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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이문구 작가의 작품들을 찾아서 읽고 있다. 1970년대 이전 산업화 시기의 농촌을 묘사하여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젖게 했던 [관촌수필] 이나, 새마을운동으로 변모된 농촌의 또 다른 모습을 그렸던 [우리동네]가 그것이었다. 한 작품을 읽고서 그 작품과 연관된 또 다른 작품을 찾아서 읽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읽었던 작품에 대한 아쉬움이거나, 아니면 그 작품의 재미에 푹 빠져서 인지도 모른다. 각 작품집은 전혀 다른 작품으로 보아도 손색이 없는 작품들이 모인 연작소설들 이었지만, 작품집들 또한 다른 듯 하면서도 후속작품이라도 되는 양 별개의 작품으로만 읽히지는 않았다. 1990년대 영악해진 농민과 삭막해진 농촌풍경을 다루었다는 이 책 [내 몸은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역시 이전에 읽은 [관촌수필]이나 [우리동네]와 전혀 관계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연작소설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이 책 역시 8개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형식 면에서 예전에 읽었던 작품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장평리, 장석리, 장천리, 장곡리 등 고향마을 이곳 저곳에 있을 법한 동네이름과 우리들이 익히 들어보았던 찔레나무, 개암나무, 싸리나무, 고욤나무와 같은 나무이름들이 묘한 친근감을 주고 있다. 작품이 그려지는 시기는 WTO나 IMF, 우루과이라운드 등으로 급변하고, 또한 휴대폰이나 노래방, 티켓다방 등 밀려드는 도시문명의 홍수 속에서 몸살을 앓으며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농촌의 모습이지만,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은 이전의 작품에서 보여주었던 그것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 작가는 작품 제목으로 쓰인 나무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제목으로 쓰인 나무는 나무이되 나무 같지 않은 나무이지요. 그렇다면 덩굴이냐, 덩굴도 아니지요. 풀 같기도 한데 풀도 아니고 그러나 숲을 이루는 데는 제 나름대로 역할을 하는 나무이지요. 꼭 소나무나 전나무, 낙엽송처럼 굵고 우뚝한 황장목 같은 근사한 나무만이 숲을 이루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있는 듯, 없는 듯 존재 가치가 희미한, 그러나 자기 줏대와 고집은 뚜렷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돈 없고 힘 없는 일년살이들도 숲을 이루는 데는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화살나무, 소태나무, 으름나무 같이 이름조차 낯설고 그다지 쓸모도 없어 보이는 나무 같지도 않은 나무들처럼, 작품 속에 나오는 사람들 역시 존재도 희미한 농촌의 갑남을녀 일 뿐이다. 그렇지만 이런 나무들이 숲을 이루는데 꼭 필요하듯이, 작품 속 인물들 역시 우리가 살아가는 농촌의 바로 우리 이웃들 이다. 이문구 작가의 작품을 처음 읽을 때부터 뜻을 한참이나 생각하게 만들기도 했던 충청도 토속어는 이 작품에서도 어김없다. 처음에는 다소 애매한 뜻을 한참이나 생각하기도 했지만, 읽을수록 어렸을 적 동네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기는 여전했다. 작가가 보여주는 토속문학의 힘이, 농촌소설이란 바로 그런 바탕 위에서 쓰여질 때, 더 많은 공감과 감흥을 주는 것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 같다.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왜 이 작품집의 제목이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이고, 제목이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찾아보니 이 제목은 김명인 시인의 [의자]라는 시詩의 한 구절이라고 한다. 