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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에는 "단편"을 좋아하지 않았다. 뭔가 소설 속 주제나 인물을 파악하기도 전에 이야기가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나이가 어려서 삶의 진리를 아직 깨치기 전이었거나 독해력이 그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장편소설은 조금 놓치고 읽어도 계속 읽어나가면 알게 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단편의 경우 한 문장이라도 놓치면 안 됐기 때문에.
우리 단편을 공부하면서 조금씩 단편의 영역을 넓혀나가고 있다. 단편이 주는 짧은 글 속에 담긴 진리가 가끔 폐부를 찌른다. "헉!"하고 들이마셔지는 감동이나 깨달음이 있다. 그 짧은 호흡 속에 한 문장, 한 문장이 주는 놀라움이 좋아졌다.
<어떤 이별>은 오스트리아의 의사이자 소설가 겸 극작가인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단편선이다. 나로선 처음 접하는 작가인데 그런 첫 작품을 이번에 처음 번역되어 소개되는 5편을 포함한 단편선을 만나게 되어 기분 좋다. 아르투어 슈니츨러는 주로 "죽음"과 "성"의 문제를 다루는데 그 당시 금기였던 것들을 심리 분석을 통해 끌어냈던 프로이트가 언어로 들춰낸 슈니츨러를 시기까지 했다니 읽기 전부터 기대가 컸다.
이번 단편선에는 총 15편이 담겨 있다. 중간쯤 위치한 <구스틀 소위>는 단편이라기보다는 중편에 가까운데 그 소설을 제외하고는 다른 14편의 단편은 7-8페이지 정도에서 길어야 40페이지 정도 되는 굉장히 짧은 단편들이다. 주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일관되게 "죽음"과 "성"을 다룬다. 사실 읽어나가면서 제일 먼저 눈에 띈 건 "불륜"이었다. 그것도 남자들의 불륜은 아무렇지도 않지만 유부녀의 불륜은 문제를 일으키는 것처럼 느껴져서 처음엔 좀 불편했다. 그런데 그 시대를 생각해 봤을 때, 또 그런 내용 상의 문제보다는 작가가 그 사건을 통해 어떤 것을 드러내려 했는지를 생각하다 보면 단지 소재이고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주제는 일관되지만 그것을 풀어내는 표현법은 무척이나 다양한다. 대부분 한 작가의 단편들은 비슷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데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경우 주제는 같지만 표현법이 달라서인지 읽을 때마다 굉장히 다른 느낌을 받게 된다. <어찌 이런 멜로디가>와 <3종의 영약>은 마치 전래 동화 같은 느낌인가 하면 <상속>과 <홀아비>는 마치 우리나라 아침 드라마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구스틀 소위>는 길이도 긴데 처음부터 끝까지 구스틀 소위의 생각을 따라 내적 독백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하마터면 읽는 걸 포기할 뻔도 했을 정도이다. 이 남자는 제빵사에게 모욕을 당한 뒤 어쩔 줄 몰라하며 자살을 생각하며 밤을 새는데 그 사이 정말 쉬지도 않고 징징댄다. 이 독백이 무려 50페이지 정도가 이어지니 아주 읽는 데도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 보면 작가가 모욕 당한 한 남자의 생각을 어찌 이리도 잘 구현해 냈을까 놀랍기만 하다. 모욕을 당하고 자살을 결심하고 이리저리 갈팡질팡하는 와중에도 남겨질 가족들 걱정, 사람들이 수군거릴 걱정, 전에 만났던 아가씨들 생각 등 이리저리 튀는 생각들이 마치 현실 속 사람들의 뇌를 그대로 표현해 낸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안드레아스 타마이어의 마지막 편지>는 제목 그대로 유서를 그대로 옮긴 듯하고, <라이젠보크 남작의 운명>이나 <총각의 죽음>은 거의 미스테리 추리 소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렇게 각각의 표현이나 장르가 다르게 느껴지더라도 각 작품마다 인물들의 심리 묘사 만큼은 정말 뛰어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이 작품들을 통해 아직 "죽음"의 세계를 탐구하지는 못했다. 몇 번 더 읽어서 알아가고 싶다. 소설의 묘미는 그런 것 같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재미. 새로운 작가를 알게 되어 즐겁다.
*이 후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
#어떤이별 #작가와비평 #아르투어슈니츨러 #단편선 #단편소설 #오스트리아소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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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 대해 돌아보던 중 독일쪽 글과 사상을 무척 좋아했다는 것을 깨달아 얼른 읽어보게 된 책이다. 자세히보니 작가는 독일은 아니고 오스트리아 사람이었지만 ㅠㅠ 암튼 나라도 가깝고 비슷한 느낌은 좀 공유하고 있는 듯...
아마 편집자가 일부러 처음엔 가벼운 작품을 배치한 것이겠지만 옮긴이의 말에서 '죽음과 연관되어 이루어지는 인간에 대한 이러한 속성 묘사는 문학을 넘어 심리분석학적 경지에 이를 정도로 치밀하다.'는 말을 보고 무척 기대했는데 첫 두 작품이 뭔가 어이가 없어서... 아 뭐지... 완전 속았나 하고 실망했었다. 그러나 이후 작품부터 작가가 보여준 탁월한 묘사들은 길이가 길었음에도 불구하고 긴장감이 넘쳤고 지옥에 있어도 천국을 생각하고 천국에 있어도 지옥을 생각할 수 있는- 혹은 하게 되는 정말 끊임없이 생각을 끊지 못하고 계속 이것저것 생각해내는 뇌와 마음을 너무너무너무나도 잘 표현했다고밖에 말할수가 없다.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단편 모음이기도 하고 약간 여러 면에서 부족함- 특히 옮긴이가 지적했듯이 대화... 뭔가 좀 이해가 안 되는 대화도 여럿 있었다. 그러나 사람의 심리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들며 끝을 보고야 마는 아르투어의 글은 정말 최고였다.
