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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역사를 아는 것은 역사실록에 적혀져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승리한 사람들의 시각으로 적어낸 역사적인 사료를 우리는 그게 사실인양, 진실처럼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역사를 이끌어갔던 왕이나 신하에 대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게 또한 역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역사를 만들어갈때 역사속에 실제 살았던 민초들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은 많지 않다. 그들이 전쟁속에서 어떻게든 살았을 민초들의 삶은 실제로 많이 알지 못한다.
우리가 민초들의 삶을 알수 있는 것은 이렇듯 영화속에서나, 소설속에서 만나볼 수 있다. 병자호란(1636년)이 일어난 후의 참담한 광경을 볼수 있는 책이다. 역사를 보면 늘 가슴아픈게 우리의 역사는 늘 침략을 받았다는 것이다. 전쟁속에서 어머니와 여동생, 아내와 딸아이를 모두 잃은 한 남자의 이야기를 읽으며 이런 느낌이 더했다.
이신李臣, 아버지는 내게 이씨 왕조의 신하로 살라 하고, 이신貳臣, 세상은 내게 다른 왕을 섬기라 한다.
이신李臣, 그는 조선의 신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후 청나라 군사들에게 아내와 딸과 함께 잡혀 청으로 끌려가던중 아내와 딸은 죽고, 죽다 살아나 청의 황제의 신하로 칙사가 되어 조선으로 돌아왔다. 죽은줄 알았던 아내가 살아있다는 말을 듣고 아내의 흔적을 찾아헤매지만 쉽지 않다. 이신은 좀처럼 잠을 이룰수 없다. 순간적으로 잠이 들어도 늘 아내와의 행복했던 기억들을 꿈으로 꾼다. 혹은 아내가 화살을 맞고 죽어가던 모습을 꿈으로 꾼다. 운종가의 거리에서 보았던 아내의 모습은 꿈결에서 보았던듯 아스라하기만 하다.
이신이 떠올리는, 청으로 가는 포로들인 조선인들의 모습은 그 때의 왕이었던 인조에 대해, 친명 정책들을 펼쳤던 신하들에 대한 울분때문에 울컥했다. 영화 「최종병기 활」에서의 조선인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될 것이다. 청으로 가는 곳에서 왕에게 몸시중을 들어야 했던 여인들, 거부를 하게 되면 그 자리에서 칼을 맞았던 모습들과 그것을 지켜봐야만 하는 조선 남자들의 처절한 모습들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책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신의 기억으로 치욕의 날들을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이런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는 이신에게 조선은 자신의 나라였으나 왕도, 신하들도 같은 나라의 사람이 아닌것처럼 느껴진다. 수많은 밤들을 불면으로 보낸 밤시간들이 그의 심정을 알려준다. 백성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던 사대부들을 벌하고자 그들에게 복수하고자 했다.
추억이란 당시에는 얼마나 행복한지 알 수가 없다. 먼 시간이 지난 후에 비로소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행복했던 시절로 영원히 돌아갈 수 없다. 오직 꿈에서만 다시 볼 뿐이다. (95~96페이지)
작품을 읽다보면 같은 여성의 입장에서 울분이 터져나올 수 밖에 없는데, 포로로 끌려가 청나라 군사들의 몸시중을 들다 조선으로 돌아온 여성들을 환향녀라고 불린다. 하지만 그 여성들을 받아주는 이가 없었다. 소위 사대부들은 환향녀인 정실아내와 같이 살수 없다고 이혼을 주청하기도 했고, 자결을 종용하기도 했다.
아내 선화를 찾는 이신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아내에게 주겠다고 당혜를 만들고 딸아이인 난이에게 주려고 꽃신을 만들던 이신의 마음 저면에서는 수많은 갈등으로 싸웠을 것이다. 잘못된 판단으로 조선의 사대부와 왕은 청나라 황제에게 치욕스러운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늘 침략의 위협을 받았던 조선의 역사 속 백성들의 속내를 알수 있던 작품이었다. 책을 다 읽고, 리뷰를 쓰는 이 시간에도 마음 한 쪽은 저려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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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소설을 좋아하지만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시대가 있다. 그 시대의 이야기는 아무리 재미있고 흥미진진해도 가능하면 읽지 않으려고 하는데 바로 일제강점기와 선조, 인조가 임금으로 있을 때이다.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인재는 있지만 쓸 줄 모르고, 생각이 틀에 맞게 짜여진, 답답하고 안타까운 사람들이 득실대 결국 피해는 백성들이 볼 수밖에 없는 구조들. 이 시대를 보면 왜 조선이란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었는지 알 수 있다. 이 책의 시대적 배경은 병자호란 직후의 조선이다. 전쟁 통에 청나라로 끌려갔던 이신은 청나라 황제의 칙사가 되어 조선으로 돌아온다. 이신의 아버지는 광해 군을 도와 무기를 만들고 나라의 안위를 걱정했지만 인조반정으로 죽음을 당했다. 청과의 외교를 선택했던 광해와 달리 반정 세력은 척화론을 주장하며 명과의 관계를 강조했지만 그로 인해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전쟁으로 인해 고통 받는 것은 순전히 백성들 뿐. 50만 명이 넘는 평범한 백성은 청의 포로가 되어 개만도 못한 삶을 살고, 그 중 상당수를 차지했던 여자들은 치욕과 학대를 당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조선으로 돌아온 여자들에게는 ‘환향녀’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이들은 남편과 아버지들로부터 왜 살아 있느냐는 말을 듣게 되고 정절을 위해 자살을 권유하기도 한다. 