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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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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용 시인의 시에는 체험성이 묻어난다. 『몽유 속을 걷다』를 읽으면서 시인이 직접 체험한 것을 읊고 있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시인의 체험에서 나왔다고 생각되는 것은 시인은 시를 사물이나 하층 노동자 혹은 빈민을 그려내면서 다른 이의 눈이 아닌 그들의 눈으로 보고 있고 그것에는 어떠한 절박함과 감정이 실려있기 때문이다. 김신용의 시에서는 독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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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용 시인의 시에는 체험성이 묻어난다. 『몽유 속을 걷다』를 읽으면서 시인이 직접 체험한 것을 읊고 있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시인의 체험에서 나왔다고 생각되는 것은 시인은 시를 사물이나 하층 노동자 혹은 빈민을 그려내면서 다른 이의 눈이 아닌 그들의 눈으로 보고 있고 그것에는 어떠한 절박함과 감정이 실려있기 때문이다. 김신용의 시에서는 독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그러나 상상할 수 있는 그들이자 우리인 이웃의 모습을 그려낸다. 이 그려내는 모습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인은 사물에 대해 천천히 관찰하고 조심스럽게 기술하고 있다. ‘말의 뼈를 뽑아 / 삭아버린 서까래 하나 얹지 못한’ (「빈집 속의 빈집」)에서 알 수 있듯이 시인의 언어는 정교하고 잘 다듬어졌다. 이것은 섬세한 묘현이기도 하다. 이런 묘사로 시인은 여러 가지를 말하고 있다. 우선, 『몽유 속을 걷다』에서 눈에 띄는 것은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이었다. 시인은 『몽유 속을 걷다』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과 반성을 하고 있다. ‘그럼 나는 잎새 하나의 그늘을 지었는가? 등나무처럼 지친 마음 쉬어갈 넉넉할 빈터를 드리웠는가?/문득 돌아보면 내 그림자, 손톱 같다.’ (「등아무 앞에서」)는 구절은 시인이 자신에 대한 성찰을 하면서 자신의 내면 깊이에 대한 고백과 반성을 하고 있는 것을 엿볼수 있다. 이런 자아 성찰은 「눈을 뜨면 인수봉이 솟아오른다」에서도 보이는데 시인은 ‘나는 또 어떤 모독의 오르가슴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이빨이었고 손톱이었으면서/그 이빨과 손톱으로 여기까지 기어왔으면서’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삶의 일부를 드러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런 자아 성찰은 ‘바다는, 언제나 우리의 꿈이었다/그러나 나는 풀잎의 낯을 씻는 물 한 방울 되지 못했다/풀의 집의 초라한 식탁을 켜는 촛불 하나 되지 못했다/그냥 하수구를 통해 시궁창을 흘러왔다’(「구름莊 여관」)에서도 보이듯 자신의 과거에 대한 한탄을 뿜어내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시인은 쉽게 절망하지 않는다. ‘그 소실점을 향해 이제 나는 수증기가 되려 한다/그러나 나는 저 구름장 여관으로 가는 길을 모른다/그 구름장 여관에서 다시 물방울끼리 모여, 사람 사는 곳의 마당 위로 내리고 싶은데……’(「구름莊 여관」)에서 보이듯 시인은 쉽게 절망하지도 그렇다고 쉽게 긍정하지도 않는다. 아직 유보 상태인 것이다. 김신용 시인은 시의 많은 부분을 하층 노동자와 빈민의 일상을 비추고 삶을 이야기하는데 할애하고 있다. 시인은 그들의 가난을 그리고 있으며 이 가난이 곧 그들의 삶이 된다.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각양각색이다. ‘불법입국한 조선족 교포 심양댁’처럼 조선족 교보도 있고, 광부도 있으며, 심지어 거지도 등장한다. 시인은 이들의 삶에 있어 동정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냥 지나치지도 않는다. 천천히 세심하게 그려내고 있을 뿐인 것이다. ‘불법체류자로 벌금을 물어도, 차 배달 주문받은 여관방/몸 한 번 열면 삼만 원, 제 살던 곳 한 달 생활비가 생기는 재미는/짐승처럼 얽히고 설킨 여관방의 비디오 장면처럼/숨을 컥컥 막히게 해, 어차피 배 지나간 자리/두 아의 어미, 시침 뚝 뗀 귀향의 인천 뱃고동 소리 그립기만 하네 ’(「심양댁」)에서 읽을 수 있는 시인의 시선은 어느 한쪽에서 치우쳐지지 않았지만 연민을 품고 있다. 이런 이웃들이 사는 공간이 시에 자주 등장하는데 그 공간은 ‘힐튼 호텔의 뒷골목, 찌그러져가는 판잣집 동네’ (「밤.불가사리」)거나 ‘지금은 변두리 공단 동네’ (「칼 가는 사람」)이다. 김신용 시인의 시는 감정에 젖은 언어도 아니고 그렇다고 감정이 없는 언어도 아니었다. 시인은 적당한 거리를 외적으로 유지하지만 내적으로 담긴 시인의 시선은 하층 노동자와 빈민에 대해 연민을 느끼고 있으며 또한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 하고 있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y******2 2004.04.09.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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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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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 속을 걷다』- 김신용 (사망은 말고,) 라는 그 말이 장난스럽게 들린다.  꿈과 현실, 장자의 나비가 된 꿈. 이 숨 쉬고 있는 현실이 꿈이라면, 그래서 벽돌이 머리에 떨어져 내가 죽는다면 그 순간 꿈에서 깨어날지도, 그래서 (사망은 말고,) 라고 말했던 아닐까. 어떤 것이 꿈이고 어떤 것이 현실인지 사람들도 모른다. 아마도… 〈붉은 감〉을 읽으면서 마지막 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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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 속을 걷다』- 김신용

(사망은 말고,) 라는 그 말이 장난스럽게 들린다.  꿈과 현실, 장자의 나비가 된 꿈.

