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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읽어나가다 소설 속 아버지, “이 땅 어디서도 존재하지 못했던 유령”처럼 살아가야만 했던 김이섭의 생을 복기해나가는 딸 지형이 나와 동시대를 살아간 인물임을 인지하게 되었다. 좌익 경향의 사상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특정 범죄’를 다시 범할 가능성 혹은 위험성이 있다는 이유가 되어 여행과 거주이전의 제한을 가하고, 취업을 봉쇄하며 보호관찰과 보안 감호로 운신의 자유를 제한하던 ‘사회안전법’이라는 해괴한 독재권력의 억압을 피할 수 없었던 이섭의 고통에 감히 비할까 만은, 학내에서 은밀히 암약하던 사복경찰들을 피해 늘 잠행해야만 했던 내 대학 시절의 기억은 아마도 이 소설의 저류를 흐르는 “올가미를 휘두르며 사냥꾼에 포위된” 악몽과 ‘고독한 울음’을 함께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꼭 30년 되는 날이니 1975년 8월 15일이다. 인생의 절반을 일체 치하에서 살았고 나머지 30년을 해방된 조국에서 살았던, 한 남자의 “짐작할 수도, 감히 알 수도 없었던 시간들”의 이야기다. 이 60년이라는 시간에 이 땅과 이 곳에서 살던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았으며, 그 삶이 오늘 우리들의 삶에 어떤 변화, 영향을 가져왔던 것일까. 이러한 물음을 왜 다시금 해야 하는 가는 서글프고 안타깝기조차 하지만, 오늘, 지배 권력에 저항하는 동료 시민들에 대한 연민조차 가질 내면의 공간이 사라져버린 그 무감해진 우리네 도덕 감각의 전환이 요구되는 지점에 서 있기 때문이다. “우리 현대사가 진실, 진정성 따위를 등 뒤에 흘릴 때 그것을 조용히 수습하는 문학 본연의 기능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는 2016년 이 작품에 대한 대산문학상 선정 사유처럼, 우리는 이 책에서 어느 센가 잊어버린 도덕적 책임의 감각, 시민적 양심을 긴급하게 각성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아하게 유영하는 새우는 물속만 벗어나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몸을 구부려 옆으로 누워있는 꼴은 언제나 ‘투항의 자세’처럼 보였다.” 48쪽
그래, 이섭이 대하(大蝦) 종묘 양식장의 등 굽은 새우를 자기반영으로 인식했듯, 딸 지형의 말인 “세상 누구보다 뜨겁고 격렬했지만 오랫동안 차갑고 어두운 곳에 갇혀버린 새우”처럼 온몸으로 이 땅의 불의하고 냉소적 물결을 버텨내던 한 남자의 삶을 통해서 보게 되는 우리의 현대사에서 그 흔적이 슬그머니 지워지고 망각된 우리네 모두의 비극을 읽게 된다. 일제 식민지하에서 살아내야 했던 이 땅의 사람들은 모욕과 굴욕, 억압의 삶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이때 식민지 권력의 압제에 저항하는 유일하게 의존할 수 있었던 이념이 사회주의였으며, 그것은 가지지 못한 자와의 나눔과 배움이고, 공평한 사회를 향한 시민의 연대였다. 이섭이 “식민지 말단 관리나 잘해야 선생 노릇”이라는 이용만 당하고 말 일본 유학을 중도에 포기하고 사회주의자가 되어 친일 자본주의의 이권을 물려받은 권력에 의해 쫓기는 것은 자신들의 불의한 권력의 항구적 유지를 위해 사상과 이념에 색깔을 입히기 시작한 까닭이다. 오늘도 여전히 권력의 무능과 부패와 부조리함에 저항하면 곧 빨갱이라 매도하는 작태, 그 불의함은 이처럼 식민지의 잔재이고 그 친일 종자들의 더러운 욕망이 한 연원일 것이다.
5년의 수감생활과 전쟁통에 아내와 세 어린 자식들과의 헤어짐은 이섭에게 죄의식과 사라지지 않는 그리움을 남긴다. 돈과 권력을 헐벗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함께 사는 공평한 세상을 만들겠다고 그가 믿었던 이념은 자신의 가족조차 지키지 못하는 빛바랜 몽상이 되어버렸다. 그는 결코 폭력도 전쟁도 꿈 꾼 이가 아니었다. 그러함에도 소수 권력자들은 이념을 자신들의 권력의 방패 수단으로 전락시켜버렸다. 전쟁이 끝나고 만난 고교시절 친구였던 최라는 인물은 이섭에게 말한다. “인간은 그렇게 거룩하지도 않으며, 인간이 타고난 잔혹한 욕망을 무시한 이념일 뿐”이라고. 공평함과 약자와의 나눔이 한낱 몽상이며, 이상주의라 치부하며 이섭의 꿈꾸었던 세계에 대한 희망을 냉소적으로 힐난한다. 더구나 최는 “약육강식의 생존본능대로 살아가는 것”이, 이 사회의 조건이라 말한다. 식민지 치하에서도 부를 축적한 친일부역자나 할 만한 소리다. 이것은 다시 변조되어 이섭의 꿈은 범죄이고 절대악이 되어버린 세계가 된 것이다.