또한 죽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침을 뱉고 욕을 한다. 결국 대부분의 여성들은 자결을 선택하기도 하고, 자결하지 않은 여자들은 자결로 위장해 살해당하기도 하고, 죽지 못해 살기도 한다. 정작 책임져야 할 이들은 여전히 명나라를 숭배하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하려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청나라의 칙사가 되어 돌아온 이신은 자신만의 복수를 준비하게 되는데... 역사는 돌고 돈다고 말한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도 변하지 못한 그들로 인해 조선은 결국 일제강점기를 맞이하며 역사 속에서 사라진다. 내가 역사를 공부하면서 조선이란 나라를 싫어하는 이유는 사대부들의 생각. 오랜 시간 이어온 그 생각의 뿌리가 치가 떨리도록 싫기 때문이다. 그 징그러운 모습이 하나도 변하지 않고 이어져 지금의 우리 정치판을 이룬 것 같아 너무 싫다. 말을 백성을 말하지만 진심으로 백성을 국민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안위만 생각했던 사람들. 그들이 벌 받지 않고 면면이 이어져 지금의 고위 공직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만의 리그를 위해 높은 벽을 만들고 테두리를 형성한다. 모두가 평등하다고 말하는 민주사회에서 평등하지 않음을 은연중에 내비치며.... 읽은 동안 화가 났고 왜 읽었을까 후회를 했다. 조선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아 답답했다. 결국 그 혼란 속에서 피해를 입는 건 국민들뿐인데... 이신(貳臣)이란 두 마음을 품은 신하 혹은 두 임금을 섬긴 신하라는 말이다. ‘아버지는 내게 이씨 왕조의 신하로 살라했지만, 세상은 내게 다른 왕을 섬기라 한다.’ 라는 책 표지의 말이 아프고 아려왔다. 시대를 탓하기엔 이신의 인생이 아프고, 시대를 탓하지 않기엔 울화가 치민다. 전쟁을 빌미가 된 사대부들은 전쟁이 끝나고 더 높은 벼슬에 올라 세상을 호령하려 드는 모습에서 지금의 정치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구나 생각했다. 그들이 그 자리에 있는 건 결국 ‘국민이 미련해서?’ 일까? 모르겠다. 세상이 변하기를 바라지만 세상사람 모두 다 내 마음 같지 않고, 내 마음 같아 뽑은 사람도 그 자리에 오르기만 하면 모두 변해버린다. 지난 아픈 과거를 반복하지 말라고 역사는 말한다. 하지만 그 역사를 배우면서도 똑같은 행동을 한다. 세상은 변하지 않는데 그 나라의 수장이 없어진다고 세상이 달라질까? 답답하면서 서글픈 생각이 드는 건 나뿐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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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14년(1636년). 병자년의 겨울. 임금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세 번 큰절을 올리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했다. 이듬해 3월이 되자 조선 원정군의 주력부대는 다시 압록강을 건넜다. 임금은 청의 신하가 되어 궁궐로 돌아왔으며 신료들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더 높은 품계를 받은 신하들도 있었다. 누구도 전쟁에 대해, 패배와 굴욕, 죽음과 상처에 대해 책임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꽃이 피고 또 졌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다. 그리고...
우리가 잊고 싶어하는 역사, 혹은 무심코 잊어버리고 사는 치욕의 역사는 오늘날 우리의 또 다른 삶을 반추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최근에 이런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세월호 선장과 병자호란 당시 지도자들의 서로 닮았다는 것이다. 배와 승객을 버리고 제일 먼저 도망간 선장과 아무런 방어대책이 없는 상황에서 백성들을 전지에 남겨두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국왕은 모두 리더의 책임감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는 거울과도 같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오랑캐 황제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의 역사를 만들었다. 인조는 과거 정권을 뒤엎는 데는 성공했지만, 집권 이후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데는 실패했고, 그 피해는 백성의 피와 눈물로 고스란히 나타났다.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일을 우리가 다시 돌이켜봐야 하는 이유는, 이것을 비단 과거의 일이라고 치부하기엔 현재의 상황이 심상치가 않은 것이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소통과도 같다. 그러니 기억하고 싶지 않은 비참한 역사 속에서도 우리는 오늘날의 자화상을 발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조는 피눈물 흘리는 노파의 오열을 듣고서야 병자호란이 끝난 지 1년 1개월 만에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했고, 박근혜 대통령 역시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14일 만에야 겨우 국민들에게 사과했다. 지도자가 무능하면 그 시련이 국민의 처절한 고통으로 고스란히 전가된다 김훈은 <남한산성>에서 조선 왕이 오랑캐의 황제에게 이마에 피가 나도록 땅을 찧으며 절을 올리게 만든 역사적 치욕을 정교한 프레임으로 복원한 적이 있다.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무기력한 왕과 그를 둘러싼 권력 다툼속에 고통 받는 민초들의 삶은 참담하고 쓸쓸했다. 강희진이 그리는 <이신>에서는 평범한 행복을 꿈꾸었으나 포로사냥의 희생자가 되어 가족을 잃고 인간성조차 말살 당한 남자를 내세워 착한 백성들의 한과 서늘한 분노를 대변한다.
