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제목은 지극히 상징적인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정작 소크라테스와 헤르만헤세의 이름은 몇 번 등장하지도 않는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의미하고 헤르만헤세는 ''문학''을 의미한다. 저자는 일반인들에게 멀게만 느껴지는 철학이라는 요소를 생기넘치는 문학의 요소와 접목시키고 있다. 장-폴 사르트르, 임마누엘 칸트, 프리드리히 헤겔의 이름이 좀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르나 그들이 이야기하는 ''철학''이라는 것은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물들의 목소리로 흘러나온다. 고양이와 개, 버드나무와 오리나무, 철도와 도로 등 너무나 실존적이고 그래서 당연하게만 느껴지는 사물들이 실은 고유한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상징할 수 있는 놀랍도록 흥미로운 존재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미셸 투르니에는 이 작업을 하기 위해 독특한 방식을 도입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의 사물을 독단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반드시 그것과 대비된다고 생각되는 사물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다. 즉 반대되는 위치에 있는 존재나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양방을 더욱 명확학 인식하도록 돕는다는 의도이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그 기준이다. ''남자와 여자'', ''유목민과 정착민'', ''시간과 공간''같은 익숙하게 대립되는 개념도 있지만 ''두려움과 고뇌'', ''황소와 말'', ''돈 주앙과 카사노바''와 같이 언뜻 보아서는 그 기준이 애매모호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들 역시 (비슷한 속성을 지니고 있는 듯 하지만) 합리적인 분기점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바로 미셸 투르니에의 고유한 신화적 상상력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돈 주앙과 카사노바는 둘 다 희대의 바람둥이로 알려진 인물이지만 여자에 대해 가지는 인식은 천양지차였다. 돈 주앙은 기본적으로 여자들을 ''경멸''했으며 마치 사냥감처럼 취급했다. 그는 그가 등장하는 희극 작품들 안에서 한 떼거리의 사냥개같은 여자들에게 쫓기는 동시에 그들을 정복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카사노바는 몸과 마음을 다해서 여자를 사랑했다. 그에게 여자의 냄새란 생명 그 자체의 냄새다. 그래서 카사노바는 방랑하는 모험가에다 도박꾼이며, 어떻게 해 볼 수 없이 불성실한 사내이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그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는 여자의 모든 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가장 은밀한 내면까지 말이다. 이와 같은 ''대립시키기'' 작업이 유용하고도 귀중한 것은, 평소 당연하게 여기는 개념의 속성에 대해 다시금 곰곰이 생각해보고 새로운 일면을 드러내기 위한 일고찰에 중대한 동기를 제공해 준다는 점 때문이다. 신선한 발상과 사고의 전환은 우리에게 무궁무진한 발전과 진전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출발점이다. 다르게 생각하는 ''창조적 사고''라는 것을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껏 만끽할 수 있다(하지만 그와 같은 즐거움에 가속도가 붙으려면 책의 절반은 넘어가야 한다. 이 작가의 익숙하지 않은 방식에 익숙해져야 하니까). |
| 수많은 단어들의 나열, 도대체 이 단어들이 서로 동등한 하나의 항으로서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물과 불, 주인과 하인 등 보는 그 순간부터 서로 반대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들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것들은 그렇게까지 확연해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조금은 익숙치 않고 또 조금은 어색한 묶음마냥 느껴졌었다. 하지만 작가가 그 둘을 서로 반대되는 개념으로 인식하고 설정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지금껏 생각해온 것과는 다른 이유가 존재하기 때문이리라. 