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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은 인간학이다.” 카를 라너(Karl Rahner:1904~1984)가 한 말이다. 국내에서 발간된 책의 제목으로도 사용됐다. 이 말은 라너의 신학 사상을 명쾌하게 요약한 것이라 생각한다. 인간이란 신을 향해 절대적으로 ‘초월’하는 존재다. 인간에 관해 말한다 함은 신에 관해 말함이요, 신에 관해 말한다 함은 인간에 관해 말함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인간 중심’과 ‘신 중심’은 상반되는 것이 아니고, 동일 현실을 가리킴을 말한다.
중세부터 이어져 온 신학은 관념론, 형이상학을 주된 방법론으로 삼았다. 그에 따라 신과 인간 세상을 연구하고 이해했다. 신학이 ‘인간 세상과 분리된’, ‘세상에 문을 걸어 잠근’ 학문 영역으로 여겨진 이유다. 라너의 신학은 스승인 하이데거와 근대 사상가들의 영향이 컸다. ‘위로부터’가 아닌 ‘아래로부터’의 학문, 즉 인간과 세상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당시 가톨릭 신학계 큰 파장을 넘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한다. 가톨릭 교회는 이를 계기로 쇄신과 적응의 계기를 마련한다.
심오해 보이는 배경을 가진 <일상>은 48쪽으로 작고 얇다. 라너의 방대한 저술과 비교해보면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다. 본문은 9개의 꼭지로 구성되었고, 각 꼭지 당 4쪽 정도다. 즉, 일상의 신학, 일하는 것, 걷는 것, 앉는 것, 보는 것, 웃는 것, 먹는 것, 자는 것, 일상에서의 은혜 체험이 그것이다. 익숙하고, 시시해서 ‘무뎌지기’까지 한 제목과 짧은 내용이지만 문장과 어휘가 품은 함의는 그렇지 않다.
라너가 신학자는 시인이 되어야 함을 가르친 것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겠다. 신학적 표현이 아름다우면서도 의미가 포함된 시적 어휘의 성격을 가져야 함을 말하며, 자신의 주변과 세상, 인간에 대한 시인다운 감수성에 바탕을 둔 공감 능력과 의미 발견이 신학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기에 그렇게 말했으리라.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의 이유도 같은 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신학적으로는 더한 의미를 가진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으나 여기서는 글의 성격상 생략하기로 한다.
짧은 본문에 대한 요약은 라너의 생각과 가르침에 누가 될까 우려된다. 더 나은 선택은 일부 내용 인용이라 생각한다. 한계가 있겠지만 말이다.
“일상은 꿀도 타지 않고 미화하지도 않은 채 견디어 내야 한다.(중략) 인간이 있는 곳이란 곧 자유롭고 책임있는 행위로 실재(實在)의 숨은 깊이를 드러내는 곳이다.” (8쪽)
“참으로 인간다운 삶이란 더없이 진지한 자유 안에서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포착되는 영원한 하느님의 무게를 지닌 삶인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찾아 얻게 하는 것은 실상 이념이나 고상한 말이나 자아 반영이 아니라, 이기심에서 나를 풀어 주는 행위, 나를 잊게 해 주는 남을 위한 염려, 나를 가라앉히고 슬기롭게 해 주는 인내 등이다. 누구든 인간으로서 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영원의 핵심을 위해 조금이나마 시간을 낸다면, 그는 작은 것들도 가이없는 깊이를 지녔음을, 영원의 전조임을, 문득 깨닫게 될 것이다. 이는 마치 온 하늘을 담고 있는 물방울처럼 그 자체이상의 무엇이며, 자체 너머를 가리키는 상징 같은 것, 다가오는 무한성을 알리는 전갈에 스스로 휩쓸린 전령 같은 것, 본연의 현실이 이미 다가왔기 때문에 우리 위에 드리워지는 실재의 그림자 같은 것이다.”(9쪽)
라너는 글의 시작을 릴케의 말로 삼는다. “너의 일상이 초라해 보인다고 탓하지 말라. 풍요를 불러낼 만한 힘이 없는 너 자신을 탓하라.” 글의 시작이 독자로 하여금 자책과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느껴 거부감마저 들 수 있는 문구다. 그럼에도 글의 결론처럼 느껴진다. 인간은 ‘일상의 풍요로움을 불러낼 힘’을 갖고 있어 희망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우리가 일상을 '초월'하는 희망의 이유다.
사족: 신학적인 글이라 배경이 다르신 일반 독자들에게 다소 거부감이 들거나 생소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기 저기 숨어있는 라너의 인간 삶과 행동에 대한 통찰은 신학적 제한을 넘어섭니다. 추천의 이유입니다. 장애 요인 하나를 더 하면, 초판 발행 연도가 1980년이라는 점입니다. 번역 어투에서 느껴지는 낯설음의 이유입니다. 낯설음은 거부가 아닌 친숙함으로 극복가능하지 않을까요? 도구는 네이버 사전으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