이섭이 사회주의자로서 행동을 하도록 했던 깨달음의 일화가 회고되고 있는데, 상전, 아랫것과 같은 자신을 가두었던 오랜 습관적 위계의 굴레를 떨쳐내기 위해 직접 땅을 갈고 나무를 하며 몸의 감격을 느끼고 있을 때, 마을의 가난한 친구 운식이 “도련님이 심심풀이 원족이라도 나오신 겐가? 심심한 도련님이 나무를 싹싹 긁어가는 바람에” 빈 지게로 내려가며 하는 말이다. 당장 끼니를 끓일 나무가 없어 온 산을 헤매고 다니는 사람은 놀이삼아 지게지고 온 도련님과 다르다는 것이다. 결국 이섭의 “작은 나뭇짐은 누군가의 것을 빼앗은 것”이라는 얘기다. 분배의 정의, 곧 자본주의가 메우지 못한 결핍, 사회적 정의를 위한 각성의 한 표현일 것이다.
지형의 기억을 통해 1960~70년대 이 땅을 지배하던 반공주의의 그 악질적 악령, 그리고 독재의 항구화를 위해 탱크를 시내 한가운데 세워 놓고 시민을 위협하며 “한국적 민주주의 토착화”라는 기이한 구호를 내세운 10월 유신, 그리고는 사회안전법이라는 자신들의 권력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사상범으로 옥죄기 위한 법령에 이르기까지 그 던적스러운 시대의 풍경이 흐른다. “오랜만에 오신 삼촌/ 간첩인가 다시보자.”는 표어로 가족의 유대에까지 불신의 눈초리를 밀어넣는 그런 파렴치함이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시간이었음을, 이섭은 취업을 위한 신원조회에서 모든 취업이 봉쇄되어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꾸려갈 권리가 부정되고, 하물며 5촌인 종질로부터 종질부의 외교관 발령을 위한 신원내역 조사로 이섭의 전력이 드러나 반려되었다는 비난을 듣기까지 한다. ![]()
1981년이 되어서야 우리의 형법에서 완전히 폐지되었던 연좌제, 즉 친족관계로 연루시켜 형사 및 각종 사회적 관계에서 배제하는 ‘자기책임의 원칙’에 반하는 악질적 법규에 붙들려 옴짝달싹 할 수 없게 한 제도였다. 그런데 오늘, 헌법상 개인의 기본권에 반하는 이 폐지된 단어의 망령이 다시 되살아나 인권을 유린하고 있다. 여론에 흘려져 누군가를 비난하고 조롱하려 할 때마다 그 화살을 대상인의 가족에게까지 겨누어 사회적 불이익을 조장하려는 악의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 현재의 헌법 13조 3항은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로 명시하여 연좌제가 적용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결국 이 땅에 함께 살고있는 우리네 믿음이란 것, 그 인식의 도덕적 불모성일 것이다. 권력의 안위를 위해 저항하는 사람들을 억압하기위해 악용되었던 이 시대착오적 법률이 폐지되기까지 해방 후 36년이 걸렸다. 소설 속 이섭은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사회안전법이라는 또 다른 악의적 법률과 그의 삶을 내내 옥죄었던 연좌제가 폐지되는 걸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이섭의 장인은 잃어버린 딸과 손주들, 가슴에 박힌 대못을 차마 뽑지 못하는 사위의 생존을 위해 어떻게 든 연줄이 닿는 사람들을 동원해 그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준다. 그래서 제주도 목장을 거치고 충청도 서해안 양식장을 꾸려나가고, 가구점 외판영업사원을 전전한다. 옛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정처 없는 시선으로 두리번거리는, 자신에게는 아무런 시선조차 주지도 않는 이섭의 집에 들어와 치매 시아버지를 간병하고, 여인 미자는 아들과 세 딸을 가지게 된다. “종이라도 들인 듯 뻔뻔하고, 제 고통을 무기삼아 함부로 칼을 휘두르는” 남편이지만 시린 가슴을 부여안고 묵묵히 내조한다. 이섭의 두 번째 아내가 되는 지형의 엄마인 미자의 신산한 삶 또한 이 사회가 만들어낸 또 다른 형태의 고통을 보여 준다. 전쟁의 폭력성, 삶의 잔인성을.
이들 가난한 삶에 다시 균열이 발생한다, 막내딸 지우의 죽음을 겪게 된다. 다시 이룬 가족을 위해 발바닥에 피가 나도록 걷지만 누추한 병실에 누워있던 아이가 병원비 걱정을 하던 장면은 아비로서의 어깨를 걱정하게 만든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 “억지로 버티고 있던 마음의 철심이 툭 부러지는 소리를 냈다.”는 자신의 생 전부가 부정당하는 이 소리에 그는 삶의 길을, 그 방향을 상실하고 방황한다. “내 탓이다. 내 탓이야, 모두가 잘 못 산 내 죄다.”
나는 이 통한의 목소리를 부정하고 싶어진다. 그의 탓이 아니다. 그는 결코 잘 못 살지 않았다. “가장 아끼는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나서까지 남는 게 무어란 말인가” 와 함께, “나는 결국 몽상가였어”라는 자조적 고백의 말은 그 고통을 알기에 감히 이해에 근접할 수 있지만, 나는 그의 이념적 굴종에 동의하지 않는다. 뭇 사람들은 꿈, 이상, 유토피아는 그 단어의 의미처럼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도달 가능한 현실의 성취가 아닌 망상이라며 혐오감을 보이기도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아주 작은 변화를 이루고 다시금 그 곳에서 또 한걸음 앞으로 내딛는 것, 그렇게 끊임없이 변화해 나가는 것이 곧 이상이요, 꿈이라고 말이다.