이렇듯 작가는 하나의 개념이 서로 다른 개념과 짝을 이루며 그 반대어로 인하여 자신의 의미가 조금 더 부각되고 확실해진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것이 왜 반대어인지를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 번도 그렇게까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에, 작가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나의 두뇌에 울려퍼졌고, 나의 생각이 짧았음을 그제서야 느끼며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같은 방이지만 그 느낌에서부터 확연한 차이를 불러 일으키고 더 나아가 서로가 담고 있는 의미에서는 진정 반대어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다락방과 지하실, 같은 좋아한다는 감정이지만 결코 같을 수 없는 사랑과 우정, 지금껏 내가 알지 못했던 단어와 단어 사이의 관계 속에 파묻혀 있다 보니 머리가 아파옴을 느낀다. 무심코 사용했던 단어 하나하나였건만, 알고보니 난 그와 같은 것들에 대해 너무도 쉽게 내뱉었던 것 같다.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지도 못한 체,… 그런 나에게 그 단어 안에 담겨져있는 2차적 의미까지 파악하는 것은 무리였던 걸지도 모르겠다. 원서를 읽은 것이 아니기에 본래의 프랑스어 판에서는 어떠한 문체로 이와 같은 이야기들이 풀려 나갔을지 잘 모르겠다. 한국어로의 번역 과정에서 보여준 김정란 님의 따스함이 미셸 투르니에의 철학적 사고에 문학적 힘을 불어넣지 않았나 라는 생각을 해본다. |
| 내가 투르니에를 알게 된 것은 그의 대표작 마왕을 통해서였다. 그 때 받았던 둔중한 충격을 잊을 수 없던 나는 즉시 그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버렸고, 그의 책이라면 무엇이든 찾아 읽었다. 그의 수필집은 소설과는 달리,재치와 통찰력으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이 책 역시 그러한 면모가 잘 나타난 책이다. 보통 사람들이 평범하게 지나치는 것에서 그는 우주를 발견한다! 한낱 포크마저 인간 본질의 상징으로 끌어올리는 그의 상상력과, 인간 군상들의 내부를 꿰뚫어보는 시선에서는 놀랄 수 밖에 없다. 또한 그의 문장에서는 재치가 넘친다. 결코 경박하지 않으며 읽는 이를 매혹시키는 재치는 투르니에만의 경륜과 감각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리라. 그리고 이 책은 우리에게 철학적 사고의 계기를 제공한다. 아주 먼 옛날에는 모든 사람들이 철학자이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철학이란 우주의 아스라한 별처럼 멀어지고,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오로지 냉혹한 생존법칙 뿐이다. 그런 속에서 투르니에는 이 책을 통해 일상의 사물을 통한 철학적 사유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한 권의 책으로 누릴 수 있는 사치이다. 책을 덮으며, 이 책 역시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지닌 끝없는 철학과 지식을 잘 포장해낸 책이다. 이제 바라는 건 어서 그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 것-그래야 아직까지 번역되지 않은 그의 책들이 어서 나올테니 말이다. |
|
미셸 투르니에의 글은 부담스럽지 않다. 2년 전에 출간되었던 [짧은 글 긴 침묵]에서도 그러했듯 결코 어렵고 난해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글이 마구 읽혀대는 수필류는 절대로 아니다. 그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아주 친근한 개념으로부터 철학적 사유의 극단을 보여주는 작가인 것이다. 시인 김정란씨가 번역한 이번 책 역시 이와같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명상을 보여준다.
이 책의 목차를 보면 투르니에가 순전히 생활로부터 얻은 철학적이고 신화적인 사유를 전개하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웃음과 눈물, 건강과 병, 프로펠러와 지느러미, 철도와 도로, 피에로와 아를르캥, 유목민과 정착민, 소금과 설탕 등등이다. 우리 생활 속에서 익히 볼 수 있는 사물과 개념들에서 투르니에만의 사유가 펼쳐지는 것은 그의 사유체계가 신화적 상상력에 깊은 영향을 받고 있어서인지 모른다.
그리스 로마 신화라든지, 삼국유사와 같은 우리의 전통 신화를 살펴보면 사물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컨대 수선화나 히야신스가 피게된 전설, 혹은 울산바위가 생겨나게 된 전설들이 이야기의 형식을 통해 자연스럽게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고대의 사유체계를 보여준다고 볼 수 있는데 고대인들은 자연을 인간적인 것으로 보고 그와 의사소통하며 하나의 인격체로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인격적인 자연에 대한 존경과 배려가 신화적 상상력 속에 포함되어 있기 마련이다.
