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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일본의 역사인식(나카츠카 아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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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위조하는 행위를 당연하다고 생각함으로써 일본이라는 나라의 정치 군사 지도자들의 눈이 흐려져 간다는 사실은 러일전쟁 직후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메이지 초기부터 진행되기 시작하여 마침내 ‘체질화’되었습니다(243).   강화도 사건은 첫째, 처음부터 끝까지 먹을 물을 찾고 있었다는 내용을 시종일관 주장하고 있으며 그것이 마치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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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위조하는 행위를 당연하다고 생각함으로써 일본이라는 나라의 정치 군사 지도자들의 눈이 흐려져 간다는 사실은 러일전쟁 직후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메이지 초기부터 진행되기 시작하여 마침내 체질화되었습니다(243).

 

강화도 사건은 첫째, 처음부터 끝까지 먹을 물을 찾고 있었다는 내용을 시종일관 주장하고 있으며 그것이 마치 강화도 사건의 배경인 듯이 씌어 있다는 점, 둘째, 전투는 하루가 아니라 3일간에 걸쳐 있었다는 점, 이 두 가지입니다(181).

 

정부 안에서 타국 영해 안의 강으로 들어가 ”3일이나 있었다고 한다면 타국 영해에 들어가 전쟁을 한 것이 되며, 국제 공법상 용납할 수 없는 행위라는 의견이 있었다는 점 바로 그것 때문에 마치 하루 동안인 것처럼 바꿔 썼다는 사실, 그러한 정부 안의 의견에 대해 이노우에는 영해 안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국제공법에 연료나 물이 떨어졌을 때는 임시로 어느 곳의 항만으로 들어가더라도 지장이 없다는 내용도 있다. 그래서 자기도 이번에 물을 찾으러 갔기 때문에 별로 잘못된 곳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강화도 사건은 운요호가 먹을 물을 찾는 다는 국제법상 인정되는 행동을 했으므로 별로 잘못된 곳은 없다고 한 이노우에 주장에 따라 바꿔 씌어졌다고 추측케 합니다(183).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은 동학군의 씨를 근절이라도 시키려고 마음대로 대학살을 자행하였는데, 그것은 조선민족에게만 일어난 비극이 아니라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쳐 일본이 지배하고 침략한 아이누 민족, 오키나와의 사람들, 그리고 1937년 중국의 남경대학살 등에 이어진, 동아시아의 수많은 민족에게 공통적으로 일어난 사실을 박 씨는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민족이라는 울타리를 떨쳐버리고 동아시아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276).

 

청일전쟁 개시 전부터 조선에 상륙해 있던 일본군은 조선 정부에 대해 군용전선 가설을 계속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조선 정부에는 조선의 주권에 관한 일이아고 하여 강력히 반대함으로써 좀처럼 이본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일본군은 조선 왕궁을 점령하는 행동과 병행하여 청국으로 총하는 서울과 인천의 전선을 절단합니다. 왕궁 점령 사실이 신속하게 청국으로 전해지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였습니다.

다른 한편, 일본군은 전쟁을 전제로 조선 정부에게 일방적으로 전선 가설을 통고, 8월 중순에는 서울과 부산 간의 전선 가설을 완성시켰으며, 그 뒤 일본군이 북상함에 따라 점점 더 중국과의 국경 근처까지 군용전선을 연장해 갑니다(229)

 

일본군 만이 아니라 모든 외국인을 모조리 구축하려고 했는가?”라는 질문에 전봉준은 그렇지 않다. 다른 나라는 다만 통상만 할 뿐인데 일봉인은 군대를 이끌고 서울에 진을 치고 있다. 그 때문에 우리 영토를 쳐서 빼앗으려 한다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항일 투쟁을 배외주의적인 폭동으로 보는 것이 잘못이라고 하는 것은 위의 전봉준의 답변으로부터도 명백합니다. 왕궁 점령이 조선의 항일 투쟁을 가속시켜 한층 넓은 지역에 걸쳐 동학농민군이 봉기했습니다(231).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은 정해진 수순을 밟아 행해진 것에 비해 만주사변 이후의 전쟁은 이상한 전쟁이다라는 의견이 있지만 청일전쟁 직전 당시 일본 정부도 조선에 파견되어 있던 일본군과 공모하여 전쟁의 명분을 손에 넣기 위해 조선 왕궁을 점령하여 국왕을 포로로 삼았던 그런 이상한 짓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외교문서나 전쟁사에서 말살하고 기억에 남기지 않도록 처리해 왔기 때문에 그 이상함이 다시 반복되게 된 것입니다(86).