도대체 누가 누구더러 절개를 다시 회복하라고 하는가? 김씨 부인이 그 동안 공부한 바로는 조선의 그 누구도 청나라에서 돌아오는 아녀자들에게 손가락질 하거나 정절을 지키지 못했다고 시비할 자격이 없었다. 혹시 그런 말을 할 선비가 있다면 그는 이미 죽은 사람들일 거라고 김씨 부인은 믿었다. 그들이 무슨 권리로 회절강을 만들어, 그렇잖아도 끔찍한 삶을 경험한 여인들에게 또 다른 멍에를 지우는 촌극을 벌인다는 말인가? 또 한번 버린 정절이 물로 씻는다고 회복될 수 있단 말인가? 만일 회절강이 있다면 그 강물에 가장 먼저 몸과 마음을 씻어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교지를 내린 오랑캐의 주구, 즉 임금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시련이 환향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병자호란의 희생양으로 청국에 끌려갔던 조선의 아녀자들은 환황녀라는 이름으로 멸시당하고, 정절을 훼손했다는 이유로 죽음에 이른다. 대체 누가 그들을 그 지경으로 몰아넣었는가? 참혹한 전쟁을 막지는 못하고 백성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던 이들이 간신히 살아온 아녀자들에게 정절 운운하는 대목은 기가 찰 정도이다. 사대부들은 심양에서 돌아온 환향녀들과 재결합을 거부하고, 이혼하고 새 장가를 들 수 있도록 해달라고 왕에게 주청을 올렸다. 더러운 몸으로 조상의 제사를 받을 수 없다는 핑계였다. 수많은 사대부가의 환향녀들이 쫓겨나거나 자결을 강요 받았고, 그에 불응할 경우 은밀히 살해되는 경우도 드문 일이 아니었다. 염치 같은 것은 애초에 없는 망종들이었던 것이다. 자연히 환향녀들의 자살이 끊이지 않았다. 아녀자들이 전쟁을 벌인 것도 아니고, 전쟁에 진 것도 아녀자들의 잘못이 아니건만 전쟁으로 인한 단죄가 왜 아녀자들의 몫이 되어야 하느냔 말이다. 일본군에게 성노예로 끌려간 위안부를 두고 그들이 자발적으로 따라다녔다고 말하는 망언만큼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어불성설의 참담한 책임 회피는 세월호를 둘러싼 현재의 우리 현실에서도 보여지는 모습이라 안타깝고, 화가 난다. 환향녀(還鄕女).. 고향[鄕]에 돌아온[還] 여자[女]가 뭘 어쨌단 말인가. ‘화냥년’이라는, 손가락질의 표적으로 변질된 원통하고 서러운 이름. 나라의 패전으로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청국에 끌려간 여인들이다. 당시에 임금은 교지를 내려 한강, 소양강, 금강, 예성강, 대동강 등을 회절강이라 칭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아녀자들에게 그곳에서 회절하는 정성으로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렇잖아도 끔찍한 삶을 경험한 여인들에게 임금이 무슨 권리로 회절강을 만들고, 또 한번 잊어버린 정절이 물로 씻는다고 회복이 될 수 있단 말인지. 만일 진짜 회절강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곳에서 몸과 마음을 씻어야 할 사람은 오랑캐 황제에게 치욕스럽게 고개를 숙여야 했던 임금이 아니었을까.
이것이 하늘이 정한 이치라면 하늘이 존재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인간의 의지뿐이다. 그것만이 천명이다. 나쁜 왕은 죽여야 한다... 이신은 중얼거렸다. 오랫동안 품고 있던 진심이었다. 입 밖에 내고 보니 그가 정말로 원했던 것은 바로 그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왕을 죽여야 한다.
주인공 이신은 칙사라는 높은 지위까지 올랐으나 여전히 서얼이고, 사랑의 열병을 앓는 사내이며, 칼잡이이고, 잃어버린 아내와 딸의 꽃신을 만드는 갖바치였다. 이씨 왕조의 신하(李臣)로 살라는 뜻을 담아 이름 지어졌으나, 다른 왕을 섬긴 이신(貳臣)이 된 그를 통해서 국가에 복수하는 것은 평범한 백성들 모두의 염원이 아니었을까. 이신은 청나라의 칙사가 되어 조선으로 돌아와 마찬가지로 청으로 끌려갔던 아내와 딸을 찾으면서,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을 져야 할 이들을 향해 복수를 계획한다. 이신(李臣)에서 이신(貳臣)으로 그의 삶이 바뀌게 만든 그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이들에게 말이다. '평범한 남자'를 통해 17세기 조선의 사대부를 단죄하는 일은 물론 그리 쉽지도, 만만치도 않다. 하지만 그의 입장에서 쓰여진 이야기라서, 병자호란을 전후로 한 인조와 서인 세력의 무능과 전쟁의 후유증이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전달된다. 하룻밤도 편하게 잠들어본 적 없는, 고독하고 고독한 남자 이신. 모든 것을 잃어 버린 그의 통탄한 마음은 착하게 살았기 때문에 별다른 저항도 할 수 없이 죽어간 백성들의 그것과도 같다. 강희진은 이토록 참혹한 비극이 있었다면 전쟁을 부른 당사자들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함에도 흐지부지 끝나버린 400년 전의 역사에 주목해서 이 작품을 쓰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17세기 조선 사대부들의 모습은 오늘날의 사회지도층과 크게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400년이 지나도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 안타깝고 부끄럽다.
진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만화경처럼 눈에 비춰질 뿐, 무엇이 비춰지게 할 것인가를 정하는 것은 바로 권력이었다. 중요한 것은 백성들에게 그들이 진실을 알고 있다고 믿게끔 만드는 것이다. 임금은 그 일을 아주 능숙하게 해내고 있었다.
강화도 나루터에서 몸을 던진 여인들, 청으로 끌려가 모진 매질과 고신에 죽어간 사람들, 가족과 모든 것을 잃고 어두운 골짜기에서 죽어간 수많은 백성들의 원한은 아무도 갚아주지 않았다. 그 모든 일을 벌인 임금은 여전히 임금이고, 사대부들은 여전히 사대부였으니까 말이다. 어차피 허구인데 더 끝까지 가버리지, 결말이 조금 허무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나는 작가의 이런 시도만으로도 어쩐지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과오는 있으나 책임이 없는 그들에게 보란 듯이 이신처럼 그런 존재가, 현재의 세상에서도 언젠가는 나타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희망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치욕스러운 역사를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고,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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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를 읽으려면 숲의 한 나무가 아니라 숲 전체를 봐야합니다.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에는 한 남자의 삶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청나라로 아내와 딸과 함께 끌려갔으나 돌아온 것은 자신 뿐..이제는 고향이었던 그곳에 복수를 하러 왔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아내와 딸을 잊지 못하는 순정파 입니다. 이 책은 한국 역사의 아픈 부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학창 시절 들었던 '병자호란' 당시, 포로로 갔던 사람들 중에는 사대부의 아녀자들과 딸이 포함되어 있었답니다. 먼 타국에서 여성이 겪을 몹쓸짓을 생각하니 너무 눈물이 나올 뿐이었어요. 그렇다고, 다행히 살아온 여인들에게는 따뜻한 위로 대신 환향녀(還鄕女) 이라 말하며 스스로 목숨을 던지기를 나라에서는 바라고 있었죠. 피해자인데 보살펴주지 못할 망정 이렇게 대하다니...이것을 읽고 있자니 원하지 않게 위안부로 끌려가야만 했던 그분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왈칵 쏟아지기도 했답니다. 누구를 위한 나라이며 정부였을지 지금이나 그때나 변함이 없는거 같습니다.