미셸 투르니에의 산문 역시 이와 같은 신화적 상상력의 모습을 담고 있다. 예컨대 [지하실과 다락방]에 대해서 투르니에는 '과거를 향해 몸을 돌리고 있기 때문에 다락방은 기억하고 보존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지하실에서는 앞으로 다가올 계절이 익어가고 있다. 마늘은 천장에 매달려 있고, 쇠로 된 선반 위에서는 포도주가 익어가고 있다'처럼 다락방과 지하실을 마치 사람이 사유하는 형태로 묘사해놓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소금을 지혜의 상징으로서 전통적으로 중년의 나이와 관련시키고 설탕을 유년기에 비유하는 것, 스푼은 포크 덕분에 모성적인 부드러움을 보여주고 있다는 등 그의 비유가 주로 사물을 인격을 지닌 대상으로 바라보는 데에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번뜩이는 사유의 정점! 미셸 투르니에의 마술적인 언어에 다시 한 번 경탄한다. [인상깊은구절] 경멸은 우정을 죽여 버린다. 반면에 사랑의 격정은 사랑하는 대상의 어리석음, 비겁함, 천박함 따위에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다고? 때로 사랑은 대상의 탐욕, 욕심 등의 가장 나쁜 단점들 때문에 더욱 격렬해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추잡한 것을 먹고 살 수도 있기 있기 때문이다. |
| 문학은 삶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결국 철학과 만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문학과 철학의 만남이 행복한 결혼으로 이어지는 경우란 그리 많지 않다.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앞서 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결국은 각자의 길로 갈라서게 된다. 사정이 이렇게 된 것은 이 둘이 사용하는 언어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철학은 논리적인 이성의 언어를 사용하는데 반해서 문학은 상상력을 동원한 감성의 언어를 사용한다. 서구 근대 철학의 시조로 불리는 르네 데카르트도 이 차이에 주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심오한 사유가 철학자들의 글보다도 시인들의 글 속에서 더 잘 나타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놀랄지도 모른다. 시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열정과 상상력의 힘에 의해서 글을 쓰기 때문이다. 인간의 내면에는 숫돌 안에 빛이 숨겨져 있듯이 과학의 씨앗이 숨겨져 있다. 철학자들은 이성을 사용하여 그 씨앗들을 끄집어낸다. 반면에 시인들은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 씨앗들이 튀어나오게 할뿐만 아니라 빛을 발하게 한다. (<개인적 사고="">에서) 그렇다고 철학과 문학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결혼시켜 심오한 사상을 잉태한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니체의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나 사르트르의 <구토> 등이 바로 그러한 텍스트에 속한다. 니체와 사르트르는 철학자인 동시에 작가였고, 지금까지도 불멸의 명작으로 살아남은 그들의 저작은 철학 서적인 동시에 문학 작품이다. 이렇게 볼 때, 위대한 작가들을 후대까지 살아남게 하는 진정한 힘은 작품 속에 그가 심어 넣은 철학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내가 보기에,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내리는 프랑스의 작가 미셸 투르니에 역시 후대까지 살아남을 위대한 작가들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의 철학적 에세이 <소크라테스와 헤르만="" 헤세의="" 점심="">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이에 공감하리라. 이미 제목에서 눈치챌 수 있듯이 <소크라테스와 헤르만="" 헤세의="" 점심="">은 철학과 문학의 만남을 펼쳐 보이고 있다. 그런데 그 만남의 자리는 격식을 차려 코스별로 진행되는 고급 레스토랑의 잘 차려진 저녁 식탁이 아니라, 손으로 막 집어먹어도 무방한 노천 카페의 허름한 점심 탁자이다. 따라서 그 자리는 무겁지 않고 가볍다. 따분하지 않고 유쾌하다. 그렇다고 해서 진지함이 전혀 없는 경박한 자리인 것은 결코 아니다. 잠시 딴전을 피우다가도 다시 주제로 되돌아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게 되고, 주위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껏 웃다가도 어느 순간 가슴을 베는 선뜻한 칼날이 느껴져 입을 다물게 되는 그런 자리이다. 바로 그런 촌철살인의 순간에, 우리는 한때 철학자를 꿈꾸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대신에 작가의 길로 들어선 미셸 투르니에의 숨은 이력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을 번역한 김정란 시인이 <개념의 거울(le="" miroir="" des="" idees)="">이라는 원제를 버리고 <소크라테스와 헤르만="" 헤세의="" 점심="">이라는 다소 동떨어진 제목을 붙인 것도, 이러한 미셸 투르니에의 좌절된 철학자의 꿈을 고려한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나는 이 책의 성격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원제를 그대로 살리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되어, 이 책의 새로운 제목이 조금 불만스러웠다. 