특히 친숙한 여인에서 죽은 아내의 뒷모습이나 걸음걸이 입술을 씰룩이는 등의 행동이 아내와 닮았기에- 그 사람에게 가까이가면 어떤 죄책감을 느끼다가, 그녀가 마치 일부러 아내를 흉내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분노했다가 하는 장면들과 심리 묘사는 아주 놀랍고 날카로운 것이었다.
그리고 아예 완전히 한 사람의 내적 독백으로 이루어져있는 구스틀 소위는 정말 어떤 사건 앞에서 정신없이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도 어떤 계기로 문득 문득 추억에 빠졌다가 완전히 사사로운 것들을 생각했다가 곧 그것이 아무 의미없음을 깨달았다가 하며 혼란에 빠져있는 심리를 너무나도 잘 표현했다.
눈먼 제로니모와 형에서는 눈 먼 동생이 보이지 않기에 형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지만 마침내 형의 사랑을 깨닫는 과정을- 형이 겪는 고통을 상세하게 풀어냈는데, 정말 탁월한 심리 묘사들을 보고 있자면 하나하나가 작가가 직접 겪은 것처럼- 그 등장인물에 완전히 몰입하여 이야기를 풀어냈다는 것이 느껴졌다.
부족한 점이 많지만 특유의 장점이 드러나는 부분이 무척 재미있기에 심리 묘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한번쯤 읽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런 서술 부분에서는 탁월한 <어떤 이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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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이별 #글로벌콘텐츠 #작가와비평 #슈니츨러 여러 생각들이 계속해서 그의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다. 그는 수많은 복장으로 변장한 채 층계를 타고 그녀의 집으로 올라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의사의 조수로, 약사 보조원으로, 하인으로, 장의회사 직원으로, 거지로 변장한 다음 마지막으로는 염장이가 되어 그녀를 전혀 모르는체하며 죽은 그녀 옆에 앉아 그녀를 하얀 천으로 둘러싸서 관 속에 넣고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68 안나가 마지막으로 그에게 왔던 그날, 그녀가 그에게 그 자리에서 쉽게 작별을 고했더라면 오늘 그는 벌써 그녀를 잊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건 지극히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끔찍할 정도로 오래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69,70 알베르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온 세상이 갑자기 죽은 듯이 조용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 순간에는 팔딱대며 뛰던 모든 심장이 멈추고, 사람들 모두가 걸어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달려가던 모든 마차가 멈추고, 째깍대던 시계들이 멈추었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그는 살아서 움직이던 세상 전체가 한순간 그대로 정지해 버렸다고 생각했다. 71 '?아마도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이 알 수 없는 순간은 우리의 가련한 영원함일지도 모르지? 그래, 이제 오후의 기다림도 끝났고?이제 더는 망보기창 앞에 서 있지 않을거야. 다시는. 다시는 절대로 서 있지 않을거야.' 72 ㅡ 이 작가는 오스트리아의 의사이자 소설가 겸 극작가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문학은 죽음과 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특히 같은 시대를 산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 정신분석 기법을 통해 인간의 심리 상태를 예리하게 묘사한다. 어떤이별은 유부녀에 대한 몰입적 사랑과 그녀의 죽음에서 비롯되는 내연남의 심리적 방황과 갈등을 그렸다. 옮긴이는 슈니츨러의 문학을 감히 죽음의 문학으로 지칭하곤 한다. ㅡ 남성작가가 쓴 남자의 심리상태를 보는게 흥미진진했다. 알려지지 않은 슈니츨러의 단편들만 엮은책이라 조금은 아쉬웠지만 기회가 된다면 장편소설도 읽어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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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별 - 슈니츨러 명작 단편선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단편선집이다. 개인적으로는 슈니츨러가 오스트리아의 대문호라는건 알았지만 그의 작품은 처음 접하게 되었다. 특히 <죽은 자는 말이 없다>를 드디어 읽어보게 되어 반갑기도 했다.
책의 구성은 그의 열다섯편 단편을 엮은 형식으로 죽음과 사랑, 그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의 오묘하고도 복잡한 심리가 문학적으로 표현된다. 작품 그 자체의 이야기도 즐거웠지만 슈니츨러가 영향받은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기법을 통한 인간의 심리 상태를 예리하게 묘사하는 대목들이 인상적이었다.
또한 다양한 양태로 등장하는 죽음을 통해 인간의 자기중심적이고 타산적인 성향과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심리를 세밀하게 다룬다. 슈니츨러는 인간의 의식이 단순히 눈앞에 드러나는 표면적인 것에 머물 뿐, 그 배후나 밑바닥에 감춰져 존재하는 또 다른 힘을 보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을 경우 누구에게나 예기치 않은 죽음이 닥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슈니츨러의 작품을 보면 한결같이 현실의 공간을 넘어선 욕망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 진다. 다소 교훈적이기까지 한 단편들은 슈니츨러의 색깔을 압축해 놓은 것처럼 보인다. 비현실의 영역을 꿈꾸는 인간들의 심리가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리와 많은 유사성을 지닌다. 그래서 더 공감을 가지게 한다.
맨 먼저 읽어 볼 수 있는 <어찌 이런 멜로디가>에서는 생을 갈구하는 인간들을 향한 슈니츨러의 조소가 배여져 있는 듯하다. 그외에도 상속, 3종의 영약, 홀아비, 어떤 이별,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등으로 이어지는 이 책은 올해 가을에 읽어보면 좋을 명작임이 틀림없었다.
개인적으로는 제빵사가 뇌졸중으로 급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삶을 찾아 의기양양해하는 장교의 이중성을 그린 구스틀 소위가 흥미로웠고 어릴 적 실수로 동생을 눈 멀게 하여 평생을 동생의 눈이 되어 헌신하고자 하는 형과 앞을 보지 못해 일어나는 형에 대한 오해와 불신으로 황폐해져 가는 동생 사이의 문물 겨운 형제애 스토리도 빠뜨릴 수 없는 수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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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별'이라는 제목은 수많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낭만적이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며, 고독하기도 하고, 덤덤한 느낌이 들기도 하며 말 그대로 '어떤' 이별에 대한 내용인지 너무나 궁금했다.