조선의 왕을 섬겼던 남자 '이신'은 모든 백성들의 아픔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더한 삶을 살았을 누군가도 있을 거에요. 다만, 역사는 기록하지 않았을 뿐이고요. 병자호란은 임진왜란에 비해 기간은 짧았지만 치욕은 더 컸답니다. 하지만, 누구도 책임을 지지 하지 않았고 임금은 백성을 외면해버리고...지금은 침략이라는 단어가 사라져 버렸으나 여전히 남아있는 그 잔재들은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는 청나라의 칙사로 오게 된 '이신' . 살아있을지 모르는 아내와 딸을 찾아헤매면서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책임져야 하는 이들에 대해 처벌을 하려고 합니다. 정절만을 강조하는 사대부들 자신들의 죄를 결코 들추지 않으면서 나약한 여인네들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 덮혀버리는 이들을 보고 있자니 화가 나기도 합니다. 오히려, 임금이 회절강을 만드는데 그곳에서 씻는 다면 정절이 회복이 된다는 말을 도대체 누가 만들었을지...오히려 그곳에 가야 할 사람은 임금과 신하들 입니다.
<이신>은 단지, 한 편의 소설로 끝마쳐서는 안됩니다. 역사의 한 부분이고 아픔이며 반드시 기억하고 다시는 이런 어리석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비록, 현재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나 이제는 경제전쟁이 있습니다. 칼 대신 경제로 타국의 위험을 받기도 합니다. 역사를 알아야 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미래를 대처하기 위함입니다. 같은 일을 반복되지 않게 하는 것..더불어, 한 나라에 대한 자부심과 자긍심을 길러줘야 하는데 이 점이 한국은 부족합니다. 물론, 저 역시 역사를 깊이 있게 배우지 못함은 부끄럽습니다. 개인적인 관심이 아니라 필수적인 사항을 가르쳐야 함에도 그러지 못한점과 여전히 고통은 한 나라의 국민이 받고 있으니 4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으니 씁쓸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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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처로웠다. 이상하리만큼 이신 그의 감정에 몰입이 됐다.전쟁은 이렇게 한 인간,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놓고 피폐하게 만든다. 청의 침입이 없었다면 이신의 인생은 어땠을까. 사랑하는 선화와 딸 난이와 백년해로 했을까. 아니..전쟁이 없었다면 신분차이 때문에 선화와 맺어질 수 없었겠지.
병자호란. 그는 서자의 신분이었지만 전쟁의 위험으로 평소 흠모해왔던 반가의 선화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아내와 딸, 노모, 여동생 모두 청으로 끌려가게 됐고, 그 와중에 가족들은 죽음을 당한다. 소중한 것을 모두 잃어버린 이신은 삶에 대한 의욕을 잃게 되지만, 청에서 그는 황제의 목숨을 구한 인연으로 그의 신임을 얻게 된다.
이신은 조선에 칙사로 파견이 되는데,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어쩔 수 없었던 그는 아내가 살아있다는 소식에 그녀를 찾아나선다. 한편 인조는 그를 내금위장으로 삼고는 역도를 추적해달라고 요청한다.
이 작품을 지배하는 정서는 이신의 감정이었다. 그의 상실감과 선화를 향한 그리움, 조선에 대한 이중감정이 내내 작품을 끌고 간다. 조선 왕도 어려워하는 황제의 칙사로 귀국했지만, 정작 그에겐 이 벼슬에 아무런 미련도 없었다.
그리고 패전으로 겪어야 하는 조선인들의 굴욕과 치욕은 상당히 세밀하게 묘사됐다. 그럼에도 분노보다 오히려 차분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대부들의 굴욕, 당시 조선의 지배층을 보면, 그런 굴욕을 겪을 수 밖에 없었겠다 싶었고, 그런 치욕을 겪었던 부녀자들은 그 시대에 태어났다는 게 죄였다. 연민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인조.뜻밖이었다. 지금까지는 권좌에 대한 미련과 집착이 광기에 가까운 왕이었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작품에선 아주 치밀하고 전략적으로 권력을 움켜쥐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익히 알고 있는 뻔한 캐릭터가 아니라 새로웠다. 얼마 전에 읽었던 인조가 등장하는 '소현세자 독살사건' 속 뻔한 인조와는 꽤나 대조적이었다. 그렇기에, 백성의 안위보다는 권력에 집착했던 인조가 더욱 눈꼴 사나웠지만.