다행히 2003년 같은 출판사에서 개정판을 내면서 책의 제목을 원제에 보다 가까운 <생각의 거울="">로 바꾸었다고 한다. 아마도 나처럼 느꼈던 사람들이 제법 많았던 모양이다. 거울은 시계만큼이나 자주 철학적 성찰의 대상이 되어 온 오브제이다. 프랑스의 젊은 문화사학자 사빈 멜쉬오르 보네가 쓴 매력적인 책 <거울의 역사="">에 의하면, 대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에게 거울을 자주 들여다보라고 했다고 한다. 거울은 ''너 자신을 알라''의 보조자로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신격화하지 않도록 해주며, 자신의 한계를 알아서 자만에 빠지는 것을 피하도록 해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작가 미셸 투르니에의 ''생각의 거울''은 그렇게 진지하고 무거운 윤리적ㆍ도덕적 소명과는 무관한 것들을 비추고 있어 들여다보기에 즐겁다. 남자와 여자, 웃음과 눈물, 동물과 식물, 유목민과 정착민, 태양과 달 등 마치 거울에 비춘 것처럼 우리의 의식 속에서 대립하고 있는 두 개의 개념을 짝 지은 57개의 쌍, 114개의 개념을 비춰 보여주고 있는 그의 ''생각의 거울''에서 문학과 철학은 놀라울 정도로 잘 어울리고 또 서로 닮은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거울 놀이를 통하여 철학과 문학의 결혼을 주선하는 이 책의 기획의도에 대해서 미셸 투르니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고립된 개념은 사색에 매끈한 표면을 제공하기 때문에 사색은 손을 댈 수가 없다. 그러나 반대 개념을 그 개념에 대치시키면, 그 개념은 파열되어 버리거나 투명해져서 그 내적 구조를 보여 준다. 문화는 문명에 대치시켜 보았을 때 비로소 그 파괴적인 힘을 드러낸다. 황소의 목은 말의 엉덩이의 의해서만 분명해진다. 스푼은 포크 덕택에 그 모성적인 부드러움을 보여 준다. 달은 환한 대낮에만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우리에게 이야기해 준다. (16쪽, ''들어가는 말 : 114가지 개념 읽기'') 과연 그렇다. ''사랑''이라는 덧없는 열정에 지나치게 많은 것을 걸고 있는 현대 서구 문명의 취약성은 ''우정''이라는 굳건한 토대에 비추어보아야만 비로소 느껴진다. 부유하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는 ''주인''의 물질적 우월성은 ''하인''이 지니고 있는 헌신, 성실함, 검소함 등 고결한 자질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서로를 비추는 과정 속에서 뜻밖에 발견하게 되는 이러한 통찰들은 자잘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손가락으로 그걸 집어드는 순간, 그 만만치 않은 무게 때문에 놀라게 된다. 그 통찰들은 방대한 독서와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사유가 고도로 압축되어 있는 밀도 높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와 헤르만="" 헤세의="" 점심="">을 읽으면서 독자인 우리가 저자 미셸 투르니에와 함께 즐기는 점심은 가볍지만 매우 배부른 것이다. 철학적 개념들에 흔히 붙어 있기 마련인 소화하기 어려운 지방질이 말끔히 가셔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싱싱하고 단백질 풍부한 영양식을 마련한 미셸 투르니에의 이 놀라운 요리 솜씨가 철학이 아니라 문학에 빚지고 있음은 두말 할 나위 없다.소크라테스와>거울의>생각의>소크라테스와>개념의>소크라테스와>소크라테스와>구토>짜라투스투라는>개인적> |
| 책 제목은 마음에 안 들지만-'소크라테스와 헤르만 헤세의 점심'이라니 말이다.- 이 작가의 글을 한 번 쯤 읽어 보고 싶어서 이 책을 사게 되었다. 우리 주위에는 많은 대수롭지 않은 것들, 대수로운 것들이 놓여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그냥 그렇게 거기 있으려니, 원래 그러려니 하고 지나치기만 했지 한 번도 이 글에서처럼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도대체가 '목욕'은 '우파'적 성향이고, '샤워'는 '좌파'적 성향이라는 대위법을 평소에 생각할 인간이 얼마나 되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투르니에는 이런 대립항들을 끌어다가 생각을 자유롭게 풀어 나가고 있다. 분명 내겐 이해하기 어려운 철학적 사유들도 있지만 어떤 것들은 읽다가 낄낄거리게도 된다. 예를 들면 이런 것 -고양이는 명예를 걸고 그 무엇에도 도움이 되지 않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한 번 쯤 스치고 지나갈 이런 것들에 대한 새로운 개념 정리도 즐거운 놀이가 될 성 싶다. |
|
뚜르니에하면 떠오르는게 있습니다. 고요하고 그윽한 버려진 수도원에서 숲과 풀벌레들을 벗삼아 유쾌하게 웃음짓는 노년의 신사... 전에 불문학자인 김화영 선생님이 미셀 뚜르니에를 인터뷰한 적이 있었죠. 김선생님은 그의 글을 통해 이미 접해진 듯 뚜르니에가 살고 있는 수도원에 익숙한 눈놀림을 하고 있었고, 뚜르니에는 지음을 만난 듯 유머러스한 이야기를 들려주더군요. 철학자가 되기 꿈꾸었으나 교수자격시험에 떨어진 후 오히려 수필가로 더 성공했다죠.
