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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섯 해 지나 만나다』는 노동자의 시이다. 현장에서 나오는 그런 이야기들이다. 그런 이야기들은 모두 거짓됨이 없는 삶의 이야기일 것이다.
이 안에 있는 시들은 모두 땀을 흘리는 노동자의 시이다. 어떤 상상력도 가미되어 있지 않은 시들이 대부분이다.
〈봉암에 가면〉,〈노동자 탓이오〉그 외의 시에서는 노동자들의 비애가 있다. 그들의 슬픔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 이야기들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봉암 공단에 가면 정말 한쪽 팔이 잘린 김씨가 있을 것 같고 그 사람의 옆에는 소주병이 있을 것 같다. 부도내고 도망간 사장 때문에 제대로 보상도 받지 못하고 치료도 받지 못하는 그런 사람의 눈물이 봉암에 가면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는 상황인데도 무슨 미련이 있기에 떠나지 못하는 걸까. 그 부도낸 사장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일까. 만나면 멱살이라도 잡기 위해서 떠나지 못하는 것일까. 자기 팔 책임지라고 따지기라도 할 것인가. 그 사장이 만약 김씨에게 잡힌다 하더라도 아마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김씨는 그런 사장을 만나기 위해 떠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인생을 걸었던 그 곳의 하늘을 원망하기 위해 떠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사회적 약자는 이래 치이고 저래 치이다 죽어버린다. 원망을 해봐야 소용이 없다. 기득권자들은 사회적 약자들에겐 냉혈한처럼 대하기 때문이다. 한보, 삼미, 기아 사태등도 결국은 노동자들에게 피해가 고스란히 갔다. 그래서 화자는 이렇게 마지막으로 이야기한다.
“에이 더러버서 노동자도 못해 먹겠습니다”라고.
이 나라에서는 돈과 권력이 없으면 손해 보면 살아가는 것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과연 우리는 누구를 우러러 봐야 할까요. 〈우러러보는 사람〉에서는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회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은 모두 자본 앞에서 쓰러졌습니다. 자본 앞에서 비굴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연 그들을 우러러 봐야 할까요.
아니면 저 밑바닥에서 자본 앞에 떳떳한 노동자를 우러러봐야 할까요. 그건 선택의 자유겠지요. 여기서 누구를 우러러봐야 한다고 떠들어봐야 소용없는 짓일 테니까요.
한때는 흰 와이셔츠에 자가용 타고 출근하여 모닝커피를 마시며 회전의자 등에 기대어 하루 시작할 줄 알았는데
현재는 그렇지 못한 자신을 바라봅니다. - 〈한때는〉 좋은 삶, 편안한 삶을 살게 되리라 믿었지만 빨랫줄에 목맨 꺼뭇꺼뭇 작업복의 빛나는 모습을 바라볼 뿐입니다.
그냥 지금의 삶에 만족하는 걸까요. 아직은 판단하기 힘드네요.
노동자들은 오늘도 24시간 2개조, 아니면 3개조로 일을 합니다. 특히 밤에 일하는 것은 힘들기 때문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합니다. 공단의 불빛은 그래서 꺼지는 날이 별로 없습니다. 세찬 바람이 공단 골목골목을 돌아다니기도 합니다. 춥더군요. 공단의 골목은.
아니, 그 바람이 추운 건 아마 힘든 노동자들의 한숨이 아닐까. 지금 생각해 봅니다.
사실 이 시들을 읽으면서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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