불꽃같았던 이신의 마지막. 더 이상 그에게는 조국도 벼슬도 부귀영화도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잘못된 시대를 만난 것은 그가 어쩔 수 없는 불행한 운명이었지만 그와 선화가 맺어진 것은 그에겐 더할 나위없는 행복한 운명이었을 것이다. 책을 덮든 뒤에도 한참 여운이 남았다. 그의 의지와 선택. 선화를 향한 한 사내의 지순한 사랑과 전쟁으로 무너져버린 인간 이신의 삶에 그가 겪었을 고통과 그리움과 공허함이 전해져왔다. 소설의 주인공 그 사나이의 불행이 전염이라도 된 듯 왜 이렇게 내 마음까지 허무해져왔던 것일까. 그에게 공감한 것이다. 공감하게 하는 것, 미워하게 하는 것,사랑하게 하는 것, 분노하게 하는 것, 연민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소설의 매력이다. 오랫만에 소설 읽는 즐거움을 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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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으로 제7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강희진씨가 3년이란 시간을 분투 끝에 신작 소설 '이신'을 발표했다. 솔직히 유령을 읽어보지 못했지만 탈북자 청년이 가진 정신적 고통과 현실적 어려움을 잘 표현한 작품이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기에 저자의 작품에 가졌는데 신작소설 '이신'을 먼저 읽게 되었다.
시대에 흐름의 따라 역사 속 인물들이 재평가 된다. 특히나 조선왕조 500년 속 임금 중 개인적으로 가장 불운한 왕이라고 생각한 인물이 있다. 그는 시대가 낳은 불운한 왕 '광해군'... 정통을 따지는 조선시대에 서자이며 차남으로 자신의 형제를 죽이고 후금과 명 사이에서의 중립외교와 인목대비를 폐모시키고 영창대군을 죽인 것은 인조반정의 명분이 되어 폐위되고 만 왕이다. '이신'은 광해군을 호위하던 내금위장의 아들인 '이신'이 병자호란으로 그의 아버지가 바라던 삶이 아닌 청나라의 왕을 모시는 인물로 칙사로 조선에 돌아온다.
인조와 서인으로 인해 발생한 병자호란으로 이신은 물론이고 수많은 백성... 특히나 여성들의 엄청난 희생을 치르게 된다. 그 여인들 속에는 이신의 아내인 선화와 그의 딸이 있다. 이신 역시 서자라 선화를 아내로 맡기 힘들었지만 시대가 그와 선화를 부부로 맺어준다. 허나 그들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고 칙사로 고국으로 돌아 온 이신은 어딘가 살아있을 거라 믿는 아내와 딸을 백방으로 찾기 위해 노력한다. 헌데 그렇게 그리던 아내를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스치듯 보게 된다.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인물의 집근처에서... 여기에 알 수 없는 자객 두 명은 또 누구인지...
살인 사건을 둘러싸고 알 수 없는 기류가 흐른다. 누구 무슨 목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는지... 이 살인사건은 이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는 아내 선화의 오빠가 깊이 관련되어 있으며 그들의 목표는 하나다. 여기에 인조임금 역시 자신을 옥조아 오는 손길에 대한 방어책을 마련하지만...
이신이란 인물이 가진 고뇌와 아픔, 자신을 믿는 왕에 대한 신의와 조선인으로 살기를 포기한 사연 등이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다. 무엇보다 연약한 여자들이 겪어야 하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무척이나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기득권 권력층에 속해 있으면서 사대부란 이름만을 앞세워 자신들의 아내, 딸이 겪어야 했던 아픔을 이해하고 용서하기 보다는 내치거나 죽음으로 몰고 가는 상황들이 안타깝고 화가 난다.
이신을 버티게 한 의미가 없어지자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 담고 있는 한 가지 일을 결행에 옮기게 된다. 이신이란 인물과 시대가 가진 아픔, 여인들의 슬픔이 잘 묻어난 작품으로 마치 한 편의 역사 드라마를 보는 듯 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란 생각이 들 정도로 흥미롭다.
옳은 판단을 하지 못한 인물들로 인해 고통은 항상 백성들의 몫이다. 역사적 비극을 불러 온 인물들의 책임은 흐지부지 사라지고 백성들의 고통만 남았을 뿐이다. 이와 비슷한 일은 현재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함에도 현재 우리 정치는...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이신이란 인물을 통해 조선시대로 시간 여행을 하였고 그 시대가 가진 아픔, 슬픔, 고통 등을 온전히 느끼며 읽은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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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 속의 역사는 조각조각 나 있다. 학교 다닐 때 배웠건만 그때는 아무런 기억도 없었고 성적도 좋지 않아서 버려두었던 역사를 팩션이라는 소설 장르로 하나씩 맞춰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물론 소설이라서 역사와 똑같지 않다는 것을 감안하고 보더라도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는 책들이고 더구나 나처럼 역사에 재미가 없는 사람이라면 재미도 붙일 수가 있다. 지금은 같이 읽기로 [아리랑]을 읽고 있는데 우리네 역사는 어찌 그리도 아픈지 읽어도 읽어도 그 시절에는 참 암담했다라는 생각을 한다.
우리가 일보본의 침략을 받은 것은 일제강점기인 그때가 처음은 아니다. 임진왜란때도 당했었다. 그나마 이순신 장군이 있었기에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일까. 이 책의 배경이 되고 있는 선조 이후도 평안한 나날은 아니다. 이제는 중국의 침입이다. 그때 당시는 명나라 청나라였다. 우리는 그들 강대국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고 그들의 황제를 우리의 황제로 모시며 우리의 임금은 그들의 임금에게 복종을 맹세해야 했다. 우리는 왜 이토록 치욕적인 과거를 가지게 되었던 것일까.
이신은 황제의 칙사다. 서얼 출신이었던 그는 중국 황제의 칙사가 되어 이곳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아무도 그를 함부로 할 수 없다. 아니 오히려 그를 받들어 모셔야 하는 그런 존재가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아내와 딸을 찾고 있다. 중국으로 끌려갈 때 강에 빠졌던 그녀. 죽은 목숨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그는 그녀를 찾고 있다. 어디에선가 분명 살아있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말이 다. 잠을 자도 눈을 떠도 그의 눈 속에는 오직 그녀 뿐이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자신의 처 외에도 첩을 둘 수가 있었다. 그렇게 둘 수 있었으면 그들에게서 태어난 자식들도 똑같이 인정해 줘야했건만 그들은 서출이라고 손가락질 받았고 인정받지 못했고 관직에도 제한을 받았다. 그것은 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궁이 아닌 왕비가 아닌 후궁에게서 태어난 왕자는 세자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신이 자신의 출신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한 것도 사실일 것이다. 그런 그의 마음은 아버지가 가장 잘 이해해주지 않았을까? 아버지 또한 얼자로 태어났으니. 그래도 임금을 보았고 관직에 있었던 그는 자신의 아들에게도 그런 기회가 올 것으로 낙관적으로 보았던 것일까.
