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의 마음으로 2024"<참 좋았더라>는소설이다. 상상이 날개를 펴기 시작 하는, 역사의 검은 구멍을 확인하려는 독자들을 위해 참고 문헌을 다음에 둔다." 책이 예술작품처럼 따뜻해서 더 좋았습니다. 책을 만나는 모든이들의 화양연화를 응원하겠습니다. 모두에게 감사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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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죽음은 비참하고 불행했다. 서울의 한 병원에서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한 천재 화가 이중섭(1916~1956). '빈센트 반 고흐'에 비견될 정도로 추앙받는 예술가,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대표하는 화가라는 타이틀은 모두 그의 사후에 붙여진 것이다. 이다지도 슬픈 죽음이란 말인가. 그는 마지막에 혼자였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손성은은 2016년 <인물미술사학> 12호에 발표한 논문 '이중섭 심리부검'에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던 그가 왜 정신증상이 있었고 죽음에 이르렀는가 연구했다. 이중섭은 우울증과 조증을 반복하는 양극성 정동장애와 거식증을 심하게 앓았던 것으로 보인다. 손성은은 가족과 떨어져 있으면서 깊어진 우울감, 그리움, 죄책감이 자기 학대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이중섭의 고통스럽고 가슴 아픈 서사는 사람들의 주목을 많이 받았다. 남겨진 작품들만큼이나 관심을 끌었던 그의 생애를 조명하는 책과 논문들도 많이 나왔다. 하지만 죽음을 넘나드는 가난속에서도 위대한 작품을 그려낸 대가라는 수식은 어딘가 공허하다. 통영! 참 좋았던 이중섭의 시간속으로 도스토예프스키는 "밤이 어두울수록 별들은 밝게 빛나고, 슬픔이 깊을수록 신과 더 가까워진다"고 했다. 소설가 김탁환은 장편소설 <참 좋았더라>(2024)에서 이중섭의 '별의 순간'에 집중했다. 이중섭이 예술가로서 가장 빛났던 시간과 장소들을 찾아 작가는 통영을 샅샅이 훑었다. 지독한 가난과 외로움이 평생 그림자처럼 따라 붙었으나, 이중섭의 삶이 마냥 비참하기만 했을까. 이중섭이 절망을 뚫고 살게 만드는 힘의 원천은 그림이 아니었을까. 김탁환 작가는 통영에서 그림에 치열했던 화가의 예술적 영감이 정점에 이른 이중섭의 '화양연화'를 발견하고자 했다. 불행했던 비운의 천재라는 틀을 걷어내자 비로소 화가 이중섭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1916년 평안남도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까지 했던 이중섭의 삶은 한국전쟁을 경유하며 판이하게 달라졌다. 이 시기 월남한 이북 출신의 예술가에게 남쪽 땅은 무척 가혹했다. 이중섭은 부산(1950년), 제주 서귀포(1951년) 등에 머물렀는데 변변한 생계수단이 없어 막노동을 전전하며 힘들고 가난하게 보냈다. 가족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낸 이후에도 변변한 출로를 찾지 못하던 이중섭에게 공예가 유강렬은 통영행을 제안한다. 유강렬은 이중섭에게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화구와 물감을 대줬고 '아틀리에'(작업실)를 제공했다. 이중섭은 통영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에서 강의도 하면서 제자들을 길러냈다. 화가 유택렬, 김용주, 전혁림과 공예가 김봉룡, 시인 유치환, 김춘수 등 동시대 예인들과 폭넓게 교류했다. 그를 위해 마련된 공간과 그를 아끼는 사람들로부터 이중섭은 위안을 얻은 것처럼 보인다. 위대한 작품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찬란했던 통영의 이중섭을 조명한 소설, 그래서 이 작품의 제목이 <참 좋았더라> 인가 보다. "통영으로 갈 결심을 굳히며 다짐했다. 소를 그린다. 소 곁에 사람이나 풍경을 두지 않는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소도 아니요, 사람을 위해 밭을 가는 소도 아니다.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도 아니요, 외양간에 갇힌 소도 아니다. 소다운 소다. 네발로 땅을 딛고 어디든 간다. 막아서는 장벽엔 온몸으로 부딪친다. 고개를 치켜들고 하늘을 향해 껄껄껄 웃는다. 자유다, 해방이다."(66쪽) 이중섭의 그림이 말하는 '이중섭' 통영의 이중섭은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 1953년부터 이듬해까지 짧게 통영에 머물렀으나 가장 왕성하게 그림을 그렸다. 