한낱 몽상이라는 자발적 굴복을 정당화하는 그 노예적 삶을 강압하는 현실 조건의 변화를 위해 투쟁하는 삶, 바로 이 작품처럼 그것을 끊임없이 환기하는 노력이 바로 꿈이라고 생각한다. 이섭은 절대 실패한 삶이 아니다. 지형이 작가가 되어 아버지 삶을 온통 채우던 그리움, 지켜내야 할 가족에 대한 사랑을 전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만으로 우리 인간의 삶은 충분하지 않은가? 준엄한 삶의 가치만을 말한다고 비난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섭을, 그가 이룬 가족들의 삶에 감히 고통을 느낀다. 내가 느끼는 공감과 슬픔이 무어 대수롭겠는가마는 이섭은 우리들이 잊어버릴 이야기를 다시 듣고 각성하게 해주지 않는가. 그로서 그의 꿈은 절대 몽상이 아님을 증명된 것일 게다.
술에 취해 요에 엎드려 사지를 버둥거리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 지형의 연민과 그녀의 보이지 않는 각오가 보이는 것만 같다. 아마 지형은 “뭐든지 뜨거운 마음으로 해야 돼. 공부를 해도, 연애를 해도 마음을 다 바쳐야 돼. 그렇지 않으면 의무감만 남고 사는 게 재미없어”라는 그녀가 기억하는 아버지가 남겨준 마지막 말은 소설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채우는 작가로서 방북해 평양 시가를 내려다보는 시선과 글로 응축되어 아버지 김이섭에 대한 깊은 연민과사랑의 애도로 승화한다. 지형은 그곳에서 “욕망이 철저히 통제된 세계와 욕망이 지나치게 과잉된 세계, 그 어느 쪽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이념으로 재단하여 타자를 적대화하여 공격하고 매장하던 시대가 완전히 저물고 이제는 공정과 평등, 개인의 기본적 권리가 보장되는 민주주의가 열렸다고 생각했지만, 이것은 큰 오해가 되고 말았다. 다시금 역사 퇴행적인 친일과 색깔론이 우악스럽게 등장하고, 국민을 이념적으로 분열시켜 권력을 자의적으로 행사하려는 무도함의 세계를 마주하고 있다. 이제 또다시 권력에 의해 이념과 사상의 왜곡을 통해 존재를 부정당하고 모멸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이 나타나서는 안 된다. 이섭이 자신이 쓰려는 제목 ‘유령의 시간’이라는 삶을 부정당해야만 했던 자서전을 쓸 것임을 해방 30년이 된 날 아내 미자와 지석, 지형, 지선을 모아 앉혀두고, “나중에 너희가 커서 이걸 읽게 될 때 오늘을 기억해주면 좋겠구나.”라는 그 유언같은 말을 되새긴다. 이 책은 이념과 사상으로 인해 뒤틀린 한 인간의 삶의 비극성을 바로 지금의 우리네 삶의 현실 속으로 현재화하여 읽을 수 있도록 해주는 그 실천일 것이다.
오늘 우리들이 잃지 말아야 할 것 신뢰와 연민, 지켜내야 할 소중한 사랑일 것일 게다. 혹자들은 말한다. 케케묵은 옛 시절의 단어들, 그것들이 소환하는 진부함이라고 말이다. 실제로 그 안으로 들어가 아무것도 보지 않거나 보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치졸한 변명의 언어가 아닐까? 어찌 그 진부함이란 오만한 언어로 이 땅의 역사가 은폐한 것들을 함부로 재단할 수 있다는 말일까? 개정판 작가의 말에서 작가 김이정은 “제목 때문인지 책은 몇 년간 죽어 있었다.”고, “유령과 같이 떠돈 지 4년째 책의 의미가 지난 역사로 묻힐 것 같은 분위기가 도래하기도 했다.“고 쓰고 있다. 나 또한 2015년 이 나라에서 더 이상은 국민의 삶을 억압하는 폭력적 권력은 들어서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성급한 오판이었음을 실토한다. 지금 직면한 이 가당찮은 현실은 유령의 시간을 긴급하고도 절대적으로 소환한다. 수많은 가려져 보이지 않은 존재들이 견뎌야 했던 그 고통의 실체를 다시 복기하고, 환기하며, 각성의 추동력으로 삼으라고 말이다. 독자인 나 또한 작가처럼 기쁘게 이 책을 맞이했다. 젊은 독자들이 그 어떤 자들이 말하는 오래전 시간의 먼지더미를 뒤집어 쓴 묵은 언어라는 자기 합리화, 변명에 휩쓸리지 않고 읽어야 할 작품이라고 강력 추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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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꿈을 꿉니다. 아주 오랫동안 깨어나지 못할 기나긴 꿈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꿈을 꾸는 동안 많은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그 세월은 마치 내가 아닌, 나를 대신했던 어느 유령의 삶이었던 듯 아득하기만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나의 삶이라고 말할 수 없는 '유령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뜻에 따라, 나의 의지대로 살지 못했다고 누구에게 항변하거나 반환을 청구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삶은 대체로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1925년에 태어나 1975년에 생을 마감한 그의 이름은 '김이섭'입니다. 그렇습니다. 김이정의 소설 <유령의 시간>은 주인공 이섭의 육십 평생을 더듬는 이야기입니다. '인생의 절반을 일제 치하에서 살았고 나머지 30년을 해방된 조국에서 살았'던 이섭. 그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물론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라는 게 대부분 거기서 거기일 뿐 한국전쟁 이후에 출생한 우리들의 삶과 비교할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럼에도 작가는 시대의 비극을 온몸으로 겪었던 이섭의 파란만장한 삶을 당연하다는 듯 그저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환갑 이전에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었던 이섭이었기에 그 정도의 대가는 마땅하다는 듯 말입니다. "갑자기 60년이라는 시간이 한없이 멀고 아득해 보였다. 가슴이 아릿해졌다. 