과연 '어떤 이별'에 대한 이야기일까?
이번에 완독한 '어떤 이별'에는 15편의 단편들이 엮여있는데 기본적으로 죽음과 성(性)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이 작가의 작품은 처음 접해보는데 특정한 상황이나 순간에 그려지는 심리묘사가 치밀하게 그려져있어 순간의 몰입감으로 흠뻑 빠져들 수 있었다.
===== 우연히 길에서 주운 악보로 돌연 세상의 명성을 얻게 되지만 결국 떳떳하지 못한 성공적 삶을 참회하며 자살을 택하는 작곡가의 삶을 그린 이야기.
===== 아내가 남긴 편지들을 통해 아내의 불륜을 알게 된 남편이 아내의 장례식에서 두 남자가 함께 울 수는 없다며 결투를 통해 불륜남을 살해하는 이야기.
===== 여자의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지배하여 자신만의 여자로 만드는 독점적 사랑을 꿈꾸다 결국 여자를 죽음에 빠뜨리는 남자의 이야기.
===== 아내가 죽은 직후 아내가 모아둔 편지들을 통해 가장 친한 친구가 아내와 깊은 사랑을 맺어온 것을 알게 된 남편이 아내의 장례식에 문상 온 친구 앞에 내보이는 복잡 미묘한 심리를 다룬 이야기.
===== 유부녀에 대한 몰입적 사랑과 그녀의 죽음에서 비롯되는 내연남의 심리적 방황과 갈등을 그린 이야기
===== 불륜 관계의 남녀가 마차 여행을 즐기던 중 전복 사고로 남자가 치명상을 입은 후 전개되는 여자의 심리 변전을 의식의 흐름을 통해 치밀하게 묘사한 이야기.
===== 젊은 아내가 병사한 후 우연히 아내와 똑같은 모습의 여인을 만나 그녀에 대한 욕망과 죽은 아내에 대한 죄책감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결국 그녀를 죽음으로 모는 젊은 홀아비의 양면적 심리 상태를 그린 이야기.
===== 이웃 제빵사에게 모욕을 당해 군인의 명예가 실추됨으로써 자살을 결심했다가 제빵사가 뇌졸중으로 급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삶을 찾아 의기양양해하는 장교의 이중성을 그린 이야기.
===== 어릴 적 실수로 동생을 눈멀게 하여 평생을 동생의 눈이 되어 헌신하고자 하는 형과 앞을 보지 못해 일어나는 형에 대한 오해와 불신으로 황폐해져 가는 동생 사이의 눈물겨운 형제애를 그린 이야기.
===== 아내가 흑인 남자와 간통하여 까만 피부색의 아이를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정숙함과 결백함을 믿고 이를 증명해 주기 위해 마지막 편지를 남기고 자살하는 남편의 신비에 찬 심리를 묘사한 이야기.
===== 사랑하는 여인을 차지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걸고 끝없이 구애 행각을 이어가는 남자가 여인의 또 다른 정부의 음모에 빠져 비극적 종말을 맞는 과정을 신비적 요소를 곁들여 정교하게 형상화한 이야기.
===== 오랫동안 사랑해 온 여자가 병으로 앞을 보지 못하게 되자 그녀를 버리는 남자와 버림받은 것을 비관하여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여자의 이야기.
===== 나이 든 총각이 오래전부터 친구들의 아내들과 불륜 관계를 맺어왔다는 고백 편지를 남기고 죽자 편지를 읽은 친구들이 아내의 부정에 대해 내보이는 미묘한 반응을 묘사한 이야기.
===== 한 마리 나비를 과대망상에 빠진 천재로 의인화하여 삶의 무상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이야기.
===== 신의 계시를 거역하는 인간의 오만과 불손이 초래할 불행한 결과를 경고하는 이야기.
15편의 단편들은 전반적으로 사랑(혹은 성)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공통으로 쓰여 있었다. 특정 상황이나 순간에 대한 어떤 이의 극에 대한 심리묘사라던가 혼자 독백처럼 머릿속을 울리는 끊임없는 속삭임들이 여러 감정들을 담아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머릿속을 활보하고 다닌 것 같은 느낌 혹은, 특정 상황에 전지전능한 신의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행복, 우울, 슬픔, 기쁨, 고독 등 다양한 감정에 대한 심리묘사가 탁월하게 기록되어 있어 각 상황별 심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흠뻑 빠져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15편 중에서 몇 가지 기억에 남는 작품을 살펴보면..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 후 텅 빈 집안에서 느끼는 공허함과 고독을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했던 남편은 죽은 아내에 대한 소식을 듣고 곧 방문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가장 친한 친구의 위로만을 기다리며 아내의 방을 천천히 둘러본다. 그러다 우연히 발견한 아내의 편지를 통해 가장 친한 친구가 아내의 또 다른 남자였음을 알게 된다. 그 사실을 안 순간 세상의 모든 것은 암흑 그 자체, 분노와 함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을 느낀다. 세상 가장 믿었던 두 사람에게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는 차근차근 생전 아내의 모습과 친구의 모습을 떠올려보며 점차 기이한 감정들을 느끼게 된다. 그러다 문득 사랑하던 여자를 잃은 친구에 대한 연민이 피어오른다. 분노와 연민 그리고 알 수 없는 여러 감정들 속에서 오랜 친구를 미워할 수도 없었던 그는 마음을 다잡아본다. 꾹꾹 눌러 담은 감정들을 목구멍 깊숙이 숨기고 마음과는 다른 일상적인 이야기들로 친구를 맞이한다. 그러다 아내 외에도 사랑하는 약혼녀가 있음을 알게 된 리햐르트는 결국 눌러두었던 그 감정을 터트리며 후고에게 외친다. "나 다 알고 있어"
<어떤 이별> 유부녀에 대한 몰입적 사랑으로 그녀를 기다리는 시간 내내 혼자 그리는 생각의 파편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한 남자를 만나볼 수 있다. 그러다 그녀가 오지 않는 시간이 길어감에 따라 점차 낭떠러지로 내몰리는 심리묘사와 더불어 과감하게 그녀의 집을 방문하여 그녀의 시신을 마주하고 돌아오는 내연남을 통해 그의 머릿속을 부유하듯 떠돌다 나온 느낌마저 들었다.