이 숨 쉬고 있는 현실이 꿈이라면, 그래서 벽돌이 머리에 떨어져 내가 죽는다면 그 순간 꿈에서 깨어날지도, 그래서 (사망은 말고,) 라고 말했던 아닐까.

어떤 것이 꿈이고 어떤 것이 현실인지 사람들도 모른다. 아마도…


〈붉은 감〉을 읽으면서 마지막 연에 집중할 수 있었다. 마지막 연에

쪼아먹어 다오

타는 심장, 스스로 가슴 찢어 땅에 내던지기 전에

감정이입이 제대로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가 떠오른다.

빈 가지에 홀로 걸려 있는 ‘감’하나. 사람들이 따가지 않은 감. 선택받지 못하고 가지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까치밥이 되어야 할 운명을 지닌 감.

타는 심장이라고 했다. 답답한 심정을 드러내는 말일까?  땅에 내던지고 싶을 정도로 답답한 현실이 싫다는 말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홀로 가지 끝에 사람들로 선택받지 못한 감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어떤 무리의 사람들 집단에 들어가려 했지만 그 집단으로부터 따돌림을 받는다면 답답할 수밖에 없다. 괜히 공장에서 일을 하던 때가 생각이 난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었던 나.

하지만 도대체 그들 사이로 들어갈 수 없었던 그 때가 생각이 나고, 답답하던 그 때가 생각이 난다.


〈거지〉속에 ‘새’는 뭘까?  날려 보냈지만 돌아오지 않는 그 새는 과연 무엇일까?

지하도에 쭈그리고 앉아, 손을 내밀 때마다

새를 날려보낸다

전철역 근처에서 살았던 나는 지하도 세계를 잘 알고 있다. 아침마다, 저녁마다 그 곳의 풍경을 보았던 나는 그 곳을 지금도 그릴 수 있다.

신문지, 큰 포장 박스(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침대이고, 이불일 수 있는)가 널려 있는 그 위에 어떤 사람들이 쪼그리고 앉아 있다.

그들이 손을 내밀 때마다 날려 보내는 것은 자존심이 아닐까?  -- 『날아라 잡상인』이라는 책 속에서 본 기억이 난다.  그들도 사람이기에 자존심을 날려 보내고 돈(생활을 위해 필요한 것)을 얻어내는 것은 아닐까.

그 새라는 의미가 자존심이든 아니든 한 번 날린 그 새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어디선가 죽은 시체로 하늘을 둥둥 떠다니거나 강물 위를 떠다니지 않을까.


물고기의 무덤이나 물고기의 눈꺼풀에 대해 깊게 생각해 - 지금 생각해 보니! - 본적이 없었다.

그냥 강물이, 바다가 그들의 무덤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사람들 뱃속(?)이 그들의 무덤일지도 모르겠다.

하기는 살신성인을 해서 인간을 살리는 그들의 무덤은 사람들 뱃속이겠지.

인간은 물고기를 위해 살신성인을 한 적이 있던가? 물고기들처럼…

가끔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물고기 무덤〉이 어디든지 나 또한 소주 한잔에 들이키는 물고기 한 점의 살을 좋아한다. “소주 한 잔 칵! 생각만 해도 으스스하다” - 이 구절에 와서는 정말 소주 한 잔 하고픈 마음이 든다.


식칼이 유순하다니 이상하다. 무섭기만 하고, 성질이 날카롭다고 생각해왔는데.

그래서 그 앞에서는 조심조심 행동을 해왔는데 이상하다.

식칼을 아무렇게 놓지도 못한다. 잘못 보이면 내 손에 붉은 핏방울이 맺힐지 모르니 말이다.

그 날카롭게 보이는 입가가 생각이 난다. 그런데 유순하다니. “스스로 입가에 피를 묻히지 않다니

〈식칼〉은 조금 더 관찰해야할 필요성을 느낀다. 유순한 점을 발견하기 위해 조금 더 노력해야 할 것 같다.


문학평론가들의 해설(책 뒤편에 있는 경우가 많아서인지)을 잘 안 읽어왔다.

읽게 되면 감상을 제대로 쓰지 못할 것 같아서라는 것이 이유요, 핑계였다.

하지만, 이 번 만큼은 읽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다 읽지 않았다. 작품에 대한 설명은 읽지 않았다.

그냥 시인에 대해 쓴 글만 조금 읽었을 뿐이다.

작가의 독특한 이력에 대한 쓴 글.

체험이라는 힘에 바탕을 두고 쓴 시라는 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시에 오로지 체험만이 있었을까? 라는 의문을 던져본다.



p********p 2009.12.23.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