창고에서 의자를 꺼내 처마 밑 계단에 얹어놓고 진종일 서성거려온 내 몸에도 앉기를 권했다. 와서 앉으렴,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때로는 창고 구석에 처박혀 어둠을 주인으로 섬기기도 했다. 마른장마에 잔 비 뿌리다 마는 오늘 어느새 다 자란 저 벼들을 보면 들판의 주인은 바람인가 온 다리가 휘청거리면서도 바람에게 의자를 내 주는 것은 그 무게로 벼를 익히는 것이라 깨닫는다. 흔들리는 생각이 저절로 무거워져 의자를 이마 높이로 받들고 싶어질 때 저쪽 구산 자락은 훨씬 이전부터 정지의 자세로 지그시 뒷발을 내리고 파도를 등에 업는 것을 본다. 우리에게 어떤 안식이 있느냐고 네가 네 번째 나에게 묻는다. 모든 것을 부인한 한낮인데 부지런한 낮 닭이 어디선가 길게 또 운다. 아무도 없는데 무엇인가 내 어깨에 걸터앉아 하루 종일 힘겹게 흔들린다. - [의자] 전문 -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여전히 흔들리며 힘들게 산다. 바람에 흔들리는 벼들도 바람이 힘들다고 생각하나 보다. 그래서 의자를 내 주고 싶었나.. 내 몸 역시 바람처럼 흔들리며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기에 힘이 들고, 이제는 앉아서 쉴 의자가 필요했는지 모른다. 새천년의 농촌을 찾아온 각종 라운드와 도시문명의 홍수 역시 우리들의 이웃들을 서 있기도 힘들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작가는 의자가 필요했고, 김명인 시인이 그 의자를 주었는지 모른다. |
| 이문구님의 소설 앞에 서면 바짝 긴장이 된다. 뾰족하면서도 시퍼렇게 살아있는 언어들이 마구 날 찌르기 때문이다. 어떤 분들은 미려한 문체로 날 경직시키는데, 이 분은 적확하며 토속적인 언어로 나의 뇌를 쥐나게 만든다. 그래서 님의 소설을 읽다보면 어느새 내 손엔 형광펜이 들려지게 되곤 한다. 평생 살아도 한 번 만나질까 말까 한 숨어있는 비경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 한이 없듯, 어쩌면 생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비경같은 언어의 마주침이 그의 글 속엔 절절이 녹아있다. 장평리 찔레나무, 장석리 화살나무, 장천리 소태나무, 장이리 개암나무, 장동리 싸리나무, 장척리 으름나무, 장곡리 고욤나무, 더더대를 찾아서...... 내가 아는 이름도 있고, 모르는 이름도 있다. 유명하거나 근사한 나무도 아니다. 그런 나무처럼 거기에 얽혀 뿌리를 함께 내린 인생살이들을 가지처럼 엮어 놓았다. 숭늉같이 구수하게, 샘물같이 맑게, 뒷동산 아지랭이같이 정겹게. 그러면서 산허리에 저녁이면 슬며시 내려와 외로움을 피했다 가는 산안개처럼 외롭고 쓸쓸하게. 누구에게나 있을 고향의 아늑함을 만나고플 때, 이 책을 펼쳐보라. 환하게 웃고 있는 그만의 언어를 만나보라. |
| 책을 읽으며 가슴이 울렁거리고,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좋았다고 하면 그 나이에 "감성이 남아 있네요" 라고 말할 지도 모른다. 또는 감상적이라고도 하고 소녀 같다고도 하겠지. 하지만 아주 오래 동안 구획정리 잘 된 도시에서 살다보면, 그리고 똑똑하고 영악한 사람들 사이에서 스스로 상처입고 살면 작은 일에도 걸핏하면 눈물이 나곤 한다. 이문구 선생의 책을 읽으며 나는 눈물이 난다. 그리고 풍성한 말의 잔치에 가슴이 울렁거린다. 장평리 찔레나무는 유쾌하다. 그러나 울음 끝에 찔끔 눈물이 나는, 말하자면 페이소스가 느껴지는 그런 글 말이다. (그러고 보니 가끔 보는 시트콤 안녕,프란체스카도 그렇다) 명절 무렵이면 우리나라 많은 주부들이 느낄 두통을 생각한다. 명절에 또는 제사에 어쩌다 한번 만나는 인간관계란 어렵고 곤욕스럽기 짝이 없다. 내가 해야 할 도리와 받아야 할 대접 사이의 불균형, 그리고 남이 아니기에 더욱 얄밉고 남보다 못한 악연을 만들기도 한다. "우리가 남인감유" 하며 아픈 구석 찌르는 시동생,곧 평상시 안부 한번 없다가 수능 끝나자 조카 시험 점수가 캐묻는 염치없는 삼촌 말이다. 그리고 어쩌다 한번 시골에 내려오면 남이 기껏 지어 놓은 농작물이나 노략질 하듯 훑어가는 인간들 말이다. 미우나 고우나 같이 살아야 하기에 감내하는 남편과의 갈등을 일시에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부채질하며 상승 작용을 일으키지 않던가. 화살나무, 내 닉이 화살나무니 말할 것 없이 애정을 느끼는 작품이다. 홍쾌식 노인의 신산한 삶이 개펄가의 화살나무로 담겨 있다. 가슴이 울렁거린 건 장동리 싸리나무였다. 