언젠가 아버지가 저 자서전을 완성하고 읽어볼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속엔 지형이 모르는 아버지의 45년 삶이 들어 있을까. 아니 나머지 15년에 대해서도 지형이 아는 아버지의 모습은 아주 일부분일 것이다. 지형은 다음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원고지 한 권을 사서 아버지에게 선물했다." (p.265) 일제강점기 시절 제법 부유한 집안에서 성장했던 이섭은 일본으로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입신양명의 의지를 버리고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합니다. 해방 후 그가 속한 조직과 그의 행적이 드러나면서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지만 오히려 그의 부인과 젖먹이 막내딸이 끌려가게 됩니다. 그 틈을 타 이섭은 월북을 감행합니다. 그러나 북한의 실상을 직접 확인한 이섭은 크게 실망하여 다시 돌아오지만 부인과 아이들은 이미 이섭을 찾아 북으로 떠난 뒤였습니다. 5년간의 교도소 생활 후 옛집에서 시체처럼 가족을 기다리던 이섭. 자신에게 헌신했던 부인 진과 세 자녀를 그리워하며 잊지 못하던 이섭은 혹여라도 그들이 고무보트를 타고 다시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헛된 시간만 흘려보냅니다. 그러나 전쟁통에 형님이 죽는 바람에 집안의 장남 역할을 해야 했던 이섭은 그보다 열일곱 살이나 어린 미자와 반강제로 재혼을 하게 됩니다. 미자 역시 전쟁통에 남편을 잃고 혼자가 된 처지였습니다. 소설은 그렇게 두 사람의 기구한 삶으로 이어집니다. 신원조회 때문에 직업을 구할 수 없었던 이섭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사람은 전처인 진의 아버지, 말하자면 이섭의 전 장인이었습니다. 맏딸이었던 진을 가슴에 품고 있었던 장인은 이섭을 사위가 아닌 맏아들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장인의 도움으로 서해안의 한 마을에서 새우 양식을 하며 살아가게 된 이섭의 가족. 거실에 가족사진도 한 장 없고, 가까운 친척도 없는 이상한 가족의 맏딸로 태어난 지형은 누구보다도 아는 게 많고, 가족에게는 더없이 다정한 자신의 아버지가 새우 양식이나 하며 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간척지를 임대하여 새우 양식을 하며 서해안 바닷가에서 생계를 유지하던 이섭의 가족. 지형은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어머니 미자로부터 전쟁통에 가족을 잃은 이섭의 사정과 재혼의 내막을 듣게 됩니다. 전후 사정을 알게 된 지형은 자신을 비롯한 사 남매에게 언제나 따뜻하고 신뢰를 잃지 않았던 아버지를 보면서 '저렇게 모든 걸 잃고도 여전히 인간을 사랑한다는 게 가능할까?' 생각합니다. 새우 양식장이 사라지면서 이섭과 그의 가족은 결국 서울로 이사합니다. 이섭에게는 자신이 지켜주지 못했던 전 부인과 삼 남매에 대한 회한과 추억이 어린 곳이라 결코 다시 오고 싶지 않았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전 장인의 도움으로 가구점 영업사원이 된 이섭은 환갑이 가까운 나이에도 가족을 위해 헌신합니다. "결국 사회안전법이 공포되고 말았다. 법조계와 학계에서 논란이 거세게 일었지만 누구도 그들의 힘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정권은 남북 화해라는 유화의 제스처를 보이더니 바로 얼굴을 바꾸고 시퍼런 총칼을 드러냈다. 아니 화해의 제스처야말로 총칼을 꺼내기 위한 명분이었는지도 몰랐다." (p.251) 작가와 아버지의 자전적 소설이기도 한 <유령의 시간>은 맏딸 지형과 아버지 이섭의 시선이 번갈아 교차하면서 전개됩니다. 게다가 소설을 여는 프롤로그와 소설을 닫는 에필로그에서는 남북작가대회에 참석한 지형이 평양의 한 대학에 교수로 있다는 이복 오빠 지용에게 쓴 편지가 등장합니다.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던 이섭이 자신의 육체를 떠나 유령이 되었던, 호흡이 멈춘 유령의 시간을 지형은 가만가만 들려줍니다. 소설에서 이섭이 평생을 이기적으로 살았던 동창 최와 만나는 장면은 꽤나 인상적입니다. 어쩌면 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결국 몽상가였을 뿐이라고 고백하는 이섭에게 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지만 모든 변화는 자네 같은 몽상가들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지. 나 같은 자들은 자기 자신 하나도 변화시키지 못하잖는가. 자네는 늘 어딘가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있지만 나는 결코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네.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고 생각만 하지. 무엇보다 안전한 곳이거든." (p.215~p.216) 환갑이란 나이가 무척이나 아득하게 느껴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루가 일 년 같고, 일 년이 마치 십 년처럼 느껴지던 고단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처럼 변화가 빠른 시기에는 30년, 40년 전의 일도 마치 엊그제 있었던 일처럼 무척이나 가깝게 느껴지겠지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그 시절의 우리는 환갑이란 나이는 아무나 기대할 수 있는 그런 나이가 이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지금처럼 환갑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는, 흔하디흔한 나이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부모 세대 혹은 조부모 세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지만, 햇수로는 불과 4,50년 전의 일이니 우리의 기억은 얼마나 쉽게 변하고 있는지요. 어느 누구나 꿈을 꿉니다. 