모욕을 당한 군인의 하룻밤 사이 심리묘사가 디테일하게 그려져있다. 글을 읽는 내내 시끄러운 누군가의 음성을 들은 것 같아 읽고 난 후 한동안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총각의 죽음 이후 알 수 없는 이유로 불려온 친구 3명. 의사와 작가와 상인!
기존에 읽었던 여러 책에서는 스토리텔링에 집중하는 것에 비해 특정한 상황 속에서 깊이 있는 심리묘사를 통해 그려지는 스토리는 흥미롭고 색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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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을 때는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한 예술가들이 많다. 때문에 지독한 가난과 싸우다 병마에 시달리기도 하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그들은 대체적으로 '천재적' 예술가들에 속하며, 시대에 저항적이거나 혹은 반정부적, 사회 부조리에 비판적인 인물들이 많다. 주류로부터 배척 당하기 때문에 가난하게 살다가 예술혼을 불태우며 생애를 끝마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후에 빛을 본 예술가들 중에 사회 부조리만큼 자신도 타락한 삶을 살다가 비극적 생을 마감한 인물도 있다. 천재적이라기보다 '동일화'했다고 말해야 할까? 이 소설집의 저자 아르투어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 1862∼1931)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부유한 유태인 의학교수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부친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의학을 공부해서 의사가 되었다. 1886년부터 병원에서 일했고 1893년에는 자신의 병원을 개업했으나, 생의 대부분을 작가로 활동했다. 작품 활동 초기에는 주로 희곡을 집필했으며, 후고 호프만슈탈(Hugo von Hofmannsthal, 1874∼1929)과 친구였고, 스스로 자신의 ‘정신적 도플갱어’라고 칭했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기법을 많이 사용했다. 그는 오랫동안 도나우 왕정의 퇴폐를 묘사하는 작가로 낙인 찍혔으며, 모든 작품에서 당시 빈의 세기말적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어서 풍속 묘사가로, 그의 문학은 '오락 문학'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작가에 대한 지식 없이 작품의 성격만 듣고 읽기를 희망했던 슈니츨러가 손에 들어온 독자의 기분은 한없이 부풀어 올랐다.
당시 슈니츨러의 문학에 대한 이러한 평가절하는 무대를 사회비판의 장으로 바꾸어놓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사회변혁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다는 인식 때문이다. 1960년이 지나서야 슈니츨러는 사회전통의 압박, 소외, 고독, 자유와 헌신, 거짓과 실제에 대한 갈등을 예리하게 분석하는 작가로 평가되었으며 체호프처럼 위대한 인간묘사가의 한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1914년까지 슈니츨러의 희곡은 오토 브람(Otto Brahm)의 연출로 빈 부르크테아터뿐만 아니라 베를린극장에서도 가장 많이 상연된 작품에 속한다. 슈니츨러는 1931년 사망할 때까지 멸망한 사회의 연대기 작가로 평가받았는데 이는 그가 뒤늦게 단편소설 쪽으로 방향을 돌렸기 때문이다. 1960년경에야 비로소 연극 감독인 아들 하인리히 슈니츨러의 활약으로 슈니츨러의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해외저자사전) 작가로 성공하여 부와 명성을 얻기도 하지만 도박과 낭비로 수차례 어려움을 자초했고, 젊은 시절의 여성 편력은 카사노바의 환락과 모험을 옮겨놓은 듯했다. 실존 인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낯선 또는 병적인 그의 삶은 14세 때부터 죽는 날까지, 처음 3년을 제외하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한 일기에 담겨 있다.
1895년 단편 「죽음 Sterben」을 발표하면서 작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같은 해 빈 부르크테아터에서 초연된 「사랑의 유희 Liebelei」를 통해 드라마 작가로서도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수련의 시절부터 히스테리와 최면 등 인간의 무의식과 심리를 다루는 정신의학 분야에 관심을 가졌는데, 이러한 관심은 그의 문학에서도 드러난다. 작가 슈니츨러는 ‘내적 독백’과 같은 혁신적인 서사기법을 통해 인간의 은밀한 내면과 무의식을 여과 없이 표면으로 끌어낸다. 장교, 예술가, 의사 등 당시 빈의 부유한 시민계급을 대표하는 인물의 은밀한 내면을 들여다봄으로써 비판에 부딪치기도 했고, 합스부르크 제국의 장교의 1인칭 독백을 담은 소설 『구스틀 대위 Lieutnant Gustl』(1901)로 명예재판에 회부되어 제국의 장교신분을 박탈당한다. 성적 타부를 건드리는 연작 드라마 「윤무 Der Reigen」는 외설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카사노바의 귀향 Casanovas Heimfahrt』(1918), 『엘제 양 Fraulein Else』(1926), 『꿈의 노벨레 Traumnovelle』(1926)를 통해 세기말 빈 시민사회의 위선과 이중적인 윤리의식을, 『트인 데로 가는 길 Der Weg ins Freie』(1908)에서 반유대주의, 세기 전환기의 몰락해가는 합스부르크 제국과 오스트리아 사회, 민족주의와 정치적인 혼란 속에서 무기력한 빈 부르주아의 파노라마를 보여준다. 대표적인 희곡으로 『아나톨(Anatol)』, 『사랑의 유희(Liebelei)』, 『윤무(Reigen)』, 『광활한 땅(Das weite Land)』, 『베른하르디 교수(Professor Bernhardi)』 등을 들 수 있다. 만년에는 희곡보다 소설을 썼으며, 대표적인 단편소설로 『구스틀 소위(Leutnant Gustl)』, 『엘제 양(Fraulein Else)』, 『야외로 가는 길(Der Weg ins Freie)』 등이 있다.