시적인 문체로 그 동안 내가 얼마나 삭막한 글들을 읽어 왔고 내 마음 또한 메말랐는지를 일깨운다. 이 글을 읽으며 감깐 김영하식의 소설에 열광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었다. (물론 김영하 소설은 서사 문학의 방향서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고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리라. 다만, 이런 훌륭한 글들을 읽을 수 있는 학생들이 많지 않을 것이란 생각, 그리고 그런 작품을 읽을 수 있는 문학적 소양을 기를 수 있는 문학 교육에 내가 너무 멀리 서 있다는 것이 안타깝고 슬프다. |
| 참으로 오래도록 기다리던 이문구님의 소설집이었다. 맛이 아주다르고 조금은 씁쓸하기까지한 수필집을 읽으며 기다림을 메우고 있을즈음 새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고 바로 구입해 맛있는 음식인양 아껴가며 읽었다. 장곡리 고욤나무는 기왕에 읽었던 작품임에도 늘 새로 읽는 듯이 감칠 맛이 났고 다른 작품들 역시 마찬가지의 느낌으로 읽어 나갈 수 있었다. 말이 살아있을 수 있는건 말을 하고,말을 듣고 그 말을 전하는 사람이 살아있어야 가능한 일이라 말을 전하는 이가 이문구라는게 몹시도 미더운일이다. 시를 느끼며 읊은들 이런 맛이 날까. 의뭉스럽기까지한 너스레로 농민의 마음을- 절대로 순박하지않은 피폐하고 상처받은 우리의 농심들을- 온전히 옮겨놓을수야 없겠지만 그들의 말을 들어야하는건 우리가 그들과 닯을것이 없기때문이리라. 아무나 나무될 수 있을까. 그게 덩굴로 자라 다른 나무를 타고 올라가 으름을 맷건,나무인지 풀인지 구분없이 자라 열매는 고사하고 쏘시개감도 되지 못하건,까치조차도 집짓기를 꺼릴만치 가지가 실하지 못하건 간에 나도 그를 통해 하나의 나무로 살아내보고 싶다. 나도 그의 입을 통해 내목소리를 진양조로 내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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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이문구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 나는 선생님의 작품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오며가며 일므 세 글자가 귀에 익은 분이셨다. 지금은 흐릿하게 기억만 남아있지만 선생님의 대표작인 <관촌수필>. 역시 좋은 작품은 시간을 뛰어넘어 존재한다. 선생님이 떠나시는 길을 배웅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게으르게나마 책을 읽는 학생의 입장에서 때늦게 선생님의 작품을 꺼내어 읽은게 바로 이 책이다.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솔직히 나는 요즘 작가들의 문체에 익숙해진터라 선생님의 문체에 다시금 익숙해지는데 꽤나 고생했다. 문장을 아무리 읽어도 그 문장이 머리 속에서 그려지지 않고 계속 헛돌았다. 그때에 느낀 난감함이란 참.. 그건 아마도 선생님이 갖고 있는 독특한 사투리 문체에 세월의 더깨가 얹힌 탓일텐데 그런 문장조차 제대로 읽어내려가지 못하는 내가 참 한심했더랬다.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는 선생님이 한 박자 쉬는 느낌으로 찬찬히 돌아보는 듯 쓰신 이야기들이다. 여러 나무들에 비유하여 이제는 너무 멀어진채 닮아져가고 있는 농촌 이야기를 구성지게 풀어놓은 책.. 나는 이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마치 아주 오랜만에 고등학생 시절로 되돌아가 국어 교과서에 실린 소설 한 편을 다시 읽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정갈한 구성, 알아챌 수 있는 비유, 뒤에 남는 교훈.. 매번 파격과 재기발랄로 가득찬 신진 작가들의 문장을 읽어오다 오랜만에 선생님의 문장을 접하니 정말 구수하다. 어렵기도 하지만 역시 오래된 문장은 쉽게 내칠 수 없는 힘이 있다. 선생님이 이제는 편히 몸 누우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인상깊은구절] 사람들은 왜 밤이 되면 잠을 자면서 저 달을 두고도 달빛을 보지 않고, 물을 두고도 물빛을 보지 않고, 산을 두고도 산빛을 보지 않고, 길을 두고도 길에 다니지 않고, 밤에는 오로지 죽은 듯이 내지 죽어 사는 듯이 잠들만 자는 것일까. 