그러나 세월이 한참 지난 후 돌이켜보면 그 꿈의 향배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어쩌면 실체가 없는 유령의 시간을 좇느라 지금 이 순간의 아까운 시간들을 허투루 보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순간순간 실재하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어느 날 그렇게 불쑥 환갑이 찾아오고, 생의 마지막 순간이 도래하는 까닭입니다. 소설 속 이섭이 깨어난다면 꿈이 아닌 실재하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라고 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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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기준이 되는 것은 저마다 다르다. 돈을 쫓는 사람에게는 돈이, 행복과 안정을 꿈꾸는 사람에게는 조금 부족해도 마음의 안정과 행복을 떠올리는 게 우선이 된다. 이상하게도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를 희생하게 되는 인생의 계산법은 늘 적용되는지라, 언제나 선택은 하나를 포기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기도 했다. 이섭이 북으로 올라갔다가 남으로 내려오면서 선택한 우선순위, ‘이쪽에서 내 가족을 희생시킬 만큼 더 나은 것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뿐이었던 결정은, 그의 인생을 유령의 시간으로 만든다. “솔직히 난 어떤 사상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생각은 안 드네. 다만 어떤 게 더 인간적인 제도냐의 문제겠지. 나는 겁 많은 사람이라서 그냥 내 가족과 아이들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네. 내가 믿는 신념 때문에 가족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을 뿐이네. 제 몸만 아낀다고 비난해도 좋네. 나는 아이들이 칼끝에 손만 베여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네.” (134페이지) 일제강점기가 끝났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도 있었다. 이게 행복일까 싶은 것도 잠깐, 사회주의를 꿈꿨던 이섭은 경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됐다. 경찰이 그를 대신해서 아내와 어린 딸을 잡아갔지만, 아무런 죄가 없는 이들이 곧 풀려날 거로 믿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그는 이념을 좇아 북한으로 간다. 모든 것이 공평하게 나눠지고 살아갈 수 있는 그곳에서 자리를 잡으면 남은 가족을 불러와야지. 아마도 이런 마음으로 목숨 걸고 북으로 올라간 건 아닐까. 막상 보게 된 북한의 현실은 그가 바라던 이념과 너무 달랐기에 또 한 번 목숨을 걸고 임진강을 건너 남으로 내려온다. 그렇게 마주한 또 다른 현실은 잔혹했다. 그의 아내와 아이들이 북으로 갔다는 소식에, 그는 죽은 사람처럼 살아간다. 거창한 바람도 아니었는데, 현실은 잔혹했다. 내 가족과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었던 소박한 바람은 한 사람을 살아있는 유령으로 만들었다.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숨을 쉬고 있으나 살아있는 것도 아니고, 죽어도 아쉬울 것 없을 것 같지만 그에게는 책임져야 할 또 다른 가족이 있다. 그가 두 번째로 꾸린 가족 역시 그의 행복이고 책임이었으니, 살아가야 했다. 하지만 만만치 않은 세상은 그를 번번이 좌절하게 했고, 북쪽을 바라보면서 키운 그리움 또한 계속 쌓여가기만 했다. 먼 거리에서 수면위로 비추는 조명이 이상하게 깜빡일 때마다, 이름 모를 고무배가 남쪽으로 흘러왔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희망 고문은 커졌다. 내 가족이 그렇게 흘러 남쪽으로 오지 못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몰려왔다. 창자의 내벽에 굵은소금을 박박 문질러대는 것도 같고 칼로 자근자근 저미는 것도 같은 통증이었다. 10년 가까이 전쟁터에 갇혀 오직 홀로 싸움터를 누빈 영성이 아버지의 고독한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그 시간 동안 자신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는 남자를 보며 시린 가슴을 견뎌야 했을 여자의 외로운 울음소리 같기도 하며, 20년이 다 되도록 전생의 감옥에 갇혀 그리운 이들을 찾아 헤매다 어느새 쉬어버린 이섭 자신의 울음소리 같기도 했다. 심지어 신혼의 골방에서 신랑이 폭사했다는 미자의 울음으로도 들렸다. 어쩌면 그 모두의 것인지도 모를 울음이 이섭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198페이지) 창문 너머로 아파트가 보이는 북한의 한 호텔에서, 화자인 지형의 목소리로 시작된 이 소설은 첫 페이지에서부터 이념으로 분단된 한반도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런 현실에서 지형은 작가가 되어 북한에 방문하게 되었고, 뒤늦게 알게 된 아버지의 간절함을 조금이라도 풀어드리고 싶었으나,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아버지가 평생 품고 살았던 비통함은 그래서 더 안타깝다. 살아있다고 믿고 있으니 만날 것 같았지만 그러지 못했고, 금방이라도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지만 닿지 못했다. 기다림에 애가 타지만 그래도 견딜 수 있었는데, ‘사회안전법’은 또 한 번 한 사람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그저 가족과 행복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가졌던 이념이, 그 이념을 좇아가고 싶었던 선택이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도 있나? 