이신. 그의 아버지는 자신에게 조선의 신하로 살라고 했고 그럴 수 없었던 그의 세상은 자신에게 다른 왕을 섬기라 한다고 했다. 그의 태생은 변변치 않았지만 이제는 높은 지위에까지 올랐다. 힘든 인생이었다. 어떻게 해서도 살아남았던 그런 운명이었다. 전쟁터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중국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 그들을 속국시키려는 노력은 또 얼마였던가. 물론 그곳에서 죽었던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이제 살아남은 그가 할 일이 있다.
전쟁은 또 하나의 피해를 낳았다. 우리가 흔히 화냥년이라고 부르는 그 단어는 환황년이라는 이 단어에서 유래된 것이다. 중국으로 잡혀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그들. 살아 돌아온 것을 축하해야 할 터인데 그들은 오히려 손가락질을 받았다. 정절을 잃은 몸이라고 말이다. 돌아온 그들을 사람들은 외면했고 가족들도 인정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 살아온 목숨인데 이런 천대를 받고 살 수 없었던 그들은 많은 수가 자결을 함으로 자신의 억울함을 드러내었다. 하지만 왜 죽어야만 했는가. 이야기 속의 그녀처럼 당당하게 살아서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했어야 함이 아닌가. 비록 상황이 어려울지라도 더욱 당당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임금이라는 자리는 늘 위태로웠다. 평안한 것 같으면서 이 세상에 아무것도 부러울 것 없는 것 같으면서도 항상 불안한 자리가 그 자리였다. 그 자리는 마치 오리가 미친듯이 수면 아래서 발을 놀리고 있는 것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래서 왕을 중심으로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그렇게 많은 것이다. 그들의 이중성을 알기 때문에. 하지만 그들이 잘못한 것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없는 일을 만들었고 그래서 무죄한 사람들을 한꺼번에 처단했고 그렇게 함으로 자신들의 안녕을 누리고자 했다. 여기 왕과 그를 섬겼던 신하. 이제는 다른 사람을 섬기는 황제의 칙사. 그들의 대면이 이루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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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 너는 옳았고 나는 이겼다. 인조의 독백이다. 권력을 유지할 줄만 안 임금 인조, 청나라와 전쟁으로 50만 명이 넘는 전쟁 포로로 청에 잡혀갔고 청에 끌려가는 도중 비참하게 죽거나 죽임을 당했고, 정절을 강요당한 여인들이 강화도 포구에서 압록강변에서 몸을 날렸고, 전쟁 통에 살아남은 백성도 제대로 이성을 지니기 살아가기 힘들었던 시대, 정묘호란과 병자 호란 후 조선에서 전쟁과 패배로 백성은 고통을 겪었지만 누구도 책임을 진 자는 없다. 이신은 이 모든 책임과 원인 제공자로 권력 유지에만 급급했던 인조를 지목하고, 그를 죽여야 한다고 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서사의 힘이 이런 것인가 싶었다. 인조를 죽여야 한다는 생각에 궁에 들어가 칼을 빼어들고 임금을 향해 몸을 날린 사내. 그는 어떤 사연으로 그렇게 해야했을까? 조선의 신하로 살고자 했으나 청의 신하가 된 자. 청의 태종의 신하였으나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현실에 눈뜨고 백성의 고통과 분노, 한계를 볼 줄 알았던 사람, 이신. 소설을 손에 잡고 단 한 번도 놓치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읽었다. 그러나 가볍지 않았다. 역사의 이야기였으나 현대사와 곳곳이 겹치기도 하였다. 작가의 현실인식으로 탄생한 작품이라는 의견에 공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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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병기활>의 마지막이 가슴 아팠던 이유
<최종병기 활>을 처음보고 그 숨막히는 활[!]전에 엄청 환호했던 기억이 납니다. 자신의 누이 동생을 납치한 청나라 정예부대를 끝까지 뒤쫓아가 조선의 신궁으로 박살내고 특히 마지막, 자신을 감싸고 있던 모든 두려움을 이겨내며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모습은 전율까지 느낄 정도입니다.
하지만 <최종병기활>은 서글픕니다. 주인공의 죽음도 안타깝지만 숨막히는 싸움이 끝난 뒤나오는 마지막 자막에 가슴 아픈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기 때문입니다.
"병자호란 기간 동안 50만명의 조선인들이 인질과 포로로 끌려갔지만 송환은 없었다. 다만, 소수만이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돌아왔다." <최종병기활>의 주인공 남이와 서군은 자신들의 동생이자 아내를 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경계선을 넘어 청의 본거지로 갔습니다. 하물며 백성의 아버지라 불리는 임금이 백성을 두고 혼자 도망가 전쟁이 끝난 이후 상처받은 가족들을 나 몰라라 하는 경우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그런 이야기를 담은 역사팩션소설 <이신>은 어쩜 <최종병기 활> 이후 여전히 고통 받는 당시의 백성들을 위한 작가의 울분, 아니 그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울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병자호란 후 조선, ‘소설’’이 던지는 ‘시대’에 대한 돌직구
책 리뷰에 이런 말해서 죄송합니다만, "화냥년[?]"이라는 말 들어보셨죠? 서방질하는 계집이라는 말의 비속어입니다. 뜻이 참 거시기한데[?]... 그런데 이 말의 어원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아십니까? 바로 두 차례의 호란에 청나라에 끌려간 뒤 죽지 않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여성들을 말합니다.