눈만 뜨면 화구를 메고 밖으로 나갔다. 저녁에 아틀리에로 돌아와 밤새 그리는 불면의 밤들이 쌓여갔다. 일본의 아내에게 보낼 편지에 '백 점을 그렸다'고 자랑할 정도였다. 그러나 만 점을 그린들 최고의 경지에 이른 '단 한 점'이 절실했다. 이중섭이 더욱 '소'에 집착한 이유이다. 김탁환 작가는 '화가 이중섭'의 그림에 투영된 '인간 이중섭'을 통찰한다. '사람'에 집중하니 그림속에 담긴 풍부한 이야기와 의미들을 포착할 수 있었다. 이중섭에 대한 독보적인 접근이라고 생각했다. 작가는 이중섭이 통영에서 그린 소 그림을 이렇게 묘사했다. 두 페이지 꽉 채운 분량인데 일부만 소개한다. 이 글을 읽고 나서 이중섭의 그림을 보니 비로소 '그'가 보였다. "다리 넷에 두 상황이 겹친다. 왼쪽 앞다리만으로 머리와 목과 어깨를 지탱하기 때문에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린 현재 상황이 하나고, 들고 있던 오른쪽 앞다리가 땅에 닿는 순간 돌진해 나아갈 미래 상황이 또 다른 하나다. 기실 이중섭은 그림으로 절망을 벽을 넘었다. 자화상 같기도 하고 시대상 같기도 한 그림에 쏟아낸 예술가의 순정한 투혼은 사람들은 열광했다. 1955년 이중섭은 서울 미도파백화점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관람객이 쏟아져 들어온다. 소설은 여기서 끝난다. 이후 이중섭의 인생은 그가 원했던 모양대로 되지는 못했다. 김탁환 작가는 소설을 쓰는 동안 "한 인간은 어떤 과정을 거쳐 경지이자 한계에 이르는가?"라는 질문을 품었다고 했다. 이중섭은 예술가로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점에 이르렀으나 안전하게 내려오지 못하고 세상에 알려진대로 안타까운 결말을 맺고 말았다. 이중섭의 죽음을 알기에 소설 속 이중섭의 '화양연화'를 읽는 내내 마음이 아렸다. 이중섭의 발자취를 따라 통영의 붉은 바다를 마주한 작가의 마음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작품속에서 '글쓰는 사람' 김탁환이 '그리는 사람' 이중섭과 수도 없이 조우하며 나눴을 예술가의 고뇌를 감히 짐작할수는 없겠지만.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실렸습니다. (2025.0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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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았더라[지은이 김탁환, 펴낸 곳 남해의 봄날, 312쪽]를 읽고
화양연화. 화양연화(花樣年華)는 국어대사전에는 등재되지 않는 단어다. 다만 네이버에서 검색하면 “꽃처럼 아름다운 시절”을 말하는 뜻으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표현하는 말, 즉 청춘이라고 했다. 김탁환은 ‘이중섭의 화양연화‘라는 부제를 왜 사용했을까? 이중섭의 청춘 시절, 외롭고 고통스럽지만 그나마 행복했던 시절에 대한 작품이라는 걸 은연중 말하고자 함이었을까? 책 표지를 넘기면, ’필경 불행하구나, 인간은, 하지만 행복하구나, 욕망에 시달리는 예술가는!‘라는 샤를 보들레르의 시 한 구절이 다가온다. 그리고 등장인물과 등장 인간이 펼쳐진다. 아련하게, 그리고 훌쩍, 그렇게 복잡한 감정으로 가슴에 담아 놓는다. 그리곤 일본에 일주일을 머물다 돌아오는 사내를 만나고야 만다. 배의 갑판에서 사내는, 무릎을 꿇은 사내는 왼손으론 담배 싸는 은지銀紙를 펴 잡고, 오른손으론 송곳을 쥔 채 곧게 죽죽 긋기도 하고 부드럽게 돌리기도 했다. 참 벨난 환쟁이였다, 선원이 보기에는. 빚은 지옥이다. 어떻게 벗어날까. 1952년 6월 아내가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들어간 뒤엔 빚을 졌다. 오산학교 후배 마영일에게 사기를 당해서다. 더 꼼꼼하게 살펴봤어야 했다며 자책하는 아내에게 짐이 되긴 싫었다. 벗어날 길을 제시하고 싶었다. 일본에 남는 것을 상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밀항자에겐 제약이 너무 많았다. 그러니 통영으로 돌아와야 했다, 화가는. 시국은 휴전이었다. 기쁨이나 안도감보다는 슬픔과 분노가 훨씬 앞섰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비보였기 때문이다. 겹으로 선 장벽이 하늘을 가렸다. 북으로는 원산의 어머니, 남으로는 도쿄의 아내와 두 아들에게 갈 길이 막힌 것이다. 그러하여도 그림을 그려야 한다, 화가는. 1953년 봄, 중섭은 유강렬, 장윤성과 함께 통영 성림다방에서 3인전을 마쳤다. 그때 온 관람객들이 부산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았다. 가족과 다시 재회하겠다는 일념으로 작품에 매진하던 그 시절을 알아주는 듯했다. 중섭은 시인 양명문에게 배운 노래를 낮고 힘차게 불러 보기도 한다.