이념, 역사, 정치 등 많은 화두가 언급될 수 있는 소설이겠지만, 한 사람의 삶으로 읽혔다. 그 인생의 흐름 사이에 이념 갈등, 민족의 역사, 현실 속 정치적인 면이 부정할 수 없이 존재한다는 게 아이러니이지만. 혹시라도 그는 현실적인 문제에 갇혀 자기 삶이 다르게 읽힐까 봐서 걱정이라도 했을까. 자신의 삶을 유령의 시간이라고 선언하면서, 스스로 그 모든 이야기를 쓰고자 했다. 몇 장 쓰지도 못한 채로 생을 마감할 줄은 몰랐겠지만. 그렇게 첫 문장이 시작되고 40년 만에 작가가 아버지의 인생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래서 더 의미 있다. 내가 접근할 수 없던 시대의 불행을, 울음 가득한 외침을 듣게 한다. 역사가 쥐고 흔들었던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인생에서 보아야 할 것을 고민하게 한다. 개정판으로 읽게 된 지금, 굉장히 잘 읽히는 소설이지만, 생각해 보면 많은 것이 의아하기도 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거의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뭐가 달라졌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사상을 나누어 이야기하는 것도, 오물 풍선을 날려 보내고, 확성기를 틀어대고, 남과 북의 대화는 단절되었으며, 급기야 남과 북을 잇는 다리를 폭파하기에 이른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 안타까움 속에 존재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유령 같은 인생은 누구의 몫인지 묻고 싶다. #유령의시간 #김이정 #교유서가 #다시소설 #책 #책추천 #문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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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을 산다. 내가 원하는 삶과 살아가는 삶이 다르다는 걸 인정하는 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도 삶의 방향은 더 나은 쪽으로 두었다. 내 삶을 사느라 내 삶 밖을 둘러볼 여력이 없었다. 내 삶 밖을 생각하고 알아가는 통로는 소설이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타인의 삶을 상상하거나 그들의 고통과 아픔에 동참했다. 때로 나의 그것과 비교했다. 저마다의 삶은 비교할 수 없는 고유한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김이정의 『유령의 시간』 을 읽는 일도 다르지 않았다. 소설을 읽으면서 나의 삶과 그들의 삶을 생각한다. 정확하게는 소설 속 ‘지형’의 아버지 ‘이섭’의 삶이다. 이섭은 아내 미자와 1남 3녀를 둔 가장이다. 새우 양식장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미자와 나이 차가 많을 뿐 평범한 아버지다. 지형이 아버지에 대해 아는 건 일본에서 대학을 다녔다는 것 정도다. 나중에야 아버지에게 다른 아내가 있고 자식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이섭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던 것일까. 소설은 화자 지형을 통해 아버지의 시간을 천천히 들려준다. 일제강점기 일본 유학을 다녀올 정도로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이섭은 사회주의를 선택한다. 이념을 위한 삶이 아니라 가진 것을 나눠주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시대는 그를 나쁜 쪽으로 몰았다. 우선은 살기 위해 북으로 갔다. 이섭에게는 최선이었다. 하지만 다시 남을 택했다. 가족이 있으니까. “이쪽에서 내 가족을 희생시킬 만큼 더 나은 것을 발견하지 못한 것뿐이네. 내가 돌아가려는 곳은 가족이 있는 집일뿐이야.” (205쪽) 이섭 대신 아내가 감옥에 갈 줄은 몰랐고 어린 자식의 생사를 모르는 시간이 길게 이어졌다. 전쟁이 일어나고 이섭은 그렇게 혼자가 되었다. 가슴에 그들을 품고 미자를 만나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 세상은 이섭의 이력을 외면했다. 직장을 구하려 이력서를 낼 때마다 신원 조회에서 탈락했고 조카와 친척에게도 피해가 갔다.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할 수 없던 아버지의 삶이었다. 자신의 지난 시간을 자세히 말할 수 없었다. 부모 형제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심연 깊숙이 자리한 슬픔에 대해서 함구할 수밖에 없었다. 작가는 그런 이섭의 깊은 슬픔과 무한의 고통은 아름다운 비유와 묘사로 보여준다. ![]() 단단한 투구와 갑옷까지 거창하게 차려입은 채 온몸을 굽히고 손을 모은 자의 비굴함을 보는 것 같아 잡힌 새우를 볼 때마다 기분이 언짢아지곤 해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보면서도 언짢음이 쉽게 가시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허약한 것들의 비루함이라니. 생각해보면 허약한 자신에 대한 이섭의 적의는 제법 뿌리가 깊었다. (45쪽) 가만히 누워 있으면 벽지 사이로 모래가 흘러내리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저 부실한 시민아파트는 이섭의 인생을 닮아 있었다. 언제 무너져내릴지 모르는 위태로운 건물에 이 순간에도 사람들이 숨차게 살고 있었다. (255쪽) 제대로 된 가장의 역할은 고사하고 자식을 지키지 못한 회한은 막내딸 지우의 죽음으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거기다 그를 올가 맨 ‘사회안전법’까지. 이섭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려 몸부림치는 그에게 1975년 8월 15일, 해방 30년이 된 60의 나이에 자서전을 쓰기 시작한 건 유일한 숨구멍은 아닐는지. 결국 완성하지 못한 아버지의 원고가 이 소설의 시작이다. 