오랑캐에게 몹쓸 짓을 당하고도 ‘어찌 여인의 절개를 지키며 자결하지 않고 돌아왔느냐’ 며 붙인 환향녀가 시대가 지나면서 이렇게 단어가 되었다고 하네요. 단어의 탄생 배경도 혈압 오르게 하는데, 그런데 오히려 되묻고 싶은 건, 당시 조선시대 지배층들은 그들에게 감히 그렇게 부를 자격이 있나 모르겠습니다.
임금은 백성을 등지고 도망갔으며 명분만을 쫓던 신료들과 사대부들은 나라의 비극에 어찌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오랑캐의 나라와 친분을 맺을 수 없다며 대책 없는 척화만을 주장하고 그 피해는 아녀자들, 그리고 백성들이 고스란히 당했습니다.
소설 <이신>은 그런 두 차례의 호란을 겪고 난 뒤 조선에 돌아온 척신(청나라의 사신) '이신'이 바라본 당시의 조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제목이자 주인공의 이름인 이신은 크게 두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이씨 조선 왕조의 신하로 살아라’ 는 본 의미와 조선인이지만 호란을 겪으며 청나라로 넘어가 황제를 보필하며 ‘다른 왕을 섬긴다’는 의미에서 '이신'입니다.
그런 '이신'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호란 후 여전히 고립되고 흉흉한 조선을 바라보며 그런 와중에도 허울뿐인 권력을 견고하기 위해 '호란'의 상처를 역이용하는 임금과 그 신하들을 비판하는 소설입니다. 특히 이신은 호란 중에 자신의 아내와 어머니, 딸까지 잊어버려 조선의 대한 원망이 극에 달았지만 호란 이후 반성 없이 여전히 자신들의 안위와 권력을 권고하기 위한 명분만을 추구하며 백성을 돌보지 않는 시대에 대한 원망은 더욱 커져갑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참을 ‘인’자 여러 번 자체적으로 새겼습니다. 근데 슬픈 건 이게 ‘소설’인 동시에 ‘역사’라는 사실인 거죠.
치밀한 자료분석과 꼼꼼한 문체로 흡입력있는 이야기를 이끈 강희진 작가 스스로도 병자호란의 역사를 준비하면서 어처구니 없는 당대에 모습에 엄청난 분노를 느꼈다고 합니다. 특히 후반부로 갈 수록 청나라의 눈치를 보면서도 자신의 손 앞에 놓여있는 권력을 놓지 않는 당대 임금의 모습에 허탈한 마음 밖에 없었습니다. 마지막 챕터의 제목도 의미심장합니다. '나쁜왕은 죽여야 한다'! 총 11장까지 다가가는 동안 점점 쌓여가는 이야기가 마지막 챕터에 작가와 독자 모두 동의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영화 <최종병기 활>처럼 백성들은 권력층의 오판으로 피폐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강을 건너 칼을 들었고 무모하지만 고통을 헤쳐나갔습니다. 주인공 이신 역시 죽었다는 자신의 아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씻을 수 없는 상처지만 그것을 딛고 일어나 나은 다음을 위해서 말이죠.
하지만소설 <이신>에는 <최종병기 활>같은 희망은 없습니다. 호란 당시의 인조와 측근들은 실리를 파악하지 못하게 백성을 고통에 넣게 만들었고 그것을 책임지지도 않고 도망갔으며 삼전도의 굴욕까지 당했습니다. 그러나 권력층의 반성은 없습니다. 여전히 백성들은 권력의 계략없이 이용당하고 있으며 자신의 어머니, 딸, 아내가 청에게 입에 담을 수 없는 상처를 당했음에도 사대부의 명부와 절개를 요구하며 그들의 자결까지 요구하다니. 극 중 이신은 이 상황에 큰 혼돈을 겪습니다. 과거를 반성하지 못한 자, 결국 다음을 이어갈 미래도 없었던 거죠.
우스개 소리로 국사 교과서의 마지막의 문장이 항상 같다고 하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은 여전히 살기 힘들었다"라고. 소설 ‘이신’을 읽으면 마치 국사책의 마지막을 본 느낌입니다. 소설 ‘이신’은 <최종병기 활> 이후의 처참한 역사로 출발하고 있지만 마지막을 읽고 진정 이 소설이 바랬던 건 영화 <광해>의 이 대사가 아닐까 하고 리뷰를 마칩니다.