그는 답답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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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인생이 부끄럽다. 아름다운 소설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름답고 따뜻하고 그립다. 소설가는 장인, 이라는 생각을 했다. 흙을 밟아 주무르고 만져서 그릇을 만드는 과정이 소설을 쓰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나처럼 인생을 대강대강 사는 사람이 어찌 소설을 쓸 것인가. 립싱크를 해도 가수인 것처럼, 표절을 해도 작가인데 그런 세상인데, 부끄러운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그냥 쓴 문장 하나 찾을 수 없고, 뜻없는 대화 하나 찾을 수 없는 소설들이다. 소설쓰기의 교과서라는 말이 아니다. 인생의 교과서라 하면 반은 맞을까? [인상깊은구절] 망연한 눈으로물 위의 달빛에 빠져 다링 이우는 줄도 모르고 있던 그는 갑자기 달빛에서 헤어나 물이 사방에서 금을 긋고 있는 기스락까지 물 위를 모조리 쓸어보았다. 없었다. 밤낮으로 늘 있던 것들이, 그리하여 지금 이 시간에도 반드시 그렇게들 있어야 마땅한 것들이 없었다. 어쩐지 처음부터 어디가 허전하고 어느 구석인가 굻은 듯한 느낌이 드문드문 묻어나서 거칫거리었던 장본도 바로 그것들이 보이지 않은 탓이었던 것을. 그는 그제서야 새삼스럽게 그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
| 이 책은 이문구 소설가가 돌아가셔서 들게 되었다.. 나는 그의 대표작인 `관촌수필`이나 `우리동네` 같은 것들이 있었지만 이 책을 들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 책의 제목 자체가 그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었던 듯 보였고, 동인 문학상을 받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사투리가 있는 책들은 대부분이 약간 읽기가 어렵다. 그런데 동인 문학상을 받아서 그랬던 것인지 이 책은 그런 책들에 비해서 쉽다는 생각이 든다.. 재미도 있다.. 특히 이 책은 차례를 바라보면서도 웃음이 난다. 나무 이름이 죽이어지는 그런 특이한 차례는 이문구 만의 특징이 아닐까. 우리 동네도 그렇드시 누구네, 누구네 하면서 이어지는 차례는 정마로 마음 한 켠에 웃음꽃이 피어오른다.. 글도 마찬가지다.. 맛깔스러운 충청도의 사투리를 접하게 되면 다른 곳에 있는 사투리보다 정겹다고 해야 될까.. 다른 책에서는 잘 접하지 못했던 사투리라서 재미도 난다. 그리고 어리숙한 사람들의 대화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나는 이 책은 특히 소리내서 읽어본다.. 그리고 발음이 잘 안되는 부분은 혼자 웃어본다... |
|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제목 참 기가 차다. 어쩜 이리도 절절이 사람 가슴을 파고 들까. 하지만 정작 이 제목은 이문구 자신이 쓴 것은 아니다. 김명인의 시 <의자>에 있는 말이다. 재작년. 이 책을 내 서가에 꽂아놓게 된 것도 순전히 이 제목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목은 서가까지만 책을 인도할 뿐, 내 눈에까지 끌어오진 못했다. 내 눈 앞에 이 책을 들이민 것은 우연히 접하게 된 선배의 짧은 촌평이었다. 대학을 기준으로 나보다 3년 선배. 독서 경력으로는 적어도 나보다 10년 선배인 형은, 지금 프랑스에 유학중이다. 물론 한번도 직장을 다녀본 적 없고, 돈을 벌어본 적도 없다. 그런 형이 읊조리는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는 말의 느낌은 사뭇 달랐다. 그 형이 이 책을 이렇게 평했다. "아무튼 이문구의 소설은 모처럼 글읽는 재미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얼마전까지 형편없는 요즘 작가들의 글을 읽느라 질려버린 나머지 '안되겠다. 내가 써야겠다'고 늘 되풀이하던 결심을 또 한번 했던 내게 잊고 있던 많은 겁나는 작가들(글이란 개나 소나 쓰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던)에 대한 기억을 되새겨줌으로써 다시 한번 그 결심을 고이 접어두게 만들기까지 했다." 