작가가 된 지형이 남북작가대회 작가단에 참여해 북한 호텔 객실에 있는 첫 장면에서 느꼈던 알 수 없는 묵직한 슬픔의 근원이었다. 아버지가 끝내 꺼내지 못하고 그리워만 했던 아내와 자식, 지형에게는 두 오빠였던 그들에게 전하는 길고 긴 안부라고 할까. 유령이 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를 향한 애끓는 애도였다. 어쩌면 아버지는 유령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땅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못했던 유령. 마침내 하늘은 짙은 남색이 되었다. 지형은 하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초가을 강바람이 손가락 하나하나, 머리카락 한올 한 올을 쓰다듬으며 대기 속으로 사라졌다. 유령의 시간이 저물었다. (283쪽) 통렬한 아픔을 아름답게 그려 낸 김이정의 『유령의 시간』 은 사느라 지우며 잊고 지낸 아픔과 국가와 사회가 돌봐야 할 지난 시대를 추모한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가 함께 하기를 바란다. 부디 소설 속 1970년대가 아닌 2024년 현재에는 유령으로 존재하는 이가 없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담아서. 나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내가 몰랐던 삶도 들여다보고 생각할 것이다. 비록 소설을 읽고 이어지는 보잘것없는 작은 시간이겠지만.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분단과 역사의 폭력에 희생된 개인의 삶을 생각하고 담아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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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들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닌 운명처럼 '지금은 날 읽어야 해' 하고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김이정 작가님의 장편소설 [유령의 시간] 처럼. 바쁘게 살다보면 시간이 참 빠르게 흐르는 것 같습니다. 자꾸만 뭔가를 잊어가고 잃어가다보면 겪어보지 못한 역사의 물줄기는 신화처럼, 그저 옛이야기처럼 산화됩니다. 80년대 이산가족 방송을 흐릿하게 기억하고, 누군가는 몰래 북한에 갔다왔다는 이유로 수감이 되고, 90년대와 2000년대 또다른 세상이 열리는가 싶었지만 여전히 전쟁이 끝나고도 70년째 분단의 역사를 안고 살아갑니다. 햇살이 드는 시기도 있었지만 지금은 서로가 서로를 향해 오물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때, 독립운동을 위해 가산을 나눠 목숨값을 치르던 시절을 거치고 좀더 깨어 있는 지성인들이 황폐화한 조국을 일으켜 세우고자 사회주의 국가의 이상향을 펼쳐보려 하던 시절에 강대국의 입맛에 따라 나라의 허리가 잘리고 급기야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게 됩니다. 소설의 프롤로그는 그로부터 50년쯤 지나 '지형'이라는 이름의 작가 가 평양의 고려호텔 창문 밖에 온통 잿빛 거리를 보여주듯 설명하며 시작합니다. 남북작가대회 작가단에 합류해 머무는 호텔 건너편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누군가를 만나길 기대하는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지지만 소설은 야속하게도 시간을 과거로 돌려 지형의 아버지가 제주도에서 말을 키우다 쫒기듯 충청도 서해 바닷가 새우 양식장을 하던 시절로, 또 개발에 떠밀리듯 서울로 올라와 시민아파트에 살게 된 이야기, 잃어버린 아이들 세 명이 돌아오길 기다리다 가슴에 묻고, 다시 얻은 네 명의 자식들 중 또 하나를 잃은 아버지가 일제 강점기에서 30년, 해방 된 후 30년이 되었으니 자식들을 앞에 불러모아 놓고 잊혀서는 안되는 자신의 이야기를 쓰겠다고 결심을 선언한 장면에 이어서 시대가 개인에게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는지 아버지를 기어이 거꾸러뜨리고, 포기하려던 대학 진학의 꿈을 막 피우려던 오빠 지석에게 가장의 무게를 고스란히 남긴채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지형의 아버지가 겪어야만 했던 부당한 차별과 감시, 사회적 폭력이 자꾸만 튀어나오던 판도라의 상자엔 그 어디에도 희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뼈져리게 느낄 때즈음 소설은 다시 평양의 고려호텔을 떠나는 지형의 편지로 마무리 됩니다. 잊혀지면, 놓쳤으면 안타까웠을 책을 만날 수 있어 행복하면서 슬픈 날들이었습니다. 지금의 우리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유령의시간 #김이정 #장편소설 #교유서가 #다시소설 #책추천 #책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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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온 세상이 난리가 났다. 한강 작가님이 2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셨다는 소식이었다. 나를 비롯한 전 국민이 기뻐 마다하지 않은 이 시기에 갑툭튀 같은 비판을 SNS에 당당히 올린 김00 작가가 있었다. 그 말인 즉슨 한강 작가님의 작품이 왜곡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쓰여져 있다면서 중국의 찬쉐 작가가 수상하여야 한다는 다소 참 황당하면서도 정신나간 소리를 한 작가의 글을 TV보도로 접하였는데, 그런 이상한 말을 지껼이는 사람들이 득세한 시기가 불과 반세기가 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 그런 말을 지껄이는 사람들이 등 따숩고 배부른 시기에 [유령의 시간 ] 김이섭씨 같은 분들이 엄연히 대한민국에 살다 가셨다는 사실 또한 사실이었다. 그런 시대를 거친 게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아직도 이념 논쟁이 한창인 대한민국의 현실을 마주한 시간이었다. 