(중략) 짜악 쨕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은 남어 있으리라 “명태”라고 이 세상에 남어 있으리라 - 양명문의 ’명태‘에서
월남 후 삶은, 그림과 가족이 동시에 흔들렸다. 그러니 중섭은 가족을 그려야 한다. 그림 속에서 가족은 굶주리지 않았고 울지 않았고 아프지 않았고 춥지 않았다. 중섭은 줄기차게 가족을 그렸다. 밥은 굶어도 담배를 건너뛸 순 없었다. 술 또한 거의 매일 입으로 들어갔다. 술을 마시고 취기가 오르면 희망은 더 희망적이고 절망은 더 절망적이었다. 담배는 한 갑을 줄줄이 피우더라도 작업할 수 있었다. 담배가 술처럼 몸과 마음을 흩어 놓았다면 빈 담뱃갑에서 은지를 꺼내 그리진 못했을 것이다. 각성과 자책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손만 뻗으면 확보할 수 있는 종이가 은지였다. 시인들은 중섭의 느리고 낮게 떨리는 목소리에서 이 화가가 얼마나 오랫동안 시와 동거해 왔는지 충분히 느꼈다. 그렇게 처음은 있되 끝은 없는 이야기가 시작되고, 시가 된 화가의 이야기이고 그림이 된 시인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빈센트 반 고흐에게 해바라기가 있다면 중섭에겐 단연코 소다. 소를 누가 먼저 그렸는가 혹은 얼마나 많이 그렸는가 하는 물음은 어리석다. 문제는 수준이다. 중섭은 통영에서 소를 완전히 새롭게 그려보리라 결심한다. 중섭은 가족에게 보낸 많은 편지화와 독특한 방식의 은지화 그리고 강렬한 인상의 작품 ’소‘ 시리즈로 많이 알려져 있다. 피란길에서도 그림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은지에다 계속해서 작품을 그렸다고 한다. 빈센트 반 고흐에게 해바라기가 있다면 중섭에겐 단연코 소다. 대작을 그리겠노라 그리 다짐한다. 대작이란 두 글자는 작품의 크기가 아니라 수준이다. 최고의 성취를 가리킨다. 부산으로 내려와 수용소에 있을 때도 걸으면서도 앉아서도 누워서도 소를 생각했다. 일본에서 다시 바다를 건너는 동안에도 중섭은 소를 생각했다. 그리고 때를 기다렸다. 소 다운 소를 그리기 위해. 중섭은 충분히 돌아다니며 전체를 살핀 후에야, 풍경이든 정물이든 파고드는 스타일이었다. 말보다 손을 믿는 사람이었다. 예술가를 만나면, 눈을 맞추고 말을 붙이는 대신 고개를 숙이고 들었다. 그 자세를 취하면 상대의 손이 보였다. 중섭은 연필을 깎았다. 연필을 깎으며 주문처럼 시를 쭝얼쭝얼 외웠다. 통영에 온 뒤부턴 줄곧 서정주의 시 ’문‘을 품어, 잠들지 못하는 밤의 동반으로 살았다. 늘어나는 실패를 되짚고자 택한 것이 연필이다. 연필 하나를 다 깎을 때까지 갈망이 사라지지 않으면 작업을 시작했다. 까마귀와 보름달이 먼저 떠올랐고 그다음은 물고기와 아이들이었다. 11월 통영 도착 후 완성한 그림이 벌써 백 점을 넘겼다. 1953년 12월 성림다방에서 중섭의 개인전이 열렸다. “그림쟁이는 물론이구 글쟁이 소리쟁이 북쟁이 철쟁이 춤쟁이 다 모였지비. 뜨뜻한 대귀탕 한 사발 해 제껴야 무릎두 허리두 쫙 피지비.” 유강렬은 중앙시장 단골 식당으로 중섭을 데리고 가선 대구탕을 시킨다. 유강렬이 음식값을 내는 사이, 이중섭의 혼잣말이 파도처럼 흐른다. “내래 시방 시작두 않앗어.” 이남덕이 두 아들과 한국으로 돌아올 가능성은 없었다. 부산과 서귀포에서 함께 지낸 날들을 되짚어 봤다. 가족이 편히 자고 입고 먹는 데 필요한 돈을 벌어 온 적이 없었다. 가장 역할을 못 한 것이다. 