이 소설집 『어떤 이별 : 슈니츨러 명작 단편선』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오스트리아를 대표한 작가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단편들을 모은 고전 명작 단편선이다. 국내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구스틀 소위」, 「눈먼 제로니모와 형」을 비롯하여 아직 국내에 번역 소개되지 않은 「홀아비」, 「친숙한 여인」, 「안드레아스 타마이어의 마지막 편지」, 「새로운 노래」, 「총각의 죽음」 등 모두 15편의 단편이 발표 연대순으로 수록되어 발간 의미가 크다. 이관우 역자에 따르면 슈니츨러는 죽음과 성(性)의 문제를 문학에 녹여 내며, 특히 같은 시대를 산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 정신분석의 기법을 통한 인간의 심리 상태를 예리하게 묘사한다. 이 책 속의 대다수 작품 또한 남녀 사이의 사랑과 증오를 그리면서 나아가 그것과 연관된 죽음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다양한 양태로 등장하는 죽음을 통해 인간의 자기중심적이고 타산적인 성향과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심리를 세밀하게 다룬다. 이처럼 죽음과 연관되어 이루어지는 인간의 속성 묘사는 문학을 넘어 심리분석학적 경지에 이를 정도로 치밀하다. 슈니츨러가 문학에서의 프로이트라고 불리는 이유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바탕을 둔 듯 인물의 내면세계로 깊이 파고들어 인간의 위선과 약점을 예리하게 들춰내는 심리묘사에 있다.
무엇보다도 슈니츨러는 인간의 의식이 단순히 눈앞에 드러나는 표면적인 것에 머물 뿐, 그 배후나 밑바닥에 감춰져 존재하는 또 다른 힘을 보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을 경우 누구에게나 예기치 않은 죽음이 닥칠 수 있음을 경고한다. 특히 단편 중 「상속」, 「3종의 영약」, 「친숙한 여인」, 「라이젠보크 남작의 운명」, 「새로운 노래」, 「삼중의 경고」 등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죽음이 그러하다. 책 속 등장인물들의 여러 죽음과 다양한 사랑, 그 속에 감춰져 있는 심리 변전을 따라가다 보면, 그동안 보지 못했던 자신의 깊은 내면을 어느새 마주하게 될 것이다. 「상속」의 경우 일반적으로 상속이라고 하면 뜻하지 않은 거액의 상속만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때로는 영 달갑잖은, 상식을 벗어나는 불쾌한 체험이 '상속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사람이 죽는 것도 한순간에 일어나는 일이며, 이 소설에서는 놀랍게도 오랜 동안 달콤한 불륜의 순간을 공유하던 정부(情婦)가 죽고 그 법적 남편이 찾아와 시비를 가리자며 결투를 청한다. 결투는 당시 슈니츨러의 시대로부터 200년 전에 없어진 서양의 풍습이다. 한창 나이의 젊은 여성이 갑자기 죽듯, 총알 한 방이나 샤브르의 한 획에도 깊은 상처를 입어 생명을 잃기도 하는 연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육신과 욕망은 좋은 대비를 이룬다.
이 책의 표제작인 「어떤 이별」도 불륜 이야기이다. 「상속」과 비슷하게 여기서 알베르트와 안나는 갑작스런 이별을 맞이하는데 그 원인은 안나의 뇌(腦)티푸스로 인한 죽음이다. 다른 점은 알베르트는 끝내 자신이 고인에게 누구였는지 밝힐 수가 없고 그 남편이나 주변 사람들도 다 사정을 모른 채 일단은 고인의 죽음에 대한 애도에만 몰입한다. 의사는 환자에게 버젓이 남편이 있었음을, 아니 알베르트를 '오빠'로 착각한다. 알베르트는 지금 애인이 갑자기 죽었다는 사실에 슬퍼 미치기 직전인데 그걸 누구한테 표현을 못하고 속으로 삭이는 과정이 이 소설의 핵심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Die Toten schweigen」) 익숙한 표현이 소설의 제목이다. 슈니츨러의 단편 소설 제목인 줄 몰랐던 한국 독자들도 마치 한국어 격언이라도 되듯 문구 자체가 낯설지 않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 중에서는 분량이 28페이지나 되니 꽤 긴 편이다. "이봐, 오늘 프라터에서 마차를 타고 산책하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전혀 관심 없어.)" "나도 그렇게 믿고 있었어. 하지만 누군가가 우연히 우리를 들여다볼 수도 있저." "누구인지를 알아내는 건 불가능하지." "부탁인데 우리 다른 곳으로 가." "자기 좋을 대로 하자."(p.80~81) 마차를 타고 공원의 돌며 밀회를 즐기는 불륜 관계의 남녀가 주고받는 대화 속에 19세기 비엔나의 유한 귀족들의 타락을 엿볼 수 있는 대화가 오간다. 주위엔 별로 관심 갖지 않고 버젓이 자신들만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담았다. 요즘도 밀회라면 남들 눈을 피해야 할 텐데 19세기 유럽 귀족들은 시내 공원을 밀회 장소로 택할 정도였다는 점을 드러내는 작가의 의도적 표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불륜, 사회 부조리, 귀족의 성적 타락 등만 슈니츨러의 관심을 끈 것은 아니다. 「눈먼 제로니모와 형」은 형제애를 다룬다. 이 작품에서 카를로가 어렸을 때 장난을 치다 동생 제로니모의 시력을 잃게 만든다. 그 후로 성인이 된 카를로는 동생을 데리고 다니며 구걸을 해 동생의 생계를 책임진다. 그러나 어느 날 알 수 없는 어떤 사람이 제로니모에게 다가와 "형한테 내가 금화 한닢을 주었는데 혹시 형이 다 차지하지 않게 조심할 것"을 귀띔한다. 물론 특별한 이유없는 거짓말이다. 지금껏 동생을 성심껏 돌봐온 그가 그런 일을 한 적이 없고 그런 큰돈을 적선 받은 적도 없다. 그러나 동생은 이제 형을 계속 의심하게 된다. 형은 의심을 그칠 줄 모르는 동생 제로니모의 마음을 편하게 해줄 생각으로 진짜 금화 한 닢을 훔친다. 그러나 동생은 의심을 거두기는커녕 지금까지 얼마나 자주 형이 자신을 속였을지를 생각하며 본노한다. 이때 경찰이 찾아와 절도 혐의로 두 형제를 체포하려 든다. 동생 제레니모는 형이 큰돈을 적선 받은 적이 없었으며 어떻게 해서 금화를 손에 지녔는지 모든 진상을 파악하게 된다. 제레니모의 마음에 평안이 깃들고, 형은 다시 안식을 찾은 동생을 보고 "더 바랄 게 없다'며 마음을 놓는다. 미국 역사의 위대한 인디안 추장 제로니모와의 이름이 왜 거기서 나와? 