그를 지적 스노비즘에 빠져 사는 사람으로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지만 그는 별로 개의치 않는 듯 합니다. 그의 이 책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그는 어깨와 목의 힘을 한껏 빼고 가볍게 개념과 범주들을 넘나듭니다. "소크라테스"하면 떠오르는 것이 이런 경쾌함입니다. 플라톤의 진중한 무게가 답답하게 느껴질 때 일수록 소크라테스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플라톤의 두텁고 강단있어보이는 입술과 달리 소크라테스는 양 미간에 지혜의 즐거움이 배어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보고 싶어집니다.
하나의 범주는 반대범주을 통해서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는 것은 재미있는 사고게임에 빠져들게 하곤 합니다. 해체주의자들에게 의미가 무한히 소급되는 이유는 아마도 이 반대범주들이 하나로 고정되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뚜르니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상정하는 대립범주들 뿐만 아니라 전혀 그럴 듯 하지 않은 대립들 속에서도 멋진 통찰을 구성해냅니다. 전 고양이와 개의 대비가 눈에 쏙 들어왔습니다.
뚜르니에는 "경찰견"은 있어도 "경찰 고양이"가 없다는 장 콕도의 말로 은근히 고양이 옹호론을 폅니다. 끊임없이 충성할 주인과 동족을 쫓아다니는 개와 달리 고양이는 스스로 어떤 것에도 도움이 되기를 거부하고 자기 동족으로부터 도망치죠. (책의 후반부에 이 대립은 좀 더 추상화되어서 일차적 인간 대 이차적 인간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그건 직접 사서 보시고요^^) 묘심(고양이의 마음)이랄까? 눈 틈 사이로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제 수염을 흩날리게 놓아두고 구석에서 눈을 반쯤 뜬 채 명상하듯 누워있는 고양이... 흠... 이건 바로 뚜르니에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이 책은 한뜻 출판사에서 불완전하게 번역되었던 적이 있는 책인데 다시 모든 내용을 담아 번역되었답니다. 김정란 시인의 번역이 이전의 책 보다 훨씬 좋군요. 시인이셔서 그런지 우리말을 구수하게 살리시는 능력도 빼어납니다. 봄바람이 불기시작하는 오후에 고양이의 마음으로 이 책을 들고 혼자만의 생각의 징검다리 놓기를 해보심도 좋을 듯... 적극 추천합니다. ^^ [인상깊은구절] 고양이는 집 안에 남아서 난로가나 등잔 아래에서 빈둥거리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꾸벅꾸벅 졸기 위해서가 아니라 깊은 생각에 잠기기 위해서이다. 고양이가 쓸데없이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게으리기 때문이 아니라 지혜롭기 때문이다. 개가 일차적 동물이라면 고양이는 이차적 동물이다. |
| 철학과 역사에 대해 어렵고 난해한 책은 이해를 못하는바.. --; 가볍게 쓰여진 책부터 많이 보려고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부류의 책은 도리어 과학서적을 더 좋아하는데.. 이거.. 그래도 나름대로는 많이 팔렸다고 하기에 그냥 집어 본 책입니다. 전체적으로 너무너무 재미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물에 대한 철학적(이라고 작가는 얘기하던데..) 사색을 위해 반어적 의미의 것들을 빚대어 72가지 주제를 다룬 책이라고 하던데... 실제 내용은 빚대어 설명한 것까지 114가지이죠. 예를 들면, 남자와 여자, 사랑과 우정, 돈주앙과 카사노바, 웃음과 눈물 등입니다. 문학과 철학의 교감이라고 서문에서 밝히는데.. 글쎄요. 별로 재미 없습니다. 단지 작가의 말은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책을 내는 사람이 독자의 이야기를 들으려 한다는 점은 참 좋습니다. 한국에서 책이 출간되면서 한국독자를 위해 쓴 작가 서문은... 요즘은 많이 흔한 것이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마음을 잔잔하게 해 주네요. 특히 굉장한 애정과 성의가 담긴 듯한 서문이었습니다. |
| 작은 사소한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즐거움을 다시한번 느끼게 해주는 책이었다 하지만 이 전에 읽었던 미셸 투르니에의 '예찬'에서 받았던 느낌보다는 마음이 전해지지 않는 책이었다.. '예찬'보다는 작가의 평생을 통한 생각이 담겨져 있다는 느낌이 덜해서 그때문에 약간 실망스럽기도 했다. 이만한 책을 보는것도 쉽진 않지만 그래도 좀더 저자의 모든 것이 느껴지는..마음으로 다가오는 글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래도 세상을 맛없게 살아가지 않도록.. '생각을 한다'라는 인간의 즐거움을 다시한번 일깨워줄 수 있는 한번쯤은 읽어봄 직 한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