 

청일전쟁은 일본인 조선을 제압하면서 중요한 한 발을 내디딘 전쟁이었습니다. 그 전쟁은 조선을 전장으로 시작했던 것입니다. 특히 청나라와 개전(1894725) 직전인 723일 새벽에 일본은 조선의 왕궁을 점령했습니다. 전쟁의 대의명분을 얻기 위해서 무력으로 국왕에게 일본의 말을 들을 것을 강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조선의 국왕을 사실상 포로로 삼은 것입니다. 조선인에게 마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입군이 다시 온 것처럼 보인 것은 당연합니다. 조선 인민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습니다. 광범위한 항일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메이지 원년 이래 일본이 처음으로 직면한 그리고 그 이후에도 중국을 시작으로 아시아 각지에서 일본군이 직면하게 되는 대중적 민중적인 항일투쟁, 그 최초의 항일투쟁이 이 조선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이 청일전쟁 기간 중의 조선의 항일투쟁은 조선의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근대 일본사에서도 역사적으로 커다한 사건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만, ‘메이지의 영광을 주장하는 사람들뿐만 이나라 지금 사용되고 있는 일본의 중등교육용 역사교과서는 이에 대해 한마디도 쓰여있지 않습니다.

아니 그럴 리 없다. 동학과 관련된 건 쓰여 있습니다. 저도 배웠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청일전쟁이 일어나기 전, 그해 봄의 제1차 동학농민봉기와 헷갈리고 있는 것입니다(71-72).

 

청일전쟁 초반 청나라 병사를 태우고 인천 앞바다에서 침몰된 고승호에서 일본 해군에 의해 구조되었던 4명은 모두 서양인이었습니다. 청나라 병사는 단 한명도 구조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광경이 당시 상황을 목격한 유럽인에게는 기이하게 보였습니다. “고승호로부터 빠져나온 지나인이 병기도 갖지 않고 물이 없는 곳으로 달려갈 때, 일본 군함이 캐틀링건으로 사격하는 것을 보았다”(42)

 

보통 독자에게는 역시 청일 러일전쟁, 1차 세계대전 시기의 일본은 국제적으로도 훌륭한 나라였구나하는 인상이 남게됩니다. 여기서도 쇼와의 이상함청일 러일전쟁 시대와는 분리되어 있습니다(43).

 

제국주의 국가들의 아시아 침략 대열에 뒤늦게 들어가려 한 일본은 제국주의 대국의 대립과 불화 속에서 일본의 정치적 입장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대국 간의 대립을 이용하는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영국과 손을 잡고 북방의 러시아에 대항하는 길이었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의 1900년 의화단 진압전쟁에서 강력한 군사력을 열강에 선보이는데 성공한 일본은 1902년 영국과 동맹을 맺습니다. 영일동맹 협약입니다(139).

 

영일동맹은 러시아에 대한 군사적인 동맹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과 중국의 민족운동을 억누르기 위한 동맹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영일동맹은 1905년에 개정되어 동아시아 및 인도 지역의 전 국면에서 평화를 확보한다며 인도로부터 동아시아 전체로 대상을 확대하고, 영국은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상, 군사상 및 경제상의 탁월한 이익을 갖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일본이 그 이익을 옹호증진하기 위해 정당하고 또한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지도, 관리 감독 및 보호 조치를 한국에서 가질 권리를 승인한 것입니다. 동아시아에서 제국주의적 권리를 지키고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아시아의 여러 민족의 독립운동을 억누르는 것이 바로 영일동맹이었던 것입니다(140-141).

 

1920년대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의 특징적인 것 중의 하나는 조선에서의 산미증식계획입니다. 토야마현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퍼진 쌀소동(1918)에서 보이는 것처럼 일본의 식량위기에 대한 대응책으로서 조선에서 쌀을 증산하여 일본인의 식량으로 쓰기 위해 대량의 쌀이 일본에 반입되었던 것입니다(87).

 

1930년에 두만강 건너편 간도성에서는 주민의 76%를 조선인이 점해 그 수는 39만명, 만주 전체에서는 61만명에 이르렀습니다. 또 그곳에서는 조선에서 곤란해진 반일 독립운동의 지도자들도 다수 이주해 왔습니다. 게다가 이 부근은 지형이 복잡하고 산과 밀림이 많아 유격 게릴라전에는 안성맞춤인 지방이었습니다. 조선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 이 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이 조선 내에서도 끊임없는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1930530일 밤부터 31일에 걸쳐 조선의 공산주의자가 주력이 되어 지주와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슬로건을 걸고 일어난 봉기가 유명합니다. 이 간도 5 30봉기는 중일 양측 관헌의 탄압에 부딪혀 진압되었으나 일본의 지배에 가한 충격은 컸습니다(89)

 

조선 통치상에서도 조선 양민의 만주 발전을 크게 추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 통치가 성에 차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고 이쓴 괘씸한 자를 철저하게 탄압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두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본군을 만주땅에 투입하여 침략을 확대하려고 한 것입니다(90).

 

쇼와 초기부터 패전에 이르는 일본의 역사는 일본 역사상 비연속의 시대라는 시바 씨의 주장, 쇼와의 전쟁은 붉은 석양의 만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한도 씨의 주장은 이러한 상황을 감안한다면 과연 유효한 것일까요? 극히 의문스럽습니다(95).

 

 

t****b 2015.02.17.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