하는 뜬금없는 생각이 나게 해 슬며시 혼자 미소지어본다. 장편 전성시대에 오랜 만에 읽어보는 단편소설의 간결하고 사회 풍자가 강렬한 작품을 읽으니 맑은 하늘처럼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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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프로이트라 불리는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작품 『어떤 이별』은 연인과의 이별, 사람과 사람의 이별을 넘어 인간이 이 세상에서 마주하는 '죽음'의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며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예리하게 분석한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눈먼 제로니모와 형」, 「구스틀 소위」, 「총각의 죽음」, 「친숙한 여인」 등 15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작품 속에 어떤 이는 계단에서 넘어져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어떤 이는 사고사가 나며, 죽임을 당하기도 한다. 반면에 자살을 생각하던 이가 갑작스러운 타인의 죽음으로 자신이 살아갈 희망을 보이기도 하면서 '죽음'이 자신의 처지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사랑하는 이의 죽음 그리고 타인의 죽음에 대한 고통의 크기가 다른 이해타산적인 인간 심리를 녹여낸다. 「안드레아스 타마이어의 마지막 편지」의 시작은 다음과 같다. '나는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다. 내가 살아있는 한 사람들이 나를 조롱할 것이고, 아무도 진실을 알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실은 나의 아내가 나에게 충실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천지신명께 맹세하며, 내 죽음을 통해 이것을 증명하겠다.' p.222 타마이어는 독특한 피부색을 띠고 태어난 아이로 인해 주변 사람들로부터 조롱당하고 비웃음의 대상이 되자 자신의 확신과 아내의 명예를 위해 죽기로 결심한다. 작품에는 타마이어가 각종 문헌과 사료들을 조사하며 기록을 남기며 고군분투하는 내적 갈등을 묘사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의 결단이 아내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희생처럼 비치지만 자신의 죽음으로 아내의 정숙을 밝히려고 하는 타마이어는 과연 부인을 위한 것일까?라는 생각이 든다. 어려운 상황을 함께 극복해 나가기보다 자살을 선택하는 것은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으로부터의 비겁한 도피가 아닐까. 우리는 세상에서 다양한 '죽음'의 양상을 목도한다. 사랑하는 이의 부재에 대해 세상이 갑자기 멈춰버리는 듯한 극한의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는가 하면, 타인의 죽음으로 자신의 과오를 덮을 수 있다며 위안을 받는 이기적이고 모순적인 심리를 가지기도 한다. 문학의 프로이트라 불리는 명성답게 아르투어 슈니출러는 단편 곳곳에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이들의 심리묘사를 날카롭게 분석하며 '죽음'앞에 인간의 이기심, 공포, 좌절, 슬픔 등의 감정을 절묘하게 녹여냈다. 슈니츨러의 작품은 처음 접했는데, 이별 그리고 죽음에 대한 주제로 풀어낸 『어떤 이별』은 단편선이라 그런지 초반에는 책장이 잘 넘어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느새 작가가 주인공들의 감정선에 녹여낸 인간의 위선적인 단면들을 들춰내며 읽다 보니 마지막 단편까지 호기심이 가는 책이었다. 책장을 덮으며 영원한 이별 앞에 아름다운 이별이 있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죽음이라는 영원한 이별의 기로에서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며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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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나 그 제자 융의 세계는 난해하고도 기괴하면서 또 한편으로 (깊은 곳에) 철저한 논리와 맥락이 (숨어) 있습니다. 그들과 동시대를 살았으며 주제의식을 공유한 작가이고 또 그들처럼 의사였던 아버지를 둔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작품 세계도 그러하지 않을까, 처음에는 긴장하고 읽었으나 읽을수록 재미있고 약간 우울한 분위기의 작품들조차도 유쾌하게 읽혔습니다. 표지의 그로테스크함에 한 발 물러셨던 독자들에게라면 전혀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해 주고 싶습니다.
<어찌 이런 멜로디가>. 원어인 독일어 제목을 보면 "Welch eine Melodie"인데, 이 번역서에 수록된 모든 작품 서두에 이렇게 원어 제목이 병기되어 있습니다. 영어로 풀면 감탄문인 "What a melody"이죠. "어찌 이런 멜로디가!" 내용을 보면 어떤 전설인지, 혹은 우화인지 모르게 펼쳐집니다. 예전에 괴테도 이른바 데몬이라는 것의 존재를 말하면서, 누구한테나 불시에 찾아오는 천재적 영감을 언급했습니다. 20세기의 수학자, 과학자였던 마틴 가드너 역시 "아이디어는 누구나 떠올릴 수 있다"고 하며 꼭 천재나 전문가의 산물이 아니라고 한 적 있죠. 여기서는 어느 소년에게 저 기막힌 멜로디가 떠올랐고 그걸 우연히 주워서 발표하여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된 작곡가가, 성공에도 불구하고 참된 자신의 작품과 재능이 아님을 한탄하고 (누군지 모를) 그 천재를 질투하여 마침내 자살에 이르렀다는 이야기입니다. 기막힌 악상, 멜로디 등은, 우리 시대에도 평범한 작곡가에게 한 번 정도는 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대개 그런 이들은 이른바 "원 히트 원더"로 끝나고 말지만 말입니다.