일본의 식민지 시대를 거쳐 분단, 전쟁 그리고 독재 그리고 민주화를 이루기까지 김이섭씨 같은 많은 분들이 유령의 시간을 묵묵하게 견디면서 살다 가셨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온 자신에게 그리고 남겨진 자녀를 위해 자신의 자서전을 완성하지 못하고 그렇게 세상을 떠났지만, 남은 자녀들은 그렇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완성하고 종국에는 그 이야기의 완성을 끝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또 바라고 바라본다. #사락독서챌린지 #유령의시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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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형의 아버지는 지식인입니다. 제주도에서 말도 키우고, 서해에 와서는 새우양식장을 하지만, 도무지 이런 일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아버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운동을 나갑니다.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어머니 때문인 걸까요. 늘 책을 읽으며 공부하고, 가족들에게 다정하며, 이웃들에게 친절한 그는 정말 좋은 사람입니다. . 이섭은 만주와 상해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는 셋째 숙부와 독립자금을 대어주는 가족들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이념에 젖어들게 됩니다. 인간이란 너무나 완전한 존재라 고귀한 사회주의 이념을 실현한다면 누구나 평등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이념 갈등과 한국 전쟁으로 이섭은 가족을 잃습니다. 남한에서 이섭이 설 수 있는 자리는 어디에도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혹시 헤어진 가족들이 돌아올까봐 이섭은 그들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버텨 나갑니다. . 인간이란 얼마나 나약하고 모순된 존재이던가요. 이념 자체는 순수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인간은 종국에는 타락하고야 말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념을 왜곡하고 혐오하며 수많은 피를 뿌리고야 마는 사악한 존재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만이 이 세상을 파국으로 치닫지 않도록 하는 길이라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 2015년에 세상에 처음 나왔고 올해 교유서가에서 개정하여 다시 선보인 이 작품은 김이정 작가가 아버지의 미완성 자서전을 읽은 순간부터 마음의 빚으로 느끼고 있었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쓴 것이라고 합니다. 일제시대, 광복, 이념갈등, 전쟁, 유신정권 등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배경으로 하기에 글이 무겁고 슬픔에도, 표현들이 또 너무나 아름다워서 애처롭고 쓸쓸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작가의 편지는, 오빠에게 가 닿았을까요. p38 동이 트는 동쪽 하늘이 붉은 피를 언뜻언뜻 내비치며 산통을 시작하고 있었다. p45 사지를 결박당한 듯 다리를 모은 채 부유물처럼 떠다니는 새우. 새우마저 자신을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목을 조여왔다. 이섭은 새우의 형태가 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길고 뾰족한 부리를 앞세우고 긴 수염을 휘날리며 우아하게 유영하는 새우는 그러나 물속만 벗어나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짧은 발들을 가지런히 모으고 몸을 구부려 옆으로 누워 있는 꼴은 언제나 투항의 자세처럼 보였다. p68 수문 너머 바다의 드넓은 갯벌 위로 잘 익은 홍시 같은 붉은 해가 곧 떨어질 듯 위태롭게 걸려 있었다. p88 장인과 이섭은 서로의 가슴에 박힌 대못을 차마 뽑아내지 못한 채 두꺼워져가는 녹을 못 본 척 외면하고 있었다. 이젠 녹이 너무 두꺼워 도저히 못을 뺄 수도 없었다. p103 이섭은 무릎이 꺾인 채 길 위에 퍼질러앉았다. 지나온 길은 이미 오래전에 지워지고 눈앞의 길은 점점 아득해졌다. p150 이섭은 그제야 본의 아니게 자신이 뺏은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당연히 자기 것이라고 여겼던 것들은 어쩌면 자신이 빼앗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p169 도망치는 영석의 발소리가 지형의 가슴 한가운데를 밟고 지나갔다. "왜 갑자기 첫사랑은 물어?" 엄마가 순간 손을 멈추고 지형을 빤히 쳐다보았다. 지형은 얼굴이 붉어졌다. 다급하게 도망치던 영석의 발소리가 가슴에 멍자국을 남긴 것 같았다. p197 파월 장병들은 이미 월남에서 철수를 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총을 들고 포탄에 살점이 튀는 밀림을 혼자 뛰어다니며 비명을 질렀을 남자의 생이 이제는 자유로워졌을까. p215 그의 부드럽고 말끔한 손이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그는 자기 자신 하나는 온전히 지켜낸 것 같았다. 타인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이나 가족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없이 살아왔을 것이다. 위선 없는 그의 생이 문득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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