“그대들이 말하는 사대의 예 , 나에겐 사대의 예보다 내 백성들의 목숨이 백곱절 천곱절 더 중요하단 말이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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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시체와 죽음뿐이다.” 강희진 작가의 작품 <이신>은 400년 전 우리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패배의 기록이자 짧은 전쟁기간에 비해 역사상 가장 큰 피해와 전후 엄청난 파장과 후유증을 안겨준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내게 조선을 위해서 칼을 들라 했으나 나는 조선의 임금과 조정을 향해서 칼을 들게 되었다.” 제목인 <이신>은 주인공의 이름이자, 지금은 다른 왕을 섬기는 이신이라는 동음이자 다른 뜻을 가진 중의적인 뜻을 함축하고 있으며, 어느 곳에도 환영받진 못하는 마치 최인훈의 <광장>의 주인공과 닮은 기구한 운명의 인물임을 내신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설 <이신>은 임진왜란 이후 상처를 채 아물지 못한 상태에서 인조반정을 거쳐 조청전쟁인 정묘호란, 병자호란이라는 잊을 수 없는 치욕의 역사의 기록을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우선 주인공 이신은 광해군의 내금위장이던 아버지가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최후까지 왕을 호위하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이익수의 서자입니다. 광해군은 왜와의 전쟁을 몸소 현장에서 겪으면서 격변하는 동아시아 정세를 정확히 내다보고 판단하여,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절묘한 중립외교를 구사하며 발흥하던 청나라의 침공에 대비하고 있었지만, 조정의 중신들은 반정으로 집권한 인조와 서인세력은 광해군 시절의 모든 정책을 부인하며 막강한 청나라를 오랑캐로 무시하며 오로지 천조국 명나라 섬기기에만 여념이 없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 대한 후과가 바로 정묘호란과 뒤이은 병자호란이라는 희대의 국난을 자초하게 되죠. 사실, 역사적으로 보면 광해군 실각이후 그리고 인조집권 초에 조선의 군사력은 이렇게 까지 허무하게 무너질 정도는 아니였죠. 반정공신인 이괄이 부병사부원수로 재임시에 조선의 주축이자 주력인 기병과 왜란당시에 투항한 조선 최고의 살수집단인 항왜인들과 그들이 전수한 조총들, 그리고 조선의 화약기술 등 당시 조선의 정예병력이 압록강부근 이괄의 지휘아래에 전방에 배치되어 있었지만 이괄의 난에 이 병력들이 공중분해되어 인조와 조정은 그나마의 병력도 더는 증강시키거나 보완하려 하지 않게 되었죠. 그리고 이를 안 홍타이지의 허를 찌르는 기습작전으로 맹렬하게 저항하는 성들을 우회하여 조선의 수도 한양을 급습하여 결국 강화도로 피신하지 못하고 남한산성에 갇혀 농성하던 인조의 항복을 받아내어 이후 청나라의 속국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인공 이신을 조선에 자신의 칙사로 파견하여 조선인이지만 청나라의 사신의 신분으로 조선에 온 이신은 다른 마음과 가슴의 숨겨둔 비수를 품고 조선에 당도하면서 이야기는 시작합니다. 반정으로 자신의 집안은 물론이고 사랑하던 친구의 그리고 아내의 집안마저 몰락하면서 평안도 산골로 친구의 여동생이자 신분의 차이로 사라을 표현하지 못한 여인 선화와 함께 피신하여 나름 짧지만 행복한 시절을 보내지만 행복은 오래 가지 못하고, 정묘호란으로 어머니와 여동생,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잃고 청나라의 포로가 되어 심양으로 끌려가고 그곳에서 그는 청나라 고관들의 신발을 만드는 갖바치에서 전쟁터에 끌려 나갔다가 황제 홍타이지를 죽음의 위기에서 구하면서 신분상승하게 됩니다. 홍타이지의 총신에서 간통죄로 사형되기 직전, 황제의 마지막 배려로 유배지로 조선에 파견된 이신은 조선은 더 이상 그가 알던 그의 아버지의 나라, 사랑하는 친구와 아내와 유년과 짧은 신혼을 보내던 그 나라가 아니였습니다. 탁상공론으로 국가는 물론이고 자신들의 처와 딸들을 지키지 못했던 조선 조정과 스스로 조선의 기둥이라고 자부하던 사대부들은 심양에서 돌아온 아녀자와 여인들을 환향녀라는 낙인을 찍고 모욕하고 포로생활보다 더 힘든 치욕과 고통을 안겨주며 자결을 강요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죠. 사랑하는 아내와 딸이 돌아오기만 한다면 과거에 대해 아무 것도 묻지 않겠다는 이신은 이런 조선의 조정과 사대부들의 모순된 행동들이 그저 어이없고 우스우며 비록 적국이지만 사랑한다면 과거와 더럽혀진 몸따윈 아무렇지 않다며 포로지만 진실된 사랑을 보여준 청나라와 신분은 천하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던 사람들과 많은 상반된 모습들을 지옥에서 본 그에겐 혼란으로 다가옵니다. 황제의 칙사이자 무인인 이신의 활약으로 잇달아 벌어지는 연쇄살인의 배후를 쫓으며 그 화살들이 인조에 대한 역모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과 반정으로 신하들에 의해 안치된 허수아비 인조의 모습과 사대부들의 허황되고 근거없는 피해의식으로 인한 모순과 이중성, 그리고 각자의 지옥과 죽음의 경계에서 살아가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과 사연들. 드러나는 거대음모의 실체 등이 작가의 탁월한 필력으로 다채롭게 그려지는 것인 너무도 흡입력이 엄청나서 책에서 눈을 뗄 수 없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처음엔 이신의 모습에서 <뿌리깊은 나무>의 강채윤의 모습을 보는 듯했지만 제 개인적으론 그의 모습에서 드라마<추노>에서의 송태하와 비슷한감을 느꼈습니다. 조선의 칼이었던 그는 소현세자의 의문의 죽음과 함께 왕과 조정신료들의 환멸감과 가망없는 미래 그리고 그들의 백성의 애민은 없고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그 누구도 가차없이 죽이고 억울하게 제거하는 모습에서 그의 칼은 임금과 조선을 향하게 되는 것이 이신과 다른 듯 하면서도 비슷한 감이 있어보였습니다. 치욕의 기록이자 잊고 싶은 역사인 호란을 배경으로 한 소설 <이신>은 정부와 국가가 제 기능을 망각하고 상실하고 부패하면 어떤 파란과 국난을 맞이하고 국민을 보호하지 못한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의 몫으로 돌아가는 참담한 과정과 피와 눈물과 슬픔을 작가의 상상력과 혼신의 노력이 잘 보여준 좋은 소설이라 생각이 듭니다. 처칠은 ‘역사는 반복된다. 다만 비극으로.’라고 했죠. 이 부분은 정확하게 얼마전 있었던 세월호 사건의 그것과 겹쳐 보입니다. 사건이 터진 이후의 과정과 현재까지의 모습이 왜 이리 이 소설에서 보이는 조정의 모습과 닮았는지 논쟁은 있으나 대책은 없고 책임자는 없는 모습들... 오늘날의 정치인들이 꼭 읽어주길 바라는 작품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정말 <이신>은 너무도 의미있고 뜻 깊은 작품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