<상속>. 우리는 "상속"이라고 하면 어떤 뜻하지 않은 거액의 상속만 떠올리기 쉽지만 때로는 영 달갑잖은, 상식을 벗어나는 어떤 불쾌한 체험이 "상속물"로 다가올 수도 있는 법입니다. 사람이 죽는 건 정말로 한순간에도 벌어지며, 여기서는 놀랍게도 오랜 동안 달콤한 불륜의 순간을 공유하던 정부(情婦)가 죽고 그 법적 남편이 찾아와 시비를 가리자며 결투를 청하는 내용입니다. 결투는 작가 슈니츨러의 시대로부터 최소 이백 년 전에 없어진(비엔나 아니라 어느 도시에서도) 풍습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한창 나이의 젊은 여성이 갑자기 죽듯, 총알 한 방이나 사브르의 깊은 상처 한 획에도 연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육신은 그 생명을 잃기 일쑤이고...
이 책의 표제작인 <어떤 이별>도 불륜 이야기입니다. <상속>과 비슷하게 여기서 알베르트와 안나는 갑작스런 이별을 맞이하는데 그 원인은 안나의 뇌(腦) 티푸스로 인한 죽음입니다. 다른 점은, 알베르트는 끝내 자신이 고인에게 누구였는지 밝힐 수가 없고 그 남편이나 주변 사람들도 다 사정을 모른 채 일단은 고인의 죽음에 대한 애도에만 몰입한다는 거죠. 의사는 환자에게 버젓이 남편이 있었음을 아니 알베르트를 "오빠"로 착각하고... 알베르트는 지금 애인이 갑자기 죽었다는 사실에 슬퍼 미치기 직전인데 그걸 누구한테 표현을 못하고 속으로 삭이는 과정이 포인트입니다. 이런 건 작가가 실제로 겪어 봐야 이런 절절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Die Toten schweigen." 원어로 보니 "죽은 자(들)은 말이 없다"네요. 여튼 여기서는 대표 복수의 용법이므로 뭐가 되었든 차이가 없습니다. 이게 소설 제목, 게다가 슈니츨러의 단편 제목인 줄 몰랐던 사람도 마치 한국어 격언이라도 되듯 "죽은 자는 말이 없다"라는 문구 자체는 어디서 들어 보았을 것입니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 중에서는 분량이 28페이지나 되니 꽤 긴 편입니다. "이봐, 오늘 프라터에서 마차를 타고 산책하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전혀 관심 없어.(p80)" 20세기 아니라 19세기라고 해도 비엔나의 청춘, 혹은 유한 귀족들은 타인에게 전혀 관심 안 두고 자신들만의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21세기의 서울이라고 해도 큰 차이는 없습니다.
마치 <상속>에서처럼, 어떤 남녀, 여기서는 프란츠와 엠마라는 이름을 가진 이들이, 법적 배우자 모르게 바람을 피우고 그날도 밀회를 즐깁니다. 공개리에 행하는 마차 산책이지만 아무도 신경 쓰는 이가 없으므로 "밀회"의 일종이죠. 뜻하지 않게, 험한 날씨 때문에 마차가 전복되고 프란츠만 죽은 채 마부와 엠마는 살아납니다. 마부는 자신에게 당국과 피해자가 과실을 추궁할까 두려워 잠적합니다. 이 사건 뒤에 숨은 어떤 사연이 밝혀지면 엠마의 안정된 생은 그날로 끝장입니다. 독자들은 혹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작품에서처럼 남자가 여성을 살해하고 더러운 야심을 펼 첫걸음을 떼는 이야기일까 착각했을 수도 있겠으나 여기서는 정반대로 여자가 아닌 남자가 죽었죠.
우리가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할 때는 대개, 죽은 자가 진상을 알고 있으나 이미 죽었으니, 우리만 입을 다물면 무슨 탈이 생기겠는가? 같은 컴컴한 속내를 드러내는 의도입니다. 이 소설에서도 처음에는 그런 의도로 엠마가 가위 눌려 잠꼬대에서 떠들었으나, 이는 그녀의 무의식일 뿐입니다. 남편인 교수가 그녀의 잠꼬대 이야기를 해 주자, 그녀는 자신 안에 그토록 이기적이고 타락한 것이 감춰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합니다. 엠마는 자신의 양심이 어떻게 하면 다시 편안해질지 알고 이내 빠른 결단을 내립니다. 여기서 "죽은 자는 말이 없다"란 뜻은, "죽은 자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으니 산 나라도 이야기해야겠다"라는 뜻으로 (즉 반대로) 들립니다. 사람 사는 세상은 이처럼, 최소한의 양심이 살아 있어야 최소한의 사회 작동이 가능합니다.
<눈먼 제로니모와 형>. 이 이야기에서는.... 음, 형 카를로가 어렸을 때 장난을 치다 동생 제로니모의 시력을 잃게 만듭니다. 그 후로 성인이 된 카를로는 동생을 데리고 다니며 구걸을 하는데, 어느날 알 수 없는 어떤 사람이 갑자기 제로니모에게 다가와 "형한테 내가 금화 한 닢을 줬는데 혹시 형이 다 차지하지 않게 조심할 것"을 귀띔합니다. 물론 형은 기가 막힐 일인 게, 지금껏 동생을 성심껏 돌봐 온 그가 그런 일을 한 적이 없고 그런 큰 돈을 적선받은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생은 이제 형을 계속 의심하게 되는데, 형은 의심을 그칠 줄 모르는 동생 제로니모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줄 요량으로 진짜 금화 한 닢을 훔치고 맙니다(!).
