체 그들 사이로 들어갈 수 없었던 그 때가 생각이 나고, 답답하던 그 때가 생각이 난다.
〈거지〉속에 ‘새’는 뭘까? 날려 보냈지만 돌아오지 않는 그 새는 과연 무엇일까?
“지하도에 쭈그리고 앉아, 손을 내밀 때마다”
“새를 날려보낸다”
전철역 근처에서 살았던 나는 지하도 세계를 잘 알고 있다. 아침마다, 저녁마다 그 곳의 풍경을 보았던 나는 그 곳을 지금도 그릴 수 있다.
신문지, 큰 포장 박스(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침대이고, 이불일 수 있는)가 널려 있는 그 위에 어떤 사람들이 쪼그리고 앉아 있다.
그들이 손을 내밀 때마다 날려 보내는 것은 자존심이 아닐까? -- 『날아라 잡상인』이라는 책 속에서 본 기억이 난다. 그들도 사람이기에 자존심을 날려 보내고 돈(생활을 위해 필요한 것)을 얻어내는 것은 아닐까.
그 새라는 의미가 자존심이든 아니든 한 번 날린 그 새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어디선가 죽은 시체로 하늘을 둥둥 떠다니거나 강물 위를 떠다니지 않을까.
물고기의 무덤이나 물고기의 눈꺼풀에 대해 깊게 생각해 - 지금 생각해 보니! - 본적이 없었다.
그냥 강물이, 바다가 그들의 무덤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사람들 뱃속(?)이 그들의 무덤일지도 모르겠다.
하기는 살신성인을 해서 인간을 살리는 그들의 무덤은 사람들 뱃속이겠지.
인간은 물고기를 위해 살신성인을 한 적이 있던가? 물고기들처럼…
가끔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물고기 무덤〉이 어디든지 나 또한 소주 한잔에 들이키는 물고기 한 점의 살을 좋아한다. “소주 한 잔 칵! 생각만 해도 으스스하다” - 이 구절에 와서는 정말 소주 한 잔 하고픈 마음이 든다.
식칼이 유순하다니 이상하다. 무섭기만 하고, 성질이 날카롭다고 생각해왔는데.
그래서 그 앞에서는 조심조심 행동을 해왔는데 이상하다.
식칼을 아무렇게 놓지도 못한다. 잘못 보이면 내 손에 붉은 핏방울이 맺힐지 모르니 말이다.
그 날카롭게 보이는 입가가 생각이 난다. 그런데 유순하다니. “스스로 입가에 피를 묻히지 않다니”
〈식칼〉은 조금 더 관찰해야할 필요성을 느낀다. 유순한 점을 발견하기 위해 조금 더 노력해야 할 것 같다.
문학평론가들의 해설(책 뒤편에 있는 경우가 많아서인지)을 잘 안 읽어왔다.
읽게 되면 감상을 제대로 쓰지 못할 것 같아서라는 것이 이유요, 핑계였다.
하지만, 이 번 만큼은 읽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다 읽지 않았다. 작품에 대한 설명은 읽지 않았다.
그냥 시인에 대해 쓴 글만 조금 읽었을 뿐이다.
작가의 독특한 이력에 대한 쓴 글.
체험이라는 힘에 바탕을 두고 쓴 시라는 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시에 오로지 체험만이 있었을까? 라는 의문을 던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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