형의 이 말에 대한 내 느낌은 절반의 공감이다. 책을 처음 잡았을 때, 활자로 나타난 충청도 사투리가 언뜻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어법이 익숙해지면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 책읽기는 순식간에 끝을 내고 말았다. 글읽는 맛을 느끼게 했다는 점에서 공감한다. 하지만 와닿지 않는 주제, 크게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 문제의식이 책 한권을 이끌고 나갈 힘을 주지 않았다. 결국 이 소설집도 2편을 읽고 덮고 말았다. 다만 이같은 평가는 무척이나 자신이 없다. 적어도 문학이라는 분야에서만은 존경해마지 않는 선배의 절찬을 납득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한 비웃음이 앞서기 때문이다. 내 좀더 인생의 공력이 쌓였을 때, 이문구라는 작가를 다시 한번 접하고 싶다. |
| 솔직히 이 책을 모두 이해하였노라고 말하진 못하겠다. 단 한번의 훑어읽음이 이 책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데는 무리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그마만큼 이 책은 사람을 끌어들이는데 있어서 뚝배기 같은 진지한 맛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한번 읽을 때는 그저 내용파악하는데 버거움을 느끼지만 다 읽고 나면 왠지 모르게 다시 읽고 싶은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고 해야 될까. 이 책은 바로 그러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남도의 구수한 사투리 문체는 사람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제목에서 오는 피로함과 지침의 기색 마저도 모두 지워주었다. 그것은 우리 농촌의 현 모습이었고 지난 날 따스했던 우리 사회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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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편의 연작이 일관되게 보여주는 것은 '너무 오래 서있거나 걸어왔던' 이들이 그들 나름대로 '앉거나 쉬려하는' 모습인 것같다. 그 방식은 자포자기일 수도 있고(장평리 찔레나무), 도주일 수도 있고(장석리 화살나무), 희망일 수도 있고(장이리 개암나무), 심지어 죽음일 수도 있다(장곡리 고욤나무). 자본주의 사회에서 철저하게 소외받은 농사꾼들의 지지리도 고단한 삶이, 그야말로 질펀하게 쏟아져있는 하나 하나의 글은 그들의 '쉼' 또한 가만히 내버려두질 않고 있는 듯하다.
어느 누구 하나도 농군의 아들 딸이지 않을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을 보건대, 그들의 지리한 걸음은 나와 내 부모의 걸음에 다르지 않다. 그래서일까... 그들의 고단한 걸음이 결코 낯설지 않고, 그들의 힘든 쉼 또한 이렇게나 동정이 가는 것은... 무엇이 나와 그들을 이렇게도 힘들게 만들었을까. 무엇이 나를 쉴 수 있게 해줄 것인가. 도피일까, 포기일까, 희망일까, 죽음일까.
작가가 '사회의식'과는 담쌓은 동인문학상을 받았다는 것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던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로선 동인문학상이 이 작품에 상을 주기로 결정했다는 것이 더 놀라운 일인 것같다. 질펀한 사투리 속에 녹아있는 무식한 농군들의 유식한 사회의식은, 순수미학으로 포장하기에는 너무나 날카로운 탓이다.
하지만, 그 논란으로 솔깃하여 책을 집어들게 되었으니, 상이 제 값은 한 셈인가? 어쨌거나, 읽는 내내 사람들의 걸쭉한 말잔치로 내내 즐거운 걸음이었다. [인상깊은구절]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희망은 역시 자라나는 아이들뿐이라는 것을 다시금 느꼈던 것이다. 그는 문득 꾸지뽕나무를 쳐다보았다. 까치 둥지가 어느 때보다도 잘 보였다. 만약 저마저두 없었더라면 이냥 오래 가는 가물에, 이냥 더디 가는 더위를 워치게 견딜 뻔했을겨. 전은 까치둥지를 바라보며 내 너를 보아서 가마, 하고 정한 다음 웃는 낯으로 일렀다.(중략)"시방버텀 열심히 허거라. 내년 봄이면 둥지 하나가 더 생길텐디, 그늠은 니꺼다." |