그러나 동생은 의심을 거두기는커녕 지금까지 얼마나 자주 형이 자신을 속였을지를 생각하며 분노에 떠는데, 이때 경찰이 찾아와 절도 혐의로 두 형제를 체포하려 듭니다. 그제서야 동생은, 형이 큰 돈을 적선 받은 적이 없었으며 어떻게 해서 금화를 손에 지녔는지 모든 진상을 파악하게 되며 마음에 평안이 깃들고, 형은 다시 안식을 찾은 그런 동생을 보고 "더 바랄 게 없다"며 마음을 놓습니다. (그러나 이제 두 형제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결말은 과연 해피앤딩인지 아니면.... 참 독자의 마음을 어둡게 만드네요. 이런 불행한 운명이 닥치는 데에 어떤 잘못을 한 사람은 사실 없습니다. 구태여 따지자면 악마의 마음을 갖고 제로니모의 마음에 의심을 불어넣은 그 정체불명의 신사죠. 미국역사의 위대한 추장 제로니모와는 아무 관계가 없으며 애초에 선주민 이름이 아닌 별명이죠. 하필 그 제로니모도 말년에 형편이 어려워 엽서를 파는 등 구걸 비슷한 불쌍한 처지에 몰리기도 했습니다.
맨마지막의 <어느 천재의 이야기>와 <삼중의 경고>는 서로 붙은 이야기라고 봐도 됩니다. 아마 <어느 천재...>를 읽지 않고 <삼중의...>를 읽으면 정확한 의미 파악이 힘들 것입니다. 참... 어찌 보면 우습고 슬픈 우화이며, 다른 한편으로 마치 동양의 <장자>에 나올 법한 신비한 분위기인데 이처럼 인과 연이 묘하게 엮여 나비효과(....)를 만든다는 사연은 확실히 서구적이라기보다는 동양적입니다. 그런데 마차를 모는 청년이 끝까지 그 정체불명의 섭리의 목소리에 굴하지 않고 "젠장! 애초에 왜 세상을 이따위로 만들어야 했죠?"라고 대드는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거참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이때로부터 대략 삼십 년 후에 로캉탱이 "구토"를 했는지도 모를...
이 책에 실린 모든 이야기는, 어떤 의식의 흐름처럼 알쏭달쏭하지 않고 명확한 서사가 흐르기에 "재미있습니다." 어렵지만 유익한 작품, 뭐 이런 분위기가 아니라는 걸 알려 드립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으로부터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된 서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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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부터 가을 느낌이 난다고 하면 내가 너무 감성적인 성격인걸 들키는 기분이다. 그렇게 생각해서인지, '어떤 이별'같은 제목은 가을에 더 어울린다.그런가 하면 ' 어떤 만남'같은 제목은 가을보다는 봄에 더 어울릴 것같다. 굳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대보라고 하면 만남이라는 단어와 이별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 탓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봄과 가을, 두 계절의 차이 같은게 생각나서다.
가을 느낌에 어울리는 표지답게 꽤 나이들어 보이는 남자의 무척 심각한 표정의 흑백 초상화다. '혹시 이사람이 작가 슈니츨러인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제목도 쓸쓸함을 연상 시키는데, 표지도 분위기를 제대로 잡고 있다. 제목과 표지에 걸맞게 책에 나오는 여러 편의 단편 소설들은 사랑하는 남녀의 이별이나 죽음을 다뤘다.
작가 아르투어 슈니츨러는 이 책으로 처음 만나는 작가다. 오스트리아의 의사이자 소설가겸 극작가였다.슈니츨러는 작품에서 주로 성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었단다. 그리고 같은 시대를 살았던, 프로이트의 영향으로 정신분석 기법을 통해 인간의 심리상태를 날카롭게 묘사했다고 한다.
슈니츨러가 살았던 시절의 연도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이다. 지금부터 대략 1 세기전에 살았던 셈인데, 그 시대에도 남편의 눈을 피해 다른 남자를 만나는 여자들이 있었다는게 신기하게 생각됐다. 물론 이 책은소설인걸 잘 안다. 그런데 소설은 당시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이니, 소설가 슈니츨러는 충분히 가능한 얘기를 썼을 것이다. 남녀의 사랑에 시대의 구분 따위는 필요없는 것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여러 작품에 드러난 남자의 질투심도 흥미있었다. ' 예나 지금이나 남자는 본능적으로 소유욕을 갖고 있나보다 '하는 생각을 했다.
본문에 나오는 문장중에 '죽음은 화해시킨다.'는 문장이 있다. 그렇다. 아무리 미워했던 사람도 죽으면 미워하기 보다는 대개는 그리워하게 된다.책 날개의 작가소개에 나온대로 슈니츨러는 심리묘사에 뛰어났다.특히 불안해 하고 초조해 하는 남자의 심리를 아주 잘 표현했다.모처럼 명작을 읽으며 가을 맞이를 제대로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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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작가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명작 단편선인 < 어떤 이별 >에 마음이 갑니다.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대표작 중의 하나로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를 읽은 적이 있어서 그 감흥을 떠올리면서 만나게 된 작품이기도 해서 더 애정을 가지고 읽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다양한 작품들이 이 명작 단편선에 포함되어서 부푼 마음으로 그 문학세계에 빠져볼 수 있었답니다. 특히 그의 작품세계는 죽음, 성을 주요하게 다루면서 마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도 조우하는 느낌으로 그 문학세계에 빠져들 수 있어서 더 집중하여 몰입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듯합니다. 단편선이어서 많은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쁨과 풍성함이 있습니다. 너무나도 만족스럽고 마음이 넉넉해지는 기분이 됩니다.
작품 '어찌 이런 멜로디가'부터 시작해서 이 단편선의 대표제목이기도 한 '어떤 이별', 유명한 작품인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구스틀 소위' 등의 많은 작품들이 의사였던 작가의 이력만큼이나 특별하고도 섬세하게 와닿습니다. 재미있게 빠져들 수 있는 매력적인 요소들을 갖추면서도 단편이 주는 몰입감과 빠른 전개감, 그리고 눈을 뗄 수 없는 장면의 전환 등으로 더 재미있게 와닿습니다. 유럽풍의 특별한 소설이라는 점에서도 매력적이었지만 그네들의 인간애, 인간의 본질을 다루는 방식이나 관점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음에 대해서 파악하는 계기가 되기도 해서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특별한 소설로 초대받고 싶은 이들에게 적극 권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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