판매가 순조롭고 작품 평이 좋다면...... 남대일은 강구안을 담은 스승의 풍경화 두 점을 나란히 놓곤 밤을 꼬박 새웠다. 중섭은 그림을 훑더니 말했다. ’눈으로는 자연을 보는 거고, 정신이란, 감각이란 논리를 동반한다.‘고. 그러고는 덧붙인다. “보이는 대루만 그리문 사진을 어드롷게 넘어서 갓네? 해석을 해야디.” 중섭은 매일 쉼 없이 그렸다. 통영에 정착한 뒤 이런저런 소를 스케치하고는 있지만, 아직 채색에 들어가진 않았다. 물안개는 통영의 또 다른 매력이다. 중섭은 안개 속에서도 돌아다니기를 멈추지 않았다. 안개 속에서는 정직해야 한다. 통영에서 2백 점 넘게 그린 화가가 아니라, 단 한 점의 소도 그리지 못한 형편없는 화가가 바로 나다, 중섭은 부끄럽다. 통영에 와서도 중섭은 계속 기다렸다. 아틀리에까지 갖췄고 개인전을 연 후 도쿄로 갈 마음이 바빴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느꼈다. 그가 기다린 것은 저것이야말로 기도로구나! 라고 느낀, 죽음조차 넘어서는 간절함이었다. 속삭이는 소, 떨어진 꽃잎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소, 고집부리는 소, 숨는 소, 절뚝거리는 소 ...... 배경은 황톳빛이다. 농사에 잔뼈가 굵은 농부라면, 흙 맛 좋은 색이라 할 것 이다. 소가 딛는 땅을 찾아 횡으로 검은 줄을 긋는다. 걸어온 길이며 걸어갈 길이다. 배경과 소가죽의 빛깔이 다르지 않다. 안은 밖이고 밖은 안이다. 검은 선이 그림자처럼 흰 선에 붙어 몸의 균형을 잡는다. 머리는 낮추고 등은 세운다. 다리 넷이 모여 믿음을 나누고 흩어져 의심을 버린다. 붓이 마지막으로 집중한 것은 뿔 한 상이다. 다음 대결을 향한 깃발 처럼 순백으로 단정하다. 정면으로 내달려 치받으려는 의지다. 통영에서 그린 첫 소다. 서울에서 개인전을 연다는 것, 그림을 팔아 이름을 얻고 일본 갈 여비를 마련하고 30만 엔 빚을 갚는 것. 중섭은 우선 거기까지만 생각한다. 그리고 당장 대작에 도전하진 않았다.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뿐만 아니라, 전쟁과 분단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전부 끌어안을 강력한 힘이 필요했다. 길들지 않고 진중하게 나아가기 위해선, 일소도 아니고 젖소도 아닌 들소여야 했다. 통영을 떠나기 전, 들소 한 마리를 더 그리기로 했다. 이번엔 두상이다. 입을 한껏 벌린 소다. 그림 중앙에 소의 얼굴을 두고 배경을 온통 붉게 칠한다. 노을보다도 붉고 장작불보다도 붉다. 그리고 중섭은 서울에서 마지막 발자취를 남기고 홀연 떠나버린다. 너무나 아쉬워서 책에 실린 중섭의 그림이 다정하고 현혹이 되어 제목만이라도 일일이 적어 본다.
도원, 다섯 아이, 물고기와 아이, 달과 까마귀, 닭과 게, 선착장을 내려다본 풍경, 길, 욕지도 풍경, 춤추는 가족, 세병관, 충렬사, 닭, 들소, 복사꽃 가지에 앉은 새, 배수지의 봄, 복사꽃 핀 마을, 싸우는 소, 서귀포의 환상, 붉은 소, 소와 아동, 흰 소, 두 개의 복숭아
[뒷이야기] 내 삶의 화양연화는 언제였을까. 문득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작가처럼, 화가처럼...... 나도 화양연화는 이미 지나갔을까, 아직 오지 않았을까, 혹 지금 지나는 중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